홍재전서 제105권
경사강의(經史講義) 42 ○ 역(易) 5 갑진년(1784, 정조8)에 선발된 이서구(李書九)ㆍ정동관(鄭東觀)ㆍ한치응(韓致應)ㆍ한상신(韓商新)ㆍ홍의호(洪義浩) 등이 답변한 것이다
[수괘(需卦)]
“상육(上六)은 굴[穴]에 들어감이다.”라고 한 것에 대하여 그 상(象)을 설정한 뜻을 말하여 줄 수 있겠는가? 어떤 이의 말에 의하면 “감(坎)은 물이 되고, 함정도 되고, 도랑도 되고, 숨는 것도 되므로 굴의 상징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 육사(六四)는 감의 초효(初爻)에 있으니 마땅히 굴에 들어가는 상이 있을 것인데 도리어 굴에서 나왔다고 하고, 상육은 감의 상효(上爻)에 있으니 마땅히 굴에서 나오는 상이 있을 것인데 도리어 굴에 들어간다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호병문(胡炳文)이 이를 논하여 말하기를, “육사는 음유(陰柔)로 음(陰)의 바른 자리에서 기다릴 수가 있어서 험난(險難)함에서 벗어날 수 있으므로 ‘나온다’고 한 것이니 이는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을 허여(許與)한 것이고, 상육은 음유로서 험난의 마지막에 해당하여 다시 기다릴 수가 없고 오직 험난한 데에 들어가게 되므로 ‘들어간다’고 한 것이니 이는 이미 그렇게 된 것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을 과연 어떻게 여기는가?
육사(六四)와 상육(上六)은 다 음효(陰爻)인데, 음(陰)은 물러남을 위주로 합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초효(初爻)에 있는 것은 물러나 굴에서 나가는 상(象)이 있고, 상효(上爻)에 있는 것은 물러나서 굴로 들어가는 상이 있는 것입니다. 호씨(胡氏)가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이다’와 하고 ‘이미 그렇게 된 것이다’로 나누어 말한 것은 아마도 견강부회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부르지 않은 세 사람이 올 것이니 공경하면 마침내는 길할 것이다.”라고 한 것은 무슨 말인가? 이를 논하는 이들은 모두 “아래의 세 양(陽)이 오는 것은 상육(上六)을 침해하려는 뜻이 있는 것이니 상육은 반드시 공경하는 마음을 다하여 대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여야 비로소 화를 면하고 길함을 얻을 것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상육이 험난(險難)한 굴속에 있으니 세 양으로서는 다툴 곳이 아니며 또 구삼(九三)은 자기와 상응(相應) 관계이니 반드시 자기를 해칠 사람이 아니다. 경문(經文)에서 부르지 않은 손님이라고 한 것은 다만 그가 오는 것이 자기가 부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찌 꺼리는 생각이 있어서이겠는가. 대개 상육은 음유(陰柔)로서 험난함이 지극한 곳에 있으면서 그 험난함을 구제할 능력이 없으니 굴에 들어가는 곤궁함이 있는 것이다. 오직 다행스러운 것은 아래에 구삼의 상응이 있어서 내가 부르기를 기다리지 않고서도 그 동류와 함께 찾아와서 그 험난함을 구제해 주려는 것이다. 그러니 상육으로서는 유순(柔順)한 도리로써 공경히 예우만 하면 마침내 반드시 그의 힘을 입어 험난한 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니, 그것이 마침내는 길하다는 것이다. 명(明) 나라 학자 임희원(林希元)이 그 말을 강력히 주장하고 또 패공(沛公)이 항백(項伯)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면한 사실을 인용하여 증명하였는데, 그것이 과연 일설(一說)에 대비할 수 있는 것인가?
상육은 음으로서 여러 양의 위에 있고, 아래에 있는 세 양은 위로 올라올 뜻을 갖고 있으니, 그 꺼리게 되고 다투게 될 근심은 반드시 이를 수밖에 없는 형편이므로 반드시 경계를 하면서 공경하는 마음을 다하여 대하라는 것입니다. 《정전(程傳)》에서 “진실로 공경하여 대하면 비록 매우 강포(剛暴)한 자라고 하더라도 어찌 침해할 리가 있겠는가.” 하였으니, 임희원의 말에 비하면 그 말이 더 의미가 있습니다. 아마도 《정전》의 말을 정설(正說)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