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시문집 제8권

대책(對策)

 

 

십삼경책(十三經策) 경술년(1790) 겨울에 임금이 내각(內閣)에서 직접 시험을 보였다.

 

 

왕은 묻는다.
모든 경서(經書)의 목록(目錄) 중에 십삼경(十三經)이 제일 첫머리에 있다. 이 십삼경은 진실로 도덕(道德)이 담겨 있는 탁약(槖籥)이요, 문예(文藝)도 실려 있는 연해(淵海)이다. 그 전수(傳授)의 원류와 전주(箋注)의 득실(得失)에 대하여 모두 자세히 설명할 수 있겠는가.


신은 대답합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경서(經書)들을 해석하는 데 세 가지 방법이 있는데, 첫째는 전하여 들은 것으로써, 둘째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써, 셋째는 자기의 의사로써 해석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사로써 해석한 것은 아무리 천백 년 뒤에 출생하였어도 능히 천백 년 이상의 것을 초연히 입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주자(朱子)가 《대학(大學)》에 대하여 바로 단정하기를 ‘경일장(經一章)은 공자(孔子)의 말이요, 전십장(傳十章)은 증자(曾子)의 뜻이다.’ 하였으니, 이는 절대로 전하여 듣거나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에 의뢰한 것이 아니라, 엄연히 자기의 의사로써 단정지은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시대의 예나 지금에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하여 듣거나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에 있어서는 예와 가까운 것으로써, 주장을 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요(歌謠)나 풍속이 옛것과 서로 비슷한 것은 비록 시골의 비루한 데서 얻어진 것이라도 그런대로 상고할 만한 점이 있는 때문이며, 스승이 직접 전하여 주고 강론하여 준 것은 비록 스승의 보통 이야기나 언소(言笑) 따위를 기록한 것이라도 그런대로 증거가 될 만한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저 한(漢) 나라의 선비들이 위(魏)ㆍ진(晉) 시대의 선비보다 낫고, 위ㆍ진 시대의 선비들이 수(隋)ㆍ당(唐) 시대의 선비들보다 낫다는 것은 옛사람들은 모두 현명하고 지금 사람들은 모두 못나서가 아닙니다. 이는 원근(遠近 시대가 멀고 가까운 것)과 친소(親疎 스승에게서 직접 배우고 못 배운 것)의 차이가 서로 상대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거리가 동떨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삼경의 원래 뜻을 연구하려면 그 주소(注疏)를 버리고서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주자가 《시경》ㆍ《서경》의 집전(集傳)과 《논어》ㆍ《맹자》의 집주(集注) 등을 만들 적에 그 의리(義理)의 조리나 도학(道學)의 맥락 등에 있어서는 실지 자신의 의사로 초연히 증거하여 주소와는 들쭉날쭉한 점이 없지 않지만, 글자의 뜻을 풀이하거나 장구(章句)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는 전적으로 주소를 인용했습니다. 이로 본다면 주자의 뜻은, 한 사람이나 한 학파의 말만 가지고 무리하게 우겨 천하의 학문을 변혁시키려고 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 그런데 지금의 학자들은 칠서대전(七書大全)이 있는 줄만 알지,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가 있는 줄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춘추(春秋)》와 삼례(三禮《의례(儀禮)》ㆍ《주례(周禮)》ㆍ《예기(禮記)》) 등의 천지에 빛나는 글도 칠서(七書)의 목록에 배열되지 않았다 해서 그 글들을 폐기하여 강론하지 않으며, 도외시하여 들여놓지도 않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사문(斯文)의 큰 걱정거리이며, 세교(世敎)에 시급한 문제입니다. 지금 다행히도 전하의 청문(淸問 허심(虛心)으로 묻는 것)이 이 문제에 언급되셨는데, 신이 어찌 감히 보고 들은 것을 전부 말씀드려 가르침을 기다리지 않겠습니까.
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십삼경은 모든 서책 중에 으뜸입니다. 대저 건상(乾象)을 관찰하고 가르침을 베풀어 길흉(吉凶)의 진리를 파헤치며, 《시경(詩經)》을 외고 《서경(書經)》을 읽어 치란(治亂)의 자취를 증험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삼경(三經)이 도(道)를 실은 실적이요, 절문(節文)과 의측(儀則)으로써 하늘이나 사람의 활용을 발명하며, 국가를 건립하고 작위(爵位)를 설치하여 한 제왕(帝王)의 제도를 성립한 것은 삼례(三禮)가 가르침을 설립한 실적이요, 포폄(褒貶)의 대의(大義)를 발휘하여 난신(亂臣)ㆍ적자(賊子)들이 두려움을 갖도록 한 것은 《좌씨전(左氏傳)》ㆍ《공양전(公羊傳)》ㆍ《곡량전(穀梁傳)》 등이 《춘추(春秋)》를 우익(羽翼)한 실적이요, 궁장(宮墻)을 보여주고 의리(義理)를 분석하여 준 것은 《논어(論語)》와 《맹자(孟子)》로 사문(斯文)의 별이나 태양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또한 《효경(孝經)》에 요도(要道)를 연역(演繹)한 것이나 《이아(爾雅)》에 형명(形名)들을 널리 기록한 것까지도 다 성현이 남긴 교훈이요 학문의 종지(宗旨)입니다. 그러므로 도통(道統)을 전수하여 수사(洙泗)의 참 근원을 접속시킨 이도 반드시 이 십삼경에 귀의(歸依)하였고, 전석(箋釋)을 좌우에 두고서 학문의 방향을 이룩한 이도 반드시 이 십삼경에 노력하였습니다. 이로 본다면, 십삼경은 참으로 덕성(德性)을 수련시키는 노배(爐韛 풀무)이며, 예술(藝術)을 간직한 부고(府庫)인 셈입니다. 그런데 그윽이 개탄스러운 바는, 사람의 심정은 새로운 것은 좋아하나 옛것은 싫어하고, 세상의 도덕(道德)은 더렵혀지기는 쉬워도 융성하여지기는 어려우므로, 문호(門戶)가 분열되어 스승의 학설이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고, 자기와 뜻이 맞는 사람끼리는 한 당(黨)이 되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마구 배격하여 폐혹(蔽惑)됨이 많다는 점입니다. 십삼경의 글이 겨우 실오라기처럼 보존되었고, 십삼경의 가르침도 깃발의 술처럼 위험스럽게 간들거리고 있으니, 세상의 교화를 맡은 이가 어찌 걱정이 되지 않겠습니까. 먼저 학문을 넓힌 다음에 예(禮)로써 집약하고, 모든 것을 통달하여 극치에 도달하였으면 하는 것이, 참으로 오늘날의 소망입니다.

《주역》은 백성들을 낳는 봄의 부고(府庫)에, 《서경》은 백성들을 키우는 여름의 부고에, 《시경》은 백성들을 성숙시키는 가을의 부고에, 《춘추》는 백성들을 간직하는 겨울의 부고에 해당하는데, 이처럼 분속시킨 의의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의례(儀禮)》는 예(禮)의 근본이, 《예기(禮記)》는 예의 지엽(枝葉)이, 《이아(爾雅)》는 《시경》ㆍ《서경》의 금대(襟帶)가, 《논어(論語)》는 육경(六經《시경》ㆍ《서경》ㆍ《예기》ㆍ《주례(周禮)》ㆍ《주역》ㆍ《춘추》)의 정화(精華)가 되는데, 이처럼 비유한 의의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진(秦) 나라가 서적들을 불태워 버린 화염 속에 《주역》만 유일하게 남았는데, 《연산(連山)》이나 《귀장(歸藏)》은 끝내 실전(失傳)되었고, 공자(孔子)의 옛집 벽 속에 간직된 서적들 중에 《시경》은 포함되지 않았는데, 국풍(國風)과 아(雅)ㆍ송(頌)이 제 모습을 잃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순전(舜典 《서경》의 편명)이 대항(大航)에서 뒤늦게 출현되었으니, 순전이 공안국(孔安國)의 구본(舊本)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고공기(考工記 《주례(周禮)》의 편명)도 하간(河間)에서 뒤늦게 구입하였으니, 고공기가 과연 주관(周官)의 유제(遺制)에 틀림없는 것인가.


신은 생각하건대, 사경(四經 《주역》ㆍ《서경》ㆍ《시경》ㆍ《춘추》)을 사부(四府 춘ㆍ하ㆍ추ㆍ동)에 분속시킨 것에 대해서는 신이 상고하건대, 소 강절(邵康節 강절은 송(宋) 나라 소옹(邵雍)의 시호)의 관물편(觀物篇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의 편명)에서, 황(皇)ㆍ제(帝)ㆍ왕(王)ㆍ패(覇)를 춘ㆍ하ㆍ추ㆍ동에 분배시켜 놓고는, 《주역》은 삼황(三皇 복희(伏羲)ㆍ신농(神農)ㆍ황제(皇帝))에게서, 《서경》은 이제(二帝 요(堯)ㆍ순(舜))에게서, 《시경》은 삼왕(三王 우왕(禹王)ㆍ탕왕(湯王)ㆍ문왕(文王))에게서, 《춘추》는 오패(五覇 제 환공(齊桓公)ㆍ진 문공(晉文公)ㆍ진 목공(秦穆公)ㆍ송 양공(宋襄公)ㆍ초 장왕(楚莊王))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하였으니, 사부(四府)의 의의는 사시(四時)에서 취상(取象)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소자(邵子)의 학문은 상수(象數)에 치우쳐 억지로 끌어댄 점이 없지 않으나, 신이 망령되이 의론드릴 수 없습니다. 《의례(儀禮)》ㆍ《예기》ㆍ《이아(爾雅)》ㆍ《논어》 등에 각각 비유가 있는 것에 대해서는 신이 생각하건대, 《의례》는 당시에 사용하였던 한 제왕(帝王)의 의문(儀文)으로서 이를테면 오늘날의 의주(儀注)나 홀기(笏記) 같은 것이요, 《예기》는 의문(儀文)의 본 뜻과 심오한 의의를 부연(敷衍)한 것으로서, 이를테면 오늘날의 전주(箋注)나 연의(衍義) 같은 것이며, 《의례》의 빙례(聘禮)나 연례(燕禮)는 《예기》의 빙의(聘義)나 연의(燕義)의 근본이 되고, 《예기》의 사의(射義)나 혼의(昏義)는 《의례》의 사례(射禮)나 혼례의 지엽이 되며,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에 있어서도 모두 다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주자가 황직경(黃直卿 직경은 송(宋) 나라 황간(黃榦)의 자)에게 답한 편지에서 《의례》와 《예기》를 경(經)과 전(傳)으로 분립시킨 것이 근본과 가지가 정연하고, 연자편(練子篇)에서 경서(經書)들을 물건에 비유한 것도 참으로 정밀 친절하였으며, 금대(襟帶)이니, 정화(精華)이니 한 비유에 있어서는 광채를 윤식(潤飾)한 뜻에 불과하므로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연산》이나 《귀장》이 끝내 실전된 것에 대해서는 신이 살펴보건대, 두자춘(杜子春)의 《주례(周禮)》 주(注)에, 《연산》은 복희(伏羲)의 역(易)이요, 《귀장》은 황제(黃帝)의 역이라고 했고, 또 《세보(世譜)》 등 책에는, 신농(神農)의 일명(一名)을 연산씨(連山氏), 황제의 일명을 귀장씨(歸藏氏)라 한다 하였으니, 《연산》과 《귀장》은 진정 복희ㆍ신농ㆍ황제의 역인 것입니다. 그런데 설명하는 이는 또,

“하(夏)의 역은 첫머리가 간괘(艮卦)이기 때문에 《연산》이라 하고, 상(商)의 역은 첫머리가 곤괘(坤卦)이기 때문에 《귀장》이라 하는데, 간(艮)은 산(山)에 해당하고 곤(坤)은 장(藏 간 직함)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좌전(左傳)》에 ‘목강(穆姜)이 점을 쳐 간괘(艮卦)를 얻었다.’ 하였으니 이는 《연산》을 말하고, 예운(禮運 《예기(禮記)》의 편명)에 공자(孔子)가 ‘송(宋) 나라에서 곤괘(坤卦)와 건괘를 얻었다.’ 하였으니 이는 《귀장》을 말한다.”

하였습니다. 이에 의하면 춘추(春秋) 말엽까지도 《연산》과 《귀장》이 그대로 보존되다가, 함양(咸陽 진(秦) 나라의 수도)이 불탈 때 항우(項羽)가 지른 불더미 속에 들어가 버렸을 것이므로, 총서(叢書)에 실린 《연산》이나 《귀장》은 다만 위작(僞作)일 뿐입니다.
국풍(國風)과 아(雅)ㆍ송(頌)이 제 모습을 잃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신이 생각하건대, 《상서(尙書)》가 단순히 공자(孔子)의 옛집 벽 속에 소장되었기 때문에 전해졌다기보다는 복생(伏生) 한 사람의 구전(口傳)에 의해 끊이지 않은 것처럼, 《시경》역시 그러하였습니다. 당시에 《시경》을 연구한 이로는 한(漢) 나라 제(齊) 땅 사람 후창(后蒼)과 노(魯) 땅 사람 신공 배(申公培)와 연(燕) 땅 사람 한영(韓嬰) 등 세 사람이 모두 스승의 전수를 받아 학통이 그런대로 끊이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시경》을 풍송(諷誦)한 것이 관악(管樂)이나 현악(絃樂)에까지 올려져 있어, 서적에만 의존되지 않았으므로 《시경》이 유실될 염려가 없었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순전(舜典)이 꼭 공안국(孔安國)의 진본(眞本)이라 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신이 생각하건대, 매색(梅賾)이 《상서(尙書)》를 올릴 때에 순전 1편이 없었다고 말한 것은 공안국의 순전전(舜典傳)이 따로 없었다고 말한 것이지, 순전의 경문(經文)조차 없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매색이 올린 순전은 다만 요전(堯典) 중에서 그 절반을 잘라낸 것으로서, 서경(西京 서한(西漢)의 대명사) 이후로 요전이 없어지지 않았으니 순전도 그대로 보존되었을 터인데, 어찌 꼭 공안국의 구본(舊本) 순전이라야만 고경(古經)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요방흥(姚方興)이 올린 순전 첫머리의 왈약계고(曰若稽古) 등 28자에 대해서는, 바로 요방흥의 위작(僞作)입니다. 그 뒤에 선비들이 아무리 왕연수(王延壽)와 왕찬(王粲) 등의 문자를 인용하여 요방흥의 순전 28자가 진본(眞本)이라고 입증하였지만, 신은 이를 믿지 못하겠습니다. 정현(鄭玄)이 주석한 《두림칠서상서(杜林漆書尙書)》가 진작 없어져 버렸으니, 《상서》 58편이 모두 공자의 옛집 벽 속에서 나온 진본이 아닌 것이지, 순전(舜典)만이 공안국의 진본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고공기(考工記)가 간혹 주관(周官)과 틀리다는 것에 대해서는 신이 생각하건대, 《주례(周禮)》5편이 비록 주공(周公)이 손수 집필한 것은 아니지만, 유흠(劉歆)의 위조(僞造)는 절대로 아닙니다. 동관(冬官 《주례》의 편명) 1편은 한 경제(漢景帝) 시대에 천금(千金)을 상(賞)으로 걸어 놓고 구입하여도 되지 않자, 하는 수 없이 고공기로써 동관편(冬官篇)의 유실 부분을 보완하였기 때문에 장씨(匠氏)에 관한 일에만 특별히 상세하고, 다른 것은 다 구비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고공기가 선진(先秦)의 고문(古文)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므로 송(宋) 나라 선비들처럼 헐뜯고 배격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자(朱子)가 일찍이, 주(周) 나라의 법도는 《주례(周禮)》속에 갖추어져 있다 하였고, 또 《주례》의 규모는 모두 주공(周公)이 만든 것이라고 하였으니, 《주례》 6편의 문자를 부질없이 의론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봅니다.

《노론(魯論 노(魯) 나라 사람들이 전한 현행 《논어》)》과 《제론(齊論 제(齊) 나라 사람들이 전한 《논어》)》이 다 공자(孔子)의 문하에서 전해 온 것인데, 문왕편(問王篇 《제론》에 있는 편명)이《장후론(張侯論 한(漢) 나라 안창후(安昌侯) 장우(張禹)가 전한 《논어》)》에는 삭제되었고,《맹자내서(孟子內書 현재의 《맹자》7편을 가리킴)》와 《맹자외서(孟子外書《맹자》7편 이외에 4편으로 된 책)》도 모두 맹자(孟子)에게서 나온 것인데, 성선편(性善篇《맹자》 외서에 있는 편명)이 유독 조기(趙岐)가 주(注)를 낸 《맹자》에 누락되었으니, 경전(經傳)이 후세에 전하여지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 데에는 그 기수(氣數)가 있는 것인가. 《공양전(公羊傳)》과 《곡량전(穀梁傳)》이 서경(西京) 시대에 성행하다가, 진(晉)ㆍ위(魏) 시대에 이르러서는 그 학설이 차츰 미약하여졌고, 《좌씨전(左氏傳)》은 장창(張蒼)에게서 처음 출현되었지만, 당(唐)ㆍ송(宋) 시대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학관(學官)을 설립하여 주석을 내었으니, 한번 성행하기도 하고 한번 침체되기도 하는 데에는 정말 시운(時運)이 있는 것인가.


문왕편(問王篇)이 《장후론(張候論)》에 삭제된 데 대해서는 신이 생각하건대, 《논어》는 모두 세 종류로서 문왕편과 지도편(知道篇)은 《제론》에만 있습니다. 경적지(經籍志)를 살펴보건대 ‘장우(張禹)가 《제론》과 《노론》두 가지 책을 하나로 합쳐, 그 중에 번거롭고 의심스럽거나 넘치거나 거짓스러운 것을 삭제해 버렸는데, 고문(古文) 《논어》가 출현되자 과연 《노론》과 서로 합치되었다.’ 하였으니, 문왕편 등이 《장후론》에 삭제당한 것은 필시 당시에 적실한 근거가 있었을 터이므로, 문왕편이 없어진 것을 애석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성선편(性善篇)이 유독 조기가 주를 낸 《맹자》에 누락된 데 대해서는 신이 살펴보건대, 《맹자외서》는 바로 성선변(性善辨)ㆍ문설(文說)ㆍ효경(孝經)ㆍ위정(爲正) 등 4편입니다. 조 대경(趙臺卿 대경은 조기(趙岐)의 자)이, 《맹자외서》의 글은 깊이도 없을 뿐더러 말도 모방한 점이 많다고 하였으니, 당시에 《맹자외서》를 방치해 버리고 돌아보지도 않았던 것은 반드시 까닭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순자(筍子)》에 실린, 사심(邪心)부터 먼저 퇴치시켜야 한다느니 나쁜 마음을 제거하여야 한다는 말이나, 《양자(楊子)》에 실린, 뜻은 있으나 도(道)에 이르지 못한 자가 있다는 말들은 모두 《맹자》의 7편 중에 있는 글은 아니지만, 역시 후인들을 충분히 깨우쳐 분발시킬 만합니다. 이 때문에 선유(先儒)들이 혹 《맹자외서》가 방치당한 것을 애석하게 여기기도 했습니다. 《공양전(公羊傳)》ㆍ《곡량전(穀梁傳)》ㆍ《좌씨전(左氏傳)》이 한번 성행하기도 하고 한번 침체되기도 한 데 대해서는 신이 생각하건대, 경전(經傳)이 성행하거나 쇠퇴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 당시 임금의 좋아하고 싫어함과 주석을 낸 학자들의 잘하고 서투름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경제(漢景帝)가 《공양전》을 좋아하자 호모생(胡母生 한(漢) 나라 사람으로 《공양전》에 밝았음)과 동중서(董仲舒 한(漢) 나라 사람으로 《공양전》에 밝았음) 등의 《공양전》학설이 수립되었고, 한 선제(漢宣帝)가 《곡량전》을 좋아하자 채천추(蔡千秋 한(漢) 나라 사람으로 《곡량전》에 밝았음)와 유향(劉向 한(漢) 나라 사람으로 《곡량전》에 밝았음) 등의 《곡량전》학설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동중서는 재변(才辯)이 능한 반면에 강옹(江翁 한(漢) 나라 사람으로 《곡량전》에 밝았음)은 천성이 어눌하였기 때문에 《공양전》은 성행하고 《곡량전》은 침체되었던 것이며, 영광(榮廣 한(漢) 나라 사람으로 《곡량전》에 밝았음)은 박학(博學)한 반면에 휴맹(畦孟 맹은 한(漢) 나라 휴홍(畦弘)의 자로 《공양전》에 밝았음)은 말이 궁색한 때문에, 《곡량전》은 성행하고 《공양전》은 침체되었던 것입니다. 《좌씨전》에 있어서는 장창(張蒼)에게서 처음으로 출현되어 본래 그것을 전하는 사람이 없다가, 한 문제(漢文帝) 시대에 이르러서야 가의(賈誼)가 《좌씨전훈고(左氏傳訓詁)》를 저술하여 관공(貫公)에게 전수하였고, 그 뒤에는 유흠(劉歆)이 《좌씨전훈고》를 고찰 시정하여 학교의 과목으로 선정하려 하였으나 여러 선비들이 호응하여 주지 않았으며, 건무(建武 한 광무제(漢光武帝)의 연호) 이후에 이르러서 한흠(韓歆)ㆍ진원(陳元)ㆍ이봉(李封) 등이 모두 《좌씨전》을 주장하였으나 그대로 시행되지 못하다가, 가규(賈逵)ㆍ복건(服虔)ㆍ두예(杜預) 등이 서로 전해 가면서 《좌씨전》을 해석함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위(魏)ㆍ진(晉) 시대에 성행할 수 있게 되었고 수(隋)ㆍ당(唐) 이후부터는 마침내 《공양전》이나 《곡량전》 등의 권위를 앗아버렸습니다. 그러나 《춘추》의 경지(經旨)를 발명함에 있어서는 《공양전》이나 《곡량전》 등이 《좌씨전》보다 나으므로, 지금은 한쪽만을 폐기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상서(尙書)》의 금문(今文 복생(伏生)이 외어서 전한 《서경(書經)》 문자)과 고문(古文 공자(孔子)의 옛집 벽 속에서 나온 《서경》 문자) 중에 어떤 것이 진본(眞本)이고 어떤 것이 위본(僞本)인지 증거가 없고, 《모시(毛詩)》의 대서(大序)소서(小序)에 대해서도 누구의 말을 따르고 누구의 말을 버릴 것인지 해결할 수 없다. 춘왕정월(春王正月)은 사시절(四時節)도, 달도 개정한 것이라[改時改月]고 하는 문제는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한 공안(公案)이요, 속임(屬衽)과 구변(鈳邊)을 합쳐서 꿰매느니, 덮어서 꿰매느니 하는 문제도 예부터 여러 변론이 있다. 이상 여러 문제들에 대하여, 과연 널리 인증하고 자세히 고증하여 천고(千古)의 의문점을 충분히 깨뜨릴 수 있겠는가.


《상서》의 고문과 금문에 대해서는 신이 생각하건대, 이에 대한 말들이 매우 번거로우므로 죄다 말씀드릴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나 중훼지고(仲虺之誥 《서경》 상서(商書)의 편명)의, 미약한 제후(諸侯)는 병합하고, 우매한 제후는 공략해야 한다[兼弱攻昧]는 말은 도리어 《좌전(左傳)》의 글귀를 표절하였고, 대우모(大禹謨 《서경》 우서(虞書)의 편명)의, 고요(臯陶)를 버린다 해도 그 생각이 고요에게만 있다[釋玆在玆]는 말은 《좌전》의, 참으로 자기부터 전일하여야 한다[信壹]는 뜻과는 매우 다른 것으로서 혹[疣] 같은 존재임을 엄폐할 수 없고, 또 조각조각 깨뜨려진 흔적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자(朱子)가 ‘나는 일찍이 공안국(孔安國)의 《서전(書傳)》이 위서(僞書)인 것으로 의심하였다.’ 하였으니 신도 감히 여기에 이의(異議)가 없습니다. 《모시(毛詩)》의 대서(大序)와 소서(小序)에 대해서는 신이 생각하건대, 이에 대한 말들이 역시 장황하므로 어느 겨를에 죄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소서에 박잡(駁雜)한 점이 없지 않는 것은 참으로 주자(朱子)의 말과 같습니다. 다만 소서가 꼭 위굉(衛宏)의 손에서 나왔느냐는 것에는 분명한 증거가 없으나, 대모공(大毛公 모형(毛亨)을 가리킴)과 소모공(小毛公 모장(毛萇)을 가리킴) 사이에는 분명히 전수하여 준 맥락이 있으므로, 소서를 모공(毛公)이 저술하였다고 한 말은 전혀 배격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춘왕정월(春王正月)의 문제가 지금까지 해결되지 못한 데 대해서는 신이 감히 주착없이 단정할 수는 없으나 《춘추호씨전(春秋胡氏傳)》에, 하(夏) 나라의 역법(曆法) 사시절(四時節)을 주(周) 나라의 달 앞에 올려 놓았다[以夏時冠周月]고 한 말은, 신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사시절이나 달을 개정하지 않았다는 의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걸핏하면 빈풍(豳風 《시경》 국풍(國風)의 하나) 칠월장(七月章)과 이훈(伊訓 《서경》 상서(尙書)의 편명)의 ‘십이월(十二月)’이란 문구와 《사기(史記)》 본기(本紀)의 ‘동시월(冬十月)’이란 문구로써 구실을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시(毛詩)》나 《주례(周禮)》에는 하정(夏正 하(夏) 나라의 역서법(曆書法)으로 지금의 태음력(太陰曆))을 많이 사용하였고, 《상서(尙書)》나 《춘추》에는 주정(周正 주(周) 나라의 역서법(曆書法)으로 하정(夏正)의 자월(子月)인 11월을 정월로 삼았음)을 아울러 사용하였던 증거가 대단히 많습니다. 이에 대한 말이 비록 왕양명(王陽明 양명은 명(明) 나라 왕수인(王守仁)의 호)에게서 나왔지만 소홀히 여길 수는 없습니다. 이를테면, 《춘추》 장공(莊公) 7년에, 가을에 홍수(洪水)로 맥묘(麥苗)가 없어졌다고 한 것이나, 환공(桓公) 8년에, 겨울에 진눈깨비가 내렸다고 한 것이나, 은공(隱公) 9년에, 3월에 천둥과 번개가 있었다고 한 것이나, 환공(桓公) 14년에, 봄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고 한 것이나, 정공(定公) 원년에, 10월에 서리가 내렸다고 한 따위들은 모두 재이(災異)를 기록한 것인데 이를 하(夏) 나라의 역법(曆法) 사시절(四時節)로 따져 보면 비와 바람이 순조로워서, 재이가 될 수 없습니다. 다만 《춘추》에, 여름 4월에 정(鄭) 나라가 온(溫) 땅의 보리를 탈취해 갔다는 것이나, 가을에 또 주(周) 나라의 벼를 탈취해 갔다는 것만은, 위 요옹(魏了翁 요옹은 송(宋) 나라 진관(陳瓘)의 호)의 《정삭고(正朔考)》에서, 이는 하정(夏正)을 사용한 분명한 증거라고 하였으니, 신은 이에 대해 가부를 논란할 수 없습니다. 속임(屬衽)과 구변(鉤邊)에 대한 변론이 여러 가지인 데 대해서는 신이 생각하건대 ‘속(屬)’은 잇댄다는 뜻으로서 심의(深衣)는 몸을 깊숙이 가리려는 것이므로 의신(衣身) 곁에 또 1폭(幅)을 잇대어, 이것을 ‘속임’이라 합니다. ‘구(鉤)’는 ‘구(袧)’의 뜻으로서 주름잡는 것입니다. 심의의 치마[裳] 앞쪽이 비록 6폭이지만 옷섶을 여미고 나면 앞쪽은 3폭으로 되고, 뒤쪽도 비록 6폭이지만 양쪽 갓폭[邊幅]을 제하고 나면 뒤쪽은 4폭으로 됩니다. 양쪽 가의 2폭은 좌우 양쪽 겨드랑이 밑으로 들어가는데, 이 2폭만이 특별히 주름을 잡아서, 마치 오늘날의 직령(直領)과 같기 때문에 이것을 구변(鉤邊)이라 합니다. 그런데 정강성(鄭康成 강성은 후한(後漢) 정현(鄭玄)의 자)의 말에 구변은 지금의 곡거(曲裾)와 같은 것으로, 까마귀부리처럼 만든다고 한 제도와 양신재(楊信齋 신재는 송(宋) 나라 양복(楊復)의 호)의 말에, 속임은 합쳐서 꿰매고 구변은 덮어서 꿰맨다고 한 법에 대해서는, 신은 무슨 말들인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주례》에 보이는 관직 제도를 주관(周官 《서경》 주서(周書)의 편명)과 비교해 보면 엇갈린 것이 많고, 추성(鄒聖 맹자(孟子)를 가리킴)의 분전(分田 토지를 분할하여 백성에게 나눠줌)에 대한 의론을 왕제(王制 《예기》의 편명)에 상고해 보면 합치하지 않는다. 이 모두 경전(經傳)에서 나온 것인데도 이처럼 엇갈림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벽옹(辟雍 주(周) 나라 태학교의 이름)이 태학교(太學校)의 이름으로 잘못 불렸다는 것은 진작부터 양승암(楊升菴 승암은 명(明) 나라 양신(楊愼)의 호)의 분명한 증거가 있고, 교제(郊祭)체제(禘祭)가 백금(伯禽 주공(周公)의 아들)에게서부터 시작되지 않았다는 것도 방합산(方合山)의 적실한 증거가 있으니, 벽옹과 교제ㆍ체제 등이 비록 경전에 나타난 것이지만 역시 모두 믿을 수 없는 것인가. 왕개보(王介甫 개보는 송(宋) 나라 왕안석(王安石)의 자)가 좌씨(左氏)에 대하여 변론한 것이 11가지의 분명한 증거가 있고, 임효존(林孝存)이 《주례》에 대하여 논박한 것도 십론(十論)ㆍ칠난(七難) 등이 있는데, 이 모두 낱낱이 들어서 되풀이하여 토론할 수 있겠는가.


《주례》가 주관과 많이 엇갈린다는 데 대해서는 신이 생각하건대, 사공(司空 벼슬이름)이 주관에서는 국가의 토지만을 관장하였는데 《주례》에서는 모든 공장(工匠)들을 관장하였고, 삼공(三公 태사(太師)ㆍ태부(太傅)ㆍ태보(太保))과 삼고(三孤 소사(少師)ㆍ소부(少傅)ㆍ소보(少保))도 주관에서는 관직 책임이 있는데 《주례》에서는 육관(六官)에 들어 있지 않으니, 이것이 이른바 주관과 엇갈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관(冬官 주(周) 나라 육관(六官)의 하나로 토목(土木) 공작(工作)을 관장하였음)은 본시 빠진 것을 보완한 것이므로 굳이 주관과 서로 합치시킬 필요가 없고, 삼공이나 삼고는 이미 유사(有司)가 아니니, 어찌 육관에 배열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례》를 공박하는 사람들이 꼭 주관까지 아울러 비난하니, 《주례》와 주관이 합치하지 않는 데 대해 번거로이 변론할 나위가 없다고 봅니다. 《맹자(孟子)》가 왕제(王制)와 합치하지 아니한다는 데 대해서는 신이 상고하건대, 맹자가 북궁의(北宮錡)의, 주(周) 나라 관작(官爵)과 봉록(俸祿) 제도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기를 ‘제후(諸侯)들이 자기들에게 방해되는 것을 싫어하여 관작이나 봉록에 대한 전적(典籍)들을 없애버렸다. 그러나 일찍이 그 대략은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맹자의 말도 미비한 점이 없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노식(盧植)의 말에 의하면 ‘한 문제(漢文帝)가 박사 제생(博士諸生)에게 명하여 왕제(王制)를 저작하도록 했다.’고 하였는데, 왕제의 말이 본시 틀린 점이 많은 것은 그들이 스승에게 배우거나 전해 들은 것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니, 맹자의 말이 혹시 왕제와 다른 점을 이상하게 여길 나위가 없습니다. 벽옹(辟雍)이 태학교(太學校)의 이름으로 잘못 불렸다는데 대해서는 신이 생각하건대, 벽옹을 영대(靈臺)라고 한 것은 《좌씨전(左氏傳)》에서 나온 것으로, 영대는 태묘(太廟)의 부지(敷地) 안에 있고, 그 사방에는 영소(靈沼)가 빙 둘러 있기 때문에 벽옹이라 한다 하였으며, 그 뒤 한(漢) 나라에 이르러서는 영대와 벽옹을 합쳐서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한시설(韓詩說)에, 옹(雍)을 화(和)라 하였으니, 영대는 본래 분침(氛祲 요사스러운 기운) 등을 관찰하는 곳이요, 벽옹은 본래 태학교의 이름입니다. 채옹(蔡邕)의 《명당월령론(明堂月令論)》에도, 태묘와 학궁(學宮)이 통합된 제도를 자세히 서술하였지만, 벽옹은 그대로 태학교의 이름입니다. 장자(莊子)가 벽옹을 음악 이름으로 일컬은 데 대해서는, 음악 이름을 태학교인 벽옹으로 간주한 것에 불과하니, 이는 굳이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양신(楊愼)의, 벽옹이 태학교의 이름으로 잘못 불려졌다고 한 말은 저절로 틀린 셈입니다. 교제(郊祭)와 체제(禘祭)가 백금(伯禽)에게서부터 시작되지 않았다는 데 대해서는 신이 생각하건대, 노(魯) 나라에서 지낸 교제는, 다만 하늘[上帝]에 풍년을 기원한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가어(家語)》에, 공자(孔子)가 노 정공(魯定公)의 물음에 대답하면서 ‘노 나라에는 동지(冬至)에 지내는 대교(大郊)가 없다.’ 하였습니다. 또 《춘추(春秋)》에 교제에 대해 기록된 것이 통틀어 9건이 있지만, 모두 여름 4월에 있었고 봄 정월에는 있지 않으니, 자월(子月 음력 11월을 말함)의 장지(長至 동지(冬至))에 지내는 교제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또 성공(成公) 17년에는 교제가 가을 9월에 있었으니, 이는 바로 주송(周頌 《시경》 삼송(三頌)의 하나로 주(周) 나라 종묘(宗廟) 음악)의 가을에 보답하는 제사로, 모두 천자(天子)의 예(禮)를 참람되이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노(魯) 나라에서 지낸 체제(禘祭) 역시 길체(吉禘)와 시체(時禘) 등입니다. 이를테면 《춘추》에, 민공(閔公) 2년에 장공(莊公)에게 길체를 지냈다는 것과 왕제(王制 《예기》의 편명)에, 봄에는 약제(礿祭)를 지내고 여름에는 체제(禘祭)를 지낸다는 것과 제의(祭義 《예기(禮記)》의 편명)에, 봄에는 체제를 지내고 가을에는 상제(嘗祭)를 지낸다는 것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주공(周公)에게만 교제(郊祭)와 체제가 있었으므로 제통(祭統 《예기(禮記)》의 편명)과 명당위(明堂位 《예기》의 편명)에 모두 이르기를, 성왕(成王)이 주공은 천하에 공훈(功勳)이 있다 하여 중대한 제사를 하사했다고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시조(始祖)에게 제사지내고, 시조왕(始祖王)의 사당을 건립하였다는 말이 《좌전》에 나타나 있습니다. 다만 노 나라의 다른 공(公)들에게까지 교제와 체제를 무분별하게 지낸 것만은 비례(非禮)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예운(禮運 《예기》의 편명)에 공자(孔子)가, 노 나라의 교제와 체제는 예(禮)가 아니니, 주공(周公)의 도(道)가 쇠퇴해진 셈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제와 체제가 일찍이 백금(伯禽)에게서부터 시작되지 않은 것이 아니며, 여러 공들의 사당에까지 무분별하게 지낸 것은 희공(僖公)에게서부터 시작된 것이니, 방합산(方合山)의 교제와 체제가 백금에게서부터 시작되지 않았다는 말은 참으로 미비한 점이 있는 셈입니다. 왕개보(王介甫)가 좌씨(左氏)를 변론한 데 대해서는 신이 생각하건대, 《좌씨해(左氏解)》에 좌씨를 육국(六國 전국시대 제(齊)ㆍ초(楚)ㆍ연(燕)ㆍ한(韓)ㆍ위(魏)ㆍ조(趙)를 말함) 시대 사람이라고 전적으로 변론했습니다. 그러나 진씨(陳氏)가 이미, 《좌씨해》는 형공(荊公 왕안석(王安石)의 봉호)의 소작이 아니라고 변론하였습니다. 《좌씨해》에 이른 11가지 분명한 증거가 있다는 말을 비록 낱낱이 상고해보지는 못하였지만, 한(韓)ㆍ위(魏)와 지백(智伯 진(晉) 나라 대부(大夫))의 사건과, 조 양자(趙襄子)의 시호(諡號)진(秦) 나라의 서장(庶長)이라는 관작과, 우(虞) 나라가 납제(臘祭)를 지내지 못하게 되었다는 문자들이 모두 《좌씨전》에 실려 있기 때문에 좌씨를 육국 시대 사람이라고 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유향(劉向)ㆍ유흠(劉歆)ㆍ두예(杜預) 등이, 좌구명(左丘明)이 공자(孔子)와 함께 노(魯) 나라의 사기(史記)를 보고서 《춘추》를 지었다고 하였으니, 좌씨가 육국 시대 사람이었다는 말은 수다스럽게 변론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임효존(林孝存)이 《주례》를 논박한 데 대해서는 신이 생각하건대, 임석(林碩)의 자(字)는 효존으로, 한(漢) 나라 시대에 이름이 나지 못하고 있다가 특히 《주례》를 공박한 것으로 이름을 얻게 되었는데, 그는 《주례》를 말세(末世)에 어지럽혀져 고증(考證)에 맞지 않는 책으로 여겼습니다. 그가 이른, 십론(十論)ᆉ칠난(七難) 등은 모두 전하여진 것이 없고, 오직 가공언(賈公彦)의 석의(釋義)에 두어 대목만이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 거칠고 증거가 없으므로 서술할 나위가 없습니다.

문언(文言)ㆍ단(彖)ㆍ상(象)을 괘(卦) 아래에 차례로 모은 것은 누구에게서 시작되었으며 《춘추(春秋)》의 경(經)과 전(傳)을 연도별로 나눠 붙인 것은 어느 시대에 시작되었는가. 엄중(淹中)에서 나온 일례(逸禮)로서 지금까지 전하여 오는 것은 《대기(戴記)》중에서 어느 편(篇)이며 벽(壁) 속에서 나온 고문(古文)으로서 금문(今文)에 비하여 불어난 것은 《효경(孝經)》중에서 어느 장(章)인가. 구려(駒驪 고구려를 말함)의 건국이 한 원제(漢元帝)의 뒤였는데 공안국(孔安國)의 주(注)에는 그 이름이 미리 열거되었으며 서장(庶長)의 벼슬을 둔 것이 진 효공(秦孝公) 때에 시작되었었는데 좌구명(左丘明)의 《좌전(左傳)》에 이 관명(官名)이 앞서 언급된 것은 어찌된 까닭인가.


문언ㆍ단ㆍ상을 괘 아래에 차례로 모은 것은, 신이 생각하건대 《주역(周易)》은 상구(商瞿)가 공자(孔子)에게 배운 뒤로부터 여섯 번을 전수하여 전하(田何)에 이르렀고 그 뒤에는 초공(焦贛)ㆍ비직(費直)이 있었습니다. 한(漢) 나라 말엽에 이르러서는 전하와 초공의 학통이 미약해져 끊어지고 비씨만이 홀로 남았으니, 동경(東京 후한(後漢)을 가리킴)의 순상(荀爽)ㆍ유표(劉表)ㆍ마융(馬融)ㆍ정현(鄭玄)은 모두 비직의 학통을 전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언ㆍ단ㆍ상이 괘 아래에 든 것은 비록 왕필(王弼)로부터 시작되었으나 왕필 또한 비직의 학통이었으니, 그 근본은 비씨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춘추》의 경과 전을 연도별로 나눠 붙인 것은, 신이 생각하건대 《공양전(公羊傳)》과 《곡량전(穀梁傳)》은 본시 전주(箋注) 체제여서 당시에 이미 《춘추》의 정경(正經)에 삽입되었고 일찍이 별도로 나오지 않았으며, 《좌씨전》만은 경은 경대로 전은 전대로였던 것을 원개(元凱 진(晉) 나라 두예(杜預)의 자(字))에 이르러 비로소 《좌전》을 나눠서 경문 각 연도의 뒤에 붙였습니다. 즉 원개 자신이 쓴 서문에 ‘경문을 연도로 나눠서 전(傳)의 연도와 서로 부합되게 했다.’ 하였으니, 지금에 와서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엄중에서 나온 일례로서 지금까지 전하여 오는 것은, 신이 상고하건대 노(魯) 나라의 엄중에서 나온 고경(古經)의 예(禮)가 본래 56편이었는데, 그 중에 17편은 한(漢) 나라 초기 고당생(高堂生)이 전한 17편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한 선제(漢宣帝) 때에 이르러 후창(后蒼)이 이 17편에 가장 밝았고 이에 《곡대기(曲臺記)》를 지어 양(梁) 나라 사람 대덕(戴德 《대대례(大戴禮)》의 편자)ㆍ대성(戴聖 《소대례(小戴禮)》의 편자)과 패(沛) 땅 사람 경보(慶普)에게 전수하였습니다. 한 나라 말기 정현(鄭玄)은 소대(小戴 대성을 말함)의 학통을 이어 고경(古經)을 교감하고 주석을 냈으니, 바로 지금의 《의례(儀禮)》17편이며 그 중 상복(喪服) 1편은 자하(子夏 공자의 제자 복상(卜商)의 자)가 이전에 전수한 것으로 여러 선비들이 많이 주석하여 본래 별도로 유행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엄중에서 나온 일례로서 지금까지 전하여 오는 것은 바로 《의례》17편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소대례(小戴禮)》인데, 세상에서 다만 《예기(禮記)》를 소대의 기록으로 알고 있으니, 이는 오류를 그대로 인습한 것입니다. 또 《논형(論衡)》에서 말한 ‘하내(河內)의 여자(女子)가 오래된 집을 헐다가 일례(逸禮) 한 편을 얻었다.’ 하는데, 이는 이것을 가리킨 말이 아닙니다. 고문 《효경(孝經)》이 금문에 비하여 불어난 것은, 신이 상고하건대 《효경》은 본래 《상서(尙書 《서경(書經)》을 말함)》와 함께 공벽(孔壁)에서 나온 것을 공안국(孔安國)이 전(傳)을 지은 것입니다. 또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는 ‘하간(河間) 사람 안지(顔芝)가 소장한 것을 한 나라 초기에 안지의 아들 정(貞)이 내놓았는데, 유향(劉向)이 안지의 본(本)을 고문(古文)에 비해서 번잡하고 의심스러운 것이 삭제되었다고 했으며, 공안국의 본은 양(梁) 나라 때 없어졌다가 수(隋) 나라 때에 이르러 하간의 유현(劉炫)이 민간에서 구입하여 조정에 올려졌으나 선비들은 모두 유현의 위조라고 했다.’ 하였습니다. 이것이 소위 고문본입니다. 그러나 그 불어났다는 것도 많아보았자 규문(閨門) 1장의 24자와 한(閑) 자ㆍ좌(坐) 자ㆍ삼(參) 자ㆍ자왈(子曰) 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렇다면 유향이 삭제했다고 한 것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았을 것인데, 어떻게 유현의 위조로 직단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금문본과 고문본을 함께 대조 연구하는 것이 옳을 줄 압니다. 공안국이 구려의 호칭을 미리 열거한 것은, 신이 회숙신지명(賄肅愼之命 《서경(書經)》의 일편(逸篇) 이름)을 상고하건대 공안국 주(注)에 ‘동해(東海)의 고구려ㆍ부여(扶餘)ㆍ간(馯)ㆍ맥(貊)의 족속을 주 무왕(周武王)이 모두 통했다.’ 했는데, 후세의 선비들이 ‘구려의 임금인 주몽(朱蒙)은 한 원제(漢元帝) 건소(建昭) 2년(서기전 37년)에 비로소 국호를 세웠다. 공안국이 조칙을 받아 《서경》의 전(傳)을 지을 때도 중국과의 왕래가 통하지 않았거든, 하물며 무왕 때이겠는가.’ 했으므로 신은 이것을 잘못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국호는 본시 지명(地名)을 따랐으므로 주몽의 건국이 비록 원제 때에 있었다 하더라도 구려란 땅 이름은 당연히 공안국 이전에 있었을 것인데, 어떻게 미리 열거한 것이 되겠습니까. 《문헌통고(文獻通考)》를 보면 ‘한 무제(漢武帝)가 조선(朝鮮)을 멸망시키고 고구려(高句麗)를 현(縣)으로 만들었다.’ 했으며 《한서(漢書)》에도 ‘현도(玄菟)와 낙랑(樂浪)은 무제 때에 설치되었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지리지(地理志)의 현도군 속현(屬縣)에 구려가 명백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구려라는 이름은 사실 무제 이전에 있었으니, 이것을 가지고 고문이 허위란 확증을 삼을 수는 없습니다. 좌구명(左丘明)이 서장(庶長)을 앞서 언급한 것은, 신이 살피건대 《좌전》에 불경(不更 관명)인 여보(女父)와 진(秦) 나라 서장 포(鮑)와 서장 무(武)가 보이는데, 후세의 선비들이 ‘진(秦) 나라가 효공(孝公) 때에 이르러 적의 수급(首級)을 벤 데 대한 관작을 정하면서 불경과 서장의 칭호가 있었으니, 좌씨는 당연히 진 효공 이후의 사람이다.’ 합니다. 그러나 신은 이 또한 잘못이라 여깁니다. 진 나라가 주 효왕(周孝王) 때부터 비자(非子)가 나라를 받았으니, 춘추 시대 이전에도 그 나라가 없지 않은 것입니다. 나라가 있었으면 관청을 두었을 것이고 관청을 두었으면 벼슬 이름이 있었을 것이므로, 다만 불경과 서장에 대한 기록이 우연히 효공 때에 보였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왕계(王稽) 이전에는 진 나라에 알자(謁者)란 벼슬이 없었고 조고(趙高) 이전에는 진 나라에 중거부령(中車府令)이란 벼슬이 없었단 말입니까. 이는 두 사람의 좌씨(左氏)가 있었다는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이아(爾雅)》가 과연 주공(周公)이 지은 것이라면 바람과 비에 대한 해석에서 어찌 《초사(楚辭 한(漢) 나라 유향(劉向)이 편찬한 책 이름)》의 글귀를 인용했으며, 《효경》이 진실로 중니(仲尼 공자의 자)가 지은 것이라면 첫장의 글에서 무슨 까닭에 증자(曾子)라 호칭하여 말하였겠는가. 《공양전(公羊傳)》의 소(疏)는 지은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는데, 혹 서언(徐彦)이라고 자칭한 것은 어느 것에 의거한 것이며, 《추전(鄒傳 《맹자(孟子)》)》은 처음에는 유가류(儒家類)에 끼었었는데, 경류(經類)의 서열에 올린 것은 누가 한 것인가.


《이아》에 《초사》를 인용한 것은, 신이 생각하건대 육씨(陸氏 육덕명(陸德明)을 말함)의 《경전석문(經傳釋文)》에 ‘《이아》를 주공이 지었다고 말하는 것은 오직 석고(釋詁 전체 19편 중의 수편(首編) 이름) 한 편이다.’ 하였습니다. 이 말은 대체로 위(魏)의 장읍(張揖)이 올린 광아표(廣雅表)에 기인된 것입니다. 그 나머지 편들은 어떤 이는 ‘중니와 자하(子夏 복 상(卜商)의 자)가 덧붙인 것이다.’ 하고 어떤 이는 숙손통(叔孫通)이 증보한 것이라 하고 어떤 이는 패군(沛郡)의 양문(梁文)이 고증한 것이라 하고 있습니다. 곽박(郭璞)의 서문에도 단지 ‘중고(中古) 때 시작되어 한(漢) 나라 때에 융성했다.’ 하였을 뿐, 지은 사람은 밝히지 않고 있으니 석천편(釋天篇)은 주공이 지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암무지개는 혈이(挈貳)라 하고 폭우가 먼지를 쓸어간다.[蜺爲挈貳 涷雨灑塵]’는 본래 곽박(郭璞) 주소에 있는 문구이니, 이것을 가지고 의심할 수는 없습니다. 《효경》에서 증자라 호칭한 것은, 신이 살피건대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에 ‘《효경》은 공자가 증자를 위해서 효(孝)의 도리를 말한 것이다.’ 하였으나 이것을 가지고 공자가 지은 것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휴(何休)의 말에 ‘공자가, 나의 뜻은 《춘추》에 있고 행동은 《효경》에 있다고 했다.’ 하였으니, 이 말을 믿는다면 《효경》은 공자가 직접 지은 것입니다. 그러나 《춘추》는 본래 노(魯) 나라 역사를 기록한 책이었는데 공자가 따다가 책 이름으로 삼았으니, 《효경》도 예부터 전해오는 책을 증자의 문도(門徒)가 따다가 책 이름으로 삼은 것이 아닌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첫 장에서 증자라 호칭한 것을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공양전》의 소에 대해 어떤 이가 서언(徐彦)의 것으로 지칭하는 것은, 신이 살피건대 《숭문총목(崇文總目)》에도 지은 사람의 성명이 나타나지 않았고 하휴(何休) 이후의 역대 유림전(儒林傳)에도 모두 서언이라는 두 글자가 없습니다. 다만 《광천장서지(廣川藏書志)》에 ‘세상에 서언이란 사람이 전해오고 있으나 어느 시대인지는 알지 못한다.’ 하였는데 진씨(陳氏)가 정원(貞元 당 덕종(唐德宗)의 연호)ㆍ장경(長慶 당 목종(唐穆宗)의 연호)의 후대로 짐작된다고 한 것도 억측의 말입니다. 《맹자》가 경류의 서열에 오른 것은, 신이 생각하건대 《맹자》가 진시황(秦始皇) 때 불에 소각되지 않은 것은 본래 제자류(諸子類)에 섞여 있었기 때문이었고, 한 문제(漢文帝) 때에 이르러 《논어(論語)》와 함께 아울러 박사(博士)를 두었었으나 그대로 제자류였으므로 전기박사(傳記博士)라 칭하였으며, 후한(後漢) 때에 이르러 조기(趙岐)가 처음으로 주해하였습니다. 그러나 양한(兩漢) 이래의 예문지에는 모두 《논어》는 경류에 삽입되고 《맹자》는 유가류(儒家類)에 삽입되었다가 양(梁)ㆍ수(隋) 무렵에 비로소 《논어》ㆍ《맹자》ㆍ《중용》ㆍ《대학》과 아울러 ‘소경(小經)’으로 칭하여졌습니다. 이 때문에 직재 진씨(直齋陳氏 송(宋) 나라 진진손(陳振孫)을 말함)의 《서록해제(書錄解題)》에는 이를 따라서 《논어》ㆍ《맹자》를 함께 경류에 삽입시켰고 송(宋) 나라에 이르러서는 맹자를 점점 더 높이고 숭상하여 안자(顔子)ㆍ증자(曾子)와 나란히 태학(太學)에 배향(配享)하였습니다. 이것이 《맹자》의 드러나고 묻힌 데 대한 전말입니다.

선유(先儒)들이 말하기를 ‘구사(九師)가 오면서 《주역》의 도(道)가 숨겨지고 오전(五傳)이 생기면서 《춘추》의 뜻이 흩어졌으며, 《대대기(大戴記)》와 《소대기(小戴記)》가 나오면서 예(禮)가 쇠잔해지고 《제시(齊詩)》ㆍ《노시(魯詩)》와 《한시(韓詩)》ㆍ《모시(毛詩)》가 생기면서 시(詩)가 미약해졌다.’ 하였다. 그렇다면 전(傳)이나 주(注)가 도움은 없고 도리어 해만 있는 것이 이와 같단 말인가. 관학(館學)에서 상대할 이가 없고 전중(殿中)에서 쌍벽할 이가 없었으며, 정대춘(井大春 대춘은 정단(井丹)의 자)의 종합 박식과 주선광(周宣光 선광은 주거(周擧)의 자)의 종횡무진이 당세에는 훌륭히 칭찬되었으나 후세에는 전해지지 않았으며, 왕필(王弼)은 노장학(老莊學)에 침음(浸淫)하였고 범영(范寗)은 혹 참위설(讖緯說)에 관계되었으며, 정강성(鄭康成 강성은 정현(鄭玄)의 자)의 주는 간혹 서로 모순되고 공영달(孔潁達)의 소(疏)는 오류와 번잡이 없지 않은데도, 지금까지 오래도록 침체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선유들의 설에 대하여 신이 생각하건대, 진 나라가 경적(經籍)을 불사른 뒤로 육경(六經)이 잿더미로 화하여 타다 남은 간편(簡編)들이 뒤섞여 민간에서 나왔으나 제(齊)ㆍ노(魯)의 여러 선비들이 제각기 들은 바를 적어 주석을 달지 않았던들, 천년 뒤에 어떻게 그 조금이나마 알아냈겠습니까. 왕발(王勃)이 지은 익주묘비(益州廟碑 공자의 비)에 ‘구사(九師)는 《주역》의 학파만 분리하였고 오전(五傳)은 《춘추》의 원폭(員幅)만 찢어 놓았다.’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회피할 수 없는 비판이지만, 그렇다고 어찌 한 말로 결정지어 ‘숨겨졌다’ ‘흩어졌다’ ‘쇠잔해졌다’ ‘미약해졌다’고 하겠습니까. 이는 모두 마음과 기질이 거칠고 호방한 사람들이 함부로 선철(先哲)을 헐뜯는 말입니다. 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네 유신[四儒臣]이 후세에 전하여지지 않는 것은, 신이 살피건대 《북사(北史)》에 ‘육애(陸乂)가 오경(五經)에 가장 정통하여 당시 관학에서는 상대할 이가 없었다.’ 하였고, 후한(後漢) 때 정홍(丁鴻)은 백호관(白虎觀)에서 오경을 강론하였는데 당시 관중에서는 쌍벽할 이가 없었으며, 정단(井丹)과 주거(周擧)는 경전에 널리 통하고 담론을 잘하여 경사(京師)에서 노래까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한때 재주와 말솜씨만을 과시하였고, 후세에 전한 저술 공로가 없었으므로 지금 일컬어지지 않고 말았습니다.
네 주가[四注家]가 오래도록 침체되지 않은 것은, 신이 생각하건대 왕씨와 범씨는 혹 이단(異端)과 관계되었으나, 대성(戴聖)의 부정(不正)으로도 《예기》를 주석하는 데 해롭지 않았고 경방(京房)의 술수(術數)로도 《주역》을 주석하는 데 해롭지 않았으니, 그들이 이단에 관계되었다 하여 굳이 배척할 것은 못 됩니다. 정현과 공안국이 거칠고 잡스러움을 면치 못하였으나, 수많은 말 가운데서 혹 서로 모순되거나 호분누석(毫分縷析)하는 데 번잡함이 없을 수 없는 것은 형편상 불가피한 일이니, 이것을 가지고 선유(先儒)를 경솔하게 배척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대저 하늘을 날[經]로 하고 땅을 씨[緯]로 하는 것을 경(經)이라 이르고, 성인이 창작하고 이것을 현인이 서술한 것을 경이라 이르고, 고금을 통하고 우주를 미륜(彌綸)하는 것을 경이라 이르는데, 경이라는 것은 항구불변(恒久不變)의 지극한 도(道)요 없어지지 않는 큰 가르침이다. 깊고 넓은 것은 경의 문(文)이고, 간략하면서도 심오한 것은 경의 의(義)이고, 광대정명(光大貞明)한 것은 경의 가르침이다. 통명 지화(通明知化)하여 정미한 온오(蘊奧)를 다하고, 개물 성무(開物成務)하여 수많은 깊은 이치의 기틀을 다하였으니 아, 한량없이 크다. 저 구구히 형명 도수(刑名度數)에만 매어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하는 자는 경을 앎이 어찌 얕지 않겠는가. 그러나 진(秦) 나라에서 불타고 한(漢) 나라에서 유실(遺失)되어 단간궐문(斷簡闕文)을 상고하려 해도 증거할 데가 없는데, 오직 추(鄒)ㆍ노(魯)ㆍ제(齊)ㆍ양(梁) 사이에 시(詩)ㆍ예(禮)ㆍ《춘추(春秋)》에 밝은 이들이 유실된 것을 주워모으고 결루(缺漏)된 것을 보충하여 보물이나 보첩(譜牒)처럼 보유하였고, 진(晉)ㆍ당(唐)에 이르러서야 십삼경(十三經)의 전소(傳疏)와 전해(箋解)가 비로소 갖추어졌으므로, 구양수(歐陽脩)가 ‘여러 선비들의 장구(章句)의 학문이 돌아가면서 서로 강론하고 서술하여 성도(聖道)가 대략 밝혀졌다.’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그 말들이 모두 순수하지는 못하나 그 공로는 민멸할 수 없다. 송(宋) 나라 군자들이 나오면서부터 전해지지 않은 수사(洙泗 공자를 말함)의 전통을 계승하고 한(漢)ㆍ당(唐)의 천착한 누습(陋習)을 쓸어버렸으며, 《중용(中庸)》ㆍ《대학(大學)》을 《예기》에서 발췌해 내고 《맹자》를 격상시켜 《논어》와 짝하게 하여 한 세상을 심성 도기(心性道器)의 학설로써 고동시켰다. 이에 유림(儒林)과 도학(道學)이 두 갈래로 갈라지고 양한(兩漢) 이래 훈고 명물(訓詁名物)의 학문이 차츰 사라져갔다.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십삼경의 전체(全體)와 대용(大用)은 깊고 빛나서 천지에 참여하고 우주에 뻗쳤으며, 그 문체는 별처럼 반짝거리고 태양처럼 찬란하며, 그 부유(富裕)함은 땅처럼 두텁고 바다처럼 넓어 정미한 뜻이 신(神)의 경지에 들고 신묘한 묵계가 도(道)에 부합되었으니, 참으로 기송(記誦 훈고학(訓詁學)을 말함)하는 선비로서는 그 한쪽도 엿보지 못할 것입니다. 진 나라에서 불타고 한 나라에서 유실되었으나 남은 간편(簡編)이 없어지지 아니하여 제(齊) 나라에서 영가(詠歌)되고 노(魯) 나라에서 송독(誦讀)되어, 남은 향기가 지금까지 전하여졌으니, 실로 도(道)를 안고 경(經)을 궁구하는 사람이 시대마다 있었던 것입니다. 그 중에는 간혹 순금 속에 철(鐵)이, 쌀 속에 쭉정이가 있기도 하였으나 그 공로가 허물을 덮을 수 있으니, 이는 군자들이 용서해야 할 일입니다. 송 나라의 군자들이 나오면서부터 또 한번 그 도를 발전시켰고, 주자(朱子)에 이르러서는 집대성(集大成)하여 회통(會通)시키고 대일통(大一統)하여 거듭 창건해서 천고(千古)를 능가하고 우주를 포함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연대가 멀고 사실을 증거할 수 없어 비록 주 부자(朱夫子)의 해박한 지식으로도 오히려 자신이 있는 것은 남겨 놓고 의심스러운 것은 빼놓았으며, 처음에는 갑(甲)이라 하였고 나중에는 을(乙)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 주자가 한(漢) 나라 초기 책을 구해들이던 때에 출생하지 못해, 공안국ㆍ정현ㆍ유향(劉向)ㆍ동중서(董仲舒)의 무리들이 그 학술을 사용할 수 없도록 하지 못한 것이 애석합니다.

황명(皇明) 영락(永樂 성조(成祖)의 연호) 연간에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학궁(學宮)에 반사(頒賜)한 뒤로부터 농사짓는 선비나 책 속에 사는 생도들이 어려서부터 늙기에 이르도록 학습하여도 끝내 호광(胡廣 명 나라 사람)과 해진(解縉 명 나라 사람)이 만든 대전(大全)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만약 공안국ㆍ정현 이후에 전해오는 학설과 마융(馬融)ㆍ왕숙(王肅) 등 제가(諸家)들의 동이점(同異點)을 물으면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을 딱 벌린 채 대답을 못한다. 이러고서도 교학(敎學)의 공로를 빛내고 천고 유림의 전통을 이으려 한다면 어찌 서로 모순되어 어렵지 않겠는가. 오늘날 경전의 근원을 소급(溯及)하고 속학(俗學)의 잘못을 바로잡아, 큰 것만을 힘쓰고 작은 것을 소홀히 여기거나, 지금것만을 본받고 옛것을 그르다 하지 않으며, 뜻을 공손히 가져 널리 배우고 먼저 나온 학설을 기본으로, 뒤에 나온 학설을 뒤로 하여, 십삼경의 뜻이 조목마다 해석되어 해와 별처럼 환하게 하려면 그 방법이 어떻게 되는가. 그대들은 경전을 궁구하고 옛것을 배운 데다가 평소에 강구한 것이 있을 것이니, 각기 규정된 법식은 타파하고 마음을 다하여 대답하라. 내가 지금 임헌(臨軒)하여 기다리고 있노라.


대명(大明)이 천하를 다스려 문명이 크게 밝아지면서 주자(朱子)를 존신(尊信)하고 다른 학설을 금지하였으며, 사서ㆍ삼경을 학궁에 반포하고 호광ㆍ해진 등을 시켜 대전(大全)을 편찬케 하여 천하 학자들로 하여금 자기의 지혜와 의사를 무시하고 모두 여기에 추향(趨向)하도록 함으로써 양한(兩漢) 이래의 여러 학설이 유통되지 못하고 폐지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제자(諸子)들의 학통을 바르게 하고 한 세대의 잘못을 구제하는 데는 참으로 도움이 되었으나, 그 폐단은 교왕(矯枉)의 과도함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 뒤에 몽매한 선비들이 용렬하고 거칠어서 애당초 학문의 이동설(異同說)과 경적의 신구본(新舊本)이 있는 줄을 모른 채, 굳어진 학설만을 따르고 세속의 학문만을 숭상하여 마치 하늘이 만들어 낸 것으로 알 뿐 자기의 총명을 폐쇄해 버렸습니다. 옛것을 소급하여 근본을 찾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것을 좋아한다고 지적하고, 경(經)을 인용하여 전(傳)을 증거하는 사람에게는 기묘한 것을 숭상한다고 꾸짖어 《의례(儀禮)》가 폐물로 되고 《주례(周禮)》가 벽서(僻書)로 되었으며, 《공양전(公羊傳)》과 《곡량전(穀梁傳)》이 이단으로 돌아가 《이아(爾雅)》와 《효경(孝經)》이 부적이나 비기(袐記)처럼 여겨졌는가 하면, 마융과 정현은 그 성명마저 희미해지고 공영달(孔潁達)의 소(疏)나 가공언(賈公彦 공언은 가규(賈逵)의 자)의 석(釋)은 그 면목조차 볼 수 없는 채, 소략하고 멸렬하여 다시는 옛것을 계승할 수 없게 되었으니, 사문(斯文)의 침체됨이 오늘날과 같은 때가 없습니다. 아, 천하의 일이 처음에는 한 이치로 시작되었다가 중간에는 온갖 다른 것으로 분류되고 끝에는 다시 한 이치에 합치됩니다. 그러므로 박문(博文)한 뒤에 약례(約禮)하는 것이 성문(聖門)의 전해오는 법입니다.
지금 경전(經典)의 설(說)들이 어지럽고 뒤섞여서 그 강기(綱紀)가 없으니, 진실로 정밀히 선택하고 널리 채취하여 그 표준을 알고 그 표준에 돌아가게 하지 않는다면 경(經)의 도(道)가 거의 꺼져갈 것입니다. 아가위[楯]ㆍ배[梨]ㆍ등자[橙]ㆍ귤(橘) 등 맛이 다른 과일을 소반에 함께 늘어 놓으면 자리에 앉은 사람이 스스로 선택할 것이고, 금(金)ㆍ패(貝)ㆍ주(珠)ㆍ옥(玉) 등 질이 다른 보배를 저자에 같이 늘어 놓으면 구하는 사람이 스스로 선택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박한 선비로 하여금 서적을 널리 구해들이고 아울러 감식(鑑識)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임의대로 선택하게 하여, 경문(經文) 아래에 그 세대를 참고하고 그 전주(箋注)를 싣되, 그 중에 번잡한 것은 산삭하고 중복된 것은 도태하여, 위로 진(秦)ㆍ한(漢)에서 아래 황명(皇明)에 이르기까지 새로 발명된 학설로서 한 가지 뜻이라도 갖춰진 것이면 모두 그 정미한 뜻만을 취하고, 무릇 당동벌이(黨同伐異)하는 쓸모없는 말은 모두 산삭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글읽는 선비들로 하여금 책을 펴보면 어떤 학설은 어떤 사람한테서, 어떤 뜻은 어떤 책에서 비롯된 것인가를 환히 알게 하는 한편, 취하고 버리고 좇고 좇지 않는 권한은 배우는 이들 스스로가 선택하게 할 것이요 억지로 따르게 하지 않는다면, 박아(博雅)한 선비가 차츰 그 사이에서 배출하여 성조(聖朝)의 교화를 빛내고 성문(聖門)의 은미한 뜻을 밝힐 것이니, 어찌 아릅답지 않겠습니까. 또 우리나라에는 십삼경(十三經)이 아직까지 발간되지 못하였으니, 이는 이웃 나라에 알게 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곡무 파사(谷霧波沙 핵심이 아닌 곁가지를 말함)까지는 모두 간행할 필요가 없지만 지금 만일 이전에 빼버렸던 1부(部)의 책을 별도로 인쇄 반포한다면 사람들의 눈과 귀에 젖어 오랫동안 스스로 익히게 되어서 경학(經學)에 반드시 시우(時雨)와 같은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명경과(明經科 경(經)을 강론하게 하여 뽑는 과거의 일종)가 설치되면서 경서의 뜻이 밝지 못하여지고 학구(學究 서당 훈장의 비칭)란 기롱이 나오면서 선비들의 자질이 날로 낮아졌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마땅히 그 제도를 차츰 고쳐서 경술(經術)을 배운 선비로 하여금 자음(字音)ㆍ구두(句讀)와 빨리 읽고 느리게 읽는 데에만 얽매이지 않도록 한다면 거의 경학을 높이는 조그만 도움이 될 것이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를 힘쓰소서. 신은 삼가 대책(對策)합니다.

 

대서(大序) : 《모시(毛詩)》의 관저편(關雎篇) 머리에 있는 서문(序文)으로, 왕숙(王肅)과 심중(沈重)은 "자하(子夏)의 저작이다.” 하였고, 정자(程子)는 "공자(孔子)의 저작이다.” 하였다.
소서(小序) : 《모시(毛詩)》의 각 편(篇) 머리마다 있는 서문(序文)으로, 왕숙과 심중은 "자하와 모공(毛公)의 합작(合作)이다.” 하였고, 정초(鄭樵)는 "위굉(衛宏)의 저작이다.” 하였다.
춘왕정월(春王正月)은 …… 것이라[改時改月] : 춘왕정월은 《춘추》 첫머리에 나온 경문(經文). 《좌씨전(左氏傳)》 공소(孔疏)에 보면, 왕도 주왕(周王), 정월도 주왕의 정월을 가리킨 것으로 말하였다. 이를테면, 봄 주왕의 정월이라는 뜻으로, 이에 대하여 《공양전》에는, “일통(一統)을 중대하게 여긴 것이다.” 하였다. 대저 주(周) 나라는 자월(子月 하정(夏正)의 11월)을 세수(歲首)인 정월로 개정한바, 달력이 하(夏) 나라보다 2개월 앞서가므로 사시절도 따라서 2개월씩 앞당겨진다. 그러니, 사실 사시절도 개정하고 달도 개정한[改時改月] 것이다. 그러므로 주자(朱子)가, “《주례(周禮)》에 정세(正歲)와 정월(正月)이 있는 것을 보면 주 나라는 사실 원래부터 춘정월(春正月)을 개정한 것이다. 공자의 ‘하 나라의 역법(曆法)을 사용하겠다.’ 는 말은, 다만 주 나라의 역법이 절서(節序)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인월(寅月 태음력(太陰曆)의 정월)로써 세수(歲首)를 삼은 하 나라의 역법을 따르려 한 것뿐이다.” 하였고, 또 “《춘추》는 노(魯) 나라의 역사이므로, 당연히 시왕(時王 주왕(周王))의 역법을 사용해야 한다.” 하였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춘추호씨전(春秋胡氏傳)》에, 하 나라의 사시절을 주 나라의 달 앞에 올려 놓았다[夏時冠周月]고 하였으므로, 달만 개정하고 사시절은 개정하지 않은 것[改月不改時]으로 보는 이도 있다.
교제(郊祭) : 본래는, 천자(天子)가 동지(冬至)에 남쪽 교외(郊外)로 나가 하늘에 제사지내고, 하지(夏至)에 북쪽 교외로 나가 땅에 제사지내는 걱을 가리킴. 이 밖에 제후(諸侯)가 봄에 지내는 풍년 기원제(豐年祈願祭)와 가을에 지내는 추수 감사제(秋收感謝祭)도 교제라고 한다.
체제(禘祭) : 본래는, 천자가 시조왕(始祖王)을 낳은 조상을 왕으로 추존하여 시조왕의 사당에 모시고 시조왕을 거기에 배향(配享)시키는 제사인데, 이 밖에 제후(諸侯)가 지내는 길체(吉禘)와 시체(時禘)도 체제라 한다.
육관(六官) : 주(周) 나라 시대에 중앙의 행정기관으로, 천관(天官) 총재(冢宰)ㆍ지관(地官) 사도(司徒)ㆍ춘관(春官) 종백(宗伯)ㆍ하관(夏官) 사마(司馬)ㆍ추관(秋官) 사구(司寇)ㆍ동관(冬官) 사공(司空)을 말한다.
영대(靈臺) : 주 문왕(周文王)이 만든 것으로, 요사스런 기운이나 길한 조짐을 관찰하기도 하고, 때때로 여기에 노닐면서 피로도 푸는 곳인데, 백성들이 문왕의 덕을 사모하여 ‘영대’라 불렀다고 한다.
영소(靈沼) : 주 문왕이 만든 것으로, 동물을 기르는 영유(靈囿) 안에 있는 연못을 말한다.
한(韓) …… 사건 : 《춘추좌전(春秋左傳)》애공(哀公) 27년 조에, “지백(智伯)이 탐욕스럽고 성격이 괴퍅하기 때문에 한ㆍ위가 배반하여 지백을 살해했다.” 하였는데, 두예(杜預)의 주(註)에, “이 사건은 공자(孔子)가 《춘추》 집필을 그만둔 지 27년 후에 있었다.”고 설명하였기 때문에 《좌전》을 지은 좌씨(左氏)가 육국(六國) 시대 사람이었다는 설이 있다.
조 양자(趙襄子)의 시호(諡號) : 양자는 진(晉) 나라 조무휼(趙無恤)의 시호. 그는 공자가 《춘추》를 쓴 지 80년 후에 죽어 양자라는 시호가 나왔는데, 《춘추좌전》 애공(哀公) 27년에 조 양자로 적혀 있기 때문에, 《좌전》을 지은 좌씨가 육국 시대 사람이었다는 설도 있다.
진(秦) 나라의 서장(庶長)이라 : 《춘추좌전(春秋左傳)》양공(襄公) 11년 조에, “진 나라의 두 서장 포(鮑)와 무(武)가 군사를 거느리고 진(晉) 나라를 정벌하여 정(鄭) 나라를 구원했다.” 하였는데, 서장은 진 나라 작명(爵名)으로, 공자가 《춘추》를 절필한 뒤에 육국 시대의 진 나라 작명이 기록된 때문에 《좌전》을 지은 좌씨가 육국 시대 사람이라는 설도 있다.
우(虞) 나라가 …… 되었다는 : 춘추좌전 희공(僖公) 5년 조 에, “우 나라가 납제(臘祭 섣달에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되었다.” 하였는데, 공영달(孔穎達)의 소(疏)에는 “진본기(秦本紀)에 의하면, 혜왕(惠王) 12년에 처음으로 납제를 지내기 시작했다.”고 설명한 때문에 《좌전》을 지은 좌씨가 육국 시대 사람이었다는 설도 있다.
엄중(淹中) : 흔히 공벽본(孔壁本), 또는 고본(古本)이라 불리는 책들이 나온 땅 이름. 《한서(漢書)》 권53에, “노 공왕(魯恭王) 유여(劉餘)가 집치레를 좋아하여 궁실을 넓히려고 공자의 옛집을 헐다가 벽 속에서 전서(篆書)로 씌어진 《상서(尙書)》ㆍ《예기(禮記)》ㆍ《논어(論語)》ㆍ《효경(孝經)》 등 수십 편을 얻었다.” 하였다.
일례(逸禮) : 지금 전하는 《의례(儀禮)》 17편 이외의 것을 말한다. 유흠(劉歆)의 39편설과 정현(鄭玄)의 56편 설이 전하는데, 다산(茶山)은 정현의 설을 따른 것 같다. 《漢書 藝文志》
《곡대기(曲臺記)》 : 한(漢) 나라 천자가 활쏘기할 때의 의식을 적은 책. 활쏘기하던 궁(宮) 이름이 곡대(曲臺)였던 까닭에 그 이름을 따라 이렇게 이름하였는데, 모두 9편이다.
두 사람의 좌씨(左氏) : 《논어》 공야장(公冶長)에서 공자가 칭찬한 좌구명(左丘明)과 《좌전》을 지은 좌구명이 서로 다르다는 설. 흔히들 《좌전》은 좌구명이 공자에게 경을 전수받아 전을 지은 것으로 전해 왔었는데, 당(唐) 나라 담조(啖助)와 조광(趙匡)이 이것을 부정하였고 정초(鄭樵)의, 좌씨는 구명(丘明)이 아니라는 변(辯)에는 8가지의 증거를 들어 좌씨가 공자 때 사람이 아니고 육국(六國) 시대 사람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숭문총목(崇文總目)》 : 송(宋) 나라 인종(仁宗) 연간에 장관(張觀) 등이 칙명을 받아 편찬한 도서목록. 당시 국가의 도서를 장서하였던 소문(昭文)ㆍ사관(史館)ㆍ집현(集賢)ㆍ비각(祕閣)의 사고도서(四庫圖書) 3만 6백 69권을 집대성한 것이다. 《宋史 藝文志》
구사(九師) : 한(漢)의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주역(周易)》에 밝은 9명의 스승을 초빙하여 도덕에 관한 계훈(誡訓) 20편을 짓게 하고 그것을 《구사역(九師易)》이라 불렀다. 《文中子 中說 註》
오전(五傳) : 《춘추》의 전(傳)을 지은 오가(五家)로 《추씨전(鄒氏傳)》ㆍ《협씨전(夾氏傳)》ㆍ《좌씨전(左氏傳)》ㆍ《공양전(公羊傳)》ㆍ《곡량전(穀梁傳)》을 말한다. 그러나 《협씨전》은 한(漢) 나라 때 이미 이름만 있을 뿐, 전해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漢書 藝文志》
정단(井丹)과 …… 노래까지 : 정단은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 때 사람으로 어렸을 때부터 오경(五經)에 능통하고 담론에 뛰어나 당시 경사(京師)에서 ‘오경에 해박한 이는 정대춘이다.[五經彌綸井大春]’라는 노래가 퍼졌고, 주거(周擧)는 후한 환제(後漢桓帝) 때 사람으로 경사에서 "오경을 종횡한 이는 주선광이다.[五經縱橫周宣光]"라는 노래가 불려졌다. 대춘은 정단의 자, 선광은 주거의 자다.
마융(馬融) …… 동이점(同異點) : 《수서(隋書)》경적지(經籍志)에, “《예기(禮記)》 2백 14편을 대덕(戴德)이 85편으로 줄여서 《대대기(大戴記)》를 만들었고 대성(戴聖)이 또 이를 46편으로 줄여서 《소대기(小戴記)》를 만들었는데, 한말(漢末)에 마융이 월령(月令)ㆍ악기(樂記)ㆍ명당위(明堂位) 3편을 보태어 49편으로 만들었다.” 하였는데, 《후한서(後漢書)》교현전(橋玄傳)에는, “이 49편은 마융 이전에 이미 49편으로 되어 있었다.” 하여 이설이 분분하다. 그리고 왕숙(王肅)은 고문(古文) 《서경(書經)》의 주(註)를 내면서 순전(舜典)을 요전(堯典)에서 분리시키고 순전 첫머리의 28자를 고증하여 실었으니, 이는 금문(今文)ㆍ고문과의 편수 출입(出入)을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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