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선생전서 제14권

잡저(雜著)

역수책(易數策)

 

문(問) : 유자(儒者)는, 일개 사물의 이치에 대해서도 궁구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데, 하물며 천지(天地)의 큰 이치와 상(象)ㆍ수(數)의 변하는 법을 궁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태초에 혼돈(混沌 천지가 열리기 이전의 상태)하여 기(氣)가 나뉘어지지 않고 희미하고 아득하였으나, 이의(二儀 천지 또는 음양)가 처음 열리자 만 가지 형상이 따라 나타났는데, 그 닫히고[闔] 열리게[闢] 하는 것은, 누가 이를 주재하는 것인가?
복희(伏羲)가 맨 먼저 나와서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살펴서 하도(河圖)가 나오자 비로소 팔괘(八卦)를 그렸으니, 만약 하도가 나오지 않았으면 팔괘는 끝내 그리지 못하였겠는가?
성인은 전인과 후인의 법이 같고, 도는 옛날과 지금이 일치하는지라, 낙서(洛書)가 나타나자 대우(大禹 하우씨(夏禹氏))가 이를 본받아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차서를 나열하였다. 두 성인의 소견은 무엇을 근거로 하여 복잡하고 간략한 차이가 있는 것인가? 혹시 은미한 뜻이 있는 것인가?
하도와 낙서가 서로 위치를 바꾸어서 상생(相生)ㆍ상극(相克)과 홀수ㆍ짝수가 서로 크게 두드러진 차이가 있는 것은, 또한 하늘이 사람에게 계시(啓示)하는 뜻에 전후의 차이가 있어서인가?
문왕(文王)ㆍ주공(周公)ㆍ공자(孔子)에 이르러 괘의 이치를 미루어 책(策)으로 만들고, 연역(衍繹)하여 십익(十翼)을 붙이자, 주역(周易)의 도(道)가 세상에 크게 드러났다. 만약 세 성인이 아니었다면 팔괘와 오복(五福)의 쓰임[用]이 능히 변전(變轉)하지 못하고, 64괘(卦)가 끝내 이루어질 수 없었겠는가?
천지 만물의 정상(情狀)은 무궁하고, 64괘의 변하는 것은 유한한 것인데 성인은 이르기를, “귀신이라도 정상을 숨길 수 없다.” 하였으니, 유한하게 변하는 것을 가지고 무궁한 정상을 다 담을 수 있다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시(蓍 시초(蓍草)로 점을 치는 것)와 귀(龜 거북으로 점을 치는 것)는 그 장점과 단점이 있으나, 길흉(吉凶)을 밝게 고해 주니, 성인의 뜻은 반드시 사람마다 나아가고 그치는 행동 일체를 시귀(蓍龜)에 의존하게 하려고 그렇게 한 것인가?
진한(秦漢) 이후로 주역의 도가 끊어져서 양웅(揚雄)ㆍ곽박(郭璞)ㆍ이순풍(李淳風) 일행(一行)이 어지럽게 번갈아 일어나서 서로들 옳다고 다투었으니, 그 주역을 그린 유의(遺意)에 보탬이나 이익됨이 있었던가?
낙양(洛陽)의 소자(邵子 소옹(邵雍))는 천인(天人 천리(天理)와 인사(人事))의 학문을 탐구하여 옛 성인이 밝혀내지 못한 것을 밝혀내고 방도(方圖)와 원도(圓圖)의 두 그림을 만들었는데, 무엇을 본받아 그렇게 한 것인가? 또 원도 가운데서 구괘(姤卦)는 반드시 건괘(乾卦) 뒤에다 두고, 복괘(復卦)는 곤괘(坤卦) 뒤에다 둔 것은 무슨 뜻인가?
천진교(天津橋)에서 두견새가 우는 것을 듣고 소인이 권세를 부릴 것을 알았고, 마른나무 가지가 저절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원부(元夫)가 와서 벌목할 것을 알았다는 것은, 성인이 주역을 지을 때에 그 능히 천 년 뒤의 장석(匠石)의 이름과 수유(竪儒)의 화(禍)를 미리 알아서 그렇게 한 것인가?
정자(程子)ㆍ주자(朱子) 두 현인(賢人)이 복희씨의 역경(易經)에 전(傳 정자가 지은 역경 해석)과 본의(本義 주자가 지은 주해)를 달았는데, 혹 그 주해의 말이 서로 같지 않은 것이 있으니,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른 것인가?
지금 옥당(玉堂)의 선비를 뽑아 역학을 전업으로 익히게 하고 차례로 번갈아가며 강론하게 하는데, 만약 이들로 하여금 깨끗하고 정묘한 주역의 뜻을 연구하게 한다면 그것은 국가의 정치에 유익하여 비록 격물치지ㆍ성의정심의 학문이 없어도 되겠는가? 그 논설을 듣기를 원한다.


대(對) : 하나의 이[一理]가 혼성(渾成)하고 두 기[二氣]가 유행하여 천지의 큰 것과 사물의 변하는 것이 기의 묘용(妙用)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 말을 아는 이라야 가히 주역을 논할 것입니다. 이제 집사(執事) 선생께서 특별히 역학의 미묘한 뜻을, 배우는 단계의 저에게 물어서 연구한 말을 듣고자 하시나, 저는 식견이 거칠고 얕아, 아직껏 책을 맨 가죽끈[韋編]이 끊어지지도 않았고, 베개의 글[枕書]을 깨뜨리지도 못하였는데, 어찌 족히 밝으신 물음에 만족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마는, 이미 융성한 뜻을 받든지라 감히 입을 다물고 있지 못하겠기에 논설하겠습니다.
만물은 하나의 오행(五行)이요, 오행은 하나의 음ㆍ양이며, 음ㆍ양은 하나의 태극이니, 태극은 억지로 이름 한 것입니다. 그 체(體)를 역(易)이라 하고, 그 이(理)를 도(道)라 하며 그 용(用)을 신(神)이라 합니다. 이 때문에 천지ㆍ자연의 역학이 있고, 복희씨(伏羲氏)의 역학이 있으며, 문왕과 주공의 역학이 있고, 공자의 역학이 있는 것입니다. 자연의 역학은, 팔괘로써는 구(求)할 수 없고, 복희씨의 역학은 문자(文字)로써는 구할 수 없습니다. 문왕과 주공이 있었기에 역도(易道)의 쓰임이 세상에 밝혀졌고, 공자가 있었기에 역학의 뜻이 후세에 밝아졌습니다. 그 뒤로는 도통(道統)이 전하지 못하고 사람들이 다른 견해를 품어서 비록 역학을 엿본다고 하나 그 본래의 뜻에 근본 하지 않고 문(文)ㆍ사(辭)와 상(象)ㆍ수(數)를 멋대로 해석하기도 하고 문자에 구애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송(宋)나라의 진유(眞儒)가 나와서 성인이 남긴 업적을 이어서 전성이 밝히지 못했던 것을 발명하니, 사도(斯道)가 다시 밝아졌습니다. 저는 이것으로 인하여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대개 형이상(形而上)이란 것은 자연의 이요, 형이하(形而下)란 것은 자연의 기입니다. 이 이가 있으면 이 기는 있지 않을 수 없고, 이 기가 있으면 만물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기가 동(動)하면 양이 되고, 정(靜)하면 음이 됩니다. 한 번 동하고 한 번 정하는 것은 기요, 동하게 하고 정하게 하는 것은 이입니다.
음ㆍ양이 이미 나누어지면 두 의[二儀]가 비로소 열리고, 두 의가 이미 열리면 만물이 이에 태어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기요, 그렇게 되게 하는 것은 이입니다.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누가 이것을 주장하였는지 알지 못하나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에 불과하다 하겠습니다.
혼돈(混沌)한 기운이 천지의 시초라고는 하나, 혼돈한 기운이 있기 전에 또 천지 만물이 몇 번이나 모였다가 몇 번이나 흩어졌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가고 오는 것이 한이 없고, 처음과 끝이 실마리가 없으니, 언뜻 보건대, 그것은 오직 무극(無極)입니다. 옛일을 상고해 보면, 복희씨가 처음으로 나서 도통(道統)이 이에서 비롯하였습니다. 하늘이 도를 아끼지 아니하고 땅이 보(寶)를 아끼지 아니하여, 이에 용마(龍馬)가 하도를 지고 나오자, 이를 본받아 팔괘를 그렸습니다. 대개 하늘과 땅은 반드시 성인을 기다려 이 수(數)를 사람에게 보이고, 성인은 반드시 글의 실마리를 기다려 이 이치를 세상에 밝혔으니, 하늘은 성인을 낳지 않을 수 없고, 또 하도를 낳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자연의 감응으로서 하늘과 사람이 서로 사귀게 되는 묘리입니다. 그러나 역에는 태극(太極)이 있어서, 이것이 양의(兩儀)를 낳고 양의는 사상(四象)을 낳으며, 사상을 팔괘를 낳습니다. 성인이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살피니, 천지 사이의 뭇 만물이 한 양(陽)과 한 음(陰)의 이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 이가 있으면 이 상(象)이 있고, 이 상이 있으면 이 수(數)가 있으니 어찌 하도만이 그렇겠습니까. 풀잎 하나 나뭇가지 하나라도 이 때문에 괘(卦)를 그릴 수 있는데, 하도가 나오기 전에 이미 복희씨의 마음속에 팔괘의 형상이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정자(程子)의 매토설(賣兎說)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대우(大禹)가 치수(治水)하기에 이르러서 땅이 평정되고, 하늘이 이루어지며, 신령한 거북이 낙서를 바쳤으므로, 이를 본떠서 구주(九疇)를 지었으니, 임금의 정치하는 심법(心法)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도의 수(數)는 온전한 것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10에서 끝이 났으니, 천지자연의 상징이요, 낙서의 수는 변하는 것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9에서 끝이 났으니, 인사(人事)의 당연한 도리입니다. 복희씨는 단지 하도에서 도리를 얻었고, 대우씨는 단지 낙서에서 도리를 얻었으니, 비록 복잡하거나 간략한 차이는 있는 듯하나, 실은 하도와 낙서가 서로 경위(經緯)가 되었으며, 팔괘와 구주가 서로 표리(表裏)가 되어 앞의 성인과 뒤의 성인의 법이 같고 옛날과 지금의 도가 일치하는데, 또 무엇을 의심하겠습니까?
대개 1과 6은 북쪽에 있고 2와 7은 남쪽에 있으며, 3과 8은 동쪽에 있고 4와 9는 서쪽에 있으며, 5와 10은 중앙에 있으며, 짝수는 남고 홀수는 부족하며, 왼편으로 돌아서 상생(相生)하는 것은 하도의 수(數)입니다. 9는 위에 있고, 1은 아래에 있으며, 왼편은 3, 오른편은 7이요, 2와 4는 어깨가 되고, 6과 8은 발이 되며, 5는 중앙에 있으며, 홀수는 남고 짝수는 부족하며 오른편으로 돌아서 상극(相剋)하는 것은 낙서의 수(數)입니다. 복희씨가 아니면 누가 능히 그 전부를 들어서 상수(常數)의 체(體)를 보였을 것이며, 대우가 아니면 누가 능히 홍범을 지어서 변수(變數)의 용(用)을 보였겠습니까? 그러나 낙서의 수로도 팔괘를 그릴 수 있고, 하도의 수로도 구주를 지을 수 있으니, 하도가 낙서로 되지 못하는 것도 아니요, 낙서가 하도로 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홀수와 짝수, 상생과 상극이 비록 현저하게 다르다고 하나 그 이치는 하나입니다. 이 이치가 하늘에 있어서는 팔괘가 되고, 사람에 있어서는 구주가 되니, 제가 보기에는 앞뒤가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아아, 복희씨의 역학은 괘(卦)ㆍ효(爻)만 있고, 애초에 문자(文字)는 없었으나 천지의 이치와 음ㆍ양의 변화가 다 여기에서 갖추어져 있습니다. 중고(中古)에 내려오면서 백성들의 하는 일이 날로 불어나니, 문왕(文王)이 이를 근심하여 괘의 뜻에 기본해서, 단사(彖辭)를 붙였고, 주공(周公)에 이르러서는 사물로 인하여 교화를 베풀어서 깊은 뜻을 궁구하고 미묘한 뜻을 천명하여 천하에 밝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주(周)의 덕이 이미 쇠하자 이 도는 다시 어두워졌습니다. 우리 공자께서 이에 계사(繫辭)를 지어 경의 뜻을 밝혔는데, 세 성인이 한마음으로 복희씨의 역학을 부연하여 상(象)을 천고(千古)에 드리우니, 해가 중천에 있는 것과 같이 밝았습니다. 기자(箕子)가 홍범을 무왕(武王)에게 진술한 것도 대우의 뜻을 서술한 것입니다.
대개 성인의 덕은 천지와 합하고, 밝은 것은 일월과 같으며, 사시(四時)와 더불어 그 질서를 합하고, 귀신과 더불어 그 길흉(吉凶)을 합하여, 마음의 움직이는 데서 구하고, 정신의 운용하는 데서 얻는 것이니, 성인이 아니면 어찌 능히 역학의 미묘한 뜻을 알겠습니까. 주역[大易]의 뜻은 진실한 이(理)일 따름입니다. 진실한 이는 쉬지 않으니 하늘이 어찌 세 성인을 낳지 않을 수 있으며, 세 성인은 어찌 대역(大易)을 부연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64괘는 복희씨가 이미 그 형을 그렸으니, 세 성인을 기다려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크도다, 역이여.[大哉易也] 이로써 성명(性命)의 이치에 순응하고, 이로써 유명(幽明)의 까닭을 통하고, 이로써 사물의 정(情)을 다하니 그 체(體)가 지극히 커서 포함하지 아니한 것이 없고, 그 용(用)이 지극히 신묘하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사람은 64괘의 변하는 것이 유한한 것만 알고, 64괘의 쓰이는 것이 무궁함은 알지 못합니다.
1이 2가 된다고 하면 1은 2의 근본입니다. 그런데 어찌 2는 많고 1은 적다고 이를 수 있겠습니까? 2가 4로 되고 4가 8이 되고 8이 64괘가 되는 것도 역시 이와 같은 것입니다. 64가 무궁함에 이르면 64도 역시 무궁한 수의 근본입니다. 그러니 무궁한 수는 많은 것이고 64는 적은 것이라 하겠습니까? 그 괘는 64개이지만 그 이(理)는 무궁하고, 그 용(用)도 무궁합니다. 이 때문에 때는 일정하지 아니하고, 괘는 일정한 상(象)이 없으며, 일은 일치하지 아니하고, 효(爻)는 일정한 위치가 없는 것입니다.
선유(先儒)들이 말하기를, “한 시기[一時]로만 괘를 찾으면 변화가 없는 데에 구애되니 역이 아니고, 한 일[一事]로만 효를 밝히면 막히어 통하지 못하니 역이 아니다.” 하였으니, 반드시 그 이치를 궁구하여 그 변화를 다하여야 역을 안다고 할 것입니다. 성인이 이른바, “귀신도 그 정상(情狀)을 숨기지 못한다.” 한 것이 어찌 우리를 속인 것이겠습니까.
역학이란 것은 길흉을 결정하고, 대업(大業)을 낳는 것입니다. 길하고 흉한 것의 징조는 반드시 점[卜筮]에 상고하는데, 대개 사람이 하는 계책에는 마음이 있지 않을 수 없고, 마음이 있으면 사사로운 마음이 생기는 것을 면하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옛날 성왕(聖王)은 비록 황도의 지극함을 세우고도 감히 스스로 옳다고 아니하고,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신의 밝은 뜻을 고찰하여 그 의심나는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반드시 점치는 사람을 세워서 점치기를 명하였으니, 이는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재계(齋戒)를 하여 하늘의 명령을 듣는 것입니다. 무왕은 지극히 어진 임금으로서 지극히 어질지 못한 이를 정벌하면서도 오히려 말하기를, “나의 꿈이 나의 점과 합한다.” 하였으니, 성인의 계책도 점에 미쳤던 것을 가히 알 수 있습니다. 다만 후세에는 적합한 사람을 택하지 않고 시초[蓍]와 거북[龜]도 사사로운 마음에서 나왔으니, 점을 치지 않은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슬프다, 진한(秦漢) 이후로 성학(聖學)이 전하지 아니하고 역도(易道)가 드디어 망하였으니, 역학의 전체를 아는 이는 진실로 얻을 수 없고, 역학의 한 부분을 아는 이도 세대(世代)마다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대개 역학은 만 가지 일의 근본인데, 선과 악이 여기에서 생기고, 사(邪)와 정(正)이 여기에서 나오기 때문에 역을 배워도 그 바탕을 잃어서, 사설(邪說)에 흘러가는 이도 있었습니다. 한(漢)나라의 양웅(揚雄), 진(晉)의 곽박(郭璞), 당(唐)의 이순풍(李淳風), 일행(一行)의 무리가 혹은 태현(太玄 양웅이 지은 책 이름)을 짓고, 혹은 성명(性命)을 말하고, 혹은 역수(曆數)를 추산하였는데, 가히 역학의 한 부분을 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역학만을 구하고 이치를 탐구하지 않았으며, 한갓 그런 사실만을 보고, 그렇게 되는 까닭은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역학의 바탕을 잃었으니, 어찌 네 성인의 남긴 뜻에 도움이 있겠습니까. 이치를 알지 못하고 능히 역학을 아는 이가 있다는 것을 나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위백양(魏伯陽)의 참동계(參同契)와 같은 것도 역학을 배워서 사설(邪說)로 흐른 것이니, 어찌 특히 양웅의 무리만 그러하였겠습니까?
그 후 천년 뒤에 나서 네 성인의 마음을 깨닫고, 천(天)ㆍ인(人)의 학문을 연구하여 성리(性理)에 통한 이는 오직 소자(邵子)뿐이었습니다. 소자의 학문이 진희이(陳希夷)에서 나왔으나, 그 독특하게 아는 묘리는 푸른색이 쪽[藍]에서 나왔지만 쪽보다 더 푸른 것과 같습니다. 복희씨의 괘를 미루어 방도(方圖)와 원도(圓圖)를 지었으니, 바깥이 둥근 것은 양이 동하여 하늘이 된 것이요, 가운데가 모난 것은 음이 정하여 땅이 된 것입니다. 천지의 이치는 다 여기에 있습니다. 원도의 가운데 건(乾)은 오중(午中)에서 다하고, 곤(坤)은 자중(子中)에서 다하였으며, 구괘(姤卦)는 음이 처음 생겨난 것이요, 복괘(復卦)는 양이 처음 생겨난 것입니다. 건은 양이 지극하여 음이 생겨나는 까닭으로 구괘를 건괘의 뒤에 두었고, 곤은 음이 지극하여 양이 생겨나는 까닭으로, 복괘를 곤괘의 뒤에 둔 것은 다 이치로써 미루어 한 것입니다. 동지(冬至)가 복괘가 되는 것은 한 양이 처음 동하는 것이요, 하지(夏至)가 구괘가 되는 것은 한 음이 처음 싹트는 것이니, 어찌 이 그림과 서로 합하지 않겠습니까. 소자는 이미 역학의 이(理)에 밝고, 또 역학의 수(數)에 정통하여, 복희씨 선천(先天)의 학(學)과 문왕 후천의 수(數)를 정밀히 분석하되 솜씨가 능통하여 막힌 것이 없었습니다. 천지의 시작과 끝이나 물(物)의 조화의 감응함을 지극히 궁리하여, 능히 미래를 알고 지혜를 이끌기를 신(神)과 같이 하였으니,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의 기운이 남으로부터 북으로 가는 것을 보고 곧 소인이 권력을 잡을 것을 안 것은, 이치로써 때를 관찰하여 그 닥쳐올 것을 미리 안 것입니다. 마른 나뭇가지가 바람도 없는데 저절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장석(匠石)이 와서 벌목할 것을 안 것은, 이것은 수로써 사물(事物)을 미루어 장차 그렇게 될 것을 안 것입니다. 이치로써 미루면 점을 치지 않아도 가히 알 것인데, 어찌 천진교(天津橋)에 두견새가 우는 것을 들어야만 국가의 운수가 어려워질 것을 알겠습니까. 다만 수(數)로써 미루는 것은 점이 아니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사물에 붙여서 괘를 이룬 뒤라야 물의 수(數)가 마땅히 다할 것을 아는 것입니다. 성인이 주역을 지어서 무궁한 용(用)을 한 권의 책에 부쳤으니, 어찌 반드시 어떤 일만을 위하여 어느 괘를 그렸겠습니까. 그 이치는 지극히 넓으니, 오직 이치를 궁구한 사람이라야 가히 그 변하는 것을 다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원부(元夫)의 이름을 안 것은 우연히 맞은 것이니, 더욱 미리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역학의 이치가 무궁한데, 반드시 일마다 끌어다 부합시키려고 하면 하나의 국부적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자와 주자는 함께 역학을 밝게 통하여 도의 학통[道統]을 전하였는데, 사도(斯道)가 막히고 어두워졌음을 슬퍼하여, 학자에게 진실한 근원을 알려준 것입니다. 정자의 전(傳)은 성인의 남긴 뜻을 캐내었고, 주자의 본의(本義)는 길ㆍ흉의 일정한 수를 밝혔으니, 그 독특한 견해는 언어와 문자의 사이에서는 구할 수 없습니다. 간혹 주해의 말이 같지 않은 것이 있으나, 제가 어찌 감히 그 옳고 그른 것을 가볍게 논하겠습니까.
삼가 살피건대, 우리 조정에서 사문(斯文 유학)이 크게 떨쳐서, 옥당(玉堂)의 선비들이 역학에 몰두하여, 그 맑고 정밀한 뜻을 깊이 밝히고, 개물성무(開物成務)의 도를 천양(闡揚)하여 우리 임금의 문명하신 덕을 이어 받들고, 우리 백성의 마땅히 행하여야 할 도리를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정치의 교화가 아름답고 밝아서 봉(鳳)이 이르고 그림이 나오는 태평 시대를 기대할 만하게 되었으니, 어찌 도움이 적다고 말하겠습니까.
그러나 역학의 도는 체(體)와 용(用)이 한 근원이요, 현(顯)과 미(微)가 간격이 없으니, 진실로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못하면 그 이치를 볼 수 없고, 성의정심(誠意正心)이 아니면 그것을 실천하지 못할 것이니, 격물치지ㆍ성의정심은 역학 중에서 하나의 일입니다. 격물치지를 하지 않으면서 성인의 도를 알고자 하는 것은, 비유하면 물이 없는 내에 배를 띄워서 큰 바다로 저어 가기를 구하는 것과 같고, 성의정심을 하지 않으면서 성인의 도에 이르고자 하는 것은 마치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태산이나 화산에 올라가는 것을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역(周易)을 배우고자 하는 이라면 이것을 버리고서 무엇으로 하겠습니까?
어리석은 저는 이미 집사(執事)의 물음에 대답하였으나, 또 집사에게 고할 것이 있습니다. 대개 하늘의 일이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것은 역의 지극히 미묘한 것이요, 솔개가 하늘을 날고 고기가 물에서 뛰는 것은 역의 지극히 드러난 것입니다. 하늘이 높고 땅이 두터운 것과 해와 달이 밝은 것과, 인(人)과 물(物)이 번성하는 것과, 산이 높고 내[川]가 흐르는 것은 역의 용(用)이요, 하늘이 높은 까닭과 땅이 두터운 까닭, 해와 달이 밝은 까닭, 인(人)과 물(物)이 번성한 까닭과 산천이 솟고 흐르는 까닭은 역의 체(體)입니다. 크게는 천지의 바깥으로부터 작게는 털끝만 한 것에 이르기까지 어찌 주역의 이치를 벗어난 것이 있겠습니까. 복희씨는 괘를 그려서 이 역학의 괘ㆍ효에 붙였고, 문왕은 단(彖)을 지어서 이 역학의 단과 상에 붙였으며, 공자는 계사(繫辭)를 지어서 이 역학의 계사에 부쳤는데, 괘ㆍ효ㆍ단사는 역학이 이미 형성되고 이미 나타난 것입니다. 모름지기 복희씨가 팔괘를 그리지 않아서 이 역이 형성되지 않았던 때에도 역이 없다고 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니, 집사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삼가 대답합니다.

[주D-001]개물성무(開物成務) : 하늘의 물상을 열어서 만물의 뜻을 깨달아 사람의 행할 일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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