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헌선생문집 제3권_

소(疏)_

위문하고 음식물을 하사한 것에 감사하는 소(갑술년 정월 초하루)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은 초야에 있는 용렬하고 어리석은 자로 재주도 없고 학식도 없어 좀벌레처럼 한 세상을 보내다가 마땅히 초목처럼 썩어 없어져야 할 몸이온데, 외람되이 은혜로운 발탁을 선묘(宣廟)의 조정에서 입었사옵고 거듭 특별한 예우(禮遇)를 성상(聖上)의 교화에서 입사와, 끼쳐주신 은택을 입어 죽음에 임박하였으나 아직 죽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아직도 견마(犬馬)처럼 헛되이 나이만 먹어 벌레와 같은 목숨을 부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사오니, 이는 실로 천지 부모와 같은 성상의 높으신 은덕이옵니다.
신은 금년에 나이가 81세이니, 늙고 병듦이 모두 지극하여 불원간에 땅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종전에 입은 망극한 은혜에 다시 보답할 길이 없사오니, 구구히 밤낮으로 정성껏 축원드리는 것은 오직 요(堯) 임금 백성의 축원일 뿐이옵니다.
신은 작년 겨울 초기에 상언(上言)을 구하시는 성지(聖旨)로 인하여 감히 양암(諒闇)의 아래에 말씀을 드렸사온데, 전하께서는 탓하지 않으시고 마침내 따뜻한 비답(批答)을 내리시니, 신은 받들어 읽고서 감격하여 늙은이의 눈물이 저절로 흘러 내렸습니다.
또 세모(歲暮)에는 특별히 전교를 내리시어 인자한 은총이 또한 신에게 미쳤습니다. 그리하여 본도(本道)의 감사(監司)가 명령을 받들어 즉시 위문하는 은총과 음식물을 하사하여 우대하시는 뜻을 베풀었으니, 이는 바로 구천(九天)의 우로(雨露)와 같은 은택이 다시 궁벽한 시골의 마른 풀에 가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 조그마한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삼춘(三春)처럼 따뜻하신 은혜에 우러러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큰 은혜를 입사와 이 원삭(元朔)을 만나오니, 살려는 뜻이 갑자기 싹터서 썩은 뼈가 다시 회생하려 하므로 북쪽 대궐로 향하는 마음이 간절하오나 정성을 바칠 길이 없습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오늘은 바로 1년의 첫날로서 여염(閭閻)의 어리석은 지아비와 어리석은 부인들도 모두 서로 마주보고 사사로이 축원을 하옵니다. 그런데 더구나 이 늙은 신하가 성상에게 어찌 말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은(殷) 나라 성탕(成湯)의 반명(盤銘)에 이르기를 “만일 어느날 새롭게 하였거든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 하였으며, 주(周) 나라 시(詩)에 이르기를 “주 나라가 오래된 나라이나 천명(天命)은 새롭다.” 하였으니,성탕이 스스로 새롭게 한 것은 바로 날마다 공경함을 더하여 일덕(一德)을 쌓은 것이며, 주 나라 문왕(文王)이 천명을 새롭게 한 것은 바로 하늘의 심원(深遠)한 덕을 체행하여 계속하고 밝혀서 공경한 것입니다.
이제 양(陽)의 덕이 처음 형통하여 원화(元和)의 기운이 새로이 창달하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성탕과 문왕의 마음에 뜻을 두시고 은 나라와 주 나라의 정치를 생각하시어, 마땅히 힘써야 할 것은 반드시 힘쓰고 마땅히 고쳐야 할 것은 반드시 고쳐서 원(元)을 체행하여 정도(正道)에 거하는 도를 다하시고 하늘의 영원한 명을 기원하는 덕을 닦으시어, 천지(天地)와 조화를 함께 하고 일월(日月)과 광명을 나란히 하소서. 이렇게 하신다면 천 가지 간사함이 저절로 사라지고 백 가지 장애물이 덕으로 돌아와서 수(壽)와 복(福)이 산과 구릉과 같을 것이요 국가가 반석처럼 편안할 것이오니, 종묘 사직의 경사와 신하와 백성들의 복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은혜를 받자옵고 감격하오니, 땅에 엎드려 하늘에 축원하는 사사로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와 삼가 혈성(血誠)을 짜 아뢰옵니다.

[주D-001]요(堯) 임금 백성의 축원 : 화(華) 땅의 국경을 맡은 봉인(封人)이 요 임금에게 수(壽)·부(富)·다남자(多男子)를 축원한 것을 이른다.
[주D-002]반명(盤銘) : 목욕하는 그릇에 새긴 명문(銘文)으로 다음의 내용은 《대학(大學)》에 보인다.
[주D-003]원(元)을 체행하여 정도(正道)에 거하는 도 : 군주가 천지의 원기(元氣)를 근본으로 삼아 항상 정도에 입각하여 정교(政敎)를 폄을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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