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선생속집 제8권_서(序)
천명도설(天命圖說)
제1절 천명(天命)의 뜻에 대한 논의
묻기를,
“천명의 뜻을 들을 수 있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하늘은 즉 이(理)이다. 그런데 그 덕이 네 가지가 있으니, 원(元)ㆍ형(亨)ㆍ이(利)ㆍ정(貞)이다. 네 가지의 실상을 성(誠)이라 한다. 대개 원(元)이란 것은 시작의 이치요, 형(亨)은 형통의 이치이며, 이(利)는 수행의 이치요, 정(貞)은 성공의 이치다. 그것이 순환하여 쉬지 않음이 모두 진실하여 거짓이 없는 묘(妙)함이, 이른바 성(誠)이라 한다. 그러므로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이 유행할 때 이 네 가지가 항상 그중에 있어서 만물을 명하는 근원이 되었다. 이리하여, 대개 만물의 음양오행의 기운을 받아 형상이 된 것은 원ㆍ형ㆍ이ㆍ정의 이치를 갖추어 성(性)으로 삼지 않은 것이 없다. 그 성의 조목은 또 다섯 가지가 있으니,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이다. 그러므로 이 사덕(四德) 오상(五常)은 상하(上下)가 같은 이치요, 하늘과 사람 간에 구분이 있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성인(聖人)과 우인(愚人)과 물(物)이 다르게 된 것은 기가 그렇게 함이요, 원ㆍ형ㆍ이ㆍ정이 본래 그러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자사(子思)는, ‘곧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 한다.’ 하였으니, 대개 만물의 음양과 오행이 묘하게 합한 근원이며, 사덕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하였다. 이(理)는 본래 하나[一]인데 그 덕은 넷이나 되는 것은 어째서인가? 이(理)는 태극이다. 태극 가운데 본래 물사(物事)가 없으니, 애초에 어찌 사덕이라고 이름할 만한 것이 있겠는가. 다만 그 유행한 뒤에 보면, 반드시 그 처음이 있고 처음이 있으면 반드시 그 통함이 있고, 통하면 반드시 그 수행함이 있고, 수행함이 있으면 반드시 그 성공함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비롯하여 통하고, 통하여 이룩하고, 이룩하여 성공됨으로써 사덕의 이름이 세워진 것이다. 이 때문에 합하여 말하면 하나의 이(理) 일 뿐인데, 나누어 말하면 이 네 가지 이(理)가 있다. 그러므로 “하늘은 한 이치로 만물에 명하고, 만물은 각각 한 이치가 있다.” 하는 것이 이것이다.
제2절 오행의 기에 대한 논의
묻기를,
“하늘이 이미 사덕으로 만물에 명하였다면 이른바 오행은 또한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천지간에 이(理)도 있고 기(氣)도 있으니, 이가 있게 되면 곧 기가 생기고, 기가 있으면 이가 따른다. 이는 기의 장수가 되고 기는 이의 졸개가 되어 마침내 천지의 공을 이룩하니, 이는 이른바 사덕이요, 기는 이른바 오행이다. 그것이 운행하는 즈음에 원(元)은 만물을 시작하는 이(理)인데 목(木)의 기가 이어 나게 하고, 형(亨)은 만물을 통하는 이인데 화(火)의 기가 이어 길어지게 하며, 이(利)는 물을 이룩하는 이인데 금(金)의 기가 이어 거두고, 정(貞)은 물을 성취하는 이인데 수(水)의 기가 이어 감추어 준다. 토(土)는 사계절 모두 왕성하다. 이것이 하늘이 사덕과 오행을 갖추어 그 도를 이룩하는 까닭이다.”
하였다.
제3절 이(理)와 기(氣)의 구분에 대한 논의
묻기를,
“하늘이 사덕과 오행으로 그 도를 이룩함은 진실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도(圖)에는 사덕과 오행(五行)은 같은 자리에 합하여 썼는데, 오행은 음양 속에 동그라미를 하여 쓰고, 사덕은 또 오행 속에 동그라미를 하여 쓴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이(理) 밖에는 기(氣)가 없고, 기 밖에는 이가 없으니 진실로 잠시도 떨어질 수 없으나, 그 구분은 또한 서로 섞여서 분별이 없어서는 안 된다. 더욱이 음양과 오행은 본시 이물(二物)이 아니므로 오행을 음양 가운데 두되, 반드시 사덕을 포함하여 오행이 하나의 음양이 되어서 각각 그 성(性)이 하나가 됨을 보인 것이요, 사덕은 오행 속에 동그라미를 하여 써서 이(理)가 마침내 기(氣)에 섞이지도 않고, 또한 기에서 떠나지도 않는 것을 보인 것이다.”
하였다.
제4절 만물을 낳는 근원에 대한 논의
묻기를,
“원(元)이 만물을 시작하는 이치가 되고, 목(木)의 기운이 이어 나면 물을 낳는 근원은 마땅히 목(木)에 근본 한 것인데, 도(圖)에는 틀림없이 수(水)에 근본 하였음은 어찌된 것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원(元)이 진실로 만물을 시작하는 이치가 되고, 목(木)이 또한 만물을 낳게 하는 기운이 되나, 그 원(元)이 된 바의 이는 원에서 나오지 않고 정(貞)에서 나왔으며, 그 목이 된 기(氣)는 목(木)에서 나오지 않고 수(水)에서 나왔다. 그 때문에 정(貞)은 만물을 이뤄 주는 이치도 되고, 또한 만물은 시작하는 이치도 되고, 수(水)는 만물을 감추는 기운도 되고, 또한 물을 낳게 하는 기운도 된다. 이것이 수가 정(貞)의 덕을 이어 만물을 낳는 근원이 되는 것이다. 이러므로 만물이 날 때에 그 형상은 비록 목의 기운을 기다려 이루어지나, 그 형상이 된 근원은 실로 수의 기운에서 조짐이 있게 된 것이다. 어찌하여 그러함을 아는가 하면, 대개 만물이 생기는 것은, 그 처음에는 모두가 먼저 수의 기운을 받아 점차로 엉기고 모이며, 오래된 후에 견고하게 되어 형상을 이루게 된다. 천지가 생긴 것도 또 먼저 수의 기로 이룩한 것이니, 이 이(理)에 대한 선유들의 이론은 이미 자세하므로, 이제 더 이상 부언하지 않는다. 그러니 만물을 낳는 근원이 수(水)에 근본 함을 어찌 의심하겠는가.”
하였다.
제5절 사람과 만물의 차이에 대한 논의
묻기를,
“사람과 만물이 날 때, 그 받은 성품은 똑같은 천지의 이치요, 타고난 형체는 똑같이 천지의 기운입니다. 그러나 사람과 만물은 본래 차이가 없는데, 이제 사람의 형상에는 반드시 그 전체를 희게 하여 오성(五性)이 곁으로 통하였다 하였고, 금수에는 반드시 성(性)의 동그라미 아래위에 그 한 선의 길을 희게 하며, 혹은 한 길에만 통하였다 하고, 초목에는 그 성(性)의 동그라미를 희게 하고 그 전체는 검게 하여 전혀 막혀서 통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천지 사이에 이(理)는 하나이나 기(氣)는 만 가지로 같지 않다. 그 이(理)를 궁구하면, 만물을 합하여 성을 하나로 같이 하였으되, 그 기(氣)를 논하자면 만물이 나누어져 각각 기를 하나씩 가졌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이(理)가 이(理)로 됨은 그 체가 본시 공허하고, 공허하기 때문에 상대가 없으며, 상대가 없기 때문에 사람에게 있거나 만물에 있거나 간에 진실로 더하고 덜함이 없이 하나가 된다. 그러나 기에 이르러 비로소 음과 양이 대립하는 형상이 있어서 서로 그 근본이 되므로 음(陰) 중에 양(陽)이 없을 수 없고, 양 중에 음이 없을 수 없으며, 음 중의 양 가운데 또 음이 없을 수 없고, 양 중의 음 가운데 또 양이 없을 수 없다. 그 변함이 십ㆍ백ㆍ천ㆍ만에 이르러 각각 상대가 없을 수 없다. 그렇다면 대개 만물이 이(理)와 기(氣)를 받은 것은 그 성이 차이가 없는데, 그 기(氣)는 치우침[偏]과 바름[正]의 차이가 없을 수 없다. 이러므로 사람과 만물이 날 때 음양의 바른 기운을 얻은 것은 사람이 되고, 음양의 치우친 기를 얻은 것은 만물이 되었다. 사람은 이미 음양의 바른 기[正氣]를 얻었으니 그 기질이 통하고 밝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물은 이미 음양의 치우친 기[偏氣]를 얻었으니 그 기질이 막히고 어둡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과 만물로 보면, 사람은 바른[正] 것이 되고 물은 치우친[偏] 것이 되며, 금수와 초목으로 보면 금수는 치우친 가운데 바른 것이 되고, 초목은 치우친 가운데 치우친 것이 된다. 그러므로 금수는 그 기질 중에 혹 한 줄기 통하는 것이 있고, 초목은 다만 그 이치만 갖추었을 뿐 모두 막혀 통하지 못한다. 그러면 그 성(性)이 통하기도 하고, 혹 막히기도 하는 것은 이 기의 바르고 치우친 데 차이가 있어서이고, 그 형상이 희기도 하고 검기도 한 것은 이 기가 밝고 어두운 차이가 있음을 표시한 것이니, 그 사이에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
하였다. “사람이 금수와 초목의 형상과 원(圓)ㆍ방(方)ㆍ횡(橫)ㆍ역(逆)의 차이가 있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고 물으니, 선생이 말하기를, “인물의 형상이 다르게 됨은 역시 음양, 이기(二氣)의 소치이다. 대개 양(陽)의 성은 순하고 평평하고, 음(陰)의 성은 거스르고 뒤집어진다. 그래서 사람은 천지의 수자(秀者)가 되어 양을 이루었으므로, 머리가 반드시 하늘과 같고 발은 반드시 땅과 같아서 평평하고 곧게 섰으며, 만물은 천지의 편색자(偏塞子)가 되어 음이 되었으므로, 형상이 사람과 같지 않아서 혹은 가로눕고 혹은 거스른다. 그러나 금수는 음 중의 양이 되었으므로 생(生)이 완전히 뒤집혀지지 않고 가로누웠으며, 초목은 음 중의 음이 되었으므로 생이 반드시 거스르고 뒤집어졌으니, 이것이 다 타고난 기가 같지 않음이요, 기의 순(順)과 역(逆)이 있는 까닭이다.” 하였다.
제6절 사람 마음에 대한 논의
묻기를,
“사람의 마음에 갖추어진 것을 분별하여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하늘이 사람에게 명(命)을 내려 줄 때에 이 기(氣)가 아니면 이 이(理)를 붙이지 못하고, 이 마음이 아니면 이 이와 기를 붙이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 사람의 마음은 허(虛)하고 이(理)이다. 또 영(靈) 기(氣)이다. 하여, 이와 기의 집[舍]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 이는 즉 사덕(원(元)ㆍ형(亨)ㆍ이(利)ㆍ정(貞))의 이면서 오상(五常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이 되고, 그 기는 즉 음양ㆍ오행의 기이면서 기질이 되었으니, 이렇게 사람의 마음에 갖춰진 것이 모두 하늘에 근본한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오상은 순수히 선하고 악이 없으므로 그 발한 바 사단이 또한 선하지 않은 것이 없고, 이른바 기질(氣質)이란 것은 본연(本然)의 성(性)은 아니므로, 여기에서 말한바 칠정(七情)이란 것은 사악으로 흐르기가 쉽다. 그러므로 성(性)ㆍ정(情)의 이름은 비록 하나이나 성ㆍ정의 쓰임은 다르지 않을 수 없다. 성(性)이니 정(情)이니 하는 것을 모두 갖추게 운용하는 것에 모두 이 마음의 묘함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의 주재가 되어 항상 그 성과 정을 통솔한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의 대개이다.”
하였다.
“그러면 정(情)이 심(心)의 동그라미 밖에 있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고 물으니, 선생이 말하기를,
“오행은 본래 음양의 동그라미 안에 있어야 할 것인데, 염계(濂溪)의 그림에는 동그라미 밖에 있으니 이는 그림으로 구분하기 때문에 부득이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하였다.
제7절 성정(性情)의 조목에 대한 논의
묻기를,
“성ㆍ정의 조목을 반드시 사덕(四德)ㆍ오행(五行)과 서로 짝지어 나열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사람의 오성(五性)과 사단(四端)은 진실로 하늘의 사덕과 서로 응하여 각각 속하는 바가 있다. 오직 칠정의 구분만이 다른 듯하나 유(類)로써 미루어 보면 또한 각각 합하는 것이 있다. 희애(喜愛)는 목(木)에, 낙(樂)은 화(火)에, 노오(怒惡)는 금(金)에, 애(哀)는 수(水)에, 욕(欲)은 토(土)에 모두 짝을 이루면서 있지 않은 곳이 없는 것, 이것이 하늘과 사람이 일체가 되는 까닭이다.”
하였다.
제8절 선기(善幾)와 악기(惡幾)에 대한 논의
묻기를,
“의(意) 자 아래에 선기(善幾)니 악기(惡幾)니 하는 것이 있음은 어째서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의는 마음의 발함이요, 마음[心]은 성정(性情)의 주재이다. 그러므로 이 마음이 발하기 전에는 태극(太極)이 동정(動靜)의 이치를 갖추었지만 음과 양으로 갈라지지 않은 것과 같다. 한 마음 안에 혼연한 한 성(性)이 있어 순수하게 선하고 악한 것이 없는 것이다. 이 마음이 발하면, 태극이 이미 갈라져서, 동(動)은 양(陽)이 되고 정(靜)은 음(陰)이 되는 것과 같다. 이때에 기(氣)가 비로소 활동하기 때문에, 그 정(情)이 발함에 있어 선과 악의 다름이 있게 된다. 그러나 그 단서는 매우 가늘다. 이에 의(意)가 마음[心]의 발함이 되고, 또 정(情)을 끼고 좌지우지하기 때문에, 혹은 천리(天理)의 공(公)을 따르기도 하고, 혹은 인욕의 사(私)를 따르기도 하여 선과 악의 구분이 이로 말미암아 결정 나니, 이것이 이른바 의(意)의 선기(善幾)와 악기(惡幾)라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선이 발하는 것은 본래 있는 데서 근원하기 때문에 곧게 이루어져 순하고, 악의 싹은 본래 없는 데서 나왔기 때문에 종횡으로 패려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조치도(趙致道)가 〈성기도(誠幾圖)〉를 만든 까닭이요, 내가 여기에서 취하여 말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제9절 타고난 기질(氣質)에 대한 논의
묻기를,
“사람과 만물이 통하고 막힌 구분은 기(氣)의 바르고 편벽됨의 차이에서 말미암았다 함은 이미 가르침을 들었으나, 우리가 다 바른 기(氣)를 얻었는데, 또 상지(上智)ㆍ중인(中人)ㆍ하우(下愚)의 다른 세 등급이 있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사람의 기는 바르기는 하다. 그러나 기에는 음과 양이 있으니, 그 타고난 기질이 어찌 맑고 탁하며, 순수하고 박잡하다고 말할 수 없겠는가. 이러므로 사람이 날 때에 하늘에서 기(氣)를 받았으니 하늘의 기운은 맑은 것도 있고 탁한 것도 있고, 땅에서 질(質)을 받았으니 땅의 질은 순수한 것도 있고, 박잡한 것도 있다. 그러므로 그 맑고 순수한 것을 타고난 자는 상지(上智)가 되니, 상지는 하늘의 이치에 대해 이미 분명히 알고 극진하게 행하므로, 자연히 하늘과 함께 합한다. 맑되 박잡하거나, 탁하되 순수함을 타고난 자는 중인(中人)이 되니, 중인은 하늘의 이치에 대해, 하나는 지(智)는 남음이 있으나 행이 부족하고, 하나는 지는 부족함이 있으나 행이 남음이 있어서, 비로소 하늘에 합한 것도 있고 어긴 것도 있다. 그 탁하고 박잡함을 얻은 것은 하우(下愚)가 되니, 하우는 하늘의 이치를 아는 것이 이미 어둡고 행하는 것이 또 간사하여 멀리 하늘과는 어그러진다. 이것이 사람이 타고난 것에 대체로 세 등급이 있게 된 까닭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와 기는 서로 필요로 하여 없는 곳이 없기 때문에, 비록 상지의 마음이라도 능히 형기(形氣)의 발하는 것이 없을 수 없고, 이(理)가 상지라고 하여 더 풍족하게 있고 하우라 하여 더 적게 있지 않으니, 비록 하우의 마음이라도 천리의 본연은 없을 수 없다. 그러므로 기질의 아름다운 것은 상지라도 감히 스스로 믿지 못하는 것이며, 천리(天理)의 본연에 대해서는 하우(下愚)라도 마땅히 스스로 힘써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우(禹)는 큰 성인인데도 순(舜)이 반드시 유정유일(惟精唯一)로써 힘쓰게 하였고, 안자는 큰 현인인데도 공자가 반드시 박문 약례(博文約禮)로써 지도한 것이다. 대학은 배우는 자의 일인데, 증자는 반드시 격치 성정(格致誠正)을 지행(志行)의 가르침으로 삼고, 중용은 가르치는 자의 일인데, 자사는 반드시 택선 고집(擇善固執)을 지행(知行)의 방법으로 삼았다. 그러면 학문의 도는 기질의 아름답고 악한 것에 매이지 않고, 오직 천리(天理)를 아는 것이 밝은가 밝지 못한가, 천리를 행하는 것이 지극한가 지극하지 못한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였다.
제10절 존양(存養)과 성찰(省察)에 대한 논의
묻기를,
“마음속[心裏]의 경(敬)ㆍ존양(存養)과 정의(情意)의 성찰(省察)ㆍ경은 무엇을 말한 것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사람이 하늘의 명을 받을 때에 사덕의 이치를 갖추어, 한 몸의 주재가 되는 것은 마음이요, 사물이 마음에 감촉되어 선ㆍ악의 기미를 따라 한 마음의 쓰임이 되는 것은 정과 의(意)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이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때에 반드시 존양하여서 그 본체(本體)를 보존하고, 정의가 발할 때에는 반드시 성찰하여 그 쓰는 것을 바르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음의 이치가 호호(浩浩)하여 잡을 수 없으며, 혼혼(渾渾)하여 측량할 수 없으니, 만약 경(敬)을 첫째로 삼지 않으면, 어찌 능히 그 성을 보존하고 그 본체를 세우겠는가. 이 마음의 발하는 것이 미묘하여 가는 털끝을 살피기보다 어렵고, 위태하여 구덩이를 밟기보다 어려울 것이니, 진실로 경을 첫째로 삼지 않으면 또 어찌 그 기미를 바르게 하고, 그 쓰임에 통달할 수 있겠는가. 이러므로 군자의 학문은 마땅히 이 마음이 발하지 않았을 때에는 반드시 경을 주로 하여 존양의 공부를 더해야 하고, 이 마음이 이미 발했을 때에는 반드시 성찰(省察)의 공부를 더해야 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경학(敬學)이 처음이 되고 끝이 되며 본체와 쓰임에 관통하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이 그림의 절실한 뜻이 더욱 여기에 있다.”
하였다.
위의 도설은 계축년(1553, 명종8)에 선생이 서울에 있을 때 정공(鄭公)과 함께 참작하여 고쳐서 완성한 것이니, 그 정묘한 곳은 다 선생이 비로소 발명하였다. 을묘년(1555) 봄에 남으로 돌아와서 깊이 생각하며 수정한 곳이 매우 많다. 그러므로 초본(初本)과는 그 이동이 매우 많다. 지금 삼가 수정한 것으로 인하여 전해 쓰기를 앞에서와 같이 하였다.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그 의(義)는 이미 〈도설〉에 갖추어져 있고, 그중에 제10절은 있어도 가하고, 없어도 가하다.” 하였다. 무오년(1558) 봄에 조목(趙穆) 사경(士敬)은 쓴다.
[주D-001]금수는 …… 것 : 사람은 타고난 기질이 바르고, 동물과 식물은 치우쳤으나 그중에서도 동물은 식물에 비하면 정(正)이며, 식물은 동물에 비하여 편(偏)이 된다. 그것은 동물은 지각(知覺)이 있으나 식물은 지각이 없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