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기는 소씨(蘇氏)의 딸이며, 상(商)나라 주왕(紂王) 자신(子辛)의 총비(寵妃)였다. 소(蘇)나라는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제원현(濟源縣)이다. 상나라 왕 자신(子辛)은 상나라 최후의 왕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말을 잘 했으며 왕이 된 후에는 대외적으로 많은 전쟁을 일으켰고, 나라 안으로는 잔혹한 압제 정치를 하였다. 뿐만 아니라 사치와 음탕한 것을 즐겼으며, 처첩들이 가득하였음에도 끊임없이 미녀들을 찾아오도록 시켰다.
당시 소(蘇)나라는 주왕(紂王)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이를 이유로 주왕은 소나라를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국력이 약한 소나라는 하는 수 없이 소나라 미인 달기를 주왕에게 바쳤다. 주왕은 은행알과 같은 눈에 복숭아 같은 뺨, 하얀 피부의 미인인 달기에 빠졌다. 주왕은 하루종일 달기를 끼고 술을 마시고 노래를 하며 즐기기만을 일삼았다.
그 당시 달기는 도화장(桃花妝)이라는 화장을 하였는데, 이것은 여러 가지 꽃잎을 짜서 그 액을 얼굴에 바르는 화장법, 즉 지금은 연지(燕脂)라고 하는 것이었다. 여인들이 사용하는 연지의 역사는 대략 달기가 도화장(桃花妝)을 했던 이 때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달기는 상의 주왕을 유혹하여 잔혹한 형벌로 생사람을 다 죽게 만들어 놓고 그런 장면을 보면서 자신의 성욕을 자극시켰다. 그녀의 이런 흉악하면서도 음탕한 행위는 바로 변태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 달기와 주왕에 대한 이야기는 유명한 역사연의(歷史演義) 소설 봉신방(封神榜)에 상세하게 전해오고 있다.
기원전 11세기에 있었던 그들의 이야기는 그보다 수백년전에 있었던 하 걸왕과 말희의 이야기와 너무도 흡사하다. 달기와 주왕이 상나라를 패망의 길로 이끌었다고 한다면 걸왕과 말희는 하나라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주왕은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고 아홉마리 소를 뒤로 잡아달길 수 있도록 힘이 장사였으며, 그의 눈과 귀도 매우 예민하여 상당한 분별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하고 성격이 포악하였다. 특히 그는 달기를 왕비로 맞은 후부터 그런 성격이 더욱 심하게 드러나 마침내 자신의 손으로 상왕조를 파멸시키기에 이르른다.야사는 주왕이 왜 달기에게 빠져들 수 밖에 없었는지 전하고 있다. 즉 달기는 외형적인 미모를 훨씬 능가하는 다른 어떤 성적 매력이 있었으며, 그 비밀은 바로 그녀의 성기에 있었다고 한다. 그녀의 성기는 넓어졌다 좁아졌다 하고 질은 겹겹의 주름으로 이루어져 있어 남자의 성기가 안에 들어오면 움직이지 않아도 저절로 액체를 분비하여 꿈틀거리면서 빨아들이고 꽉 죄기때문에 주왕의 쾌감이 극에 달하여 정사는 안중에 두지 않게 했다는 것이다. 이런 야사에 따르자면 달기의 성기는 명기중의 명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왕은 달기를 처음 본 순간 첫눈에 반하여 그녀를 침실로 데려갔으며 달기의 특수한 신체구조는 주왕을 극도로 흥분시켰다. 이날 이후부터 주왕은 다른 궁녀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정사도 내팽긴 채 오직 달기에게만 빠져버리고 만다. 달기는 왕비에 책봉된 후에 주왕이 자신의 미색에 현혹되어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서서히 황음무도한 본색을 드러내게 된다. 그녀는 먼저 웅장하고 화려한 궁궐을 지어달라고 요구하고, 모든 난간과 기둥을 마노와 옥으로 장식하게 하였다.주왕은 달기의 환심을 사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백성들을 가혹하게 착취하여 경비를 조달하고, 10만여명의 장인들을 불러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사를 시켰다. 7년이 흘러 길이 3리, 높이 1천척, 대궁전 100여개, 소궁전 72개에 이르는 호화로운 궁궐이 완성되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녹대이다. 주왕과 달기는 밤낮으로 이 녹대에서 꿈같은 세월을 보내며 짙은 유희를 즐겼다. 역사에서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즐긴 모습을 장야음(長夜飮)이라고 했다. 당시 대신 기자(箕子)는 "대왕의 측근들조차 모두 왕조의 멸망을 모르지만 나만은 그것을 안다. 나의 처지가 실로 너무 위태롭구나!"라고 탄식하였다.
달기는 음욕을 즐기는 것 이외에도 잔혹한 형벌로 생사람을 확살하는 장면을 즐겼다. 그녀는 주왕과 함께 여러가지 무시무시한 형벌을 고안해냈다.처음에 상나라의 창시자인 탕왕은 하나라 걸왕의 형법이 너무 잔혹하여 그것을 폐지하고 비교적 경미한 형벌로 죄인들을 처벌했다. 그러나 주왕은 선제의 법도가 너무 가볍다고 여겨 특별히 대형 청동 인두를 제조하였다. 그러고는 형을 받은 죄수들에게 자신의 손으로 붉게 달아 오른 인두를 자신의 벌거벗은 몸위에 놓고 지지게 하였다.이렇게 잔인한 협벌에도 달기는 시시하다고 여겨 주왕에게 대형 구리기둥을 주조하도록 건의하였다. 거기에 씨벌겋게 타오르는 숯불을 넣고 죄수를 벌거벗겨 숯불위에 서서 붉게 달아오르는 구리기둥을 꽉 붙들게 하였다.이것이 바로 무시무시한 포락지형(포烙之刑)이다. 이런 처참한 상황은 달기의 변태적 성욕을 자극시켰다. 죄수가 포락지형을 받고 팔딱팔딱 뛰면서 재로 변할 때마다 그녀는 성에 굶주린 듯한 신음을 토해내며 주왕의 품에서 몸부림쳤다. 일종의 사디즘적 변태성욕자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을 본 후 섹스를 하면 천부적인 성기능의 몇배나 역량을 발휘하여 주왕을 만족시켜 주었기에 주왕은 이 형벌 을 더욱 자주 이용하여 달기를 흥분시켰다. 이 포락지형을 즐기는 것이 점차 지겨워지자 달기는 고심 끝에 돈분(돈盆)이라는 형을 고안해냈다. 녹대 부근에 구덩이를 파서 수많은 독사와 전갈을 집어넣고 죄수들을 발가벗겨 안으로 밀어넣게 하였다. 달기는 주왕과 함께 녹대 위에서 잔치상을 처려 놓고 그 구덩이 안에서 독사와 전갈에게 죽어가며 몸부림을 치는 장면을 구경하면서 즐겼다. 바로 근처에 침실을 마련해 놓고 달기가 흥분하면 그리로 데려가 환락에 빠져들곤 했다. 당시에 구후(九侯), 악후(鄂侯), 서백(西伯 : 상 멸망후 주나라 문왕)이라는 삼공이 있었다. 주왕은 구후의 딸이 달기에 필적할 정도로 용모가 아름답다 듣고는 강제로 데려와 후궁에 앉힌 다음 그녀와 달기의 옷을 벗겨 차례로 비교해 보았다. 그녀의 용모에 흡족한 주왕은 비에 책봉했지만 정숙했던 구후의 딸은 황음무도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주왕의 노여움을 사 사형에 처해지게 된다.이 소식은 달기를 자극하여 또 다른 독랄한 형벌을 고안하게 한다. 미꾸라지를 여러마리 잡아 구후의 딸을 벗기고는 큰 대자로 침대 기둥에 묶어 놓고 그녀의 음부에 집어넣게 했다. 미꾸라지는 습하고 따뜻한 곳을 좋아하는 지라 그녀의 음부속으로 파고들어가 그녀를 처참히 죽어가게 하였다. 주왕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자 구후를 붙잡아 살을 갈갈기 토막내어 버렸다. 악후도 몇번이나 충언을 하다가 결국 처형당했다. 서백 희창은 이 소식을 듣고 하늘을 우러러 세번 탄식한다. 그는 기산(崎山)에서 비밀리에 군사를 훈련시키며 폭군을 토벌할 준비를 하였다.주왕은 달기와 임산부의 배를 갈라 성별 내기를 하거나 공신 비간의 가슴을 갈라 심장을 꺼내는 등 잔인한 행위를 일삼으며 잔인무도한 행각으로 세월을 보냈다.기원전 1057년 서백 희창의 아들 희발(姬發 주나라 무왕)과 강태공이 대군을 거느리고 상나라의 수도 조가(朝歌)를 공격하자 주왕은 녹대 아래 불길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하지만 달기는 자신이 주왕을 홀렸기에 상나라가 멸망한 것이 아니냐며 큰소릴를 치며 떳떳해했다. 수차례 망나니의 참수가 실패로 끝나고 화살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서야 상나라와 악녀 달기의 시대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 [출처] 달기(妲己) _ 악녀의 화신|작성자 풍월주인
얼마후 동분 좌우로 연못을 파달라고 한 다음 왼쪽에는 술지게미를 쌓은 작은 언덕을 만들고 거기에 나무를 심게 하였다. 그 나무에 고기덩어리를 걸어 놓고 육림(肉林)이라 하였으며 오른쪽 연못에는 술을 가득 채워놓고 주해(酒海)라 하였다. 궁녀와 환곤을 불러모아 나체로 씨름을 하게 한다음 승자는 주해육림에 들어가 마음껏 먹고 마시게 하고 패자는 돈분에 집어 넣는 벌을 내렸다.
달기에 관한 내용은 봉신방에서 언급한 바에 따르면 과장된 내용이 너무도 많다. 그녀의 친가 쪽 득세가 부각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은과 상의 갑골문자 유물 어디에서도 달기에 관한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달기의 죽음에 대해서도 사기의 저자 사마천(사마천)은 주왕이 녹대에서 뛰어내린 후 주 무왕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세설신어(世說新語)에서는 공융(孔融)의 말을 인용하여 주나라 군대가 조가에 진입한 후에 주공이 달기를 취하여 시녀로 삼았다고 한다. 이것은 주나라 조가 진입후에 달기를 비방하는 말이 없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있는 자료이다.어찌되었거나 달기는 뒤에 일어난 왕조에 의해 역사적으로 희생된 인물일 가능성이 크지만 지금까지도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여전히 경국지색, 악녀의 화신이자 사디즘의 원조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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