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태서지 |
권수제 |
매헌선생문집(梅軒先生文集) |
판심제 |
매헌선생문집(梅軒先生文集) |
간종 |
목판본 |
간행년 |
미상(1909년 이후 간행) |
권책 |
연보(年譜), 원집(原集) 3권, 부록(附錄) 합 2책 |
행자 |
10행 18자 |
규격 |
18.4×16.4(cm) |
어미 |
上下二葉花紋魚尾 |
소장처 |
국립중앙도서관 |
소장도서번호 |
古3648-文11-9 |
총간집수 |
한국문집총간 속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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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성명 |
금보(琴輔) |
생년 |
1521년(중종 16) |
몰년 |
1584년(선조 17) |
자 |
사임(士任) |
호 |
매헌(梅軒), 백률당(栢栗堂), 백당(栢堂) |
본관 |
봉화(奉化) |
특기사항 |
이황(李滉)의 문인. 오수영(吳守盈), 이숙량(李叔樑) 등과 교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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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도 |
기사전거 : 家狀(琴是養 撰), 琴元福碣文(琴輔 撰), 奉化琴氏世譜 등에 의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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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력 |
왕력 |
서기 |
간지 |
연호 |
연령 |
기사 |
중종 |
16 |
1521 |
신사 |
正德 |
16 |
1 |
4월, 奉化 槐村里에서 태어나다. |
중종 |
30 |
1535 |
을미 |
嘉靖 |
14 |
15 |
형 琴軔과 楓井寺에서 독서하다. |
중종 |
35 |
1540 |
경자 |
嘉靖 |
19 |
20 |
眞城李氏 李寅의 딸과 혼인하다. |
중종 |
36 |
1541 |
신축 |
嘉靖 |
20 |
21 |
〈趙普論〉을 짓다. |
중종 |
38 |
1543 |
계묘 |
嘉靖 |
22 |
23 |
溫溪에 거처하며 退溪 李滉에게 수업을 받다. |
중종 |
39 |
1544 |
갑진 |
嘉靖 |
23 |
24 |
가을, 龍壽寺에서 독서하다. |
명종 |
1 |
1546 |
병오 |
嘉靖 |
25 |
26 |
4월, 사마시에 합격하다. |
명종 |
3 |
1548 |
무신 |
嘉靖 |
27 |
28 |
丹陽 郡守 이황을 찾아뵙고 「中庸」과 「大學」에 대해 질의하다. ○ 龜潭, 島潭을 유람하다. |
명종 |
4 |
1549 |
기유 |
嘉靖 |
28 |
29 |
小白山을 유람하고 白雲洞書院에 머물다. |
명종 |
8 |
1553 |
계축 |
嘉靖 |
32 |
33 |
泮宮에서 月川 趙穆과 講討하다. |
명종 |
10 |
1555 |
을묘 |
嘉靖 |
34 |
35 |
3월, 淸吟石을 유람하다. |
명종 |
11 |
1556 |
병진 |
嘉靖 |
35 |
36 |
이황의 거처 寒栖庵 남쪽에 집을 짓고, 軒 앞에 매화를 심고 ‘梅軒’으로 호를 삼다. ○ 「朱子書節要」를 繕寫하다. ○ 11월, 溪堂의 司馬會에 참석하여 朱子書를 읽다. |
명종 |
12 |
1557 |
정사 |
嘉靖 |
36 |
37 |
「四書質疑」를 짓다. |
명종 |
14 |
1559 |
기미 |
嘉靖 |
38 |
39 |
봄, 慶州를 유람하다. |
명종 |
15 |
1560 |
경신 |
嘉靖 |
39 |
40 |
4월, 趙穆, 金富儀와 이황을 모시고 孤山을 유람하다. ○ 「心經」, 「近思錄」을 읽고 「心近講義」를 짓다. ○ 겨울, 陶山에 머물다. |
명종 |
17 |
1562 |
임술 |
嘉靖 |
41 |
42 |
「武夷志」를 읽고, 〈九曲櫂歌〉에 차운하다. |
명종 |
19 |
1564 |
갑자 |
嘉靖 |
43 |
44 |
봄, 龍壽寺를 유람하다. ○ 4월, 李文樑, 琴蘭秀, 金富倫 등과 이황을 모시고 淸凉山을 유람하다. |
명종 |
20 |
1565 |
을축 |
嘉靖 |
44 |
45 |
이황에게 「啓蒙問目」을 올리다. |
명종 |
21 |
1566 |
병인 |
嘉靖 |
45 |
46 |
3월, 松巖 權好文을 방문하다. |
명종 |
22 |
1567 |
정묘 |
隆慶 |
1 |
47 |
易東書院의 役事를 감독하다. |
선조 |
1 |
1568 |
무진 |
隆慶 |
2 |
48 |
4월, 鄭惟一과 川南을 유람하다. ○ 7월, 조카 琴胤古를 양자로 삼다. ○ 11월, 모친상을 당하다. |
선조 |
2 |
1569 |
기사 |
隆慶 |
3 |
49 |
1월, 부친상을 당하다. |
선조 |
3 |
1570 |
경오 |
隆慶 |
4 |
50 |
12월, 이황을 곡하다. |
선조 |
4 |
1571 |
신미 |
隆慶 |
5 |
51 |
2월, 집안의 화재로 이황이 준 〈敬齋箴圖〉와 자신이 지은 「四書質疑」만 겨우 구하다. ○ 6월, 동문들과 역동서원에서 「退溪集」을 裒集하다. |
선조 |
5 |
1572 |
임신 |
隆慶 |
6 |
52 |
4월, 역동서원에서 이황의 日錄을 수정하다. ○ 具鳳齡, 鄭惟一, 柳成龍 등과 浮石寺를 유람하다. |
선조 |
6 |
1573 |
계유 |
萬曆 |
1 |
53 |
3월, 李叔樑, 琴蘭秀 등과 廓然亭에서 講信하다. ○ 11월, 伊山書院에 이황의 위판을 봉안하다. |
선조 |
8 |
1575 |
을해 |
萬曆 |
3 |
55 |
봄, 栢栗堂을 짓다. |
선조 |
9 |
1576 |
병자 |
萬曆 |
4 |
56 |
吳守盈, 趙穆, 琴應夾 등과 愛日堂에서 모임을 갖다. |
선조 |
10 |
1577 |
정축 |
萬曆 |
5 |
57 |
2월, 이황의 墓碣銘을 쓰다. |
선조 |
11 |
1578 |
무인 |
萬曆 |
6 |
58 |
여름, 淸吟石을 유람하다. |
선조 |
12 |
1579 |
기묘 |
萬曆 |
7 |
59 |
아들 琴胤古를 조목에게 보내 수업받게 하다. |
선조 |
16 |
1583 |
계미 |
萬曆 |
11 |
63 |
11월, 조목이 내방하다. |
선조 |
17 |
1584 |
갑신 |
萬曆 |
12 |
64 |
3월 7일, 졸하다. ○ 9월, 禮安 龍頭山에 장사 지내다. | 기사전거 : 年譜, 家狀(琴是養 撰), 行狀(許傳 撰) 등에 의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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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찬 및 간행 |
저자는 조선 중기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특히 글씨에 뛰어나 李叔樑, 吳守盈과 ‘宣城三筆’로 칭해졌다. 저자의 저서로는 「四書質疑」, 「心近講義」, 「四書記問」, 「四禮正變」, 「嘉善彙編」 등과 시문이 있었는데 집안의 화재로 「四書質疑」만 남고 대부분 소실되었다. 저자의 시문은 생전에 화재로 많이 소실되었으며, 사후에도 손자 琴是養이 찬한 家狀 외에는 따로 시문을 정리하지 않아 대부분 산일되었다. 그 후 저자의 10세손 琴佑烈(1824~1904)이 산일되고 남은 저자의 시문과 관계 기록을 陶山의 草本과 여러 문중의 古蹟에서 수집하는 한편, 許傳(1797~1886)에게 받은 행장과 李彙載(1795~1875)에게 받은 묘갈명 등 부록 문자를 모아 1891년에 4권 2책으로 편차해 두었다. 이를 嗣孫 琴祜烈(1853~1926)이 1909년에 金鶴鎭의 발문을 받아 목판으로 간행하였는데, 그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초간본》 이 본은 국립중앙도서관(古3648-文11-9),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D1-A684),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장서각(D3B-529),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저자의 10세손 琴佑烈이 수집 편차한 것을 사손 琴祜烈이 金鶴鎭의 발문을 받아 저자의 아들 琴胤古의 墓碣銘을 附集하여 목판으로 간행한 초간본으로 국립중앙도서관장본이다. 이 중 遺墨(3판)과 저자의 아들 琴胤古의 松坡公碣銘(3판)은 본 총간의 편집 방침에 따라 수록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기사전거 : 序(李彙寧 撰), 跋(金鶴鎭ㆍ琴書述ㆍ琴佑烈 撰), 行狀(許傳 撰) 등에 의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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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과 내용 |
본집은 年譜, 原集 3권, 附錄 합 2책이다. 권수에 李彙寧이 지은 序文, 그 뒤에 年譜, 目錄이 있다. 권1은 詩(30題), 賦(1)이다. 〈淸吟石謹次退溪先生韻〉은 李滉이 지은 〈淸吟石〉 시에 차운하여 봄의 경치를 읊은 4수의 시이다. 〈誠敬吟〉은 誠으로 천 가지 위선을 소멸시키고, 敬으로 백 가지 삿됨을 이긴다며 誠敬 工夫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다. 〈東京懷古〉는 慶州를 유람하고 황폐해진 古都의 정경을 읊은 것이다. 〈伊山書院奉安退溪先生……〉은 이산서원에 이황을 봉안하고 돌아오는 길에 李安道, 金隆 등과 巴寺에 묵으면서 스승을 생각하며 비감한 심정에 대해 읊은 것이다. 만시는 李仲樑, 金富儀, 李寯에 대한 것이다. 〈陳情賦〉는 이황이 졸한 뒤에 심경을 읊은 것으로, 기박한 명을 받고 재주도 둔하게 태어나 반백 년을 살아온 인생 여정을 읊고 聖門에 어긋나지 않게 살기를 바라는 내용이다. 권2는 書(7), 祭文(3), 碣文(2), 雜著(5)이다. 서는 李滉과 奇大升이 나눈 四七辨의 編次에 대해 金誠一ㆍ李安道와 논의한 〈與金士純李逢原論先生與存齋……〉, 尊德性道問學에 대해 琴應夾과 논한 〈答琴夾之〉 등이다. 제문은 李滉, 金富儀, 李國樑에 대한 것이다. 갈문은 琴元福의 碣文抄略, 성균 진사 南瑞龍의 墓碣陰記이다. 잡저는 宋의 개국 공신으로 太祖를 도와 천하를 평정하고, 太宗을 도와 태평 시대를 이룩한 趙普에 대해 논한 〈趙普論〉, 陶山의 정경을 기록한 이황의 〈陶山記〉에 주석을 붙인 〈陶山記考證〉, 禹倬을 모신 易東書院을 세운 전말을 기록한 〈易東書院記事〉 등이다. 권3은 雜著(1)이다. 저자의 저술 가운데 산일되지 않고 남아 있는 「四書質疑」로 1556년 寒栖庵 곁에 거처하며 이황에게 강의를 받고 問難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중용에 대한 설명에는 體用圖가 첨부되어 있다. 부록은 師友寄贈(10), 琴是養이 지은 家狀, 許傳이 지은 行狀, 琴 이 지은 墓誌銘, 李彙載가 지은 墓碣銘이다. 사우기증은 이황이 저자가 寒栖庵 남쪽에 집을 지은 것을 보고 준 시를 비롯하여 趙穆, 吳守盈, 琴蘭秀 등이 저자의 시에 차운한 시, 조목이 저자를 애도한 시 등이다. 권말에 1909년에 金鶴鎭이 지은 발, 1853년에 琴書述이 지은 발, 1891년에 琴佑烈이 지은 識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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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 김은정(金恩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