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력 |
서기 |
간지 |
연호 |
연령 |
기사 |
중종 |
25 |
1530 |
경인 |
嘉靖 |
9 |
1 |
2월 13일, 禮安縣 淨羅里에서 태어나다. |
중종 |
36 |
1541 |
신축 |
嘉靖 |
20 |
12 |
靑溪 金璡에게 수학하다. |
명종 |
1 |
1546 |
병오 |
嘉靖 |
25 |
17 |
1월, 모친상을 당하다. |
명종 |
4 |
1549 |
기유 |
嘉靖 |
28 |
20 |
겨울, 具鳳齡 등과 淸凉山 上仙庵에서 독서하다. |
명종 |
5 |
1550 |
경술 |
嘉靖 |
29 |
21 |
橫城趙氏 趙大春의 딸과 혼인하다. ○ 趙穆의 권유로 李滉의 문하에서 수업하다. |
명종 |
7 |
1552 |
임자 |
嘉靖 |
31 |
23 |
11월, 조목, 구봉령 등과 玄沙寺에서 修契하다. |
명종 |
8 |
1553 |
계축 |
嘉靖 |
32 |
24 |
10월, 장남 琴憬이 태어나다. |
명종 |
9 |
1554 |
갑인 |
嘉靖 |
33 |
25 |
봄, 惺惺齋를 짓자 이황이 扁額을 써 주다. |
명종 |
10 |
1555 |
을묘 |
嘉靖 |
34 |
26 |
여름, 조목과 성성재에서 글을 읽다. |
명종 |
11 |
1556 |
병진 |
嘉靖 |
35 |
27 |
4월, 조목과 月蘭庵에서 독서하고, 「朱子書節要」를 繕寫하다. |
명종 |
12 |
1557 |
정사 |
嘉靖 |
36 |
28 |
8월, 차남 琴 이 태어나다. |
명종 |
13 |
1558 |
무오 |
嘉靖 |
37 |
29 |
4월, 易東書院 터로 鰲潭을 추천하여 이황을 모시고 보러 가다. ○ 가을, 普賢庵에서 李德弘과 머물다. |
명종 |
14 |
1559 |
기미 |
嘉靖 |
38 |
30 |
봄, 이덕홍이 성성재에서 한 달간 유숙하다. |
명종 |
15 |
1560 |
경신 |
嘉靖 |
39 |
31 |
11월, 星州에서 黃俊良과 吳健을 만나다. |
명종 |
16 |
1561 |
신유 |
嘉靖 |
40 |
32 |
鄭琢과 矗石樓를 유람하다. ○ 4월, 雷龍堂에서 曺植을 뵙다. ○ 가을, 생원시에 합격하다. |
명종 |
17 |
1562 |
임술 |
嘉靖 |
41 |
33 |
4월, 3남 琴愷가 태어나다. |
명종 |
19 |
1564 |
갑자 |
嘉靖 |
43 |
35 |
가을, 日洞精舍(孤山亭)를 짓다. |
선조 |
1 |
1568 |
무진 |
隆慶 |
2 |
39 |
1월, 鄭逑가 찾아오다. |
선조 |
3 |
1570 |
경오 |
隆慶 |
4 |
41 |
12월, 이황을 곡하다. |
선조 |
4 |
1571 |
신미 |
隆慶 |
5 |
42 |
1월, 4남 琴恪이 태어나다. ○ 6월, 易東書院에서 퇴계의 문집을 裒集하다. |
선조 |
5 |
1572 |
임신 |
隆慶 |
6 |
43 |
4월, 金富弼 등과 浮石寺를 유람하다. |
선조 |
7 |
1574 |
갑술 |
萬曆 |
2 |
45 |
〈退溪先生易名私議〉를 짓다. |
선조 |
8 |
1575 |
을해 |
萬曆 |
3 |
46 |
5월, 부친상을 당하다. |
선조 |
10 |
1577 |
정축 |
萬曆 |
5 |
48 |
8월, 일동정사로 柳夢鼎이 찾아오다. ○ 10월, 김부필을 곡하다. |
선조 |
12 |
1579 |
기묘 |
萬曆 |
7 |
50 |
4월, 遺逸로 齊陵 參奉이 되다. ○ 8월, 강화도를 유람하다. |
선조 |
13 |
1580 |
경진 |
萬曆 |
8 |
51 |
2월, 박연폭포를 유람하고 崧陽書院의 鄭夢周 사당에 참배하다. |
선조 |
14 |
1581 |
신사 |
萬曆 |
9 |
52 |
11월, 集慶殿 參奉이 되다. |
선조 |
15 |
1582 |
임오 |
萬曆 |
10 |
53 |
8월, 鮑石亭과 利見臺를 유람하다. ○ 겨울, 玉山書院에서 李彦迪의 글을 講討하다. |
선조 |
16 |
1583 |
계미 |
萬曆 |
11 |
54 |
2월, 敬陵 參奉이 되다. ○ 李珥가 찾아오다. ○ 7월, 金誠一과 東西 分黨에 관한 館學儒疏를 논하다. |
선조 |
17 |
1584 |
갑신 |
萬曆 |
12 |
55 |
〈讀花潭集辨〉을 짓다. ○ 8월, 李安道를 곡하다. |
선조 |
18 |
1585 |
을유 |
萬曆 |
13 |
56 |
2월, 金宇顒이 찾아오다. ○ 12월, 長興庫 奉事가 되다. |
선조 |
19 |
1586 |
병술 |
萬曆 |
14 |
57 |
7월, 具鳳齡을 곡하다. |
선조 |
20 |
1587 |
정해 |
萬曆 |
15 |
58 |
12월, 長興庫 直長이 되다. |
선조 |
21 |
1588 |
무자 |
萬曆 |
16 |
59 |
8월, 4남 琴恪이 죽다. |
선조 |
22 |
1589 |
기축 |
萬曆 |
17 |
60 |
6월, 掌隷院 司評이 되다. |
선조 |
23 |
1590 |
경인 |
萬曆 |
18 |
61 |
3월, 통신사 김성일을 전별하다. ○ 4월, 사직하고 귀향하다. |
선조 |
25 |
1592 |
임진 |
萬曆 |
20 |
63 |
왜란이 일어나자 金垓와 함께 鄕兵을 모으다. |
선조 |
26 |
1593 |
계사 |
萬曆 |
21 |
64 |
4월, 김성일을 곡하다. ○ 6월, 守城將이 되다. ○ 8월, 安東에서 體察使 柳成龍을 만나다. |
선조 |
27 |
1594 |
갑오 |
萬曆 |
22 |
65 |
申之悌와 청량산 산성을 살펴보고 수축하게 하다. |
선조 |
29 |
1596 |
병신 |
萬曆 |
24 |
67 |
星州 判官과 翊衛司 翊衛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
선조 |
30 |
1597 |
정유 |
萬曆 |
25 |
68 |
장남 琴憬을 郭再佑가 있는 火旺山城으로 보내다. ○ 4월, 天淵臺에서 체찰사 李元翼을 만나다. ○ 守城將이 되다. |
선조 |
31 |
1598 |
무술 |
萬曆 |
26 |
69 |
鄕約을 講修하여 민심을 수습하다. ○ 韓浚謙이 찾아오다. |
선조 |
32 |
1599 |
기해 |
萬曆 |
27 |
70 |
3월, 奉化 縣監이 되어 향약을 시행하다. |
선조 |
33 |
1600 |
경자 |
萬曆 |
28 |
71 |
玉淵亭에서 柳成龍을 만나다. ○ 5월, 도산에서 「퇴계집」 간행을 고하다. ○ 8월, 사직하고 귀향하다. |
선조 |
37 |
1604 |
갑진 |
萬曆 |
32 |
75 |
2월 13일, 졸하다. ○ 8월, 白雲山에 장사 지내다. |
선조 |
38 |
1605 |
을사 |
萬曆 |
33 |
― |
宣武 原從功臣에 추록되고, 左承旨에 추증되다. |
숙종 |
35 |
1709 |
기축 |
康熙 |
48 |
― |
禮安 東溪祠에 봉안되다. |
순종 |
3 |
1909 |
기유 |
隆熙 |
3 |
― |
10대손 琴鼎基 등이 활자로 문집을 인행하다. | 기사전거 : 年譜, 墓碣銘(柳根 撰), 遺事(琴書述 撰), 本集內容 등에 의함 |
저자는 禮安 출신의 학자로 손위 처남인 月川 趙穆의 권유로 退溪 李滉의 문하에 들었고 이황과는 姻戚 관계에 있다. 學行을 겸한 청빈한 선비이자 자연을 완상하는 감성을 아우른 인물로 임진왜란 때에는 守城將으로서 향병을 모으고 군량을 조달하는 등 국난 극복에 앞장서는 실천적인 삶을 살았다. 저자의 시문은 사후 200여 년이 지나도록 간행되지 못하다가, 8대손 琴詩述(1783~1851)과 琴書述(1791~1872) 형제 대에 이르러 「퇴계집」 등 여러 문집에서 저자의 시문을 수집 정리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0대손 琴鼎基와 琴岱基가 저자의 시문을 다시 수집하고, 연보 및 부록 등을 증보 합편하여 1909년에 활자로 문집을 인행하였다.《초간본》 이 본은 규장각(古3428-719), 국립중앙도서관(우촌古3648-文11-3),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晩松D1-A1896)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0대손 琴鼎基 등이 1909년에 활자로 인행한 초간본으로 규장각장본이며, 영인 저본의 권2는 板次 ‘二’가 중복되어 있으며, 권4의 제3판은 卷次가 ‘二’로 誤記되어 있다.
기사전거 : 序(金道和 撰), 跋(李晩燾ㆍ琴鼎基 撰), 墓碣銘(柳根 撰), 遺事(琴書述 撰) 등에 의함 |
본집은 4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두에는 1908년에 金道和가 지은 서문과 목록이 있다. 권1은 詩 90題로 시체와 관계없이 저작 연대순으로 수록되어 있다. 1553년에 「心經」을 읽고 이황에게 올린 칠언시를 시작으로 金守一, 裵三益 등과 교유한 시, 두류산과 가야산을 유람하면서 쓴 시, 日洞精舍를 소재로 한 시, 통신사 金誠一을 전송하는 送詩 등으로 대부분 師友간의 贈答詩이다. 권2는 書(23)와 잡저(10)이다. 서는 이황과 조목, 金就礪, 김성일, 金富倫, 南致利에게 보낸 것이다. 〈上退溪先生問目〉은 상례와 제례에 관해 질의하고 답한 것이고, 조목에게는 살가운 내용 등이 담긴 12편이 있는데 그중 〈答趙士敬〉은 기축옥사에 연루된 지인들에 대해 염려하는 편지이다. 잡저는 識(5), 辨(2), 議(1) 등인데, 〈讀花潭集辨〉은 서경덕의 理氣說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으며, 〈退溪先生易名私議〉는 이황의 시호로 文, 元, 正 세 자 가운데 ‘文’이 가장 합당하다는 의견이며, 〈族契入議後識〉와 〈洞中鄕約小識〉에 붙인 조목은 奉化에서 시행한 향약의 규정이다. 권3은 記(3), 銘(2), 祭文(2), 年譜이다. 〈普賢菴壁上……〉은 淸凉山에서 정양하며 학문의 깊이를 다진 인연을 기록하였고, 〈陶山書堂營建記事〉는 1574년에 창건한 도산서원의 건축 기록이다. 명은 좌우명과 유성룡의 玉淵亭에 대한 것이다. 제문은 이황을 애도한 것인데 동문들과 연명으로 쓴 것이 1편 더 있다. 말미에 부록으로 연보가 있다. 권4는 부록으로 柳根이 지은 묘갈명, 8대손 琴書述이 지은 遺事와 봉안문, 상량문, 고유문 각 1편과 挽詞 7편, 〈孤山亭題詠〉, 〈日洞山水記〉가 수록되어 있다. 〈고산정제영〉은 이황, 李文樑, 조목 등이 저자에게 贈遺한 시 49제이다. 고산정은 일동정사의 異稱으로 自號를 ‘孤山主人’이라 할 만큼 저자가 애정을 기울인 곳이다. 〈일동산수기〉는 요절한 4남 琴恪이 16세에 지은 것으로 일동정사 주변을 묘사하고 스승 許篈에게 記文을 청하는 글이다. 권미에는 1909년에 李晩燾와 10대손 琴鼎基가 지은 跋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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