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상(佛像)에 대한 변증설

 

(고전간행회본 권 60)

 

오주연문장전산고 > 분류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3 - 석전류 2 > 석전잡설(釋典雜說)

 

일찍이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를 상고하여 보니 “천비야태이(天比夜太伊)에 절이 있다. 천비야태이는 바로 유사천(流沙川) 근처라 한다. 수달장자(須達長者) 의 가옥 부지의 7리쯤 거리에 석가당(釋迦堂) 세 채가 있으니, 바로 석가의 입상(立像)ㆍ좌상(座像)ㆍ와상(臥像)을 봉안한 곳이다. 석가당에 봉안된 불상(佛像)은 굴천대산세존(堀穿大山世尊)이 직접 만들어 봉안한 것이다.

석가당 앞에는 민가(民家)가 모인 삼거리가 있는데, 석가당 길이는 각각 2리가 되고 석가당 세 채의 총 길이는 6리 반 남짓 된다. 높이는 2리 남짓되며, 기둥의 지름은 보편적으로 1백 60칸(間)이 되고 기둥의 둘레는 5백 칸이 된다.

부처의 손가락 크기는 보편적으로 3칸이 된다. 그 불상은 본래 흙돌을 가지고 조각하여 만든 것인데, 참배하는 사람들이 금박(金箔)을 붙여 수천 년 동안을 지내왔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금불상(金佛像)이 된 것이다.

그리고 유사(流沙 인도 서북방의 사막) 시냇물 위에 좌선석(座禪石)이 있는데, 그 반석의 높이는 32정(町)으로서 유사 시냇물 위에 우뚝 서있으니, 매우 기이한 반석이다. 그 반석 위에 좌선당(座禪堂)이 있는데, 석가의 불상 하나가 봉안되었다. 그리고 반석이 있는 영취산(靈鷲山)에 다라수(多羅樹)가 매우 많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옛날에는 다라수의 잎을 사용하여 글씨를 썼었다. 영취산은 높이가 1리이다.” 하였으니, 이는 불상을 만든 시초이다.
그리고 뒷날 주죽타(朱竹坨 죽타는 청(淸) 나라 주이준(朱彝尊)의 호이다) 《일하구문(日下舊聞)》을 보니, 《설루집(雪樓集 원(元) 나라 정거부(程鉅夫)의 문집)》을 인용하여 이르기를 “석가여래(釋迦如來)는 정반왕의 태자로 갑인(甲寅) 4월 8일에 태어났으니,

이는 주 소왕(周昭王) 24년이 된다. 그런데 태어난 지 7일 만에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摩耶夫人)은 도리천(忉利天)으로 왕생(往生 이승을 버리고 저승에 가는 것)하였다. 태자는 19세에 태자의 자리를 버리고 출가(出家)하여 도(道)를 닦아 주 목왕(周穆王) 3년 계미(癸未)에 이르러 성도(成道 불도의 진리를 깨달음)하였다.
그 뒤 주 목왕 8년 신묘에 석가는 어머니 은혜를 갚으려고 마침내 도리천으로 올라가 어머니를 위하여 설법하였다. 이때 우전국왕(優塡國王) 은 석가를 보려고 하여도 볼 길이 없자, 마침내 향나무를 조각하여 불상을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목건련(目犍連)은 혹 잘못된 점이 있을까 염려하여 32명의 장인(匠人)들을 직접 거느리고 도리천으로 올라가 석가를 자세히 살펴보았는 바 이렇게 세 번이나 왕복한 뒤에야 석가의 진상대로 조각하게 되었다.
불상이 이룩되자 우전국왕 및 신하와 국민들은 불상을 석가처럼 받들었다. 이해에 석가가 도리천에서 다시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자, 그 불상이 몸소 석가를 영접하여 고개를 숙이고 도(道)를 물었다.

석가는 그 불상의 이마를 쓰다듬고 예언기(豫言記)를 주면서 이르기를 ‘내가 입적한 지 천 년 뒤에 너는 진단(震旦 인도에서 중국을 가리킨다)으로 가서 인간과 하늘을 널리 이롭게 할지어다.’ 하였다.
이리하여 그 불상이 서역국에서 1천 2백 85년, 구자국(龜茲國)에서 68년, 양주(涼州)에서 14년, 장안(長安)에서 17년, 강남(江南)에서 1백 73년, 회남(淮南)에서 3백 67년 동안 있다가 다시 강남으로 되돌아가 21년, 변경(汴京)에서 1백 76년 동안 있었다. 그리고 북쪽으로 연경(燕京)에 이르러 지금 성안사(聖安寺)에서 12년 동안 있었고, 또 북쪽으로 상경(上京) 대저경사(大儲慶寺)에 이르러 20년, 남쪽으로 연궁(燕宮) 내전(內殿)에 돌아와 54년 동안 있었다.
그런데 대원(大元) 정축(丁丑) 3월에 연궁이 불에 타자 상서성(尙書省)의 석말공(石抹公)이 불상을 성안사로 다시 봉안하여 59년 동안 있었는데, 원 세조(元世祖) 지원(至元) 12년에는 대신(大臣) 발라(孛羅) 등을 성안사로 보내어 불상을 모셔다가 만수산(萬壽山) 인지전(仁智殿)에 봉안하도록 하였고, 정축(丁丑)에는 대성수만안사(大聖壽萬安寺)를 건립하였으며, 기축(己丑)에는 인지전에서 불상을 모셔다가 만안사의 후전(後殿)에 봉안하였다.

그리고 원정(元貞 원 성종(元成宗)의 연호) 원년에는 성종(成宗)이 만안사에 친히 거둥하여 불공을 올리고 불사(佛事)를 크게 일으켰다. 우전국왕이 불상을 만든 때부터 지금 연우(延祐 청 인종(淸仁宗)의 연호) 병진(丙辰)까지 계산하면 2천 3백여 년이 된다.” 하였다.
또 《일하구문(日下舊聞)》에 《서상래의기(瑞像來儀記)》를 인용하여 이르기를 “불상을 인지전에서 만안사의 후전으로 봉안한 지 1백 40여 년 만에 경수사(慶壽寺)로 봉안하여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17년까지 1백 20여 년 동안 있다가, 경수사가 화재를 당하자 상(上)에게 표문(表聞)하여 취봉사(鷲峯寺)로 봉안하였는데, 지금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25년 정유(丁酉)까지 58년이 된다. 우전국왕이 불상을 만든 해가 주 목왕(周穆王) 12년 신묘(辛卯)에 해당되므로 지금 만력 정유년까지 계산하면 총 2천 5백 80여 년이 된다.” 하였다.
그리고 《증익아함경(增益阿含經)》에는 “우전국왕(優塡國王)은 공교한 장인(匠人)들을 선출 회합시켜 소머리만한 향나무로 불상을 만들도록 하여 공양을 올리고 새벽과 저녁으로 예배를 드렸다. 이때에 파사국왕(波斯國王)도 공교한 장인들을 소집하여 석가여래의 형체를 일러주면서 진금(眞金)으로 불상을 만들어야 한다 하고,

즉시 자마(紫磨 황금의 최상품을 말한다)로 석가여래의 불상을 만들도록 하였는데, 역시 5척 남짓되었다. 이때부터 염부제주(閻浮提洲) 안에 비로소 두 불상이 있게 되었다.
불상은 본래 서역 오랑캐들이 만든 것으로 질박하고 비루하여 사람들이 공경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 조각하여 색칠한 불상은 대옹(戴顒)에게서부터 시작되었다. 대옹이 일찍이 불상 하나를 조각하여 휘장 안에 숨겨 놓고 남들에게 잘된 점과 잘못된 점의 감정을 받아 잘못된 데는 고쳐 가면서 공력을 들인 지 10년 만에 그 불상이 비로소 성취되었다.”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高句麗)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에 부도(浮屠 중을 말한다) 혜순(惠順)이 부진(苻秦 부홍(苻洪)이 세운 진(秦) 나라)에서 와서 이불란사(伊佛蘭寺)를 창건하였으니, 이는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처음이다. 그렇다면 불상도 그때에 처음 만들어졌을 것이다.
내가 사물의 시초와 분류를 따지는 벽성이 있기 때문에 부질없이 이렇게 기록하여 둔다. 가령 불상의 내력에 대하여 오늘날 이른바 사문(沙門 중의 별칭)에게 질문하면, 필시 우물우물하며 분명히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만약 우리 공자(孔子)의 성상(聖像)에 대하여 오늘날 선비들에게 질문해도, 그 내력의 시말(始末)을 자세히 말할 자가 역시 적을 터이니, 아, 어찌 선비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수달장자(須達長者) : 석존(釋尊)과 같은 때 사위성(舍衛城)에 살던 부호(富豪). 기원정사(祇園精舍)를 지어 석존에게 바쳤다.
우전국왕(優塡國王) : 우전국의 임금. 그는 석존을 무척 사모했는데, 석존이 삼십삼천(三十三天 : 도리천〈忉利天〉을 말함)에 올라가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음을 걱정하여 우두전단(牛頭旃檀 : 향나무 이름)에 석존의 상(像)을 조각함으로써 이것이 불상의 시초가 되었다.
목건련(目犍連) : 석존의 십대제자(十大弟子) 중의 한 사람으로 신통제일(神通第一)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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