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행을 표창하다[旌孝]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연려실기술 별집 제12권 > 정교전교(政敎典故)
문종 때 춘천부(春川府)의 백성 윤치(尹致)는 어머니를 섬기는 데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머니의 나이 90세인데 항상 곁을 떠나지 않고 모시면서 누울 때나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부축하고, 밤에는 어머니가 즐기는 음식물을 준비해 두었다가 어머니가 먹고 싶어하면 드리고 어머니는 그것을 먹고서야 잠을 잤다.또 봄과 가을에는 같은 마을 사람들을 모아 잔치를 베풀어서 마음껏 즐기게 해서 어머니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같은 고을에 살고 있는 백성 유육생(劉育生) 역시 성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머니의 나이 90세인데 항상 대소변 그릇을 받드는 데 조금도 싫증을 내는 빛이 없었으며, 또 추울 때나 더울 때를 가리지 않고 자기 자신이 물고기도 잡고 사냥도 하여 맛있는 것을 구해서 반드시 어머니에게 드렸고, 계절마다 한 고장의 어른과 친족들을 모아 잔치를 베풀어서 어머니의 마음을 위안하였다.
○ 성종조 때 남원군(南原君) 양성지(梁誠之)가 그의 아버지를 양지(陽智)에 장사하고, 그의 어머니는 횡성(橫城)에 장사하였는데, 매양 부모 생전에 녹봉으로 부모를 봉양하지 못한 것을 슬프게 생각해 오다가, 그 후에 벼슬과 명망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자, 조정에 청하여 맏아들 원(瑗)은 양지 현감(陽智縣監)이 되게 하고,둘째 아들 수(琇)는 횡성 현감(橫城縣監)이 되게 하여 각각 6년 동안을 부모 묘소 있는 고을에 있게 하였으니, 영화와 효도에 있어서 유감스러운 일이 없다고 이를 수가 있다. 《비문(碑文)》
○ 진사 신명화(申命和)의 아내 권씨 연(璉)의 딸 는 그 시어머니가 심한 병고로 거의 죽게 되자 한데서 향을 피우고 무릇 7주야를 시어머니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하늘에 기도하였다. 그때 권씨에게는 어린 딸이 있었는데 그 어린 딸이 하루는 하늘에서 알이 한 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크기는 새알과 같고 빛깔이 붉었는데 권씨가 이것을 주워 가지고 가서 갈아서 시어머니에게 복용시켰더니 향취가 방 안에 가득 차고 시어머니의 병이 즉시 나았다. 조정에서 이 사실을 듣고 정문(旌門)을 세워 포장(褒獎)하였다. 《지소록》
○ 김담(金澹)은 본관이 강릉(江陵)인데, 천성이 효성이 지극하여 양친을 섬기는 데 정성을 다하여 손수 맛있는 것을 만들어서 봉양하며 40년 동안을 아침저녁으로 부모 곁에서 모시고 있었으나 조금도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양친이 연달아 죽으니 곡하는 소리가 끊어지지 아니하였고, 애통으로 몸이 쇠하여 지팡이를 짚지 않으면 잘 일어나지 못하였다.좋은 술을 부어 휘장 앞에 잔을 드리고 엎드려서 종일 애통하는데 술잔이 번번이 마르니 사람들이 보고 기특하게 여겼다. 또 일찍이 산에 올라가 돌을 깨어 묘표(墓表)를 만들려고 하였으나 계절이 겨울이라 얼어서 정(釘)으로 깰 수가 없어 그 돌을 붙들고 큰 소리로 울었더니, 홀연히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나면서 돌이 쪼개졌다.사람들이 효성에 감동된 소치라고 모두 찬탄하고 칭찬하였다. 조정에서 세 번이나 벼슬에 임명하였지만 매번 오르지 않아서 그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우고 그의 호세(戶稅)를 면제하여 주었다. 그 후 김담의 나이 70세 때에 강원도 관찰사가 임금에게 장계로 알려 특별히 첨지(僉知)에 임명하였다. 90세에 죽었다. 《지소록》
○ 인조조의 박장원(朴長遠)이 정언(正言)으로서 월례적(月例的)으로 임금에게 지어 올리던 월과(月課)에, ‘반포오(反哺烏 새끼가 자라서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먹이는 까마귀)’라는 글제로 지은 절구(絶句)에,
가난하여 맛있는 음식을 갖출 길 없으니 / 貧無甘旨具
작은 새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구나 / 微禽亦動人
반포하는 숲 속 까마귀를 보니 눈물이 흐른다 / 淚落林鳥哺
하였다. 임금이 정원(政阮)에 묻기를, “이 사람의 부모가 생존해 있느냐.” 하니, 정원에서 아뢰기를, “다만 편모(偏母)가 있을 뿐입니다.” 하였더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그 절구를 보니 효성이 보통이 아니다. 한 집안의 충효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하게 한다.효양(孝養)을 하려고 하여도 이미 부모가 죽어 그 효도를 다하지 못하는 슬픔은 옛날 사람들이 마음 아파한 바이다.” 하고, 명하여 쌀 10석과 베(布) 10필을 하사하였다. 《조야기문》
○ 청풍 군수(淸風郡守) 이기설(李基卨)은 어버이를 섬기고 사람과 교접하는 데 있어 한결같이 《소학(小學)》의 법도를 그대로 준수하였다. 향교(鄕校)ㆍ구동(舊洞)의 여러 명망 있는 사람들이 공(公)의 극진한 행실을 조정에 보고하니, 인조가 특별히 포장(褒獎)하도록 명하였는데 그 정문(旌門)에, “효자와 더불어 공의 할머니 절부(節婦) 안씨(安氏), 아버지 효자 참봉(叅奉) 영응 선생(永膺先生) 지남(至男), 어머니 절부 정씨(鄭氏), 형 효자 수재(秀才) 기직(基稷), 누이동생[昧妺] 효녀 이씨(李氏)와 함께 한 집에서 여섯 정문(旌門)이 있는 것은 세상에 없는 일로써 혁혁(赫赫)하게 빛나니 일세에서 칭찬하고 감탄하노라.” 하였다. 나라에서 ‘효자삼세(孝子三世)’라는 액(額)을 내렸다. 《연봉집(連峯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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