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방을 지낸 권공(權公) 주(霔) 의 묘갈명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신독재전서 제7권 > 묘갈명(墓碣銘)

 

권씨는 관향이 안동(安東)인데, 태사(太師) 행(幸)이 고려 태조를 도와 견훤(甄萱)을 평정한 공로로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고, 자손들이 그 아름다움을 그대로 이어왔다. 아조(我朝)에 와서는 휘 극화(克和)라는 이가 소년에 사마시에 장원 급제하여 형조 참판과 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을 역임하였는데, 휘 감(瑊)을 낳았다. 그는 의정부 좌찬성에다 익대(翊戴)와 좌리(佐理) 두 공신에 책봉되었고 시호가 양평(襄平)이니, 이분이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휘가 만형(曼衡)으로 사헌부 감찰이고, 조부 휘는 현(鉉)인데, 첨지중추부사였으며, 그가 낳은 활인서 별제(活人署別提) 휘 대성(大成)이 바로 공의 고위(考位)이다. 그리고 배위는 양천 허씨(陽川許氏)로 첨정(僉正) 휘 빙(砯)의 딸이며, 증 이조 참의 휘 지(芝)의 증손녀이다.
공은 휘가 주(霔)이고, 자가 시망(時望)인데, 어려서 고아가 되었으나 학문에 노력하여 장보(章甫)들 사이에 이름이 알려졌다. 만력 임인년(1602)에 동지인 한효상(韓孝祥), 조정호(趙廷虎)와 함께 상소하여 우계(牛溪) 성 선생(成先生)에 대한 무함을 변명하였는데, 선비들로부터 옳다는 인정을 받았다. 임자년(1612)에 성균관에 입학하였다가 광해군의 난정(亂政)을 보고는 그 길로 벼슬을 포기한 채 동호(東湖)의 저도(楮島)에서 문 닫고 지냈으며, 그 뒤 남원(南原)으로 옮겨 가서 10여 년을 별로 하는 일 없이 지냈다. 인조(仁祖)의 반정(反正)으로 앉은 자리에서 오수 찰방(獒樹察訪)에 제수되었는데, 1년 동안에 마정(馬政)으로 도내에서 최고라는 명성을 얻었다. 공무로 인해 전주(全州)에 갔다가 객관(客館)에서 죽었으니, 때는 병인년(1626) 11월이었고 공의 나이는 53세였으며,

이듬해 8월에 청풍군(淸風郡) 황강(黃江) 북쪽에다 새 자리를 잡아 안장하였다.
공은 타고난 효우(孝友)에다 지극한 행실이 빈틈이 없었으며, 홀로 계신 자친을 봉양하면서 그의 마음을 즐겁게 하기에 최선을 다했다. 난리 속에 흉년까지 겹치자 원근에 관계없이 먹을 양식을 마련하느라 몸에 완전한 살갗이 없을 정도로 온갖 고생을 다 겪으면서도 어버이 봉양에 필요한 물품이면 모든 것을 다 준비하였다. 또한 상례를 치를 물품까지도 후회가 없을 정도로 마련하였다. 멀리 떨어져 사는 백씨(伯氏)가 역시 묵은 병에 걸려 1년 이상 고생을 했는데, 그의 병 간호를 위해서도 먼 길을 오가면서 할 수 있는 데까지 힘을 다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죽은 후 치상(治喪)하고 반장(返葬)하는 일 등에 대해서도 모두 스스로 처리하였다. 조카들도 자신의 자식이나 다름없이 보살펴 주었는데, 이와 같이 하나 둘로 셀 수 없는 일들이 모두 공의 평소의 축적을 말해 주고 있다.
공의 배위는 풍산 심씨(豐山沈氏)로 참봉 일승(日昇)의 딸이었는데, 천성이 온순하고 부도(婦道)를 다했다. 공보다는 20년 뒤에 세상을 떴고, 묘는 공과 부장하였다.
아들 성원(聖源)은 진사로서 지금 여산 군수(礪山郡守)에 재직중이고, 다음은 도원(道源)으로 유업을 하고 있으며, 딸 둘은 각각 사인(士人) 이시연(李時衍), 이지백(李之白)에게 시집갔다. 성원의 아들 격(格)은 소년 등과하여 현재 괴원(槐院)에 근무하고 있고, 슬하에 1남 2녀가 있으나 모두 어리다.
군수공이 나와 친한 사이였는데, 어느 날 나에게 선인의 가장(家狀)을 주면서 하는 말이, “우리 선인께서는 평소 내로라 하는 이들에게 버림을 당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선 선생(先先生)께서도 좋게 대해 주셨고, 지금 내가 또 오자(吾子)와 가까이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자의 말 한마디로 묘도(墓道)를 빛나게 해 준다면, 이는 우리가 두 세대에 걸쳐 서로 알고 지내는 보람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내가 사양하다 못해 그 대략을 이상과 같이 기록하고 다음과 같이 명한다.

하늘이 이미 아름다운 바탕을 공에게 주었으니 / 天旣錫以美質
그는 효성과 우애로 일관된 화신이었다네 / 孝且友以飾其躬
십 년을 강호와 전야에서 빛을 감추고 / 十年江湖田野
궁하게 사는 것 달게 여겼구나 / 甘晦彩而守窮
한번 벼슬길 나서매 큰일을 하리라 기대했건만 / 一命固有所濟
아, 슬프게도 목숨마저 길지 못했으니 / 吁嗟乎壽又不永
때를 잘못 만난 탓일까 운명일까 / 抑時耶命耶
사람이 불행을 당하는 것 / 其遇人之不幸
오고 가는 기수 때문이라면 / 惟氣有往復
후손들에겐 경사가 있으리 / 尙庶冀其後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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