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연문장전산고 > 분류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1 - 경전류 1 > 경전총설(經傳總說)
탈락되고 뒤바뀐 경문(經文)을 그 문의(文義)에 따라 고정(考定)한 것에 대한 변증설
(고전간행회본 권 56)
고염무(顧炎武)는, “《예기》 악기(樂記) 편의 ‘관이정(寬而靜)’으로부터 ‘사직이자(肆直而慈)’까지의 1절(節)은 마땅히 ‘애자의가상(愛者宜歌商)’이란 글귀 이에 있어야만 글 뜻이 매우 분명하게 된다. 그러나 정 강성(鄭康成)도 옛 글을 그대로 두어 감히 고치지 않고 다만 주에, ‘이 글은 대쪽[竹簡]이 바뀌고 차서가 잘못되어 ‘관이정’이란 글귀는 마땅히 ‘애자의가상’이란 글귀 위에 있어야 한다. 이것을 이어서 …… ’라고 했을 뿐이다.
《서경》 무성(武成) 편의 착간(錯簡)은 〈무성편 글에 있는〉 날짜로 고증할 수 있으나, 채 침(蔡沈)도 옛 글을 그대로 두고 별도로 한 편을 서술하여 고정무성(攷定武成)을 만들었는데 가장 체계가 있다.
그 밖의 경문을 고정한 것으로는, 정자(程子)가《주역》 계사(繫辭)의 ‘천일지이(天一地二)’란 한 구절을 ‘천수오(天數五)’란 글귀 위에 개치(改置)하고,《논어》의 ‘필유침의장일신유반(必有寢衣長一身有半)’이란 한 구절을 ‘재필유명의포(齊必有明衣布)’란 글귀 밑에 개치한 것과, 소자첨(蘇子瞻)이《서경》홍범(洪範)의 ‘왕성유세(王省惟歲)’란 한 구절을 ’오왈역수(五曰曆數)‘란 글귀 밑에 개치하고, 강고(康誥)의 ‘유삼월재생백(惟三月哉生魄)’이란 한 구절을 낙고(洛誥)의 ‘주공배수계수(周公拜手稽首)’란 글귀 위에 개치한 것과 주자가《대학》의 ‘강고왈지지어신(康誥曰至止於信)’이란 구절을 ‘미지유야(未之有也)’란 글귀 밑에 개치하고, ‘시운첨피기욱(詩云瞻彼淇澳)’이란 두 구절을 ‘지어신’이란 글귀 밑에 개치하며,《논어》의 ‘성불이부(誠不以富)’란 두 글귀를 ‘제경공유마천사(齊景公有馬千駟)’란 한 구절 밑에 개치하고, 《시경》 소아(小雅)에는 남해(南陔) 장을 녹명지십(鹿鳴之什)에 채우고, 이하 백화지십(白華之什)으로 개정한 것 따위는 모두 지당하니 다시 의심할 여지가 없다.
후인들은 그것을 본받아 함부로 천착하여《주례》의 오관(五官)을 서로 바꾸어 조정했다.
문헌(文憲) 왕백(王栢)은 이남상배도(二南相配圖)ㆍ홍범경전도(洪範經傳圖)ㆍ중정중용장도(重定中庸章句圖)를 만들고《시경》의 감당(甘棠)ㆍ야유사균(野有死麕)ㆍ하피농의(何彼穠矣) 등 3장을 왕풍(王風)에 개치하였는데, 인산 김씨(仁山金氏)는 이것을 본받아, ‘염시오복(斂時五福)’이란 한 구절을 ‘고종명(考終命)’이란 글귀 밑에 개치하였고, ‘유벽작복(惟辟作福)’이란 한 구절을 ‘육왈약’(六曰弱)이란 글귀 밑에 개치하여 공맹의 글로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것에 거의 완전한 책이 없는 것으로 만들었으니, 아마 ‘성인의 말을 두려워한다.’는 것이 아닌 듯하다.
문청(文淸) 동 괴(董槐)는,《대학》의 ‘지지이후유정(知止而後有定)’이란 두 구절을 ‘자왈청송오유인야(子曰聽訟吾猶人也)’란 글구 위에 개치하고, 전(傳)의 4장은 격물치지(格物致知)를 해석한 것이라고 전을 9장을 만들었다. 그렇게 보면《대학》은 원래 궐문이 없는 것이 되는 셈이니, 그 설을 따를 만하다.
봉상(鳳翔) 원 해(元楷)는, “문언(文言)의 글이 계사에 섞여든 것이 있으니, ‘명학재음(鳴鶴在陰)’으로부터 이하 7절과 ‘자천우지(自天祐之)’ 1절 및 ‘동동왕래(憧憧往來)’ 이하 11절, 이 19절은 모두 문언으로서, 곧 ‘항룡유회(亢龍有悔)‘란 한 구절이 거듭 보이는 데에서 증명할 수 있다고 하여 드디어 이 18절을 가져다가 ‘천현이지황(天玄而地黃)’이란 글귀 뒤에 붙여 놓았으니, 괘를 따라 서차하였다. 뜻에 있어서 역시 통한다.
옛 사람의 글은 변화하여 구애됨이 없는데, 하물며 육경은 성인으로부터 나와서 선고(先古)에 전해진 것임에랴? 후인들이 감히 함부로 의론할 것이 못 된다.”라고 하였다.
주소(注疏) 중에는 글을 잘못 인용한 것이 많다. 예컨대《이아》 석산(釋山) 조에 “초목이 많은 산을 ‘고(岵)’라 하고, 초목이 없는 산을 ‘해(峐)’ 해(孩)는 마땅히 이(坭) 자여야 한다. 라 하고, 돌에 흙이 얹힌 산을 ‘최외(崔嵬)’라 하고, 흙에 돌이 얹힌 산을 ‘조(岨)’라 한다.”는 것을 《모전(毛傳)》에서 인용하였으나 서로 상반된다.
주자는《중용장구》에서, “후직(后稷)의 손자는 실로 태왕(大王)인데 기산(岐山)의 양지쪽에 거처하였으니, 실로 상(商) 나라를 깎는 셈이다.[后稷之孫 實惟大王居岐之陽 實始剪商]”라는 것을 인용하면서, 잘못 ‘태왕에게 이르러서[至于大王]’라고 하였다.
《시집전(詩集傳)》 민여소자(閔予小子)에서《초사(楚辭)》의 “삼공이 목목하여 당지에 내렸다.[三公穆穆 登降堂只]”라는 것을 인용하여 잘못 “삼공이 읍양하다.[三公揖讓]”라고 하였다.
또《논어》의 주에, “하는 호라 하고, 은은 연이라 했다.[夏曰瑚 殷曰璉]” 하였으니, 이것은 고주(古注)에 잘못된 것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예기》에, “하후씨의 4연과 은의 6호[夏后氏之四璉 殷之六瑚]”라 하였으니, 이것은 하 나라는 연이라 하였고, 은 나라는 호라고 하였던 것이다.
향례(享禮)의 주에, “기운이 발하여 얼굴에 가득하다.[發氣滿容]”라는 것을 인용하였는데, 이제《의례》의 글에는, “기운이 발하여 얼굴에 찼다.[發氣盈容]” 라고 되어 있는데, 한 나라 사람들이 혜제(惠帝)의 이름인 영(盈)자를 피하여 만(滿)자로 대신 쓴 것이니, 마땅히 고쳐야 할 것을 고치지 못한 것이다.
《맹자》의 “신농을 말한 자가 있어[有爲神農之言者]”라는 그 주에, ‘사마 천이 이른바 농가의 유다.[史遷所謂農家者流也]’ 라고 인용하였는데, 인산 김씨(仁山金氏)는, “태사공(太史公)의 육가(六家) 동이(同異)를 논한 데 농가라는 말이 없고, 반고(班固)의《예문지》(藝文志)에, 비로소 구류(九流)를 분류하면서 농가류가 있게 되었으니,《집주》에서 우연히 잘못된 것을 미처 고치지 못한 것이다.
성(姓) 씨(氏) 같은 것은 매우 분명한 것인데, 자하(子夏)는 공자의 제자로 성은 복(卜) 이름은 상(商), 자금(子禽)의 성은 진(陳) 이름은 항(亢), 자공(子貢)의 성은 단목(端木) 이름은 사(賜), 자문(子文)의 성은 투(鬪) 이름 누오(於菟)라고 한 유 같은 것은 씨(氏)로써 성을 삼은 것이다.
제 선왕(齊宣王)의 성은 전(田)이고 이름은 벽강(辟彊)인데 성과 씨를 합쳐서 하나로 만든 것이니 어찌 옛 사람의 잘못된 것을 답습하여 바로잡지 않겠는가? 이것은 그 잘못된 것의 만분의 일을 대략 초(抄)했을 뿐으로 만약 다 말한다면 하루 아침에 이루 기록할 수 없다.
주 양공(周亮工)의《인수옥서영(因樹屋書影)》에 인용된 송말(宋末) 문양(汶陽) 사람 설산(雪山) 왕질(王質)의《시경총문(詩經總聞)》ㆍ오군(吳郡)사람 임 약무(林若撫)의《시담(詩談)》 왕질(王質)의 호는 설 산(雪山),《시경총문》은 20권인데 순우(淳祐) 연간에 흥진(興陳) 오일강(吳日强)이 문양 태수(汶陽太守)로 있을 때 그것을 판각했으나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사 조제(謝肇淛)가 기록하여 비부(秘府)에 두었었는데, 그의 아들들이 모든 장서를 팔아버렸기 때문에 진 개중(陳開中)이 구입하여 나에게 주었다. 그 글에 “소성(小星) 2장(章)은, 밤에 여자가 남자를 보내는 시이다. 일이 급하면 사람은 피로하게 되는 것이니. 운명에 돌리지 않을 수 없다. ‘이불과 홑이불을 안았다.’ 하였으니, 명을 받는 즉시 출발해야 하므로 미처 ‘치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추우(騶虞) 2장은, 사냥을 읊은 시이다. 일행이 다만 짐승 다섯 마리를 잡았다 한 것은 많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풀이 처음 돋아났으므로 짐승을 깊이 감춰주지 못하기 때문에 이와 같다. 그 마음은 비록 자애로우나 그 예는 폐할 수 없다. 나라의 제사를 이바지하고 임금의 반찬을 충당하기 위하여 부득이 해야 하므로 짐승을 잡을 때마다 추우를 들어 칭탄했다. 그러나 산풀을 밟지 않고 산 물건을 먹지 않는 이 짐승을 어찌 잡을 수 있었겠는가? 그렇게 말한 것은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3백 편에 모두 그의 창의로 해석했는데, 애석하게도 나에게는 간행할 힘이 없다.”라고 했다. 임약무(林若撫)의《시담(詩談)》에, “당풍(唐風) 산 유추(山有樞) 편을 주낸 사람은 ‘전편 실솔(蟋蟀) 편을 화답하여 근심을 푼 것이다.’ 하였으니, 잘못 해석한 것이다. 대개 이때에 곡옥(曲沃)은 강하고 진(晉) 나라는 약하였기 때문에 진나라 사람들은 나라가 장차 자기들의 나라가 되지 않을 것을 분명히 알았으나 감히 말할 수 없었으므로 임금이 안락만을 취하고 있는 것을 풍자하여 하루 아침에 멸망하게 되면 의상(衣裳)ㆍ거마(車馬)ㆍ종고(鐘鼓)ㆍ주식(酒食)이 모두 남의 소유가 될 것을 걱정했으므로 그 사(嗣)는 곧으나 그 정(情)은 조심스럽고, 그 뜻은 절박하나 나머지 비애(悲哀)가 있으니, 어찌 슬픔을 풀었다고 할 수 있는가? 위풍(魏風)에, ‘그래도 돌아오고 버리지 말라.[猶來無棄]’를《시집(詩緝)》에는, ‘어미가 항상 자식을 생각하여 어미를 버리고 돌아오지 않지 말라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뜻을 이해했다 하겠다. 주자의《집주(集註)》에는, ‘그 시체를 버린다.’라고 하였으니, 틀린 해석이다. 소남(召南) 채빈(采蘋)편에, ‘어디에다 상(湘) 하는가? 솥과 가마솥에다 하지요.’라는 것을《집주》에는, 상을 삶[烹]는 것으로 훈고(訓誥)했으니, 틀린 것이다. 상자는 물을 따랐으니, 씻는 것이 되어야 마땅하다. 소아(小雅) 사월(四月) 편에, ‘산에 아름다운 나무가 있으니, 후율(候栗)과 후매(候梅)로다.’라는 것을《집주》에는 ‘후(候)는 유(維)이다.’ 했는데,《서경잡기(西京雜記)》에, ‘상림(上林)에 후매(候梅)가 있다.’ 하였고,《진궁궐기(晉宮闕記)》에, ‘화림도원(華林桃園)에 후도(候桃) 세 그루가 있다.’ 하였으니, 후(候)가 유(維)의 뜻이 아님이 분명하다.”하였다. 이것이 그 대략이다.ㆍ전당(錢塘) 사람 고 첨인 사기(高澹人士奇)가 지은《천록지여(天祿識餘)》의《시》와《역》을 해석한 데도 상고할 수 있다. 《시경》에, “동(東)이여 동이여 바야흐로 만무(萬舞)를 추려 한다.”는 것을 자공(子貢)의 대서(大序)와 모씨(毛氏)의 소서(小序)에 모두 “영관(伶官)의 시이다.”하였다. 신공(申公)은 “동은 영관의 이름인데 어지러운 나라에 살고 있음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므로 부르짖기를, ‘동이여 동이여 너는 대낮에 여기에서 춤을 추고 있느냐?’라고 한 것이다.”라고 했으니, 마치《동관한기》(東觀漢記)에 회음(淮陰:한 신(韓信)을 이름.)이 가슴을 치며 탄식하기를, “신(信)이여 신이여 녹록(碌碌)하게 번 쾌(樊噲) 따위와 대열을 함께 하느냐?”한 것과 같다. 모씨본(毛氏本)에 동(東) 자가 잘못 간(簡) 자로 되어 있으므로《집주》에, “간소하고 오만하다.”로 해석했으니 잘못이다.《주역》에, “진(震)이 귀방(鬼方)을 정벌하였다.” 한 것을 곽 침(郭琛)은, “진(震)은 곧 지백(摯伯)의 이름이니 왕계(王季)의 비(妃)인 태임(太姙)의 아버지이다.” 하였는데,《정전(程傳)》에는 진을 무위(武威)를 선양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렇다면, “3년에 대국(大國)에서 상이 있었다.”한 것은 누구에게 주었단 말인가?《서경》에, “말을 잘하고 얼굴 모양을 잘 꾸미는 공임(孔壬)이다.”한 것을 곽씨(郭氏)는, “공은 공공(共工)의 씨(氏)이고 임은 그 이름이다.” 하였는데 채 침의 주에는 간악함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여, 환도(驩兜)ㆍ삼묘(三苗)와 같지 않게 하였다. 그러므로 고고학(考古學)이 이같이 어렵다는 것을 알겠다.
탈락되고 …… 변증설 : 옛날에 대쪽[竹簡]을 엮어 경문을 썼기 때문에 끈이 낡아 대쪽이 탈락되거나 뒤바뀐 것을 후세의 선비들이 그 문의(文義)를 따져 고정(考定)했는데, 그 중에는 지당한 것이 있는 반면 너무 외람되거나 도리어 틀린 것이 수없이 많다. 그러므로 고고학이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고정무성(攷定武成) : 현행되고 있는 《서경》 대전(大傳) 무성 편 끝에 붙어 있다.
천일지이(天一地二) …… 글귀 : 《주역》계사 하에 보이는데, 주자 본의(本義)에, “이 책장은 본래 제10장의 첫머리에 있었는데, 정자(程子)가, ‘이 장에 있어야 마땅하다.’ 하기로 이제 정자의 말을 따른다.”라고 했다.
재필유명의포(齊必有明衣布) …… 개치한 것 : 《논어》향당(鄕黨)에 보이는데, 그 주에, 정자(程子)는, “이것은 착간이다. 마땅히 제필유명의포(齊必有明衣布)라고 한 밑에 있어야 된다.”라고 보인다.
주공배수계수(周公拜手稽首) …… 개치한 것 : 《서경》낙고(洛誥)에, “주공배수계수(周公拜手稽首)”라고 한 주에 소씨(蘇氏)는, ‘이 위에는 탈간(脫簡)이 있다. 강고(康誥)에, 《유삼월재생백(惟三月哉生魄)》이란 글귀로부터 《홍대고치(洪大誥治)》란 글귀까지의 48자는 여기에 있어야 한다.’ 라고 보인다.
미지유야(未之有也)’ …… 개치 : 《대학장구대전(大學章句大全)》에, “우전지수장"(右傳之首章)" 이라고 한 그 주에, ‘이 장으로부터 3장의 지어신(止於信)까지는 구본(舊本)에는 몰세불망(沒世不忘)이란 글귀 밑에 잘못 놓여 있었다.’라고 보인다.
지어신 …… 개치하며 : 《대학장구대전》에, “우전지삼장(右傳之三章)”이라고 한 그 주에, ‘이 장안의 기욱시(淇澳詩)를 인용한 데로부터 이하는 구본에는 성의장(誠意章) 밑에 놓여 있었다.’라고 보인다.
제경공유마천사(齊景公有馬千駟) …… 개치하고 : 《논어》안연(顔淵)에, “성불이부역지이이(誠不以富亦祗以異)”라고 한 주에, 정자는 ‘이것은 착간이다. 마땅히 제16편에, 《제경공유마천사(齊景公有馬千駟)》란 대문 위에 있어야 한다.’라고 보인다.
백화지십(白華之什)으로 개정한 : 《시전대전(詩傳大全)》 백화지십이지이(白樺之什二之二) 편제(篇題)에, “모공(毛公)은 남해(南陔) 이하 3편은 사(辭)가 없으므로 어리(魚麗)를 올려 녹명(鹿鳴)에 10편의 수를 채우고 생시(笙詩)인 3편을 그 뒤에 붙였다. 그리고 남유가어(南有嘉魚)로 다음 10편의 머리를 삼았는데, 지금 《의례》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라고 보인다.
오관(五官) : 천관 총재(天官冢宰)ㆍ지관 사도(地官司徒)ㆍ춘관 종백(春官宗伯)ㆍ하관 사마(夏官司馬)ㆍ추관 사구(秋官司寇)를 이름이다.
3장 : 이 세 장의 시는 《시경》소남(召南)에 보인다.
육왈약(六曰弱) …… 개치 : 《서경》주서(周書) 홍범(洪範)에 보인다.
지지이후유정(知止而後有定) : 《대학장구대전》경(經) 1장에 보인다.
자왈청송오유인야(子曰聽訟吾猶人也) : 《대학장구대전》제4장에 보인다.
7절 : 《주역》계사(繫辭) 상에 보이는, “명학재음(鳴鶴在陰)…가불신호(可不愼乎)"까지를 이름이다.
자천우지(自天祐之) : 《주역》계사 상에 보이는, “자천우지 길무불리(自天祐之吉无不利)"를 이름이다.
11절 : 《주역》계사 하에 보이는, “역왈동동왕래(易曰憧憧往來) …… 이용안신이숭덕야(利用安身以崇德也)"까지를 이름이다.
항룡유회(亢龍有悔) : 《주역》건괘(乾卦) 문언(文言)에 보이고 또 계사 상에도 보인다.
천현이지황(天玄而地黃) : 《주역》곤괘(坤卦) 문언에 보인다.
초목이 …… 한다 : 《이아(爾雅)》 석산(釋山)에 보인다.
《모전(毛傳)》에서 인용하였으나 : 《시경》주남(周南) 권이(卷耳) 주에, “최외(崔嵬)는 흙산[土山] 위에 바위[石]가 있는 것이다.”라고 보인다.
후직(后稷)의 …… 셈이다.[后稷之孫 實惟大王居岐之陽 實始剪商] : 《시경》노송(魯頌) 비궁(閟宮)에 보인다.
태왕에게 이르러서[至于大王] : 《중용장구대전(中庸章句大全)》 제18장에, ‘무왕 찬태왕 왕계지서(武王纘太王王季之緖)’ 라고 한 주에 보인다.
삼공이 …… 내렸다.[三公穆穆 登降堂只] : 《초사(楚辭)》 대초(大招)에 보인다.
삼공이 …… 하였다 : 《시경》주송(周頌) 민여소자(閔予小子)에 “염자황조(念玆皇祖)”라고 한 주에 보인다.
하는 호라 …… 했다.[夏曰瑚 殷曰璉] : 《논어》공야장(公冶長)에, “자공문왈 사야하여 자왈 여기야(子貢問曰賜也何如子曰女器也)”라고 한 주에 보인다.
하후씨의 …… 은의 6호[夏后氏之四璉 殷之六瑚] : 《예기》명당위(明堂位)에 보인다.
기운이 …… 가득하다.[發氣滿容] : 《논어》향당(鄕黨)에, “향례유용색(享禮有容色)”이라고 한 주에 보인다.
기운이 …… 찼다.[發氣盈容] : 《의례(儀禮)》 빙례(聘禮)에 보인다.
신농을 …… 있어[有爲神農之言者] : 《맹자》등문공 상(縢文公上) 상에 보인다.
육가(六家) : 음양가(陰陽家)ㆍ유가(儒家)ㆍ묵가(墨家)ㆍ법가(法家)ㆍ명가(名家)ㆍ도가(道家)를 이름. 《사기》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 보인다.
구류(九流) : 유가류(儒家流)ㆍ도가류(道家流)ㆍ음양가류(陰陽家流)ㆍ법가류(法家流)ㆍ명가류(名家流)ㆍ묵가류(墨家流)ㆍ종횡가류(縱橫家流)ㆍ잡가류(雜家流)ㆍ농가류(農家流)를 이름. 《한서》예문지(藝文志)에 보인다.
소성(小星) : 《시경》소남(召南) 소성(小星) 장을 이름.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嘒彼小星 三五在東 肅肅宵征 夙夜在公 寔命不同, 嘒彼小星 維參與卯 肅肅宵征 抱衾與裯 寔命不同.
추우(騶虞) : 《시경》소남 추우(騶虞) 장을 이름.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彼茁者葮 壹發五豝 于嗟乎騶虞, 彼茁者蓬 壹發五豵 于嗟乎騶虞.
3백 편 : 《시경》에 수록된 시가 모두 3백 16편인데 그 대략의 수만을 들어 3백 편이라 했다.
동(東)이여 …… 한다 : 《시경》패풍(邶風) 간혜(簡兮)에 보인다.
진(震)이 …… 정벌하였다 : 《주역》미제괘(未濟卦) 구사(九四) 효사(爻辭)에 보인다.
말을 …… 공임(孔壬)이다 : 《서경》고요모(皐陶謨)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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