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례(五禮)란 무엇인가
1.1. 길례(吉禮)
   길례(吉禮)는 제신(諸神 - 天神∙地神∙人神)과 이들 신위에 의례(祀∙祭∙享∙釋奠)를 행할 때 국가를 대표하여 왕만이 할 수 있다는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예컨대 사천의(祀天儀)는 대사(大祀)로서 천명을 받은 황제만이 행할 수 있는 의례이며 국가의 안녕을 기구(祈求)하는 의례인 것이다. 고려 및 조선 초 제천의식(祭天儀式)을 주재하는 것이 천명에 의한 왕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여 대외적으로는 중국과 함께 대등한 정치적 독립과 대내적으로는 유일한 정권임을 강조하고 있었다. 길례에는 대·중·소의 3사(祀)가 있는데, 대사(大祀)에는 환구(圜丘), 방택(方澤), 사직(社稷), 태묘(太廟) 등이 있고, 중사(中祀)에는 선농(先農), 선잠(先蠶), 문선왕묘(文宣王廟)가 있다. 성균관 문묘에 공자(孔子)의 제향의(祭享儀)인 석존의(釋尊儀)가 포함됨으로써 유학 수용을 상징적으로도 읽을 수 있다.

 

     1.2. 가례(嘉禮)

   가례(嘉禮)는 왕실로부터 서민에 이르는 광범한 사회계층을 통과의례적인 饗宴의 자리를 열어 만민(萬民)이 조화토록 하는 의례로 특히 왕실이 주인의 역을 담당하는 것이다. 책봉이나 혼인, 관례 등 왕실의 의례에 격조와 위엄, 그리고 화합의 형식을 가하는 것으로, 왕이 일족에게 술과 음식을 내리는 연회(宴會)의식, 남녀의 덕을 성취케 하는 예의 시작인 관례(冠禮)와 남녀의 정을 사랑하여 예의 근본을 이루는 혼례(婚禮), 옛 친구와 붕우(朋友)와의 관계를 토대로 하여 서로 간에 친하게 진내고자 하는 의례, 매우 후하고 중한 연향(宴饗)의 의례로서 친함을 구하는 의례, 선왕을 함께 모시는 형제의 나라들과 친하게 지내고자 하는 의식 등이 있다.


     1.3. 빈례(賓禮)

   빈례(賓禮)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친화를 유도하도록 하려는 것으로, 중국의『주례(周禮)』에서 다루는 빈례(賓禮)의 범주는 주(周)왕실과 봉건제후들과의 관례를 주로 하였으나 당나라 이후에 오면서 주변 나라와의 소위 국제적인 외교관계의 개념으로 그 성격이 바뀌어진다. 고려나 조선에서는 중국과 다르게 국제관계 만을 빈례로 다루고 있는데, 특히 중국과의 관계를 북조(北朝)나 대명(大明)으로 구분하고 있다.

 

     1.4. 군례(軍禮)

   국가의 존립을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그 존재가 필요한 군(軍)을 통제하고 강군(强軍)을 만들기 위한 것으로 군례(軍禮)는 국가를 유지하고 안전하게 하는 것은 군대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인식하면서 이러한 군대의 최고 통수권자로서의 왕의 위상을 의식으로 상징하는 것이다. 예컨대 견장출정의(遣將出征儀) 사환의(師還儀) 구일월식(救日月蝕) 계동대나의(季冬大儺儀) 등이 있다. 여기서 '구일월식'이나 '계동대나의'가 군례에 포함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일상에서 벗어난 일식을 강력한 군사의 힘을 빌어 원래의 상태로 복귀시키거나 역귀를 쫒아내는데 힘을 빌린 상징적인 요소가 담겨있다. 조선 초기 에는 왕의 노부(蓾簿), 강무(講武), 대사의(大射儀) 등의 의식을 만듦으로써 왕이 갖는 군사면(軍事面)에서의 권위가 강조되고 군사력의 통제를 구축하려는 적극적인 정치적 의지를 보였다.

     1.5. 흉례(凶禮)
   흉례(凶禮)는 국가의 재화(災禍)∙질병(疾病)∙왕을 비롯한 왕족의 사망(死亡) 등의 슬픔을 위로하여 극복하려는 의례이다. 모든 의례에서 주인이 왕인 것은 물론이고 특히 왕의 죽음으로 인한 대권의 계승에서 오는 국가적인 재난으로 보면서 이를 흉례의식에서 처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시 왕권의 위상이 최고임을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고려사(高麗史)』「예지(禮志)」에서는 국상(國喪)만을 흉례로 다루고 있으나, 조선왕조에서 관심이 집중된 것은 흉례(凶禮)에서 사왕(嗣王)부분을 포함한 왕위계승에 관한 부분이다. 왕권의 교체를 왕의 상례의식(喪禮儀式) 속에서 확실하게 지켜지도록 흉례(凶禮)의 내용에서 치밀하게 정비된 것이다.

 

 
2. 『상정고금례(詳定古今禮)』
   고려왕조에서는 성종(成宗) 때부터 유교문화의 예의 체계를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질서를 필요로 하였다. 그리고 고려왕조가 어느 정도 유교문화의 오례의 체계를 수용하여 정리한 것은 예종(睿宗) 때였다. 이러한 분위기를 토대로 하여 예의에 관한 문헌자료를 정리한 것이 최윤의(崔允儀)의『상정고금례(詳定古今禮)』이다. 고려 인종때(1122∼1146) 최윤의 등 17명이 왕명으로 고금의 예의를 수집, 고증하여 50권으로 엮은 것이나, 이 책은 현존하지 않고 있다.

3. 『세종실록(世宗實錄)』오례의(五禮儀)
   조선은 건국부터 유교 국가를 표방한 나라이다. 유교 국가의 통치 이념과 통치 방법은 덕치(德治)와 예치(禮治)였다. 따라서 조선의 건국이후 왕실과 사대부들은 그들의 정치적 이념을 유교이념(性理學)에 기초하고 있다. 유교문화이념을 기초로 한 정치와 사회개혁을 주장하는 조선의 사대부층과 새 왕실은 조선의 왕권을 고려시기 이래 습용(襲用)되어 온 오례를 통하여 당대(當代)의 왕권을 기초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것은 고려왕조를 계승한 조선왕조의 정통성의 문제도 해결하며 새로운 정권의 혁명적 내용도 수용하는 명분논리(名分論理)를 오례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에서는 신왕실의 정치적 위상을 정비하기 위하여 태조대(太祖代)부터 오례를 통해서 왕실과 사대부들은 정치적으로 유교적 예론으로 심화된 오례운영에 가일층 노력하게 된다. 조선 초기 오례운영을 정치와 학문적으로 여과하여 일차적으로 정리한 것이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등재된 「오례(五禮)」였다

 

4.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국조오례의』는 1474년(성종 5)에 이르러 신숙주(申叔舟)∙정척(鄭陟) 등에 의해서 비로소 국가전례로서 완성되었다. 『국조오례의』는 오례, 즉 길례(吉禮)∙가례(嘉禮)∙빈례(賓禮)∙군례(軍禮)∙흉례(凶禮)로 구성된 국가의 기본 예전으로, 조선왕조의 정치∙법제의 기틀인『경국대전』과 함께 편찬되었다.
   『국조오례의』는 오례에 대한 의식(儀式)과 서례가 따로 정리되어 있다. 의식에는 오례 전반에 대한 의식 절차만을 자세히 기술하였고, 서례에는 그 절차를 행함에 있어서 필요한 참고사항을 오례의 순서대로 다섯 항목에 걸쳐 설명하고 그 도설(圖說)을 붙이고 있다.
   『국조오례의』의 오례 순서는 길례∙가례∙빈례∙군례∙흉례로 되어 있다. 이것은『주례』나 고려의『고금상정례』의 오례 순서(길∙흉∙군∙빈∙가례)와 다르고,『통전』과『송사(宋史)』의 오례 순서와 같은데, 이것은 송대의 성리학이 갖는 예론이 수용되었음을 보여준다.
   길례에는 원구(圓丘)와 방택(方澤)을 제외한, 종묘(宗廟)∙사직(社稷)∙문묘(文廟) 등 국가에서 지내는 제사 의식이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로 편재되어 있다. 그리고 주현(州縣)까지 길례 운영을 보여주는 「제주현명산대천의(祭州縣名山大川儀)」∙「주현석전문선왕의(州縣釋奠文宣王儀)」 등의 의식과 관료나 일반 백성의 「대부사서인사중월시향의(大夫士庶人四仲月時享儀)」가 기술되어 있다. 여기에는 성리학의 수용에 따른 세계관과 사대교린의 명분 하에 원구제가 빠져 있지만, 조선왕조의 정통성의 논리를 예론으로 밝히기 위하여 역대왕조의 시조신에 주목하는 등 길례의 전체적인 항목 구성은 왕실 중심의 의례에서 양반관료들의 의례까지 포함하고 있다.
   가례에는 중국에 대한 사대(事大)와 세자∙왕녀∙종친∙과거∙사신∙외관 등에 관한 가례 절차와 의식을 기술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왕실 안에서의 관∙혼례(冠∙婚禮)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왕실과 관료들의 정치적 명분을 가례라는 틀을 이용하여 유지시키고 있다. 그리고 「향음주의(鄕飮酒儀)」∙「문무과영친의(文武科榮親儀)」 등 왕실중심의 오례에서 사대부층을 포섭하려는 의도도 보이고 있다.
   빈례에는 중국과 일본, 유구(琉球) 등의 외국사신을 접대하는 사대교린의 의식이 기술되어 있다. 여기에는 오례 전 체계 속에서 명과의 사대명분 논리로서 조선왕조의 위상을 정하고 있다.
   군례에는 의례적인 면만을 구현하는 「사우사단의(射于射壇儀)」∙「대열의(大閱儀)」 ∙「강무의(講武儀)」 등의 군사의식과 「구일식의(救日食儀)」∙「계동대나의(季冬大儺儀」가 기술되어 있다. 조선초기 북방지역에 군사작전이 있었음에도 「출정의(出征儀)」와 「취각령(吹角令)」이 오례의에서 제외된 것은 밖으로 명과의 관계를 의식하고, 안으로 조선초기 이래 오랫동안 평화기에서 오는 시대상황의 반영이라 여겨진다.
   흉례에는 「위황제거애의(爲皇帝擧哀儀)」 등 중국의 국휼(國恤)에 대한 조선조의 의식과 국왕 이하 궁중의 상장례(喪葬禮)의 절차가 편재되어 있고, 그밖에 관료와 일반 백성의 「대부사서인상의(大夫士庶人喪儀)」가 기술되어 있다. 여기에 「대부사서인상의」가 유교 예제로 정립되어 있다는 것은 왕실의 권위만을 주장하는 오례의 예론이 성종대에 이르러 양반관료에서 서인에 이르기까지 포함시키려는 보편적 명분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상의 의식 절차가 대부분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예제이지만, 오례 운영에 그 행례 범위가 왕경에서 주현까지 확대되고 보편적 예론으로 왕실, 양반관료에서 서인에 이르기까지 포괄하고 있었다는 점에서『국조오례의』는 왕권과 양반관료들의 정치세력의 균형 위에서 성립되어진 예전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이 완성된 뒤에는 이 오례가 국가의 기본준칙이 되어 여러 차례 印刊이 되었다. 또『國朝續五禮儀』·『國朝五禮儀補』 등이 후기에 이를 기본으로 하여 편찬되기도 하였다.

5.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國朝續五禮儀』는 국조의례의를 기초로 하여 그것이 오랜 시간을 경과하는 동안 禮가 퇴이하여 제도로서 아름답지 못한 것, 속되어서 준행할 수 없는 것, 시대에 맞지 않는 것 등이 있으므로 英祖의 王命에 따라 朝臣들이 다시 다듬고 손질하여 만든 책으로 1744년(英祖 20)에 완성한 것이다. 『經國大典』의 속편인 『續大典』과 함께 같은 때 찬집되었다. 각권 수록 내용은 권 1 앞에 尹汲이 쓴 御製序 및 序例∙考異와 吉禮, 권 2 嘉禮, 권 3 嘉禮, 권 4 賓禮∙軍禮, 권 5 凶禮와 끝에 편차에 참여한 조신의 명단이 있다.『五禮儀』를 引用한 것은 전부 「 原書」라고 표시하여 전후의 변화관계를 잘 나타내 주었으며 그 중에서 명목이 증가된 것과 器服을 고친 것은 일일이 모아서 도설을 만들어 序例에 첨가하였다. 그리고 「 原書」에다 註를 붙여 이를 增修하여 본문의 내용과 다른 것은 그때그때 수록하여 번잡을 피하였다. 이책을 만든 것은 莊陵의 復位 후이므로 그에 대한 禮儀文이 많이 실려 있다. 대체로 續編의 儀節은 모두 年代와 先儒의 說 및 註를 대부분 붙여서 알기 쉽게 해 두었다. 그리고 序例에서 「 原書」와 비교하여 名目과 儀節이 고금에 다른 것이 있을 경우, 그것을 수정해야 하나 「 原書」에 붙일 수 없기 때문에 「 辨證」 1編을 따로 만들어『考異錄』이라 하여 序例뒤에 붙였다. 이 예대로 각 항목 밑에 각기 考異를 붙여 「 序例考異」, 「 吉禮考異」, 「 嘉禮考異」, 「 軍禮考異」, 「 凶禮考異」 등으로 나누었으며 이 항목에는 각각 변증된 내용에 따라 목차가 붙어 있어서 그 개정된 사항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게 하였다.『國朝五禮儀』가 朝鮮 전후의 의례를 파악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라면 朝鮮 후기에 와서는 위책과 함께 이 책이 國家儀式의 기준이 되어온 것이다. 한편 본 규장각에는 4권 2책으로 된 同名의 本이 있는데 내용에 있어서는 본서와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여기에서는 考異目錄이 완전히 빠져있고 吉禮의 永禧殿조의 내용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러한 兩書의 차이를 근거로 하여 이것이 약간 먼저 출판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것을 출간하였다가 다시 그 부족된 곳을 보관하여 5권 4책의 본서로 출판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6. 『국조속의례의보(國朝續五禮儀補』
   『국조속의례의보』는『국조속오례의』를 보충한 책으로, 1751년(영조 27) 신만(申晩) 등에 의하여 편찬되었다. 2권 1책, 목판본으로 권1에 길례(吉禮) 11편, 권2에 가례(嘉禮) 10편 등을 보충하였는데, 왕이 친히 종묘(宗廟)에 향사지낼 때 생기(牲器)를 보살피는 절차를 비롯하여 서계시(誓戒時)에 왕세자가 입참(入參)하는 절차, 영희전(永禧殿)에서 세자가 아헌하는 절차, 성균관에서 문과나 무과의 시험을 보일 때 왕세자가 입참하는 절차 등 주로 왕세자와 왕세손에 관한 의식절차를 규정지은 것이다.
   또한, 종묘·사직·영희전 등에서 왕세자가 왕을 섭사하는 대행의식(代行儀式)을 강정했고, 또한 왕이 유고하여 정무를 보지 못할 때 왕세자가 섭정하는 절차를 규정지었으며 왕세손의 관례(冠禮)·납빈(納嬪)·서연(書筵)·입학의 절차를 강정하였다.
   이 책은 왕의 친림행사 이 외에 왕세자나 왕세손의 대행을 규정한 것이므로 당시 궁중의 필요에 의하여 제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국조오례의』나『국조속오례의』를 제정하여 시행하는 과정에서 미비한 점을 보충해놓은 것이므로, 위의 세가지 예서를 모두 합하면 완전한 국가전형의 예서가 된다.
7. 조선시대 의궤(儀軌)와 그 특징
   의궤(儀軌)란 글자 그대로 '의례(儀禮)의 궤범(軌範)'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의궤는 국가 오례에 따른 '왕실 및 국가의 각종 의례적 행사를 수행한 뒤, 그 전말을 정리하여 후일 궤범으로 삼기 위해 남긴 문헌들'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궤범'이라는 말에서 엿볼 수 있듯이 의궤는 일반 기록보다 더욱 권위있는 기록이다. 따라서 의궤에는 대부분 그 행사에 필요한 물품이나 쓰인 기물들이 양식과 형태에 따라서 그림으로 설명해 놓은 도설과 도해, 그리고 도식(圖式-圖形)이 첨부되어 있다.
   그런데 현존하는 의궤를 실사(實査)해 보면, 의례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보이는 건축(建築)이나 책(冊)의 찬술, 간행, 녹훈(錄勳) 등의 경우에도 의궤가 작성되었다. 예컨대 장서각(藏書閣) 소장의 『순치십사년칠월일추쇄도감의궤(順治十四年七月日推刷都監儀軌)』(藏 2-3671)의 경우 1655年~1657年(孝宗 6~8)에 各司의 노비(奴婢)를 추쇄(推刷)하고, 추쇄에 관련된 일체의 내용을 종합하여 추쇄도감(推刷都監)에서 작성하였던 의궤이다. 도망간 노비를 추쇄하는 일은 왕실이나 국가의 의례(儀禮)와는 거리가 멀다. 의례라기보다는 국가의 행정적인 공무에 해당한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의궤의 개념을 의례에만 한정시키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의궤는 대부분 의례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의례를 기록하고 있는 기록물로는 의궤 이외에도 의주(儀註), 일기(日記), 등록(謄錄) 등이 있다. 의궤를 이들 기록물과 비교해 본다면 의궤의 성격이 더욱 분명해 질 것이다. 우선 의주와 비교해 보면, 의주도 의례행위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궤와 공통된다. 의주는 의례가 시작되기 전에 미리 여러 예제 관련 서적에서 의례의 절차를 조사해 놓은 의례의 참고서이다. 의궤는 의식을 마치고 난 뒤, 그 의식을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기록해 둔 책이다.
   '의궤'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1361년(공민왕 10)에 홍건적의 난을 피해 춘추사적(春秋事蹟) 및 각종 제향 의궤 들을 땅에 묻었다는 내용이다. 이를 보면, 고려 시기에도 의궤들을 만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난이 평정된 후 다시 땅을 파보니, 10분의 2도 건지지 못했다고 하니, 아마도 고려 시기 의궤들, 강도 천도나 원간섭기를 피해 그래도 공민왕대까지 전해졌던 의궤들은 이때 거의 다 없어지지 않았을까 한다.
   고려의 전통을 이어, 조선에 들어서서도 이른 시기부터 의궤를 마련하였다. 왕조를 개창한 태조대부터 의궤를 작성하였는데, 종묘 제사에서 쓸 춤에 대한 의궤와 경복궁 창건에 관한 의궤가 그것이다. 이미 이른 시기부터 예서에 해당하는 의궤와 백서에 해당하는 의궤가 만들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에도 후대에 볼 수 있는 많은 종류의 의궤들이 조선 전기에도 편찬되었음을 실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궤들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모두 소진되어 현전하지 않는다. 불행히도 임진왜란 전에는 지방 사고에는 거의 보관하지 않았고, 중앙 관련 부처에만 한두 벌 보관하는 정도였기 때문에 전란의 와중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의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600년(선조 33) 선조비인 의인왕후의 국장을 치루면서 만든 것들이다. 이때 만들어진 빈전도감의궤, 산릉도감의궤는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전해지고 있고, 국장도감의궤는 강화도 외규장각에 있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현전하지 않는다. 병인양요(1866)의 와중에 불타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시대를 내려오면서 의궤들은 그 종류와 숫자가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7세기 숙종대를 기점으로 의궤의 숫자가 대폭적으로 증가하는데, 이는 분상처를 적어도 5곳에서 9곳까지 확장한 영향이 크다. 의궤에 따라 분상처가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어람건과 관련 부서들 분상건(보통 의정부와 예조, 춘추관 등이 그 대상이 된다) 지방의 4곳 사고 분상 등이 기본이 되고, 8건 이하를 만들 때에는 지방 사고 중 한두 곳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재위 기간이 길었고, 대사례, 친경, 친잠례 등 이전에 별로 안 해봤던 예들을 많이 시행해보았던 영조대와 황제 즉위를 계기로 또 많은 새로운 예들을 시행했던 고종대에도 각종 의궤가 많이 편찬된 편이었다.
   정조대에 들어서면, 의궤 분상과 관련해서 새로운 조처가 내려지는데, 바로 왕에게 바치는 어람건을 폐지한 것이다. 별로 보지도 않는데, 쓸데없이 만들지 말라는 것이 전교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규장각을 설치하고 규장각 분상본을 어람건과 똑같은 형식으로 만들어 올리게 하였기 때문에, 규장각이라는 기관을 어람건을 분상받고 보존하는 기관으로 격을 만들어주기 위한 방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결국 이름만 바뀌었을 뿐 어람건은 여전히 만들어졌고, 이후에도 같은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현전하는 의궤로 공공기관에서 보관하고 있어 수량이 파악된 의궤들은 650여 종이 넘는다. 국내에서는 조선 규장각의 후신인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장서각이 있고, 해외에는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과 일본 궁내청이 있다. 650여 종 중 80%가 넘는 양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다.
   1985년 박병선 여사의 조사 활동을 통해 국내에 알려진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약 170여 종의 의궤들은 1866년 병인양요 때 가져간 책들이다. 병인양요 이전에 편찬된 의궤들 중 어람건들이 대부분인 것이 특징이나, 이중에서 국내에서 판본을 찾을 수 없는 유일본은 30종 뿐이다. 병인양요 때 화재 속으로 사라져 이름만 전해지고 있는 유일본이 90여 종에 달한다.
   같은 종이라 하더라도 형태상 의궤는 크게 어람건과 분상건, 두 가지로 구별된다. 어람건은 말 그대로 왕에게 올리는 책으로서, 속은 우윳빛이 도는 두툼한 종이를 쓰고 붉은 색으로 줄을 그었으며, 글씨도 매우 공들여서 썼다. 또한 외양도 무척 화려하다. 어람건을 펼쳤을 때 느끼게 되는 감동은 말로 형언할 수 없다. 바로 어제 닥나무를 두드려 만들어낸 듯한 손때 한 번 안탄 종이에 공들여 쓴 글씨, 손으로 그었을 것인데도 비뚤어짐이나 번짐하나 없는 붉은 색 인찰선은 감동 그 자체이다.
   그러나 인조대부터 제작된 비교적 초기 의궤들이 바로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있다. 1849년 이후 제작된 어람건들은 강화도로 옮겨가지 않아서였는지 대부분 국내에 남아 있으며, 설혹 어람건이 없다 하여도 다른 분상건들이 많이 남아 있어서 자료가 아예 없는 경우는 드물다. 인조대 무렵의 의궤들은 어람건 1건과 분상건 1건 식으로 두어 건만 만들어진 경우가 많은데, 강화도에 있던 사고를 프랑스군이 불태우면서 초기 의궤들 많은 수가 소실되었고, 그 중 아주 극히 일부만이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있는 것이다. 프랑스에 있는 책들 174종의 책들은 대부분이 어람건이다.
   어람건은 왕이 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매우 전시적인 책이다. 이 책은 "보기 위한 책"이 아니라, 장식용으로 만들어진 경우가 허다하다. 그에 비해 중앙 부서, 특히 예조나 의정부에 보관한 책은 실제로 참고하기 위한 책이다. 분상건은 어람건보다 하급의 종이를 사용하며, 글씨나 표지 제본 모두 어람건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래도 이렇게 만든 분상건들이 사고 분상본처럼 그냥 보존만 되었으면 나름대로 깔끔하게 남아 있었을 것이나, 예조나 의정부에 보관된 책들은 그렇지 않았다. 후대에 와서 비슷한 의식을 치룰 때가 되면 어김없이 바로 직전의 의궤들이 참고가 되었고, 그때마다 예조의 책들은 대상 자료가 되었다. 그래서 손때가 잔뜩 타서 종이들이 찢어지거나 몇 장씩 뭉쳐 있는 경우들도 많고, 각 내용별로 초서로 "행(行)"이라고 쓴 첨지들이 빼곡히 붙어 있기도 하다.
   이렇듯 필사본 의궤들은 같은 종이라고 하더라도 분상건 별로 각각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 또 사람이 베껴 쓰는 것인 만큼 책 별로 오자나 탈자 등도 있을 수 있다. 실제로 장수를 세어보면, 같은 종의 의궤라도 몇 장씩 차이 나는 경우를 볼 수가 있다. 심한 경우에는 어떤 분상본에는 반차도를 넣고, 어떤 데에는 넣지 않는 경우도 있다.

저자 : 한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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