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잠서원(道岑書院)의 사림(士林)들에게 답하는 편지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
제가 일본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갔을 적에 제군자(諸君子)들께서 부족한 저를 못나다고 여기지 않고 문득 노선생(老先生)의 묘도문자(墓道文字)를 써서 새기는 일을 저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이에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가 없어서 머뭇거리다가 공경스레 승낙하였습니다. 그 뒤 일을 마친 뒤에는 다시 시사(時事)가 크게 변하여 중외(中外)로 분주하게 돌아다니느라 몹시 바빴던 탓에 잠시도 짬을 내어 붓을 잡을 겨를이 없었던 지가 지금까지 8, 9년이나 되었으니, 탄식스럽고 죄송스러운 마음이 교차하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뜻하지 않게 제군자들께서 저를 책망하지 않고 곡진하게 깨우치면서 천리 먼 이곳까지 편지를 보내 주었는데, 편지 내용이 간절하고 정성스러운바, 어쩜 이리도 예가 지나치고 정성이 지극하단 말입니까. 두 번 절한 다음 자세를 바로하고서 읽어 보노라니, 황공스런 마음에 진땀이 흐르면서 어찌할 줄을 모르겠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노선생의 학문과 도덕은 위로 이락(伊洛)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갔으며, 말씀과 가르침은 능히 후세 사람들을 영원히 가르칠 만합니다. 그러니 그것을 천명(闡明)하고 발양(發揚)하는 것은 참으로 아무나 능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문장에 뛰어난 거장은 각 시대마다 있는 법입니다. 그러니 저와 같이 못난 사람이 어찌 감히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늦게 태어난 말학(末學)으로서 노둔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오직 노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배우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고 있는데, 이제 문자를 쓰는 일로써 묘도문자를 새기는 일에 종사하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참으로 감히 고사할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종시토록 제군자들의 성대한 가르침을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가례고증(家禮考證)》은 선현들이 미처 밝혀내지 못한 바를 확충시킨 것으로서 의절(儀節)과 정형(正衡)에 있어서 능히 앞서지 못할 바가 있으니, 온 세상에 간행하여 반포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본도(本道)는 물력(物力)이 크게 부족하여 아마도 비용을 마련해 낼 길이 없을 듯하며, 영백(嶺伯)이 기꺼이 각판(刻板)할 것이라고도 기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 지방의 선비들과 더불어서 명을 받들어 주선하는 것이 마땅할 뿐입니다.
문집의 서문(序文)에 대한 것은 역시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성리자의(性理字義)》와 《독서록(讀書錄)》은 일찍이 북로(北路)에서 간행한 것이 있기에 감히 한 부(部)씩을 올립니다. 총망 중에 다 쓰지 못하고 이만 줄입니다.
[주D-002]성리자의(性理字義)와 …… 있기에 : 《성리자의》는 송나라의 북계(北溪) 진순(陳淳)이 지은 책이며, 《독서록(讀書錄)》은 경헌(敬軒) 설선(薛瑄)이 지은 책인데, 김세렴(金世濂)이 인조 19년(1641)에 안변도호부사(安邊都護府使)로 있을 적에 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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