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천집 ( 月川集 )
  형태서지
권수제  月川先生文集
판심제  月川先生文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666年刊
권책  原集 6권, 年譜, 附錄 합 3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0×16.3(㎝)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奎4583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38
 저자
성명  조목(趙穆)
생년  1524년(중종 19)
몰년  1606년(선조 39)
 士敬
 月川, 東皐
본관  橫城
특기사항  退溪 李滉의 門人
 가계도
 趙瓊
 
 趙大春
 
 安東權氏
 權受益의 女
 趙肅
 
 趙穆
 
 安東權氏
 權盖世의 女
 趙龜朋
 早卒
 女
 
 金裕吉
 
 女
 
 權昞
 
 女
 
 金光纉
 
 側室 宣城金氏
 金鳳齡의 女
 趙壽朋
 進士
 趙錫朋
 主簿
 女
 
 女
 
 琴憙
 
 女
 
 權重器
 
 女
 
 琴蘭秀
 
 側室
 
 趙老得
 
 趙末得
 

기사전거 : 世系圖, 神道碑銘(鄭蘊 撰), 趙大春墓碣(趙穆 撰)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중종 19 1524 갑신 嘉靖 3 1 3월 23일, 禮安縣 月川里에서 태어나다.
중종 30 1535 을미 嘉靖 14 12 四書三經을 모두 읽다.
중종 33 1538 무술 嘉靖 17 15 겨울, 退溪 李滉의 문하에 들어가 受業하다.
중종 36 1541 신축 嘉靖 20 18 1월, 淸凉山에서 독서하다. ○ 가을, 향시에 합격하고 이어 생원시에 합격하다. ○ 11월 石臺庵에서 독서하다.
중종 37 1542 임인 嘉靖 21 19 6월, 安東黌舍를 유람하다.
중종 38 1543 계묘 嘉靖 22 20 1월, 玄沙寺에서 독서하다. ○ 10월, 廣興寺에서 독서하다.
중종 39 1544 갑진 嘉靖 23 21 11월, 豐基 郡守로 부임한 愼齋 周世鵬을 찾아보다.
인종 1 1545 을사 嘉靖 24 22 白雲洞書院을 유람하다.
명종 1 1546 병오 嘉靖 25 23 5월, 모부인 權氏喪을 당하다.
명종 4 1549 기유 嘉靖 28 26 參奉 權盖世의 女와 혼인하다. ○ 5월, 豐基에서 퇴계선생을 배알하고 이어 백운동서원에 머물다.
명종 5 1550 경술 嘉靖 29 27 퇴계선생에게 經書를 質疑하다.
명종 6 1551 신해 嘉靖 30 28 鄕試와 生員試에 합격하다.
명종 7 1552 임자 嘉靖 31 29 봄, 生員會試에 합격하다. ○ 12월, 玄沙寺에서 脩契하다.
명종 8 1553 계축 嘉靖 32 30 12월, 성균관에 유학하다.
명종 9 1554 갑인 嘉靖 33 31 4월, 고향으로 돌아오다. ○ 9월, 愼齋 周世鵬의 상에 곡하다.
명종 10 1555 을묘 嘉靖 34 32 6월, 聾巖 李賢輔의 상에 곡하다. ○ 12월, 鄕擧別試에 응시하여 5등하다.
명종 12 1557 정사 嘉靖 36 34 4월, 성균관에 유학하다.
명종 13 1558 무오 嘉靖 37 35 5월, 月瀾寺에서 독서하다.
명종 14 1559 기미 嘉靖 38 36 3월, 淸遠臺를 짓다.
명종 15 1560 경신 嘉靖 39 37 퇴계선생을 모시고 芙蓉山에 올라가 精舍의 터를 정하다. ○ 4월, 月瀾寺에서 독서하다. ○ 퇴계선생을 모시고 孤山을 유람하다.
명종 17 1562 임술 嘉靖 41 39 3월, 퇴계선생을 모시고 翠微峰에 오르다.
명종 18 1563 계해 嘉靖 42 40 8월, 퇴계선생을 배알하고 이어 陶山에 머물며 經學을 講論하다.
명종 19 1564 갑자 嘉靖 43 41 퇴계선생을 모시고 紫霞峯에 오르다.
명종 20 1565 을축 嘉靖 44 42 9월, 퇴계선생을 모시고 歷川의 남쪽에 있는 凌雲臺와 鰲潭 등을 유람하다.
명종 21 1566 병인 嘉靖 45 43 2월, 將仕郞 恭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7월, 퇴계선생에게 「心經」을 질의하다.
선조 1 1568 무진 隆慶 2 45 6월, 集慶殿 參奉이 되다. ○ 12월, 휴가를 받아 돌아온 후에 사직하고 출사하지 아니하다.
선조 3 1570 경오 隆慶 4 47 7월, 퇴계선생을 모시고 諸生과 함께 易東書院에 모여 「心經」을 강론하다. ○ 8월, 禹倬선생을 역동서원에 봉안하다. ○ 11월, 溪上에서 퇴계선생을 간병하다. ○ 12월, 퇴계선생의 상을 당하다.
선조 4 1571 신미 隆慶 5 48 퇴계선생의 장례에 참여하다.
선조 5 1572 임신 隆慶 6 49 童蒙敎官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4월, 동문과 함께 尙德祠를 도산에 건립하는 일을 의논하다. ○ 5월, 〈退溪先生言行總錄〉을 짓고, 동문과 함께 의논하여 연보의 초고를 잡다.
선조 6 1573 계유 萬曆 1 50 4월, 부친상을 당하다. ○ 6월, 三公과 吏曹가 함께 의논하여 學行이 뛰어난 인물을 천거하는데 首薦에 들다. 함께 천거된 인물은 李之蓾, 鄭仁弘, 崔永慶, 金千鎰이다. 이에 參上에 오르다.
선조 8 1575 을해 萬曆 3 52 6월, 造紙署 司紙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공조 좌랑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7월, 造紙署 司紙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선조 9 1576 병자 萬曆 4 53 5월, 「理學通錄」의 跋을 짓다. ○ 10월, 奉化 縣監이 되다.
선조 11 1578 무인 萬曆 6 55 3월, 文殊山을 유람하다. ○ 4월, 淸凉山을 유람하다. ○ 8월, 陶山의 享祀에 참여하다. ○ 小白山을 유람하다.
선조 12 1579 기묘 萬曆 7 56 7월, 체직되어 돌아오다. ○ 9월, 제생과 함께 淸凉山을 유람하다. ○ 月川書堂에서 강학하다.
선조 13 1580 경진 萬曆 8 57 「朱子大全」을 한 책으로 抄錄하고 「朱書抄」라고 명명하다. 또 〈困知雜錄〉을 만들다. ○ 6월, 공조 좌랑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7월, 全羅 都事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도산에서 제생을 모아 강학하다. ○ 10월, 宜寧 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선조 14 1581 신사 萬曆 9 58 1월, 역동서원에서 제생을 모아 강학하다. ○ 高靈 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4월, 忠淸道 都事가 되다. ○ 8월, 휴가를 받아 귀향하고는 사직하고 출사하지 않다.
선조 15 1582 임오 萬曆 10 59 형조 좌랑에 제수되고, 이어 공조 좌랑으로 바뀌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선조 16 1583 계미 萬曆 11 60 新寧 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선조 17 1584 갑신 萬曆 12 61 9월, 퇴계선생문집을 편집하다. ○ 盈德 縣監에 제수되었으나 豐基에 도착하여 사직소를 올리고 부임하지 않다.
선조 18 1585 을유 萬曆 13 62 1월, 工曹佐郞 兼 校正廳郞廳이 되다. ○ 2월, 공조 정랑에 移拜되다. ○ 5월, 典牲署主簿 兼 校正廳郞廳이 되다. ○ 11월 工曹正郞 兼 校正廳郞廳이 되다.
선조 19 1586 병술 萬曆 14 63 9월, 尙瑞院 判官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10월, 錦山 郡守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선조 20 1587 정해 萬曆 15 64 1월, 丹陽 郡守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4월, 掌苑署 掌苑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5월, 廬江書院에서 동문들과 퇴계집을 교정하다. ○ 11월, 陜川 郡守가 되다.
선조 21 1588 무자 萬曆 16 65 8월, 釋菜禮를 거행하다. ○ 鰲山書院을 방문하다.
선조 22 1589 기축 萬曆 17 66 鄕校를 重修하다. ○ 8월, 釋菜禮를 거행하다. ○ 10월, 伽倻山을 유람하다.
선조 23 1590 경인 萬曆 18 67 5월, 귀향하다. ○ 9월, 月川書堂을 중수하다.
선조 24 1591 신묘 萬曆 19 68 4월, 涉趣園을 짓다.
선조 25 1592 임진 萬曆 20 69 2월, 濟用監 僉正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선조 27 1594 갑오 萬曆 22 71 6월, 易東書院에 머물며 제생과 함께 「心經」을 강학하다. ○ 9월, 歙谷 縣令이 되다. ○ 10월, 軍資監主簿에 제수되었으나 사은숙배하고 바로 사직소를 올리다. ○ 월천서당으로 돌아오다. ○ 11월, 掌樂院 正이 되다.
선조 28 1595 을미 萬曆 23 72 5월, 襄陽 府使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9월, 掌樂院 正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12월, 司膽寺 正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선조 29 1596 병신 萬曆 24 73 體察使 李元翼이 來訪하다.
선조 30 1597 정유 萬曆 25 74 西厓 柳成龍에게 편지하여 主和의 잘못을 논하다.
선조 32 1599 기해 萬曆 27 76 1월, 도산서원의 묘에 배알하다. ○ 7월, 白雲洞書院을 유람하다.
선조 33 1600 경자 萬曆 28 77 5월, 도산서원에서 퇴계선생문집의 간행을 마치고 告廟하다.
선조 34 1601 신축 萬曆 29 78 1월, 司宰監 正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10월, 天淵臺 三大字를 刻하고 告廟하다. ○ 校正廳郞廳으로 부르는 召命에 따라 入城하려 하였으나 병으로 呈狀하고 부임하지 않다. ○ 11월, 淸凉山을 유람하다.
선조 35 1602 임인 萬曆 30 79 2월, 尙衣院 正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禮賓寺 正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윤2월, 折衝將軍 義興衛 副護軍에 특별히 승진되다. ○ 3월, 校正廳 堂上으로 부르는 召命에 따라 入城하려 하였으나 병으로 呈狀하고 부임하지 않다. ○ 工曹 參議가 되다.
선조 37 1604 갑진 萬曆 32 81 1월, 도산서원과 역동서원의 廟에 배알하다. ○ 2월, 琴蘭秀의 상에 곡하다. ○ 3월, 도산서원에서 기거하다. ○ 7월, 嘉善大夫 龍驤衛 副護軍에 특별히 승진하다. ○ 윤9월, 芙蓉精舍가 낙성되다. ○ 11월, 공조 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선조 39 1606 병오 萬曆 34 83 1월, 도산서원의 묘에 배알하다. ○ 10월, 졸하다.
선조 40 1607 정미 萬曆 35 - 1월, 芙蓉山 남쪽에 장사 지내다.
광해군 5 1613 계축 萬曆 41 - 禮安 儒生 등이 감사 尹暉에게 呈文하여 趙穆의 도산서원 從享을 請하다.

기사전거 : 年譜(金澤龍 撰)에 의함
 편찬 및 간행
본집의 편찬에 관한 중요한 기록은 1662년 許穆의 序文이다. 許穆은 이 서문에서 禮安 縣監 李碩寬의 청탁에 따라 저자의 子 趙錫朋이 소장한 草稿 4권을 刪定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미수 특유의 서체로 쓰여진 본집 서문의 기사와 「眉叟記言」의 〈月川集序〉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즉 「眉叟記言」에 수록된 서문 말미에 “又以言行記神道碑文附焉”의 11자가 본집에 수록된 서문에는 빠져 있다. 「眉叟記言」은 自編稿이므로 變改를 상정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본집이 간행되면서 그 부분이 삭제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본집의 간행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다. 즉 위의 기사는 眉叟가 본집을 산정하면서 부록 부분의 처리를 언급한 것으로 “언행기와 신도비문을 부록으로 첨부한다.”는 뜻이다. 현재 본집의 부록에는 桐溪 鄭蘊이 지은 신도비문은 수록되어 있으나 언행기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미수가 산정한 초고본에 수록되어 있던 언행기가 간행의 과정에서 삭제되고 그와 함께 본 서문에서도 관계기사가 삭제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言行記는 月川의 문인인 金澤龍(1547~1627)이 지은 〈月川言行錄〉으로서 이 언행록의 기사 중에는 月川이 西厓를 “主和誤國”으로 비판하여 보낸 이른바 정유년(1597) 편지가 장황하게 기술되어 있었으며, 이것이 바로 월천의 문도와 서애의 문도 사이에 분쟁을 야기시킨 것으로서 서애의 문도인 鶴沙 金應祖의 〈西厓辨誣錄〉 (鶴沙集 卷5)에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월천의 高弟인 김택룡과 서애의 고제인 김응조를 대표로 하여 야기된 분쟁은 당시에 파문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월천 문도에게 있어서 이렇게 중요한 言行記가 삭제되어 있으며, 전존된 것이 확실한 정유년 편지도 본집에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김택룡이 찬한 연보에서도 정유년의 기록은 西厓 柳相國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간단한 기사 아래에 細註로 “論和議之非”라고만 하여 간행 당시의 상황을 엿보게 한다. 더욱이 이 「月川集」의 발문을 金應祖가 찬하고 있다는 점은 본집에서 서애와 관련된 기록이 대부분 삭제되거나 완화될 수밖에 없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아울러 이는 「月川集」 간행의 전제조건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하여튼 眉叟가 말한 초고 4권은 미수의 산정을 거치고, 이어 서애 비판 관계 기록이 정리된 후에 1666년경 禮安에서 목판으로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초간본》이 초간본은 규장각(奎4583),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299),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D1-A681)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초간본으로 규장각장본이다.

기사전거 : 序(許穆 撰), 跋(金應祖 撰)에 의함
 구성과 내용
권수에는 許穆이 쓴 序가 있고 이어서 본집의 目錄, 世圖, 年譜가 실려 있다.
본집은 詩, 疏, 書, 辨疑, 雜著, 跋, 祝文, 祭文, 墓碣, 墓誌 그리고 論의 순서로 「退溪集」의 편차와 매우 흡사하다. 권1의 시는 대략 저작 시대에 따랐으며, 퇴계선생 및 그 문도들과의 수창시가 많다. 권2의 상소는 대부분이 사직소인데, 이 중 〈甲午陳情疏〉는 왜구와의 강화를 극력 반대하는 상소문이다.
권3의 書는 客體의 비중에 따라 편차하였는데 모두 21편이다. 특히 退溪에게 보낸 편지는 5편에 불과한데, 이는 전란으로 대부분 유실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與同門諸契論朱書節要刊本曲折”은 「朱子書節要」의 간행에 즈음하여 저자의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서책의 크기와 자체의 형태까지 하나 하나 언급하고 있어 당시 서책의 간행과 관련한 정서를 엿볼 수 있다. 이어 동문에게 퇴계선생의 碣文과 誌文의 내용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한 편지가 있는데, 이는 高峯 奇大升이 찬한 것에 대한 것이다.
권4의 「心經稟質」, 「朱書節要稟質」, 「尙書疑義」, 「家禮疑義」는 모두 퇴계와 여러 가지 경서에 대하여 논한 것으로서 저자가 묻고 퇴계가 답하는 일문일답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중 퇴계가 답한 부분을 「退溪集」의 서간과 대조해 보면 대부분 “先生答曰”의 형식적인 문자를 제외하고는 한 자도 틀림없이 동일하다. (예를 들면 〈心經稟質〉의 앞부분은 「退溪集」권23의 23판과 27판의 편지와 동일하며, 〈朱書節要稟質〉은 권23의 33판 〈答趙士敬問目〉과 뒤의 “問仁義不足以盡道” 이하 몇 줄을 제외하고는 동일함) 따라서 저자가 陶山에서 직접 講經하며 기록한 것이라기보다는 「退溪集」에서 추출한 것으로 보인다.
권5의 雜著와 권6의 跋, 祝文, 祭文에는 퇴계와 관련된 글들이 산견된다. 특히 도산서원에 관한 여러 가지 축문, 〈退溪集告成文〉 및 〈告退溪埋誌文〉은 저자가 갖는 퇴계 문도에서의 위치를 보여 주는 것들이다. 끝으로 말미에 실린 두 개의 論은 荀彧을 비판한 〈荀彧論〉과 부정적인 붕당관을 주장한 〈朔蜀洛三黨論〉이다.
부록에는 신도비명과 賜祭文, 祭文, 挽詞 등이 실려 있으며 권미에 金應祖가 쓴 跋文이 실려 있다.

필자 : 徐廷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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