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력 |
서기 |
간지 |
연호 |
연령 |
기사 |
중종 |
19 |
1524 |
갑신 |
嘉靖 |
3 |
1 |
3월 23일, 禮安縣 月川里에서 태어나다. |
중종 |
30 |
1535 |
을미 |
嘉靖 |
14 |
12 |
四書三經을 모두 읽다. |
중종 |
33 |
1538 |
무술 |
嘉靖 |
17 |
15 |
겨울, 退溪 李滉의 문하에 들어가 受業하다. |
중종 |
36 |
1541 |
신축 |
嘉靖 |
20 |
18 |
1월, 淸凉山에서 독서하다. ○ 가을, 향시에 합격하고 이어 생원시에 합격하다. ○ 11월 石臺庵에서 독서하다. |
중종 |
37 |
1542 |
임인 |
嘉靖 |
21 |
19 |
6월, 安東黌舍를 유람하다. |
중종 |
38 |
1543 |
계묘 |
嘉靖 |
22 |
20 |
1월, 玄沙寺에서 독서하다. ○ 10월, 廣興寺에서 독서하다. |
중종 |
39 |
1544 |
갑진 |
嘉靖 |
23 |
21 |
11월, 豐基 郡守로 부임한 愼齋 周世鵬을 찾아보다. |
인종 |
1 |
1545 |
을사 |
嘉靖 |
24 |
22 |
白雲洞書院을 유람하다. |
명종 |
1 |
1546 |
병오 |
嘉靖 |
25 |
23 |
5월, 모부인 權氏喪을 당하다. |
명종 |
4 |
1549 |
기유 |
嘉靖 |
28 |
26 |
參奉 權盖世의 女와 혼인하다. ○ 5월, 豐基에서 퇴계선생을 배알하고 이어 백운동서원에 머물다. |
명종 |
5 |
1550 |
경술 |
嘉靖 |
29 |
27 |
퇴계선생에게 經書를 質疑하다. |
명종 |
6 |
1551 |
신해 |
嘉靖 |
30 |
28 |
鄕試와 生員試에 합격하다. |
명종 |
7 |
1552 |
임자 |
嘉靖 |
31 |
29 |
봄, 生員會試에 합격하다. ○ 12월, 玄沙寺에서 脩契하다. |
명종 |
8 |
1553 |
계축 |
嘉靖 |
32 |
30 |
12월, 성균관에 유학하다. |
명종 |
9 |
1554 |
갑인 |
嘉靖 |
33 |
31 |
4월, 고향으로 돌아오다. ○ 9월, 愼齋 周世鵬의 상에 곡하다. |
명종 |
10 |
1555 |
을묘 |
嘉靖 |
34 |
32 |
6월, 聾巖 李賢輔의 상에 곡하다. ○ 12월, 鄕擧別試에 응시하여 5등하다. |
명종 |
12 |
1557 |
정사 |
嘉靖 |
36 |
34 |
4월, 성균관에 유학하다. |
명종 |
13 |
1558 |
무오 |
嘉靖 |
37 |
35 |
5월, 月瀾寺에서 독서하다. |
명종 |
14 |
1559 |
기미 |
嘉靖 |
38 |
36 |
3월, 淸遠臺를 짓다. |
명종 |
15 |
1560 |
경신 |
嘉靖 |
39 |
37 |
퇴계선생을 모시고 芙蓉山에 올라가 精舍의 터를 정하다. ○ 4월, 月瀾寺에서 독서하다. ○ 퇴계선생을 모시고 孤山을 유람하다. |
명종 |
17 |
1562 |
임술 |
嘉靖 |
41 |
39 |
3월, 퇴계선생을 모시고 翠微峰에 오르다. |
명종 |
18 |
1563 |
계해 |
嘉靖 |
42 |
40 |
8월, 퇴계선생을 배알하고 이어 陶山에 머물며 經學을 講論하다. |
명종 |
19 |
1564 |
갑자 |
嘉靖 |
43 |
41 |
퇴계선생을 모시고 紫霞峯에 오르다. |
명종 |
20 |
1565 |
을축 |
嘉靖 |
44 |
42 |
9월, 퇴계선생을 모시고 歷川의 남쪽에 있는 凌雲臺와 鰲潭 등을 유람하다. |
명종 |
21 |
1566 |
병인 |
嘉靖 |
45 |
43 |
2월, 將仕郞 恭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7월, 퇴계선생에게 「心經」을 질의하다. |
선조 |
1 |
1568 |
무진 |
隆慶 |
2 |
45 |
6월, 集慶殿 參奉이 되다. ○ 12월, 휴가를 받아 돌아온 후에 사직하고 출사하지 아니하다. |
선조 |
3 |
1570 |
경오 |
隆慶 |
4 |
47 |
7월, 퇴계선생을 모시고 諸生과 함께 易東書院에 모여 「心經」을 강론하다. ○ 8월, 禹倬선생을 역동서원에 봉안하다. ○ 11월, 溪上에서 퇴계선생을 간병하다. ○ 12월, 퇴계선생의 상을 당하다. |
선조 |
4 |
1571 |
신미 |
隆慶 |
5 |
48 |
퇴계선생의 장례에 참여하다. |
선조 |
5 |
1572 |
임신 |
隆慶 |
6 |
49 |
童蒙敎官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4월, 동문과 함께 尙德祠를 도산에 건립하는 일을 의논하다. ○ 5월, 〈退溪先生言行總錄〉을 짓고, 동문과 함께 의논하여 연보의 초고를 잡다. |
선조 |
6 |
1573 |
계유 |
萬曆 |
1 |
50 |
4월, 부친상을 당하다. ○ 6월, 三公과 吏曹가 함께 의논하여 學行이 뛰어난 인물을 천거하는데 首薦에 들다. 함께 천거된 인물은 李之蓾, 鄭仁弘, 崔永慶, 金千鎰이다. 이에 參上에 오르다. |
선조 |
8 |
1575 |
을해 |
萬曆 |
3 |
52 |
6월, 造紙署 司紙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공조 좌랑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7월, 造紙署 司紙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선조 |
9 |
1576 |
병자 |
萬曆 |
4 |
53 |
5월, 「理學通錄」의 跋을 짓다. ○ 10월, 奉化 縣監이 되다. |
선조 |
11 |
1578 |
무인 |
萬曆 |
6 |
55 |
3월, 文殊山을 유람하다. ○ 4월, 淸凉山을 유람하다. ○ 8월, 陶山의 享祀에 참여하다. ○ 小白山을 유람하다. |
선조 |
12 |
1579 |
기묘 |
萬曆 |
7 |
56 |
7월, 체직되어 돌아오다. ○ 9월, 제생과 함께 淸凉山을 유람하다. ○ 月川書堂에서 강학하다. |
선조 |
13 |
1580 |
경진 |
萬曆 |
8 |
57 |
「朱子大全」을 한 책으로 抄錄하고 「朱書抄」라고 명명하다. 또 〈困知雜錄〉을 만들다. ○ 6월, 공조 좌랑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7월, 全羅 都事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도산에서 제생을 모아 강학하다. ○ 10월, 宜寧 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선조 |
14 |
1581 |
신사 |
萬曆 |
9 |
58 |
1월, 역동서원에서 제생을 모아 강학하다. ○ 高靈 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4월, 忠淸道 都事가 되다. ○ 8월, 휴가를 받아 귀향하고는 사직하고 출사하지 않다. |
선조 |
15 |
1582 |
임오 |
萬曆 |
10 |
59 |
형조 좌랑에 제수되고, 이어 공조 좌랑으로 바뀌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선조 |
16 |
1583 |
계미 |
萬曆 |
11 |
60 |
新寧 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선조 |
17 |
1584 |
갑신 |
萬曆 |
12 |
61 |
9월, 퇴계선생문집을 편집하다. ○ 盈德 縣監에 제수되었으나 豐基에 도착하여 사직소를 올리고 부임하지 않다. |
선조 |
18 |
1585 |
을유 |
萬曆 |
13 |
62 |
1월, 工曹佐郞 兼 校正廳郞廳이 되다. ○ 2월, 공조 정랑에 移拜되다. ○ 5월, 典牲署主簿 兼 校正廳郞廳이 되다. ○ 11월 工曹正郞 兼 校正廳郞廳이 되다. |
선조 |
19 |
1586 |
병술 |
萬曆 |
14 |
63 |
9월, 尙瑞院 判官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10월, 錦山 郡守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선조 |
20 |
1587 |
정해 |
萬曆 |
15 |
64 |
1월, 丹陽 郡守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4월, 掌苑署 掌苑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5월, 廬江書院에서 동문들과 퇴계집을 교정하다. ○ 11월, 陜川 郡守가 되다. |
선조 |
21 |
1588 |
무자 |
萬曆 |
16 |
65 |
8월, 釋菜禮를 거행하다. ○ 鰲山書院을 방문하다. |
선조 |
22 |
1589 |
기축 |
萬曆 |
17 |
66 |
鄕校를 重修하다. ○ 8월, 釋菜禮를 거행하다. ○ 10월, 伽倻山을 유람하다. |
선조 |
23 |
1590 |
경인 |
萬曆 |
18 |
67 |
5월, 귀향하다. ○ 9월, 月川書堂을 중수하다. |
선조 |
24 |
1591 |
신묘 |
萬曆 |
19 |
68 |
4월, 涉趣園을 짓다. |
선조 |
25 |
1592 |
임진 |
萬曆 |
20 |
69 |
2월, 濟用監 僉正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선조 |
27 |
1594 |
갑오 |
萬曆 |
22 |
71 |
6월, 易東書院에 머물며 제생과 함께 「心經」을 강학하다. ○ 9월, 歙谷 縣令이 되다. ○ 10월, 軍資監主簿에 제수되었으나 사은숙배하고 바로 사직소를 올리다. ○ 월천서당으로 돌아오다. ○ 11월, 掌樂院 正이 되다. |
선조 |
28 |
1595 |
을미 |
萬曆 |
23 |
72 |
5월, 襄陽 府使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9월, 掌樂院 正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12월, 司膽寺 正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선조 |
29 |
1596 |
병신 |
萬曆 |
24 |
73 |
體察使 李元翼이 來訪하다. |
선조 |
30 |
1597 |
정유 |
萬曆 |
25 |
74 |
西厓 柳成龍에게 편지하여 主和의 잘못을 논하다. |
선조 |
32 |
1599 |
기해 |
萬曆 |
27 |
76 |
1월, 도산서원의 묘에 배알하다. ○ 7월, 白雲洞書院을 유람하다. |
선조 |
33 |
1600 |
경자 |
萬曆 |
28 |
77 |
5월, 도산서원에서 퇴계선생문집의 간행을 마치고 告廟하다. |
선조 |
34 |
1601 |
신축 |
萬曆 |
29 |
78 |
1월, 司宰監 正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10월, 天淵臺 三大字를 刻하고 告廟하다. ○ 校正廳郞廳으로 부르는 召命에 따라 入城하려 하였으나 병으로 呈狀하고 부임하지 않다. ○ 11월, 淸凉山을 유람하다. |
선조 |
35 |
1602 |
임인 |
萬曆 |
30 |
79 |
2월, 尙衣院 正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禮賓寺 正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윤2월, 折衝將軍 義興衛 副護軍에 특별히 승진되다. ○ 3월, 校正廳 堂上으로 부르는 召命에 따라 入城하려 하였으나 병으로 呈狀하고 부임하지 않다. ○ 工曹 參議가 되다. |
선조 |
37 |
1604 |
갑진 |
萬曆 |
32 |
81 |
1월, 도산서원과 역동서원의 廟에 배알하다. ○ 2월, 琴蘭秀의 상에 곡하다. ○ 3월, 도산서원에서 기거하다. ○ 7월, 嘉善大夫 龍驤衛 副護軍에 특별히 승진하다. ○ 윤9월, 芙蓉精舍가 낙성되다. ○ 11월, 공조 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선조 |
39 |
1606 |
병오 |
萬曆 |
34 |
83 |
1월, 도산서원의 묘에 배알하다. ○ 10월, 졸하다. |
선조 |
40 |
1607 |
정미 |
萬曆 |
35 |
- |
1월, 芙蓉山 남쪽에 장사 지내다. |
광해군 |
5 |
1613 |
계축 |
萬曆 |
41 |
- |
禮安 儒生 등이 감사 尹暉에게 呈文하여 趙穆의 도산서원 從享을 請하다. | 기사전거 : 年譜(金澤龍 撰)에 의함 |
권수에는 許穆이 쓴 序가 있고 이어서 본집의 目錄, 世圖, 年譜가 실려 있다. 본집은 詩, 疏, 書, 辨疑, 雜著, 跋, 祝文, 祭文, 墓碣, 墓誌 그리고 論의 순서로 「退溪集」의 편차와 매우 흡사하다. 권1의 시는 대략 저작 시대에 따랐으며, 퇴계선생 및 그 문도들과의 수창시가 많다. 권2의 상소는 대부분이 사직소인데, 이 중 〈甲午陳情疏〉는 왜구와의 강화를 극력 반대하는 상소문이다. 권3의 書는 客體의 비중에 따라 편차하였는데 모두 21편이다. 특히 退溪에게 보낸 편지는 5편에 불과한데, 이는 전란으로 대부분 유실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與同門諸契論朱書節要刊本曲折”은 「朱子書節要」의 간행에 즈음하여 저자의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서책의 크기와 자체의 형태까지 하나 하나 언급하고 있어 당시 서책의 간행과 관련한 정서를 엿볼 수 있다. 이어 동문에게 퇴계선생의 碣文과 誌文의 내용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한 편지가 있는데, 이는 高峯 奇大升이 찬한 것에 대한 것이다. 권4의 「心經稟質」, 「朱書節要稟質」, 「尙書疑義」, 「家禮疑義」는 모두 퇴계와 여러 가지 경서에 대하여 논한 것으로서 저자가 묻고 퇴계가 답하는 일문일답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중 퇴계가 답한 부분을 「退溪集」의 서간과 대조해 보면 대부분 “先生答曰”의 형식적인 문자를 제외하고는 한 자도 틀림없이 동일하다. (예를 들면 〈心經稟質〉의 앞부분은 「退溪集」권23의 23판과 27판의 편지와 동일하며, 〈朱書節要稟質〉은 권23의 33판 〈答趙士敬問目〉과 뒤의 “問仁義不足以盡道” 이하 몇 줄을 제외하고는 동일함) 따라서 저자가 陶山에서 직접 講經하며 기록한 것이라기보다는 「退溪集」에서 추출한 것으로 보인다. 권5의 雜著와 권6의 跋, 祝文, 祭文에는 퇴계와 관련된 글들이 산견된다. 특히 도산서원에 관한 여러 가지 축문, 〈退溪集告成文〉 및 〈告退溪埋誌文〉은 저자가 갖는 퇴계 문도에서의 위치를 보여 주는 것들이다. 끝으로 말미에 실린 두 개의 論은 荀彧을 비판한 〈荀彧論〉과 부정적인 붕당관을 주장한 〈朔蜀洛三黨論〉이다. 부록에는 신도비명과 賜祭文, 祭文, 挽詞 등이 실려 있으며 권미에 金應祖가 쓴 跋文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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