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절요 제23권
충렬왕 5(忠烈王五)
무신 34년(1308) 원 무종(武宗) 지대(至大) 원년
○ 봄 정월에 동지밀직 조서(趙瑞)를 원 나라에 보내어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게 했다.
○ 2월에 원 나라에서 보낸 사자가 와서 연호를 고친 조서를 반포하였다.
○ 연등대회(燃燈大會)에서 시신들이 축하하는 술잔을 올리니, 왕이 답배(答杯)를 주며 이르기를, “오늘의 관등(觀燈)이 나의 마지막 관등이니 경 등은 마땅히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시신들이 모두 다 잔을 비웠다.
○ 황제가 왕에게 포도주를 하사하였다.
○ 여름 4월에 원 나라에서 사자를 보내어 향을 주고, 또 황태후의 명으로 처녀를 뽑았다.
○ 왕이 진봉산(進奉山)에서 사냥하였다.
○ 내고에서 왕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 평양군(平壤君) 조인규(趙仁規)가 졸하였다. 조인규는 상원군(祥原郡) 사람인데,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뛰어났었다. 몽고어를 베우는데 동배들보다 뛰어나지 못하다 하여 문을 닫고 3년 동안 밤낮으로 외우고 익혀서 드디어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주청할 일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조인규를 보내니 사신으로 간 적이 모두 30번이나 되었으며, 전대(專對)한 공적이 자못 많았다. 그러나 전민(田民)을 많이 모아 부자가 되었고, 또 왕비의 아버지로서 권세가 한 세상에 진동하였으며, 아들과 사위가 모두 장군과 재상의 지위에 있었다. 병이 들어 자제들이 명의를 데려다가 진찰을 하니 조인규가 말하기를, “내가 한 졸병에서 입신하여 벼슬이 더할 수 없는 품계에 이르고, 나이도 70을 넘었다. 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린 것이니 의원은 무엇하겠는가." 하였다. 그때 여러 아들들은 원 나라에 있고 오직 조연(趙璉)만이 간호하고 있었는데, 그에게 말하기를, “너희 형제 자매가 9명이나 되는데, 서로 다투어서 남에게 비웃음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근신하여라. 집안에서부터 나라일에 이르기까지 이 도리를 따를 것이며, 너희 형제들이 오기를 기다려 고루 타일러서 길이 가법으로 하여라." 하였다. 그러나 그의 딸이 염세충(廉世忠)의 아내가 되었는데, 구종(驅從)하는 종 배삼(裵三)과 간통하여 추문이 퍼졌다.
○ 5월 병인일에 왕이 병이 있어 김문연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 지밀직사사 박선(朴瑄)이 원 나라에서 돌아왔다. 황제가 전왕에게 정책(定策 새 임금을 세울 때에 계책을 도움)한 공훈이 있다고 하여 특히 개부의동삼사 태자태부 상주국 부마도위(開府儀同三司太子太傅上柱國駙馬都尉)로 제수하고 승진시켜 심양왕에 봉하였으며 또 중서성에 들어가 정사에 참의하게 하고, 금호부(金虎符)ㆍ옥대ㆍ칠보대(七寶帶)ㆍ벽전금대(碧鈿金帶)와 황금 5백 냥ㆍ은 5천 냥을 하사하였다. 황후와 황태자도 전왕을 총애하여 사금한 보물과 비단을 이루 다 셀 수 없었다.
○ 전왕이 관제를 개정하여 이혼(李混)ㆍ최균(崔鈞) 등을 보내어 관제와 비판(批判)을 선포하였다.
○ 6월에 원 나라에서 사자를 보내어 모든 왕족과 부마(駙馬)가 역마의 차자(箚子)를 사사로이 발급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 가을 7월에 재상과 추신들이 자운사(慈雲寺)에 모였는데, 어떤 사람이 익명으로 투서를 하여 말하기를, “중호(中護) 이혼이 전왕의 처소에 나아가 전선(銓選)의 방법을 의논할 때, 자기의 두 아들을 발탁하여 승진시켰으며, 그 밖에도 친척과 친구를 천거한 것이 많았습니다. 전하를 속이고 사심을 행했으니 임용하여서는 안 됩니다." 하니, 이혼이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 기사일에 왕이 신효사(神孝寺)에서 흥하였다. 유교(遺敎)에 이르기를, “불곡(不穀 왕이 자기를 낮추어서 하는 말)이 천지와 조종의 도움을 입어 외람되게 왕위에 있은 지 이제 35년이 되었다. 그 사이에 나라에 어려움이 많아 백성은 생업에 안정을 얻지 못하였다. 사악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이 함께 나왔고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들은 스스로 물러갔으니, 이것은 모두 나의 무덕함이 그렇게 만든 것으로 마음에 매우 부끄럽다. 그러나 다행히도 하늘의 도움을 입어 향년 73세가 되었다. 이제 깊은 병을 얻었는데 여러 달 동안 낫지를 않는다. 다만 심양왕을 한 번 보고 싶어서 일찍이 서신을 보내어 오기를 재촉하였는데, 죽을 때가 되었으니 어찌 기다릴 수가 있겠는가. 슬프다. 삶이 있으면 죽임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며, 아비가 전하는 것을 아들이 받는 것은 지금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예부터 그러하였다. 조종의 기업과 나라의 기무를 일체 심양왕에게 맡기니, 오직 너희 신료들은 각각 직책을 지키며 심양왕이 오기를 기다려 나의 유훈(遺訓)을 전달하여 유실함이 없게 하라." 하였다.
○ 신미일에 첨의평리 김이용(金利用)을 원 나라에 보내어 국상을 고하였다.
○ 8월에 시가(市街)의 장랑(長廊)이 낙성되었다.
○ 임자일에 전왕이 원 나라에서 와서 분상(奔喪)하였는데, 길을 재촉하여 10여 일만에 도착하였다. 빈전(殯殿)에 들어가 곡하고 전제(奠祭)를 행하니, 모든 관원들은 현관(顯冠)과 소복차림으로 시립하였다.
○ 갑인일에 왕이 경령전(景靈殿)에 나아가 왕위의 전승을 고하고, 드디어 수녕궁(壽寧宮)에서 즉위하여 여러 신하들의 조하를 받았는데, 반열의 순서는 오른쪽을 높였다. 예식을 마치기 전에 하늘에서 큰 우레와 번개가 일어나고 우박이 내렸다. 갠 뒤에 첨의사(僉議司)에서 왕에게 연회를 베풀고, 재신 이하의 여러 신하가 모두 백마를 바쳤다.
○ 9월에 양현고(養賢庫)에 은 50근을 하사하고, 예문관(藝文館)으로 하여금 군ㆍ현에서 뛰어나게 재주있는 자들을 불러 모으게 하여 직첩을 주어 훈도(訓導)에 임명하였다.
○ 언부의랑(讞部議郞) 한중희(韓仲熙)를 궁문에서 곤장을 쳤는데 사람들이 그의 죄를 알지 못하였다. 그 뒤에 중희를 불러서 위무하였다.
○ 경오일에 신효사(神孝寺)에 행차하여 황제를 위하여 복을 빌었다.
○ 무인일에 신효사에 행차하였다가 드디어 왕륜사(王輪寺)까지 들렸는데, 주지 인조(仁照)가 차를 드리고 고기반찬을 올렸다.
○ 예문사백(藝文詞伯) 오형(吳詗) 등에게 명하여 여러 궁과 내료의 관직 명칭을 고치게 하였다.
○ 용화지(龍化池)에 행차하니, 중호 김심(金深)이 왕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 수녕궁에서 중과 여승 2천 2백여 명을 공양하였다.
○ 모든 관원들이 왕의 생일을 축하하고 각각 다과를 드렸는데, 전의시(典儀寺)는 미처 드리지 못하였고 서운관(書雲觀)은 배 한 그릇 뿐이어서 전의겸관(典儀兼官) 이언충(李彦忠)과 서운제점(書雲提點) 최실(崔實)에게 모두 은 1근씩을 징수하였다.
○ 겨울 10월에 중문에 방을 붙여 이르기를, “왕륜사의 주지 인조(仁照), 용암사(龍巖寺)의 주지 용선(用宣), 선암사(仙巖寺)의 주지 약굉(若宏)과 최단(崔湍)ㆍ권한공(權漢功)ㆍ김지겸(金之謙)ㆍ김사원(金士元)ㆍ최실(崔實)ㆍ환이(桓頣)ㆍ오현량(吳玄良)ㆍ강방언(姜邦彦)ㆍ이진(李珍)ㆍ강융(姜融)ㆍ조통(趙通)ㆍ조적(曹頔)ㆍ조석(曹碩)ㆍ최현(崔玄)ㆍ정자우(鄭子羽)ㆍ최중공(崔仲公)ㆍ문점(文坫)ㆍ이백겸(李伯謙)을 제외한 사람들은 특별히 부르지 아니하면 들어오지 못한다."고 하였다.
○ 고릉(高陵)을 배알하고, 능터를 불길한 데에 정했다 하여 터를 선정한 밀직부사로 치사한 강헌(姜軒)과 고 찬성사 오윤부(伍允孚)의 사위 강미(姜美)와 외손 2명을 순군옥에 가두고, 마침내 새 능에 가서 호작관(護作官)과 공역하는 무리들에게 술을 하사하여 노고를 위로하였다.
○ 비로서 5부로 하여금 호구를 점검하게 하였다.
○ 낙랑군(樂浪君) 김혼(金琿)이 왕을 맞이하여 남산서재(男山書齋)에서 연회를 베푸니, 재신과 추신과 중들이 날마다 음식을 올리는데 호화하고 사치하기를 다툼이 심했다.
○ 심양노인(瀋陽路人)이 왕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 계사일에 왕이 빈전에 제사드리고 드디어 김문연(金文衍)의 집에 행차하여 숙창원비(淑昌院妃)와 더불어 한참동안 있으니, 사람들이 비로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숙창원비는 문연의 누이이다.
○ 유사가 대행왕의 시호를 올릴 것을 의논하니, 왕이 옳지 않다고 하며 이르기를, “상국이 있으니, 내가 장차 청하겠다. 죽책(竹冊)ㆍ옥책(玉冊)이 또한 예에 맞는가." 하니, '순성수정상승대왕(純誠守正上昇大王)'이라는 호만을 올렸다.
○ 정유일에 경릉(慶陵)에 장사지냈다. 영구가 처음 떠날 때 왕은 최질(衰絰)의 차림으로 손수 향로를 받들고 걸어서 십천교(十川橋)에 이르러서야 견여(肩輿)를 탔다. 산릉(山陵)에 이르러 장사를 마치고 왕이 능에 갔다가 곧 돌아와 상복을 벗었다. 옛 관례는 중승(中丞)이 서명하고 임금의 능을 봉하는 법인데, 항간에 전하기를, 능을 봉한 사람은 좋지 못하다고 하였다. 이날 집의 이언충(李彦忠)이 사퇴하였으므로 왕이 집의 최성지(崔誠之)에게 명하여 봉하게 하고, 또 말하기를, “너의 앞날이 내게 있지 않느냐." 하였다. 성지는 바로 최실(崔實)이다.
○ 원 나라의 황태자가 사신을 보내어 즉위를 축하하였다.
○ 왕이 각 도의 무농사(務農使) 이후(李厚)ㆍ육희지(陸希摯)ㆍ최백륜(崔伯倫) 등을 불러 효유하기를, “내가 전농사(典農司)를 둔 것은 한(漢) 나라의 상평창을 본받아 백성과 더불어 곡물을 사고 팔아 백성들의 급한 것을 구하려는 것이지 사사로운 이익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다. 또 나라에 3년을 대비할 만한 저축이 없다면 나라가 나라답게 될 수 없다. 만약 급한 일이 있게 되어 갑자기 백성에게서 색출한다면, 백성의 원망없이 일을 이루고자 한들 될 수 있겠는가. 무릇 백성으로서 세력이 강한 집에 붙은 자는 날로 부유하고 안일해지며, 외롭고 잔약한 백성은 부렴(賦斂)에 곤란을 겪고 있다. 이것은 오로지 명을 받들어 행하는 자가 사를 따르고 공을 저버린 까닭이니, 내가 매우 민망하게 여긴다. 너희들은 나의 뜻을 체득하여 그 폐단을 통렬히 개혁하되, 좇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가 범한 바에 따라 처단한 뒤에 첨의부(僉議府)에 보고하라." 하였다.
○ 재신 원관(元灌)이 수녕궁에서 왕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 병오일에 정안군(定安君) 허종(許琮)의 집에 행차하여 잔치를 베풀었으니, 허종이 새 집에 입주한 것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날 고 평양공(平陽公) 현(眩)의 아내 허씨(許氏)를 들이고 순비(順妃)라고 하였다.
○ 기유일에 김문연의 집에 행차하여 숙창원비(淑昌院妃)에게 음행하였다. 이튿날 감찰규정 우탁(禹倬)이 흰옷을 입고 도끼를 갖고 짚을 묶어 놓고 글을 올려 왕의 난행을 간하였다. 근신(近臣)이 상소문을 펴들고 감히 읽지 못하니, 우탁이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근신으로서 임금의 그릇된 것을 바로잡지 못하고 악을 유도하여 이 지경이 이르게 하였으니, 그 죄를 아는가." 하였다. 좌우들은 두려워하여 몸을 떨고, 왕은 부끄러워하였다. 얼마 안 되어 숙창원비를 승진시켜 숙비(淑妃)로 봉하였다. 우탁은 단산(丹山 단양(丹陽))사람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일찍이 영해 사록(寧海司錄)이 되었는데, 군에 요신(妖神)의 신사가 있어 이름을 팔령(八鈴)이라고 하였다. 백성들이 영험하고 괴이한 것에 미혹되어 제사를 받드는 것이 매우 번거로웠는데, 탁이 부임하자 즉시 부수어 바다에 던져 버리니 음사(淫祀)가 마침내 없어졌다. 뒤에 복주(福州)의 예안(禮安)에 늙어서 퇴임하니, 충숙왕이 그의 충의를 높게 여겨 두 번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우탁은 경과 사에 능통하고, 더욱이 역학(易學)에 깊어서 점치는 것은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정자(程子)의 역전(易傳)이 처음으로 전해졌을 때, 우리 나라에 잘 아는 이가 없었다. 우탁이 곧 문을 닫고 월여를 연구하여 드디어 해득하고 생도들에게 교수하여서 우리나라에 의리(義理)의 학문이 처음으로 행해지게 되었다. 벼슬이 성균좨주(成均祭酒)에 이르렀으며, 치사한 뒤에 81세로 졸하였다.
○ 원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서 왕을 책봉하여 정동행중서성 우승상 고려국왕을 삼고 전과 같이 개부의 동삼사 태사태자 상주국 부마도위 심양왕으로 하였다.
○ 원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와서 왕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 11월 갑자일에 팔관회(八關會)를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전달 기유일부터 왕이 김문연의 집으로 옯겨 거처하였다. 숙비가 밤낮으로 갖은 아양을 부리니 왕이 매혹되어 친히 정사를 처리하지 아니하더니 이런 명이 있었다.
○ 크게 사면령을 반포하고, 교하기를, “내가 부덕하여 두려워하고 겁내는 마음으로 감히 편안할 겨를이 없다. 돌이켜 생각건대, 조왕(祖王)께서 나라를 창건한 처음에는 법도가 모두 갖추어졌었는데, 후대에 내려오면서 점차로 무너졌으니, 근년에는 또 간신이 세력을 잡아 국권을 우롱하고 기강을 문란하게 하여 공사(公私)의 전민(田民)을 모두 빼앗겼으니, 백성들은 먹고살기가 어렵고 나라의 창고는 텅 비게 되었으나 사삿집의 부는 넘치니, 내가 매우 통탄하는 바이다. 이에 사자를 뽑아 보내어 백성의 전지를 조사하여 조(租)와 부(賦)를 균평하게 부과해서 옛날의 방식을 따르려고 한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나라의 경비를 충분히 준비하기 위함이며, 한편으로는 봉록을 넉넉히 주기 위함이고, 한편으로는 백성의 살림살이를 풍족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더구나 새로 왕위에 오른 때이니, 마땅히 특별한 은택을 베풀어야 하겠다." 하였다.
○ 임신일에 왕이 원 나라에 갔다. 제안대군(齊安大君) 숙(淑)을 명하여 권서정동성사(權署征東省事)로 삼았다.
○ 윤월에 외종형제(外從兄弟)와 통혼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 원 나라에서 보낸 직성사인(直省舍人) 첩가대(帖哥歹) 등이 와서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 12월에 평리 조연(趙璉)을 원 나라에 보내어 신년을 축하하게 하였다.
○ 왕의 이름과 음(音)이 같은 이름을 금지하였다.
출처 : 한국고전종합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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