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전서 제104권

경사강의(經史講義) 41 ○ 역(易) 4

 

[계사전 하(繫辭傳下) 제5장]

 

천하의 이치는 굽히는 것과 펴는 것일 뿐이다. 천지를 가지고 말하면 태극(太極)이 동(動)하고 정(靜)하는 것, 해와 달이 왕래(往來)하는 것, 추위와 더위가 서로 밀어내는 것, 밤과 낮이 서로 대신하는 것들이 모두 굽히고 펴는 것이다. 사람의 몸을 가지고 말하면 나아가고 나아가지 않는 것, 말하고 침묵하는 것, 동하고 정하는 것,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 모두 굽히고 펴는 것이다. 굽히는 이유는 장차 펴고자 해서이니, 이는 조화의 예측할 수 없는 오묘함이고 원형이정(元亨利貞)이 돌면서 반복하는 기미이다. 그래서 “굽히고 펴는 것이 서로 감응하여 이로움이 생겨난다.”고 한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펴는 것이 이로운 줄만 알았지 굽히는 것이 이로운 줄은 모르니, 자벌레와 용과 뱀을 비유로 든 것은 굽히는 것이 이롭다는 사실을 밝혀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한 것이다. 유염(兪琰)은 “‘의리를 정미롭게 하여 신묘함에 들어감[精義入神]’은 안이고 ‘쓰임을 이루는 것[致用]’은 밖이니 안에서 밖에 이르는 것은 자벌레가 몸을 굽혀 펴기를 구하는 것과 같고, ‘쓰는 것을 이롭게 하여 몸을 편안히 함[利用安身]’은 밖이고 ‘덕을 높임[崇德]’은 안이니 용과 뱀이 겨울잠을 자면서 몸을 보존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고, 채청(蔡淸)은 “‘의리를 정미롭게 함[精義]’은 지혜로써 말한 것이고, ‘쓰는 것을 이롭게 함[利用]’은 행(行)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니, 앞의 설을 따르면 정의(精義)와 치용(致用), 이용(利用)과 숭덕(崇德)이 각각 체(體)와 용(用)이 되고, 뒤의 설을 따르면 정의와 이용이 체와 용이 된다. 두 주장이 비록 자세하고 소략한 차이는 있지만 또한 서로 통할 수 있는가?

[신복(申馥)이 대답하였다.]
느슨한 것은 팽팽한 것의 근본이고, 닫힌 것은 여는 것의 기틀이며, 굽힌 것은 펴는 것의 시작입니다. 초목이 싹틀 때에는 반드시 굽혔다가 펴지고, 흐르는 물이 웅덩이를 채울 때에는 반드시 고였다가 흐르니, 그것이 굽히고 펴지는 뜻입니다. 또 지극히 굳건한 것은 천지(天地)인데 굽히지 않고서 능히 펴질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으니, 양(陽)이 음(陰)에게 굽혀 있다가 복괘(復卦)가 되고, 해가 달에게 굽혀 있다가 낮이 되고, 더위가 추위에 굽혀 있다가 봄이 됩니다. 사람에게 있어서도 매한가지이니, 공자(孔子)는 지(止)할 적에는 굽히고 행(行)할 적에는 폈으며, 안자(顔子)는 숨어 있을 때에는 굽히고 쓰일 때에는 폈습니다. 비록 작은 예(例)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장량(張良)이 다리 아래로 내려가 신발을 주워 오고 한신(韓信)이 바짓가랑이 사이로 들어가는 모욕을 당한 것에 대하여 선대 학자들은 모두 “굽혔다가 능히 편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굽히는 것이 바로 펴는 것이 되며, 역(易)에서 용과 뱀 그리고 자벌레를 예로 들어 말한 뜻도 아마 이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펴는 것이 이로운 줄만 알았지 굽히는 것이 이로운 줄은 모르니, 그것이 바로 길거리에 고인 물은 바다에 이르지 못하고 소인의 행동은 확연하지만 날로 망하는 이유입니다. 두 선대 학자들의 ‘정의(精義)’와 ‘이용(利用)’에 대한 주장은 둘 다 타당한 점이 있습니다. 대개 아래 글의 ‘치용(致用)’과 ‘숭덕(崇德)’을 겸하여 가리켜 말하면 ‘정의’는 ‘치용’에 대하여, ‘이용’은 ‘숭덕’에 대하여 각각 체(體)와 용(用)이 되어 안팎이 서로 길러 주는 뜻이 되고, 위 글의 ‘정의’와 ‘이용’만을 가리켜 말한다면 ‘정의’와 ‘치용’이 또 그 자체로서 체와 용이 되어 지(知)와 행(行)이 서로 필요로 하는 뜻이 되니, 비록 서로 밝혀 준 것이라고 하더라도 괜찮습니다.


선대의 학자는 함괘(咸卦) 아래에 예시(例示)한 열 개의 효(爻)는 모두 함괘 구사(九四) 효의 뜻을 이어 이치의 정일(貞一)함을 밝힌 것으로 보았다. 왕래(往來)와 굴신(屈信)은 두 가지가 아니니, 예를 들어 열 개의 효를 가지고 나누어 말한다면 어느 것이 능히 동정(動靜)의 일치(一致)를 알 수 있는 것이고, 어느 것이 대소(大小)의 일치를 알 수 있는 것이며, 어느 것이 안위(安危)의 일치를 알 수 있는 것인가? 또 어느 것이 현미(顯微)의 일치를 알 수 있는 것이고, 어느 것이 손익(損益)의 일치를 알 수 있는 것이며, 어느 것이 굴신(屈信)의 도(道)에 어두워 흉함을 취하는 데 이르게 되는 것인가? 저 음양(陰陽)이 병행(竝行)은 하되 양을 임금으로 삼으니 그 권한을 임금에게 돌리는 것은 하나이고, 동정이 서로 순환은 하되 정(靜)을 주체로 삼으니 그 일을 전적으로 주인에게 돌리는 것은 하나이다. 이것이 천하의 동함이 결국은 항상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니, 정일의 뜻을 이런 관점에서 다 논할 수 있겠는가?

[윤행임이 대답하였다.]
동정(動靜)의 일치(一致)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면 해괘(解卦)의 상육(上六)에 “기구를 몸에 간직하였다가 때를 기다려 움직인다.”고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정(靜)한 속에서 동(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안위(安危)의 일치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면 비괘(否卦)의 구오(九五)에 “편안해도 위태로운 상황을 잊지 않고 보존되어도 망할 염려를 잊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위태로움 속에서 편안히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미(顯微)의 일치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면 예괘(豫卦)의 육이(六二)에 “은미함과 드러남을 알고 부드러움과 강함을 안다.”고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은미함 속에서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손익(損益)의 일치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면 손괘(損卦)의 육삼(六三)에 “세 사람이 가는 데에는 한 사람을 덜고 한 사람이 가는 데에는 벗을 얻는다.”고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더는 것 속에서 보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소(大小)의 일치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면 서합괘(噬嗑卦)의 초구(初九)에 “불의(不義)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작게 징계하여 크게 경계시킨다.”고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작은 것 속에서 크게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 복괘(復卦)의 초구와 같은 경우는 사실상 안위와 현미의 뜻을 겸했다고 할 수 있는데 안자(顔子)가 그것을 따라 행했기 때문에 공자가 “안씨(顔氏)의 아들은 거의 도에 가깝게 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니 그 점에 대해서는 신(臣)이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익괘(益卦) 상구의 “항상 하지 못한다.”고 한 것과 정괘(鼎卦) 구사(九四)의 “밥을 엎었다.”고 한 것과 서합괘 상구의 “형틀을 씌운다.”고 한 것과 곤괘(困卦) 육삼의 “돌에 곤란을 당한다.”고 한 것들은 바로 굴신(屈信)의 도에 어두워 스스로 흉함과 인색함을 취한 것이니, 굳이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 ‘정(貞)’에는 두 개의 뜻이 있습니다. 정형(貞亨)ㆍ정길(貞吉)ㆍ정무구(貞无咎)ㆍ정회망(貞悔亡)이라고 한 것은 대개 여기에 오래하면 형통하고 길하고 허물이 없고 후회가 없어지는 상이 있음을 말한 것이고, 정려(貞厲)ㆍ정린(貞吝)ㆍ정흉(貞凶)ㆍ불가정(不可貞)이라고 한 것은 여기에 오래하면 위태롭고 인색하고 흉하고 오래할 수 없는 상이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래했을 경우를 가리켜 말한 것이고, 이정(利貞)의 성정(性情)과 정고(貞固)의 간사(幹事)는 사덕(四德)을 가리켜 말한 것이니, 정일(貞一)의 뜻을 분변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이상은 계사전 하(繫辭傳下) 제5장이다.


 

[주D-001]공자(孔子)는 …… 폈습니다 : 여기서 지(止)와 행(行), 숨어 있을 때와 쓰일 때라는 것은 “벼슬할 만하면 벼슬하고 그만둘 만하면 그만둔다.[可以仕則仕 可以止則止]”는 것과 “쓰여지면 행하고 버림받으면 숨어 있는다.[用之則行 舍之則藏]”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孟子 公孫丑上》 《論語 述而》
[주D-002]장량(張良)이 …… 주워 오고 : 장량이 이교(圯橋)에서 황석공(黃石公)이 다리 밑에 떨어뜨린 신을 주워다가 그에게 신게 하고 태공(太公)의 병서를 받은 고사를 말한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주D-003]한신(韓信)이 …… 당한 것 : 한신이 젊은 시절에 회음(淮陰)의 한 백정에게서 받은 모욕을 말하는데, 이는 마음속에 큰 뜻을 품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큰 뜻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작은 모욕 정도는 달게 받음을 의미한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주D-004]정일(貞一) : 정부일(貞夫一)의 준말로, 사물(事物)의 변동(變動)은 무궁(無窮)하나 마침내 일리(一理)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周易 繫辭傳下 第1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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