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헌선생문집 제7권_
잡저(雜著)_
피대설(皮帒說)
나는 젊어서 제대로 학문을 하지 못하고 늦게야 비로소 깨닫고는 맨 처음 삼재(三才)의 이치를 연구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한 작은 책자를 만든 다음, 천지(天地)와 고금(古今), 인물(人物)과 사변(事變)의 제목을 배열하여 쓰고 명칭하기를 ‘우주요괄(宇宙要括)’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이 한 몸이 가는 곳에는 반드시 이 책을 휴대하고 그 제목을 보아 차례로 생각하고 연구하였는데, 혹 노상(路上)에 있어 항상 손에 두기가 어려우므로 반드시 이것을 차고 다니는 도구가 있어야 하였다.
이에 피대(皮帒 가죽 주머니)를 만들었는데, 피대를 만드는 제도는 먼저 얇은 판자를 사용하되 길이는 포백척(布帛尺)으로 한 자 남짓하고 넓이는 7, 8촌(寸)쯤 되는 것으로 등의 줄기를 삼은 다음 송아지 가죽으로 그 속을 붙여 펴고 등으로부터 싸서 배에 이르러 합하여 꿰맸으며, 그 밑을 막고 주둥이를 비워 물건을 받아 넣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또 한 작은 소가죽 조각을 잘라 한쪽을 둥글게 하고 그 밑을 등의 판자에 붙여서 배를 향해 늘어뜨려 주둥이를 막았으며, 주둥이 가까운 곳에 두 개의 단추를 만들고 겉가죽에 두 구멍을 내어서 단추를 받아 단단히 매어 두는 자료로 삼았다.
대(帒)가 이루어지니, 첩책(帖冊)을 차고 다니는 것이 이로부터 도구가 있게 되었다. 첩책이 이미 들어가고도 다소 남은 공간이 있어 딴 물건을 용납할 만하므로 딴 책 한두 권과 소첩(梳帖 빗을 넣어 두는 첩), 연갑(硯匣 벼루를 넣어 두는 갑)과 모자(帽子) 등의 물건을 또 따라서 넣어 두었다.
나는 언제나 외출하게 되면 반드시 이 피대를 가지고 다녔는데 그후 1, 2년이 지나 임진왜란이 일어나니, 나는 이때 상중(喪中)에 있으면서 도망하여 피난하였다. 그리하여 몸에 따르는 모든 집물(什物)들을 하나도 가지고 간 것이 없었으나, 유독 이 피대만은 마침내 한 동자(童子)로 하여금 지고 가게 하였으니, 여기에 넣은 것은 바로 첩책과 《역경(易經)》 2권, 《역회통(易會通)》 당본(唐本) 1권, 소첩, 연갑이었다.
산골짝에 도망하여 숨고 동서(東西)로 유리(流離)할 때에도 이 피대는 일찍이 나의 몸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누우면 베개가 되고 밥을 먹으면 밥상이 되고 책을 읽으면 책상이 되고 다닐 때에는 몸소 지고 다녔는바, 이렇게 한 것이 임진년(1592,선조25)으로부터 갑오년(1594,선조27)에 이르렀다.
난리가 다소 수그러들자, 나는 혹 사람들로부터 잔편(殘篇) 몇 권을 얻었고 혹 여러 경전(經傳)을 손수 써서 점점 쌓여 여러 권이 되니, 이 피대로는 다 넣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포대(布帒 삼베 주머니)를 사용하여 그 속을 넓히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이 뒤로는 피대가 점점 내 몸에서 가까워지지 못하였다.
이 피대는 다만 첩책과 소첩 등의 물건을 넣어 가지고 다닐 뿐이요 딴 큰 책과 거질(巨秩)을 용납할 수 없으며, 또 그 복판(腹板)이 단단하여 편안히 쓰기에 마땅하지 않으므로 더욱 소중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내 비록 편안히 쓰지는 않았으나 만드는 데 공력이 들었고 휴대한 지가 오래 되었으며 난리를 치를 때에 오직 이것을 사용하였으므로 또한 일찍이 가벼이 여기거나 천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실용에는 마땅하지 못한 지가 여러 해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며칠 전에, 몸에 가까이하는 사소한 여러 도구들을 거두어 넣을 만한 것이 없음을 생각하였다. 이에 이 피대가 쓰이지 않고 버려져 있는 것을 생각하고는 손수 꺼내어 먼지와 터럭을 털어 제거하고 더러운 때들을 씻어내고서 반복하여 살펴보니, 필경 만든 것이 졸렬하고 속의 공간이 너무 좁아서 비록 억지로 쓰려고 하나 끝내 온당치 못하였다.
이에 그 만든 것을 가지고 다소 변경하여 쓰임에 편리하게 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배에 꿰맨 것을 분해(分解)하되 주둥이로부터 절반쯤 되는 곳에 이르게 하여 출납하기가 다소 편하게 하였더니, 보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전에 쓰던 것보다 훨씬 낫다.” 하였다. 그러므로 또다시 두 개의 단추를 꿰맨 것을 분해한 좌우쪽에 달아서 넣는 물건을 거두어 닫게 하니, 이로부터 피대가 점차 다시 쓰여지려는가 보다.
나는 마침내 탄식하기를, “한 피대가 쓰여지고 버려지며 이용되고 폐기되는 것도 또한 운수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처음에는 첩책 때문에 이것을 만들었고, 나는 자못 필요한 물건이라고 여겨 출행할 때에는 반드시 가지고 다녔다. 그리하여 피난하는 날에 모든 문방구(文房具)의 백 가지 사용하는 것으로 이 피대보다 소중한 물건들이 일찍이 여러 가지가 있었건만 딴 물건은 하나도 보전하지 못하고 오직 이 피대만을 가지고 와서 시종 서로 버리지 않았으니, 피대가 쓰여져 이용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다가 중간에 이르러는 온당하게 쓸 수 없다고 생각하고 소원히 여겨 나갈 때에도 가지고 가지 않고 들어올 때에도 가까이 하지 않아서 책상에 버려 두고는 보아도 본 체하지 않아 거미가 그 주둥이에 그물을 치고 먼지가 그 꿰맨 곳에 가득히 쌓인 지가 거의 6, 7년이었으니, 이는 피대가 버림을 받아 부질없이 보관된 것이었다.
그러다가 이제 오늘날 내 쓸 만한 물건이 없어 형세가 이미 곤궁한 뒤에야 다시 취하여 수리하고 그 제도를 변경하여 다소 통하게 해서 다시 몸에 가까이 하는 물건으로 삼고자 하니, 이는 또 이 피대가 오늘로부터 쓰임을 받아 이용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똑같은 나인데도 이 피대에 대하여 혹 가까이하여 쓰고 혹 소원히하여 버리며, 피대는 똑같은 피대인데도 나에게 혹 쓰임을 당하여 이용되고 혹 버림을 받아 숨겨지니, 그 누가 이렇게 만드는 것이겠는가. 내 어찌 이것을 가까이하고 소원히하려는 뜻이 있었겠는가마는 자연히 가까이하고 소원히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피대가 어찌 한 번 나아가고 한 번 물러감에 뜻이 있었겠는가마는 자연히 나아가고 물러감이 없을 수 없었으니, 그 가까이하고 소원히하며 그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이 과연 누가 이렇게 하게 하는 것인가.
나는 사람으로서 이 피대를 주관하는 자이다. 이것을 만든 자도 나이고 이것을 고친 자도 나이고 쓰는 자도 나이고 버린 자도 나이다. 만들고 고치고 쓰고 버리되 나 역시 나로 하여금 이것을 만들고 또 나로 하여금 이것을 고치고 또 나로 하여금 이것을 쓰고 또 나로 하여금 이것을 버리며, 이미 나로 하여금 이것을 버렸다가 다시 나로 하여금 이것을 쓰게 한 것이 누군인지를 알지 못하니, 하물며 저 피대는 물건인데 나에게 또한 무슨 정이 있겠는가. 이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가까이하고 소원히하고 쓰고 버리며 나아가고 물러가고 나오고 감추는 것이 나도 아니고 피대도 아니고 오직 운수인 것이다.
내 이제 다시 이것을 거두어 장차 쓰려고 하나 다만 몇 년의 세월을 쓰다가 버릴는지 알 수 없다. 과연 버릴 것인가, 혹 버리지 않고 피대가 스스로 해져 다할 것인가. 아니면 영원히 버려지지는 않더라도 혹 절실하지 않은 물건이 될 것인가. 이를 모두 알 수 없으니, 나는 이에 대하여 감회가 없지 못하다. 그러므로 우선 이것을 만들고 고치고 내치고 받아들인 연고를 기록하여 후일의 참고로 삼는 바이다.
피대를 만든 공인(工人)은 바로 족생(族生) 정보(正甫)의 종[奴]으로 이름은 학경(鶴京)인데 왜란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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