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헌선생문집 제8권_
잡저(雜著)_
주왕산(周王山)에 대한 기록
산의 높이가 가장 높지는 않으나 산의 이름은 크게 드러났으니, 이는 고적(古跡)이 있고 또 바위와 골짝이 기이하기 때문이다. 나는 주왕산(周王山)의 이름을 들은 지가 오래였으므로 한번 구경하여 진세(塵世)의 눈을 상쾌하게 할 것을 생각한 것이 오래였으나 소원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금년 여름에 친구들을 따라 산의 가까운 지역에 가서 우거(寓居)하게 되었다.
하루는 두서너 명의 친구들과 약속하여 오랜 소원을 부응하려고 하였는데, 마침 이날 점심 무렵 비가 내려 두루 구경하지 못하였다.
사람들에게 들으니, 이 산을 주왕(周王)이라고 이름한 것은 삼한(三韓) 시대에 한 왕호(王號)를 가지고 있던 자가 이 곳에 피란(避亂)하여 산의 위에 대궐을 세웠는바, 옆에 폭포수가 있고 폭포수 가운데에는 바위 구멍이 있어 사람이 몸을 숨길 수 있으며 폭포수가 가리우고 있기 때문에 외부 사람들은 바위에 구멍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 임금은 위급한 일이 있으면 이 구멍에 숨어서 피하곤 했다 한다. 나는 해가 저물고 또 비가 내리므로 그 자취를 직접 보지는 못하였으나 산이 이름을 얻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구경하는 자들은 이르기를, “이 산은 골짝이 좁고 시냇물이 험하며 암벽이 우뚝이 솟아 있고 고개 위가 평평하고 넓으며 사방의 길이 모두 멀리 막혀 있으니, 난세(亂世)를 당하면 군대를 은닉하여 적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
놀러와서 이 산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다만 고적(古跡) 때문이 아니요 바위가 기이하고 물이 깨끗하여 마치 신선(神仙)들이 서식(棲息)하는 곳인 듯해서이다.
골짝의 이름은 두 개가 있으니, 동쪽은 바로 이른바 주왕이 피란했다는 장소이다. 폭포의 구멍이 아직 변치 않았고 대궐터가 그대로 남아 있는데 골짝에 들어가 몇 리쯤 가면 지금 허물어진 사찰(寺刹)이 하나 있다.
서쪽은 바위와 골짝이 동쪽에 비하여 더욱 기이한데 바위의 허리로 인적이 미치지 않는 곳에 이상한 새 한 마리가 이 틈에 둥지를 틀고 있으니, 사람들은 청학(靑鶴)이라 이른다. 이 새는 매년 봄과 여름에 이 곳에서 알을 까 새끼를 치는데, 둥지를 마주한 바위 머리에 작은 암자를 세워 이 새를 바라보나 암벽이 멀고 둥지가 높아 사람들이 이 새를 볼 수 없었다. 그리하여 평상시 와서 구경하는 자들은 나팔을 불어 새를 놀라게 해서 날아 나오기를 기다린 뒤에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한 무인(武人)이 둥지에 활을 쏘아 화살이 그 옆에 꽂히자, 이후로는 학이 마침내 더욱 험한 바위로 옮겨가서 사람들이 다시 보지 못한다고 한다.
골짜기 5리쯤 되는 곳에 이르면 벼랑이 끊기고 길이 다하는데 길이 다한 곳에 부암(附巖)이라는 바위가 있는바, 이 바위가 높은 벼랑에 붙어 있기 때문에 부암이라고 명칭한 것이다. 만약 개미처럼 붙고 이[蝨]처럼 기어 올라가면 이 바위에 올라가 길을 통할 수 있다. 이 길을 따라 한 고개를 넘어가면 산세가 다소 평평하여 그다지 기이하고 아름답지는 않으나 다만 용못이 몇 곳 있는데 폭포를 받아 못을 이루었으며 하도 높아 가까이 근접할 수가 없고 너무 깊어 측량할 수가 없다.
용못으로부터 북쪽으로 7, 8리쯤 가면 옛날에 점촌(店村)이 있었는데 이름을 광혈(廣穴)이라 하는 바, 난리로 주민들이 흩어져 지금은 다만 몇 채의 막사가 남아 있다 하나 이상은 다 내가 직접 가보지 못하였다.
나는 이번 걸음에 비록 두루 보고 감상하지는 못하였으나 산의 대략은 이미 알게 되었다. 가장 기이한 것은 여러 바위이며, 바위 중에서도 서쪽 골짝에 있는 것이 더욱 기이하였다.
이 날 눈으로 본 것을 한번 기록하면, 골짝의 입구로부터 길이 다하는 곳에 이르기까지는 약 5리 쯤 되는데 양쪽의 벼랑이 모두 바위이나 서로 중첩되어 있지 않으며, 아래로 바위 밑으로부터 위로 바위 머리에 이르기까지 몇 길[丈]인지 알 수 없으나 다만 한 돌로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져 있다. 중간에 작은 시냇물이 있고 시냇물로부터 오솔길이 있는데 오솔길은 흙을 밟지 않고 돌을 따라 걸어 올라가는바, 돌이 시내의 좌우에 널려 있어 혹은 높기도 하고 혹은 낮기도 하며, 혹은 크기도 하고 혹은 작기도 하며, 혹은 종(縱)으로 있기도 하고 혹은 횡(橫)으로 있기도 하며, 혹은 기울기도 하고 혹은 평평하기도 하니, 다리 힘이 건장한 자가 아니면 반드시 항상 넘어지고 만다.
이 길을 따라 올라가는 자들은 두 벼랑의 암벽을 우러러보면 바위 뿌리가 각기 사람과 겨우 지척지간에 있는데, 바위 모서리가 곧바로 구름이 다니는 하늘 위로 솟아 있어 하늘과 해가 참으로 우물 안에서 보는 것처럼 보인다.
이른바 부암(附巖)이라는 바위 위에 이르면 좌우의 여러 바위가 눈 앞에 펼쳐져 있어 천 가지 모습과 만 가지 모양이 모두 갖춰져 있다. 혹은 네모지고 혹은 둥글며 혹은 쭈그러들고 혹은 삐쭉 나왔으며, 혹은 좌우(左右)가 서로 맞이하여 마치 손을 잡고 읍(揖)하는 듯한 것이 있고 혹은 피차(彼此)가 서로 높아 마치 누가 더 큰가를 다투는 듯한 것이 있으며, 혹은 부부(夫婦)처럼 배합한 것이 있고 혹은 형제(兄弟)처럼 나란히 자리한 것이 있으며, 혹은 원수처럼 서로 등진 것이 있고 혹은 친구처럼 서로 가까이한 것이 있다.
혹은 한 바위가 우뚝 솟고 나머지 여러 바위는 함께 낮으니, 높이 있어 우러러 받드는 것은 군주와 스승과 같고 낮아서 압도당하는 것은 신하와 첩과 같으며, 동쪽 벼랑의 바위가 서쪽 벼랑에 연하지 않고 서쪽 벼랑의 바위가 동쪽 벼랑에 이어지지 아니하여, 마치 문(門)을 나누고 진(陣)을 구별하여 진법(陣法)이 서로 뒤섞이지 않는 듯하다. 혹은 엄연하고 엄숙하여 중립(中立)하고 기울지 아니하여 마치 범할 수 없는 대인(大人)과 정사(正士)를 연상시키는 것이 있으며, 혹은 기이하고 괴이하여 모양을 형상할 수 없어 마치 우리 유학과 배치되는 이도(異道), 좌학(左學 이단의 학문)과 같은 것이 있었다.
혹은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장수가 군주에게 절하지 않는 것을 예(禮)로 삼은 듯한 것이 있고, 혹은 맹금류(猛禽類)나 곰과 같은 장수가 살벌(殺伐)을 마음으로 삼은 듯한 것이 있으며, 혹은 상고(上古) 시대의 성인(聖人)이 질박한 세상에 태어나 도(道)가 천지(天地)와 똑같아 성정(性情)을 드러내지 않는 듯하고, 혹은 말세(末世)에 경박한 사람들이 재주를 믿어 교만하고 방자해서 스스로 자랑하는 듯한 것이 있다.
혹은 숲과 골짝에서 자유로이 생활하여 그 일을 고상히 하는 자인 듯한 것이 있고, 혹은 바위 구멍으로 도피하여 더러운 세상에 장차 오염될까 두려워하는 듯한 것이 있으며, 혹은 괴리(乖離)하여 스스로 달리하는 듯한 것이 있고 혹은 의지하고 붙어서 사람들과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것과 같은 것이 있으며, 혹은 작은 것이 큰 것을 따른 것이 있고 혹은 뒤에 있는 것이 앞의 것을 따른 듯한 것이 있었다. 머리를 숙이고 감추어 마치 시세(時勢)를 두려워하는 듯한 것이 있고 모서리를 드러내어 마치 세상의 어지러움에 분노하는 듯한 것이 있으니, 이것이 그 대략으로 그 형상을 이루 다 형용할 수 없었다.
이제 기이한 형상을 가지고 감히 옛날 역사책에서 들은 것에 비유한다면 마치 옛 도(道)를 좋아하고 성인(聖人)을 사모하는 사람이 세상에 늦게 태어난 것을 서글퍼하고 지극한 덕을 보지 못하는 것을 개탄하여 그 도를 상상하고 옛 성인을 그리워한 나머지 붓끝을 가지고 조화를 부려 천고(千古)의 성인(聖人)들을 그려내어 삼황(三皇)을 배열하고 오제(五帝)를 나열하되 첫번째에는 반고씨(盤古氏)를 놓고 중간에는 무회씨(無懷氏)와 갈천씨(葛天氏)를 놓고 아래로는 삼대(三代)의 성왕(聖王)에 이르기까지 그 형상을 갖추어 높이고 숭상하지 않음이 없다. 그 형체는 모사(模寫)할 수 있으나 그 도는 모사할 수 없으며, 그 몸은 그릴 수 있으나 그 마음은 그리지 못하여, 다만 이름과 지위를 가지고 모의(模擬)하는 듯하다.
또 두추(斗樞 북두성의 첫 번째 별)에 번개가 치자 황제 헌원씨(黃帝軒轅氏)가 용상(龍床)에 납시고, 치우(蚩尤)의 안개가 걷히자 운사(雲師)가 나열하는 듯하다. 그리하여 음양(陰陽)을 조화하고 사시(四時)를 순히 하는 것은 정승의 지위에 있는 풍후(風后)이고, 만방(萬邦)을 편안히 하고 사해(四海)를 깨끗이 하는 것은 장수인 역목(力牧)이다. 해와 달을 똑고르게 하여 책력(冊曆)을 만들어 절기(節氣)를 손바닥 위에서 움직인 것은 용성(容成)이란 신하가 있고, 북두성의 자루를 가지고 천문(天文)을 점치고 인간 세상에 육십갑자(六十甲子)를 만든 것은 대요(大撓)라는 사람이 있다.
굽어 살피고 우러러 관찰하여 만 가지 변화를 연구해서 산수(算數)를 만든 것은 바로 예수(隷首)이고, 기후(氣候)를 살피고 수(數)를 상고하여 알맞는 음을 찾아 율려(律呂)를 만든 것은 영륜(伶倫)이다. 의복에 문장(文章)을 만들어 귀천(貴賤)이 드러나고 배와 수레를 만들어 만국(萬國)이 와서 조공하니, 여러 관직이 모두 구비하여 각각 하늘이 내려준 직책을 수행해서 하늘의 직무를 다스리는 기상(氣像)이 있다.
또 당(唐)과 우(虞)의 시대에 요(堯)와 순(舜)이 등극함에 사악(四岳)이 지위에 있고, 팔원(八元)과 팔개(八凱)가 등용되어 한 당(堂)에서 서로 담론을 하고, 여러 제후(諸侯)들이 아름답게 덕이 있는 이에게 양보하여 상서로운 바람을 만들고 상서로운 해가 빛나니, 백관(百官)들이 서로 좋은 점을 본받아 모든 공적이 이루어지는 기상이 있다.
또 주(周) 나라 무왕(武王)이 목야(牧野)에 군대를 주둔하고 하늘의 아름다운 명을 기다리고 있는데, 만국의 군대가 모두 모이고 열 명의 훌륭한 신하들이 일제히 일어나 군의 대오(隊伍)가 정돈되고 창과 칼이 구름을 깨끗이 씻어낸다. 태공(太公)은 날쌘 매처럼 뽐내고 굉요(閎夭)는 훌륭한 계책을 올리는데 무왕이 황금 도끼와 흰 깃발을 가지고 군사들에게 맹세하니, 우방(友邦)의 여러 군주와 일을 맡은 사도(司徒), 사마(司馬), 사공(司空), 아(亞), 여(旅), 사씨(師氏)와 천부장(千夫長), 백부장(百夫長)들이 각각 창을 들고 각각 방패를 나란히 하고 각각 세모진 창을 세워 함께 맹세하는 말을 듣는다. 그리하여 범과 같고 비휴(貔貅)와 같고 곰과 같고 큰 곰과 같이 무용(武勇)이 당당한 장수들이 일제히 멈추어 힘을 쓰는 듯한 기상이 있다.
또 주공(周公)이 총재(冢宰) 자리에 있으면서 예악(禮樂)을 만든 것이 천지(天地)의 조화와 같으니, 여러 관직과 온갖 직책을 맡은 자들이 모두 질서를 따라 예악과 문물이 구비되지 않음이 없다. 제후들이 조회 오매 다섯 등급의 작위(爵位)로 진열하여 옥과 비단이 뜰에 교차하고 종과 북이 당하(堂下)에 모두 매달려 있다. 치국(治國)의 대도(大道)를 막 펼쳐 존비(尊卑)의 지위를 감히 혼란시키지 못하고, 사당에서 연향(宴饗)을 마련하여 크고 작은 신하들이 감히 예를 넘지 못하니, 목목(穆穆)하고 황황(皇皇)하며 빈빈(彬彬)하고 욱욱(郁郁)한 기상이 있는 듯하다.
또 천지(天地)의 원기(元氣)가 이구산(尼丘山)에 모여 있어 공자(孔子)가 수수(洙水)와 사수(泗水) 가에서 가르침을 베풀자, 영재(英才)가 구름 떼처럼 모여 3천 명의 제자가 있고 70명의 훌륭한 인재를 이루니, 다섯 가지 과목을 세워 재주를 다하고 네 가지 가르침을 가지고 학문을 성취시킨다. 그리하여 혹은 당(堂)에 올라 방(房)에 들어온 자도 있고 혹은 문장(門墻)을 바라보기만 하고 들어가지 못한 자도 있다. 안회(顔回)는 어리석은 듯하고 증삼(曾參)은 노둔하며 중유(仲由)는 용맹하고 증점(曾點)은 뜻이 높아 각각 그 재주에 따라 성취하니, 재주는 사람에 따라 길고 짧고, 학문은 공력에 따라 높고 낮으나 모두가 성현(聖賢)의 무리이다.
또 맹자(孟子)가 전국 시대(戰國時代)에 우뚝이 솟아 수사(洙泗)의 성학(聖學)을 이어 드높은 태산(泰山)의 기상을 지니고 호연(浩然)의 바른 기운을 길러 천지의 사이에 충만되어 있다. 제(齊) 나라와 양(梁) 나라의 군주를 압도하니 인의(仁義)의 말이 하늘을 다스릴 수 있고, 장의(張儀)와 공손연(公孫衍)의 무리를 첩이나 부인으로 여기니 도덕(道德)의 의논이 땅을 다스릴 수 있다. 무너지는 파도에 울분을 느껴 큰 제방(堤防)을 세우고, 우리 도를 보호하여 큰 한계(限界)를 만들어 황왕(皇王)의 세대를 출입하고 예의(禮義)를 종횡(縱橫)하니, 문장(文章)의 예봉(銳鋒)이 몇천 길[丈]인지 알 수 없으며 화두(話頭)가 몇만 층인지 알 수 없다. 유속(流俗)들은 그 의(義)를 우러러보고는 혼이 달아나고 이단(異端)들은 유풍(遺風)을 바라보고는 넋이 빠지니, 그 확고함이 흔들 수 없고 그 엄함이 범할 수 없는 듯하다.
또 진(秦) 나라 관문(關門)이 한번 격파되니 초(楚) 나라의 범처럼 무서운 항우(項羽)가 교만하고, 때가 오지 않으니 적룡(赤龍)인 유방(劉邦)이 잠시 굽힌다. 홍문연(鴻門宴)에 호걸들이 다투어 달려와 범증(范增)은 결행을 재촉하는 패옥(佩玉)을 자주 들고 항장(項莊)은 칼춤을 추어 유방을 죽이려 한다. 장량(張良)이 급히 나가 위급함을 알리자 번쾌(樊噲)가 방패를 들고 곧바로 들어오니, 이 때를 당하여 사나운 바람이 뒤집히는 듯하고 구름이 어지러이 모이는 듯하며, 범이 움키는 듯하고 용이 버티고 있는 듯하다. 초(楚) 나라 신하들은 초 나라를 위하여 도모하고 한(漢) 나라 신하들은 한 나라를 위하여 도모하니, 천하의 자웅(雌雄)이 아직 결판나지 않은 듯하다.
또 천하가 한(漢) 나라로 돌아와 초 나라가 망하고 노(魯) 나라가 도륙(屠戮)을 당하니, 전씨(田氏)의 후손이 외로운 섬에서 의리를 지킨다. 그를 따르는 자 4백 명은 모두가 의사(義士)인데, 천하가 넓지 않은 것이 아니나 4백 명의 몸을 용납할 곳이 없으며, 한(漢) 나라의 벼슬이 영화롭지 않은 것이 아니나 한 마음으로 지키는 절개를 바꿀 수 없다. 이에 의리를 뽐내어 하늘에 맹세하고 함께 죽기로 약속하니, 4백 명이 충절(忠節)을 지켜 함께 죽어 추상(秋霜)이 늠름한 듯하다.
또 한(漢) 나라의 국운(國運)이 장차 다하니 영웅이 힘을 쓸 곳이 없다. 오(吳) 나라와 위(魏) 나라가 한창 강성하니, 촉(蜀) 나라의 왕업(王業)이 외롭고 위태롭다. 힘은 비록 미약하나 의리는 더욱 굳세고, 세력은 비록 부족하나 뜻은 더욱 웅장하다. 와룡(臥龍 제갈량(諸葛亮)을 가리킴)은 구름과 비 속에서 비늘을 떨치고 봉추(鳳雛 방통(龐統)을 가리킴)는 아득한 하늘에서 날개를 치며관우(關羽)는 범처럼 뛰어오르고 장비(張飛)는 곰처럼 분발하고 조운(趙雲)은 사람들 속에서 뛰어나며, 또 모두 담력(膽力)을 키우고 주먹을 떨침과 같으니, 끝내 성공과 실패를 가지고 영웅을 논할 수 없다. 이 때를 당하여 촉 나라의 한 지방이 어찌 영웅의 소굴이 아니겠는가.
또 수양성(睢陽城)이 위급하여 외로운 성에 힘이 다하였는데, 장순(張巡)이 천 길 높이 우뚝한 절개를 지니고 허원(許遠)이 구정(九鼎)의 의리를 잡아, 애첩(愛妾)을 죽여 먹으면서도 뜻이 흔들리지 않고, 참새를 모두 잡아 먹고 쥐구멍을 파 먹으면서도 기운이 꺾이지 않는다. 하란진명(賀蘭進明)은 공을 시기하여 구원하지 않고 오랑캐의 형세는 약세(弱勢)를 틈타 더욱 압박하니, 남제운(南霽雲)의 성난 쓸개가 말[斗]처럼 크고, 뇌만춘(雷萬春)의 의(義)가 산처럼 높은 것과 같다. 이 때를 당하여 수양성 안의 사람들이 모두 분노하고 함께 감격하여 필사(必死)의 각오를 간직하고 구차히 살려는 계책이 없다. 그리하여 한 성으로 온 천하를 막아내어 성이 비록 격파되었으나 충절이 더욱 굳고 죽음이 비록 참혹하였으나 의리가 더욱 높았으니, 어쩌면 그리도 장한가.
또 애산(崖山)에 해가 지는데 창해(滄海)에 구름이 깜깜하다. 군신(君臣)과 사직(社稷)을 외로운 한 배에 싣고 가니, 이 때를 당하여 일이 이미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문천상(文天祥), 육수부(陸秀夫), 장세걸(張世傑) 등 여러 신하들은 위태로움에 대처하는 큰 충절이 확고하여 평상시와 다름이 없다. 조복(朝服)과 주절(柱節)로 강상(綱常)의 중함을 한 몸에 맡기고 하루의 사직을 보존할 것을 도모하여 곧바로 하루의 직분을 다하였으니, 비록 원(元) 나라의 백안(伯顔)과 장홍범(張弘範)이 하늘에 넘치는 세력으로 핍박하였으나 자신에게 있는 의지는 일찍이 조금도 변치 않았다. 아! 어쩌면 그리도 늠름한가.
이는 내가 이 산을 유람할 적에 수많은 바위의 기이한 모양을 보고 우리 인간의 기상을 만고(萬古)의 위에 인식한 것이니, 비록 인간의 일에 크고 작음이 똑같지 않고 지나간 자취에 길흉(吉凶)이 각기 다르나 널리 취하여 비유함에 어찌 해롭겠는가.
적멸(寂滅)의 가르침이 서방(西方)에 일어나 파리한 중과 늙은 승려(僧侶)가 백 명과 열 명으로 무리를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육합(六合)을 먼지와 초개(草芥)로 여기고 인간 세상을 꿈과 환(幻)으로 여겨, 하늘을 우러르고 벽을 향하여 좌선(坐禪)하고 입정(入定)하는 것은 이른바 승려와 부처인데, 바위의 괴이한 것이 이와 유사하다.
선도(仙道)의 학문이 후세에 나와 조화(造化)의 권세를 훔치고 사생(死生)의 관문을 초월하여, 천륜(天倫)을 거스르고 인륜을 버려 방장산(方丈山)을 집으로 삼고 영주산(瀛洲山)을 가정(家庭)으로 여긴다. 그리하여 천년 봄을 고요히 앉아 있고 바둑 한 판에 도끼 자루가 썩는 것은 이른바 신선(神仙)인데, 바위의 은벽(隱僻)한 것이 이와 유사하다.
그러나 이상은 모두 우리의 도(道)가 아니니, 비록 이와 유사한들 어찌 굳이 숭상할 것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바위가 사람과 유사하려는 데 뜻이 있는 것이 아니요, 나의 뜻으로 스스로 모의(模擬)할 뿐이다.
똑같은 한 산의 바위인데 바위의 모양이 천 가지로 다르고 만 가지로 구별되며, 똑같은 천지의 사람인데 사람의 일에는 천만 가지 변화가 있으니, 천지가 만물을 만든 실정(實情)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바위 모양이 천 가지로 다르고 만 가지로 구별됨과 인간의 일이 천만 가지로 변화함은 모두가 이치이다. 이치는 본래 하나인데 물건에 나타남은 천 가지 다름과 만 가지 구별이 있으며 사람의 일은 천만 가지 변화가 있으니, 이는 어째서인가? 이 이치는 본래 일정한 방소(方所)가 없고 또 일정한 형체가 없으므로 물건이 얻어 형체가 될 적에 자연히 그 다름과 구별이 없을 수 없으며, 사람이 얻어 일이 될 때에 또한 그 변화가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이치가 하나임은 체(體)이고 형체가 각기 다름과 일이 변함은 용(用)이니, 하나가 있지 않으면 어떻게 천만 가지의 용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체는 하나가 아닐 수 없고 용은 천만 가지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지가 만물을 내고 물건이 형체를 지니고 있음이 천만 가지가 아닐 수 없는 것은 자연의 형세이므로 그렇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기상을 간직하고 사업을 짓는 것으로 말하면 어찌 그 사이에 취사 선택이 없을 수 있겠는가. 물건의 형체가 각기 다름과 인사(人事)의 변화가 이미 한 이치에 해롭지 않다면 내 지나간 옛 자취를 저울질하고 인사의 변화를 취사 선택하는 것이 한 성(性)에 해롭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바위가 물건과 유사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내가 취하는 것이 선택이 없을 수 있겠는가. 삼황(三皇), 오제(五帝)의 지극한 도(道)의 질박함과 지극한 덕(德)의 순박함을 내 숭상하지 않을 수 없다.
황제 헌원씨(黃帝軒轅氏)가 여러 관직을 진열하고 당(唐), 우(虞)가 온갖 직책을 나열하며, 정돈되고 엄숙함이 목야(牧野)의 출정(出征)과 같고, 질서정연하고 찬란함이 주공(周公)의 제도(制度)와 같은 것을 내 사모하지 않을 수 없다. 공자(孔子)가 수사(洙泗)에서 가르치는 과목을 설정하고 맹씨(孟氏 맹자(孟子)를 가리킴)가 도를 호위함을 내 이에 스승삼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홍문(鴻門)의 호걸과 전횡(田橫)의 의사(義士)는 내 그 지략은 위대하게 여기나 그 덕은 보지 않으며 그 뜻은 아름답게 여기나 그 도는 취하지 않는다. 촉한(蜀漢)의 영웅과 수양(首陽)의 절의와 애산(崖山)의 충의는 내 이에 높이 숭상하여 존경한다. 그러나 승려와 부처의 학문은 이단(異端)이니 배척하여야 할 것이요, 선도(仙道)의 도는 바른 도가 아니니 멀리하여야 할 것이다.
숭상할 만하고 사모할 만하고 스승삼을 만한 것과 위대하게 여기나 보지 않고 아름답게 여기나 취하지 않는 것과 높이 존경하나 배척하여 멀리하는 것은 다 내가 평소에 강명(講明)하여야 할 바이니, 어찌 산의 바위를 필요로 하겠는가.
오직 상상하고 모의하여 천 년의 뒤에 마치 훌륭한 모습과 풍절(風節)을 천 년 이전에 본 듯한 것으로 말하면 어찌 오늘날 이 유람으로 말미암아 얻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에 그 비유되고 모의되어 인식된 것을 기록해서 다른날 책상 위에 분발하는 자료로 삼는 바이다.
만력(萬曆) 정유년(1597,선조30) 맹하(孟夏) 일(日)에 기록하다.
[주D-002]팔원(八元)과 팔개(八凱) : 팔원은 여덟 명의 인인(仁人)이고 팔개는 여덟 명의 선인(善人)이다.
[주D-003]열 명의 훌륭한 신하 : 《서경(書經)》 태서(泰誓)에서 무왕(武王)은 “나는 나라를 다스리는 열 명의 신하가 있다.” 하였으며, 《논어(論語)》 태백(泰伯)에서 공자(孔子)는 “이 중에 부인이 한 명 끼어 있으니, 남자는 9명뿐이다.” 하였는데, 그 주(註)에 열 명의 신하는 주공 단(周公旦), 소공 석(召公奭), 태공 망(太公望), 필공(畢公), 영공(榮公), 태전(太顚), 굉요(閎夭), 산의생(散宜生), 남궁괄(南宮适)과 무왕의 어머니인 문모(文母)라 하였고, 일설에는 무왕이 자기 어머니를 신하라고 말할 수 없으니 아마도 무왕의 아내인 읍강(邑姜)일 것이라고 하였다.
[주D-004]우방(友邦)의……백부장(百夫長) : 이 내용은 《서경(書經)》 목서(牧誓)에 보인다. 아(亞)는 부(副)의 뜻으로 부사도(副司徒), 부사마(副司馬), 부사공(副司空)을 이르며, 여(旅)는 여러 대부(大夫)이고 사씨(師氏)는 성문을 지키는 장수이며, 천부장(千夫長)과 백부장(百夫長)은 천 명을 거느리는 장수와 백 명을 거느리는 장수이다.
[주D-005]목목(穆穆)하고……기상 : 목목은 공경하는 모양이고 황황(皇皇)은 아름다운 모양으로 천자와 제후왕의 훌륭한 용모를 나타낸 것이다. 빈빈(彬彬)은 문(文)과 질(質)이 잘 조화되어 아름다운 모양이고 욱욱(郁郁)은 문채가 찬란한 모양이다.
[주D-006]다섯 가지 과목 : 자세하지 않다. 《논어(論語)》 선진(先進)에서 공자(孔子)의 제자들을 소장(所長)에 따라 네 가지로 분류하여 “덕행(德行)에는 안연(顔淵), 민자건(閔子騫), 염백우(冉伯牛), 중궁(仲弓)이고, 언어(言語)에는 재아(宰我), 자공(子貢)이고, 정사(政事)에는 염유(冉有), 계로(季路)이고, 문학(文學)에는 자유(子游), 자하(子夏)이다.” 하였다. 후세에는 이것을 공문사과(孔門四科)라 하는바, 혹 이 사과를 오과(五科)로 잘못 쓰지 않았나 추측된다.
[주D-007]네 가지 가르침 : 문학과 행실, 충(忠)과 신(信)으로, 《논어(論語)》 술이(述而)에 “공자는 네 가지로 사람을 가르쳤으니 문학과 행실, 충과 신이었다.[子以四敎 文行忠信]”라고 보인다.
[주D-008]전씨(田氏)의 후손 : 제(齊) 나라의 전횡(田橫)을 가리킨다. 전국 시대(戰國時代) 제 나라의 왕족으로 초(楚)와 한(漢)이 대치하던 당시 전영(田榮)의 뒤를 이어 제왕(齊王)이 되고 항우(項羽)를 섬겼으나, 항우가 패망하자 화를 두려워하여 5백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서해의 오호도(烏乎島)로 피신하였다. 천하를 통일한 유방(劉邦)이 사람을 보내어 “와서 항복하면 제후왕을 봉하고 오지 않으면 섬 전체를 도륙(屠戮)하겠다.”고 위협하자, 낙양(洛陽)으로 유방을 찾아가던 중 끝내 굴복하는 것을 싫어하여 그만 자결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그의 부하들도 모두 자결하여 충절을 지켰다. 본문의 4백 명은 5백 명의 오기(誤記)인 것으로 보인다.
[주D-009]구정(九鼎)의 의리 : 구정은 우왕(禹王)이 구주(九州)의 쇠를 모아 주조하였다는 솥으로 역대에 국가의 왕통(王統)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여겨왔다. 이 때문에 큰 의리와 충절을 일컫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주D-010]애산(崖山) : 애산(厓山)으로도 쓴다. 중국의 광동성(廣東省) 신회현(新會縣) 남쪽 바닷속에 있는 섬으로 천험(天險)의 요새이다. 남송(南宋) 말기 금(金) 나라의 침공으로 송(宋) 나라가 위태롭게 되자, 장세걸(張世傑) 등은 황제인 조병(趙昺)을 받들고 이곳으로 피난하였으나 금 나라의 백안(伯顔)과 장홍범(張弘範)에게 패하여 멸망하였는바, 다음의 내용은 이 사실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宋史 卷四百五十一 張世傑列傳》
[주D-011]조복(朝服)과 주절(柱節) : 조복은 조회할 때에 입는 관복이며 주절은 가느다란 철사줄이 들어 있는 관(冠)으로 추측되나 자세하지 않다.
[주D-012]적멸(寂滅)의 가르침 : 불교(佛敎)의 교리를 이른다. 적멸은 열반(涅槃)의 의역(義譯)인바, 본체가 고요하여 일체의 상(相)을 떠났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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