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헌선생문집 제8권_
잡저(雜著)_
동진록(同塵錄)
그리하여 무릇 귀한 자와 부유한 자는 일찍이 친하였거나 또는 성의(誠意)를 가지고 서로 만나보려고 하는 자가 아니면 진실로 감히 스스로 붙으려는 뜻이 없었으며, 이른바 어질고 지혜로운 자에 있어서도 만약 참으로 어질고 참으로 지혜로움을 스스로 살펴 알지 못하면 감히 달려가 만나보려고 하지 않았으며, 비록 혹 만나더라도 또한 가볍게 마음으로 허여(許與)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난하고 천한 자는 만일 정상적인 방법으로 가난과 천함을 얻지 않았으면 진실로 성분(性分)의 안에 관계되지 않으므로 내 감히 스스로 외면하여 가벼이 여기지 않았으며, 어리석고 불초(不肖)한 자에 있어서도 또한 일찍이 차별하여 대우하고 비하하여 오만히 대하지 아니하여 혹 더불어 용납하여 만나주고 혹 더불어 말을 나누곤 하였다.
그러므로 나를 좋아하는 자들은 나를 혹 전금(展禽)의 화(和)함에 비유하고 나를 비판하는 자들은 나를 향원(鄕愿)의 행실에 비교하였으나 나는 오히려 이러한 행실을 고치지 않았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후로는 세도(世道)가 날로 더욱 혼탁해지고 인심(人心)이 더욱 패악해지니, 이러한 때를 당하여 비록 바른 도를 지키고 예의(禮義)를 몸소 실천하는 자라도 시골에 있으면서 일체 올바른 법도로 다스릴 수 없는데 하물며 유리(流離)하여 딴 마을에 나그네로 부쳐 있는 자가 어찌 세속을 따라 스스로 감추는 도가 없겠는가.
이에 억지로 온화하고 유순한 안색(顔色)을 하고 강경(剛勁)한 모양을 힘써 제거하여, 비록 노예(奴隷)와 비첩(婢妾), 아동(兒童)과 하우(下愚)를 만나더라도 반드시 온화한 얼굴로 대하고 따뜻한 말로 상대하니, 하물며 마을 사람들을 능가하여 감히 기세(氣勢)를 내는 자를 대함에 있어서랴.
이는 비단 사나운 자를 만나거나 교만한 자를 만나 거만한 말을 하다가 노여움을 저촉하고 완악한 용모를 하다가 욕을 부를까 우려해서 그러할 뿐만 아니라, 고을의 풍속이 질박하고 촌스러우며 백성들이 지식이 없으니, 다만 충신(忠信)과 질직(質直)함으로써 서로 사귀어야 하고 예법(禮法)과 겸양(謙讓)으로 종사할 수 없어서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떳떳함을 변하고 평소의 행실을 고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말을 잘 하지 못하여 일찍이 마음속과 다른 말을 하지 못하였으나 지금은 혹 억지로 말하는 경우가 있으며, 나는 모양을 꾸미는 것을 잘 하지 못하여 일찍이 기뻐하지 않는 웃음을 짓지 못하였으나 지금은 혹 억지로 웃는 경우가 있다. 그리하여 바둑판으로 놀이하는 경우도 있고 활을 쏘고 구경하는 경우도 있으며, 혹 앞 시내에서 물고기 잡는 자들과 함께 어울리고 혹 뒷산에서 사냥하는 지아비를 따라다닌다. 혹은 밭두둑에서 함께 두 다리를 뻗고 걸터앉기도 하고 혹은 길거리에서 서로 농담을 나누기도 하며, 혹은 방패와 창에 대한 일을 말하기도 하고 혹은 농사짓고 누에치는 일을 말하기도 한다.
상대방의 물음에 따라 답하여 감히 옳고 그름을 다투지 않으며, 말에 따라 들어 주어 감히 잘잘못을 구별하지 않는데, 이와 같이 날을 보내고 이와 같이 해를 마친다. 나는 때때로, “내가 난세(亂世)에 대처하고 말속(末俗)을 따름은 자신을 보존하는 계책에는 잘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유속(流俗)과 함께하고 더러운 세속과 영합하여 날로 물들고 달로 변화하여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며 의심하고는 곧바로 스스로 다음과 같이 해명(解明)하였다.
바깥에서 따름은 자취이고 중심에 지킴은 마음이며, 변할 수 없는 것은 도이고 변할 수 있는 것은 일이다. 나는 중심의 지킴을 한결같이 할 뿐이니, 바깥의 자취를 따름이 어찌 나쁘겠는가. 나는 변할 수 없는 것을 변치 않을 뿐이니, 또 변할 만한 것을 변하는 것이 어찌 나쁘겠는가.
능히 클 수 있고 능히 작을 수 있은 뒤에야 용(龍)의 신묘함을 볼 수 있으며, 능히 굽힐 수 있고 능히 펼 수 있은 뒤에야 귀신(鬼神)의 묘함을 볼 수 있으니, 도가 어찌 한결같이 높고 멀고 깊고 큰 것만을 하겠는가. 비록 지극한 덕을 간직한 사람이라도 때로는 낮고 가깝고 얕고 작은 것을 하여 혐의하지 않으니, 이 때문에 그 높고 멀고 깊고 큰 도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 도가 어찌 다만 사람에게 있어서만 그러하겠는가. 천지(天地)와 같이 광대(廣大)하고 고후(高厚)하며 일월(日月)과 같이 지극히 밝으며 풍우(風雨)와 같이 깊고 멀더라도 그렇지 않음이 없다.
내가 한번 말해 보겠다. 하늘이 덮어주고 땅이 실어주는 것으로, 날아가는 새에는 봉황(鳳凰)이 있고 달리는 짐승에는 기린(麒麟)이 있으며, 물고기와 벌레에는 거북과 용(龍)이 있고 풀에는 지초(芝草)와 난초(蘭草)가 있으며, 나무에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있고 흙에는 금(金)과 옥(玉)이 있으며, 산에는 오악(五嶽)이 있고 물에는 사독(四瀆)이 있으며,사람에는 성인(聖人)과 현인(賢人)이 있고 나라에는 황제(皇帝)와 왕(王)이 있으니, 그 있는 바가 크고 또 귀하지 않은가.
뱁새에 이르러는 새 중에 작은 것이고 개와 돼지는 짐승 중에 작은 것이며, 하막(蝦蟆)은 벌레 중에 작은 것이고 쑥과 갈대는 풀 중에 작은 것이며, 탱자나무와 가시나무는 나무 중에 작은 것이고 모래와 자갈은 흙 중에 작은 것이며, 구릉은 산 중에 작은 것이고 도랑과 개천은 물 중에 작은 것이며, 어리석은 지아비와 어리석은 지어미는 사람 중에 작은 것이고 일반 백성들은 나라의 미천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 또한 하늘이 덮어주고 땅이 실어주는 가운데 포용되지 않음이 없으니, 어찌 유독 크고 귀한 것만이 천지에 포용되고 작고 미세한 것은 마침내 버려지겠는가.
단지 물건의 포용됨이 귀천(貴賤)과 대소(大小)와 거세(巨細)를 겸할 뿐만 아니라 그 운행하고 조화를 베푸는 도(道)도 모두 높고 작고 얕고 깊음이 있다. 추위가 심해지면 갖옷을 겹쳐 입고 따뜻한 방에 있는 자도 오히려 따뜻할 수 없으나 추위가 약해지면 미세한 벌레도 또한 발생(發生)하니, 이는 추위가 항상 심하지만은 않고 때로는 쇠할 때가 있는 것이다. 더위가 성하면 산이 마르고 냇물이 끓으나 더위가 식으면 한 덩이의 흙도 마르지 않고 길 위에 있는 빗물도 마르지 않으니, 이는 더위가 항상 성하지만은 않고 때로는 쉴 때가 있는 것이다. 어찌 길이 융성하고 쇠하지 않으며 길이 성하고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겠는가.
해와 달이 물건을 비춤도 또한 그러하여 단지 아름답고 큰 것만을 비추고 미세한 것은 비추지 않는 것이 아니며, 비바람이 물건을 적셔줌도 또한 그러하여 단지 크고 귀한 것만을 적셔주고 천하고 작은 것은 적셔주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높고 크며 지극히 넓고 후(厚)한 것은 물건을 선별하여 용납하지 않고, 지극히 밝은 것은 물건을 선별하여 비추지 않고, 지극히 윤택한 것은 물건을 선별하여 적셔주지 않는다.
성인(聖人)의 도(道)도 이와 같다. 그 높고 크고 깊고 원대(遠大)한 것으로 말하면 천지(天地)에 유통(流通)하고 음양(陰陽)에 출입하여 귀신과 길흉을 함께하고 해와 달과 광명을 함께하여, 이미 돌아가신 성인(聖人)을 잇고 만세(萬世)의 후학(後學)들을 열어주나, 그 낮고 작고 얕고 천근(淺近)한 것으로 말하면 교화(敎化)가 풀 한 포기와 나무 한 그루에도 모두 입혀지고 덕(德)이 어리석은 지아비와 어리석은 지어미에게까지 미치며, 도(道)가 여염(閭閻)과 밭두둑에 행해지고 몸이 궁벽한 골목과 들에서도 편안하니, 이것이 능히 클 수 있고 능히 작을 수 있어 변화(變化)하고 굴신(屈伸)하는 도인 것이다.
하늘에 천거하자 하늘이 받아주고 백성에게 드러내자 백성들이 귀의(歸依)하여 필부(匹夫)로서 요(堯) 임금의 지위를 선양(禪讓)받았으니, 대순(大舜)의 성(聖)스러움이 어떠하였는가. 그러나 미숫가루를 먹고 채소를 먹을 적에 뇌택(雷澤)에서는 고기잡는 어부가 되고 황하(黃河) 가에서는 질그릇을 굽는 도공(陶工)이 되고 역산(歷山)에서는 밭가는 백성이 되었으니, 이 때를 당하여 대순이 감히 야인(野人)들과 스스로 달리하였겠는가.
도가 여러 왕 중에 으뜸이어서 요(堯), 순(舜)보다도 크게 어질었으니, 공자(孔子)의 성스러움이 어떠하였는가. 그러나 노(魯) 나라 사람들이 사냥하여 잡은 짐승의 많고 적음을 다투자 그들과 함께 사냥하여 잡은 짐승의 많고 적음을 다투었으며, 음행(淫行)이 있는 남자(南子)를 만나보고 포악한 양화(陽貨)를 만나보았으며, 광(匡) 땅에서 경계하는 마음을 품었고 진(陳) 나라에서 식량이 떨어져 경황이 없어 수레바퀴 자국이 온 천하를 돌았으니, 이 때를 당하여 공자가 감히 한 가지 잘함으로써 이름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이는 성인을 일반 사람들이 미칠 수 없어, 변화함이 신묘한 용과 같고 굴신함이 귀신과 같아 덮어주고 실어주고, 광명함이 천지와 일월과 똑같음이 있는 것이다. 내가 오늘날 진세(塵世)와 함께함도 이러한 뜻이므로 우선 이것을 기록하여 후일 스스로 상고하기를 기다리는 바이다.
[주D-002]향원(鄕愿)의 행실 : 향원은 향원(鄕原)으로 쓰기도 하는바, 시골에서 삼가고 조심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공자(孔子)는 이러한 자들을 겉으로만 공손한 사이비 유덕자(似而非有德者)라 하여 “향원은 덕의 적이다.[鄕原德之賊也]”라고 배척하였다. 《論語 陽貨》 《孟子 盡心下》
[주D-003]오악(五嶽)이……있으며 : 오악은 중국의 다섯 개의 명산으로 동악(東嶽)인 태산(泰山), 서악(西嶽)인 화산(華山), 남악(南嶽)인 형산(衡山), 북악(北嶽)인 항산(恒山), 중악(中嶽)인 숭산(嵩山)이라고 하나 기록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으며, 사독은 네 개의 큰 물로 곧 양자강(揚子江), 황하(黃河), 회수(淮水), 제수(濟水)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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