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헌선생문집 제9권_
기(記)_
입암(立巖)에 대한 기문
무릇 산과 들 사이에 바위가 혹 우뚝 솟아 있어 입암(立巖 선바위)이라고 이름하는 것을 내 많이 보았지만 가장 기이하고 특별하여 더불어 비견할 수 없는 것은 내 홀로 이 바위에서 보았다.
딴 바위에 이른바 ‘섰다[立]’는 것은 반드시 높으면서 크고 크면서 바르고 바르면서 곧지는 못하다. 혹 여러 바위 사이에 나열되어 있어서 홀로 서서 기울지 않은 상(象)이 있음을 볼 수 없고, 혹 산등성이와 벼랑 위에 자리하고 있어서 우뚝 솟아 스스로 빼어난 기이함이 있음을 볼 수 없으며, 혹 여러 층이 중첩되고 거듭 쌓여 높아져서 그 전체가 한 바탕이 아닌 것이 있고, 혹 어지러운 모서리와 기울어진 구멍이 있어서 기울고 벼랑이 있고 뚫려 있으며 좌우가 혹처럼 나와 모가 나 바르지 못한 것이 있으며, 혹 바위 밑부분이 거칠고 끝에 이르면 뾰족한 것이 있고, 혹 네모지고 둥근 것을 분별할 수 없어서 기울고 곧지 않은 것이 있다.
그리고 혹 바위는 기이하나 서 있는 곳이 제자리가 아니어서 만약 도시(都市)의 사이와 큰길 가에 있으면 번거로움을 싫어하는 자들이 혐의하며, 또 기상(氣像)이 이와 비슷한 자가 보고 즐길 줄을 아나 물을 좋아하는 지혜로운 자
그렇다면 바위가 서 있는 것을 얻기 어려우며, 이른바 서 있다는 것도 또한 품류(品類)가 많다. 그리하여 그 기이함이 한두 가지가 아니고 그 병통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기이함이 많고 병통이 적은 것을 쉽게 볼 수 없으니, 하물며 완전히 기이하고 병통이 없는 것은 천백 개 중에 하나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 다행히 여기에서 얻었으니, 이 바위는 참으로 기이하다.
사방의 높이가 10여 장(丈)이 될 만하고 상하의 둘레가 7, 8심(尋 8척(尺)을 이름)에 가깝다. 여러 바위 사이에 서 있지 않으니 이른바 홀로 서서 기울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형이 산등성이와 산기슭을 의지하지 않았으니 이른바 우뚝 솟아 스스로 빼어났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발끝부터 머리에 이르기까지 전체가 한 바탕이니 여러 층이 중첩되고 거듭 쌓여 구차히 높은 것이 아니며, 모서리지지 않고 구멍이 나지 않고 혹이 붙지 않고 움푹 꺼지지 않았으니, 기울고 결함이 있고 뚫려 있어 바르지 않은 것이 아니다.
아래로부터 위에 이르기까지 그 곧음이 똑같고 밑부분으로부터 머리에 이르기까지 그 큼이 똑고르니 바르다고 이를 만하며, 바라보면 둥근 듯하고 나아가 보면 네모진 듯하며 앞에서 보면 기울지 않고 뒤에서 돌아보면 치우치치 않으니 중정(中正)하다고 이를 만하다. 시장 곁이 아니고 큰 길거리가 아니며 깊은 산 가운데에 있으니 제자리에 서 있다고 할 것이요, 맑은 물을 끼고 깊은 못에 임해 있어서 지극히 고요한 것을 지극히 동(動)하는 가운데에 간직하고 있으니 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하는 자들이 모두 좋아한다. 나는 이 때문에 바위가 서 있는 것을 본 것이 많으나 지금 이 바위를 홀로 처음 보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비단 그 형체가 기이하고 서 있는 것이 특이하며 방위(方位)가 알맞는 곳을 점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한 바위가 가운데 서 있는데 여러 산들이 둘러 있고 여러 골짝이 싸고 있는바, 그 형세를 돕는 것은 뒤에는 운둔(雲屯)의 높은 바위가 있고 전면에는 우뚝 솟은 높은 봉우리가 있으며, 왼쪽에는 붕새[鵬] 부리의 뫼가 있고 오른쪽에는 거북이 엎드린 등성이가 있으며, 동구(洞口)에는 푸른 산이 중첩되어 있고 골짝 위에는 근원을 찾는 작은 오솔길이 있다.
그리하여 돌의 크고 작음을 따질 것 없이 모두 앉아서 잠을 잘 만하고, 나무의 늙고 어림을 막론하고 모두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을 쉬게 한다. 흐름을 따라 굽이가 있어서 모두가 바람을 이끌어 오는 자리이고, 돌에 부딪혀 못을 이루어서 모두가 낚싯대를 던질 만한 물결이다.
백운(白雲)은 무슨 마음으로 산마을을 덮고 있으며 푸른 송라(松蘿)는 무정한데 어이하여 들길을 막고 있나. 몇 두둑의 황폐한 밭은 콩을 심을 수 있고 천산(千山)의 새로운 산나물은 입맛을 돋을 수 있다. 구불구불한 돌길은 지팡이 소리를 아침저녁으로 울릴 수 있고, 지저귀는 새 소리는 제 스스로 울부짖는데 내 홀로 노래한다. 그리하여 물건을 만나 흥취를 이루고 눈을 붙여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비록 묘한 솜씨라도 다 그려낼 수 없고 비록 공교한 문장이라도 이것을 다 거두어 표현할 수 없으니, 그렇다면 한 바위가 간직하고 있는 기이한 경치를 이루 헤아릴 수 있겠는가.
바위 뒤에 작은 골짝이 있는데 땅이 그리 넓지 아니하여 수십 채의 초가(草家)를 용납할 만하며, 북, 동, 서 3면에는 모두 높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그 남쪽 어구는 곧 앞서 말한 운둔암(雲屯巖)이며 그 아래가 바로 이 입암(立巖)이다. 바위 아래에는 냇물이 있고 냇물 남쪽에는 또 봉우리가 있으며 봉우리 위에는 또 고개가 있다. 그리하여 지형이 이미 높으면서도 오목하게 파여서 냇물을 따라 가는 자들은 이곳에 마을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하니, 참으로 은자(隱者)가 살 만한 곳이다.
옛날에는 거주하는 사람이 없었고 혹 마을의 농부들이 이곳에 와서 농사짓는 자가 있었으나 땅이 척박하여 곡식을 경작하는 데 적합하지 않으므로 대부분 황폐한 채로 버려져 있었다. 임진년(1592,선조25)에 왜구(倭寇)가 쳐들어오자, 영양(永陽)의 선비 3, 4명이 뜻을 합하고 이 골짝에 들어와 사니, 3, 4명의 선비는 곧 나의 벗인 권군 강재(權君强哉), 손군 길보(孫君吉甫), 정군 여섭(鄭君汝燮)과 군섭(君燮) 형제였다.
네 친구들이 나를 보고 바위가 기이함을 극구 말하였으므로 나는 네 친구를 따라 지난해에 비로소 와서 구경하니, 과연 네 친구의 말이 허황된 칭찬이 아님을 징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금년에 또다시 찾아가 오랫동안 머물면서 지난해에 미처 보지 못한 곳을 두루 탐방(探訪)하니, 과연 볼수록 더욱 기이하고 오래 있을수록 더욱 싫지 않았다.
하루는 네 친구가 나를 보고 말하기를, “바위가 이처럼 신기하고 사는 곳이 이처럼 깊으므로 우리들은 이곳을 노년(老年)을 마칠 장소로 삼고자 하니, 공(公)은 우리들을 따르지 않겠는가? 또 우리들이 처음 취한 것은 이 바위가 신기하기 때문이었는데, 이 바위의 위아래와 사방에는 골짝과 시냇물과 돌이 모두가 아름다운 경치로서 이 바위의 도움이 되고 있으니, 곳에 따라 명칭을 붙여 우리들이 놀고 구경하며 탐상(探賞)하는 장소로 삼지 않겠는가?” 하였다.
나는 흥에 취하여 졸연(猝然)히 이를 승낙하고, 스스로 어리석고 졸렬하고 참람하고 망녕되며 또 시냇물과 산에 욕을 끼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미 이 바위와 산, 시냇물과 돌의 아름다운 경치를 얻었는데, 만일 깃들여 쉬고 거처하며 학문을 닦을 집을 만들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또 편안히 머물 곳이 없을 것이다. 또 처자식이 시끄럽게 떠드는 사이와 닭이나 개가 번잡하게 다니는 곳이 어찌 군자(君子)가 정신을 기르고 본성을 기를 수 있는 곳이겠는가.
이에 네 친구가 한 서재(書齋)를 설치하고자 하였는데, 바위 뒤 동쪽 가에 집 몇 칸을 세울 만한 곳이 있었다. 이 곳은 뒤는 마을과 막혀 있고 앞은 시냇물을 굽어보며, 바위를 등지고 서 있거나 바위 위에 걸터앉을 수 있어 앉고 누움에 그 모양을 모두 볼 수 있다. 또 바람을 막고 양지(陽地)를 향하여 비록 추운 겨울이라도 따뜻함을 취할 수 있다.
서재를 비록 세우지 않았으나 네 친구의 계책이 이미 정해졌으므로 나는 미리 이름을 짓기를 ‘우란재(友蘭齋)’라 할 것을 청하였다. 난초는 진실로 깊은 골짝에서 자라는 풀로 군자가 차고 다니니, 서재를 이름한 뜻을 네 친구는 묵묵히 알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바위로부터 북쪽으로 가다가 마을 집에 미치지 못하고 마을로부터 남쪽으로 가다가 입암에 미치지 못하는 곳에 한 바위가 우뚝이 산처럼 솟아 있으니, 그 높이가 또한 4, 5길이 될 만하고 그 주위가 대략 땅을 측량하는 자[尺]로 재면 또한 수십 척(尺)에 내리지 않는다. 높이 솟아 있고 우뚝하여 진실로 구름이 주둔[雲屯]해 있는 듯하였다.
그 위에는 오래된 소나무 수십 그루가 용(龍) 모양의 가지가 서로 얽혀 있고 바람에 시달린 잎이 앙상하여 높은 산과 큰 산악의 형체가 의연(依然)히 있고 신선이 사는 지역과 절정(絶頂)의 풍취(風趣)가 은연(隱然)히 있어 우러러보는 자들로 하여금 정신이 엄숙하고 상쾌하며 마음과 생각이 깨끗하고 원대하게 하여 자연히 흥기(興起)하는 바가 있었다. 그러므로 칭하기를 ‘기여암(起予巖)’이라 하였다.
북, 동, 서 3면의 언덕에는 모두 작은 길이 있어 산에 오를 수 있으나 남쪽 언덕은 또 높이가 배나 되어 가팔라 오를 수 없으며, 남쪽 언덕의 밑은 곧 우란재의 터이다. 또 입암의 위, 기여암의 아래 중간에 평평한 바위가 있는데, 입암과 기여암과의 거리가 각각 10여 보(步)쯤 된다. 사람들이 마을로부터 올 경우, 기여암의 서쪽 곁을 따라 오면 굳이 산을 오르지 않고도 평평히 걸어 이곳에 오를 수 있으며, 그 아래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또한 7, 8길[丈]이 되어 내려다 볼 수 없고 그 가운데는 평평하고 둥글다.
네 친구는 지형을 따라 터를 닦고 그 주위에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었다. 대의 좌우에는 두 그루의 높은 소나무가 있어 아침저녁의 햇빛을 가리울 수 있으며, 한낮에 그늘이 완전하지 않을 때가 있으므로 또 긴 나무를 두 소나무에 걸쳐 놓아 기둥을 삼고 딴 소나무의 먼 가지를 베어다가 덮어서 햇빛을 가리우지 못하는 부분을 보충하니, 종일토록 햇빛을 보지 않을 수 있었다. 대의 남쪽 귀퉁이에도 작은 소나무 몇 그루가 있는데 길이가 혹 몇 자쯤 된다. 네 친구들은 이 소나무를 사랑하고 보호하여 날마다 자라기를 기다리니, 이 소나무가 만약 자라면 굳이 딴 나뭇가지를 베어다가 덮지 않아도 그늘이 저절로 충분할 것이다.
대 위는 10여 명이 앉을 만하니 차를 끓이고 술을 데우는 데 모두 적당한 장소가 있으며, 따라온 노비(奴婢)와 어린이들도 각기 곁에 편안히 앉을 곳이 있다. 대 위에 앉으면 3면이 모두 높은 절벽이어서 반드시 항상 깊은 못에 임한 듯이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으므로 이 대를 이름하여 ‘계구(戒懼)’라 하였으니, 계구는 대가 된 형세인데 계구의 뜻은 참으로 많다.
이 대는 뒤에는 기여암이 있고 앞에는 입암이 있으니, 다만 두 바위만 가지고도 한 구역의 좋은 경치를 점령할 수 있는데, 하물며 좌우와 원근이 모두 기이한 구경거리이다. 그리하여 형형색색(形形色色)으로 크고 작은 것이 나열되어 있어 기이함을 다투고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서로 신기한 구경거리가 되고 있음에랴.
한 줄기 푸른 물이 동쪽 벼랑으로부터 흘러와서 굽이굽이 감돌아 입암의 아래를 부딪히고 지나가는데, 해가 오래고 세월이 흐를수록 그 부딪힘이 그치지 않아 지금 바위 밑에는 물에 깎인 흔적이 역력하다. 이 물이 이미 서쪽으로 흘러갔다가 다시 남쪽으로 돌아서 혹 숲을 돌아 숨기도 하고 혹 돌을 지나 나타나기도 하며, 혹 느리게 흘러 못이 되고 혹 급하게 흘러 여울이 되며, 혹 나뉘어 섬[島]이 되고 혹 굽어 물가를 이루었는바, 대 위에서 7, 8리를 볼 수 있다.
대의 바로 남쪽에는 큰 산 한 줄기가 점점 낮아져 가운데가 줄어들었는바, 서쪽에서 와서 북쪽으로 돌아 입암과 마주한 곳에 이르러 봉우리가 우뚝 솟았으며 벼랑의 돌이 높이 솟아 있다. 이 봉우리는 시냇물 남쪽에 있고 입암은 시냇물의 북쪽에 있어 마치 서로 손을 잡고 읍(揖)하는 듯한데 이름을 ‘구인봉(九仞峯)’이라 하였다. 구인봉은 그 높음을 말한 것이나 구인이란 말은 공자(孔子)의 산을 만드는 비유에서 나왔으니, 우리들은 한 삼태기의 흙을 더하지 아니하여 아홉 길의 산이 되지 못함을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의 동쪽에는 뒷산 한 줄기가 있는데 이 역시 온 것이 점점 낮아진 뒤에 다시 일어나 봉우리가 되었는바, 봉우리의 모양이 단정하고 둥글어 마치 부용(芙蓉)이 물 위로 나왔는데 꽃봉오리가 터지지 않은 듯하였다.
대 위에 해가 저물고 산중 사람들이 막 즐거워하여 등불을 켜려고 하나 구할 수가 없고 촛불을 밝히려고 하나 마땅치가 않다. 이 때에 함께 주목(注目)하고 동쪽을 바라보며 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는데 한 조각 얼음같은 둥근 달이 봉우리 위로부터 나와서 마치 봉우리가 둥근 달을 토해내는 듯하였다. 그러므로 이 봉우리를 이름하여 ‘토월(吐月)’이라 하였으니, 대 가운데의 밤 경치가 이 달을 얻어 밝아진다.
대의 서북쪽에는 가장 높은 한 뫼가 있는바, 산인(山人)들이 산을 나가지 않고 때로 울적한 회포를 펴고자 하면 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는 벼랑을 따라 등라(藤蘿)를 부여잡고 이 뫼에 한번 올라, 선니(宣尼 공자)께서 동산(東山)에 오르고 태산(泰山)에 오른 놀이를 따른다면 한 조그마한 청구(靑丘 우리 나라)가 일찍이 한번 보는 시야(視野)에 차지 못하니, 이 뫼를 어찌 ‘소로(小魯)’라고 이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토월봉(吐月峯)의 동쪽에 깊고 빼어난 고개가 있는데 반은 감추어져 있고 반은 드러나 있으며 울울창창(鬱鬱蒼蒼)하여 나무하는 지아비와 약초를 캐는 나그네들의 발자취도 미치기 어려우니, 이곳을 이름하여 ‘산지령(産芝嶺)’이라 하였다.
지초(芝草)가 반드시 이곳에서 생산되는 것은 아니나 산지(産芝)라고 이름한 것은 어째서인가? 옛날 상산(商山)의 사호(四皓)가 시서(詩書)를 불태우고 선비들을 묻어 죽이는 진(秦) 나라의 학정(虐政)을 피하여 몸과 세상을 상산의 깊은 골짜기에 부쳐 두고 홀로 멀리 당(唐), 우(虞)의 태평성세를 그리워하였으니, 천 년이 지난 뒤에 자지가(紫芝歌)를 외우고 읊어보면 또한 그 금회(襟懷)가 세속을 초탈하였음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들을 그리워하나 볼 수 없으니, 그의 뜻을 숭상하여 높이 읍(揖)하는 자가 눈을 붙여 회포를 펼 곳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고개 이름을 ‘산지’라 한 것이다.
산이 산지령에서 서쪽으로 간 것이 또 계구대(戒懼臺)의 동남쪽에 한 고개를 만들었으니, 곧 구인봉(九仞峯)이 온 곳이다. 대에서 바라보면 가장 가깝고 또 마주보고 있으며 둥글고 높고 농후(濃厚)하며 울창하고 밝게 드러났는바, 이곳을 이름하여 ‘함휘(含輝)’라 하였으니, 이는 주회암(朱晦庵 회암은 주희(朱熹)의 호)의 “옥이 묻혀 있으니 산이 빛을 머금고 있다.[玉蘊山含輝]”는 뜻을 취한 것이다.
이 산이 옥을 간직하고 있는지의 여부는 진실로 알 수 없으나 좋은 옥이 묻혀 있는 곳은 반드시 명산(名山)이며, 회옹(晦翁)의 이 시구(詩句)는 또 군자가 덕을 쌓아 순수함이 얼굴에 나타나고 덕스러운 모양이 등에 가득함을 비유한 것이니, 우리들은 이로부터 이 산을 바라보면서 반드시 그 이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들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 과연 덕이며 낯과 등에 나타나는 것이 과연 순수하고 가득할 것인가? 이 또한 어찌 스스로 닦는 도움이 아니겠는가. ‘함휘’라는 이름은 이것을 취한 것이다.
함휘령(含輝嶺)으로부터 남쪽으로 가면 또 한 고개가 아득한 사이에 높이 솟아 있으니, 계구대에 앉아 있는 자는 반드시 구인봉 위로 눈을 들어 올려다 본 뒤에야 이 곳을 바라볼 수 있다. 이 곳은 언제나 흰 구름이 정상에 모여 있어 혹은 관(冠)과 건(巾)을 머리에 쓴 듯하고, 혹은 빗긴 띠가 허리에 있는 듯하며, 혹은 벼랑과 골짝이 모두 가리워진 경우가 있고, 혹은 봉우리와 산이 반쯤 노출된 경우가 있으며, 혹은 처음에는 얇았다가 끝내는 빽빽하고 혹은 잠시 모였다가 곧바로 흩어지며, 아침에는 안개가 되고 저녁에는 노을이 된다. 그리하여 변화가 무상하고 가고 오는 흔적이 없는 것이 이 구름이다. 그러므로 이름을 ‘정운령(停雲嶺)’이라 하고 이에 도정절(陶靖節)의 “구름이 무심히 산을 나간다.[雲無心而出岫]”는 글을 읊으니, 또한 거두고 펴며 행하고 감추는 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무릇 사면(四面)의 산이 모두가 높고 큰데 그 중에도 서산(西山)이 가장 웅장하고 높다. 한 시냇물의 하류에 있고 한 골짝의 초입구(初入口)에 있어서 마치 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하므로 마침내 이름하기를 ‘격진령(隔塵嶺)’이라 하였다.
이미 이 고개가 있어 안과 바깥을 막고 차단하므로 우리 입암(立巖)의 시내와 산의 절경(絶景)이 스스로 한 구역의 비밀스러운 곳이 되어서 산 밖에 있는 진세(塵世)의 종적들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다. 한 골짝 가운데 고기잡고 나무하는 흥취를 다만 우리들이 홀로 즐길 수 있어 세상의 뜬구름과 같은 부귀(富貴)와 서로 바꿀 수 없으니, 이 고개를 ‘격진’으로 이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시냇물의 남쪽에는 한 들이 있는데 마을과의 거리가 겨우 1, 2리(里)에 불과하다. 이 들의 토지는 벼와 보리가 잘 자라고 기장과 수수도 잘 자라니, 만일 힘써 농사를 짓는다면 충분히 굶주림을 면할 것이다. 구름을 헤치고 밭을 갈며 비를 맞으면서 호미질하는 것은 진실로 산중의 좋은 일인데, 신야(莘野)에서 농사짓던 노인과 남양(南陽)의 와룡(臥龍)이 혹 요(堯), 순(舜)의 도를 즐거워하고 혹 관중(管仲)과 악의(樂毅)에게 자신을 비유하였으니,우리들이 홀로 이윤의 뜻을 뜻하고 와룡의 마음을 마음에 간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들의 이름을 ‘경운(耕雲)’이라 한 것은 이것을 사모해서이다.
시냇물이 흐르는 곁에 숲이 연하여 푸르러 스스로 낳고 스스로 자라 어지러이 무성하다. 마을 사람들이 아침저녁으로 밥을 짓거나 노는 손님들이 차[茶]를 끓이고 고기를 삶을 적에 푸른 연기 한 가닥이 작은 색깔을 야기(惹起)하여 시인(詩人)들의 입에 제공하고 혹 돌아가는 새의 눈을 혼미하게 하니, 이 때문에 숲을 ‘야연(惹煙)’이라 이름하였다.
골짜기가 맨 아래 어구에 있는 것은 ‘초은(招隱)’이라 이름하였으니 벼슬길에 혼미하고 빠져서 돌아오지 못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긴 것이며, 골짜기가 시내 위에 있는 것을 ‘심진(尋眞)’이라 이름하였으니 참을 간직하고 깊이 은둔하는 자를 그리워하나 만나볼 수가 없다는 뜻이다.
골짜기가 정운령(停雲嶺) 아래에 있는 것을 ‘채약(採藥)’이라 이름하였으니, 약은 반드시 방외(方外)의 인사들이 단사(丹砂)나 석수(石髓)를 가지고 사람을 그르치는 것처럼 하는 것이 아니다. 한가로이 거처하며 병을 치료하여 수양하고 성명(性命)을 보전하는 데에는 약물이 없을 수 없는데 이 골짝에는 이러한 약물이 많이 생산되므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입암의 밑 시냇물이 흐르는 가운데에 돌이 평평히 깔려있는바, 모가 나고 우뚝 솟은 것이 출몰하고 이리저리 종횡하며, 가운데에는 돌 틈이 있는데 길이와 넓이가 겨우 한 길쯤 된다. 흐르는 시냇물이 이곳에 멈추어 깊이 파이고 매우 맑아 한 작은 못이 되었다. 못의 위아래에는 돌이 노출되어 둥글게 서려 있는 곳이 있는데, 흐르는 물이 불어나면 침몰되고 수위(水位)가 떨어지면 나온다. 그러나 침몰될 때가 적고 나올 때가 많은바, 이 돌에 앉아 있으면 못을 굽어볼 수 있다. 혹 몸을 씻기도 하고 혹 양치질하면서 노는 물고기가 오고 가는 것을 구경할 수 있으므로 이에 이 돌을 이름하여 ‘경심대(鏡心臺)’라 하고, 이 못을 이름하여 ‘수어연(數魚淵)’이라 하였다.
바위 그림자가 못 속으로 거꾸로 드리워지고 파란 이끼와 푸른 숲이 마치 못의 물고기의 소굴이 된 듯하다. 다만 못이 다소 넓지 못하여 작은 배를 띄울 수 없고, 돌이 다소 높지 못하여 물이 불어나면 침몰됨을 면치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경심대로부터 시냇물을 거슬러 올라가 한 굽이를 지나면 물이 돌아 물굽이를 이루었는데, 물굽이는 구인봉(九仞峯)의 동쪽 언덕에 있다. 바위가 물가에 임하여 평평하고 또 넓어서 몇 칸의 초가(草家)를 세울 수 있으나 다만 다소 높지 못하여 물이 불어나면 침몰되므로 집을 지을 수가 없다. 그러나 뒤에는 높은 산을 등지고 있고 앞에는 험한 물을 굽어보며 또 구인봉이 가리고 있어 그윽하고 아늑하며 깊고 조용하여 아득히 외인(外人)과 서로 접하지 않는 듯하므로 마침내 이름하기를 ‘피세대(避世臺)’라 하였다.
또 피세대로부터 시냇물을 건너가서 채 1, 2리가 못 되는 곳에 물을 가로지르는 돌이 있어 스스로 돌다리를 이루니, 만약 물이 불어나지 않으면 발을 적시지 않고도 건널 수 있다. 가운데에 두 개의 큰 돌이 높이 솟고 넓어서 그 위에 앉고 누울 수 있으며, 또 그 남쪽 벼랑에는 바위 틈이 있어 또한 한 대(臺)를 이룰 수 있는바, 한 장의 깔자리를 펼 수 있다. 그리하여 곧바로 시내 못을 굽어보며 낚시하기에 가장 적합하므로 마침내 ‘상엄대(尙嚴臺)’라고 이름하였으니, 엄은 엄자릉(嚴子陵)이다.
이 분은 나와서 지존(至尊)인 천자(天子)를 가까이하면 천상(天上)의 별을 움직이고, 돌아가서 한 낚싯줄을 잡으면 한(漢) 나라의 구정(九鼎)을 붙들었으니, 진실로 또한 한 세상의 대장부(大丈夫)였다. 이 대를 명칭한 뜻은 그의 절개를 숭상한 것이다.
또 상엄대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몇 리쯤 되는 곳에 이르면 두 산 사이에 한 못이 있는데 못의 넓이는 중간 크기의 배를 띄울 만하며, 시냇물은 세 줄기로 흐르는데 폭포수가 떨어져 못 속의 물소리가 항상 들려온다. 못의 양 가에는 모두 반석(磐石)이 있는데 돌이 물에 씻기고 갈려서 너르고 평평하고 매끄러우며 빛나고 깨끗하므로 그 위에 앉아 있으면 마치 유리(琉璃) 자리를 깔아 놓은 듯하다. 동쪽 산에 있는 바위는 더욱 기이하고 장엄하여 파란 이끼와 푸른 등라(藤蘿)가 울창하게 덮고 있으니, 자못 세속 가운데의 사람이 놀고 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이 못을 ‘욕학(浴鶴)’이라 이름하였으니, 이 또한 반드시 그 실재가 있는 것이 아니요 수석(水石)의 기이하고 깨끗함을 나타낸 것이다.
만약 경심대(鏡心臺)로부터 흐름을 따라 내려오면 물이 서쪽 벼랑을 부딪혀작은 못을 이루었는데, 못 위에 바위가 있고 바위 위에 소나무가 있으므로 인하여 대를 삼았다. 이곳은 비록 스스로 기이하지는 못하나 여러 산과 여러 봉우리, 여러 바위와 여러 돌로 무릇 한눈에 거두어 볼 수 있는 것이 황홀하여 형용하기 어려우며 마치 그림 속에 있어 진면목(眞面目)이 아닌 듯하므로 이름하기를 ‘화리대(畵裏臺)’라 하였다.
화리대로부터 또 서남쪽으로 2리쯤 떨어져 있는 곳에 바위가 겹쳐 언덕을 이루어 이 시냇가에 임해 있는데, 북쪽 산에서 흘러오는 시냇물이 차츰 이 시내로 떠내려와서 그 앞에 합류하여 또다시 한 곱절의 값을 더한다. 네 친구들은 이 위에 정자를 짓고자 하나 힘이 미치지 못할까 우려된다. 이곳을 이름하여 ‘합류대(合流臺)’라 하였다.
대의 앞 합류하는 곳에 물이 자못 너르고 깊으며 돌이 기이하고 아름다운 것이 많으니, 중국의 명승지인 위수(渭水)의 북쪽이 과연 이보다 나은지 모르겠다. 마침내 이 여울물을 이름하기를 ‘조월(釣月)’이라 하였다. 이는 시내 위의 상류가 모두 산 밑에 있어 달빛을 받는 것이 가장 늦으나 이 여울은 동쪽 산과 멀리 떨어져 있어 달빛을 먼저 받으므로 진실로 밤낚시하기에 마땅하니, 낚시는 곧 강태공(姜太公)의 일이다. 강태공은 몸에 세상을 구제할 도구를 간직하고 있으면서 한가로이 강호(江湖)의 사이에서 늙어가며 손에 한 낚싯대를 잡아 이대로 일생을 마칠 듯이 하였으니, 이 분이 아니면 내 누구를 따르겠는가. 이것이 이 여울물을 이름한 의의이다.
여울물을 따라 내려가서 초은동(招隱洞)의 어구에 이르면 시냇물이 못을 이룬 것이 있는데, 그 크기가 상류의 것보다 배나 되는바, 외부 사람으로 이 골짝에 들어오는 자와 산중 사람으로 이 산을 나가는 자는 모두 이 못을 경유한다. 그리하여 진세(塵世)와 선계(仙界), 신선(神仙)과 범인(凡人)들이 여기에서 모두 나누어지므로 못 이름을 ‘세이(洗耳)’라 하였으니, 이는 마음에 소유(巢由)와 허부(許父)를 따르고자 해서이다.
무릇 여러 기이한 절경을 거두어 입암(立巖)의 총관(總管)으로 돌아오는 것은 위로 욕학연(浴鶴淵)으로부터 아래로 세이담(洗耳潭)에 이르러 그치니, 그 사이 한 모래섬과 한 돌이 모두 이름을 얻을 만한 것을 어찌 이루 다 셀 수 있겠는가마는 지금 명칭한 것은 다만 가장 빼어나고 가장 큰 것을 취했을 뿐이다.
바깥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오는 자들은 반드시 바위 아래로 흐르는 물을 건너기 마련인데 흰 돌이 옆으로 깔려 있어 쪽다리로 사용하는바, 다리를 밟을 즈음에 옥소리 같은 물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므로 이 다리의 이름을 ‘향옥(響玉)’이라 하였다.
계구대(戒懼臺)로부터 걸어 내려와 장차 경심대(鏡心臺)에서 고기를 구경하려고 한다면 들어올 때에 또한 반드시 한 돌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는 바위 밑 숲 속에 있어 돌바닥에 파란 이끼가 잘 자라므로 이 다리의 이름을 ‘답태(踏苔)’라 하였으니, 이 또한 그윽한 흥취를 돕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기여암(起予巖) 옆에 차갑고 또 시원한 우물이 있으니, 물건을 윤택하게 하는 공효(功效)가 넓지 않을 수 없으므로 《주역(周易)》의 정괘(井卦) 상육(上六) 효사(爻辭)를 취하여 ‘물멱(勿羃)’이라 이름하였으니, 우물에 덮개[羃]를 씌우면 우물의 공효를 베풀지 못한다.
입암의 곁에 돌이 일곱 개가 서 있는데 모양이 북두칠성(北斗七星)과 유사하므로 이름하기를 ‘상두석(象斗石)’이라 하였다. 사시(四時)의 운행과 해와 달의 운행이 모두 북두칠성에서 법을 취하니, 북두성은 성신(星辰)에 있어 그 관계가 가장 큰데 돌의 숫자와 상(象)이 마침 북두칠성과 부합하니, 이 역시 하나의 기이한 일이다.
이상 이름을 얻은 것이 스물여덟 곳인데 스물여덟 곳이 각자 좋은 경치가 있으니, 그렇다면 이러한 이름을 얻은 것은 진실로 당연하다. 그러나 한 입암의 기이함이 있지 않다면 스물여덟 곳이 스스로 좋은 경치를 자랑하지 못하여, 심상(尋常)한 가운데의 구릉과 골짝, 봉우리와 수석(水石)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니, 그 누가 명칭을 붙여 일컫겠는가. 그렇다면 스물여덟 곳의 좋은 경치는 입암을 얻어 드러나고, 입암의 빼어난 기이함은 스물여덟 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인하여 풍부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한 계구대(戒懼臺)가 있지 않다면 진실로 입암의 빼어난 기이함을 빛내어 스물여덟 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꾸미지 못했을 것이며, 또 스물여덟 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드러내어 입암의 빼어난 기이함을 돕지 못했을 것이니, 이는 입암이 있으면 계구대가 없을 수 없는 이유이다. 이는 마치 북극성(北極星)이 28수(宿)의 높이는 바가 되고 28수가 빙둘러 향하지 않으면 북극성이 또한 홀로 높음이 될 수 없으며, 28수는 비록 각자의 자리가 있으나 한 북극성의 높음이 있지 않으면 또한 빙둘러 향할 곳이 없는 것과 같다.
그리고 또 그 가운데에 한 각수(角宿)가 28수의 첫번째 별이 되어서 이 각수가 제자리를 얻은 뒤에야 나머지 27개의 별이 차례를 따라 진열하니, 이는 입암이 스물여덟 곳의 종주(宗主)가 되고 계구대가 또 스물일곱 곳의 우두머리가 되는 이유이다.
그러나 또 네 친구가 이곳에 나가 터를 잡지 않았더라면 입암의 빼어난 기이함을 또 누가 알겠는가. 사람이 알고 알지 못함은 입암에게 무슨 상관이 되겠는가마는 시내와 산, 물과 돌은 또한 천지 사이의 한 아름다운 기물이니, 천지가 이미 이러한 아름다운 기물을 가지고 있다면 어찌 한갓 스스로 아름다울 뿐이겠는가. 반드시 가장 귀하고 가장 영특한 인간으로 하여금 이것을 주관하게한 뒤에야 시내와 산, 물과 돌이 헛되이 버려지는 한 기물이 되지 아니하여 그 아름다움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네 친구가 이곳에 와서 터를 잡은 것은 그 또한 입암의 아름다운 만남일 것이다.
아! 천지(天地)가 개벽(開闢)된 이래로 곧 이 시내와 산이 있었건만 몇만 년 동안 황폐하여 매몰되었던 지역이 오늘날 비로소 우리들이 놀고 감상하는 곳이 되었으니, 운수가 그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또한 우리들의 먼 생각을 일으키게 한다.
혹자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조물옹이 만물을 만든 이유가 어찌 한갓 조화의 공을 허비하여 다만 쓸모 없는 물건을 만들고자 함이었겠는가. 한 물건이 있으면 반드시 한 물건의 쓰임이 있고 만 가지 물건이 있으면 반드시 만 가지 물건의 쓰임이 있어 먼저 쓰일 이치가 있은 뒤에 이 물건이 있는 것이니, 만약 쓰일 이치가 없었다면 마땅히 이 물건을 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천지가 이미 만물을 내고 또 반드시 이 인간을 낸 것이니, 그런 뒤에야 인간이 만물을 주장하여 각각 그 쓰임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밭과 들에서 밭갈고 김매며 언덕과 육지에 거주하는 집을 마련하며 오곡(五穀)을 먹고 실과 삼[麻]을 짜서 옷을 입으니, 어찌 홀로 시내와 산만이 우리 인간에게 쓰임을 다하지 않겠는가. 물건이 있는데도 쓰지 않으면 도리어 물건을 만든 마음에 위배되는 것이다. 이른바 공공(公共)이라는 것은 이 물건을 헛되이 버리는 땅에 두는 것이 아니요 다만 사사로이 하지 않을 뿐이다.
시내와 산은 진실로 공공한 물건이나 내가 얻어 내가 즐거워하고 남이 얻어 남이 즐거워하고 천만 사람이 얻어 천만 사람이 모두 즐거워하여 각각 얻은 바에 따라 즐거워하니, 이 어찌 공공함에 해롭겠는가. 앞사람이 즐거워하고 뒷사람이 또한 즐거워하며 이 사람이 즐거워하고 저 사람 또한 즐거워하여 서로 사양하지 않고 모두 스스로 만족하니, 이 어찌 혐의할 것이 있겠는가. 또 만물이 어찌 반드시 정의(情意)가 있은 뒤에 사람의 쓰임이 되겠는가.
오곡은 사람의 밥이 되려는 뜻이 있지 않으나 사람들이 스스로 오곡을 먹고, 실과 삼은 사람의 옷이 되려는 뜻이 있지 않으나 사람들이 스스로 옷을 만들어 입으며, 밭과 들, 언덕과 육지에 이르러서도 또한 모두 밭갈고 김매는 곳이 되고 거주하는 집이 되려는 뜻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사람들이 스스로 밭갈고 김매고 거주하는 집을 짓는 것이니, 유정(有情)으로 무정(無情)과 사귀는 것이 한 이치가 감통(感通)하는 묘리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만물이 처음에 또 어찌 명칭이 있었겠는가. 명칭이 있는 것은 모두 우리 인간이 붙여준 것인데, 명칭을 붙이는 이유는 바로 쓰임을 다하기 위해서이다. 오직 이 시내와 산은 바로 깊고 궁벽한 한 구역이므로 또한 일찍이 명칭이 없었으며, 이미 명칭이 없었기 때문에 또한 일찍이 사람들이 놀고 감상하는 곳이 되지 못하였다. 우리들이 지금으로부터 비로소 명칭을 가(加)하고 영원히 놀고 감상하는 지역으로 삼아 헛되이 버려지는 시내와 돌이 되지 않게 하였으니, 이 또한 이 시내와 돌의 영광이 아니겠는가.
실재가 없으면서 물건에 명칭을 붙인 것으로 말하면 진실로 이러한 점이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시내와 산을 위하고 우리 사람들을 위하여 송축(頌祝)한 칭호이니, 또 어찌 나쁠 것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오늘날 명칭을 지은 것은 진실로 물건을 만든 쓰임을 이루어 시내와 산의 아름다움을 나타낸 것이다.”
혹자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그리고 혹시라도 때를 만나지 못하면 물러나 산야(山野)에 살아 한 생애를 물 달, 바위와 시내 사이에 붙여 밭갈고 김매고 낚시질하고 고기잡는 것으로 일을 삼으며 바람과 구름, 꽃과 풀로 짝을 삼는 것이 또한 모두 이 도가 있는 것이니, 어찌 시내와 산에 자취를 멈추고 담박함에 마음을 두어 몸을 깨끗이 하기 위해 인륜을 어지럽혀 세상을 잊기를 과감히 하는 행위이겠는가.”
나는 이미 혹자의 논란에 대답하고 다시 네 친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백 길이 되는 돌기둥은 서 있는 것이 확고하기 때문에 황하(黃河)의 파도가 부딪혀도 만고(萬古)에 흔들리지 않고, 천 길이 되는 큰 나무는 심겨진 뿌리가 견고하기 때문에 폭풍이 사납게 진동하여도 수백 년 동안 뽑히지 않는다. 이제 이 입암 역시 천지와 더불어 함께 시작되었는데 이미 만고의 전(前)에 기울지 않았으니, 또 어찌 만고의 뒤에 흔들리겠는가. 더구나 높고 크고 바르고 곧음이 또 딴 바위에 비할 수 없지 않은가.
우리 인간은 천지의 사이에 서서 어찌 선 바가 없이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마음에 덕을 간직하여 본연(本然)의 정해진 성(性)을 간직하고, 몸에 도를 행하여 마땅히 행할 바른 이치가 있으니, 인의예지(仁義禮智)는 덕(德)의 조목이고, 효제충신(孝悌忠信)은 도(道)의 조목이다. 이 덕에 마음을 두어 변치 않고 이 도를 몸으로 행하여 옮기지 않은 뒤에야 서는 것이 마땅히 설 곳에 서게 된다.
이로써 빈천(貧賤)에 처하면 빈천이 나의 선 바를 옮기지 못하고, 이로써 부귀(富貴)에 처하면 부귀가 나의 선 바를 방탕하게 하지 못하고, 이로써 위엄과 무력을 만나면 위엄과 무력이 나의 선 바를 굽히지 못하여, 말재주가 소진(蘇秦), 장의(張儀)와 같아도 나의 뜻을 빼앗지 못하고, 용맹이 맹분(孟賁), 하육(夏育)과 같아도 나의 의지를 좌절시키지 못한다. 이는 성현들이 작은 몸으로천지에 참여되는 이유이니, 그 서 있는 바가 도덕이기 때문이다.
요(堯), 순(舜), 우(禹)가 세운 것은 중도(中道)였다. 그러므로 사흉(四凶)의 흉악함이 제요(帝堯)의 선 바를 흔들지 못하였고 천하의 안락(安樂)함이 순, 우의 선 바를 옮기지 못하였다.
탕(湯) 임금이 세운 것은 한 덕이요 문왕(文王)이 세운 것은 계속하고 밝히는 경(敬)이며, 무왕(武王)이 세운 것은 변치 않는 덕이었다.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의 유언비어가 동요시키지 못하였으니 주공(周公)의 세운 바가 어떠하며, 만세의 난신(亂臣)과 적자(賊子)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공자(孔子)의 세운 바가 어떠하며, 양주(楊朱), 묵적(墨翟)의 말이 용납되지 못하였으니 맹자(孟子)의 세운 바가 어떠한가.
한 절개와 한 행실이 뛰어난 선비에 이르러서도 또한 반드시 세운 바가 있은 뒤에야 그 사업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니, 세움을 귀하게 여김이 이와 같다. 그러므로 바위에도 또한 서 있는 것을 취한 것이다.
지금 우리들이 입암의 위에 나아가 놀고 쉬니, 각자 스스로 설 것을 생각하여 시종 우리 바위를 저버리지 않는다면 매우 다행일 것이다. 그러나 그 세우는 요점은 또한 대 이름의 ‘계구’에 지나지 않으니, 대 위의 계구는 몇 길의 벼랑 위에 높이 임해 있는 못 때문이다.
대 아래의 못은 눈으로 볼 수 있고 그 깊음을 헤아릴 수 있으나 우리 인간의 한 몸 곁에는 몇 길의 형체 없는 못이 있고 몇 길의 가없는 구덩이가 있음을 그 누가 알겠는가. 한 생각을 잘못하면 귀신의 지역으로 말[馬]을 달리고, 한 마디 말을 가볍게 내면 풍파가 당장 일며 한 발걸음을 함부로 걸으면 그물과 덫에 빠진다. 그 위험함이 이와 같으니, 계구하는 것을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계구라는 것은 공경함을 이르니, 반드시 고요할 때에도 공경하고 동(動)할 때에도 공경하고 말할 때에도 공경하고 행할 때에도 공경하여야 한다. 이렇게 한 뒤에야 나의 서 있는 바가 나의 인의예지의 덕이 되고 효제충신의 도가 될 것이니, 어디를 간들 나의 선 바를 잃겠는가. 이렇게 한 뒤에야 나의 선 바가 또한 천지에 참여될 수 있는 것이다.
바라건대 친구들이 조만간에 만약 우란재(友蘭齋)를 완성한다면 서로 더불어 이 이치를 강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뒤에야 입암을 대하고 스물여덟 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대함에 부끄러움이 없어 모두가 자신의 성정(性情)을 쾌적하게 할 것이다.”
마을은 바로 영양(永陽)의 경내(境內)인데 군(郡)과 몇백 리가 떨어져 있고 사방의 성읍(城邑)이 모두 본군(本郡)과 같이 머니, 참으로 궁벽한 곳이다. 내 이미 시내와 산의 명칭을 말하니, 네 친구가 인하여 그 말을 기록해 줄 것을 청하므로 마침내 혹자와 문답한 내용과 우리들이 서로 말한 것을 붙이는 바이다.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쓰다.
[주D-002]공자(孔子)의 산을 만드는 비유 : 《서경(書經)》 여오(旅獒)에 “아홉 길의 산을 만드는 데 흙 한 삼태기가 부족하여 목표한 것을 달성하지 못한다.” 하였는데, 공자는 이것을 빌려 “산을 만들 적에 비록 흙 한 삼태기가 부족하여 산을 이루지 못하고 중지하는 것도 내가 중지하는 것이며, 비록 평지에 한 삼태기의 흙을 쏟아 부어 전진하더라도 내가 전진하는 것이다.” 하였다. 《論語 子罕》
[주D-003]상산(商山)의 사호(四皓) : 상산은 중국 섬서성(陝西省) 상현(商縣) 동쪽에 있는 산이며, 사호는 진(秦) 나라 말기 상산에 은둔해 있던 네 노인으로 동원공(東園公), 하황공(夏黃公), 기리계(綺里季), 녹리선생(甪里先生)을 이른다.
[주D-004]자지가(紫芝歌) : 악부(樂府)에 실려 있는 거문고 곡조의 가사. 자지는 먹으면 장생불사한다는 영지(靈芝)를 가리킨다. 상산(商山)에 은둔해 있던 네 노인들은 한 고조(漢高祖)가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이 자지가를 지어 불렀다 한다. 《古今樂錄》
[주D-005]도정절(陶靖節)의……나간다는 글 : 정절은 진(晉) 나라 말기 은사(隱士)인 도연명의 시호임. 이 내용은 그가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보인다.
[주D-006]신야(莘野)에서……비유하였으니, : 신야는 유신(有莘)이라는 나라의 들이고 농사짓던 노인은 이윤(伊尹)을 가리키며, 남양(南陽)은 하남성(河南省)에 있는 지명이고 와룡(臥龍)은 누워 있는 용이라는 뜻으로 제갈량(諸葛亮)을 가리킨다. 관중(管仲)은 춘추 시대 제(齊) 나라의 명재상이고 악의(樂毅)는 전국 시대 연(燕) 나라의 명재상이다. 《맹자(孟子)》 만장 상(萬章上)에 “이윤이 유신의 들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요(堯), 순(舜)의 도를 즐거워하였다.” 하였고, 《삼국지(三國志)》 촉지(蜀志) 제갈량전(諸葛亮傳)에 “제갈량이 남양의 융중(隆中)에 은거하여 스스로 관중과 악의에 비했다.” 하였다.
[주D-007]엄자릉(嚴子陵) : 자릉은 엄광(嚴光)의 자(字). 동한(東漢)의 고사(高士)로 일찍이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와 동문수학하였다. 광무제가 등극한 뒤에 그를 물색하여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제수하였으나 끝내 거절하고 부춘산(富春山)에 들어가 농사를 짓고 낚시질하며 일생을 마쳤다. 《後漢書 卷八十三 嚴光傳》
[주D-008]한(漢) 나라의 구정(九鼎) : 구정은 구주(九州)의 쇠를 모아 만들었다는 솥으로, 국가의 위신을 상징하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주D-009]세이(洗耳)라 하였으니……해서이다. : 세이는 추한 말을 들었다 하여 귀를 씻는 것이며, 허유(許由)와 소부(巢父)는 요(堯) 임금 때의 은사(隱士)이다. 요 임금이 허유를 초빙하여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려 하자 허유는 이에 응하지 않고 추한 말을 들었다 하여 영수(穎水)에서 귀를 씻었다. 소부는 소를 끌고 가다가 이 영수에서 물을 먹이려 하였으나 이것을 보고는 오염된 물이라 하여 소를 끌고 상류로 가서 물을 먹였다 한다. 《高士傳》
[주D-010]사흉(四凶) : 요(堯) 임금 때의 네 흉악한 사람으로 공공(共工), 환도(驩兜), 삼묘(三苗), 곤(鯀)이다. 공공은 관명이고 삼묘는 삼묘의 군주인데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순(舜) 임금은 섭정을 하면서 공공을 유주(幽州)로 귀양보내고 환도를 숭산(崇山)으로 추방하고 삼묘를 삼위(三危)에 가두고 곤을 우산(羽山)에 가두었다. 《書經 舜典》 《孟子 萬章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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