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헌선생문집 제9권_
기(記)_
입암 정사(立巖精舍)에 대한 기문
뜻이 같은 영양(永陽)의 네 친구들이 물의 북쪽 가장 깊고 궁벽한 곳에 나아가 한 골목을 얻으니, 골목의 입구에는 시냇물이 있고 시냇가에는 한 큰 바위가 10여 장(丈) 높이 솟아 있는바, 이것이 바로 입암(立巖)이다.
입암의 북쪽 10보(步)쯤 되는 곳에 끊긴 벼랑이 우뚝이 멈춰 있는데, 지형이 너르고 평평하여 무우(舞雩)에서 목욕하고 바람 쐬는 관동(冠童) 10여 명을 용납할 수 있는바, 몇 그루의 고송(古松)이 푸른 그늘을 짙게 깔고 있어 매우 시원하니, 이는 바로 계구대(戒懼臺)라고 이름한 곳이다.
계구대에서 다시 북쪽으로 약간 동쪽으로 가면 다소 높은 한 작은 석봉(石峯)이 있는데 기이하게 솟고 우뚝이 버티고 있어 은연(隱然)히 공동산(崆峒山)의 풍취가 있는바, 이름을 기여암(起予巖)이라 한다. 봉우리의 남쪽 밑에 옛터가 있는데 계단이 무너져 돌이 어지러이 널려 있으니, 어느 시대에 누가 쌓은 것인지 알 수 없다.
여러 친구들이 놀고 감상한 뒤에 마침내 서로 돌아보고 바라보니, 천 년의 늙은 거북이 적막한 물가에 형체를 드러내어 머리를 들고 공기를 마시느라 우뚝 버티고 바람과 해를 피하지 않는 듯한 것은 뒷봉우리가 현무(玄武)가 된 것이며, 산에서 군주 노릇을 하다가 이미 늙어 위엄과 소리를 거두고 발톱과 이빨을 거두고는 부자(父子)의 천성을 온전히 하고 장구히 꿇어앉아 떠나가지 않는 듯한 것은 대의 바위가 오른쪽에 백호(白虎)가 된 것이다.
잠겨 있던 물 속에서 나오고 숨겨진 곳을 떠나 처음에는 구불구불하다가 끝내는 서려 있어 마치 엎드려 있는 듯하고 일어난 듯하기도 하여 구름을 헤치고 여의주(如意珠)를 날리는 듯한 것은 토월봉(吐月峯)이 동쪽에서 청룡(靑龍)이 된 것이며, 큰 붕새[鵬]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9만 리 창공을 날다가 이미 지쳐 땅으로 내려오되 오히려 머리를 들고 창공을 바라보는 듯한 것은 구인봉(九仞峯)이 주작(朱雀)이 된 것이다.
또 산지(産芝), 함휘(含輝), 정운(停雲), 격진(隔塵) 등의 여러 봉우리가 눈앞에 병풍처럼 배열되어 있고 담처럼 가리고 있으며, 한 시냇물이 굽이굽이 돌아 흘러오는 것이 마치 띠가 감아돌고 옷깃이 싸고 있는 듯하여 들어가는 것만 보이고 가는 것은 보이지 않으니, 위아래 수십 리의 시냇물과 산의 맑고 깨끗한 기운이 모두 이곳에 모여 있다.
여러 친구들은 이곳을 즐거워하여 옛터를 다시 닦고 한 모재(茅齋 초가로 만든 서재)를 설치하여 머물고 휴식하는 장소로 삼았는데, 좌우에는 방을 마련하고 가운데에는 대청을 두었는바, 각각 한 칸씩이고 두 방의 북쪽에는 감실(龕室)을 지어 수백 권의 책을 보관할 만하였으며 앞뒤를 다소 넓혀 여러 화훼(花卉)를 심어 놓으니, 꽤 볼만 하였다.
졸렬한 나는 다행히 여러 친구들에게 버림을 받지 아니하여 또한 항상 이곳을 오가며 함께하였다. 그러므로 감히 벗들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청하였다.
세속을 버려 인간의 일을 끊고 인륜을 버리며 공허(空虛)한 것을 말하고 현묘(玄妙)한 이치를 찾으며 숨은 것을 찾고 괴이한 짓을 행하여, 연하(煙霞)를 고향으로 삼고 바위와 골짝에 거하며 사슴과 멧돼지와 짝하고 도깨비와 벗삼는 자들이 혹 이러한 곳에서 은둔하고 감추니, 이 또한 좌도(左道)라서 유자(儒者)의 사모하는 바가 아니다.
오직 한 가지 일이 있으니, 세상의 분화(紛華)함을 등지고 말로(末路)의 부귀 영화에 치달림을 천하게 여겨, 책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 우리의 급선무임을 알고 몸을 닦고 성(性)을 기르는 것이 우리의 본업(本業)임을 아는 자들이 여기에 머물며 학문을 닦는다면 바름을 길러 성인(聖人)이 되는 공부가 산 아래의 물에 형상할 수 있고, 옛 성인들의 훌륭한 말씀과 행실을 많이 쌓는 것이 산 가운데의 하늘에 법받을 수 있을 것이다.
뜰 아래에 흐르는 물이 밤낮으로 쉬지 않으니 근원이 있어 다하지 않음을 알고, 앞산의 오솔길이 잠시만 쓰지 않으면 띠풀이 꽉 차 길을 막으니 힘써 행함이 가장 귀함을 알 수 있다. 오직 나의 책 속에 있는 성현들이 앉거나 서거나 항상 나타나 이미 스승과 벗이 엄하지 않음을 근심하지 않는다.
하물며 저 입암(立巖)은 아침저녁으로 마주 대할 때에 우뚝 솟아 있어 천만고(千萬古)를 지나도 항상 그대로이다. 그리하여 세찬 물결도 어지럽히지 못하고 미친 바람도 흔들지 못하며 장마비도 썩히지 못하고 뜨거운 불도 녹이지 못하니, 이는 《주역(周易)》의 이른바 “서는 바에 방위를 바꾸지 않고 홀로 서서 두려워하지 않는다.[立不易方 獨立不懼]”는 것이며, 《논어(論語)》에 이른바“더욱 높고 더욱 견고하여 드높이 서 있다.[彌高彌堅 卓爾所立]”는 것이며, 《중용(中庸)》에 이른바 “화하면서도 흐르지 아니하여 중립하고 기울지 않는다.[和而不流 中立不倚]”는 것이며, 《맹자(孟子)》에 이른바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하여 빈천이 뜻을 옮기지 못하고 부귀가 마음을 방탕하게 하지 못하고 위엄과 무력이 굽히지 못한다.[至大至剛 貧賤不能移 富貴不能淫 威武不能屈]”는 것을여기에서 인식할 것이니, 각자 분발하고 진작하여 함께 자신을 세울 곳으로삼을 것을 생각함이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이는 여러 친구들이 힘써야 할 것이다.
젊어서 배우지 못하고 늙어서 아는 것이 없어 이미 지나간 세월을 다시 돌릴 수 없고 이미 노쇠한 정력을 다시 강하게 할 수 없다. 다만 흰 머리의 나이에 수습하고 노년 시절에 스스로 힘쓰니, 다행히 밖으로 사모함이 없고 만년(晩年)에 취미가 있어 때와 시월(時月)의 사이에 만약 다시 만(萬)에 하나 전진이 있다면 이 또한 어찌 거처하는 곳의 도움이 아니겠는가. 이는 바로 노부(老夫)의 일이다.
혹 봄이 되어 산에 꽃이 만발하였는데 시원한 바람이 골짝에 가득하며, 여름이 되어 소나무 그늘에 저절로 바람이 불어와 뜨거운 햇볕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가을이 되어 단풍숲에 비단 물결이 떠올라 옥같은 시냇물에 붉은 단풍이 비추며, 겨울이 되어 눈꽃이 휘날려 골짝의 하늘이 아득하니, 이는 모두 사람과 함께하는 아름다운 흥취이다. 그리고 앞 들에 안개가 걷히고 동쪽 산에 달이 떠오르는 것은 아침저녁의 아름다운 경치이다.
마침내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마음 내키는 대로 발걸음을 옮기며 샘물로 양치질하고 돌 위에 앉으니, 어디든 적당하지 않은 곳이 없다. 작은 그물을 푸른 물결에 던지니 은빛의 생선이 쟁반에서 뛰며, 가느다란 연기가 바위 틈에 떠오르니 산중의 막걸리가 잔에 가득하다. 약간 취하여 높이 읊조리자 우주가 아득한 것은 어떠한 시절에 있어야 하는가. 이는 책을 다 읽고 강(講)을 마친 다음 정신을 쉬고 기운을 펴는 일인데 노부와 여러 친구들이 함께할 일이다.
그렇다면 이 서재에서 거처하는 우리들이 위로 우러러보거나 아래로 굽어봄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감히 이 약속을 위배하는 자가 있으면 이 입암이 지켜볼 것이다.”
이에 편액(扁額)하기를 입암 정사(立巖精舍)라 하였다.
만력(萬曆) 정미년(1607,선조40) 겨울에 쓰다.
[주D-002]현무(玄武) : 북방(北方)의 신(神)으로 그 모양은 거북과 뱀이 어울려 있는 것이라 하는바, 동쪽인 왼쪽은 청룡(靑龍), 서쪽인 오른쪽은 백호(白虎), 앞인 남쪽은 주작(朱雀), 뒤인 북쪽은 현무이므로 말한 것이다.
[주D-003]바름을 길러……있을 것이다. : 《주역(周易)》의 몽괘(蒙卦)는 산(山)을 상징하는 간(艮)과 물을 상징하는 감(坎)이 모여 이루어졌는바, 사람에 비유하면 어려서 몽매함에 해당한다. 이 몽괘의 단전(彖傳)에 “산 아래에 험한 물이 있는 것이 몽괘이니……어렸을 때에 바름을 기르는 것이 성인(聖人)이 되는 공부이다.” 하였다. 또 대축괘(大畜卦)는 하늘을 상징하는 건(乾)과 산을 상징하는 간(艮)이 모여 이루어졌는바, 학문을 많이 쌓는 상(象)이 된다. 이 대축괘의 상전(象傳)에 “하늘이 산 가운데에 있는 것이 대축괘이니, 군자가 이것을 보고서 옛날의 훌륭한 말씀과 올바른 행실을 많이 기억하여 덕을 쌓는다.” 하였으므로 이 두 괘를 빌려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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