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대 광해군(光海君)과 부인 유씨(柳氏) - 광해군묘(光海君墓)

 

 

광해군묘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승리 산59
사   적 : 제 363 호

光海君墓의 특징
: 조선조의 두 번째 폐위(廢位) 임금 광해군(이혼 ; 1575-1641, 재위14년)과 문성군부인 유씨(文城郡夫人 柳氏 ; ?-1623)의 광해군묘는 연산군묘(燕山君墓)와 동일하게 군묘(君墓)의 형식으로 간촐하게 조성되어 있는데, 근방에 단종(端宗)의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의 사릉(思陵)이 있고 일반인은 찾아보기도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두 봉분(封墳)에 각각 비석(碑石)이 있고 망주석(望柱石)과 장명등(長明燈), 그리고 문인석(文人石)만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光海君代의 사료

연도

재위

사  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1609

1년

4월, 임해군(臨海君) 살해됨

1617

9년

8월, {선조실록(宣祖實錄)} 간행

8월, 창덕궁(昌德宮) 중수(重修)

1618

10년

1월, 대비 호 깍아 서궁(西宮)이라 칭함

1610

2년

4월, 중궁 유씨(中宮柳氏) 왕비로 책봉

8월, 허균 등을 참형(斬刑)

8월, 허준 <동의보감(東醫寶鑑)> 찬진

1619

11년

3월, 도원수 강홍립 금나라 군대에 항복

1614

6년

2월, 강화부사 영창대군(永昌大君) 죽임

1620

12년

7월, 금나라 10여명을 제외한 포로 석방

1615

7년

11월, 능창군 교동 안치(安置)후 죽임

1622

14년

1월, 승군(僧軍)을 모집케 함

1616

8년

12월, 일본에서 담배{南靈草) 들여옴 

1623

인조

3월, 인조반정(仁祖反正) 일어남 

뒷 이야기
: 선조(宣祖)는 왕비 의인왕후(懿仁王后)에게 후사(後嗣)가 없어 후궁이었던 공빈김씨(恭嬪金氏)의 소생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습니다. 그러나 말년에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생산해 권력의 암투가 벌어지는 단초(端初)가 되었습니다. 결국 선조는 승하 직전 당시 적자(嫡子) 영창대군이 2살밖에 안되어 왕위를 광해군에게 물려주게 됩니다. 이것이 뒤에 인조반정(仁祖反正)의 싹이 되었던 것입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전후 복구 사업에 전념했던 광해군은 창덕궁(昌德宮) 등 궁궐을 중수(重修)하고 대동법(大同法)도 실시했으며, 특히 그의 북방외교 정책은 당시의 국제정세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안으로는 형이었던 임해군(臨海君)과 이복(異腹) 영창대군을 유배후 살해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시키는 등의 실정으로 반정(反正)의 싹을 키우고 말았습니다. 특히 영창대군을 교동에서 살해할 때, 방안에 가두고 불을 때어 질식해 죽게 함에 이르러서는 실정이 이미 정도를 넘어선 뒤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23년 광해군의 폐위를 논의하고 칼을 씻었다는 세검(洗劍)의 유래를 낳기도 했던 능양군(綾陽君 ; 仁祖)을 포함한 반정군(反正軍)은 광해군을 강화로 유배시키고 인목대비로부터 능양군을 왕위에 오르게 함으로써 반정을 성공하게 됩니다.

 하지만 광해군은 제주까지 유배지가 옮겨졌지만 그곳에서 67세의 천수(天壽)를 다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반정세력이 광해군을 살해할 명분이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부인 유씨(柳氏)도 역시 강화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목숨을 다하고 현재의 위치에 안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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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4대 선조(宣祖)와 비(妃) 의인왕후(懿仁王后), 계비(繼妃) 인목왕후(仁穆王后)
   - 목릉(穆陵)

 

 

목릉의 셋 중 宣祖의 능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번지 {東九陵 소재}
사   적 : 제 193 호

穆陵의 특징
: 宣祖(이균; 1552-1608, 재위 41년)와 비(妃) 의인왕후 박씨(懿仁王后 朴氏; 1555-1600), 계비(繼妃) 인목왕후 김씨(仁穆王后金氏; 1584-1632)의 목릉은 세 개의 능이 왼쪽부터 선조, 의인왕후, 인목왕후의 순으로 동원이강(同原異岡)의 형식에서 변형된 형태로 조성되었고, 동구릉(東九陵)의 가장 안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아쉽게도 현재 수목보호를 위해 관람을 제한해서 공개하고 있지 않습니다.
 선조의 능은 봉분(封墳)에 구름 문양[운채(雲彩)]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조각된 병풍석(屛風石)이 설치되어 있고 난간석(欄干石)과 기타 석물(石物)들이 전통의 양식으로 조성되어 있으나, 전란(戰亂)의 폐해(弊害) 후에 제작되어서 그런지 조형미(造形美)는 떨어지고 있습니다.
 처음 선조의 목릉은 건원릉 서쪽 산기슭에 정해졌는데, 불길(不吉)하고 습기가 있다는 원주목사(原州牧使)의 상소로 위치를 이동해 현 위치에 의인왕후릉과 함께 자리잡습니다.

목릉 세 능중 인의왕후릉

 두 번째 의인왕후릉은 병풍석(屛風石)은 없이 난간석(欄干石)만이 설치되었고 특이한 점은 장명등(長明燈)과 망주석(望柱石)의 줄기에 꽃무늬[화문(花紋)]가 처음으로 새겨져 있는데, 이후 후대(後代)의 능까지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의인왕후릉 역시 처음에는 경기도 포천 지역에 유릉(裕陵)이라 묘호를 정해 조성했다가, 선조의 능과 함께 현 위치로 옮겨와 모시게 됩니다.

 세 번째 인목왕후능은 앞의 두 능에 비해 조금 뒤에 조성되어서 그런지 어느 정도 조형미를 갖추고 있습니다. 봉분(封墳)에는 역시 병풍석(屛風石)은 생략되었고 난간석(欄干石)만을 설치하고 있습니다.

宣祖代의 사료

연도

재위

사  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1568

1년

12월, 이황 <성학십도(聖學十圖)> 올림

1592

25년

4월, 신립 충주 전사, 왕 서행(西行)

1569

2년

8월, 이이<동호문답(東湖問答)>올림

5월, 한양 함락,  6월, 평양 함락

1570

3년

12월, 이황(李滉) 죽음{1501- }

7월, 한산도(閑山島) 대첩(大捷)

1571

4년

4월, <명종실록(明宗實錄)> 인쇄

1593

26년

2월, 권율 행주대첩(幸州大捷)

1573

6년

12월, 교서관(校書館)에서 <향약(鄕約)>을 간행

8월, 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 됨

1574

7년

7월, 김효원 이조전랑(吏曹銓郞) 됨

10월, 환도(還都)함

10월, 예안에 도산서원(陶山書院) 둠

1594

27년

2월, 훈련도감(訓鍊都鑑) 설치

1575

8년

1월, 명종비[인순왕후]승하{1532-}

12월, 속오군(束五軍) 편성함

7월, 심의겸.김효원 파당으로 동서 당론이 분열됨

1597

30년

1월, 정유재란(丁酉再亂) 일어남

1577

10년

12월, 이이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지음

1월, 원균 경상우수사 겸 통제사 됨

1584

17년

1월, 이이(李珥) 죽음{1536- }

1598

31년

11월, 노량에서 이순신 적의 수군을 대파하고 전사

1588

21년

12월, 일본 통신사(通信使)를 보낼 것 요구

11월, 왜군 총철퇴, 왜란 끝남

1589

22년

10월, 정여립 모반하여 자결함

1602

35년

7월, 문묘(文廟) 대성전(大成殿) 이룩

1591

24년

2년, 이순신 전라좌도수사(水使) 됨

1605

38년

3월, 홀란온 야인 동관(潼關)에 침입 

1592

25년

4월, 임진왜란(壬辰倭亂) 일어남

1608

41년

2월, 왕 승하{1552- }, 광해군 즉위

뒷 이야기
: 선조(宣祖)는 중종(中宗)의 후궁 창빈(昌嬪) 안씨(安氏)의 아들인 덕흥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명종(明宗)의 사랑을 받다가 명종 승하후 후사(後嗣)가 없어 명종비(明宗妃)인 인순왕후(仁順王后)에 의해 1567년 조선(朝鮮) 제14대 왕으로 즉위(卽位)했습니다.
 즉위 초에 이황(李滉), 이이(李珥) 등 인재를 등용하고 유학(儒學)을 장려하였으나, 조선 최대의 전란(戰亂)인 7년간의 임진(壬辰). 정유(丁酉) 왜란(倭亂)을 겪고 국토가 유린(蹂躪)되고 문화재(文化財)가 소실(燒失)되는 피해를 입어 복구작업에 많은 힘을 기울였지만 큰 성과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선조대(宣祖代)는 조선 중기의 정치 개념을 대변하는 붕당정치(朋黨政治)가 시작된 시기입니다. 일제(日帝)의 식민사관(植民史觀)에 의해 패배주의적 민족성(民族性)을 날조한 당파싸움으로 잘못 평가되어온 붕당정치는 동인(東人)과 서인(西人) 그리고 남인(南人)과 북인(北人) 또한 노론(老論)과 소론(小論) 등으로 붕당이 나뉘지만, 이는 네 차례의 사화(士禍)을 겪은 후에 재야(在野)에서 서원(書院) 건립 등으로 세력을 확대한 사림(士林)들이 중앙에 진출하면서 새로운 이념으로 조선 정치의 구심(求心)을 잡게 되었고 중앙과 지방이 혼합된 형태의 정치 구조가 완성된 것입니다. 이는 결국 정치의 기반이 지방 중소지주층(中小地主層)까지 확대된 형태이기에 이러한 세력들이 서로 견제하면서 발전해 나간 오히려 일당(一黨)의 독재(獨裁)가 아닌 붕당(朋黨)의 민주적인(?) 정치형태로의 진보였던 것으로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의인왕후 약사(略史)>
 1555년[명종 10년]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 박응순(朴應順)의 딸로 태어난 의인왕후는 1569년에 왕비에 책봉되어 가례(嘉禮)를 행하였고 소생(所生)이 없이 1600년(선조 33년) 46세의 나이로 승하(昇遐)해 재론 끝에 건원릉(健元陵) 동쪽 목릉(穆陵)의 세 능 가운데 첫 번째로 안장되었습니다.

목릉 세 능중 인목왕후릉

<인목왕후 약사(略史)>
 인조대(仁祖代)까지 생존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호칭이 친근한 인목왕후는 선조의 계비(繼妃)로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딸로 1584년(선조 17년)에 태어났습니다. 1602년 선조의 계비로 책봉되어 1606년 선조의 유일한 적통(嫡統)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았으나 광해군(光海君) 즉위 후에 영창대군과 김제남은 피살되고 인목대비 역시 서궁(西宮)에 유폐되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을 계기로 복위하여 왕대비에 오르게 되고 1632년(인조 10년) 48세의 나이로 승하해 목릉(穆陵)의 세 번째 능으로 안장되었습니다.
 인목왕후는 글씨에도 능해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인목왕후의 어필(御筆)인 [보문경(普門經)] 일부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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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3대 명종(明宗)과 인순왕후(仁順王后) - 강릉(康陵)

 

 

13.명종 - 강릉(康陵)

소재지 :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산233-19
사   적 : 제 201 호

康陵의 특징
: 明宗(이환; 1534-1567, 재위 22년)과 비(妃) 인순왕후 심씨(仁順王后 沈氏; 1532-1575)의 강릉은 현재 원형보존을 위해 비공개 능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명종의 생모 문정왕후(文定王后;중종의 제2계비)의 태릉(泰陵)과 함께 능 위치나 의미에 많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능이라면 태릉 입구에라도 강릉(康陵)에 대한 보다 자세한 안내나 설명이 아쉽습니다.
 왕과 왕비의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조성되었고, 두 능의 봉분에는 모두 병풍석(屛風石)을 두르고 난간석(欄干石)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좌우측 무인석(武人石)의 외형이 서로 다르게 생긴 것입니다.
 사료(史料)에 의하면 선조 4년[1571년]에 강릉(康陵)의 정자각(丁字閣)에 화재가 나자 임금과 세자가 의복을 갈아입고 풍악(風樂)을 금하며 반찬 수를 줄이는 등 근신(謹愼)의 예를 다했다고 합니다.

明宗代의 사료

연도

재위

사  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1546

1년

7월, 서경덕(徐敬德) 사망{1489- }

1555

10년

5월, 이윤경 왜적 대파 {을묘왜변}

1548

3년

10월, 이황(李滉) 풍기군수(豊基郡守)됨

1556

11년

2월, 왜구 대비로 무과(武科) 실시

1550

5년

10월, <중종실록><인종실록> 완성

1557

12년

8월, 세자 책봉례(世子冊封禮) 행함

12월, 선(禪)교(敎)양종(兩宗)을 다시 둠

12월, 폐비 신씨{단경왕후}죽음{1487- }

1551

6년

6월, 보우(普雨) 봉은사 주지 됨

1559

14년

3월, 황해도 의적(義賊)임꺽정 횡행

1552

7년

4월, 선과를 둠

1563

18년

9월, 왕세자 죽음

1553

8년

7월, 대왕대비 정치(政治) 왕에게 넘김

1565

20년

4월, 대왕대비{문정왕후} 승하{1501- }

1554

9년

9월, 경복궁 중건 및 동궁(東宮)조성

6월, 제주목사(牧使) 보우 장살(杖殺)

1555

10년

5월 전라도 달량포에 왜변(倭變)

1567

22년

6월, 왕 승하-하성군 전위-왕대비 섭정

뒷 이야기
 : 명종(明宗)은 12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이 권력을 움직일 수 없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곧 생모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섭정(攝政)은 외척(外戚)의 전횡(專橫)이라는 비리를 양산하게 되고 국정의 혼란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또한 이복형제(異服兄弟)의 왕위 계승이 이어진 것도 권력 암투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명종대의 권력의 문란함은 내외의 혼란을 야기시켜 밖으로는 '을묘왜변(乙卯倭變)', 안으로는 임꺽정(林巨正) 같은 군도(群盜)의 만연 등 국가의 기강이 흔들리는 사건들이 이어지게 됩니다.

 인순왕후 심씨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沈鋼)의 딸로 태어나 명종과의 슬하에 순회세자(順懷世子)를  두었으나 세자가 어린 나이에 요절하게 되어 슬하의 자식으로 역시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명종(明宗) 승하 후 중종(中宗)의 일곱 번째 아들이었던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 아들{선조(宣祖)}이 14대 왕위에 즉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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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2대 인종(仁宗)과 인성왕후(仁聖王后) - 효릉(孝陵)

 

 

 12. 인종 - 효릉(孝陵)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산 37-1 <西三陵 소재>
사   적 : 제 200 호

孝陵의 특징
 : 조선조 최단명 왕위에 있었던 仁宗(이호; 1515-1545, 재위 8개월)과 인성왕후 박씨(仁聖王后 朴氏; 1514-1577)의 효릉은 31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夭折)한 인종(仁宗)의 능을 먼저 단촐하게 조성했다가, 인성왕후 승하[선조 10년] 후에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다시 조성되었습니다.
 재 조성할 때 인종(仁宗)의 능에는 봉분에 병풍석(屛風石)을 두르고 인성왕후 능에는 병풍석을 설치하지 않았지만, 난간석(欄干石)으로 두 능을 연결시켜 놓았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비공개 능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仁宗代의 사료

연도

재위

사  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1545

1년

6월, 조광조(趙光祖)직(職)을 추복(追復)

1545

1년

7월, 왕 승하 - 왕대비{문정왕후} 섭정

6월, 왕 병 위독하여 경원대군(慶源大君-명종)에게 전위

8월, 윤임(尹任)을 사사(賜死)함 <을사사화(乙巳士禍)>

뒷 이야기
 : 효성이 지극해서 능호(陵號)까지 효릉(孝陵)으로 정해진 인종(仁宗)은 불과 8개월밖에 안되는 재위 기간의 운명이 생모(生母) 장경왕후(章敬王后;중종의 제1계비)의 삶과 유사하게 꽃을 펴보지도 못하고 요절(夭折)해 버린 비운의 왕이었습니다. 명종(明宗)이 즉위하고 명종의 생모 문정왕후(文定王后;중종의 제2계비)가 권력을 잡은 후 인종의 외척들을 제거하는 을사사화(乙巳士禍)을 일으켜 더욱이 사후(死後)까지 않타까운 결과를 낳습니다.

 인성왕후 박씨(仁聖王后 朴氏)는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 박용(朴墉)의 딸로 태어나 11세 때 세자빈에 책봉되지만 왕비 재위 8개월만에 인종(仁宗)을 떠나 보내고 외롭게 여생을 보내다가 후사(後嗣)도 없이 64세의 나이[선조 10년]로 생을 마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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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1대 중종(中宗) - 정릉(靖陵)

 

 

 11.중종 - 정릉(靖陵)

소재지 :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135-4  { 宣靖陵 소재 }
사   적 : 제 199 호

靖陵의 특징
: 중종(이역;1488-1544, 재위39년)의 정릉이 현 위치인 성종(成宗)의
선릉(宣陵)에 인접한 곳에 위치하기 까지는 많은 우여곡절(迂餘曲折)이 있었습니다. 또한 왕비(王妃)가 3명이나 되었으면서도 같은 곳에 능이 조성되지 못했는데, 그것은 세 번째 왕비였던 명종(明宗)의 생모(生母)인 제2 계비(繼妃) 문정왕후(文定王后) 때문입니다.
 처음 중종 승하 후 제1계비였던 장경왕후(章敬王后) 능인 희릉(禧陵;서삼릉 소재) 옆에 조성되었으나, 1562년[명종 17년]에 당시 권력을 움직였던 문정왕후에 의해 현 위치로 옮겨진 것입니다.
 겉으로는 풍수지리(風水地理)를 따라 옮겼다고 했지만, 오히려 지대가 낮아 자주 침수(沈水)되었기에 결국 중종의 옆에 같이 잠들고 싶었던 문정왕후는 자신의 능을 다른 곳{태릉}으로 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중종의 정릉(靖陵)을 잘못 옮김으로 인해 그 다음 해에 명종(明宗)의 세자인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서거하고, 2년 뒤에는 문정왕후 자신, 또 2년 뒤에는 명종(明宗)이 승하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결국 임진왜란 당시에 왜적(倭賊)에게 도굴까지 당하게 되는 비운의 능이 됩니다.
 능역의 양식은 함께 있는 성종의 선릉(宣陵) 양식을 따라 웅장하게 조성되어 봉분의 병풍석(屛風石)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과 구름 문양까지 조각했습니다. 

中宗代의 사료

연도

재위

사  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1506

1년

11월, 연산군 병으로 죽음{1476- }

1521

16년

6월, 노산군(魯山君) 부인 송씨(宋氏) {단종 비-정순왕후} 죽음{1440-}

1507

2년

6월, <연산군일기> 수찬 시작

1524

19년

11월, 김안로(金安老) 파직,유배됨

1509

4년

9월,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완성

1527

22년

3월, 동궁(東宮) 작서(灼鼠)의 변(變)

1510

5년

4월, 삼포왜란(三浦倭亂) 일어남

4월, 최세진 [훈몽자회(訓蒙字會)] 찬진

1513

9년

12월, 성균관 존경각(尊慶閣)서적 소실

1529

24년

5월, 김안로를 방면(放免)함 

1515

10년

2월, 원자(元子-仁宗) 출생

1531

26년

6월, 김안로 대호군(大護軍)이 됨 

8월, 박상(朴祥)등 단경왕후 복위 상소

1537

32년

1월, 모화관에 영조문(迎詔門) 세움

1517

12년

8월, 정몽주(鄭夢周)문묘(文廟)배향

8월, 희릉(禧陵)을 천장(遷葬)함 

1518

13년

9월, 소격서(昭格署)를 폐함

10월, 김안로 사사(賜死)하고 형제 유배

1519

14년

5월, 조광조(趙光祖) 대사헌 됨

1538

33년

11월, 성주사고(星州史庫) 전소(全燒)

12월, 조광조 사사(賜死)-기묘사화

1543

38년

10월, 주세붕(周世鵬) 백운동서원 세움 

1520

15년

11월, 골육상송(骨肉相訟)을 금함

1544

39년

11월, 왕 승하{1488- } 

뒷 이야기
 : 권력의 암투에 의해 임금의 능력이 시험대에 오른 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중종대 역시 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말았던 안타까운 시대라 할 것입니다. 중종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 슬하에서 태어나 자신의 이복(異服) 형이었던 연산군(燕山君)을 폐위했고, 자신의 부인{단경왕후}까지 폐위시킨 장본인 이었기에 처음부터 당대의 국왕의 힘은 필연적 한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조광조(趙光祖)의 이상적 정치의 실현이 좌초되었을 때{기묘사화(己卯士禍-1519년)} 불안한 정국은 사회발전을 지체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발전한다는 진리처럼 권력 내부의 혼미는 외부의 결속을 가속화시키는 기반으로 작용했고 훈구세력의 몰락의 길이 열리기 시작한 시기도 또한 이때입니다.
 

 

 

  中宗의 비(妃) 단경왕후(端敬王后) - 온릉(溫陵)

 

 

중종비 단경왕후 - 온릉(溫陵)

소재지 :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 산 19
사   적 : 제 210 호

溫陵의 특징
: 중종의 정비(正妃)인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 愼氏:1487-1557)의 온릉은 왕비 책봉 1주일 만에 폐위되는 불우한 신씨의 일생을 대변하듯 조촐하게 조성되어, 현재 비공개 능으로 남아 있습니다. 단경왕후는 중종반정(中宗反政)에 반대했던 아버지{신수근}로 인해 폐위되어 1557년[명종 12년] 71세의 나이로 사저에서 승하한 뒤 본가 선영에 묻혔다가 1739년[영조 15년]에 복위(復位)되어 단경(端敬)의 시호와 온릉(溫陵)의 능호를 받고, 뒤에 추복된 단종(端宗)의
장릉(莊陵) 양식을 따라 능역이 조성되었습니다.

단경왕후 약사(略史)
: 단경왕후 신씨는 연산군(燕山君)대 좌의정 신수근(愼守勤)의 딸로 태어나 1499년[연산군 5년] 13세 때에 당시 진성대군(晉城大君;中宗)과 혼인을 맺었으나, 몇 년 뒤 중종반정(中宗反政)은 온 집안의 몰락을 가져옵니다.
 아버지의 반정(反政) 반대로 인한 죽음, 고모였던 연산군 부인 신씨(愼氏) 등의 폐위와 함께 1506년 왕비 책봉 7일만에 반정세력에 의해 폐위되는 운명을 맞습니다. 결국 슬하에 자식도 없이 권력의 암투 속에 희생양(犧牲羊)이 되고 말았던 안타까운 비운의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중종 계비 장경왕후 - 희릉(禧陵)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산 37-1 <西三陵 소재>
사   적 : 제 200 호

禧陵의 특징
 :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1491-1515)의 희릉은 중종의 정릉(靖陵)처럼 천장(遷葬)되어 현재의 서삼릉(西三陵) 능역 가운데에서 처음으로 조성된 능입니다. 원자{인종(仁宗)}를 낳고 1515년 25세의 나이로 승하한 장경왕후는 처음 태종(太宗)의 헌릉(獻陵) 옆에 조성되었으나, 1537년(중종 32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습니다. 역시 중종의 부마(駙馬)였던 김안로(金安老)의 권력 암투가 희릉 천장(遷葬)의 사단(事端)이었습니다.
 희릉은 봉분의 병풍석(屛風石) 없이 모든 양식을 조선 전기의 왕릉 양식에 따르는 전형적인 능역으로 조성되었습니다. 

장경왕후 약사(略史)
 : 장경왕후는 1491년(성종 22년)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 윤여필(尹汝弼)의 딸로 태어나 중종 원년(1506년)에 궁궐에 들어와 숙의(淑儀)에 봉해졌다가 단경왕후가 폐위(1506년)되자 다음해에 왕비에 책봉됩니다.
 슬하에 효혜공주와 인종(仁宗)을 두었는데, 바로 인종 출산후에 산후병으로 승하한 것입니다.{중종 11년}

 

 

   中宗의 제2 계비(繼妃) 문정왕후(文定王后) - 태릉(泰陵)

 

 

중종 2계비 문정왕후 - 태릉(泰陵)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 산 223-19 <泰康陵 소재>
사   적 : 제 201 호

泰陵의 특징
: 중종(中宗)의 제2계비인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尹氏 : 1501-1565)의 태릉(泰陵)은 명종(明宗)의
강릉(康陵)과 함께 태강릉(泰康陵)으로 불리우면서 주변의 태릉 푸른동산, 태릉선수촌 등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곳입니다.
 재위 1년을 못넘긴 인종(仁宗)을 이어 13대 명종(明宗)이 즉위하면서 명종의 생모(生母)였던 문정왕후가 권력을 장악했었기 때문에 사후(死後)의 능역 조성 역시 웅장하고 화려하게 이루어 졌습니다. 유난하게 거대한 석인(石人)의 얼굴과 봉분의 병풍석(屛風石)에 구름 문양과 십이지신상(十二支身像) 등은 당대 권력의 힘을 느끼게 합니다.  

文定王后 약사(略史)
 : 문정왕후 윤씨는 1501년(연산군 7년)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윤지임(尹之任)의 딸로 태어나 17세{중종 12년}에 왕비에 책봉되었고, 중종(中宗)과의 슬하에 명종(明宗)과 네 공주를 두었습니다.
 문정왕후는 일생이 아주 화려해서 자신이 왕비(王妃)에 오른 것도 중종의 제1계비(繼妃)였던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가 인종(仁宗) 출산 후 승하해서 이루어졌고, 아들 명종(明宗) 역시 인종(仁宗)의 요절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천운(天運)이 작용한 것 같다는 속설(俗說) 전해오는데, 더욱이 12세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명종(明宗)을 대신해 8년간이나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기에 권력의 정상에 오른 것입니다.
 인종(仁宗)의 외척 세력을 제거했던 을사사화(乙巳士禍;1545년) 이후 권력의 정상에 군림했던 문정왕후가 생애의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은 바로 중종(中宗)의 옆에 묻히지 못한 것입니다. 중종과 능역을 함께 하기 위해 현재 서삼릉(西三陵)의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옆에 조성했던 중종의 정릉(靖陵)을 성종(成宗)의 선릉(宣陵) 가까이 있는 봉은사(奉恩寺) 곁으로 옮겨 놓았지만 낮은 지대로 인해 자주 침수되어 문정왕후 자신은 결국 그곳에 묻히지 못하고 현 위치로 정해진 것입니다.
 또한 문정왕후는 불교(佛敎)에 심취하여 봉은사에 보우(普雨)를 주지(住持)로 두고 왕실에서의 불교 부흥에 많은 작업을 했지만, 문정왕후 사후(死後) 보우는 유배지에서 죽고 불교는 다시 배척당하게 됩니다.

 

 

 

  제10대 연산군(燕山君)과 부인신씨(夫人愼氏)- 연산군묘(燕山君墓)

 

 

10.연산군 - 연산군 및 거창신씨묘

소재지 :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산77
사   적 : 제 362 호

燕山君墓의 특징
: 조선조(朝鮮朝) 최초의 폐왕(廢王)인 연산군(이융; 1476-1506, 재위12년)과 폐비(廢妃) 부인 거창군 신씨(愼氏; 1472-1537)의 연산군묘는 유배지 강화도 교동(喬桐)에서 31세의 나이로 사망한 연산군을 그곳에 매장했다가, 1512년(중종 7년)에 폐비 부인 신씨의 상언(上言)으로 양주군(楊州郡) 해촌(海村)-{현재의 위치}에 이장(移葬)하여 왕자군(王子君)의 예우로 개장(改葬)했습니다. 그 후 1537년(중종 32년)에 부인 신씨가 사망하자 쌍분(雙墳)의 형태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10.연산군 - 연산군 묘역의 문인석 왕자군의 예우로 조성되었기에 곡장(曲墻)과 상석(上石), 장명등(長明燈), 망주석(望柱石), 문인석(文人石) 만으로 조촐하게 설치했지만, 그 보다는 폐위된 왕이었기에 봉분 앞의 비석 전면의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라는 비명과 봉분을 호위하고 있는 문인석의 얼굴 모습에서 왠지 모르게 애처로움이 느껴집니다. 더욱이 길 건너편에 조성된 세종의 셋째 딸 정의공주묘역보다 더 협소한 크기를 보면 그 안타까움은 더 커집니다.

  묘역의 아래에는 궁인인 의정궁주조씨(義貞宮主趙氏)의 묘와 연산군의 딸, 사위 구문경(具文景)의 묘가 함께 조성되어 있습니다.

10.연산군 - 궁인 및 연산군의 딸과 사위 묘

燕山君代의 사료

연도

재위

사  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1495

1년

4월, {성종실록(成宗實錄)} 수찬을 명함

1502

8년

9월, 원자(元子) '노'를 세자로 봉함

1496

2년

6월, 폐비 윤씨(尹氏) 추숭(追崇)함

1504

10년

윤4월, 경연(經筵)을 폐함

1498

4년

7월, 무오사화(戊午士禍) - 김종직(金宗直) 부관참시함

7월, 언문(彦文)의 교수.학습 금함
10월,  갑자사화(甲子士禍)-김굉필 효수

1499

5년

2월, 춘추관 {성종실록}을 찬진함

1506

12년

4월, 사간원(司諫院)을 폐함

1500

6년

6월, 음난남녀처사(淫亂男女處死)의 법을 제정함

9월, 박원종(朴元宗) 등이 왕을 폐하고 진성대군(晉城大君)을 옹립함{중종반정}

11월, 과부(寡婦) 재가(再嫁) 금함

 

 

 

뒷 이야기
 : 성종(成宗)의 장남으로 태어나 1483[성종 14년]에 세자에 책봉되고 왕위까지 오르지만 재위 12년만에 성희안, 박원종 등에 의해 성종의 둘째 아들인 진성대군(晉城大君)을 추대하고 연산군을 쫓아내는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폐위되고 맙니다.  이러한 연산군에 대한 평가는 실록<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등에서 자세하게 서술되어 포악한 성격에 거듭된 실정(失政)과 폭정 등이 나열되지만 당대의 무오사화(戊午士禍)나 갑자사화(甲子士禍) 등에서 보이듯이 권력의 암투 속에서 괴로워했던 한 인간으로 본다면, 더욱이 자신의 어머니{성종비에서 폐위된 윤씨(尹氏}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한 당사자라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연산군에 대한 평가가 객관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은 당연합니다.

 부인 신씨는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의해 연산군과 함께 폐위되었고 자신의 두 아들 또한 유배지에서 사사(賜死)되는 불우한 일생을 마감한 비운의 여인이라 할 것입니다. 

 

   제9대 성종(成宗)과 계비(繼妃) 정현왕후(貞顯王后) - 선릉(宣陵)

 

 

선릉 - 성종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135-4 { 宣靖陵 소재 }
사 적 : 제 199 호

宣陵의 특징
 : 세조의 손자이고 추존(追尊)된 덕종(德宗)의 차남인 成宗(이혈 : 1457-1494, 재위 25년)과 계비(繼妃) 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 尹氏 : 1462-1530)의 선릉(宣陵)은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으로 조성되었는데, 성종의 능에는 검약(儉約)해야 한다는 세조(世祖)의 명과 다르게 봉분에 병풍석(屛風石)을 둘러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한 것이 특이합니다.
 후에 중종(中宗)의 정릉(靖陵)이 그의 두 번째 계비(繼妃)인 문정왕후(文定王后))에 의해 선릉의 경내로 옮겨져 선정릉(宣靖陵)의 명칭으로 불리는데, 중종의
정릉(靖陵)이 조성될 때 성종의 선릉이 그 모범이 되었다고 합니다. 

선릉 - 계비 정현왕후

成宗代의 사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1471

2년

12월, 춘추관 세조실록(世祖實錄) 편찬

1484

15년

9월, 창경궁(昌慶宮) 완성

 1472

3년

5월, 춘추관 예종실록(睿宗實錄) 편찬

1488

19년

5월, 유향소(留鄕所)를 다시 둠

1476

7년

8월, 숙의(淑儀) 윤씨(尹氏) 왕비 책봉

12월, 월산대군{성종 형} 죽음{1454- }

1478

9년

11월, 서거정 <동문선(東文選)> 편찬

1492

23년

3월, 왜인(倭人)의 사무역(私貿易) 허가

1479

10년

6월, 왕비 윤씨 폐위함

* 콜럼부스 아메리카 항로 발견

1480

11년

2월, 원자 융{연산군}을 왕세자로 봉함

1494

25년

12월, 성종 승하{1457- }, 연산군 즉위

뒷 이야기
 : 성종은 아버지{추존 덕종(德宗)}가 생후 2달만에 승하하고, 예종 또한 1년만에 승하해 세조의 비(妃) 정희대비(貞熹大妃)의 명으로 13살의 나이[1469년]에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 때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齊安大君)은 간난아이였고,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은 병약해서 결국 성종이 왕위에 오른 것입니다. 7년간의 섭정을 지나 친정(親政)한 성종은 재위 25년간 조선왕조의 기반을 완성시킨<成> 국왕이 되었습니다.
 성종대의 치적으로 인해 조선조의 기틀이 완성된 것은 여러 가지 업적에서 나타납니다. 홍문관(弘文館), 존경각(尊經閣), 독서당(讀書堂)을 창설해 어진 인재들을 등용했고, 세조 대부터 시작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개정, 완성 반포하여 국가의 통치체제를 확립시켰습니다. 또한 역사서인 <동국통감(東國通鑑)>과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문학서인 <동문선(東文選)> 등의 편찬에서 보이듯이 왕성한 문화적 발전을 이루었고, 외적으로도 북방의 여진족(女眞族) 소탕이나 남방의 일본(日本)과의 무역 확대 등으로 조선조의 힘이 크게 진작된 전성기를 이룹니다.

 정현왕후 윤씨는 파평윤씨(坡平尹氏)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 윤호(尹壕)의 딸로 태어나 숙의(淑儀)에 봉해졌다가, 왕비 공혜왕후(恭惠王后)가 승하(성종 5년, 1474년)하고 원자(元子-연산군(燕山君))를 낳은 숙의(淑儀) 윤씨(尹氏)가 계비(繼妃)가 되었으나 폐위되자 1480년(성종 11년)에 왕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슬하에 중종(中宗)과 신숙공주(愼淑公主)를 낳고 중종 25년에 승하합니다.
 
 

 

 

 

 

순릉 - 성종비 공혜왕후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리 산15 <파주삼릉(坡州三陵; 구 공순영릉(恭順永陵) 소재>
사 적 : 제 205 호

順陵의 특징
: 성종의 비(妃) 공혜왕후 한씨(恭惠王后 韓氏 : 1456-1474)의 순릉(順陵)은 왕비 책봉 5년만에 슬하에 자식 없이 19살의 나이로 승하[성종 6년]해 언니인 장순왕후(章順王后 - 예종의 비) 공릉(恭陵)과 나란하게 단릉(單陵)의 형식으로 순릉(順陵)이라 명명되어 자리잡게 됩니다. 당시 풍습대로 봉분의 병풍석(屛風石)은 없고 모든 부속물들은 정갈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공혜왕후 약사(略史)
: 장순왕후와 공혜왕후. 아버지 한명회의 야심에 의해 두 딸이 모두 왕비의 자리에 오르게 됬지만 두 왕비 모두 단명하고 말았던 안타까운 일생을 보냈습니다. 공혜왕후는 12살 때[세조 13년, 1467년] 자산군(者山君-成宗)에게 출가하여 1469년에 왕비로 책봉되었지만, 5년 뒤에 슬하에 소생없이 승하합니다.
 생전에 정희왕후 윤씨{세조의 비(妃)}, 소혜왕후 한씨{추존 덕종의 비(妃)}, 안순왕후 한씨{예종의 계비(繼妃)}가 모두 생존해 있어서 공혜왕후는 효성을 다했다고 합니다.

 

 

 

  제8대 예종(睿宗)과 계비(繼妃) 안순왕후(安順王后) - 창릉(昌陵)

 

 

창릉 - 예종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산30 <서오릉(西五陵) 소재>
사 적 : 제 197 호

昌陵의 특징
 : 일반인에게 비공개 능인 창릉(昌陵)은 단명 임금 예종(이황(李晄) : 1450-1469, 재위 14개월)과 계비(繼妃)인 안순왕후 한씨(安順王后 韓氏 :? -1498)의 능으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을 취하고 석물(石物)의 배치는 {국조오례의(國祖五禮儀)}의 전통적인 예를 따르고 있습니다.

창릉 - 계비 안순왕후

睿宗代의 사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1469

1년 

1월, 한명회 영의정으로 함

1469

1년

11월,예종 승하{1450- }

9월, 경국대전(經國大典) 4전 완성

정희대비 명으로 자산군{성종} 즉위

뒷 이야기
: 세조의 차남으로 태어난 예종은 세조가 즉위하자 해양대군(海陽大君)에 책봉되었다가, 세자였던 형 의경세자(懿敬世子 : 덕종(德宗))가 요절[세조 3년, 1457년]하자 세자로 책봉되어 1468년 세조 승하 하루 전에 선위(禪位)받아 왕위에 올랐으나, 역시 1469년 11월 20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안순왕후 한씨는 청주부원군(淸州府院君) 한백륜(韓伯倫)의 딸로 태어났는데, 예종이 세자 시절 한명회의 딸{장순왕후}이 세자빈에 책봉되었다가 다음해 요절하자 세조 8년[1462년]에 두 번째 세자빈으로 간택되었고, 왕비에 오릅니다. 예종 승하 후 성종 2년에 인혜대비(仁惠大妃)로 봉해지고 연산군 3년(1497년)에 다시 명의대비(明懿大妃)에 봉해집니다. 슬하에 제안대군(齊安大君)과 현숙공주(顯肅公主)를 두었고 연산군 4년(1498년)에 승하했습니다. 
 

 

 

  睿宗의 비(妃) 장순왕후(章順王后) - 공릉(恭陵)

 

 

공릉 - 예종비 장순왕후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리 산15 <파주삼릉(坡州三陵 : 구 공순영릉(恭順永陵) 소재>
사 적 : 제 205 호

恭陵의 특징
 : 예종(睿宗)의 비(妃)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 : 1445-1461)의 공릉(恭陵)은 세자빈(世子嬪) 때 승하했기 때문에 세자빈묘로 조성되어 봉분(封墳)의 난간석(欄干石)과 병풍석(屛風石), 무인석(武人石) 등이 생략되어 간략하게 이루어져 있습니다. 후에 성종(成宗) 1년(1470년)에 공릉(恭陵)으로 명명되고 장순왕후로 추존되었습니다.
 주변에 장순왕후와 자매간인 성종(成宗)의 비(妃) 공혜왕후(恭惠王后)의
순릉(順陵)과 영조(英祖)의 장자(長子) 효장세자(孝章世子 : 추존-진종(眞宗))와 비(妃) 효순왕후(孝純王后)의 영릉(永陵)이 있어 파주삼릉(坡州三陵; 구 공순영릉(恭順永陵)으로도 불립니다.

장순왕후 약사(略史)
 : 압구정(狎鷗亭)으로 유명한 청주한씨(淸州韓氏)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의 장녀로 태어난 예종의 비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는 세조를 도와 권력을 쥐었던 아버지에 의해 세자빈으로 책봉(세조 6년, 1460년)되었으나 다음해에 인성대군(仁城大君)을 낳고 산후병으로 17살의 어린나이에 승하해 장순(章順)의 시호(諡號)를 받았습니다. 특히 동생 공혜왕후(恭惠王后 : 성종의 비(妃)) 역시 19살의 나이에 승하해 비운(非運)의 자매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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