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존 덕종(德宗)과 소혜왕후(昭惠王后) - 경릉(敬陵)

 

 

 경릉 - 추존 덕종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산30 <서오릉(西五陵) 소재>
사 적 : 제 198 호

敬陵의 특징
 : 아들{성종(成宗)}이 왕위에 올라 왕의 아버지로 뒤에 추존(追尊;
왕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제왕의 칭호를 올리던 일 - 추숭(追崇))된 덕종(이장(李暲) : 1438-1457 : 세조의 장남)과 왕비(王妃)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韓氏 : 1437-1504)의 경릉(敬陵)은 서오능(西五陵)에서 처음으로 조성되었고,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을 취했는데, 특이하게 일반적인 능 배치와 상반되게 오른쪽이 덕종의 능이고 왼쪽이 소혜왕후의 능입니다.

경릉 - 소혜왕후덕종의 능은 세자(世子) 신분으로 승하했기 때문에 세조(世祖)의 평소 소신인 간략한 장례로 인해 봉분에 병풍석(屛風石), 난간석(欄干石), 무인석(武人石) 등도 없이 대군묘(大君墓) 형식으로 간략하게 조성되어 이후의 추존(追尊)된 능의 전례를 삼게 됩니다. 그러나 소혜왕후의 능은 생전에 덕종 추존과 함께 왕비(王妃)로 추숭(追崇)되었고, 예종(睿宗)보다 뒤에 승하했기 때문에 예종의 창릉(昌陵)을 모범으로 조성되어 병풍석(屛風石)을 제외하고 제대로 된 왕릉의 형식을 취했습니다.

추존(追尊) 약사(略史)
 : 수양대군{세조}의 장남으로 태어난 덕종은 총명하게 자라 의경세자(懿敬世子)가 되었으나 병약하여 슬하에 월산대군(月山大君)과 성종(成宗)을 두고 20세의 나이에 요절했습니다. 이에 성종 2년[1471년]에 의경왕(懿敬王)으로 추존되고, 성종 7년[1476년]에 묘호를 덕종(德宗)으로 능호를 경릉(敬陵)으로 명명했습니다.

 소혜왕후 한씨는 1437년[세종 19년]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한확(韓確)의 딸로 태어나 세자빈(世子嬪)에 간택됩니다. 덕종 승하 후 예종(睿宗)을 지나 아들 성종(成宗)대에 덕종의 추존과 함께 왕후에 책봉되었고, 손자 연산군대(燕山君代)까지 살다가 승하[연산군 10년]했습니다. 특히 소혜왕후는 불경(佛經)에 조예가 깊었으며, 부녀자들을 위한 <여훈(女訓)>을 편찬하기도 했습니다. 

 

   제7대 세조(世祖)와 정희왕후(貞熹王后) - 광릉(光陵)

 

 

광릉 - 세조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47
사 적 : 제 197 호

光陵의 특징
: 세조(이유 : 1417-1468, 재위 14년)와 왕비(王妃)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 尹氏 : 1418-1483)의 광릉(光陵)은 조선조 내내 풀 한 포기의 채취도 금지할 정도로 잘 보호되어 울창한 산림을 자랑합니다. 주위의 수목원을 떠올리면 되겠지요.

광릉 - 정희왕후정자각(丁字閣)을 중심으로 좌우 언덕에 세조의 능과 정희왕후의 능이 각각 단릉(單陵)의 형식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는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간략한 의례로 백성들의 노동을 줄여야 한다는 세조의 유언대로 봉분(封墳)에 병풍석(屛風石)을 두르지 않았고, 석실(石室)과 석곽(石槨)도 사용하지 않고 회격(灰隔: 관(棺)과 광중(廣中)사이를 석회(石灰)로 다짐)으로 석실, 석곽을 대신했다고 합니다.
 정희왕후 승하 후 세조의 능과 다른 언덕에 왕후릉을 조성하면서 신하들의 의견이 능호(陵號)를 달리할 것인가, 정자각(丁字閣)을 새로 세울 것인가 등으로 분분하다가 성종(成宗)이 먼저 건립한 세조릉의 정자각을 두 언덕 사이로 옮겨지어 함께 제사 지내도록 함으로 인해 광릉(光陵)의 단독 능호(陵號)를 유지하게 됩니다.
 광릉 근처 능안마을의 봉선사(奉先寺)는 정희왕후 명으로 중건된 세조의 명복을 빌었던 광릉의 원찰(願刹)입니다.

世祖代의 사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1455

1년

11월, 춘추관 문종실록 13권 완성

1462

8년

5월, 신숙주 영의정이 됨

1456

2년

6월, 성삼문,박팽년 등 6신{死六臣}이 상왕{단종} 복위 도모로 사형

1465

11년

4월, 한성에 원각사(圓覺寺) 창건

1467

13년

5월, 길주인(吉州人) 이시애(李施愛) 반란 8월에 진압

1457

3년

6월, 상왕 노산군으로 강등 영월에 유배

9월, 왕세자(덕종) 죽음{1438- }

1468

14년

9월, 세조 승하{1417- }

10월, 노산군(魯山君) 승하{1441- }

 

 

 

뒷 이야기
: 세종의 차남으로 태어난 세조는 세종 27년(1445년)에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책봉됩니다. 세조는 권력에 대한 야심으로 1452년 단종(端宗) 즉위 후 단종을 보호했던 안평대군 이하 수십 명을 죽이거나 귀양 보냈던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1455년[단종 3년]에 단종에게서 왕위(王位)을 받아 왕권(王權)을 쥐었고 52세의 나이로 승하했습니다.
 하지만 재위 시절에는 평소 좋아하던 무술로 인해 조선군의 무력을 크게 강화해 두 차례나 북방의 여진족(女眞族)을 정벌하고, 안으로도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편찬을 시작하는 등 국가의 모든 제도를 정비한 치적도 남겼습니다.

 정희왕후는 파평윤씨(坡平尹氏)로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 윤번의 딸로 태어나 슬하에 덕종(德宗), 예종(睿宗)의 2남과 의숙공주를 두었습니다. 정희왕후는 장남 덕종이 요절(夭折)하고 차남 예종이 14세로 즉위하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으며, 예종이 재위 1년만에 승하하자 당일 덕종의 아들인 자을산군(者乙山君 : 成宗)을 즉위케 했습니다. 성종 역시 13세의 나이에 즉위했기에 정희왕후가 7년간 섭정(攝政)을 할 정도로 강한 여인이었습니다.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세조를 독려했던 일화나 두 차례의 섭정 등에서 보듯이 성종 14년(1483년) 66세로 승하할 때까지 정희왕후의 힘은 궁궐에 넘칠 정도였습니다. 

 

 

    

 

      

   제6대 단종(端宗) - 장릉(莊陵)

 

 

장릉 - 단종 

 

소재지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산121
사 적 : 제 196 호

莊陵의 특징
 : 단종(이홍위(李弘暐) : 1441-1457, 재위 3년)의 장릉은 비운의 소년 임금 능답게 많은 우여곡절 끝에 조성되었습니다. 영월로의 유배생활에서 서인(庶人)으로까지 강등되어 사약(賜藥)을 받고 생을 마감한 단종은 영월 야산에 암매장되었던 것을 중종(中宗) 11년[1516년]에 와서야 묘를 찾아 봉분(封墳)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 뒤 240년이 지난 숙종(肅宗) 24년(1698년)에 복위(復位)되어 단종(端宗)으로 묘호(廟號)를 붙이고 종묘(宗廟)에 부묘하고 단릉(單陵)의 형식으로 능호를 장릉(莊陵)이라 했습니다.
 추봉된 능의 예를 따라 난간석(欄干石)과 무인석(武人石)은 설치하지 않았고 양식 또한 가장 간단하게 조성되었습니다. 특이한 점은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을 장릉에 배향하기 위해 장릉 밑에 배식단(配食壇)을 설치했습니다.

端宗代의 사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1453

1년

1월, 문종실록(文宗實錄)찬수 시작

1454

2년

3월, 춘추관 '세종실록' 163권 완성

10월, 계유정난(癸酉靖難) 발생

6월, 단종 수양대군에게 왕위 선위

뒷 이야기
: 문종의 외아들로 태어난[세종 23년] 단종은 8세 때에 왕세손(王世孫)에 책봉되고 문종이 승하하자 1452년 12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릅니다. 어린 단종을 보위했던 영의정 황보인(皇甫仁)과 우의정 김종서(金宗瑞)와 함께 성삼문, 박팽년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단종의 숙부였던 수양대군(首陽大君)은 궁중의 역사(力士)였던 한명회(韓明澮)와 함께 자신의 동생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역모를 도모했다는 죄명으로 단종을 보위했던 충신들을 제거하는 일대 거사를 일으킨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사변(事變)을 일으킵니다. 곧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선위(禪位)를 하고  상왕(上王)으로 2년여를 지내다가 사육신(死六臣)들의 단종 복위(復位) 사건이 터지자 세조에 의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강원도 영월(寧越)로 귀양을 가게 됩니다.

 또한 단종의 실록 역시 처음에는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로 불려지다가 숙종 때 복위되면서 <단종대왕실록(端宗大王實錄)>으로 명칭을 되찾게 됩니다. 영월 청령포
결국 권력에 대한 수양대군의 야심으로 단종의 폐위와 사망. 17살의 나이로 한 많은 세상을 마감한 단종에 대한 비애는 그가 유배(流配)되었던 영월의 '청령포(淸冷浦)'나 '금표비(禁標碑)' 등지에서 가슴에 느껴집니다. 또한 영흥리의 '자규루(子規樓)'에서 자규시(子規詩)를 읊조리던 어린 단종의 모습을 회상해 보면 절로 마음이 숙연해질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왕위의 선위(禪位)에서 유배 생활과 사약(賜藥)을 받고 승하할 때까지의 단종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권력의 비애를 다시한번 생각해 봅니다.
 

 

 

   端宗의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 - 사릉(思陵)

 

 

사릉 - 정순왕후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사릉리 산65
사 적 : 제 209 호

思陵의 특징
: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 : 1440-1521)의 사릉(思陵)은 한 많은 비운의 왕비 송씨의 불우한 일생을 대변하듯이 다소 초라하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단종의 장릉이 멀리 강원도 영월에 위치해 있지만 사릉은 경기도 남양주에 승하 당시(중종 16년) 부인의 신분으로 강등되어 궁궐에서 쫓겨난 상태이었기에 부인의 묘로 초라하게 조성되었다가 숙종 24년(1698년) 단종 복위와 함께 정순왕후로 추복(追復)되어 단릉(單陵)의 형식으로 능호를 사릉(思陵)이라 명명하였습니다.
 역시 추봉된 능이었기에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欄干石) 없이 봉분만 조성하고 석양(石羊)과 석호(石虎)도 한 쌍씩만 주위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현재 비공개 능입니다.

정순왕후의 약사(略史)
 : 여산송씨(礪山宋氏)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인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의 딸로 태어난 정순왕후는 1453년(단종 1년)에 왕비로 책봉되었습니다. 1457년(세조 3년) 사육신(死六臣) 사건으로 부인(夫人)으로 강등되어 열 여덟 어린 나이에 홀로되어 82세(1521년, 중종 16년)로 승하할 때까지 한 많은 일생을 보내야했습니다.
 궁궐에서 추방된 후 여막에서 동냥으로 끼니를 이었고, 염색업으로 여생을 보내면서도 세조(世祖)의 도움을 끝까지 거부하는 청빈한 생활을 했습니다.
 * 21대 영조(英祖)의 계비(繼妃)도 정순왕후(貞純王后)입니다.

출처 : 漢字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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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대 문종(文宗)과 현덕왕후(顯德王后) - 현릉(顯陵)

 

 

현릉 - 문종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 <東九陵 소재>
사 적 : 제 193 호

顯陵의 특징
 : 문종(이향(李珦):1414-1452, 재위 2년)과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 權氏:1418-1441)의 현릉은 홍살문(紅--門)부터 모든 부속시설은 하나씩만 설치되어 있고 좌우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封墳)을 따로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종의 릉은 웅장하게 봉분에 병풍석(屛風石)까지 두르고 있지만, 현덕왕후릉은 다소 치우쳐 보입니다.
현릉 - 현덕왕후를그 이유는 본래 현덕왕후가 세자빈 때(1441년: 세종23년) 단종(端宗)을 출산하고 승하해서 문종(文宗) 즉위년[1450년]에 현덕왕후로 추숭되어 소릉(昭陵)으로 명명되었다가 단종 즉위년[1452년]에 문종과 합장(合葬)되면서 합장릉으로 현릉(顯陵)이 조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조(世祖) 3년[1457년]에 현덕왕후의 집안이 동생이 단종의 복위사건에 연루되어 현덕왕후의 능이 파헤쳐져 세가로 옮겨졌다가 중종(中宗) 8년[1513년]에 복위되어 다시 동원이강릉의 형태를 이루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文宗代의 사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1451

1년

6월, 새로운 진법(陣法)을 찬함

1452

2년

2월, 세종실록 편찬 시작

5월, 문종 승하{1414- }, 세자 단종 즉위

 

뒷 이야기
: 3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문종은 20여년간의 세자(世子) 생활로 정치력은 우수했으나 평소 몸이 허약했기에 재위 2년 4개월만에 승하하게 됩니다. 이에 어린 세자 단종이 왕위에 오르게 됨으로써 '계유정란(癸酉靖亂 :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을 강화에 압치하고 군부를 장악함)'과 세조의 찬위(簒位), 사육신(死六臣) 사건 등을 초래하게 됩니다.
 짧은 재위 기간이었지만 문종 대는 병법서(兵法書)인 <동국병감(東國兵鑑)> 등을 간행하고 <고려사(高麗史)> 등을 편찬하는 등의 작업과 함께 서울의 도성(都城)을 비롯한 각 도의 주요 읍성(邑城)들을 개축(改築)하는 등의 치적을 올립니다.

 생전과 사후 모두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던 단명(短命)한 비운의 왕비 현덕왕후는 안동권씨(安東權氏) 집안인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권전(權專)의 딸로 태어나 슬하에 단종과 경혜공주를 두었지만, 세자빈 책봉 4년만에 승하해 현덕(顯德)의 시호(諡號)를 내렸고 문종 즉위 후 왕후에 추숭(追崇)됩니다.

출처 : 漢字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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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대 세종(世宗)과 소헌왕후(昭憲王后) - 영릉(英陵)

 

 

영릉 - 세종과 소헌왕후 

 

소재지 :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83
사 적 : 제 195 호

英陵의 특징
세종(이도:1397-1450, 재위32년)과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1395-1446)의 영릉은 본래 소헌왕후 승하{세종 28년} 후 태종의
헌릉(獻陵) 영내에 하나의 봉분(封墳)에

석실(石室)을 둘로 하는 합장(合葬) 형태의 동릉이실(同陵異室)로 조성하고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세조(世祖) 대에 천장(遷葬)의 논의를 하고 결국

예종(睿宗) 1년(1469년)에 경기도 여주(驪州)로 천장(遷葬)하여 단릉(單陵)의 합장(合葬) 형태로 만들었는데, 세조(世祖)의 광릉(光陵) 제도를 따라 석실(石室)과

병풍석(屛風石)은 쓰지 않았습니다.
초기 영릉의 석조물(石造物)들은 그대로 매장(埋葬)되었는데, 이 때 신도비(神道碑)도 함께 묻고는 여주의 새 능에는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임금의 자취는 국사(國事)에 실려 있기 때문이라 했고, 이는 5대 문종(文宗) 때부터 왕릉에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던 일로 인한 것입니다.
영릉의 능원(陵原) 구조는 봉분(封墳)에 병풍석(屛風石)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欄干石)만 두른 단릉(單陵)으로 상석(床石)이 두 개 놓여 합장릉(合葬陵)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정자각(丁字閣) 왼쪽에는 수라간(水刺間)이 있어 제사 때에 제물(祭物)을 준비하는 곳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아울러 바로 인접한 곳에 17대 효종(孝宗)과 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張氏)를 모신 영릉(寧陵)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世宗代의 사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1419

1년

6월, 삼군도체찰사 이종무 쓰시마정벌

1443

25년

4월, 세자에게 정사를 섭행 시킴

9월, 정종(定宗) 승하{1357- }

12월,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

1422

4년

5월, 태종(太宗) 승하{1367- }

1445

27년

11월, 실록(實錄)을 충주, 전주, 성주(星州)의 삼고(三庫)에 분장시킴

1423

5년

2월, 남산에 봉화대(烽火臺) 설치

1424

6년

9월, 조선통보(朝鮮通寶) 주조

1446

28년

10월, 공문서에훈민정음 사용

1426

8년

8월, 춘추관<정종실록(定宗實錄)>완성

12월, 이과(吏科),사전(史典) 등 시험에 훈민정음 시험과목화 함

1431

10년

춘추관 <태종실록(太宗實錄)> 완성

1434

16년

7월, 신활자 갑인자(甲寅字) 주조

1448

30년

7월, 성균관생 및 오부학당 생도 등이 불당 건립에 반대하여 동맹휴학함

1437

19년

1월, 흉년으로 도적 성행-관리봉록삭감

1440

22년

2월, 남녀 성혼기 정함(남16,여14이상)

1450

32년

2월, 세종 승하{1397- }, 왕세자(文宗) 즉위
* 독일 구텐베르크 활자인쇄술 창안

1441

23년

8월, 측우기(測雨器)비치,양수표 세움

 

   뒷 이야기
32년간 재위(在位)했던 세종의 업적에 대한 평가는 재론(再論)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역대 임금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자세하게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수록된 방대한 치적을 살펴보면 다른 실록에서는 볼 수 없는 '지(志)'의 수록을 통해 당대의 완비된 문물(文物) 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의례(儀禮)에 관한 {오례(五禮)}, 아악(雅樂)에 관한 {악(樂)}, 역사 인문을 망라한

지리서인 {지리지(地理志)}, 천문(天文)에 관한 {칠정산(七政算)} 내외편 등 당시의

다양한 분야의 연구 업적이 얼마나 방대한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종과 소헌왕후의 슬하에는 문종(文宗), 수양<세조(世祖)>, 안평, 임영, 광평, 금성,

평원, 영응대군의 8남과 정소, 정의공주의 2녀를 두었습니다. 수많은 치적을 이룬 성군(聖君)으로 일컫는 세종과는 달리 왕비 소헌왕후는 영의정을 지낸 부친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이 태종에 의해 사사(賜死)되는 비운을 겪고, 세종 14년[1432년]에야 왕비로 개봉(改封)됩니다. 또한 자신 두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등 다소 불우한 일생을 마쳤습니다.[세종 28년]
영릉의 원찰(願刹)인 신륵사(神勒寺)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오는데, 여주로 영릉을 옮긴 후에 원찰로 삼아 보은사(報恩寺)로 개칭했지만

성리학(性理學)의 영향으로 원찰(願刹)제도가 사라져 본래의

신륵사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출처 : 漢字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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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대 태종(太宗)과 원경왕후(元敬王后) - 헌릉(獻陵)

 

 

 

 

헌릉 - 태종과 원경왕후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내곡동 산13 <獻仁陵 소재>
사 적 : 제 194 호

 

獻陵의 특징

 태종(이방원 :1367-1422 : 재위 18년, 상왕 4년)과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1365-1420)의 쌍릉(雙陵) 형태의 헌릉(獻陵)은 창업수성(創業守成)의 업적인 조선 개국(開國)과 왕실의 기반을 공고하게 만든 태종의 치적답게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태조의 건원릉(健元陵) 형식을 따른 헌릉은 원경왕후 승하 후 태종의 명으로 조성되었으며, 건원릉과 같이 신도비(神道碑)를 세워놓고 있습니다. 같은 경내(境內)에 23대 순조(純祖)의 인릉(仁陵)이 함께 모셔져 '헌인릉(獻仁陵)'의 명칭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태종대의 사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1401

1년

7월, 신문고(申聞鼓) 설치

1410

10년

2월, 주자소에서 서적을 인쇄 판매함

1402

2년

1월, 과거에 무과(武科) 설치

1411

11년

11월, 한성에 오부학당(五部學堂) 설치

8월, 호패법(號牌法) 실시

1412

12년

2월, 한성 개천(開川) 공사 끝남

1403

3년

2월, 주자소(鑄字所) 설치{계미자}

1413

13년

3월, 태조실록(太祖實錄) 15권 완성

1405

5년

1월, 최초 여관(女官) 임명{3월 폐지}

12월, 백성들에게 호패 패용토록 하명

10월, 창덕궁(昌德宮) 완성

1417

17년

5월, 명(明)에 바칠 처녀 선발

1408

8년

5월, 태조 이성계 승하{1335- }

1418

18년

6월, 세자 폐하고 충녕대군을 세자 책봉

1409

9년

8월, 태조실록 편수 하륜에게 하명

8월, 세자{忠寧大君}에게 선위(禪位)

 

뒷 이야기  

태종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조선의 개국(開國)에 1등 공신(功臣) 역할을 했습니다. 정몽주를 비롯한 고려(高麗)의 충신들을 제거하고 개국한 새왕조 조선이었기에 이방원의 야심은 당연히 왕권(王權)에 있었습니다. 세자(世子)였던 태조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소생 방석(芳碩)을 제거한 제1차 왕자의 난과 형 방간(芳幹)을 제거한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이방원은 즉위 후 중앙집권제(中央集權制)를 확립하고 세종대(世宗代)의 성대(盛代)에 기반을 세웠습니다.
 태종은 18년간의 왕위(王位) 동안 국가의 모든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고 명(明), 일본(日本), 여진(女眞) 등 주변국과의 관계 정상화로 국가의 기초를 확립했습니다. 특히 세종(世宗)에게 선위한 후에도 병권(兵權)은 장악하고 세종 원년의 대마도(對馬島) 정벌(征伐)을 주도했으며, 그 후 별궁(別宮)에서 여생(餘生)을 즐기다가 56세의 나이로 승하합니다.

 원경왕후는 고려말기의 신하였던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의 딸로 태어나 슬하에 세종(世宗)과 양녕, 효령, 성녕의 3대군(大君)과 정순, 경정, 경안, 정선의 4공주(公主)를 두었습니다. 말년에 태종과의 불화(不和)로 처남 민무구(閔無咎), 민무질(閔無疾) 형제의 처형 등 정치적 문제를 야기시키기도 했습니다.

 

 


출처 : 漢字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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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릉 - 정종과 정안왕후 

 

소재지 : 경기도 개성시 판문군 령정리(북한 소재)
사 적 : 북한 소재로 사적 미지정

厚陵의 특징
 : 定宗(이방과: 1357-1419 , 재위 2년, 상왕 20년)과 왕비 정안왕후 김씨(定安王后 金氏: 1355-1412)의 후릉은 조선 최초로 왕과 왕비의 봉분(封墳)을 나란하게 난간석(欄干石)으로 연결한 쌍릉(雙陵)의 형식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 지역에 소재하고 있어 자세한 경관은 볼 수 없지만 북한에서 발간된 사진으로 볼 때 많은 풍화(風化)와 소실된 모습에서 우리의 문화 유산이 제대로 보존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깁니다.

定宗代의 사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1399

1년

3월, 문신들을 집현전(集賢殿)에 회합

1400

2년

1월, 2차 왕자의 난{방간 유배}

11월, 세자 방원에게 선위(禪位)

뒷 이야기
 : 정종은 이성계의 둘째 아들로 태조 7년[1398년]에 왕자의 난이 일어나 세자 방석(芳碩)이 죽자 대신 세자(世子)로 책봉되고 같은 해 9월에 태조로부터 선양(禪讓)을 받아 즉위합니다. 정안왕후와의 슬하에는 후사가 없으나, 후궁들 사이에 15명의 군(君)과 8명의 옹주(翁主)를 두었습니다. 또한 2년간의 왕위(王位) 시절 역시 실질적으로는 동생 방원{태종(太宗)}의 뜻에 따라 정치가 이루어졌기에, 결국 왕위를 선위(禪位)하고 상왕(上王)으로 머물면서 말년을 지냅니다.
 '정종(定宗)'이란 묘호(廟號)는 사후(死後)에 바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숙종 7년[1681년]에 와서야 진상되어 묘호를 정종(定宗)이라 사용하게 되었고, 그 이전에는 명(明)나라 황제에게서 받은 시호(諡號) 공정(恭靖)을 칭호(稱號)로 삼아 '공정왕(恭靖王)'이라 했기에 실록 역시 <공정왕실록(恭靖王實錄)>이라 했었습니다.

 정안왕후는 고려말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이었던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 김천서(金天瑞)의 딸로 태어나[1355년] 태조 7년에 덕빈(德嬪)에 책봉되고 정종 즉위로 왕비에 올라 정종(定宗)의 내조로 일생을 마쳤습니다. 정안왕후는 정종이 실권자인 이방원에게 왕위를 넘겨주자 편안한 말년을 보내며 천수(天壽)를 다 했습니다. 하지만 슬하에 자식이 없이 58세의 나이로 태종 12년에 승하합니다.

[출처ㅡ ]

출처 : 漢字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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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원릉 - 태조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 <東九陵 소재>
사 적 : 제 193 호

健元陵의 특징
 조선조(朝鮮朝)의 건국자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1335-1408, 재위7년)의 건원릉은 전형적인 조선조 왕릉의 형식을 갖추고 이후 왕릉의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북동서 방면 3면(面)의 곡장(曲墻) 안에 단릉(單陵)의 봉분(封墳) 형식으로 봉분 앞 중앙에 상석과 장명등(長明燈)을 설치하고 양 옆에는 한 쌍의 망주석(望柱石)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한 단 아래의 좌우에 문인석(文人石)이 뒤에 석마(石馬)를 대동하고 있고, 그 아래 단에 역시 좌우로 무인석(武人石)이 석마(石馬)를 뒤에 거느리고 있어 왕릉의 위엄을 갖추었습니다. 본래 이와 같은 능의 상설 제도는 고려(高麗) 왕릉 중에서 가장 웅장하고 화려한 공민왕(恭愍王)의 현릉(玄陵)을 기본으로 삼아 설치한 것입니다.
 또한 건원릉에는 홍살문(紅살門) 안쪽 정자각 우측 비각(碑閣) 안에 태조의 업적과 명복을 비는 신도비(神道碑)를 함께 세우고 있습니다. 왕릉의 신도비는 태종의
헌릉(獻陵)에도 있습니다.

太祖代의 사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연도

재위

사  료(史料)

1392

1년

7월, 이성계 개성 수창궁에서 즉위

1396

5년

8월, 신덕황후 승하

1393

2년

2월, 국호 조선(朝鮮)으로 정함

1397

6년

9월, 흥천사(興天寺) 창건

1394

3년

10월, 한양(漢陽)으로 천도(遷都)

1398

7년

8월, 1차 왕자의 난 { 정도전,남은 피살 }

1395

4년

9월, 경복궁(景福宮) 완성

9월, 세자 방과에게 전위(傳位)

뒷 이야기
 : 이자춘{추존 환조}과 부인 최씨{추존 의혜왕후}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난 태조 이성계는 왕위에 오른 후에 국호(國號) 변경, 한양(漢陽) 천도(遷都) 등 새로운 왕조의 변화를 시도했지만 권력의 암투(暗鬪)로 인한 자식들의 분란을 당하자 차남 방과{定宗}에게 양위(讓位)하고 상왕(上王)이 됩니다. 그 후 태종이 즉위하자 태상왕으로 지내다가 74세의 나이로 자식은 모두 8남 5녀를 남기고 창덕궁에서 승하{태종 8년}합니다. 정자각 뒤 신도비가 함께 있는 비각
 건원릉에는 다른 왕릉과 다르게 봉분에 보라색 꽃을 피우는 억새풀이 무성하게 자라있습니다. 이는 '함흥차사(咸興差使)'로 유명하듯이 고향인 함흥을 그리워하는 이성계에게 함흥에서 자라는 억새풀로 일종의 의복을 해드렸다는 전설이 전합니다.
 이성계는 역성혁명(易姓革命){위화도회군}으로 새로운 왕조를 세운 인물이었지만 말년의 생활이 자식들의 피를 보는 불우한 일생을 마친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제1대 太祖의 신의왕후(神懿王后) - 제릉(齊陵)

 

 

소재지 : 경기도 개성시 판문군 상도리
사 적 : 북한 소재로 사적 미지정

齊陵의 특징
 : 태조의 정비(正妃)인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1337-1391)의 능인 제릉은 신의왕후가 조선 개국(開國) 이전에 승하(昇遐)했기에 개성 근처에 단릉(單陵)으로 봉릉(封陵)하고 조선 개국 이후에 추존(追尊)하여 제릉(齊陵)으로 명명했습니다.

신의황후 약사(略史)
 : 신의황후는 고려 말기 증 영문하부사(贈領門下府事)인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한경(韓卿)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이성계와의 슬하에 6남{방우, 방과<정종(定宗)>, 방의, 방간, 방원<태종(太宗)>, 방연} 2녀{경신, 경선}를 두고 55세[공양왕 3년]에 승하했습니다.
 처음 시호(諡號)는 태조가 즉위한 후 절비(節妃)라 하였고, 정종(定宗) 대에 신의왕후(神懿王后)로 추존되었고 태종 10년에 종묘(宗廟)에 신주를 부묘했습니다. 근세 대한제국 성립후 1899년{고종(高宗): 광무 3년}에 황후(皇后)로 추존되었습니다.
 

 

 

   제1대 太祖의 계후(繼后) 신덕왕후(神德王后) - 정릉(貞陵)

 

 

정릉 - 신덕황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2동 산 87
사 적 : 제 208 호

貞陵의 특징
 : 태조의 계비(繼妃)였던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 ? -1396)의 정릉은 처음 도성(都城) 안 황화방 북원(皇華坊 北原: 현 중구 정동)에 능을 조성하고 원찰(願刹)로 흥천사(興天寺)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태조 승하 후에 태종 이방원은 태조가 계비 강씨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었던 일{1차 왕자의 난<1398년>}로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도성 밖 양주군[현재의 정릉 자리]으로 능을 옮겼습니다. 또한 종묘(宗廟)에 부묘되지 못했고, 세종 즉위년에는 전세(田稅) 5결(結)을 주고 족친(族親)들에게 제사를 맡기기까지 합니다. 그 후 300년 가까이 방치되다가 현종(顯宗) 10년[1669년]에 종묘(宗廟)에 배향되면서 복구되었습니다.
 다소 초라한 모습으로 병풍석(屛風石)이나 난간석(欄干石), 무인석(武人石) 등이 없이 다른 왕릉에 비해 규모가 작은 것으로 보아 정릉의 수난의 역사를 알 수 있습니다.

神德王后 약사(略史)
 : 고려말 권문세가인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지낸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윤성(康允成)의 딸로 태어난 신덕왕후는 이성계와의 젊은 시절 일화로 유명합니다. 이성계가 호랑이 사냥을 하다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았는데, 우물가의 한 여인에게 받은 바가지에 버들잎을 보고 화를 냈다가 이유를 알고 여인의 지혜에 감탄했다고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슬하에 방번, 방석 2남과 경순공주를 두었는데, 태조의 총애를 받아 조선 건국 후 현비(顯妃)로 책봉되어 조선 최초의 국모(國母)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태종(太宗)의 핍박으로 사후에 무덤이 옮겨져 방치되다가 현종대(顯宗代)에 종묘에 배향되었는데, 제사를 지내는 날 한(恨)을 풀어주는 많은 비가 내려, 이를 신덕왕후의 원한을 씻어주는 비라는 뜻으로 '세원지우(洗寃之雨)'라고 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가끔 찾는 능이기도 한데, 다소 초라한 모습에서 조선 초대 국모(國母)의 위용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왕릉의 모습보다는 주변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의 운동공간이 되어버린 상황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출처ㅡ ]

출처 : 漢字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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