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 수기(修己) 상(上)

 

신이 생각건대 《대학》에 이르기를, “천자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모두 몸을 닦는 것[修身]을 근본으로 삼을 것이니, 그 근본이 어지러우면 말단(末端)이 다스려지는 경우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제왕의 학문에는 몸을 닦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사옵니다.


제1장 총론 수기(總論修己)

신이 생각건대 몸을 닦는 공부에는 지식을 넓히는 것도 있고, 행하는 것도 있사옵니다. 지식은 착한 것을 밝히는 것이요, 행하는 것은 몸을 성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지식과 행하는 것을 종합하여 말한 것을 첫머리에 드러내었습니다.


군자는 덕성(德性)을 높이고 학문을 말미암으며, 광대한 것을 이루고 정밀한 것을 다하며, 높고 밝은 것을 지극히 하고 중용을 행하며 옛것을 익혀서 새것을 알고, 두터운 것을 돈독히 하여 예의를 숭상한다. 《중용(中庸)》

주자가 말하기를, “존(尊)은 공경하여 받든다는 뜻이다. 덕성(德性)은 내가 하늘에서 받은 바른 이치이다. 도(道)는 말미암는다[由]는 뜻이다. 온(溫)은 심온(燖溫)의 온과 같은 것으로, 불[火]이 물건을 익히는 것을 심(燖)이라고 한다. 예전에 배운 것을 또다시 복습(復習)하는 것을 말한다. 돈(敦)은 두터운 것을 더하는 것이다. 존덕성(尊德性)은 마음을 보존하여 도의 체(體)가 큰 데까지 끝까지 하는 것이요, 도문학(道問學)은 지식을 이루어서 도의 체가 세밀한 데까지 다하는 것이다. 한 오라기의 사사로운 뜻으로 스스로 가리지 말아야 하며, 광대함을 이루는 것이다. 한 오라기의 사사로운 욕심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 것이니, 고명(高明)함을 지극히 하는 것이다. 아는 바를 깊이 이해하고 옛것을 익힘이다. 능한 바를 돈독히 하는 것인데, 돈후(敦厚)의 뜻이다. 이것은 모두 마음을 보존하는 일[存心]에 속한다. 이치를 분석하면 호리(毫釐)의 차이도 있지 않게 되며, 정미(精微)함을 다하는 것이다. 일을 처리하면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잘못이 있지 않게 된다. 도중용(道中庸)의 뜻입니다. 이의(理義)는 날마다 알지 못하던 것을 아는 것이고, 지신(知新)입니다. 절문(節文)은 날마다 삼가지 못하는 것을 삼가는 것이니, 숭례(崇禮)입니다. 이것은 다 지식을 이루는 일[致知]에 속한다. 대개 마음을 보존하지 아니하면 지식을 이루지 못할 것이며, 또한 마음을 보존한 자가 지식으로 이루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다섯 구절은 크고 작은 것이 서로 돕고, 처음과 끝이 서로 응한다. 동양 허씨(東陽許氏 허겸(許謙))가 말하기를, “큰 것은 위의 5절을 말한 것이요, 작은 것은 아래의 5절을 말한 것이며, 머리말은 존덕성(尊德性)과 도문학(道問學)의 한 구절을 말한 것이요, 끝의 말은 아래의 4구절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성현이 보여 준 ‘덕에 들어가는 방법’으로 이보다 더 자세한 것이 없으니, 배우는 이들이 마땅히 마음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군자가 글에서 널리 배우고 예로써 요약하면 또한 도에 배치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논어》

주자가 말하기를, “약(約)은 요령의 뜻이요, 반(畔)은 배치 음은 패(佩)이다. 한다는 뜻이다. 군자의 학문은 넓히고자 하기 때문에 상고하지 않는 글이 없고, 도를 지키는 일에서는 그 요령을 취하려고 하므로, 움직일 때는 반드시 예로써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하면 도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면재 황씨(勉齋黃氏 황간(黃榦))가 말하기를, “박(博)은 넓게 취하여 그 넓은 것을 지극하게 하는 것이요, 약(約)은 돌이켜 단속하여 그 요령을 지극히 하는 것이다.” 하였다. ○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글을 널리 배우고 예로써 요약(要約)하지 않으면 반드시 산만한 데 이를 것이다. 널리 배우고 또 예를 지켜 규범[規矩]을 따르게 되면 도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몸을 닦는 공부는 거경(居敬)과 궁리(窮理)와 역행(力行) 세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장에서는 그 실마리를 간략하게 드러내었습니다. 자세한 것은 아래에 있습니다.


제2장 입지(立志)

신이 생각건대 배움에는 뜻을 세우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으니, 뜻이 서지 아니하고 성공한 이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수기(修己) 조목에서 ‘뜻을 세우는 것[立志]’을 우선으로 하였습니다.


입지에 대하여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도에 뜻을 두어야 한다.[志於道]” 하였다. 《논어》

주자가 말하기를, “뜻[志]이라는 것은 마음의 가는 바를 이르는 것이요, 도라는 것은 사람으로서 일상 속에서 마땅히 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알고 마음이 도리로 가면 반드시 나아가는 바가 바르게 되어 다른 길에 현혹됨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 진씨(眞氏 진덕수(眞德修))가 말하기를, “뜻이라는 것은 덕에 나아가는 기초이다. 성현이 여기서 시작하여 멀어도 도달하지 아니하는 것이 없으며, 단단해도 파고들지 못하는 것이 없다. 선과 악 두 갈래는 오직 도(道)냐 이(利)냐에 달려 있을 뿐이니, 도에 뜻을 두면 곧 이(理)와 의(義)가 주재가 되어 물욕이 뜻을 옮기지 못할 것이며, 이(利)에 뜻을 두면 물욕이 주재가 되어 이와 의가 파고들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요(堯)와 걸(桀), 순(舜)과 척(蹠)이 서로 차이가 나는 까닭이니 어찌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 북계 진씨(北溪陳氏 진순(陳淳))가 말하기를, “도에 뜻을 두는 것은 마음이 완전히 도를 향하는 것이니, 만약 하다가 말든지 물러서서 다른 데로 가 버릴 의사가 있다면 뜻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하였다.


맹자께서 성품은 착하다[性善]고 하시되, 말했다 하면 반드시 요순(堯舜)을 일컬었다. 《맹자》 아래도 이와 같다.

주자가 말하기를, “도라는 것은 말한다는 뜻이다. 성(性)이라는 것은 사람이 하늘에서 받아 태어나는 이치로, 완전히 지극히 착해서 악이 있었던 적이 없다. 처음에는 보통 사람도 요순과 조금도 차이가 없었으나 다만 보통 사람은 사사로운 욕심에 빠져 착한 성품을 잃었고, 요순은 사사로운 욕심에 가려지지 않아 그 성품을 확충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맹자는 성(性)은 착하다고 말하면서 반드시 요순을 일컬어서 실증하였다. 이는 인의(仁義)는 밖에서 구할 것이 아니며, 성인도 배워서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여,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도록 하려고 한 것이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사람은 모름지기 성현과 같이 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아야 하는데,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성현은 고상하고 자신은 비천하다고 보아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이는 타고난 성품은 사람마다 다 같음을 모르는 것이니, 어찌 성현처럼 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안연(顔淵)이 말하기를, “순(舜)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순과 같은 일을 하면 역시 순과 같이 된다.” 하였다.

주자가 말하기를, “사람이 능히 그와 같이 할 수 있다면 모두 순과 같이 된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분발하여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 일상생활하는 사이에 한 오라기의 사사로운 욕심도 남겨 두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분발하여 신속(迅速)하게 흥기(興起)함이 있으면 자리가 잡혀 공부를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이것은 기름에 그림을 그리고 얼음에 조각을 하는 것과 같아서 진실로 힘을 얻을 곳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반드시 스스로 정확하고 평온하게 공부에 착수해야 할 것이요, 그저 주야로 생각만 하면서 내가 하는 바를 순(舜)이 하는 바와 비교하면서 순만 못하다고 서둘며 걱정할 일이 아니다. 마치 병든 사람이 올바르게 순서를 밟아 약을 먹어서 점차로 요양하고 치료해서 몸이 점점 충실해져 보통 사람과 같이 된 뒤에야 그만두는 것과 같으니, 어찌 환약 한 알, 가루약 한 봉으로, 하루아침에 효과를 보기를 바라며 보통 사람만 못한 것을 괴상하게 여겨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 또 배우는 이에게 가르쳐 말하기를, “글을 기억하지 못할 때에는 숙독(熟讀)을 하면 기억하게 될 것이고, 뜻이 정밀하지 못할 때에는 세밀히 생각하면 정밀해질 것이다. 그러나 뜻이 서지 않으면 바로 힘을 쏟을 곳이 없다. 지금 이익이나 국록만을 탐내면서 도의를 구하지는 않고, 귀한 사람이 되기는 바라면서 좋은 사람이 되기는 바라지 않으니, 모두 뜻이 서지 못한 병통이다. 모름지기 반복해서 생각하여 병통을 찾아보고, 용감히 분발하여 성현의 말한 모든 말들이 한 가지도 진실한 말이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비로소 뜻을 세울 수 있다. 여기서 공부를 쌓아 꾸준히 향상해 가면 큰 성과가 있을 것이니, 여러분들은 힘쓸지어다.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하였다.

이상은 입지에 대해 널리 말씀드렸습니다.


 

입지의 절목(節目)에 대하여


천지를 위하여 마음을 세우고, 백성을 위하여 도(道)를 세우며, 옛 성인을 위하여 끊어진 학통을 잇고, 오랜 세상[萬世]을 위하여 태평 시대를 열었다. 《횡거문집(橫渠文集)》

섭씨(葉氏 섭식(葉湜))가 말하기를, “천지는 만물을 낳고 또 낳는 것을 마음으로 삼으니, 성인이 천지의 화육(化育)에 참여하여 도와주어 만물로 하여금 각각 그 성명(性命)을 바르게 하는 것은, 천지를 위하여 마음을 세우는 것이요, 의리를 밝히고 강상(綱常)을 붙들어 세우는 것은 백성을 위하여 도를 세우는 것이다. 끊어진 학통을 잇는다는 것은 도통(道統)을 이어 서술하는 것을 이르는 것이요, 태평 시대를 연다는 것은 왕 노릇 할 자가 일어나 반드시 와서 법을 취하여 공리(公利)와 혜택을 만세에 드리우는 것이니, 배우는 자가 이것으로 뜻을 세우면 맡은 바가 지극히 크고 마음에 보존한 바가 지극히 공평할 것이다.” 하였다. ○ 정자가 말하기를, “임금의 도가 위여한 것은 옛일을 상고하여 학문을 바로 세우고 선악의 귀추를 밝히고,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여서 밝게 도의 바른 곳으로 나아가는 데 있다. 그러므로 임금의 뜻이 먼저 정해져야 하는 것이니, 임금의 뜻이 먼저 정해져야만 천하의 다스림이 이루어진다. 이른바 뜻을 정한다는 것은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뜻을 정성스럽게 하여 착한 것을 가려서 견고히 잡는 것이다. 먼저 의리를 다하지 않으면 많이 듣더라도 마음이 현혹되기 쉽고, 먼저 뜻을 정하지 않으면 착한 것을 지키더라도 이탈하기가 쉽다. 오직 성현의 교훈을 반드시 따르고, 선왕(先王)의 다스림을 반드시 본받아 후세의 혼탁한 정치에 휘둘리지 않고, 세속의 구태의연한 의논에 현혹되지 않으며, 스스로를 지극히 밝게 알고 도를 지극히 독실히 믿으며, 어진 이에게 맡기되 망설이지 말고 삿된 것을 버리되 의심하지 말아서, 반드시 삼대(三代)의 융성한 때와 같은 세상을 만든 뒤에야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것은 임금이 뜻을 세우는[立志] 것에 대해 말한 것이지만 또한 배우는 사람에게도 절실한 것이다.

이상은 입지(立志)의 절목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입지의 공효(功效)에 대하여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인(仁)이 멀리 있는 것이겠는가? 내가 어질고자 하면 바로 인(仁)이 이르게 된다.” 하였다. 《논어》 아래도 이와 같다.

주자가 말하기를, “인(仁)이라는 것은 마음의 덕으로서, 마음 밖에 있는 것은 아니다. 놓아 버리고 구하지 않기 때문에 멀다고 하는 이가 있는 것이니 돌이켜 구하면 바로 여기에 있으니 어찌 멀다 하겠느냐.” 하였다.

○ 정자가 말하기를, “인(仁)을 행하는 것은 자기에게 달려 있어, 이것을 행하려고 하면 곧 이르게 되니, 어찌 먼 데 있겠는가.” 하였다.


진실로 인(仁)에 뜻을 두면 악한 것이 없어진다.

주자가 말하기를, “구(苟)는 ‘진실로’라는 뜻이다. 그 마음이 진실로 어질면 반드시 악한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양기(陽氣)가 발하는 곳에서는 쇠나 돌도 뚫을 수가 있고, 정신이 하나로 모이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는가. 주자(朱子)의 말씀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세속의 학문이 성현과 같지 않은 까닭은 알기 어렵지 않다. 성현은 한다고 하면 진실로 한다. 정심(正心)을 말하면 바로 마음을 바르게 하기를 구하고, 성의(誠意)를 말하면 바로 뜻이 성실해지기를 구한다. 수신(修身)과 제가(齊家)도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의 배우는 사람들은 정심을 말하면 다만 정심을 그냥 한 번 입으로만 말하고 말고, 성의를 말하면 또 성의를 그냥 한 번 입으로만 떠들며, 수신을 말하면 또 성현들이 수신에 대해 허다하게 말한 것을 가지고 입으로만 떠들 뿐이다. 혹 옛 언어나 주워 모으고, 또 시속의 글이나 주워 엮기도 하니, 이 같은 학문을 하고서야 자신에 대하여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이 점을 마음에 새기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지금 사람들 중에도 진실로 성현의 학문 듣기를 즐기면서도, 끝내 세속의 비루함을 버리지 못하는 자가 있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다만 뜻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배우는 자는 뜻을 세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 배웠다 하면 바로 성인이 되기를 바라야 한다.” 하였다. ○ 정자가 말하기를, “세속에는 조화(造化)의 힘을 뺏는 세 가지 일이 있으니, 나라를 위하여 나라의 운명이 영원하기를 하늘에 기도하는 것과, 몸을 잘 보양하여 오래 사는 데 이르는 것과, 배워서 성인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일은 분명히 사람의 힘으로 조화를 이겨 낼 수가 있는 것인데 사람이 이것을 하지 않을 뿐이다.” 하였다.

이상은 입지(立志)의 공효(功效)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입지의 반대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스스로 해치는[自暴] 자와는 더불어 말할 수 없고, 스스로 버리는[自棄] 자와는 더불어 일할 수 없다. 예의를 그르다고 말하는 것을 스스로 해친다 하고, 나의 몸은 어진 데 처할 수도 의(義)를 행할 수도 없다고 하는 것을 스스로 버린다고 한다.” 하였다. 《맹자》 아래도 이와 같다.

주자가 말하기를, “포(暴)라는 것은 해친다는 뜻이요, 비(非)라는 것은 비방한다는 뜻이다. 스스로 자신을 해치는 이는 예의가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고 비방하고 헐뜯으니, 그와 함께 말하더라도 반드시 믿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버리는 이는 그래도 인의(仁義)가 아름다운 줄을 알고는 있으나, 게으른 데 빠져서 스스로 분명 못할 것이라 여기니, 그와 함께 무슨 일을 하여도 반드시 힘을 다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 정자가 말하기를, “사람이 선(善)으로써 스스로 다스리면 착한 데로 옮겨가지 못할 것이 없으니, 아주 어리석은 이라도 모두 차츰차츰 연마하여 나아갈 수 있다. 오직 스스로 해치는 이는 물리치고 믿지 않고, 스스로 버리는 이는 몰라라 하고 실행하지 않으니, 성인과 함께 있더라도 감화되어 선한 경지로 들어갈 수 없다. 이것이 이른바 너무 어리석은 자는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1등(等)은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2등을 하겠다고 하지 말라. 만일 이러한 말을 한다면 이것이 스스로 버리는 것이다. 배움으로 말하자면 도에 뜻을 두어야 하고, 사람으로 말하자면 성인에 뜻을 두어야 한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일생을 게을리하는 것은 스스로 해치고 스스로 버리는 것이다.” 하였다. ○ 명도(明道) 선생이 신종(神宗)에게 다스리는 도리를 적극 아뢰자, 신종이 이르기를, “이것은 요순의 일인데, 짐(朕)이 어찌 감히 감당하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명도는 슬픈 표정으로 아뢰기를, “전하의 이런 말씀은 종사(宗社)와 생민(生民)에게 복된 것이 아니옵니다.” 하였다.


인(仁)은 사람의 편안한 집이요, 의(義)는 사람의 바른길이다. 편한 집을 비워 두고 거처하지 아니하며, 바른길을 버리고 행하지 아니하니, 불쌍하구나.

주자가 말하기를, “인은 마음 전체의 덕으로서, 천리(天理) 자연의 편안함이 있고, 사람의 욕심에 빠질 위태로움은 없으니, 사람은 항상 그 가운데 있어야 하고 잠시라도 떠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편안한 집이라 하였다. 의(義)라는 것은 마땅함이니, 마땅히 행할 천리요, 간사하고 잘못된 사람의 욕심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를 바른길이라 한 것이다. 광(曠)은 비었다[空]는 뜻이고 유(由)는 행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도가 본래 고유한 것인데, 사람이 스스로 끊으니 이것이 불쌍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현의 깊은 훈계로, 배우는 이가 철저히 성찰해야 할 바이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뜻이란 기(氣)를 거느리는 것이니, 뜻이 전일하면 기가 동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배우는 이가 종신토록 글을 읽어도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다만 뜻이 서지 않아서 일 뿐입니다. 뜻이 서지 않은 데는 세 가지 병통이 있으니, 첫째는 믿지 않아서요, 둘째는 지혜롭지 못해서요, 셋째는 용감하지 못해서입니다. ‘믿지 못한다는 것’은 성현이 후학(後學)에게 밝게 알려 준 것이 명백하고도 친절하여 그 말에 따라 순서대로 나아가기만 하면 성인도 되고, 현인도 되는 것은 이치상 당연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일을 하고도 그런 공이 없는 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저 믿지 못하는 이는 성현의 말이 사람들에게 권유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라 생각하고, 다만 그 글을 음미만 할 뿐, 몸으로 실천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현의 글을 읽으면서도 세속의 행위를 일삼고 있습니다.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은 사람이 타고난 기품이 천차만별이지만 아는 데 힘쓰고 행하는 데 힘쓰면 성공하는 것은 다 같습니다. 뛰며 장사 지내는 놀이[踊躍築埋]를 한 것은 맹자의 유희였지마는 마침내 아성(亞聖 성인에 버금가는 분)이 되었고, 저물녘 돌아오고 사냥하는 것을 보고 기쁜 마음이 든 것[暮歸喜獵]은 정자의 버릇이었지마는 마침내 큰 현인이 되었으니, 어찌 반드시 나면서부터 알아야만 덕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지혜롭지 못한 자들은 자기의 자질이 아름답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뒤로 물러나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니, 나아가면 성인도 되고 현인도 되지만, 뒤로 물러나면 어리석은 자가 되고 못난 자가 되니, 이 모두가 자기가 행한 바라는 것을 너무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성현의 글을 읽으면서도 몸가짐은 기품에 구애되는 것입니다. ‘용감하지 못하다’는 것은 사람들이 성현은 우리를 속이지 아니한다는 것과 기질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 조금 알면서도, 다만 하던 대로 안주해 버리고 분발(奮發)하고 진작(振作)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어제 한 일을 오늘 개혁하기를 어렵게 여기고, 오늘 좋아하는 일을 내일 고치기를 꺼리는 것입니다. 이같이 하던 대로 답습하면서 한 치를 나아가면 한 자씩 후퇴하니, 이것은 용감하지 못한 데서 오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현의 글을 읽으면서도 전날의 습관에 젖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이 세 가지 병통이 있기 때문에 군자가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육적(六籍)은 빈말이 되고 마는 것이니, 이 얼마나 탄식할 노릇입니까.

진실로 성현의 말을 깊이 믿어 좋지 않은 자질을 바로잡되 진실로 백배 천배 노력하여 끝까지 물러나는 일이 없게 되면, 큰길이 앞에 나타나서 성인의 경지를 직접 가르쳐 줄 것이니, 어찌 도달하지 못한다고 근심하겠습니까. 대개 사람은 작은 몸으로 천지와 함께 나란히 서서, 학문의 공업을 통해 만물이 제자리를 잡고 자라나도록 하는 것을 능사(能事)로 삼습니다. 그러므로 필부(匹夫)라도 그 임금을 얻게 되면, 오히려 한 사람이라도 혜택을 입히지 못할까를 걱정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임금은 군사(君師)의 지위를 겸하여 가르치고 길러 주는 책임을 지고 세상의 표준이 되었으니, 그 책임이 얼마나 중하겠사옵니까. 한 번의 어긋난 생각이 정사를 그르치고 한마디 실수가 일을 망치게 하옵니다. 도에 뜻을 두고 도를 따르면 이로 인해 한 세상을 요순 시대로 만드는 것도 나로부터 말미암는 것이요, 욕심에 뜻을 두고 물욕을 따르면 이로 인해 한 세상을 말세(末世)로 만드는 것도 나로부터 말미암는 것입니다. 임금은 뜻이 향하는 바를 더욱 삼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설 문청(薛文淸)이 말하기를, “내 마음이 진실로 학문에 뜻을 둔다면 하늘이 나의 소원을 이루어 줄 것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학문에 진전이 없는 것은 대개 하던 대로 따르는 데에서 말미암는 것이다.” 하였으니, 삼가 살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시옵소서.


제3장 수렴(收斂)

신이 생각건대, 경(敬)이라는 것은 성학의 처음이자 끝입니다. 그러므로 주자가 말하기를, “경을 지니는 것은 궁리(窮理)하는 근본이니, 아직 깨닫지 못한 이는 경이 아니면 알 수 없다.” 하였고, 정자가 말하기를, “도에 들어가는 데는 경만한 것이 없으니, 앎을 지극히 하면서 경에 있지 않은 이는 없다.” 하였으니, 이것은 경이 학문의 시작임을 말한 것입니다. 주자가 말하기를, “이미 도를 안 자도 경이 아니면 지킬 수 없다.” 하였고, 정자가 말하기를, “경과 의(義)가 바로 서면 덕이 외롭지 아니한 것이니 성인이라도 이러할 뿐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경이 배움의 끝임을 말한 것입니다. 이제, ‘경이 학문의 시작이라는 것’을 가져다 궁리장(窮理章) 앞에 놓고 이것을 수렴(收斂)이라고 제목하여 《소학(小學)》의 공부로 삼으려고 하옵니다.


 

몸가짐[容止]을 수렴하는 것에 대하여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군자는 무겁지[重] 아니하면 위엄이 없고, 배워도 견고[固]하지 못하게 된다.” 하였다. 《논어》

주자가 말하기를, “중(重)은 매우 무겁다는 뜻이요, 위(威)는 위엄의 뜻이고, 고(固)는 견고하다는 뜻이다. 겉으로 가벼우면 반드시 내면이 견고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매우 무겁지 않으면 위엄도 없고, 배운 바도 견고하지 못하다.” 하였다. ○ 장자(張子)가 말하기를, “의리의 학문은 모름지기 깊이 생각을 해야 비로소 나아감이 있을 것이요, 얕고 경망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군자의 용모는 여유롭고 느긋하게[舒遲] 지니되 존경할 사람을 보면 조심하고[齊] 재계(齋戒)하는 것이다. 삼간다. 《예기》 아래도 이와 같다.

진씨(陳氏)가 말하기를, “서지(舒遲)는 여유 있고 느긋한 모양이다. 제(齊)는 기기제율(蘷蘷齊慄)의 제(齊) 자와 같고, 속(遬)은 삼가고 방종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였다.


발걸음은 무겁게 떼고, 손 모양은 공손하게 하며 눈 모양은 단정하게 하며, 입 모양은 다물며, 말소리는 고요하게 하며, 머리 모양은 반듯하게 하고, 숨쉬기는 안정되게 하며, 선 자세는 덕스럽게 하고, 얼굴빛은 씩씩하여야 한다.

진씨(陳氏)가 말하기를, “중(重)은 가볍게 옮기지 않는다는 것이요, 공(恭)은 태만하지 않은 것이요, 단(端)은 흘겨보지 않는 것이요, 지(止)는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요, 정(靜)은 침을 튀기거나 기침을 하지 않는 것이요, 직(直)은 머리를 기울이거나 돌리지 않는 것이요, 숙(肅)은 숨 쉬지 않는 것처럼 하는 것이요, 덕(德)은 기대지 않고 똑바로 서 있어 엄연하게 덕이 있는 기상이요, 장(莊)은 긍지가 있는 모양이다.” 하였다. ○ 어떤 사람이 묻기를, “사람이 한가하게 있을 때에 몸가짐은 게으르더라도 마음이 거만하지만 않으면 괜찮지 않습니까?” 하니, 정자가 대답하기를, “어찌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은 자세에서 마음이 거만하지 않은 이가 있겠는가. 옛날에 여여숙(呂與叔 여대림(呂大臨))이 6월에 구지(緱氏)로 찾아왔는데, 한가로이 거할 때 가만히 보더라도 반드시 엄연히 꿇어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으니 뜻이 돈독하다고 할 것이다. 학자는 모름지기 공경해야 하지만 얽매여서는 안 되니, 얽매이면 오래가기가 어렵다.” 하였다. ○ 요진경(廖晉卿 주자의 문인)이, “무슨 책을 읽어야 할지요?” 하고 물으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공의 마음이 흩어진 지 이미 오래이니, 먼저 정신을 가다듬고, 《예기》 〈옥조(玉藻)〉의 구용(九容)을 자세히 체득하여 뜻이 선 뒤에 글을 읽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경(敬)을 말하는 이는 이 마음을 간직하면 자연히 이치에 맞을 것이라고만 말하고, 용모와 사기(辭氣)에 대해서는 전혀 공부를 하지 않곤 한다. 설사 참으로 이렇게 해서 무언가를 얻는다 한들 또한 석가나 노자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더구나 마음과 생각이 황홀해서 꼭 참으로 마음으로 보존하지도 못하는 경우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하였다. ○ 절효(節孝) 서공(徐公 서적(徐積))이 처음에 안정(安定) 호 선생(胡先生 호원(胡瑗))을 모시고 배웠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처음 선생을 뵐 적에 머리 모양이 조금 기울어 있었는지, 안정 선생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말씀하기를, ‘머리 모양을 곧게 하라.[頭容直]’고 하셨다. 내가 스스로 생각해 볼 때 머리 모양만 곧게 할 것이 아니라, 마음도 역시 곧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이로부터는 감히 사심(邪心)을 갖지 않았다.”고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이 선생(李先生 이동(李侗))은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있어도 모습이 맑고 밝아 조금도 흐트러진 기색이 없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종일토록 빠른 말과 급한 기색이 없다.’ 하였는데, 그가 참으로 이러하였다. 보통 사람들은 가까운 데를 갈 때에는 반드시 천천히 걷다가도, 먼 데를 갈 때에는 여지없이 점점 급하게 걷지마는, 선생은 가까운 데를 가든 먼 데를 가든 이와 같이 느긋하였다. 보통 사람들은 사람을 불러서 오지 않으면 반드시 소리를 지르나, 선생은 불러서 오지 않더라도 전에 부르던 것보다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또 보통 사람들은 앉은 곳 벽에 글자가 있으면 머리를 들어 한 번 보는데, 선생은 그렇지 않아서 앉아 있을 때에는 보지 않고, 보고자 하면 반드시 일어나 벽 아래에 나아가서 보았으니, 그 사물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 대개 이러하였다.”고 하였다. 연평(延平) 선생은 본래 함양(涵養)한 것이 순수하고 성숙하여 그렇게 된 것이나, 처음 배우는 이도 마땅히 이것을 법으로 삼아야 한다.

이상은 몸가짐을 수렴함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언어(言語)를 수렴하는 것에 대하여


○ 《시경》에, “네가 말하는 것을 삼가고 너의 몸가짐을 공경스럽게 하여, 편안하고 착하게 하라. 흰 옥[白圭]의 티끌은 갈면 되지마는 말의 티끌은 어찌할 수도 없는 것이다. 경솔하게 말하지 말고 구차하게 말하지 말라. 나의 혀를 잡아 줄 이가 없으니, 함부로 말을 내뱉지 말라.” 하였다. 〈대아(大雅) 억(抑)〉

주자가 말하기를, “유(柔)는 편안한 것이요, 가(嘉)는 착한 것이요, 점(玷)은 이지러진 것이다. 이(易)는 가벼운 것이고, 문(捫)은 잡는 것이요, 서(逝)는 가는 것이다. 말을 삼가야 한다는 것이니, 대개 구슬에 있는 흠은 갈아서 반반하게 할 수 있지마는 말은 한 번 실수하면 구제할 수가 없고, 나를 위하여 혀를 잡아 줄 이도 없다. 그러므로 말은 나에게서 나와 실수하기가 쉬운 것이니, 항상 잡아서 놓지 않아야 한다고 한 것이다. 그 훈계가 깊고 간절하다 하겠다.” 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왕의 말이 가는 실과 같다면 그 공효는 인끈[綸]과 같고, 왕의 말이 인끈과 같다면 그 공효는 상여 줄[綍]과 같은 것이다.” 하였다. 발(綍)은 불(弗)과 같다. ○ 《예기(禮記)》

진씨(陳氏)가 말하기를, “윤(綸)은 인끈[綬]이요, 발(綍)은 관(棺)을 매는 큰 줄이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이것은 왕의 말씀은 작은 것이라도 그 이해(利害)의 공효는 매우 큰 것이오니, 반드시 삼가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옵니다.


군자는 방에 앉아서 말을 하여도 그 말이 착하면 천 리 밖에서도 응하니, 가까운 데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방에 앉아서 말을 하여도 그 말이 착하지 않으면 천 리 밖에서도 어기니, 가까운 데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말은 몸에서 나와 백성에게 미치고, 행동은 가까운 데서 나와 먼 곳에 나타나는 것이니, 말과 행동은 군자의 추기(樞機)이다. 추기가 발하는 것이 영욕(榮辱)을 주재하게 된다. 말과 행동은 군자가 천 리를 움직이는 것이니, 어찌 삼가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주역(周易)》 〈계사(繫辭)〉 ○ 역시 공자의 말씀이다.

절재 채씨(節齋蔡氏 채연(蔡淵))가 말하기를, “말이란 마음의 소리요, 행동이란 마음의 자취이니, 말과 행동이 바로 감응하는 추기이다. 착한 것은 이치이고 착하지 않은 것은 이치에 어그러진 것이다.” 하였다. 군자의 말과 행동이 착하면 화(和)한 기운이 응하고, 착하지 않으면 어그러진 기운이 응하기 때문에, 화한 것이 지극하면 천지가 편안하고 만물이 생육하며, 어그러진 것이 지극하면 천지가 막히고 어진 이가 숨는다. 그러므로 “천지를 움직인다.” 한 것입니다.

이상은 언어를 수렴함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마음[心]의 수렴에 대하여


오만함은 자라나게 해서는 안 되고 욕심은 내키는 대로 두어서는 안 되며, 뜻은 가득 채워서는 안 되고 즐거움은 끝까지 채워서는 안 된다. 《예기》

응씨(應氏)가 말하기를, “공경의 반대가 오만이요, 정(情)이 움직이는 것은 욕심이다. 뜻이 다 차면 넘치고 즐거움이 지극하면 도리어 슬픔이 온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뜻이 가득 찬다[志滿]’는 것은 적게 얻은 것에 만족하여 우쭐대며 스스로를 대단하다 여기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닭이나 개가 달아나면 구(求)할 줄을 알면서도 마음을 놓쳐 버리고서는 구할 줄 모른다. 학문의 도란 다른 것이 아니다. 그 놓쳐 버린 마음을 구하는 것일 뿐이다.” 하였다. 《맹자》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마음은 지극히 중요한 것이고 개와 닭은 지극히 하찮은 것인데, 개와 닭을 풀어 놓은 것은 구할 줄 알면서 마음을 놓쳐 버리고는 구할 줄을 모르니, 어찌 지극히 하찮은 것은 아끼면서 지극히 중요한 것은 잊어버리는가. 이것은 생각을 하지 않아서 그럴 뿐이다.”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학문하는 길은 진실로 한 가지만은 아니지만 그 도는 놓쳐 버린 마음을 구하는 데 있을 뿐이다. 능히 이같이 한다면 지기(志氣)가 환하게 밝아지고 의리가 환하게 드러나서 높은 경지에까지 이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아니하면 어두워지고 방탕해져서 배움에 종사한다 하더라도 마침내 밝게 트이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자가 말하기를, ‘성현의 수많은 말들이 다만 사람이 놓쳐 버린 마음을 거두어들여 몸으로 되돌아 들어오게 해서, 스스로 향상해 가서 아래로부터 배워 위에 이르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맹자가 처음으로 이르신 절실한 말인데, 정자가 또 발명하여 그 뜻을 자세히 한 것이니, 배우는 이는 마땅히 마음에 간직하고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맹자는 ‘학문의 도는 단연코 놓쳐 버린 마음을 구하는 데 있다’고 하였으니, 배우는 이는 모름지기 먼저 그 놓쳐 버린 마음을 수습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마음이 풀어져 버려 널리 배우는 일에도 등한해지고 자세히 따져 묻는 일에도 등한해질 것이니, 어떻게 밝게 분변하고 독실히 행할 수 있겠는가? 대개 몸은 집과 같고, 마음은 집주인과 같으니, 집주인이 있어야 문 앞에 물을 뿌리고 쓸며 집안일을 정돈할 수 있다. 만약 주인이 없다면 이 집은 그저 황폐된 집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이른바 마음을 놓쳐 버린다는 것은 마음이 딴 곳으로 도망쳐 가는 것이 아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문득 사라졌다가 막 정신을 차리고 보면 또 이내 눈앞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수습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끌어당기면 바로 보이는 것이다. 만일 마음을 수습하여 의리 위에 안정되게 두고, 이것저것 요란한 생각을 하지 않고서 오래가다 보면 저절로 물욕은 적어지고 의리는 두터워질 것이다.” 하였다.

이상은 마음을 수렴함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거경이 궁리의 근본이 됨에 대하여


함양(涵養)은 모름지기 공경스런 태도로 해야 한다. 학문으로 나아가는 것은 앎을 끝까지 다하는 데 있다. 《정씨유서(程氏遺書)》 ○ 이천(伊川) 선생의 말씀이다.

정자가 말하기를, “근본을 먼저 북돋운 뒤에 방향을 세울 수 있으니, 방향이 바로 서고 나면, 목적한 바를 이루는 수준은 힘써 행하느냐 힘써 행하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 하였다. 섭씨(葉氏)가 말하기를, “마음의 덕을 길러서, 근본을 깊고 두텁게 한 뒤라야 방향을 세워도 어긋나지 않으며, 또 쉬지 않고 힘써야 깊은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배우는 이는 모름지기 공경스레 이 마음을 지키되, 급박하게 해서는 안 되고, 마땅히 깊고 두텁게 배양하여 그 속에 깊이 잠긴 뒤라야 스스로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절박하게 구하면 단지 자신을 삿되게 할 뿐이어서, 결국 도에 이르지 못한다.” 하였다.

주자가 말하기를, “함양(涵養)이라는 절목을 옛날 사람은 바로 《소학》에서부터 함양하여 성취하였다. 그러므로 《대학》의 도는 다만 격물(格物)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그런데 지금 사람은 전날의 이런 공부에는 따르지 않고 《대학》의 격물 공부만 우선으로 쳐서 다만 생각이나 지식만으로 구하려 하고, 다시 마음을 잡아 두는[操存] 데는 힘쓰지 않는다. 그러니 비록 헤아려서 십분 터득했다 하더라도 실지로는 의거할 데가 없을 것이다. 대개 경(敬) 자는 위로도 통하고 아래로도 통하는데, 격물치지(格物致知)는 그 사이의 절차로서 나아가는 곳이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지금 사람은 모두 근본적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아 경(敬) 자를 가져다 말만 할 뿐, 실행해 나가지를 않는다. 근본이 서 있지 않기 때문에 기타 사소한 공부가 귀결할 곳이 없게 된다. 명도(明道)와 연평(延平) 모두 사람들에게 정좌(靜坐)를 가르치셨으니, 보아 하건대 모름지기 정좌를 해야 한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마음이라는 것은 지극히 텅 비어 있고 신령하면서도 헤아릴 수 없이 신령스러워, 항상 한 몸의 주재가 되어, 만 가지 일의 벼리[綱]가 되니 잠시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내달려 날아가 버려 외물을 향해 물욕을 따른다면, 몸의 주재가 없어지고 만 가지 일에 벼리가 없어져서, 비록 굽어 쳐다보고 돌아보는 사이에도 자기가 어디 있는 줄도 스스로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더구나 성인의 말씀을 반복하고 사물을 참고하여 의리의 마땅한 귀결을 구하는 일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진실로 능히 공경하고 조심해서 항상 이 마음을 보존하며, 종일토록 엄숙한 태도로 물욕에 빠지는 바가 되지 아니한다면, 곧 이것으로 독서도 하고 이것으로 이치도 관찰하여, 어딜 가든 통하지 않는 곳이 없을 것이고, 이것으로 사물에 응접하면 어떤 일이건 마땅하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공경함에 거하고 뜻을 간직하는 것이 글을 읽는 데에 근본이 되는 까닭이다.” 하였다. ○ 설씨(薛氏)가 말하기를, “고요한 가운데 무한한 묘리(妙理)가 모두 나타난다.” 하였다.

○ 신이 생각건대, 남당(南塘) 진백(陳栢)이 지은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은 배우는 자들이 받아들이기에 매우 절실합니다. 그러므로 삼가 아래에 기록합니다. 수렴하는 데 가장 힘이 될 것입니다.

잠(箴)에 이르기를, “닭이 울면 잠에서 깨어 생각이 점점 흩어진다. 그사이에 어찌하여 담담하게 정돈하고서 옛 허물을 반성하거나 새로 터득한 것을 실마리로 삼아 차근차근 조리(條理)를 잡고 분명하게 마음속으로 이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상은 일찍 잠에서 깨어났을 때를 말한 것입니다. 근본이 섰거든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빗질하고 의관을 갖추고서, 단정히 앉아서 몸가짐을 가다듬고, 솟아나는 해처럼 밝게 마음을 추스려 엄숙하게 정제(整齊)하여 밝게 비우고 고요히 하나로 모으라. 이상은 새벽에 일어났을 때를 말한 것입니다. 이에 책을 펴서 성현을 대한다면, 공자가 앉아 있고 안(顔)ㆍ증(曾)이 앞뒤에 있을 것이니, 성사(聖師)께서 말씀하신 자세한 내용을 경청하고 제자들이 묻고 변론한 것을 반복해서 참작하여 바르게 판단하라. 이상은 독서를 말한 것입니다. 일이 생기면 바로 응하여 밝은 명령[明命]이 빛나서 항상 눈앞에 있는 것을 증험할 것이며, 일에 다 응하고 나면 예전대로 마음이 담담해져 정신을 모으고 생각을 쉬게 할 것이다. 이상은 일에 응하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동정(動靜)의 순환을 마음으로 살피어 고요할 때 보존하고 움직일 때 살펴서 두 갈래 세 갈래로 갈라지지 않게 하라. 글을 읽은 여가에는 여유를 갖고 정신을 이완하고 성정(性情)을 기르라. 이상은 온종일 부지런함[日乾]을 말한 것입니다. 날이 저물면 사람이 게을러져서 혼미해지기 쉬우니, 단정히 재계하고서 정신을 밝게 떨쳐 일으키라. 밤이 이슥하면 잠자리에 들되, 손발을 가지런히 모으고서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심신(心神)이 잠들 수 있게 한다. 이상은 저녁에 조심함[夕惕]을 말한 것입니다. 밤의 원기(元氣)를 기르면 정(貞)하면 근본[元]으로 돌아갈 것이니 생각을 여기에 두어 밤낮으로 부지런히 힘쓰라.” 하였습니다. 이상은 숙야(夙夜)를 겸해서 말한 것입니다.

신이 생각건대 놓쳐 버린 마음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학문의 기초입니다. 대개 옛사람은 제 스스로 밥 먹고 말할 수 있을 때부터 바로 가르쳐서 행동마다 잘못이 없게 하고, 생각마다 지나친 것이 없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양심을 기르고 그 덕성(德性)을 높였던 것입니다. 어느 때 어느 일이라도 그렇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공부가 여기에 의거하여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이런 공부는 하지 않고 바로 이치를 궁구하고 몸을 닦는 공부에 종사하려 합니다. 그러다 보니 마음이 혼란스러워지고 행동이 규범에 어긋나서, 그 공부가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해 결코 성공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정(先正)께서 사람들에게 정좌(靜坐)하는 것을 가르치시고, 또 구용(九容)으로 몸가짐을 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배우는 자가 가장 먼저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좌라는 것 역시 일이 없을 때를 가리킨 것이니, 만일 사물에 응접할 때라면 정좌하는 것에 집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임금의 한 몸에는 온갖 긴요한 일들이 몰려드니, 만일 일 없을 때를 기다려 정좌한 뒤에야 학문하는 게 된다고 한다면 아마 그렇게 될 때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움직일 때와 고요할 때를 막론하고 이런 마음을 잊지 않고 마음 지키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노재(魯齋) 허형(許衡)이 말한 바와 같이 천만인 가운데 있더라도 항상 자기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일이 없을 때에는 텅 빈 고요함으로 자기의 본체[體]를 기를 수 있고, 일이 있을 때에는 밝게 살펴서 마음의 쓰임을 바르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상의 학문의 근본이 여기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현의 가르침은 환하여 속이지 아니하는 것이오니, 이 점을 유념하시기를 바라옵나이다.


제4장 궁리(窮理)

신이 생각건대, 수렴(收斂)한 뒤에는 이치를 궁구하여 앎을 지극히 해야 하기 때문에 궁리(窮理)를 그다음에 두었습니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대개 한 가지 물(物)에는 한 가지 이치가 있는데, 모름지기 그 이치를 궁리하여 이루어야 한다. 궁리하는 데도 많은 실마리가 있는데, 책을 읽어 의리를 해명하기도 하고, 옛날이나 지금의 인물을 논하여 그 시비를 분별하기도 하며, 사물에 응하고 접하여 무엇이 마땅한지에 따라 처리하는 것이 모두 궁리이다.” 하였습니다. 궁리하는 공부는 대략 이러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궁리(窮理)와 용공(用功)에 대하여


자하(子夏)가 말하기를, “널리 배우고 뜻을 돈독하게 하며, 절실하게 묻고 가까이서부터 생각하면 인(仁)이 그 가운데 있다.” 하였다. 《논어》 아래도 이와 같다.

주자가 말하기를, “이 네 가지는 학문과 사변(思辯)의 일로, 힘써 행하여 인(仁)을 행하는 데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여기에 따르면 마음이 밖으로 흩어지지 않아서 간직한 바가 저절로 성숙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인(仁)이 그 가운데 있다고 한 것이다.” 하였다. ○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가깝게 생각한다[近思]는 것은 유추해 나가는 것이다.” 하였다. ○ 소씨(蘇氏 소식(蘇軾))가 말하기를, “널리 배워서 뜻을 돈독하게 하지 아니하면 커서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며, 엉성하게 묻고 먼 데서 생각하면 수고롭기만 하고 공효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배우되 생각하지 아니하면 아는 것이 없고, 생각하되 배우지 아니하면 위태할 것이다.” 하였다.

주자가 말하기를, “마음에서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어두워서 얻는 것이 없고, 그 일을 익히지 아니하기 때문에 위태로워서 편안하지 못하다. 대개 학(學) 자는 행(行) 자의 뜻을 겸하였으니, 의리를 강구하여 밝히면서 학문도 해야 할 바를 본받으면 바로 행하는 뜻이 있게 된다.” 하였다. ○ 주자가 정윤부(程允夫 정순(程洵))에게 답하는 글에서 말하기를, “아우와 강론할 때마다 아우가 명민하여 문자를 보는 데 힘을 허비하지 않고 도리를 쉽고 분명하게 파악한다고 느낀다. 다만 다소 깊이 음미하고 실천하는 공부가 부족하다. 그러므로 도리가 비록 분명한 것 같지만, 문득 자신의 몸과 마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게 되어 공부하는 재미가 오래가지 못하고 조금만 지나면 바로 멎어 버리니, 이는 도리어 공부를 많이 한 뒤에야 무언가를 얻어 내는 느리고 둔한 사람의 뜻이 오래가는 것만 못하다. 이것은 본원상의 큰 병통이며, 말 한마디 뜻 한 가지가 잘못된 정도가 아니다. 전에 고사(高沙)에 있을 적에 아우가 ‘이러한 강론이 도무지 돌아가 머물 곳이 없다.’고 하여, ‘앞으로 실천을 하게 되면, 곧 돌아가 머물 곳이 있을 것이다.’라고 답한 적이 있다. 이 말에 음미할 만한 게 있어 다시 고하니, 생각해 보라.” 하였다.


착한 데 밝지 아니하면 몸을 성실하게 하지 못한다. 《중용》 ○ 역시 공자의 말씀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착한 데 밝지 아니하면 일을 맡아 궁리할 수 없어서 어디에 착한 것이 있는지를 참으로 알지 못한다.” 하였다. ○ 유씨(游氏)가 말하기를, “그 뜻을 성실하게 하려면 먼저 그 앎을 지극히 해야 할 것이니, 착한 데 밝지 아니하면 그 몸을 성실하게 할 수 없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설은 경문(經文)에 상세하지 않아 선현(先賢)들이 많이 밝혀내었으나, 정자(程子)ㆍ이씨(李氏 연평(延平) 이동(李侗))ㆍ주자(朱子) 세 선생의 설이 가장 명백하고 적절하기 때문에 삼가 그 대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배우는 데 뜻을 두었지만 지식이 가리어 굳어졌거나 역량이 못 미치면 어찌해야 합니까.” 하니, 정자가 대답하기를, “다만 앎을 지극히 해야 할 것이니 만약 지식이 밝아지면 역량(力量)이 저절로 진보한다.” 하였다. ○ 또 어떤 사람이, “충신(忠信)은 힘쓸 수가 있으나 치지(致知)는 어려우니 어째서 입니까.” 하니, 정자가 대답하기를, “성실한 것과 공경하는 것은 참으로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천하의 이치를 먼저 알지 못하면서 힘써 행할 수 있는 자는 없다. 그러므로 《대학》의 서문에 치지(致知)를 앞에 두고 성의(誠意)를 뒤에 둔 것이니, 그 등급을 넘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진실로 성인 같은 총명이나 밝은 지식이 없이 그저 그 일을 행한 자취를 실천하는 데만 힘쓴다면, 어찌 성인들처럼 움직이고 일을 주선하는 절차가 자연히 예에 맞게 될 수 있겠는가. 오직 이치를 분명하게 밝혀야만 힘쓰지 않고도 이치대로 됨을 스스로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대개 사람의 성(性)은 본래 착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치대로 행하면 어려울 것이 없을 것이다. 오직 그 앎이 지극하지 않은데 다만 힘으로 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 어려운 것만 괴롭게 여기고, 그 즐거운 것은 알지 못할 뿐이다. 아는 것이 지극해지면, 이치를 따르는 것이 즐거워지고 이치를 따르지 않는 것이 즐겁지 않아지니, 무엇 때문에 이치를 따르지 않으면서 나의 즐거움을 해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 말하기를, “착하지 않은 것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 또한 진실로 안 적이 없는 것이다.” 하였다. ○ 말하기를, “격물(格物)이라는 것은 반드시 모든 일을 하나하나 격(格)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한 가지를 격하면 만 가지 이치가 다 통하는 것입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일물을 격하여 만 가지 이치가 통하는 것은 안자(顔子)도 이르지 못하였다. 오직 오늘 일물을 격(格)하고, 내일 또 일물을 격하여 익힌 것이 많이 쌓인 뒤에야 탁 트여 관통(貫通)하는 곳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한 몸에서부터 만물의 이치에 이르기까지 이해한 것이 많아지면 자연히 시원스럽게 깨닫는 것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궁리한다는 것은 반드시 천하의 이치를 다 궁구하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또 한 가지 이치만 궁구하면 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쌓인 것이 많아진 뒤에 스스로 탁 트여 깨닫는 것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한 가지 일을 궁구하면 다른 것은 미루어 알 수 있다. 만약 한 가지 일을 궁구하여 얻지 못하면 또 별도로 한 가지 일을 궁구하되, 쉬운 것을 먼저 하기도 하고, 어려운 것을 먼저 하기도 하여 각각 자기 수준에 맞게 해야 할 것이다. 비유하자면 서울로 가는 길이 천 갈래 만 갈래지만 한 길만을 택하여 들어가더라도 그것을 미루어 나머지 길도 통함을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대개 만물은 각각 한 가지 이치를 갖추었으며, 만 가지 이치도 모두 한 근원에서 나왔다. 이것이 미루어 가면 통하지 않을 것이 없는 이유이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물(物)에는 반드시 이치가 있어서 모두 다 궁구해야 할 바이니, 하늘이 높고 땅이 깊은 이유, 귀신이 숨었다 나타나는 이유가 그것이다. 만약 내가 하늘이 높다는 것만 알 뿐이고, 땅이 깊다는 것만 알 뿐이며, 귀신이 숨었다 나타났다 하는 것만 알 뿐이라면, 이것은 이미 다 그러한 것인데 또 무슨 이치를 궁구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 또 말하기를, “효도를 하려면 마땅히 효도하는 방법을 알아야 할 것이다. 어떻게 해야 봉양(奉養)을 잘하는 것이며, 어떻게 해야 추울 때는 따뜻하게 하고 더울 때는 시원하게 하는 절도에 맞는지를 모두 궁구한 뒤에야 잘할 수 있는 것이니, 효(孝) 한 자만을 지킨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하였다. ○ 어떤 사람이 묻기를, “사물을 관찰하고서 내 몸을 살핀다는 것은 사물을 보는 것을 통해 자기 몸을 돌이켜 구한다는 것입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사물과 내가 한 이치이기 때문에 저 사물의 이치를 밝히면 곧 나에 대해서도 깨닫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안팎을 합하는 도리이다.” 하였다. 또 묻기를, “그러면 먼저 사단(四端)을 구하는 것이 옳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본성과 감정에서 구하면 진실로 몸에는 절실하다. 그러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도 다 이치가 들어 있으니,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앎을 지극히 하는 요체는 지선(至善)이 어디에 있는 줄을 알아야 하는 것으로 아비는 사랑에 머물고, 자식은 효도에 머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만약 여기에 힘쓰지 않고 그저 막연하게 만물의 이치를 보려고 하면, 대군(大軍)의 기병(騎兵)이 너무 멀리 나아가서 돌아올 줄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될까 염려스럽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격물(格物)은 몸을 살피는 것 만한 것이 없으니, 그리하면 얻는 것이 더욱 절실한 것이 된다.” 하였다. 정자는 반드시 천하의 이치를 모두 궁구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서, 또 사물에는 반드시 이치가 있으니 모두 궁구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또 이미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살펴야 한다고 하고서, 또 자기 몸을 살펴서 얻는 것이 더욱 간절하다고 하였다. 모두 상호 간에 밝혀 그 뜻을 다한 것이니, 모름지기 자세히 이해하여 꿰뚫는 것이 옳을 것이다. ○ 연평 이씨(延平李氏 이동(李侗))가 말하기를, “학문을 하려면 우선 마음을 보존하여 학문 이외의 다른 일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대개 한 가지 일을 만나면 곧 그 일을 맞아 반복해서 파고들어 그 이치를 궁구하여, 한 가지 일이 시원스레 풀리는 것을 기다린 뒤에 차례차례 조금씩 나아가서 또 다른 일을 궁구해야 한다. 이렇게 하기를 오래하여 쌓인 것이 많아지면 가슴속에 저절로 상쾌해지는 것이 있을 것이니, 이것은 글자나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천도(天道)가 유행하고 조화가 펴져 소리와 형상을 가지고 천지간에 가득 차 있는 것이 다 물(物)이다. 이 물이 있으면 이 물이 된 까닭이 있는 것이니, 모두가 각각 당연한 법칙을 가지고서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요, 사람이 능히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이제 또 지극히 절실하고 가까운 것으로 말해 보겠다. 마음이란 것은 실로 물을 주재하고 있는데, 그 체(體)에는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의 성(性)이 있고, 그 용(用)에는 측은(惻隱)ㆍ수오(羞惡)ㆍ공경(恭敬)ㆍ시비(是非)의 정(情)이 있다. 마음속에 온전히 갖추어져 있다가 느낌이 일면 응하되 각각 주재하는 바가 있어 어지럽힐 수 없다. 다음으로 몸에 갖춘 바를 두고 말하자면 입ㆍ코ㆍ귀ㆍ눈ㆍ사지(四肢) 등의 작용이 있다. 또 다음으로 몸으로 접하는 바를 두고 말하자면 군신(君臣)ㆍ부자(父子)ㆍ부부(夫婦)ㆍ장유(長幼)ㆍ붕우(朋友) 등의 일반적인 관계가 있다. 이 모두에 반드시 당연한 법칙이 있어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이른바 이치이다. 이것이 밖으로 사람에 이르면 사람의 이치가 자기와 다를 것이 없고, 멀리 사물에 이르면 사물의 이치가 사람과 다를 것이 없고, 그 큰 것을 지극히 하면, 천지의 운행과 고금의 변화도 여기서 벗어나지 않으며, 작은 것을 지극히 하면 아주 작은 티끌 하나, 한 번 숨 쉬는 순간에도 이치를 빠뜨릴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상제(上帝)가 내려 준 본성이요, 모든 백성이 가지고 있는 떳떳한 성품이다. 《유자(劉子)》의 이른바 천지(天地)의 중(中)이요, 공자가 말한 성(性)이요, 자사(子思)가 말한 천명(天命)의 성(性)이요, 맹자가 말한 인의(仁義)의 마음이요, 정자(程子)가 말한 자연 그대로의 중(中)이요, 장자(張子)가 말한 만물의 근원이요, 소자(邵子 소옹(邵雍))가 말한 도의 형체(形體)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기질(氣質)에 맑고 탁함, 치우치고 바른 차이가 있고, 물욕(物欲)에 많고 적은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사람과 사물, 어진 이와 어리석은 이가 서로 두드러지게 차이가 나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치가 같기 때문에 한 사람의 마음으로 천하 만물의 이치에 대해 다 알 수 있는 것이요, 타고난 자질이 다르기 때문에 이치를 다 궁구하지 못하는 수도 있는 것이다. 이치를 다 궁구하지 못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앎에 지극하지 못함이 있으니, 앎이 지극하지 못하면 그 마음에서 발하는 것이 반드시 순수하게 의리대로 하여 물욕의 사사로움이 섞임이 없게 할 수가 없다. 이로 인해 그 뜻이 성실하지 못한 게 있고 마음에 바르지 않은 게 있고, 몸에 닦이지 않은 게 있어 천하와 국가를 다스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옛날의 성인은 이를 근심하여 처음에 《소학(小學)》을 가르쳐서 정성과 공경함을 익히게 하였다. 그로 인해 그 놓쳐 버린 마음을 거두어들이고 덕성(德性)을 기르는 데 그 지극함을 쓰지 않음이 없었던 것이다. 《대학》으로 나아가서는 또 사물 가운데로 나아가 아는 바 이치를 따라 미루어 연구하여 각각 그 지극한 경지에 이르게 하였으니, 나의 지식이 또한 두루 통하고 정밀해져서 지극하지 않음이 없을 수 있게 되었다. 힘을 기울이는 방법을 드러나는 일을 통해 상고하기도 하고, 은미한 생각 중에서 살피기도 하며, 문자 가운데서 구하기도 하고, 강론하는 가운데 모색하기도 하여, 신심(身心)ㆍ성정(性情)의 덕(德)과 인륜(人倫)ㆍ일용(日用)의 일반적인 일 뿐 아니라 천지ㆍ귀신의 변화와 새나 짐승, 풀이나 나무의 제 모습에 이르기까지 사물마다에 그만둘래야 그만둘 수 없는 마땅히 그래야 하는 바와 바꿀래야 바꿀 수 없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다 보아 반드시 겉과 속, 정밀한 것과 거친 것까지 모두 다 알아내고, 또 더욱 유추해 나가 어느 날엔가 훤하게 꿰뚫으면 천하의 물에 대하여 모두 그 의리의 정밀한 데까지 지극히 궁구하게 될 것이고, 나의 총명과 밝은 지혜도 모두 마음의 본체를 지극히 하여 다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도리는 형체나 그림자는 없어, 오직 사물이나 말을 통해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데, 이해(理解)가 지극히 자세하면 곧 도리도 지극히 정밀해진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지금 사람들은 선하지 아니한 것[不善]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알면서도 일을 당하면 또 하니, 이는 다만 앎이 지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훼(烏喙 독한 풀)를 먹으면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알고 끝내 절대로 먹지 않는 것, 이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다. 선하지 않은 것을 알면 해서는 안 되는데, 그런데도 한다면 이것은 진실로 안다고 할 수 없다.” 하였다. ○ 어떤 사람이 묻기를, “아무 일 없을 때에는 이런 줄을 알면서도, 일을 당하면 또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어찌된 일입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그것은 단지 판단하고 조치하는 것이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격물(格物)은 아무 일 없을 때에 이해해야지 일을 당해서 이해하려 해선 안 된다. 일이 없을 때에 도리를 분명히 알았다면 일을 만났을 때 판단하고 조치하기가 자연히 쉬워진다.” 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군자는 아홉 가지 생각해야 할 것[九思]이 있다. 볼 때는 분명히 볼 것을 생각하고,[視思明] 들을 때는 분명히 들을 것을 생각하고,[聽思聰] 낯빛은 온순하게 할 것을 생각하며,[色思溫] 용모는 공손하게 할 것을 생각하며,[貌思恭] 말은 진실하게 할 것을 생각하며,[言思忠] 일은 공경스럽게 할 것을 생각하며,[事思敬] 의문스러우면 물을 것을 생각하며,[疑思問] 분(忿)해지면 어려워질 일을 생각하며,[忿思難] 얻을 것이 있으면 의리에 맞는지를 생각한다.[見得思義]” 하였다. 《논어》

주자가 말하기를, “보는 데 가려진 것이 없으면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며, 듣는 데 막힌 것이 없으면 밝게 들리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안색은 얼굴에 나타난 것이고, 용모는 온몸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물을 생각을 할 수 있으면 의심이 쌓이지 않을 것이며, 어려워질 일을 생각하면 반드시 분함을 자제하게 되고, 의로움을 생각하면 얻는 것이 구차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 어떤 사람이 묻기를, “사람은 마땅히 일에 따라서 생각해야 하는 것인데, 만약 아무 일이 없이 생각한다면 이것은 망상(妄想)입니까?” 하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만약 한가한 때에 생각하지 않다가 일을 당하여 생각하면 일을 처리할 수 없게 되니, 일은 모름지기 먼저 그 사리를 깨달아 알아야 한다.” 하였다. 만 가지 일과 만 가지 물(物)을 다 이해해야 하지마는, 몸을 살피는 것이 더욱 간절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드러냈다.


의리에 의심이 있으면 묵은 견해를 씻어 버리고 새로운 뜻이 나오게 하여야 한다. 《횡거문집(橫渠文集)》

섭씨(葉氏)가 말하기를, “마음에 의심이 있는데도 묵은 견해에 매여 있으면 생각이 치우치고 고집스러워지며 고루하고 인색해질 것이니, 어디로부터 새로운 뜻이 나오겠는가.” 하였다. ○ 장자(張子)가 말하기를, “의심할 줄을 모르는 것은 다만 실제로 공부하지 않아서이다. 실지로 노력하는 것이다. 실제로 공부하면 반드시 의문이 생겨날 것이니, 반드시 행하지 못할 곳이 있는 것, 이것이 의문이다.”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의리를 사색(思索)하다가 혼란하여 막히면 반드시 모든 것을 싹 쓸어 없애, 가슴속이 텅 비도록 놓아두어야 한다. 그러다 문득 다시 한 번 잡고 보면 맞아떨어지는 곳이 있음을 스스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전에 이 선생(李先生 연평(延平) 이동(李侗))을 뵈었을 때 말씀하신 내용인데, 오늘에야 그 말씀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연평(延平) 선생이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도리는 해가 떠 있을 때 낮이다 깨달아야 하고, 밤에는 바로 고요한 데로 가서 앉아서 생각을 하여야 비로소 터득할 수 있다.’ 하셨는데, 내가 이 말씀에 따라 해 보니 진실로 효과가 대단하였다.” 하였다. 마음이 고요하면 이치가 밝아진다.


앎을 지극히 하는[致知] 것은 수양하는 데 달려 있고, 앎을 길러 가는 데는 욕심을 줄이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정씨외서(程氏外書)》 ○ 이천(伊川) 선생의 말씀이다.

섭씨(葉氏)가 말하기를, “밖으로 물욕에 흔들리지 않으면 마음의 경지가 맑고, 안으로 함양(涵養)하는 바탕이 있으면 총명과 예지가 생겨난다.”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배우는 이의 공부는 오직 거경(居敬)ㆍ궁리(窮理)에 있는데, 이 두 가지 일은 상호 발전하게 해 준다. 궁리할 수 있으면 거경 공부가 날로 진보할 것이며, 거경할 수 있으면 궁리 공부가 날로 치밀해진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학문을 강론하는 데 힘쓰는 자는 실천하는 데 결점이 많고, 실천하는 데 몰두하는 자는 또 학문을 강론하는 것을 무익(無益)하다고 여기곤 한다. 이는 실천을 통해 학문을 강론하는 공효를 지극히 해 아는 것이 더욱 밝아지게 하면 지키는 바가 날로 견고해져서 구구하게 입이나 귀로 말하고 듣는 이와는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너무도 모르는 것이다.” 하였다.

이상은 궁리하고 노력하는 방법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궁극적인 진리를 탐구하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두 가지 공부이긴 하지만 반드시 동시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니 위에서 주로 궁극적인 진리를 탐구하는 것에 대해서만 논했더라도 실천의 의미 역시 겸하고 있습니다.


 

독서(讀書)하는 방법


《주역》에 말하기를, “하늘이 산중(山中)에 있는 것이 대축괘(大畜卦)이니, 군자는 이것을 보고 옛 언행(言行)을 많이 배워서 그 덕을 기른다.” 하였다. 〈대축괘(大畜卦)〉의 상사(象辭)이다.

정자가 말하기를, “하늘은 지극히 큰 것인데, 산중에 있으니, 쌓은 것이 지극히 큰 형상이다. 군자가 이 형상을 보아 그 깊이 쌓아 둔 것을 크게 한다. 사람의 마음에 쌓이는 것은 학문을 통해 커지는데, 옛날 성현의 언행(言行)을 많이 듣고 남긴 자취를 생각하고 그 행실을 보고 말을 살펴서 그 마음을 구하여, 거기서 터득하여 그 덕을 길러 이루는 것이 바로 대축(大畜)의 뜻이다.” 하였다.


본심(本心)이 타락한 지 오래되어 의리가 투철하게 통하지 못하거든 글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기를 항상 끊임없이 하면 물욕이 이기지 못하여 본심의 의리가 편안하고 견고해질 것이다. 《주자대전(朱子大全)》

주자가 말하기를, “천하의 이치는 미묘하고 정미(精微)하여 각각 마땅한 바가 있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바꿀 수가 없다. 오직 옛 성인만이 이치를 다 밝힐 수 있어 그 언행(言行)이 천하와 후세에 바꿀 수 없는 규범이 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 나머지도 이치를 따른 이는 군자가 되어서 길(吉)하고, 이치를 저버린 이는 소인이 되어서 흉해졌다. 길한 것이 많은 이는 사해(四海)를 보전하여 모범이 될 수 있지만 흉한 것이 심한 이는 제 몸도 보전하지 못하여 경계할 바가 되니, 이 분명한 자취와 틀림없는 공효가 경전의 가르침과 사책(史冊) 가운데 갖추어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천하의 이치를 궁구하려고 하면서 여기에 나아가 구하지 아니하면 이는 담[墻] 앞에 선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궁리가 반드시 독서하는 데 있다는 이유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사람이 학문하는 까닭은 나의 마음이 성인의 마음과 같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성인의 마음과 같지 못하기 때문에 이치를 밝히는 데 밝지 못하여, 기준이 없이 좋아하는 것에 따라서, 높은 이는 지나치고 낮은 이는 미치지 못하면서도 스스로 지나치고 미치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반드시 앞에 나아간 이의 말로써 성인의 뜻을 구하고, 성인의 뜻으로써 천지의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 구할 적에는 얕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미치고, 이를 적에는 가까운 곳에서 먼 곳에 미쳐야 할 것이니, 차근차근 순서대로 해야 하며 서둘거나 절박한 마음으로 구해선 안 된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글을 읽되 좋아하지 않는 이는 게을러지고 소홀해지며, 지속성이 없어 성공하지 못할 것이며, 글 읽기를 좋아하는 이는 많은 것을 탐(貪)하고 널리 읽으려고 힘써서, 종종 그 실마리도 잡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그 끝을 찾으려 하고, 이것을 궁구하지도 못한 채 문득 다른 데에 뜻을 둔다. 그러므로 비록 종일토록 쉬지도 못하고 수고롭히고도 마음이 바빠 항상 분주하게 쫓기는 것과 같아서 고요히 배운 것을 음미하는 즐거움이 없으니, 어찌 스스로 얻는 것을 깊이 믿어서 오래도록 질리지 않아 게으르고 소홀하여 지속성이 없는 이들과 다를 것이 있겠는가. 공자께서 이른바, ‘서두르면 도달하지 못한다.’ 한 것이나, 맹자께서 이른바, ‘나아감이 빠르면 물러나는 것도 빠르다.’ 한 것이 진실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 진실로 이것을 거울로 삼아 반성하면 마음이 하나로 가라앉아, 오래도록 흔들리지 않아서 글을 읽으면 문의(文意)가 이어지고 혈맥(血脈)이 관통하며, 자연히 점점 배어서 푹 젖어 들어 마음과 이치가 맞아떨어져, 선한 것을 권하는 것이 깊어지고, 악한 것을 경계하는 것이 절실해질 것이니, 이것이 순서대로 정밀하게 하는 것이 독서하는 법이 되는 이유이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글을 읽어도 의심이 없는 것은 처음 배우는 이의 공통된 병통이다. 이는 평소에 많이 얻는 데만 힘쓰고 자세하게 연구하지 않고 바삐 읽어 넘긴 데서 비롯된다. 지금 이 일을 깊이 경계하여 깨끗이 씻어 내고 따로 규모를 세워 문자(文字)를 볼 적에, 더욱 정밀하고 가장 급(急)한 것을 가려내야 한다. 또 한 책을 보되, 하루에 힘닿는 만큼 한두 단(段)을 보고 한 단을 깨닫고 나서 비로소 한 단으로 바꾸고, 한 책을 다 마치고서야 다른 책으로 바꾸어야 한다. 먼저 마음을 비우고 기운을 고르게 한 다음에 숙독(熟讀)하고, 정밀하게 생각하여 글자마다 구절마다 모두 와 닿는 것이 있고 여러 어진 이의 주해(註解)도 일일이 꿰뚫어 이해하고 난 뒤에야 그 시비(是非)를 비교하여 성현이 말씀하신 근본 취지를 구할 수 있다. 이미 얻는다 하더라도 되풀이하여 완미해서 그 의리가 살[肌]에 배이고 골수에 젖어 든 뒤에야 학문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윤화정(尹和靖)의 문인이 그 스승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훌륭하시도다. 성현의 가르침이여. 육경(六經)의 편(編)을 거슬림 없이 받아들이고 마음으로 체득하여 자기의 말을 외우듯이 하였네.’라고 하였으니, 이러한 지위에 이르러야 비로소 독서하는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처음 독서할 적에는 의문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다가, 다음에 점점 의문이 생기고 중간에는 마디마디 의심스러우니, 이런 고비를 지난 뒤에 의문이 점점 풀려서, 자세히 이해하고 이치를 꿰뚫어서 전혀 의심스러운 것이 없어야 비로소 배운 것이 된다.” 하였다. ○ 정자가 말하기를, “문자를 볼 적에 먼저 반드시 그 문장의 뜻을 깨달은 뒤에야 그 의미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니, 문장의 뜻도 깨닫지 못하고 의미를 이해하는 자는 없다.” 하였다. 이상은 독서를 하려면 정밀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 구산 양씨(龜山楊氏 양시(楊時))는, “독서하는 법은 몸으로 체험하고 마음으로 경험하여, 한가하고 고요한 가운데 조용히 마음속으로 이해하고, 책에서 말한 것과 나타내는 뜻을 막힘없이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니, 이는 내가 스스로 이와 같이 했던 것이다.”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독서할 적에는 반드시 몸가짐을 가다듬고 단정하게 앉아 눈으로 가만히 보고 나지막이 읊조리면서 마음을 비운 채 푹 젖어 들어야 한다. 함영(涵泳)은 숙독(熟讀)하여 깊이 완미하게 됨을 말한 것이다. 자기 몸에 절실하게 성찰(省察)하여 한 구절의 글을 읽으면 그 한 구절을 어디에서 쓸 수 있을까를 깊이 살펴야 한다.” 하였다. ○ 어떤 사람이 묻기를, “평소에 글을 읽을 때에는 소견이 있는 것 같다가도 책을 놓고 나면 또 별반 다를 게 없으니, 병통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이것은 몸에서 구하지 않고 전적으로 책에서만 구하기 때문에 당연히 이와 같이 되는 것이다. 내가 일상생활하는 사이에 도(道)가 아닌 것이 없으니, 글이란 것도 이 마음을 대 주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먼저 몸에서 구한 뒤에 책[書]에서 구하면 글을 읽는 데 맛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 정자가 말하기를, “대개 글을 볼 때, 7년이다, 1세(世)이다, 100년이다 하는 유들은 모두 《논어(論語)》에 보인다. 모두 어떻게 하여야 유익할지를 생각한 것이다.” 하였다. ○ 동래 여씨(東萊呂氏 여조겸(呂祖謙))가 말하기를, “지금 사람들은 글을 읽으면서 쓸 곳이 있음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이 2, 3십 년을 두고 성인의 글을 읽어 놓고도 일을 당하면 하루아침에 거리의 보통 사람들과 다른 게 없으니, 이는 다만 글을 읽으면서 쓰일 데가 있다는 것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이상은 글을 읽으면 실제로 쓰임이 있어야 함을 말한 것이다.

이상은 독서하는 법에 대해 통틀어 말씀드렸습니다.


 

소학(小學) 독서법


주자의 《소학(小學)》은 강령(綱領)이 매우 좋아서 일상생활하는 데 가장 적절하다. 《대학(大學)》의 성공에 이르더라도 역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소학집설(小學集說)》 ○ 진순(陳淳)의 말씀이다.

과재 이씨(果齋李氏 이방자(李方子))가 말하기를, “선생은 나이 58세에 《소학》이라는 책을 엮었다. 책이 완성되자 그것으로 어린 선비를 가르쳐서, 그 근본적인 것을 배양하여 그 지엽적인 것까지 통달하게 하였다. 내편(內篇)은 〈입교(立敎)〉ㆍ〈명륜(明倫)〉ㆍ〈경신(敬身)〉ㆍ〈계고(稽古)〉이고, 외편(外篇)은 두 가지인데, 고금(古今)의 아름다운 말을 취해 뜻을 넓히고 선행(善行)을 취하여 채웠으니, 비록《대학》에 나아간 자라도 역시 훗날 겸해서 보완할 수 있으니 수신(修身)의 규범이 여기에 대략 갖추어져 있다.”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옛사람은 《소학》에서 이미 존양(存養)이 성숙해져 기본 바탕이 이미 깊고 두터우니, 《대학》은 다만 그 위에서 고쳐서 정교함을 낸 것이다.” 하였다. ○ 어떤 사람이 묻기를, “아무개가 어려서 《소학》을 배우지 못했는데, 《대학》을 배우는 것은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대학》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소학》을 보아야만 하니, 한 달 정도라도 공부하도록 하라.” 하였다. ○ 노재 허씨(魯齋許氏 허형(許衡))가 말하기를, “《소학》이라는 책은 내가 신명과 같이 믿으며, 부모와 같이 공경한다.” 하였다.

이상은 《소학》을 읽는 법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사서(四書) 독서법


처음 배우는 이가 덕(德)에 들어가는 입문서(入門書)로 《대학》만한 것이 없다. 《정씨유서(程氏遺書)》 ○ 이천(伊川) 선생의 말씀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논어》와 《맹자》는 일에 따라 문답(問答)한 것이기 때문에 요령을 터득하기 어렵다. 그러나 《대학》만은 증자(曾子)가 공자께서 말씀하신 옛사람의 공부하던 방법을 서술하고, 그 문인이 또 전술(傳述)하여 그 뜻을 밝힌 것이다. 앞뒤가 서로 연결되고, 체통(體統)이 모두 갖추어져 있어, 이 책을 완미함으로써 옛사람의 학문의 지향을 알 수 있다. 《논어》와 《맹자》를 읽으면 이해하기가 쉬우니, 그 후의 공부할 것이 많긴 하지만 큰 체계는 이미 확립되었다 할 것이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대학》을 읽는데 어찌 그 언어(言語)만을 보겠는가. 바로 마음에서 어떠한가를 증험해 보아야 한다. 과연 호색(好色)을 좋아하듯 선한 것을 좋아하고, 악취(惡臭)를 싫어하듯 악한 것을 미워하는가를 내 마음에서 시험해 보아야 한다. 한가하게 지낼 적에 선하지 못한 짓을 한 일이 과연 있는가. 한 가지라도 이르지 못한 것이 있을 때, 용감하게 분발하기를 그만두지 않으면 반드시 큰 발전이 있을 것이다. 지금 이런 것을 알지 못하면 글은 글대로 있고 나는 나대로 있을 것이니,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하였다. 진씨(陳氏)가 말하기를, “대개 독서(讀書)하는 법은 다 이와 같아야 하니, 《대학》뿐만이 아니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대학》이란 책은 경문(經文)이 있고, 장구(章句)가 있고 혹문(或問)이 있는데, 자꾸 보다 보면 혹문은 보지 않고 장구만 보면 되고, 더 오래되면 정경(正經 원래의 경문)만 보아도 된다. 또 오래 지나면 《대학》이란 책이 나의 가슴속에 차 있기 때문에, 정경도 보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많은 공부를 활용하지 않으면 누군가에 대해 알 수 없고, 성현의 많은 공부를 활용하지 않아도 성현에 대해 알 수 없다.” 하였다.


《논어(論語)》라는 책은 그 말은 실생활과 닿아 있으나 그 뜻은 멀고, 말은 다함이 있으나 뜻은 무궁하다. 다함이 있는 말은 훈고(訓詁)를 통해 뜻을 구해야 하고, 무궁한 뜻은 마땅히 정신으로서 이해해야 한다. 《논어집주(論語集註)》 ○ 정자(程子)의 말씀이다.

연평 이씨(延平李氏)가 말하기를, “사람의 몸가짐은 마땅히 공자를 본받아야 한다. 공자 시대로부터 천여 년이나 시간이 흘러 직접 뵐 수는 없고, 볼 수 있는 것이라곤 다만 《논어》가 있을 뿐이다. 《논어》에 기록된 것은 공자의 언행(言行)이다. 매양 읽어서 음미(吟味)하고 익혀서 늘려 가며 미루어 행한다면, 당에 오르고 집에 들어갈 정도[升堂入室]는 되지 못하더라도, 역시 사군자(士君子)가 되기에 모자라는 것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논어》를 읽는 이는 여러 제자(弟子)들이 묻는 것을 곧 자기가 묻는 것으로 생각하고, 성인이 대답한 것을 지금 직접 듣는 것처럼 하면 자연히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만약 《논어》와 《맹자》의 글 가운데에서 깊이 구하고 익숙히 음미해서 함양(涵養)해 나간다면 비상한[甚生] 기질(氣質)을 이룰 것이다.” 하였다. 심생(甚生)은 비상(非常)과 같다. ○ 또 말하기를, “만약 《논어》를 읽지 않았을 때 이러이러한 사람이요, 읽은 후에도 그저 이런 사람이라면 이는 읽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성인의 도(道)를 구해 보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맹자》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창려문집(昌黎文集)》

정자가 말하기를, “안자(顔子)가 죽은 뒤에 마침내 성인의 도를 얻은 이는 증자(曾子)이고, 그 학문을 전한 이는 자사(子思)와 맹자(孟子)이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맹자가 성문(聖門)에 세운 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중니(仲尼 공자(孔子))는 하나의 인(仁) 자만을 말하였으나, 맹자는 입만 열면 이내 인의(仁義)를 말하였고, 중니는 하나의 지(志) 자만을 말하였으나, 맹자는 기운을 기르는 데 대한 허다한 설을 말하였으니, 단지 이 두 가지에 그 공효가 매우 많다.” 하였다.


《논어》와 《맹자》를 읽고도 도를 알지 못한다면, 많이 읽었다 한들 무엇 하겠는가. 《정씨유서(程氏遺書)》 ○ 이천(伊川) 선생의 말씀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논어》의 말은 포함하지 않는 것이 없으되, 사람에게 보인 것은 조존(操存)ㆍ함양(涵養)의 요체가 아닌 것이 없고, 《맹자》7편(篇)의 뜻은 끝까지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으되 사람에게 보인 것은 대체로 체험(體驗)하고 확충해 가는 실마리이다.” 하였다. ○ 정자가 말하기를, “ 배우는 이는 마땅히 《논어》와 《맹자》를 근본으로 삼아야 하니, 《논어》와 《맹자》를 공부하고 나면 육경(六經)은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그 뜻이 밝아질 것이다. 글을 읽는 이는 마땅히 성인이 경(經)을 지은 의도와, 성인이 마음 쓰는 것과 성인이 성인이 된 까닭을 보아서, 내가 아직 이르지 못한 것과 아직 얻지 못한 것을 구절마다 연구하여, 낮에는 외워 음미하고, 밤에는 생각하여, 그 마음을 고르게 하고 기운을 평온하게 하여 의문을 없애면 곧 성인의 뜻이 보일 것이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사람이 이 두 책을 얻어 보기만 해도 종신(終身)토록 자신에게 절실한 가르침이 넘쳐날 것이다.” 하였다.


《중용(中庸)》은 공부가 치밀하고 규모가 큰 것이다. 《주자대전(朱子大全)》

주자가 말하기를, “중(中)은 치우치지 아니하고 기울지 아니하며, 미발(未發)의 중(中)이다. 지나치지 아니하고 미치지 못한 것이 없는 것이며, 이발(已發)의 중(中)이다. 용(庸)은 평상(平常)이다.” 하였다. ○ 정자가 말하기를, “치우치지 않은 것을 중이라 하고, 바뀌지 않는 것을 용(庸)이라고 한다. 중이라는 것은 천하의 바른 도리요, 용이라는 것은 천하의 정해진 이치이다. 이 편은 공문(孔門)에서 전해 준 심법(心法)인데, 자사는 시간이 오래되면서 어긋남이 있을까 염려하였다. 그러므로 책에 써서 맹자에게 주었는데, 그 책에서 처음에는 하나의 이치를 말하였고, 중간에는 흩어져서 만 가지 일이 되었다가 끝에 가서는 다시 합하여 하나의 이치가 되었다. 풀어놓으면 우주[六合]에 가득 차고 거두어들이면 깊숙이 감추어져서 그 맛이 무궁하니, 모두 실학(實學)이다. 글을 잘 읽는 이가 뜻을 완미하고 연구하여 얻는 것이 있다면, 곧 종신토록 쓰더라도 다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중용》을 읽는 자는 높은 경지를 넘보거나 기이한 것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반드시 구두(句讀)와 문의(文義) 사이에 깊이 잠겨 그 귀추를 이해하고, 반드시 보지 않고 듣지 않는 가운데 삼가고 두려워하여, 실천에 옮기면 마음이 너그럽고 만족스러워질 것이니, 진실로 오래도록 힘을 쌓으면 넓고 두텁고 높고 밝은 영원한 경지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홀연히 이를 것이다.” 하였다.

이상은 사서(四書)를 읽는 법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 주자가 말하기를, “먼저 《대학》을 읽어 그 규모를 정하고, 다음에 《논어》를 읽어 그 근본을 세우며, 다음에 《맹자》를 읽어 그 뛰어남을 보고, 다음에 《중용》을 읽어 옛사람의 미묘한 것을 구해야 한다. 《대학》을 꿰뚫어 이해하여 의문이 없어진 뒤에 《논어》와 《맹자》를 읽어야 하고, 또 의문이 없어진 뒤에 《중용》을 읽어야 한다.” 하였다.


 

육경(六經) 독서법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소자(小子)들아, 어찌 시(詩)를 배우지 않느냐. 시는 흥(興)하기도 하고, 관(觀)하기도 하며, 군(群)하기도 하고, 원(怨)하기도 한다.” 하였다. 《논어》 아래도 이와 같다.

주자가 말하기를, “소자(小子)는 제자(弟子)이다. 흥(興)은 뜻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관(觀)은 득실(得失)을 따져 보는 것이고, 군(群)은 조화를 이루되 휩쓸리지 않는 것이며, 원(怨)은 원망하되 노(怒)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시는 성정(性情)에 근본을 둔 것이어서 그른 것도 있고 바른 것도 있다. 그 내용이 알기 쉬운 데다 읊조리면서 높아졌다 낮아졌다를 반복하는 사이 사람을 쉽게 감동시킨다. 그러므로 배우는 이가 그 착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켜 그만둘래야 그만둘 수 없게 되는 것도 반드시 여기서 얻게 되는 것이다.” 하였다.


가까이로는 아버지를 섬기고, 멀리로는 임금을 섬긴다.

주자가 말하기를, “인륜(人倫)의 도가 시에 갖추어져 있지 않은 것이 없으나, 이 두 가지는 중요한 것을 들어서 말한 것이다.” 하였다.


조수(鳥獸)와 초목(草木)의 이름을 많이 알게 된다.

주자가 말하기를, “그 나머지도 많이 아는 데 도움이 된다. 시를 배우는 법을 이 장(章)에서 다하였다. 《시경(詩經)》을 읽는 이는 마음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다.


시를 배우지 아니하면 말을 할 수가 없다.

주자가 말하기를, “시는 사람의 정(情)에 근본을 두고 물(物)의 이치를 갖추고 있어 풍속(風俗)의 성쇠(盛衰)를 검증해 보고, 정치의 득실(得失)을 알 수 있으며, 사리가 탁 트이고 심기(心氣)가 화평해지게 한다. 그러므로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였다. ○ 정자가 말하기를, “지금 사람이 독서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만약 시 3백 편을 왼다 하더라도 정사(政事)를 맡기면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사방(四方)에 사신으로 보냈을 때 단독으로 대처하지 못할 것이니, 많이 읽은들 무엇 하겠는가. 공자의 말씀이다. 모름지기 시를 읽기 전에는 정사를 맡겨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단독으로 대처하지 못하다가도, 시를 읽은 뒤에는 문득 정사를 맡아 잘 처리하고 사방(四方)에 사신 가서도 단독으로 대처할 줄 알아야 시를 읽은 자라 하겠다. 사람이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읽지 아니하면 담장을 마주한 것과 같다. 역시 공자의 말씀이다. 모름지기 시를 읽지 않았을 때에는 담장을 마주 대한 것 같다가도 시를 읽은 뒤에 곧 담장을 마주하지 않은 것 같이 되어야 비로소 효과가 있는 것이니, 대개 독서(讀書)는 바로 이런 방법을 규범으로 삼아야 한다.” 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예(禮)를 배우지 않으면 바로 서지 못한다.” 하였다. 《논어》

주자가 말하기를, “예는 공경과 사양(辭讓)으로 근본을 삼지마는, 자세한 절문(節文)과 도수(度數)가 있어야 사람의 살과 피부, 힘줄과 뼈의 결합을 튼튼하게 해 준다. 그러므로 배우는 이가 우뚝히 자립(自立)하여 사물(事物)에 흔들리고 빼앗기지 않으려면 반드시 여기서 얻어야 한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품절(品節)이 상세하고 밝으며 덕성(德性)이 굳게 정(定)해지기 때문에 설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 영가 주씨(永嘉周氏 주행기(周行己))가 말하기를, “300가지 예의 큰 줄기와 3000가지 예의 절목이 모두 성(性)에서 나온 것으로, 용모와 감정을 거짓으로 꾸민 것이 아니다. 하늘은 높고 땅은 낮기 때문에 예가 확립된 것이고 유(類)끼리 모이고 무리로 나뉘어졌기 때문에 예가 진실로 행해지는 것이다. 사람이 천지 사이에 위치하고 만물의 위에 섰으니, 존비(尊卑)는 나누지 않아도 드러난다. 성인이 이것을 좇아서 관혼상제(冠婚喪祭)와 조빙(朝聘)과 향사(鄕射)의 예(禮)를 만들어 군신(君臣)ㆍ부자(父子)ㆍ형제(兄弟)ㆍ부부(夫婦)ㆍ붕우(朋友)의 의리를 행하게 되었다. 그 형체로 나타나는 것은 음식ㆍ기복(器服)의 쓰임에 보이며, 형체 너머의 것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은미한 데에까지 미쳤다. 일반 사람은 힘써 노력하지만 현인은 실행하고 성인은 그대로 따른다. 그러므로 그 몸과 그 집과 그 나라와 그 천하에서 예를 행하려는 자는 예가 다스려지면 다스려지고, 예가 어지러워지면 어지러워지고, 예를 보존하면 보존되고, 예를 없애면 없어진다. 진시황이 책을 불살라 버려 삼대(三代)의 예문(禮文)이 크게 무너졌다. 한(漢)나라가 흥하여 책을 사들였으나 《예기(禮記)》49편은 여러 선비의 뒤죽박죽된 채로 전해 오는 기록에서 나온 것들이라 성인의 뜻을 다 알 수가 없다. 글 뜻을 따져 보면 때로 서로 잘 맞지 않는 것이 있지만, 그 글이 번다하다 해도 뜻은 넓으니, 배우는 이가 널리 배우고 요약하면 역시 도에서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대개 그 학설이 쉽게 드러나는 것으로는 응대(應對)하고 진퇴(進退)하는 일에 관한 것이고, 정밀한 것은 그 도덕(道德)과 성명(性命)의 요체에 관한 것이다. 어린애의 학습에서 시작하여 성인(聖人)이 되는 데서 끝난다. 오직 옛 도에 통달한 뒤라야 능히 그 말을 알 수 있고, 말을 안 뒤라야 예를 얻을 수 있다. 예가 된 까닭은 그 법칙이 멀리 있지 않다.” 하였다.


덕(德)이라는 것은 성(性)의 실마리이요, 풍악(風樂)이라는 것은 덕(德)의 꽃이다. 쇠[金]ㆍ돌[石]ㆍ실[絲]ㆍ대[竹]로 만든 악기는 음악의 도구이다. 시(詩)는 뜻을 말한 것이고, 노래는 소리를 내어 부른 것이며, 춤은 몸을 움직이는 것이니, 이 세 가지가 마음에 갖추어진 뒤에 악기(樂器)가 뒤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情)이 깊어지면서 문채가 밝아지고, 기운이 왕성해지면서 변화가 신통해진다. 조화롭고 순한 것이 마음속에 쌓여 영화(榮華)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니, 풍악만은 속일 수가 없다. 《예기(禮記)》

유씨(劉氏)가 말하기를, “뜻이라는 것은 실마리가 처음 발하는 것이다. 덕은 마음에 있는 것이고, 성(性)은 그 덕의 근본이다. 그러므로 “덕이라는 것은 성의 실마리이다.”라고 하였고 뜻은 마음이 가는 바이다. 그러므로 “실마리가 처음 발(發)하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소리와 모습은 꽃이 피어난 것이다. 뜻이 움직여 시로 나타나고, 시가 이루어지면 소리 내어 길게 노래하고, 길게 노래하는 것으로도 부족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손이 너울대고 발로 디딤새를 하여 몸을 움직이게 된다. 세 가지는 다 마음이 여러 가지 사물에 감응하여 움직인 뒤에 팔음(八音)의 악기가 더해지고 간척(干戚 방패와 도끼)과 우모(羽旄 깃털과 쇠꼬리털) 같은 도구가 곁들여지는 것이다. 마음속에서 깊이 감동이 일면 겉으로 영화가 드러난다. 이것으로 본다면 풍악을 풍악답게 하자면서 거짓으로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풍악에는 5성(聲)과 12율(律)이 있는데, 번갈아 가며 주거니 받거니 8음의 절주에 맞추어 노래하고 춤추다 보면 사람의 성정(性情)을 길러서 간사하고 더러운 것을 씻어 내고, 찌꺼기를 말끔히 녹일 수 있을 것이다. 배우는 자가 의리가 정밀해지고 인(仁)이 무르익어서, 스스로 도덕에 조화를 맞추는 데 이르려면 반드시 이것을 통해 터득해야 한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옛날의 풍악은 사라져 다시 배울 수 없게 되었으나, 학문을 강론하고 실천하는 사이에서 그 남긴 뜻을 볼 수 있다.” 하였다. ○ 임천 오씨(臨川吳氏 오징(吳澄))가 말하기를, “예경(禮經) 가운데 겨우 남아 있는 것으로 그나마 오늘날의 《의례(儀禮)》17편이 있을 뿐이고, 악경(樂經)은 없어졌다. 그 경(經)이 추측건대 성음(聲音)과 악무(樂舞)에 관한 것이 많고 읽어 외고 써 두었던 것은 적었기 때문에, 진시황이 책을 불사른 뒤에 전해지는 것은 없이 여러 선비가 풍악의 뜻을 말하는 데서 그쳤을 뿐이다.” 하였다. ○ 진씨(眞氏)가 말하기를, “주(周)나라가 쇠하자 예악(禮樂)이 무너졌으나 예서(禮書)는 오히려 남아 있는 것이 있어서, 제도(制度)와 글들을 상고하고 찾아 볼 수 있었지마는, 악서(樂書)는 다 없어져 남아 있지 않았다. 훗날 예라고 하는 것도 선왕(先王)의 제도와 맞지 않게 되었는데 풍악은 그보다 더욱 심하다. 지금 세상에서 쓰는 음악은 대개 정(鄭)나라, 위(衛)나라의 음(音)에 오랑캐의 음이 섞여 있을 뿐이라 인심을 방탕하게 하고, 풍속을 무너뜨리기 딱 좋으니, 무슨 도움이 될 게 있겠는가. 그러나 예악(禮樂)의 제도는 망했다 하더라도 예악의 이치는 남아 있으니, 장엄하고 경건한 것은 예의 근본이요, 조화롭고 즐거운 것은 풍악의 근본이다. 배우는 이가 진실로 장엄함과 경건함으로 그 몸을 다스리고, 조화와 즐거움으로 마음을 기르면 예악의 근본을 얻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주체성을 확립하고 덕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서경》을 본다면 모름지기 이제(二帝)와 삼왕(三王)의 도를 보아야 한다. 《정씨유서(程氏遺書)》 ○ 명도(明道) 선생의 말씀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상서(尙書)》를 읽어도 역대(歷代) 세상의 변화를 보기는 어려우니, 성인의 마음을 구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이를테면 요(堯) 임금에 대해서는 그 백성 다스린 방법을 생각하고, 순(舜) 임금에 대해서는 그가 임금 섬긴 방법을 생각하는 것 같은 유이다. 또 〈탕서(湯誓)〉에 말한 바, ‘내가 상제(上帝)를 두려워하여 감히 바르게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그러하다. 깊이 새기며 읽으면 어찌 탕(湯)의 마음을 보지 못하겠는가.” 하였다. ○ 또 말하기를, “《상서》는 처음 읽으면 너무 어려워서 자기와 상관없는 것 같으나, 그 후로 깊이 새기며 읽으면 요(堯)ㆍ순(舜)ㆍ우(禹)ㆍ탕(湯)ㆍ문(文)ㆍ무(武)의 사적이 모두 내게 절실한 것임을 알게 된다.” 하였다. ○ 무이 채씨(武夷蔡氏)가 말하기를, “이제와 삼왕이 천하를 다스리는 대경대법(大經大法)이 모두 이 책에 실려 있지만 수천 년 뒤에 태어나서 수천 년 전의 일을 강구해 밝히려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이제와 삼왕의 다스림은 도에 근본하고, 이제와 삼왕의 도는 마음에 근본 하였으니, 그 마음을 얻으면 도와 다스림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생각을 정밀하게 하고 마음을 한결같이 하여 중을 잡는다[精一執中]는 것은 요(堯)ㆍ순(舜)ㆍ우(禹)가 전해 준 심법(心法)이요, 중을 세우고 표준을 세운다[建中建極]는 것은 상(尙)나라의 탕왕과 주(周)나라의 무왕이 전해 준 심법(心法)이다. 덕(德)ㆍ인(仁)ㆍ경(敬)ㆍ성(誠)이란 것은 말은 달라도 이치는 하나이니, 이 마음의 오묘함을 밝히는 것 아님이 없다. 후세의 임금이 이제와 삼왕의 다스림에 뜻을 둔다면 그 도를 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이제와 삼왕의 도에 뜻을 둔다면 그 마음을 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마음을 구하는 요체를 이 책이 아니고서 무슨 수로 알 수 있겠는가.” 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대개 역(易)이란 무엇을 하는 것인가? 역이란 만물의 이치를 깨달아 그를 바탕으로 성공하여[開物成務] 천하의 도를 다 포괄하는 것, 이와 같은 것뿐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역으로써 천하의 뜻에 막힘이 없어지고, 역으로써 천하의 사업을 안정되게 하며, 역으로써 천하의 의심쩍은 일들을 결단한다.” 하였다. 《주역》 〈계사(繫辭)〉

주자가 말하기를, “만물의 이치를 깨달아 그를 바탕으로 성공한다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점을 쳐서 길흉을 알아서 일을 성공시키는 것을 말한다. 천하의 도(道)를 다 포괄한다는 것은 괘(卦)와 효(爻) 안에 천하의 도가 모두 들어 있다는 것이다.” 하였다. ○ 정자가 말하기를, “역은 변하고 바뀌는 것이니, 때에 따라 변하고 바뀌어 도를 따르는 것이다. 그 글이 광대하고 다 갖추어져 있어 성명(性命)의 이치를 따르고 유명(幽明)의 이유를 밝히고, 사물의 실정을 다 담아, 사물의 진상(眞象)을 드러내어 일을 이루는 도를 보인 것이니, 성인이 뒷세상을 근심한 것이 지극하다 하겠다. 지극히 은미(隱微)한 것은 이(理)이고, 지극히 드러난 것은 상(象)이다. 체(體)와 용(用)이 일원(一源)으로서 나타나고 숨는 것에 차이가 없으니, 모이고 통하는 것을 관찰하여 그 전례(典禮)를 행하면 주자가 말하기를, “회(會)는 이치가 모인 것을 말한 것이요, 통(通)은 일의 마땅한 것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모든 이치가 모이는 곳에는 쉽고 어려움과 막히고 방해됨이 많이 있으므로, 반드시 그 가운데서 통하는 곳을 얻어야 행할 수 있다. 전례(典禮)라는 것은 항상 된 이치이다. 말에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배우는 이가 말[言]을 구하되 반드시 가까운 데서 구해야 할 것이니, 가까운 데를 쉽게 여기는 이는 말을 아는 자가 아니다. 내가 전한 것은 말[辭]이다. 말을 통해 뜻을 얻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다.” 하였다.


때를 알고 형세를 아는 것이 역(易)을 배우는 큰 방법이다. 정자(程子)의 《역전(易傳)》

섭씨(葉氏)가 말하기를, “방(方)은 기술과 같다. 때에는 성하고 쇠한 것이 있고, 형세에는 강하고 약한 것이 있는데, 역을 배우는 이는 마땅히 그때와 형세를 따라서, 오직 변화에 맞추고 도를 따라야 한다.” 하였다.


○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왕자의 자취가 사라지면서 시가 없어지고, 시가 없어진 뒤에 《춘추(春秋)》를 짓게 되었다.” 하였다. 《맹자》 아래도 이와 같다.

주자가 말하기를, “왕자의 자취가 없어진다는 것은 평왕(平王)이 동천(東遷)하여 정교(政敎)와 호령(號令)이 천하에 미치지 못한 것을 이른 것이요, 시가 없어졌다는 것은 〈서리(黍離)〉의 시가 국풍(國風)이 되고, 아(雅)가 없어진 것을 말한다. 《춘추(春秋)》는 노(魯)나라의 역사 기록물 이름인데, 공자가 거기에 필삭(筆削)하면서 노나라 은공(隱公) 원년(元年)에서부터 시작하였는데, 이는 바로 주나라 평왕(平王) 49년이다.” 하였다.


제(齊)나라 환공(桓公)과 진(晉)나라 문공(文公)에 관한 일이요, 역사에 관한 글인데,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뜻은 곧 내가 나름대로 취한 것이다.” 하였다.

주자가 말하기를, “춘추 때에 오패(五霸)가 잇달아 일어났으나 환공(桓公)ㆍ문공(文公)이 가장 성하였다. 사(史)는 사관(史官)이다. 절취(竊取)라는 것은 겸손하게 한 말이다. 《공양전(公羊傳)》에서 잘못된 말에 대해서는 책임이 내게 있다[其辭則丘有罪焉]라 한 것과 뜻이 같다. 대개 말[言]로 결단하는 것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말한 것으로, 이른바 ‘쓸 만하면 쓰고, 깎을 만하면 깎았는데, 자유(子游)와 자하(子夏)가 한마디도 보태지 못하였다.’고 한 것이다.” 하였다. ○ 윤씨(尹氏)가 말하기를, “공자가 《춘추(春秋)》를 지을 적에도 역사를 기술하는 글로써 당시의 일을 기재하였으나, 그 뜻은 천하의 사정(邪正)을 정하여 백왕(百王)의 큰 법으로 삼았다.” 하였다. ○ 정자가 말하기를, “하늘이 백성을 내실 적에 무리 중에 재주가 뛰어난 이가 반드시 있어서, 그를 세워 군장(君長)으로 삼아, 다스리면 쟁탈(爭奪)이 멎고, 인도하면 잘 살게 되며, 가르쳐서 윤리가 밝아져야만 인도(人道)가 서고 천도(天道)가 이루어지며, 지도(地道)가 고르게 된다. 이제(二帝) 이전에는 성현이 대대로 나와 때에 맞게 흥기하여 풍기(風氣)를 마땅하도록 맞추고, 하늘의 뜻에 앞서 사람을 깨우치지 아니하였고, 각각 때를 따라 정사를 세웠다. 그 뒤에 삼왕이 잇달아 일어나면서는 세 가지 중요한 예의(禮儀)가 갖추어져, 자(子)ㆍ축(丑)ㆍ인(寅)으로 정월(正月)을 삼고, 충(忠)ㆍ질(質)ㆍ문(文)으로 숭상하는 것을 바꾸어 인도(人道)가 갖추어지고 천운(天運)이 순환하였다. 그러나 성왕(聖王)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되면서 천하를 차지한 자가 비록 옛날의 자취를 모방하려고는 하나, 역시 사사로운 뜻으로 함부로 행동할 뿐이다. 잘못된 일로는 진(秦)나라가 건해(建亥)를 정월(正月)로 삼은 것이 있고, 그릇된 도로는 한(漢)나라가 오로지 지력(智力)으로만 세상을 다스린 것이 있으니, 어찌 다시 선왕(先王)의 도를 알 수 있겠는가. 공자가 주(周)나라 말엽에 성왕(聖王)이 다시 일어나지 않고, 하늘에 순응하고 때에 상응하는 다스림이 다시 있지 않았다. 그러자 《춘추(春秋)》를 지어 백왕(百王)의 바꿀 수 없는 큰 법으로 삼았다. 이른바 삼왕에 상고해 보아도 어긋나지 않고, 천지에 세워도 어긋나지 않으며, 귀신에 질정하여도 의심이 없고, 백세(百世) 후의 성인이라도 의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춘추》의 큰 뜻은 수십(數十)이다. 섭씨(葉氏)가 말하기를, “《춘추》의 큰 뜻은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낮추며 인의(仁義)를 귀히 여기고, 간사한 것을 천하게 여기며, 중국(中國)을 안으로 하고 오랑캐를 밖으로 하는 유와 같은 것입니다.” 하였다. 그 뜻이 비록 크다 하더라도 해와 별처럼 빛나야 쉽게 볼 수 있다. 오직 때에 따라 알맞게 조처해야 할 그 은미한 글의 뜻은 알기가 어렵다. 누르기도 하고 놓아주기도 하며,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며,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가기도 하며, 아주 작아지기도 하고, 드러나기도 하여서 모두 의리에 편안하게 될 수 있었다. 문(文)과 질(質)이 알맞고 너그러움과 사나움이 마땅하고 시(是)와 비(非)가 공평함을 얻었으니, 곧 일을 제재하는 저울이요, 도를 헤아리는 모범이다. 후세의 임금이 《춘추》의 뜻을 알면 비록 덕이 우(禹)와 탕(湯)과 같지는 못하더라도, 삼대의 다스림을 본받을 수는 있을 것이니, 그 뜻을 얻고, 그 쓰임을 본받으면 삼대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상은 육경(六經)을 읽는 법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 장자(張子)가 말하기를, “육경은 순환해 가며 이해해야 한다. 의리가 다함이 없어 자신이 한 단계 성숙하고 보면 또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하였습니다.


 

사기(史記) 독서법


《사기(史記)》를 읽으면, 모름지기 치란(治亂)의 기틀과 현인 군자의 출처(出處)와 진퇴(進退)를 보아야 할 것이니, 이것이 곧 격물(格物)이다. 《정씨유서(程氏遺書)》 ○ 이천(伊川) 선생의 말씀이다.

정자가 말하기를, “대개 사기를 읽을 때에는 한갓 사적(事迹)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그 치란(治亂)과 안위(安危)와 흥폐(興廢)와 존망(存亡)의 이치를 알아야 한다. 또 〈한고조 본기(漢高祖本紀)〉를 읽는다면 한나라 4백 년의 시종(始終)과 치란이 어떠하였던가를 알아야 할 것이니, 이것 역시 배우는 것이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나는 《사기》를 읽을 때마다 반쯤 읽으면 곧 책을 덮고 생각하여, 그 성공하고 패망한 것을 헤아려 보고, 그 뒤에 다시 읽다가 합치되지 않는 곳이 있으면 또다시 정밀하게 생각하였다. 그중에는 다행히 성공한 것도 있으나 불행히 실패한 것도 많았다. 지금 사람들은 다만 성공한 이는 옳다고 하고 실패한 이는 그르다고 하니, 이는 성공한 자도 도리어 옳지 않은 것이 있고, 패망한 자도 도리어 옳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 동래 여씨(東來呂氏 여조겸(呂祖謙))가 말하기를, “대개 《사기》를 보되 잘 다스린 것을 보면 잘 다스렸다 하고, 어지러운 것을 보면 어지럽다고 하면서 한 가지 일을 보면 한 가지 일만 알고 마치니, 《사기》를 보면서 취하는 것이 무엇인가. 모름지기 자신을 그 가운데 두고 일의 이해(利害)와 때의 화란(禍亂)을 보듯 해야 하니, 반드시 책을 덮고 스스로 내가 이러한 일을 당하면 마땅히 어떻게 처리할까를 생각하면서 《사기》를 본다면, 학문도 진보하고 지식도 높아져서 유익(有益)함이 있게 될 것이다.” 하였다. ○ 허씨(許氏)가 말하기를, “ 《사기》를 볼 때에는 먼저 그 사람의 큰 대목을 훑어본 뒤에 그 세세한 행동을 보아서, 착하면 본받고 악하면 경계하여야 내 몸가짐을 바루는 데 유익하게 될 것이다. 그저 그 사건만 기억하고 그 글만 외는 것은 배우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이상은 사서(史書)를 읽는 법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신이 생각건대, 독서는 궁리하는 일인데 독서에도 차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삼가 성현의 말씀을 채택하여 위와 같이 엮었습니다. 다만 사서(四書)와 육경(六經) 외에도 송대(宋代)의 참 유학자인 주자(周子)ㆍ정자(程子)ㆍ장자(張子)ㆍ주자(朱子) 등의 글과 성리학과 관련된 설은 다 성상의 학문에 절실한 것이니 자세하게 음미하고 깊이 연역(演繹)하시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경전이 있고부터 선비로서 글을 읽지 않은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마는, 참 유학자는 드물게 나왔고, 임금으로서 글을 읽지 않은 이가 누가 있겠습니까마는 잘 다스린 자가 드물게 일어났으니, 그 무슨 까닭입니까. 독서한 것이 단지 귀로 들어가고 입으로 나오는 자료가 되었을 뿐이요, 유용한 도구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릉(廬陵) 나대경(羅大經)의 말에 의하면 “지금의 선비는 요ㆍ순ㆍ주공ㆍ공자의 말이 아니면 말하지 않고, 《논어》ㆍ《맹자》ㆍ《중용》ㆍ《대학》이 아니면 보지 않으며, 말은 반드시 주자(周子)ㆍ정자(程子)ㆍ장자(張子)ㆍ주자(朱子)를 일컫고, 학문은 반드시 치지(致知)와 격물(格物)을 말한다. 이런 일은 삼대 이후로 없었던 일이니 성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호걸(豪傑)의 선비가 나오지 않고 예의 풍속이 이루어지지 않아 선비의 기풍은 날이 갈수록 비루해지고, 인재는 해가 갈수록 줄어드니 통탄할 일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오늘의 병통을 말한 것입니다. 아, 선비들이 독서를 통해 부귀(富貴)나 이욕을 구하려 하기 때문에 그 병통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임금과 같은 이는 이미 지극히 숭고하고 부귀하기 때문에 궁리와 정심(正心)에 힘쓰고, 영원한 명(命)을 누리기를 하늘에 비는 것 외에는 아무 소망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많이 찾아 조사하고 널리 상고하여서, 겉만을 수식(修飾)하는 데에 힘쓰고, 자기 몸에 절실한 일을 하지 않으니, 어찌 생각지 않음이 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이 폐단을 깊이 징계하시고, 성리학(性理學) 공부를 정밀하게 하고 실제로 몸소 실천함으로써 경전을 빈말이 되지 않게 하신다면 국가에 매우 다행한 일입니다.


 

천지(天地)ㆍ인물(人物)의 이(理)에 대하여


○ 역(易)에 태극이 있는데, 이것은 양의(兩儀)를 낳고, 양의는 사상(四象)을 낳으며 사상은 팔괘(八卦)를 낳는다. 《주역》 〈계사(繫辭)〉 아래도 이와 같다.

주자가 말하기를, “하나가 매양 둘을 낳는 것은 자연의 이(理)이다. 역(易)이라는 것은 음ㆍ양이 변화하는 것이요, 태극이라는 것은 그 이(理)이다. 양의라는 것은 처음의 한 획[一畫]으로 음ㆍ양이 나뉜 것이다. 사상(四象)이라는 것은 그다음 두 획[二畫]으로 태(太)와 소(少)로 나뉜 것이다. 팔괘(八卦)라는 것은 그다음 세 획[三畫]으로 비로소 삼재(三才 하늘ㆍ땅ㆍ사람)의 형상이 갖추어진 것이다. 이 몇 마디 말은 실로 성인이 역(易)을 만드는 자연의 차례에 따른 것이지 추호(秋毫)도 알음알이를 빌어서 이루어진 것은 없다.” 하였다.


한 번은 음(陰), 한 번은 양(陽)이 되는 것을 도라고 이른다.

주자가 말하기를, “음ㆍ양이 서로 운행하는 것은 기(氣)이고, 그 이(理)는 이른바 도(道)이다. 음ㆍ양은 기요, 도가 아니며, 음ㆍ양이 되게 하는 것이 바로 도이다.” 하였다.


이것을 이은 것은 선(善)이요, 이것을 이룬 것은 성(性)이다.

정자가 말하기를, “낳고 낳는 것을 역(易)이라 하는데, 이것이 천도(天道)가 된 것이다. 하늘은 다만 낳는 것으로 도를 삼는데, 이 낳는 이치를 이은 것이 곧 선(善)이다. 선에는 곧 하나의 원(元)이라는 뜻이 있는데, 원(元)이라는 것은 선이 으뜸[長]이다. 만물에는 다 봄처럼 생동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잇는[繼] 것이 선이다. 이룬다[成]는 것은 만물이 스스로 그 성(性)을 이루는 것을 기다려야 얻게 된다.”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도는 음에서 갖추어져서 양으로 행한다. 잇는다[繼]는 것은 그 발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선(善)이라는 것은 조화생육(造化生育)의 공효를 말하는 것으로 양(陽)의 일이다. 이룬다[成]는 것은 갖춘다는 말이요, 성(性)이라는 것은 사물이 받은 것을 말하는 것으로, 사물이 생겨나면 성(性)이 있어서 각각 이 도를 갖추는 것을 말하니, 음(陰)의 일이다.” 하였다.


인자(仁者)는 보고서 인(仁)이라 하고, 지자(知者)는 보고서 지(知)라고 하나, 백성은 날로 쓰면서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가 적은 것이다.

건안 구씨(建安丘氏 구부국(丘富國))가 말하기를, “성(性)이 이루어진 뒤에 사람이 움직이는 양(陽)을 품수한 것이 인(仁)이 되고, 고요한 음(陰)을 품수한 것이 지(知)가 된다. 오직 그 품수한 것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보는 것이 치우쳐, 인자는 인(仁)만 보고 지(知)는 보지 못하므로 그 도가 인에서 그치며, 지자는 지(知)만을 보고 인을 보지 못하므로 그 도(道)가 지(知)에서 그친다. 백성들은 이 도 가운데서 매일 쓰고 먹고 마시며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이런 도가 있는 줄을 알지 못하니, 이것이 군자의 도가 적은 까닭이다.” 하였다. ○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행하면서도 밝게 알지[著] 못하며, 익히면서도 자세히 살피지[察] 못하며, 종신토록 그것을 따르면서도 그 도를 알지 못하는 이가 많다.” 하였다. 주자가 말하기를, “저(著)라는 것은 그 당연한 것을 밝히는 것이고, 찰(察)이라는 것은 그러한 까닭을 아는 것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형이상(形而上)을 도(道)라 하고, 형이하(形而下)를 기(器)라 하며, 바꾸어 이루어 내는 것을 변(變)이라 하고, 미루어 행하는 것을 통(通)이라 하며, 이것을 들어서[擧] 천하의 백성에게 베푸는 것을 사업(事業)이라 한다.

주자가 말하기를, “음ㆍ양은 다 형이하의 것이요, 그 이(理)는 도이다. 그 자연의 변화에 따라 마름질해 내는 것이 변(變)의 뜻이다.” 하였다. ○ 북계 진씨(北溪陳氏 진순(陳淳))가 말하기를, “도는 사물을 떠난 텅 빈 어떤 것이 아니니, 실제로 도는 물을 떠날 수 없으며, 물을 떠나서는 도라는 것이 없다. 군신유의(君臣有義)를 놓고 보자면 의리는 도요, 군신은 기(器)이다. 부자유친(父子有親)을 놓고 보자면 친(親)은 도요, 부자(父子)는 기(器)이다. 부부(夫婦)에는 부부 사이의 분별이 있고, 장유(長幼)에는 어른과 어린이의 순서가 있고, 붕우(朋友)에는 붕우 간의 믿음이 있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물에는 반드시 이(理)가 있으니 모름지기 다 궁리하고 격물(格物)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제 공자의 계사설(繫辭說)을 인용하여 이학(理學)의 근본으로 삼고, 다음에는 경전(經傳)의 여러 설을 인용하여 물에도 존재하고 몸에도 존재하는 이(理)를 대략 밝혀 그 실마리를 구하는 자료로 삼았습니다. 만일 이미 아뢴 것을 가지고 아직 아뢰지 못한 것으로 미루어 넓혀 간다면 치지(致知)의 공부에 가까울 것입니다.


○ 무극(無極)이면서 태극(太極)이다. 주자(周子)의 〈태극도설(太極圖說)〉 아래도 이와 같다.

주자가 말하기를, “하늘에 있는 것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으나 실로 조화(造化)의 중추이며, 만물의 근본(根本)이 된다. 그러므로 무극(無極)이면서 태극(太極)하다고 한 것이니, 태극 밖에 따로 무극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태극이라는 것은 다만 음양 속에 있는 것인데, 지금 사람들이 음양 위에 따로 형체도 없고 그림자도 없는 태극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함은 그릇된 것이다.” 하였다. ○ 면재 황씨(勉齋黃氏 황간(黃榦))가 말하기를, “무극이면서 태극이라는 것은 형체가 없으면서 형체가 있고, 방위가 없으면서도 큰 방위가 있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였다.


태극이 동(動)하여 양을 낳으니 동이 지극하면 정(靜)하여지고, 정하여 음을 낳으니 정이 지극하면 다시 동한다. 동하는 것과 정한 것이 서로 그 근본이 되어, 음으로도 나누어지고 양으로도 나누어져 양의(兩儀)가 성립된다.

주자가 말하기를, “태극이 동하고, 정하는 것이 천명(天命)의 유행(流行)이다. 태극이란 것은 본연(本然)의 묘(妙)요, 동하고 정하는 것은 타는[乘] 바 기(機)이며, 태극은 형이상의 도요, 음과 양은 형이하의 기(器)이다. 그러므로 드러나는 것을 두고 관찰하면, 동하고 정하는 것이 그때가 같지 않고, 음과 양이 위치가 같지 않으나 태극은 어디고 있다. 은미한 것을 두고 보자면 충막무짐(沖漠無朕 공허해서 아무것도 없음)하여, 동정과 음양의 이(理)가 그 가운데 이미 다 갖추어져 있다. 비록 그러하나 이것을 앞으로 미루어 보아도 그 처음에 합해져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이것을 뒤로 끌어 보아도 그 끝에 가서 갈라지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정자가 말하기를, ‘동하고 정하는 것은 끝[端]이 없고 음양은 처음[始]이 없다.’ 하였으니, 도를 아는 자가 아니면 누가 이것을 알 수 있겠는가.”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동하고 정하는 기(機)는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요, 이(理)와 기(氣)도 앞뒤를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기(氣)가 동하고, 정하는 데에는 반드시 이(理)가 근본이 됩니다. 그러므로 태극이 동하여 양을 낳고 정하여 음을 낳는 것입니다. 만일 이 말에 집착하여 태극이 음양 이전에 홀로 있으며 음양은 무(無)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면 ‘음양은 처음이 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새로운 눈으로 보고 깊이 완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양이 변(變)하고 음이 합하여져서 수(水)ㆍ화(火)ㆍ목(木)ㆍ금(金)ㆍ토(土)를 낳으니, 오기(五氣)가 순하게 펼쳐져서 사시(四時)가 행해진다.

주자가 말하기를, “태극이 있으면 한 번은 동하고 한 번은 정하여 양의(兩儀)가 나누어지고, 음과 양이 있으면 한 번은 변하고 한 번은 합하여 오행(五行)이 갖추어진다. 그러나 오행이라는 것은 질(質)이 땅에 갖추어지고 기(氣)가 하늘에 행해지는 것이다. 질(質)로써 그 생겨나는 순서를 말하면 수ㆍ화ㆍ목ㆍ금ㆍ토라 하는데, 수ㆍ목은 양이요, 화ㆍ금은 음이다. 기(氣)로써 그 행하는 순서를 말하면 곧 목ㆍ화ㆍ토ㆍ금ㆍ수라 하는데 목ㆍ화는 양이요, 금ㆍ수는 음이다.” 하였다. 어떤 이가 묻기를, “양은 어찌하여 변한다 하고, 음은 어찌하여 합한다 합니까?” 하여, 대답하기를, “양이 동하면 음이 따르기 때문에 변한다 하고 합한다 한 것입니다.” 하였다.


오행은 하나의 음양이요, 음양은 하나의 태극인데 태극은 본래 무극(無極)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오행이 갖추어지면 곧 생겨나 변화하고 피어나 길러지는 틀이 갖추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또 이에 나아가 근본을 미루어 보면, 그 일체(一體)가 혼연히 무극의 묘(妙) 아닌 것이 없으며, 무극의 묘 역시 하나의 사물에도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하였다.


오행이 생겨날 때에 각각 그 성(性)을 하나씩 갖는다.

장남헌(張南軒 장식(張栻))이 말하기를, “오행의 질(質)에는 같지 않은 것이 있으나, 태극의 이(理)에는 없었던 적이 없다. 오행이 각기 성(性)을 하나씩 갖는다는 것은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의 이(理)를 오행이 각각 그 하나씩 맡는 것이다.” 하였다.


무극의 진(眞)과 음양과 오행의 정(精)이 오묘하게 합하고 엉기어, 건도(乾道)는 남성(男性)을 이루고, 곤도(坤道)는 여성(女性)을 이루며 이기(二氣)가 서로 감응하여 만물을 화생(化生)하니, 만물이 생겨나고 생겨나 변화가 무궁하다.

주자가 말하기를, “진(眞)은 이(理)로써 말한 것으로, 거짓이 없는 것이다. 정(精)은 기(氣)로써 말한 것으로 둘[二]이 없다는 것이다. 묘합이라는 것은 태극과 음양ㆍ오행이 본래 섞이고 융합하여 간격이 없다는 것이다. 이(理)와 기(氣)는 원래 서로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이니 어찌 합함이 있겠는가. 다만 섞이고 융합하여 간격이 없기 때문에 묘합(妙合)이라고 한 것이니, 이 또한 새로운 눈으로 간파하여야 한다. 엉긴다[凝]는 것은 모인다는 것이니 기가 모여서 형체를 이루는 것이다. 대개 성(性)은 주(主)가 되고 음양과 오행은 씨줄과 날줄로 서로 짜여지고 또 각기 동류(同類)끼리 엉겨 모여서 형체를 이루는데, 양이 굳센 것은 남성을 이루니 아비의 도이고, 음으로서 순한 것은 여성을 이루니 어미의 도이다. 이것은 사람과 사물의 시작으로 기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기가 모여서 형체를 이루면 형체와 기운이 교감하면서 드디어 형체가 변화하여 사람과 사물이 생겨나 변화가 무궁해진다. 남녀(男女)로서 보면 곧 남녀는 각각 저마다의 성을 가지고 있지만 남녀가 하나의 태극이요, 만물로서 보면 만물은 각각 저마다의 성을 가지고 있지만 만물이 하나의 태극이다. 대개 합하여 말하면 만물은 전체로 하나의 태극이요, 나누어 말하면 일물(一物)은 각각 하나의 태극을 갖춘 것이다.” 하였다.


오직 사람만이 빼어남을 얻어 가장 영묘하다. 형체가 생겨나면 정신[神]이 지각을 내게 되고, 오성(五性)이 감동하여 선악이 나뉘고, 온갖 일이 생겨난다.

주자가 말하기를, “뭇사람은 동하고 정하는 이(理)를 갖추었으나 항상 이것을 동하는 데에서 실수를 하게 된다. 대개 사람과 사물이 생겨나는 데는 어디나 태극의 도가 있다. 그러나 음양과 오행이 기질(氣質)로 서로 움직일 때 사람이 받은 것이 홀로 빼어남을 얻었다. 그러므로 그 마음은 가장 영묘하여 그 온전한 성(性)을 잃지 아니하였으니, 이른바 천지의 마음이요, 사람의 극치(極致)이다. 그러나 음에서 형체가 생겨나고 양에서 정신이 발하며 오상(五常)의 성이 물에 감응되어 동하여, 음양의 선악이 또 같은 유끼리 나뉜다. 오성이 다른 것은 만 가지 일로 나뉜다. 대개 이기(二氣)와 오행이 만물을 화육(化育)하는데, 사람에게 있어서도 또 이와 같다.” 하였습니다.


성인(聖人)은 중(中)ㆍ정(正)ㆍ인(仁)ㆍ의(義)로써 기준을 정하되 정(靜)한 것을 주로 하여 사람의 법칙[人極]을 세웠다. 그러므로 성인은 천지와 그 덕을 합하였고, 일월과 그 밝음을 합하였고, 사시(四時)와 그 순서를 합하였으며, 귀신과 그 길(吉)ㆍ흉(凶)을 합하였다.

주자가 말하기를, “이것은 성인이 동(動)과 정(靜)의 덕을 온전하게 하되, 항상 정한 것에 근본함을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음양과 오행의 빼어난 기(氣)를 받아서 태어났는데, 성인이 난 것은 또 그 뛰어난 데서 더욱 뛰어난 것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행동이 중(中)에 맞고, 처신하는 것이 바르며, 마음을 내는 것이 어질고, 결단하는 것이 의롭다. 대개 한 번 동하고 한 번 정한 것이 태극의 도를 온전하게 하여 이지러짐이 없으면 욕심이 동(動)하고 정(情)이 이겨서, 이해(利害)가 서로 공격하는 것이 여기서 정해진다. 그러나 정(靜)이란 것은 정성을 회복한 것이요, 성(性)의 정(貞)한 상태이다. 동(動)이란 것은 정성이 통한 것이요, 천도(天道)의 원형(元亨)이다. 정(靜)이란 것은 정성을 회복한 것이요, 천도(天道)의 이정(利貞)이다. 진실로 이 마음이 고요해 욕심이 없어져서 조용하지 않으면 무슨 수로 사물의 변화에 대응하여 천하의 움직임을 통일하겠는가. 그러므로 성인은 중(中)ㆍ정(正)ㆍ인(仁)ㆍ의(義)와 동정(動靜)으로 교류[周流]하되, 움직임은 반드시 고요한 것을 주로 한다. 이것이 중(中)에 자리 잡아 천지ㆍ일월ㆍ사시(四時)ㆍ귀신도 어길 수 없는 바가 있게 하는 이유이다. 대개 반드시 체(體)가 선 뒤에 용(用)이 행해지는 것이다. 정자(程子)께서 건곤(乾坤)과 동정을 논하여 ‘전일(專一)하지 않으면 능히 곧게 나가지 못하고, 합하여 모이지 않으면 능히 흩어져 발하지 못한다.’고 한 것도 이런 뜻이다.” 하였다.


군자는 도리를 닦기 때문에 길(吉)하고, 소인은 도리를 어기기 때문에 흉(凶)하다.

주자가 말하기를, “성인은 태극의 전체(全體)로서 동하고 정하는 것이 가는 데마다 중(中)ㆍ정(正)ㆍ인(仁)ㆍ의(義)의 지극한 것이 아님이 없는데, 이는 닦지 않고도 자연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으나 도리를 닦는 것이 군자가 길해지는 이유요, 이것을 알지 못하고 어기는 것이 소인이 흉해지는 이유이다. 도리를 닦느냐 어기느냐는 역시 공경스러우냐 방자하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공경하면 욕심이 적어지고 이(理)가 밝아지며, 욕심이 적어지고 또 적어져 무(無)에 이르면 곧 고요할 때는 텅 비어 있고 움직일 때는 곧아서 성인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하늘의 도를 세우는 것을 음과 양이라 하고, 땅의 도를 세우는 것을 유(柔)와 강(剛)이라 하며, 사람의 도를 세우는 것을 인(仁)과 의(義)라 한다.’ 하였고, 또 ‘처음으로 추구해 들어가고 끝을 돌이켜 보아 생사(生死)의 이치[說]를 알게 된다.’ 하였으니, 크도다, 역(易)이여, 지극[至]하도다.

주자가 말하기를, “음양이 상(象)을 이루는 것은 천도(天道)가 서기 때문이요, 강(剛)과 유(柔)가 질(質)을 이루는 것은 지도(地道)가 서기 때문이며, 인(仁)과 의(義)가 덕을 이루는 것은 인도(人道)가 서기 때문이다. 도는 하나 뿐이나 일에 따라서 나타나기 때문에 삼재(三才)의 구별이 있고, 그 가운데 각각 체(體)와 용(用)의 나누어짐이 있으나, 그 실상은 하나의 태극이다. 양(陽)ㆍ강(剛)ㆍ인(仁)은 물의 처음이요, 음(陰)ㆍ유(柔)ㆍ의(義)는 물의 끝이다. 그 처음으로 추구해 들어가 태어나는 이유를 알면 그 끝을 돌이켜 보아 죽는 이유를 알게 된다. 이것은 천지 사이의 강기(綱紀)와 조화(造化)가 고금(古今)에 유행하는 것이니, 말할 수 없이 오묘한 것이다. 성인이 주역을 지은 것도 그 큰 뜻이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설을 인용하여 증명한 것이다.” 하였다. ○ 장자(張子)가 말하기를, “기(氣)는 앙연(怏然)히 텅 비어 있으면서 오르내리기도 하고 날아오르기도 하여 한 번도 그친 적이 없다. 이 허실(虛實)ㆍ동정(動靜)의 기틀과 음양(陰陽)ㆍ강유(剛柔)의 시초가 떠서 올라가는 것은 맑은 양이 되고, 떨어져 내려오는 것은 탁한 음이 된다. 만나서 감응하여 만나고, 모여들어 엉겨서 바람과 비가 되고, 서리와 눈도 된다. 모든 것의 형체나, 산과 시내가 이루어진 것이나, 찌꺼기[糟粕]나 불에 탄 재[煨燼]까지도 가르침이 아닌 것이 없다.” 하였다. 섭씨(葉氏)가 말하기를, “무궁한 변화가 다 도체(道體)의 유행이다. 그러므로 지극한 가르침 아닌 것이 없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떠다니는 기운이 어지러이 움직이다가 합쳐서 물질을 이룬 것이 온갖 모양의 사람과 사물을 낳았고, 그 음양의 양단(兩端)이 끊임없이 순환하는 것이 천지의 큰 뜻을 세웠다.” 하였다.


원(元)ㆍ형(亨)ㆍ이(利)ㆍ정(貞)은 천도(天道)의 상(常)이요,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는 인성(人性)의 강(綱)이다. 주자의 〈소학제사(小學題辭)〉

정자가 말하기를, “원(元)이라는 것은 만물의 시초요, 형(亨)이라는 것은 만물의 자라남이요, 이(利)라는 것은 만물이 성숙해 가는 것이요, 정(貞)이라는 것은 만물의 이루어지는 것이다. 건곤(乾坤)은 이 사덕(四德)을 가지고 있다.” 하였다. 건곤(乾坤)은 천지의 성정(性情)이다. ○ 주자가 말하기를, “인(仁)이라는 것은 마음의 덕이고 사랑의 이(理)이다. 의(義)라는 것은 마음을 제재(制裁)하는 것이고 일을 마땅하게 하는 것이다. 의(義)는 마땅한 이치이다. 예(禮)는 천리(天理)의 절문(節文)이요, 인사(人事)의 법도이다.” 하였다. 예는 절문(節文)의 이(理)이다. ○ 또 말하기를, “성(性)은 이가 나에게 있는 것이요, 인(仁)은 온화하고 자애로운 도리이며, 의(義)는 곧 결단하고 분별하는 도리이고, 예(禮)는 공경하고 절제하는 도리이며, 지(智)는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는 도리이니, 이 네 가지는 본래 사람의 마음에 갖추어진 것이며 성(性)의 본체(本體)이다.” 하였다. ○ 오씨(吳氏)가 말하기를, “만세(萬世)토록 바뀌지 않으므로 상(常)이라 하고, 만 가지 선(善)을 빠뜨림 없이 통괄하므로 강(綱)이라고 한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태극이 하늘에 있는 것을 도(道)라 하고, 이 도(道) 자는 천명(天命)이 유행한다는 도로서 솔성(率性)의 도를 말한 것이며, 인물(人物)이 마땅히 행해야 할 도(道)를 말한 것이다. 사람에게 있는 것을 성(性)이라 하니, 원(元)ㆍ형(亨)ㆍ이(利)ㆍ정(貞)은 도가 유행하는 것이요,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는 성(性)이 갖추어진 것입니다. 원(元)은 때로 말하면 봄이 되고, 사람으로 말하면 인(仁)이 되며, 형(亨)은 때로 말하면 여름이요, 사람으로 말하면 예(禮)이며, 이(利)는 때로 말하면 가을이요, 사람으로 말하면 의(義)이며, 정(貞)은 때로 말하면 겨울이요, 사람으로 말하면 지혜[智]입니다. 원ㆍ형ㆍ이ㆍ정은 유행하는 용(用)으로 순서를 삼고, 인ㆍ의ㆍ예ㆍ지는 서로 상대하는 체(體)로 이름을 세운 것이다.


만물이 하나의 근원이라는 면에서는 이(理)는 같고 기(氣)는 다르나, 만물이 다른 형체라는 면에서는 기는 그래도 서로 가까우나 이는 절대로 같지 않다. 기가 다르다는 것은 순수하거나 잡박한 정도가 같지 않은 것이고, 이가 다르다는 것은 치우쳤느냐 온전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이다. 《주자대전(朱子大全)》

주자가 말하기를, “만물에 처음 생명이 부여되었을 때에는 천명(天命)이 유행(流行)하는 것이 같을 뿐이므로 이(理)는 같고, 음양ㆍ오행의 기(氣)는 맑고 탁한 것과, 순수하고 잡박한 것이 있기 때문에 기는 다른 것이다. 만물이 이미 이것을 얻은 뒤에 비록 맑고 탁한 것과, 순수하고 섞인 것이 같지 않은 것이 있으나, 이 음양오행의 기를 같이 하였기 때문에 기는 서로 가깝고, 그 어둡고 밝은 것과, 열리고 막힌 것이 매우 멀기 때문에 이는 절대로 같지 않은 것이다. 기가 서로 가깝다는 것은, 춥고 더운 것을 알고, 배고프고 배부른 것을 알며, 사는 것을 좋아하고, 죽는 것을 싫어하며, 이(利)를 따르고 해(害)를 피하는 것 같은 것으로 사람과 물건이 모두 같다. 이(理)가 같지 않다는 것은 벌과 개미의 군신(君臣) 관계는 다만 이 의리상에서만 조금 밝고, 범과 이리의 부자(父子) 관계는 다만 이 인(仁)에서만 조금 밝다. 다른 것은 다시 미루어 가지 않는다.” 하였다. ○ 정자가 말하기를, “천지ㆍ음양의 변화는 맷돌 위아랫돌과 같다. 오르고 내리는 것과, 차고 빈 것과 세고 부드러운 것이 애당초 멈춘 적이 없어 양은 항상 차 있고, 음은 항상 이지러져 있어 고르지 않다. 비유하자면 맷돌[磨]이 이[齒]가 모두 고르지 아니한데, 고르지 않기에 많은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물이 고르지 않은 것이 물의 정(情)이다.” 하였다.


귀신이라는 것은 두 기[二氣]의 본래 능(能)한 것이다. 《장자정몽(張子正蒙)》

주자가 말하기를, “두 기[二氣]로써 말하면 귀(鬼)라는 것은 음의 영묘한 것이요, 신(神)이라는 것은 양의 영묘한 것이다. 하나의 기[一氣]로써 말하면 이르러서 펴는 것은 신(神)이요, 반대로 돌아오는 것은 귀(鬼)이지마는, 그 실상은 한 가지 물일뿐이다. 본래 능(能)하다 한 것은 오고 가는 것과 굽히고 펴는 것이 이(理)에 자연스러운 것을 말한 것으로, 안배(安排)하여 조치(措置)함을 두는 게 아니다. 두 기[二氣]는 곧 음양이요, 본래 능하다 한 것은 영묘한 것이다.” 하였다. ○ 정자가 말하기를, “귀신(鬼神)이라는 것은 천지의 공용(功用)이요 조화(造化)의 자취이다.” 하였다. 주자가 말하기를, “공용(功用)이라 하는 것은 다만 발현하는 것을 논한 것이니, 찬 것이 오면 더운 것이 가고 해가 지면 달이 뜨고 봄에는 나고 여름에는 자라는 것 같은 것으로 모두 조화(造化)의 미묘한 것으로서 볼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기가 오고 가며 오므리고 펴는 것은 볼 수 있으니, 귀신이 아니면 조화는 자취를 드러낼 수 없다.” 하였다. ○ 장자가 말하기를, “사물이 처음 생겨나면 기가 날로 이르러[至] 번성해지고 사물이 생겨나 차오르면 기가 날로 거꾸로 흩어지는데, 날로 이르는 것을 신(神)이라 하니 펴지기 때문이요, 거꾸로 가는 것을 귀(鬼)라 하는데 돌아가기 때문이다.”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천지 사이에서 사라지는 것은 귀(鬼)이고 불어나는 것은 신(神)이며, 사는 것은 신이고 죽는 것은 귀이다. 사시(四時)에서는 봄ㆍ여름은 신이고 가을ㆍ겨울은 귀이다. 사람에서는 혼(魂)은 곧 신이고 백(魄)은 곧 귀이며, 말하는 것은 신이고 침묵하는 것은 귀이며, 동(動)하는 것은 신이고 정(靜)하는 것은 귀이며, 숨을 내쉬는[呼] 것은 신이고 들이마시는[吸] 것은 귀이다.” 하였다.

이상은 천지인물의 이치를 통틀어 말씀드렸습니다. 이 이하는 사람에게 있는 이치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만물 중에서 사람이 귀한 것에 대하여


○ 사람이라는 것은 천지의 덕이고 음과 양의 사귐이며, 귀신이 모인 것이고 오행(五行)의 빼어난 기운이다. 그러므로 사람이라 함은 천지의 마음이다. 《예기》

장자가 말하기를, “천지의 덕은 사람의 덕성(德性)이 천지의 성(性)과 같음을 말하니 사람이 귀한 까닭이 여기 있다. 오행(五行)의 기를 받아 태어나서 만물 중 가장 영특하니, 이것이 빼어나다는 것이다. 대개 나는 것은 펴는 것이고, 마치는 것은 돌아가는 것인데, 한 물체가 그 처음과 끝을 겸하였으니 귀신이 모인 것이다. 음과 양의 사귐과 귀신의 모임과 오행의 기(氣)는 모든 사물이 날 때 다 그러하지만 사람만이 그것을 다 갖추었다.”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교화(敎化)는 다 사람이 만든 것이므로 이것을 천지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 용천 섭씨(龍泉葉氏 섭도(葉濤))가 말하기를, “천지의 정성(情性)은 사람이 아니면 체득하여 참여하지 못하며, 천지의 공용(功用)은 사람이 아니면 능히 살펴서 본받지 못한다. 천지가 쉬지 않는 까닭을 인도(人道)를 통해 알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이 천지의 마음이 된다고 한 것이다.” 하였다.

이상은 사람이 만물 가운데 귀하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본연의 성에 대하여


○ 위대하신 상제(上帝)께서 백성에게 충(衷 중용의 도)을 내리시니 그대로 따라 좇아[若] 떳떳한 성품을 갖게 되었다. 《상서(商書)》 〈탕고(湯誥)〉

채씨(蔡氏)가 말하기를, “황(皇)은 큰 것이요, 충(衷)은 중용이요, 약(若)은 따르는 것이다. 하늘이 명(命)을 내려, 인ㆍ의ㆍ예ㆍ지ㆍ신의 이(理)를 갖추어 편벽되거나 기우는 바가 없는 것을 충(衷)이라 한다. 사람이 명을 품수[稟命]하여 인ㆍ의ㆍ예ㆍ지ㆍ신의 이를 갖추어 마음과 함께 타고난 것을 성(性)이라고 한다.” 하였다. ○ 유강공(劉康公)이 말하기를, “백성이 천지의 중(中)을 받아 생겨나는 것을 명(命)이라고 한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하늘로 말하면 이것을 명(命)이라 하고, 사람으로 말하면 이것을 성(性)이라 하는데, 실상은 한 가지입니다.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다 사람에게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을 가지고 있다.” 하였다. 《맹자》 아래도 이와 같다.

주자가 말하기를, “천지는 만물을 내는 것을 마음으로 삼고, 생겨난 사물은 각각 천지가 사물을 내는 마음을 얻는 것을 마음으로 삼으니, 사람이 다 사람에게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하였다.


사람이 다 사람에게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지금 어떤 사람이건 어린아이가 갑자기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면, 모두가 깜짝 놀라[怵惕] 측은한 마음을 갖게 되는데, 그것은 어린아이의 부모와 알고 지내려는 것도 아니고, 마을 사람이나 친구들에게 명예를 얻으려는 것도 아니며, 비난하는 소리를 듣는 게 싫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주자가 말하기를, “사(乍)는 홀연 이라는 뜻이요, 출척(怵惕)은 놀라는 모양이다. 측(惻)은 근심하는 것이 간절한 것이요, 은(隱)은 아픈 것이 심한 것이니, 이것이 바로 사람이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는 마음이다. 납[內]은 맺는다는 것이고, 요(要)는 구한다는 것이며, 성(聲)은 명예이다. 명(名)은 사람을 구원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오명(惡名)을 얻는 것이다. 갑자기 보았을 때에 문득 이 마음이 보는 것을 따라 발하는 것이고, 위의 세 가지로 말미암아 그런 것은 아니다.” 하였다. ○ 정자가 말하기를, “강자(腔子)에 가득한 것은 이 측은한 마음이다.” 하였다. 주자가 말하기를, “강자(腔子)는 몸이라는 말과 같다.” 하였다.


이것으로 본다면 측은한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럽거나 미워하는[羞惡]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辭讓)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는 마음이 없어도 사람이 아니다.

주자가 말하기를, “수(羞)는 자기의 착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이고, 오(惡)는 남의 착하지 못한 것을 미워하는 것이다. 사(辭)는 풀어서 자기에게서 떠나게 하는 것이고, 양(讓)은 미루어서 남에게 주는 것이다. 시(是)는 착한 것을 알아 옳다고 하는 것이고, 비(非)는 악한 것을 알아 그르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이 네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측은한 것을 말하면서 다른 것까지 다 들어 말하였다. 사람에게 만일 이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하여 반드시 있어야 함을 밝힌 것이다.” 하였다.


측은한 마음은 인(仁)의 실마리[端]이고,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의(義)의 실마리이며, 사양하는 마음은 예(禮)의 실마리이고,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는 마음은 지혜의 실마리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측은하다거나, 부끄러워하고 미워한다거나, 사양한다거나,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은 정(情)이요, 인ㆍ의ㆍ예ㆍ지는 성(性)이다. 단(端)은 실마리이다. 그 정이 발하기 때문에, 성의 본연(本然)을 볼 수 있는데, 마치 물이 중(中)에 있으면 실마리가 밖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다.” 하였다.


사람이 이 사단(四端)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체(四體)를 가진 것과 같은데, 이 사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불능(不能)하다고 하는 이는 스스로를 해[賊]하는 자요, 자기 임금은 할 수 없다고 이르는 이는 그 임금을 해하는 자다.

주자가 말하기를, “사체(四體)는 사지(四肢)이니, 사람이 반드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불능하다고 하는 것은 물욕이 이를 가렸기 때문이다.” 하였다.


대개 나에게 있는 사단(四端)을 모두 확충(擴充)할 줄 알면, 불[火]이 타오르기 시작하는 것과 같고, 샘[泉]이 처음으로 솟아나기 시작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진실로 이것을 채울 수 있다면 사해(四海)를 보전할 수도 있지만, 진실로 이것을 채우지 못하면 부모도 섬길 수 없을 것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확(擴)은 미루어 넓히는 것이요, 충(充)은 채우는 것이다. 사단은 나에게 있으면서 상황에 따라서 나타나는 것인데, 미루어 넓혀서 본연(本然)의 도량을 충만하게 할 줄을 알면 날로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져서 스스로 그만둘래야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채워 나가면 사해가 비록 멀더라도 역시 내 안에 있게 되어 보전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며, 채워 나가지 못하면 아무리 가까운 일이라도 해내지 못할 것이다. 이 장(章)에서는 사람의 성정(性情)과 마음의 체용(體用)이 본래 완전히 갖추어져서 각각 조리가 있음이 이와 같다는 것을 논하였다. 배우는 자가 여기서 돌이켜 구하고 묵묵히 이해하여서 이것을 확충하면, 곧 하늘이 나에게 준 것을 다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 정자가 말하기를, “사단(四端)에서 신(信)을 말하지 않은 것은 이미 성심(誠心)이 있기 때문에 사단이 되는 것이니, 신(信)은 그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하였다. 주자가 말하기를, “사단의 신(信)은 오행의 토(土)와 같아서 정한 위치도 없고, 이룬 이름도 없으며, 전일한 기(氣)도 없으나, 수(水)ㆍ화(火)ㆍ금(金)ㆍ목(木)이 이것을 기다려서 생겨난다. 그러므로 토는 사행(四行) 어디에나 있고, 사시(四時)에서 왕성[王]할 때에 붙으니, 그 이치가 역시 이와 같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마음은 살아 있는 도이다. 사람은 이 마음을 가지고 이 모양을 갖추어서 태어난다. 측은한 마음은 사람이 살아가는 도로 걸왕(桀王)ㆍ도척(盜蹠) 같은 이라도 이것이 없이는 살지 못한다. 다만 이것을 해쳐서 하늘을 멸할 뿐이다. 처음에는 사물을 사랑할 줄 모르다가 조금 있으면 차마 저지르는 데 이르고,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 살육하는 데까지 이르며, 이 마음을 채워 나가 살육을 좋아하기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니, 어찌 사람의 이(理)이겠는가.” 하였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하늘이 백성을 낳으니 사물이 있으면 법칙이 있도다. 백성들이 간직한 성품이 아름다운 덕[懿德]을 좋아한다.” 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시를 지은 이는 그 도를 아는구나. 그러므로 사물이 있으면 반드시 법칙이 있다. 백성에게 떳떳한 성품[彝]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덕을 좋아한다.” 하였다.

주자가 말하기를, “시는 〈대아(大雅)〉ㆍ〈증민(烝民)〉의 편(篇)이다. 증(烝)은 무리이고, 물(物)은 일이며, 칙(則)은 법칙이요, 이(彝)는 떳떳한[常] 것이고, 의(懿)는 아름다운 것이다. 사물이 있으면 반드시 법칙이 있는 것은 귀와 눈이 있으면 총명의 덕이 있고, 부자(父子)가 있으면 사랑하고 효도하는 마음이 있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백성이 간직한 바 떳떳한 성(性)이다. 그러므로 인정상 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지 않는 이가 없는 것이니, 사람의 성품이 착한 것을 알 수 있다.” 하였다.


만물이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다.

주자가 말하기를, “크게는 군신(君臣)ㆍ부자(父子), 작게는 사물의 세밀한 것까지, 하나라도 당연한 이(理)가 성분(性分) 안에 갖추어져 있지 않은 것이 없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성(性)은 태극의 혼연한 체(體)이므로 본래 이름 지어 말하지 못한다. 다만 그중에 만 가지 이치가 포함되어 있는데, 벼리[綱]가 되는 큰 이치가 넷이 있다. 그러므로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라고 명한 것이다. 공자 때에는 성선(性善)의 이(理)가 본래 밝았으므로 비록 그 조목을 자세히 드러내지 않아도 그 말이 스스로 온전했었지만, 맹자 때에 이르러서는 이단(異端)이 많이 일어나서 성(性)을 불선(不善)하다고 여기기도 하였다. 맹자는 이 이가 밝혀지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밝히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다만 혼연한 전체(全體)라고만 하면 눈이 없는 저울[秤]이나 마디 없는 자[尺]와 같아서 마침내 천하 사람들을 깨우치지 못할까 염려하였다. 그래서 분별하여 말하여 넷으로 나누니, 사단(四端)의 설이 성립하게 된 것이다. 대개 사단이 발하지 않으면 비록 적연(寂然)히 동(動)하지 않으나 그중에 스스로 조리가 있고 짜임새가 있어서, 흐릿하여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외부에서 자극이 있으면 내면(內面)에서 문득 응하니, 사단이 발하는데 각각 다른 면모(面貌)가 있는 것이다. 혼연한 전체(全體) 중에 빛나는 조리가 있는 것이 이러하니 성(性)의 선한 것을 알 수 있다.” 하였다. ○ 진씨(眞氏)가 말하기를, “사람이 사람인 이유는 천지와 함께 삼자(三者)가 되기 때문이다. 대개 형체에는 크고 작은 구분이 있으나, 이(理)에는 크고 작은 구별이 없다. 이(理)는 무엇인가? 인ㆍ의ㆍ예ㆍ지가 그것이다. 천도(天道)로 말하자면 원(元)ㆍ형(亨)ㆍ이(利)ㆍ정(貞)이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한 가지이다. 사람은 천지와 더불어 본래 하나요 둘이 아닌데, 달라지는 이유는 하늘과 땅은 무심(無心)한데 사람은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천지의 거룩한 명(命)은 예로부터 항상 새로워서 원(元)하면 형(亨)하고, 형하면 이(利)하고, 이하면 정(貞)하며, 정하면 또 원(元)하여, 한 번 통하며 한 번 되돌아와 끊임없이 순환한다. 사람은 날 때부터 모두 이 이(理)를 전부 갖추었으되, 오직 그 형체에 얽매임이 있어서 물욕의 사사로움이 없지 않다. 그러므로 측은한 마음이 발하여 흔들림이 있게 되면 인(仁)을 충실히 하지 못하고, 부끄럽다거나 미워하는 마음이 발하여 빼앗김이 있게 되면 의(義)를 충실히 하지 못한다. 공경(恭敬) 사양(辭讓)을 공경(恭敬)이라고 한다. 과 시비(是非)의 발함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맹자가 확충(擴充)하라는 한마디 말에 간절했던 이유이다. 대개 선한 실마리가 발할 때 그 시초에는 매우 은미하다. 이는 마치 음양의 기(氣)가 동지와 하지에서 시작되는데, 처음에는 다 묘연하여 나타나지 않다가 양(陽)이 점점 자라서 1월에 이르면 천지의 기가 화(和)하여 물(物)이 다 발달하고, 음(陰)이 점점 자라서 7월에 이르면 천지의 기가 엄숙하여 물(物)이 다 수렴(收斂)하는 것과 같다. 천지 만물이 나서 자라는 이(理)는 다 은미한 데서부터 시작하여 나타나는 데에 이르는 것이니, 한 해라도 그렇지 아니한 것이 없다. 사람이 천지의 마음을 체득하여 제 마음으로 삼고 그 선한 실마리가 펴지는 것을 통해, 보양(保養)하고 부지(扶持)하여 그 해치는 바를 제거한다면, 불이 타오르는 데 더 부채질하는 것과 같고, 샘물이 솟아나는 데 더 터 주는 것과 같아서 측은하게 마음먹는 한 생각이 백세(百世)를 윤택하게 하고, 부끄러워하거나 미워하는 한 생각이 만백성을 바르게 하여, 요순(堯舜)의 인(仁)과 탕무(湯武)의 의(義)가 천지와 더불어 그 큰 것을 같이한 까닭을 확충(擴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상은 본연의 성을 논한 것입니다.

신이 생각건대, 사람의 한 마음에는 만 가지 이치가 전부 갖추어져 있으니, 요순의 인(仁)과 탕무의 의(義)와 공(孔)ㆍ맹(孟)의 도(道)는 다 고유한 성분(性分)입니다. 다만 앞으로는 기품(氣稟)에 얽매이고 뒤로는 물욕에 빠져 공명(公明)한 사람이 혼미해지고, 정대(正大)한 사람이 사특해져서, 멍청하게 어리석은 중인(衆人)이 되어 새나 짐승과 실상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러나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이(理)는 그대로 공명하고 정대합니다. 가리어졌을 뿐 끝내 사라질 리는 없기 때문에 진실로 혼미한 것을 제거하고 사특한 것을 끊어 버린다면, 밖에서 빌리지 않더라도 요ㆍ순ㆍ탕ㆍ무ㆍ공ㆍ맹과 같은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자기 집에 무진장의 보물(寶物)이 있는데 으슥한 곳에 묻어 둔 채 모르고 지내면서 빈한하게 구걸하고 사방을 떠돌아다니다가 선각자(先覺者)를 만나 보물이 매장된 곳을 알려 주자, 독실히 믿어서 의심하지 않고 그 매장한 것을 발굴하니, 무진장의 보화가 다 자기의 소유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이치가 매우 명백한데 사람들이 자각하지 못하니 슬픈 일입니다. 다만 이 마음에 이(理)가 갖추어져 있다는 것만 알 뿐, 그 가리어져 있는 것을 제거하는 데 힘쓰지 않는다면, 실로 보물이 매장된 곳도 알지 못하면서 나는 보물을 가지고 있노라고 함부로 말하는 것일 뿐이니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유념(留念)하시옵소서.


 

기질의 성에 대하여


○ 형체가 있은 후에 기질(氣質)의 성(性)이 있는데, 이를 잘 돌이켜야 거기에 천지의 성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기질의 성을 성이 아니라고 했다. 《장자전서(張子全書)》 〈정몽(正蒙)〉

주자가 말하기를, “천지의 성은 오로지 이를 가리켜 말한 것이요, 기질의 성은 이(理)에 기가 섞인 것을 말한다. 다만 이 성(性) 본연의 성이다. 이 기질 가운데 있기 때문에, 기질을 따라서 스스로 하나의 성(性)이 된다. 기질의 성이다. 성은 물[水]에 비유하면 본래는 다 맑은 것이므로 맑은 그릇에 담으면 맑고 더러운 그릇에 담으면 혼탁해진다. 맑게 다스리면 본연의 맑은 것이 있지 않음이 없다.” 하였다. ○ 섭씨(葉氏)가 말하기를, “기(氣)가 모여서 형체를 이루나 성(性)이 기질에 구애되어 순박(純駁)ㆍ편정(偏正)한 차이가 있으니, 이른바 기질의 성이다. 사람이 능히 선한 도리로 스스로 반성하면 곧 천지의 성이 다시 완전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기질의 성을 군자는 성이라고 하지 않는다. 대개 기질의 치우침을 따르지 않고 반드시 그 본연의 선(善)을 회복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 정자가 말하기를, “성(性)은 하늘에서 나오고, 재주는 기질에서 나오니, 기질이 맑으면 재주도 맑고, 기질이 흐리면 재주도 흐려진다. 재주에는 선(善)도 있고 불선(不善)도 있지만, 성에는 불선이 없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성을 논하고 기를 논하지 않으면 구비되지 않고, 기를 논하고 성을 논하지 않으면 밝지 않으니, 둘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하였다. 섭씨(葉氏)가 말하기를, “성의 선(善)한 것만 논하고 그 기품(氣稟)이 같지 않은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찌하여 지혜롭고 어리석음을 둘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구비되지 않았다고 한 것이다. 기품의 다른 것만 논하고 그 성(性)이 다 선(善)하다는 것을 찾아 들어가지 않는다면, 이것은 그 근본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밝지 않다고 한 것이다. 성이란 기(氣)의 이이고, 기란 성의 질(質)이므로 원래 서로 떠나지 못하는 것인데, 갈라서 둘로 하면 역시 잘못이다.” 하였다.

이상은 기질의 성을 논하였습니다.

신이 생각건대, 본연의 성과 기질의 성은 두 가지 성(性)이 아닙니다. 기질의 위에 나아가 단순히 그 이(理)만을 가리켜 본연의 성이라 하고, 이와 기질을 합하여 기질의 성이라고 명명(命名)한 것입니다.


 

심ㆍ성ㆍ정에 대하여


○ 사람이 나서 정(靜)하는 것은 하늘의 성이요, 물에 감응하여 동(動)하는 것은 성의 욕(欲)이니, 사물이 이르러 지각을 통해 안 뒤에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好惡]이 나타난다. 《예기(禮記)》 아래도 이와 같다.

유씨(劉氏)가 말하기를, “사람이 나서 정하는 것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발하지 않은 중(中)인데, 이는 천명(天命)의 성이요, 물에 감응하여 동하면 곧 성이 발하여 정(情)이 된다.”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위의 지(知)는 체(體)이고, 아래의 지(知)는 용(用)이다.” 하였다.


무엇을 인정(人情)이라고 하는가? 희(喜)ㆍ노(怒)ㆍ애(哀)ㆍ구(懼)ㆍ애(愛)ㆍ오(惡)ㆍ욕(欲)의 일곱 가지는 배우지 않고도 능한 것이다.

정자가 말하기를, “천지가 정(精)을 쌓아서 오행(五行)의 우수한 것을 얻은 것이 사람이 된다. 그 근본은 참되고 정(靜)한 것이라 그 미발(未發)한 때에 오성(五性)이 갖추어지니, 인ㆍ의ㆍ예ㆍ지ㆍ신이라 한다. 형체가 생겨나면 외물(外物)이 그 형체에 부딪쳐서 그 중(中)을 동(動)하게 한다. 그 중이 동하여 칠정이 나오는데 희ㆍ노ㆍ애ㆍ구ㆍ애ㆍ오ㆍ욕이라 한다. 정(情)이 타올라 더욱 들끓게 되면, 본성이 깎이게 된다. 그러므로 선각자는 그 정(情)을 절제하여 중에 일치하게 해서,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 그 성을 기르며, 어리석은 자는 곧 이것을 제재하지 못하여, 그 정을 따르다가 간사하고 치우치는데 이르게 되고, 그 성을 질곡(桎梏)하여 없애 버린다.” 하였다. ○ 어떤 사람이, “애(愛)와 욕(欲)을 어떻게 구별합니까?” 물으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애는 널리 사랑하는 것이요, 욕은 반드시 얻는 데 뜻을 두는 것이다.” 하였다.


제(帝 순 임금)가 말하기를, “인심(人心)은 위태롭고 도심(道心)은 미묘하니 정밀하고 전일하게 하여 그 중을 잘 잡으라.” 하였다. 〈우서(虞書)ㆍ대우모(大禹謨)〉 ○ 순(舜)이 우(禹)에게 명한 말씀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마음의 허령(虛靈)이나 지각(知覺)은 하나일 뿐인데, 인심과 도심이 다른 것은 형체의 사사로움에서 생겨나기도 하고, 성명(性命)의 정(正)에 근거하기도 하여 지각(知覺)하는 바가 같지 않다. 그러므로 위태로워서 편안하지 않고 미묘하여서 보기 어렵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이 형체를 갖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에, 비록 뛰어난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도 인심이 없을 수 없으며, 또한 이 성이 없는 이가 없기 때문에, 비록 어리석은 이라 할지라도 도심이 없을 수 없다. 두 가지가 마음 사이에 섞여 있는데, 이것을 다스릴 줄을 모른다면, 곧 위태로운 것은 더욱 위태로워지고, 미묘한 것은 더욱 미묘해져서 천리(天理)의 공평한 것이 마침내 사람의 사사로운 욕심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정(精)하면 곧 이 두 가지 사이를 살펴 잡되지 않을 것이요, 전일하면 곧 그 본심의 정(正)한 것을 지켜서 이탈하지 않을 것이니, 여기에 종사하여 조금의 빈틈도 없어 반드시 도심이 항상 한 몸의 주재가 되고, 인심이 언제나 그 명을 따른다면 곧 위태로운 것이 편안해지고 미묘한 것이 나타나서, 동정(動靜)ㆍ운위(云爲 말하고 행하는 것)가 자연히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잘못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 오봉 호씨(五峰胡氏 호굉(胡宏))가 말하기를, “천리와 인욕은 같이 가지만 그 정(情)은 다르다.” 하였다. 주자가 말하기를, “다만 이 한 사람의 마음이 도리에 합하는 것은 천리이며, 정욕(情欲)에 따르는 것은 사람의 욕심이다. 마땅히 이 분계(分界)에서 이해해야 한다.” 하였다. ○ 잠실 진씨(濳室陳氏 진식(陳埴))가 말하기를, “이 말은 깊이 음미해야 한다. 음식이나 남녀의 욕정은 요순이나 걸주(桀紂)나 마찬가지이다. 다만 이치에 맞고 절도에 맞으면 천리가 되고, 이치에 어긋나고 절도에 어긋나면 곧 사람의 욕심이 된다.” 하였다. ○ 어떤 사람이, “음식 가운데 어느 것이 천리이며, 어느 것이 사람의 욕심입니까?” 물으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마시고 먹는 것은 천리이나, 진미(眞味)를 요구하는 것은 사람의 욕심이다.” 하였다. ○ 면재 황씨(勉齋黃氏 황간(黃榦))가 말하기를, “요순(堯舜) 같은 성인이 제왕(帝王)이란 높은 자리에 처해서도 그 마음을 다스리는 바가 이와 같았는데, 세상에서 배우는 자가 이 마음이 중한 것을 알지 못하고, 정(情)에 따르고 욕심을 부려 교만하고 안일하고 방자하고 멋대로 행동해, 생각하는 사이에 위로 올라 하늘을 날아오르거나 축 처져서 가라앉거나 뜨겁게 불이 붙거나 차갑게 얼어붙거나 하니 어찌 민망하지 않겠는가. 성현의 교훈[垂訓]이 환하게 명백한데 배우는 자로서 어찌 깊이 생각하여 익혀 음미하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 서산 진씨(西山眞氏 진덕수(眞德秀))가 말하기를, “인심유위(人心惟危) 이하의 16자는 곧 요ㆍ순ㆍ우(禹)가 전해 준 심법(心法)이요, 만세 성학(聖學)의 근본이다. 선유(先儒)의 교훈이나 주석(註釋)이 비록 많으나, 유독 주자의 설이 가장 정확하다. 무릇 성색(聲色)과 취미(臭味)의 욕심은 이른바 인심이요, 인ㆍ의ㆍ예ㆍ지의 이(理)는 이른바 도심이다. 인심이 발하는 것은 날카로운 창날이나 사나운 말과 같아서 쉽게 제어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위태롭다 한 것이다. 도심이 발하는 것은 불이 처음으로 타오르거나 샘물이 솟아나는 것과 같아서 쉽게 채우고 넓히지 못하는 점이 있다. 그러므로 미묘하다고 한 것이다. 의리는 정미(精微)하여 보기 어렵기 때문에 미(微)라 한 것이요, 쉽게 채우고 넓히지 못하기 때문에 이름한 것은 아니다. 다만 서산(西山)의 설도 통(通)하여 따로 일설(一說)이 될 만하기에, 이것을 취하였다. 오직 평소에 씩씩하고 공경스러운 것으로써 스스로를 견지하여, 한 생각이 따라 일어나는 바를 살펴서, 그 성색(聲色)과 취미(臭味)를 위하여 발한 것이라면, 곧 힘쓰고 잘 다스려서 불어나고 자라나지 못하게 해야 하며, 그 인ㆍ의ㆍ예ㆍ지를 위하여 발한 것이라면 곧 한결같은 의지로 지켜서 변천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대개 이렇게 하면, 이(理)ㆍ의(義)는 항상 간직되고 물욕이 물러날 것이니, 이것으로써 만 가지 변화에 응대(應對)하면 무엇을 하든 중(中) 아닌 것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주자가 만년(晩年)의 정론(定論)에서 인심을 사람의 욕심으로 삼지 않았으니, 대개 인심은 다만 형기(形氣)에서 난 것이라, 성인이라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심이 주재가 되어 도심의 명을 따르지 않은 뒤에야 인욕(人欲)이 되는 것이다. 진씨(眞氏)의 설이 인심을 바로 해석한 것은 아니나, 천리와 사람의 욕심을 논한 것이 분명하여 배우는 이에게 유익하므로 아울러 취하였다.


마음은 성정(性情)을 통괄(統括)한 것이다. 《횡거어록(橫渠語錄)》

주자가 말하기를, “통(統)은 주재한다는 뜻이다. 성은 마음의 이(理)요, 정은 마음의 용(用)이요, 마음은 성정의 주재이니, 곧 이(理)를 갖추어서 이 정을 행하는 것이다. 지(智)로써 말하면, 시비(是非)의 이를 아는 것은 성이요, 시비를 알고 시비를 가리는 것은 정이요, 이 이를 갖추어 그 시비가 되는 것을 깨닫는 것이 마음이다. 이 분별에는 다만 털끝만큼의 차이가 있을 뿐이어서 정밀하게 살펴야 볼 수 있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마음의 전체가 맑게 텅 비어 빛나되 만 가지 이치가 구비되어, 그 유행(流行)이 동(動)ㆍ정(靜)에 관통하였으니, 그 미발한 전체로써 말하면 성(性)이요, 그 이발(已發)한 묘용(妙用)함으로써 말하면 정(情)이다. 그러나 다만 혼돈한 일물(一物) 중에 나아가서 그 이발과 미발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지, 성(性)도 한쪽에 있고 마음도 한쪽에 있고, 정도 한쪽에 있는 것으로서 이렇게 떨어져 있다는 것은 아니다.” 하였다. ○ 소자(邵子 소옹(邵雍))가 말하기를, “성(性)은 도의 형체요, 마음은 성의 성벽(城壁 성 밖의 큰 성)이며, 몸은 마음의 집이요, 물(物)은 몸을 싣는 배와 수레이다.” 하였다.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금수(禽獸)와 다른 것이 거의 없는데[幾希], 서민은 그 다른 것을 버리고, 군자는 이것을 가지고 있다.” 하였다. 《맹자》 아래도 이와 같다.

주자가 말하기를, “기희(幾希)는 적다는 뜻이다. 사람과 사물은 나면서부터 천지의 이를 다 같이 얻어서 성이 되고, 천지의 기를 다 같이 얻어서 형체가 된다. 그러나 그 같지 않은 것은 사람은 그 사이에서 형기(形氣)의 바른 것을 얻어서 그 성을 온전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조금 다를 뿐이다. 비록 조금 다르다고는 하나 인물이 구분되는 까닭이 실로 여기에 있다. 뭇사람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이를 버리니, 이름은 비록 사람이지마는 실상은 금수와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군자는 이것을 알고 보존하여 조심하고 두려워해서 마침내 그 받은 바의 바른 것을 온전하게 할 수 있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사람과 사물이 같은 것은 이(理)이고, 천지의 성은 사람과 사물이 한 가지이다. 같지 아니한 것은 마음이다. 기(氣)에는 치우치거나 바름, 통하거나 막힘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마음이 같지 않은 것이다. 인심은 허령(虛靈)하여 밝지 않은 것이 없으나, 금수는 어두워서 다만 한두 가지의 밝은 것이 있을 뿐이니, 부자(父子)간에 서로 사랑한다거나 자웅(雌雄)이 서로 구별되는 것과 같은 유이다. 사람의 허령함은 다 미루어 나갈 수 있지만 금수는 더 이상 미루어 나갈 수 없다. 사람이 만약 사사로운 욕심으로 그 허령함을 가린다면 이는 금수이니, 사람과 금수는 다만 이런 사소한 데서 구분되기 때문에 기희(幾希)라고 한 것이다.” 하였다. ○ 범씨(范氏 범준(范浚))가 〈심잠(心箴)〉에서 이르기를, “망망(茫茫)한 천지는 굽어보고 쳐다보아도 끝이 없다. 사람이 그 사이에 아주 작은 몸을 두었으니, 이 몸의 작은 것은 큰 창고의 쌀알과 같다. 그런데도 삼재(三才)에 참여하게 된 것은 오직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누군들 이 마음이 없었겠는가마는, 마음이 물욕에 끌리어 길짐승, 날짐승처럼 되는 것이다. 오직 입ㆍ귀ㆍ눈ㆍ손ㆍ발이 동(動)ㆍ정(靜)하는 사이에서 가만히 틈을 타서 그 마음의 병통이 된다. 미미한 마음을 놓고 뭇 욕심이 공격하니, 간직할 수 있는 것이 거의 드물다. 군자는 정성을 다하여 잘 생각하고 잘 공경하므로 마음이 태연하고 온몸이 마음의 명령을 따른다.” 하였다.


그 마음을 다하는 이는 그 성(性)을 안다. 그 성을 알면 하늘을 알게 된다.

주자가 말하기를, “마음이란 사람의 신명(神明)인데 뭇 이치를 갖추어서 만 가지 일에 응하는 것이요, 성이란 마음이 갖춘 이치요, 하늘은 또 이(理)가 그것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하늘이 곧 이(理)이니, 이 이는 성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하늘은 넓어서 끝이 없는데, 성은 그 온전한 것을 받았기 때문에 사람의 본심은 그 체가 확연하고 또한 한량이 없다. 그러나 오직 그 형기의 사사로움에 질곡(桎梏)되고, 듣고 보는 것이 작은 것에서 막혀서 가려져 다하지 못한 바가 있다. 사람이 능히 사물에 나아가서 그 이(理)를 궁구하여 어느 날엔가 남김없이 이해하고 관철하면 곧 그 본연의 체(體)를 온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마음의 전체를 극진히 하여 부진(不盡)한 것이 없을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이(理)를 극진히 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 이미 그 이를 알면 거기에서 따라 나오는 바도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러므로 《대학(大學)》의 서(序)로써 말하면, 지성(知性)은 물격(物格)을 이른 것이요, 진심(盡心)은 지지(知至)를 이른 것이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물(物)이나 몸에 있는 이는 다 마땅히 궁구할 것이지마는, 물에 있는 것은 넓고 넓기 때문에 대략 말하고, 몸에 있는 것은 간요하고 절실하기 때문에 좀 자세히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 몸에 있는 것은 상세히 해야 하고, 물에 있는 것은 대충해도 됨을 말한 것은 아닙니다. 가까이 생각하고 유추하기를 끝까지 다하면 아주 작은 사물이나 아주 작은 일이라도 그 이치를 통찰하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니, 하물며 광대한 천지와 미묘한 귀신의 세계에 대해 상세히 알지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신이 또 생각건대, 선유(先儒)의 심(心)ㆍ성(性)ㆍ정(情)의 설은 자세히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각각 중점을 두는 바가 있어서 말이 같지는 않습니다. 그 때문에 뒷사람들이 말에 얽매여 뜻에 혼란을 일으키는 이가 많습니다. 성이 발하여 정이 되고, 마음이 발하여 뜻이 된다고 하는 것은, 뜻이 각각 존재하여서 심ㆍ성을 두 가지 작용으로 나눈 것이 아닌데, 뒷사람들이 마침내 정과 뜻을 두 갈래로 생각하였습니다. 성이 발하여 정이 된다는 것은 이(理)가 없다는 것이 아니요, 마음이 발하여 뜻이 된다는 것은 성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마음은 성을 다할 수 있으나, 성은 마음을 검속할 수 없고, 뜻은 정을 운행할 수 있으나 정은 뜻을 운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정을 주로 하여 말한다면 성에 속하고, 뜻을 주로 하여 말한다면 마음에 속하지마는, 실상은 성은 마음이 미발(未發)한 것이요, 정과 뜻은 마음이 이발(已發)한 것입니다. 사단(四端)은 다만 이만 말한 것이고, 칠정(七情)은 이와 기를 합하여 말한 것이며, 두 가지 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뒷사람들은 마침내 이와 기가 서로 발한다고 생각하였으니, 사단은 성 가운데 본연의 성을 말한 것과 같고, 칠정은 성을 이기(理氣)를 합하여 말한 것과 같습니다. 기질(氣質)의 성은 본성이 기질 가운데 있는 것으로, 두 가지 성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칠정은 실로 사단을 포괄한 것이요, 두 정이 아닙니다. 모름지기 두 성이 있어야 비로소 두 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정(情)과 의(意)를 두 갈래[歧]로 보는 것과 이기(理氣)가 서로 발한다는 설을 분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대개 마음의 체(體)는 성이요, 마음의 용(用)은 정인데, 성정 밖에 다시 다른 마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자가 말하기를, “마음이 동하는 것이 정이다.” 주자의 말은 여기서 끊어집니다. 하였습니다. 정은 물(物)에 감동하여 처음으로 발하는 것이요, 뜻은 정에 따라 따지는 것이니, 정이 아니면 뜻이 말미암을 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자가 말하기를, “뜻은 정에 있는 것을 말미암아 작용한다. 마음이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을 성이라 하고, 마음이 감동하여 드디어 통하는 것을 정이라 하며, 마음이 느낀 바에 따라 실마리를 찾아내고 헤아려 생각하는 것을 뜻이라고 한다.” 하였으니, 마음과 성에 과연 두 작용이 있겠으며, 정과 뜻에 과연 두 갈래가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묻기를, “뜻은 본연의 정에 의하여 계교하는 것이지마는, 사람이 아직 물과 접촉하지 못하여 소감(所感)이 없을 때에도 염려의 발단(發端)이 있으니, 어찌 반드시 정에 의한다고 하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것도 옛날에 발단되었던 정을 추출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때 비록 아직 사물에 접촉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실상 옛날에 느꼈던 사물을 염려하는 것이니, 어찌 이른바 정에 의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성(五性) 밖에 다른 성은 없고, 칠정(七情) 밖에 다른 정은 없습니다. 맹자의 칠정 가운데에서 그 선정(善情)만 가려내어 사단으로 지목한 것이요, 칠정 밖에 따로 사단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의 선(善)ㆍ악(惡)이 그 어느 것인들 성에서 발하지 않는 것이 있겠습니까. 그 악(惡)이란 것은 본래 악이 아니요, 다만 형기(形氣)에 가려져서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한 것이 있어 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자가 말하기를, “선과 악은 모두 천리이다.”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천리로 인하여 사람의 욕심이 있다.” 하였습니다. 그러면 사단과 칠정이 과연 두 정이요, 이(理)와 기(氣)가 과연 서로 발하는 것이겠습니까.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설을 잠깐 보면 매우 놀라운 듯하나, 깊이 생각하면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희로애락은 성인이거나 미치광이거나 다 같이 가지고 있지마는, 그 희로애락하는 소이연(所以然)의 이치는 성(性)입니다. 그 희로애락을 아는 것은 마음이요, 사물을 만나 희로애락하는 것은 정입니다. 기뻐할 일에 기뻐하고 화낼 일에 화내는 것은 정(情)의 선(善)한 것이요, 기뻐해선 안 될 일에 기뻐하거나 화내선 안 될 일에 화내는 것은 정의 불선(不善)한 것입니다. 정이 선한 것은 청명한 기를 올라타고 천리에 따라 곧장 나오니, 그것이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의 실마리인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을 사단이라 지목하였습니다. 정의 불선한 것이 이(理)에 근거하였다고 하더라도, 얼마 안 되어 이미 더럽고 흐린 기에 가려져, 도리어 이(理)를 해치니 그것이 인ㆍ의ㆍ예ㆍ지의 실마리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사단이라고 말할 수 없을 뿐입니다. 그러니 성에 근거하지 않고 따로 두 근본이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이른바, “선악(善惡)은 다 천리인데, 천리에 따라 인욕이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인욕을 천리라고 한다면 이것은 도적을 아들인 줄 아는 것입니다. 비유하면, 여름철에 젖을 담그면 구더기가 생겨나는데, 구더기는 젖에서 생겨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구더기를 바로 젖이라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구더기는 젖에서 생겼지만 도리어 젖을 망칩니다. 인욕도 천리에서 나왔지마는 도리어 천리를 해치니 그 이치는 한가지입니다.

대개 심(心)ㆍ성(性)을 두 용(用)으로 생각하고 사단과 칠정을 두 정(情)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理)ㆍ기(氣)에 있어서 투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정이 발할 때에, 발하는 것이 기요, 발하는 까닭이 이입니다. 기가 아니면 발할 수 없고 이가 아니면 발할 까닭이 없으니, 이ㆍ기는 섞이어 원래부터 서로 떠나지 못합니다. 만일 이(離)ㆍ합(合)이 있으면 동(動)ㆍ정(靜)도 끝이 있고, 음ㆍ양도 처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란 것은 태극이요, 기란 것은 음양인데, 이제 태극과 음양이 서로 동한다고 하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태극과 음양이 서로 동할 수 없는데 이와 기가 서로 발한다고 하니, 어찌 오류가 아니겠습니까.

옛날 어떤 사람이 미발(未發) 이전의 마음과 성이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물었더니, 주자가 말하기를, “마음에는 체(體)와 용(用)이 있으니, 미발은 마음의 체요, 이발은 마음의 용이다. 그러니 어떻게 지정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마음과 성의 두 가지 작용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과 성에 두 가지 작용이 없는데 사단과 칠정에 어찌 두 가지 정이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묻기를, “주자가 말하기를, ‘정에는 선(善)ㆍ악(惡)이 있지마는 성은 완전히 선하다.’ 하였는데, 그렇다면 기질의 성에도 불선이 없는 것인가?” 하므로, 신이 대답하기를, “기질의 성에는 본래 선ㆍ악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성이라고 하는 것은 다만 미발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사람이 비록 지극히 악(惡)한 자라도 미발인 때에는 본래 불선이 없다가 발하자마자 바로 선ㆍ악이 있게 된다. 그 악한 것은 기질이나 물욕에 매이거나 가려지는 데서 말미암는 것이지, 그 성의 본체는 아니다. 그러므로 성은 완전히 선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또, “인심과 도심이 이미 두 가지 마음이라면 사단과 칠정도 어찌 두 가지 정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물으므로, 신이 대답하기를, “이것도 말에 얽매여 뜻을 놓친 유이다. 마음이 하나인데 어찌 정이 둘이 있겠는가. 다만 무엇을 주로 하여 발하느냐에 두 가지 이름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주자가 말하기를, ‘위(危)란 것은 인욕의 새싹이요, 미(微)란 것은 천리의 깊고 묘한 것이다. 마음은 하나인데 바르냐 바르지 않느냐에 따라 그 이름을 달리할 뿐이다. 도심이 한 마음, 인심이 한 마음인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이 말을 본다면, 마음이 두 가지가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어떤 사람이, “천리로 인하여 인욕이 있다는 설은 의심스럽다.” 하므로, 신이 이것을 해석하여 말하기를, “천리와 인욕은 처음부터 두 근본이 아니요, 성 가운데는 다만 인ㆍ의ㆍ예ㆍ지 네 가지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 인욕이 어찌 성 가운데에 뿌리를 박고 있겠는가. 다만 그 기에는 청(淸)ㆍ탁(濁)이 있어서 수치(修治)와 혼란(混亂)이 같지 않기 때문에, 성이 발하여 정이 될 때에 지나친 것과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인(仁)이 어긋날 때에는 애정으로 흘러서 탐욕스러워지며, 의(意)가 어긋날 때에는 지나친 판단으로 차마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되고, 예(禮)가 어긋날 때에는 지나치게 공손하다 보면 아첨이 되고, 지혜가 어긋날 때에는 꾀를 낸다는 게 사기(詐欺)가 된다. 이것을 미루어 그 나머지를 본다면 본래 다 천리이지마는, 잘못 흘러서 인욕이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 근본을 미루어 본다면 천성의 선(善)을 알 수 있고, 그 말단을 살펴본다면, 인욕으로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주자가 배우는 사람에게 분명히 보여 준 것이 적절하다.” 하였습니다. ○ 어떤 사람이 묻기를, “마음은 하나인데 정이라고도 하고, 지(志)라고도 하며, 의(意)라고도 하고, 염(念)이라고도 하며, 여(慮)라고도 하고, 사(思)라고도 하니, 어찌 그 이름이 다양하여 한결같지 않는가.” 하여 신이 대답하기를, “정이라는 것은 마음에 느끼는 바가 있어서 동(動)하는 것이다. 동했다 하면 정인데, 스스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평상시에 함양(涵養)ㆍ성찰(省察)의 공이 지극하면, 정의 발하는 것이 자연히 이(理)에 맞고 절(節)에 맞지마는, 만일 마음을 다스리는 힘이 없으면 흔히 맞지 않는 것이 많다. 지(志)란 것은 마음에 가는 바를 이르니, 정이 발하여 그 추향(趨向)을 정할 때에 선(善)으로도 가고 악(惡)으로도 가는 것이 모두 지(志)이다. 의(意)라는 것은 마음에 헤아리고 따지는 것이 있는 것을 말하는데, 정이 발하여 생각도 하고 운용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자는, ‘정은 배나 수레와 같고 의(意)는 그 배와 수레를 부리는 사람과 같다.’ 하였다. 염(念)ㆍ여(慮)ㆍ사(思) 석 자는 다 의(意)의 다른 이름인데, 사(思)는 비교적 중(重)하고, 염(念)과 여(慮)는 비교적 가볍다. 의(意)는 거짓을 할 수 있지마는 정은 거짓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의(誠意)라는 말은 있어도 성정(誠情)이라는 말은 없다.” 하였습니다. 또, “지(志)와 의(意)는 어느 것이 먼저이고 어느 것이 뒤인가?” 하여, 대답하기를, “지(志)는 의(意)가 정해진 것이요, 의는 지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이다. 지가 의의 뒤에 있는 듯하나 지가 먼저 서면 의가 뒤따라 생각하는 것도 있고, 의가 먼저 경영되고 지가 따라 정하여지는 것도 있으니, 일률적으로 논할 수 없다. 정(情)ㆍ지(志)ㆍ의(意)는 모두 한마음의 작용인데, 주된 바에 따라 각각 그 이름을 세우는 것이지, 여러 가지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하였습니다. 또, “인심과 도심은 정(情)인가, 의(意)인가?” 하여, 대답하기를, “정과 의를 통틀어 말한 것인데, 피어나는 것은 정이요, 헤아려 생각하는 것은 의이다. 사단은 도심만을 가리킨 것이요, 칠정은 인심과 도심을 묶어 일컬은 것이다.”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신에게, “이(理)와 기(氣)는 한 가지인가 두 가지인가.” 하여, 신이 대답하기를, “그 전 사람들의 해석을 참고한다면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인 것이다. 이와 기는 혼연히 간격이 없어서 원래부터 서로 뗄 수 없으니, 두 가지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정자가 말하기를, ‘기(器)도 도(道)요, 도도 기이다.’ 하였다. 비록 서로 뗄 수는 없더라도 혼연한 가운데서 서로 섞여 있지 않으니 한 가지라고 지목할 수 없다. 그러므로 주자가 말하기를, ‘이(理)는 이(理)요, 기(氣)는 기(氣)이니, 서로 섞여 있지 않다.’ 하였다.” 했습니다. 두 가지 말을 합하여 음미하고 사색한다면, 이(理)ㆍ기(氣)의 묘한 것을 거의 알 것입니다. 대개(大槪)를 논하자면 이는 형체가 없고 기는 형체가 있기 때문에 이는 통하고 기는 막혔다고 합니다. 이가 통한다는 것은 천지 만물이 동일한 것이요, 기가 막혔다는 것은 천지 만물이 각각 하나의 기라는 것입니다. 이치는 하나이나 여럿으로 나뉘었다[理一分殊]란 것은 이는 본래 하나인데, 기가 고르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소속에 따라 각각 하나의 이(理)가 되니, 이것이 여럿으로 나뉜 이유요, 이(理)가 본래 하나가 아니란 것은 아닙니다. 이는 무위(無爲)이고, 기는 유위(有爲)입니다. 그러므로 기가 발하고 이가 타는 것[氣發理乘]입니다. 음양이 동정(動靜)할 때, 태극이 이것을 올라타는데 발하는 것은 기이며, 그 기틀[機]을 올라타는 것은 이(理)입니다. 그러므로 인심에는 생각[覺]이 있고, 도체(道體)에는 작용이 없는 것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도를 넓힐 수는 있어도 도가 사람을 넓힐 수 없다.” 하였습니다. 무형(無形)ㆍ무위(無爲)이면서 유형(有形)ㆍ유위(有爲)의 주재가 되는 것이 이요, 유형ㆍ유위이면서 무형ㆍ무위의 기(器)가 되는 것이 기입니다. 이것은 이ㆍ기를 궁구하는 큰 실마리입니다. ○ 또, “이에는 체(體)도 있고 용(用)도 있는데 어떻게 분변해야 하는가.”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중용(中庸)》에, ‘군자의 도(道)는 비(費)하고도 은(隱)하다.’ 하였고, 주자(朱子)는 이것을 해석하여, ‘비(費)는 용(用)이 넓은 것이요, 은(隱)은 체(體)가 미미한 것이다.’ 하였다.” 했습니다. 사물에 흩어져 있는 이(理)의 당연한 것으로는, 아버지로서의 사랑, 아들로서의 효도, 임금으로서의 의리, 신하로서의 충성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넓다[費]’고 하고, ‘쓰인다[用]’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데에는 지극히 은미한 것이 존재하는데 이것이 그 본체(本體)입니다. 이는 사물에 존재하는 것을 두고 말한 것이요, 도는 유행하는 것을 두고 말한 것인데, 그 실제는 하나일 뿐입니다.


 

왕도(王道)와 패도(霸道)에 대하여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인(仁)을 가장하여 힘을 쓰는 자는 패자(霸者)인데 패자는 반드시 큰 나라를 둔다. 인을 행하고자 덕을 쓰는 자는 왕자(王者)인데 왕자는 큰 나라를 기대하지 않는다. 탕(湯)은 70리를 가지고 왕 노릇하였고 문왕(文王)은 백 리를 가지고 왕 노릇하였다.” 하였다. 《맹자》 아래도 이와 같다.

주자가 말하기를, “힘이란 토지와 강한 군사의 힘이다. 인을 가장한다는 것은 본래 이 마음이 없으나 그 일을 빌어서 공(功)으로 삼는 것이다. 패(霸)란 것은 제(齊)나라 환공(桓公)이나 진(晉)나라 문공(文公) 같은 이를 말한다. 덕으로 인을 행하면 나의 마음에 얻은 것으로부터 미루어 가기 때문에 가는 데마다 인 아닌 것이 없다.” 하였다. ○ 정자가 말하기를, “비록 공적인 천하의 일이라도 만약 사의(私意)를 써서 한다면 바로 사(私)이다.” 하였다.


힘으로 사람을 굴복시키는 자는 마음으로 복종하게 하는 것이 아니니 힘이 넉넉하지[贍] 못한 것이요, 덕으로 사람을 굴복시키는 자는 진심으로 기뻐서 참으로 복종하게 하는 것이니, 칠십자(七十子)가 공자에게 복종한 것과 같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서(西)로도 하고 동으로도 하며, 남으로도 하고 북으로도 하여 복종하지 않는 것이 없다.’ 한 것은 이것을 두고 이른 것이다.” 하였다.

주자가 말하기를, “섬(贍)이란 넉넉하다는 뜻이다. 시(詩)란 〈대아(大雅)ㆍ문왕(文王)ㆍ유성(有聲)〉 편이다. 왕자(王者)와 패자(霸者)의 마음은 성(誠)과 위(僞)가 같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응하는 것도 같지 않은 것이 이러하다.” 하였다. ○ 진씨(眞氏)가 말하기를, “공자는 필부(匹夫)로서 지위를 얻지 못하여도 칠십자(七十子)가 종신토록 따랐는데, 이것은 누가 그렇게 만든 것이겠는가. 이는 진심으로 기뻐서 참으로 복종한 것이니, 왕자(王者)가 사람을 복종시키는 것도 이와 같다.” 하였다. ○ 추씨(鄒氏)가 말하기를, “힘으로써 사람을 굴복시키는 이는 그 뜻이 사람을 굴복시키는 데 있으므로, 사람이 감히 굴복하지 않을 수 없으나, 덕으로써 사람을 굴복시키는 이는 사람을 굴복시키는 데 뜻이 없는데도 사람들이 굴복하지 않을 수 없다. 옛날부터 왕자(王者)와 패자(霸者)를 논한 이가 많으나 이 장(章)과 같이 매우 절실하고 분명한 것은 있지 않다.” 하였다.


어진[仁] 이는 그 의리[誼]를 바르게 하면서도 이(利)를 꾀하지 않으며, 그 도를 밝히면서도 공효는 계산하지 않기 때문에 중니(仲尼 공자의 자(字))의 문하에는 오척 동자(五尺童子)라도 오패(五伯)를 일컫기를 부끄러워하였으니, 그 속이는 힘[詐力]을 우선시하고 인의(仁義)를 뒤에 하였기 때문이다. 《한서(漢書)》 〈동중서전(董仲舒傳)〉

진씨(眞氏)가 말하기를, “맹자 이후에 오패(五霸)를 물리칠 수 있었던 이는 오직 동중서(董仲舒)이다. 대개 어진 이는 의리를 바르게 할 줄을 알 뿐이요, 이(利)가 있고 없음은 논하지 않으며, 도를 밝힐 줄 알 뿐이요, 자기 공효의 성공 여부는 계산하지 않는다. 의리는 마땅한 이(理)를 말하고, 도는 통행(通行)하는 길을 말하나, 그 실제는 하나이다. 패자(霸者)는 오직 이(利)만을 꾀하되 의리는 돌아볼 겨를이 없으며, 오직 공효만을 꾀하되 도는 돌보지 않으니, 이것이 공자의 문하에서 내쳐진 까닭이다.” 하였다. ○ 정자(程子)가 신종(神宗)에게 말하기를, “천리(天理)의 바른 것을 얻고, 인륜(人倫)의 지극한 것을 극진히 한 것은 요순의 도요, 사사로운 마음을 써서 인의(仁義)를 치우치게 따르는 일은 패자의 도입니다. 왕자의 도는 숫돌과 같아서 인정(人情)에 근거하여 예의에서 나오기 때문에, 큰길을 가는 것과 같아서 다시 구부러지는 일이 없지만, 패자의 도는 구부러진 길 가운데서 곤경을 겪고 뒤척이다가 끝내 요순의 도에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심껏 왕 노릇을 하면 곧 왕이 되고, 가장하여 패도를 행하면 패자(霸者)가 됩니다. 이 두 가지는 그 도가 같지 않으니, 그 처음을 잘 살피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주역》에 이른바, ‘털끝만큼의 차이가 천리(千里)만큼 어긋나게 된다.’고 한 것과 같으니, 그 처음을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직 폐하께서 선성(先聖)의 말씀을 생각하시고 인사(人事)의 이(理)를 살피시되, 요순의 도가 자신에 갖추어진 것을 알아서 자기 몸에 돌이켜 성실하게 하고 이것을 미루어 사해(四海)에 미친다면 만세(萬世)토록 다행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상은 왕도와 패도의 대략을 변별한 것입니다.


 

이단(異端)의 폐해에 대하여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단(異端)을 공(攻)하면 해로울 뿐이다.” 하였다. 《논어》

범씨(范氏)가 말하기를, “공(攻)이란 오로지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석(木石)이나 금옥(金玉)을 다스리는 장인[工匠]을 공(攻)이라고 한다. 이단은 성인의 도가 아니면서 따로 한 일단(一端)을 만든 것이니, 양주(楊朱)ㆍ묵적(墨翟)과 같은 부류가 이것이다. 천하를 거느려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 데 이르게 하니, 오로지 연구하여 정밀히 파고들수록 해가 심하다.”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오로지 연구해서는 안 된다는 말뿐만 아니라, 그것을 대강이나마 이해하는 것도 해서는 안 된다. 자기의 학문이 정립되어야 이단의 병통을 알게 된다.” 하였다.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양씨(楊氏)는 나를 위하였으니 이는 임금이 없는 것이요, 묵씨(墨氏)는 평등하게 사랑하였으니 이는 아비가 없는 것이다.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으면 이것은 금수(禽獸)이다.” 하였다. 《맹자》 아래도 이와 같다.

주자가 말하기를, “양주(楊朱)는 다만 자기 몸을 아낄 줄만 알고 다시 몸을 바치는 의리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임금도 없다고 한 것이다. 묵적(墨翟)은 사랑에는 차등이 없다고 보아 그 지친(至親)을 보기를 뭇사람과 다름없이 보았다. 그러므로 아비가 없다 한 것이다.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음은 인도(人道)가 끊겨 사라진 것이니, 역시 금수일 뿐이다.” 하였다.


양주와 묵적을 막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이는 성인의 무리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참으로 이 양주와 묵적의 설을 막을 수 있는 자는 그 추구하는 바가 바르므로, 비록 도를 알지는 못하더라도 역시 성인의 무리이다. 대개 거짓된 말이 바른 것을 침해하면 누구라도 이를 공격할 수 있는 것이니, 반드시 성현이라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춘추(春秋)》의 법에 난신(亂臣)이나 적자(賊子)는 사람마다 벨 수 있으며, 반드시 사사(士師)라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 것과 같다.” 하였다.


노자(老子)를 배우는 이는 유학(儒學)을 내치고 유학은 역시 노자를 내치니, 도가 같지 않으면 서로 꾀하지 않는다. 《사기(史記)》

진씨(眞氏)가 말하기를, “노자(老子)에 포함된 내용이 많은데, 그의 무위(無爲)ㆍ무욕(無欲)은 이(理)에 가까운 말이라 군자가 취한다. 그러나 양생(養生)의 말은 방사(方士 신선술을 하는 사람)들이 숭상하는 것이요, 빼앗고자 하면 반드시 준다는 것은 음모(陰謀)하는 말로 병가(兵家)가 숭상하는 것이요, 그 사물을 거친 자취로 삼고 공허(空虛)를 묘용(妙用)으로 삼는다는 것은 청담(淸談)을 즐기는 자들이 모방하는 것이다. 이(理)에 가까운 것부터 말하면 진실로 취할 만한 바가 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우리 성인에게도 있는 것이다. 이 이하는 한쪽으로 치우치고 한쪽으로 굽은 학문이어서 그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없다는 점이 있다. 양생(養生)의 설은 신선(神仙)이 약 쓰는 법에서부터 나왔고, 음모의 술(術)은 신불해(申不害)ㆍ상앙(商鞅)ㆍ한비(韓非)에게서 근거하였고, 청담을 즐기는 화(禍)는 왕필(王弼)ㆍ하안(何晏)에 이르러서 극에 달하였다. 모두 세상의 군주를 미혹하게 하고 어지럽히고 백성을 해치게 되었다. 비록 노장(老莊)의 학문이라도 처음에는 여기에 이르지 않았지만 근본에서 조금 어긋난 것이 흘러가다 보면 심해짐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말한다면 어찌 요ㆍ순ㆍ주공ㆍ공자의 도가 폐단이 없는 것만 같겠는가.” 하였다. ○ 도기(導氣)를 말하는 어떤 이가 정자(程子)에게, “당신에게도 술(術)이 있는가?”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나는 일찍이 여름에는 갈옷을 입고 겨울에는 갖옷을 입으며,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며, 욕구를 조절하며, 심기(心氣)를 안정시키는 이런 일이 있을 뿐이다.” 하였다. 또, “신선(神仙)의 설이 있는가?”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말하자면 대낮에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 같은 일은 없으나, 산림(山林) 속에 살면서 몸을 보전하고, 기를 연마하여 나이를 연장하여 수명을 늘릴 수는 있다. 비유하자면, 화롯불을 바람결에 두면 쉽게 타고 밀실(密室)에 두면 잘 타지 않는 이치와 같다.” 하였다. 또, “성인은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이것은 천지 사이의 도적이다. 조화(造化)의 기밀을 도둑질하지 않고서야 어찌 능히 나이를 연장하겠는가. 성인이 하려 하였다면 주공이나 공자께서도 이것을 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불교(佛敎)는 이적(夷狄)의 한 법(法)이다. 《창려문집(昌黎文集)》

물헌 웅씨(勿軒熊氏 웅화(熊禾))가 말하기를, “후한(後漢) 때에 중국에 들어와서 처음에는 인과응보를 논하여 어리석은 백성을 유혹하는 데 불과할 뿐이었는데, 그 뒤로 심성(心性)을 말하여 총명한 선비도 역시 현혹되었다. 배우는 사람이 힘껏 살펴서 밝게 분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였다.


불씨(佛氏)의 말은 양주(楊朱)ㆍ묵적(墨翟)에 비해 더욱 이(理)에 가까워서 그 폐해는 더욱 심하다. 배우는 자는 마땅히 음성(淫聲)이나 미색(美色)과 같이 여겨 멀리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사이에 그 가운데 들어가게 된다. 《정씨유서(程氏遺書)》 ○ 명도(明道) 선생의 말씀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양주와 묵적은 천박하여 사람을 미혹하지 못하지마는, 불씨(佛氏)는 가장 정미하여 사람을 움직이는 부분이 있다. 그 설을 따르면 공부가 깊어질수록 사람을 해친다.” 하였다. ○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석씨(釋氏)의 설을 궁구하여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린다고 한다면, 그 설을 다하기도 전에 이미 동화되어 불교도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다만 그 자취를 보고 그 설교(設敎)가 이러한데, 마음은 과연 어떠한가를 상고해야 한다. 그러나 그 마음은 취하면서 그 자취를 취하지 않기는 참으로 어려워 이 마음이 있으면 곧 이 자취가 있게 되니, 왕통(王通)이 마음과 자취가 다르다고 한 것은 난설(亂說)이다. 그러므로 또 자취상에서 그것이 성인의 학문과 합치하지 않은 것으로 단정하는 것이 좋다. 만일 합치하는 것이 있다면 나의 도에 이미 있는 것이요, 합치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진실로 취해선 안 될 바이다. 이렇게 방향을 정하면 간단하고 쉽다.” 하였다. 섭씨(葉氏)가 말하기를, “이 말은 비록 처음 배우는 자로 마음이 정해지지 않은 이를 위하여 말한 것이다. 그러나 맹자가 양주와 묵적을 물리친 것 역시 그 자취를 상고하고, 그 마음을 미루어서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 극단까지 간 것에 불과하다. 이것이 실로 이단을 변론하는 요령이다.” 하였다. ○ 왕씨(汪氏)가 말하기를, “정주(程朱)의 시대에 유학(儒學)이 선교(禪敎)로 흘러가는 일이 있었는데, 지금의 배우는 사람은 이에 대하여 입에도 올리지 않게 되었으니 정자와 주자의 공적이 크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불씨(佛氏)의 설은 정미한 것도 있고, 조잡한 것도 있습니다. 조잡한 것은 다만 윤회(輪廻)나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설로 죄와 복에 대해 늘어놓아 우매한 백성을 유혹하고 협박하여 그들로 하여금 분주히 공양(供養)하게 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 정미한 것에 있어서는 심성(心性)을 끝까지 논하여, 이(理)를 마음으로 인정하여 마음을 만 가지 법칙의 근본이라 하고, 마음을 성으로 인정하여 성(性)을 보고 듣는 작용이라 하며, 적멸(寂滅)을 종지(宗旨)로 하여 천지 만물을 환망(幻妄)이라 하고, 세간을 벗어나는 것을 도라 여기고 윤리 도덕을 질곡(桎梏)이라 하였습니다. 그 공부의 요점은 글로 쓰지 않고 바로 인심을 가리키며, 성(性)을 보면 부처가 된다 하여 어느 순간 깨달은 뒤에 점점 수도(修道)를 해 가는데, 뛰어난 사람이면 바로 깨닫고 바로 수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달마(達磨)가 양 무제(梁武帝) 때에 중국으로 들어와 처음으로 그 도를 전하였는데, 선학(禪學)이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당대(唐代)에 이르러 크게 번성하였는데, 그 무리가 천하에 가득 차서 눈썹을 치켜들고 눈을 꿈벅이거나[揚眉瞬目] 몽둥이로 내리치거나[棒] 갑자기 외마디 소리를 지르거나[喝] 크게 웃음으로써 서로 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대개 무의(無意)를 도를 얻은 것으로 보아 선악(善惡)은 논하지 않았고, 의사(意思)를 두면 모두 망녕된 견해라고 여겨, 반드시 마음대로 행하여 의사(意思)를 사용하지 않은 뒤에야 진실한 견해라고 여겼습니다. 여기에 도달하지 못한 자는 반드시 의미 없는 한두 구절 화두(話頭)를 개는 불성이 없다거나,[狗子無佛性]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와 같은 유(類)입니다. 무한한 묘리(妙理)로 삼아, 드디어 크게 의심을 내어 오로지 마음을 궁구하고 끊임없이 공을 쌓아서 고요하게 좌정(坐定)한 끝에, 비슷하게 상상하는 사이에서 심성(心性)의 그림자나마 얼핏 보고 나면, 드디어 이것을 활연(豁然)히 크게 깨달은 줄 알고 미친 듯이 행동하고 방자하게 굴면서 할 일을 다 마쳤다고 합니다. 송(宋)나라 초기까지도 그 무리들이 기세를 떨치다가 정자(程子)ㆍ주자(朱子)가 제거해서 맑게 한 뒤로부터는 그 세력이 쇠퇴하기 시작해 지금은 선학(禪學)이라 하는 것이 거의 절멸하였습니다.

또 육상산(陸象山)이 주자와 같은 세대에 출생하여 치지(致知)의 공을 지루하고 번잡하다 하여 물리치고 오로지 본심(本心)에만 힘쓰도록 하였으니, 이것도 함양하는 데 도움이 없는 것은 아니나 다만 배우는 자는 지식과 실천을 병행하여야 합니다. 만일 도리도 모르고 시비도 가릴 줄 모른다면 무엇에 근거해 마음을 보존하겠습니까. 만일 정좌(靜坐)만 해서 모든 이치가 스스로 밝아질 것 같으면, 공자는 어찌하여 “문(文)에서 널리 배워야 한다.” 했겠으며, 자사(子思)는 어찌하여 반드시, “학문을 따라야 한다.” 하였겠습니까. 이것은 치우치고 지나치며 간사하고 도피하는 선학의 설과 가깝지 않겠습니까. 상산(象山)은 이미 죽었으나 그 학풍은 끊어지지 않아 지금은 주자의 정통적인 학문과 병립(竝立)하여 서로 대항하니, 근로(勤勞)를 싫어하고 간편한 것을 즐기는 무리들은 서로 심오하고 황홀한 설을 만들어 그들과 부합합니다. 아, 그것도 우리 유학의 불행입니다.

선학은 사람을 혹하게 할 만하지만 그 언어(言語)는 유학이 아니며, 그 행실은 윤리를 절멸하게 하니, 세상에 병이(秉彛 하늘이 정한 상도(常道))가 있음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는 진실로 이미 의심하여 막았습니다. 또 정자와 주자가 선학을 물리쳤으니 그 자취를 말끔히 쓸어버린 듯한 게 당연합니다. 육상산의 학은 그렇지 않아서 말했다 하면 공자와 맹자를 일컫고, 행실은 반드시 효제(孝悌)에 근거하였으나, 그 마음을 쓰는 정미한 곳은 선학과 같습니다. 이를 물리치기가 어찌 불씨(佛氏)보다 10배나 힘들지 않겠습니까. 불씨의 폐해가 외구(外寇)의 침략과 같다면 육씨(陸氏)의 피해는 간신이 나라를 그르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몰라서는 안 되기 때문에 여기서 아울러 썼습니다.

이상은 이단(異端)의 해(害)에 대해 변별하였습니다.

○ 신이 생각건대, 궁구할 만한 사물을 다 기록할 수는 없고, 다만 왕도(王道)와 패도(霸道)의 대략과 이단(異端)의 폐해만은 분변하지 않을 수 없어서 대략 서술하였습니다. 다른 것은 유추(類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건대, 성현이 이치를 궁구하는 설의 대요(大要)는 이 장(章)에서 인용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일 그 말에 의하여 실지로 공부하여 순서에 따라 차츰 전진하신다면, 관통하는 효과는 기약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이를 것입니다. 대개 만사와 만물에는 이치가 없는 것이 없고, 사람의 마음은 온갖 이치를 포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궁구하지 못할 이(理)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열리고 닫힘이 한결같지 않고, 총명하거나 어두울 때가 있어서, 궁리하고 격물할 때에 한 번 생각하여 바로 체득하는 이도 있고, 정미하게 생각한 뒤에야 깨닫는 이도 있으며, 애를 태워도 통하지 못하는 이도 있습니다. 생각하다가 터득한 게 있어서 마음이 환해지며 확신하게 되고 시원스러워져 즐거워하며, 씻은 듯이 상쾌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점이 있는 것은 진실로 체득한 것이 있어서입니다. 비록 체득한 것이 있는 것 같더라도 믿는 가운데 의문이 있거나, 위태로워 편안치 못해 얼음 녹듯 마음이 석연해지지 못하다면 이것은 억지로 추측할 뿐이지, 진실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이제 상황에 따라 이해하고 또 성현의 말씀을 살펴서 마음가짐이 깨끗해져서, 한 번 대충 보고도 바로 마음으로 이해하여 조금도 의심스러운 것이 없으면, 이것은 한 번 생각하여 바로 얻는다는 것입니다. 만일 다시 의문이 생긴다면 도리어 진실한 견해를 어둡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명도(明道) 선생이 창고에 있었을 적에 긴 행랑의 기둥을 속으로 세어 보고는, 맞지 않을까 의심하여 몇 번이나 헤아려 보았으나 또 틀리길래, 드디어 사람을 시켜서 기둥을 짚어 가며 헤아려 보니 처음에 속으로 헤아려 본 것과 같았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을 말한 것입니다.

만일 사색하여도 체득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전심으로 뜻을 다해 죽도록 싸워 침식도 잊어버리게 되어야만 깨닫는 것이 있게 됩니다. 마치 연평(延平) 선생이 말하기를, “‘하나이기 때문에 신묘하고, 둘이기 때문에 화(化)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여 밤새도록 의자 위에 앉아서 사색하여 몸소 그 속으로 들어가 체험하고서야 평온해질 수 있었다.” 하고, 관중(管仲)이 말하기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귀신도 통할 것이니, 이는 귀신의 힘이 아니고 정신의 극치이다.”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이 바로 이런 것을 말한 것입니다.

또 혹은 오랫동안 애를 태워도 마침내 석연치 못하여 생각이 막히고 어지러워지면 모름지기 모든 것을 쓸어버리고 마음속을 비워서 일물(一物)도 없게 해야 합니다. 그런 뒤에 정밀하게 사색해 보아도, 오히려 환히 알 수 없다면 이것은 우선 놓아두고 따로 다른 것을 궁구해야 합니다. 궁구하고 궁구하여 차차 마음이 밝아지면 앞서 환히 얻지 못한 것도 갑자기 자각(自覺)할 때가 있습니다. 주자가 말하기를, “여기서 이해하지 못한 것을 오로지 이것만을 두고 지키고 있으면 도리어 혼미(昏迷)하게 되니, 모름지기 다른 것을 궁구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이것을 통해 저것이 밝혀질 수도 있다.”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 세 조목을 서로 발명한 것은 궁리의 요법(要法)인데, 여기에 종사하여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고, 깨끗함으로써 고요히 길러 그 근본을 배양하고 의문을 묻고 판단함으로써 그 흥취(興趣)를 펴게 하되, 오랫동안 공이 쌓이면 하루아침에 활연히 관통하여 어느 물(物)이건 끝까지 궁구하지 못할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마음에 다하지 못한 것이 없으면, 나의 식견이 성현과 합치되어 욕심의 유혹이나, 공리(功利)의 말이나, 이단의 방해와 같은 것이 모두 나의 마음을 매이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큰길같이 평탄하여 멀리 가도 의심이 없어서 성의정심(誠意正心)하여 큰일을 처리하고, 큰 사업을 결정하기를 마치 강물이 툭 터져 막을 수 없듯이 트입니다. 학문을 하고 이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학문을 한들 무엇에 쓰겠습니까?

또 생각건대, 임금의 자리는 필부와는 같지 않습니다. 필부는 반드시 몸을 닦아서 때를 기다리고 임금을 만나서 도를 행하기 때문에, 학문이 부족하면 감히 직접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임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이미 신민의 주(主)가 되었고, 이미 교양(敎養)의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지금 몸을 닦고 있으므로 사람을 다스릴 겨를이 없다.” 한다면, 나라의 정치가 폐지됩니다. 그러므로 몸을 닦고 사람을 다스릴 도(道)를 같이 이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루 동안의 접하는 모든 일 하나하나마다 반드시 지당한 이치를 구하되, 그 그른 것을 버리고 그 옳은 것은 행하여, 유학하는 신하를 가까이하여 의리를 강론하고, 간쟁(諫諍)을 받아들여서 오직 선(善)을 위주로 하는 것이 다 임금의 궁리할 일입니다. 만일 장구(章句)를 찾고 화려한 언사(言辭)를 채집하여 부질없는 말에다만 신경 쓸 뿐, 몸을 닦고 사람을 다스리는 실질적인 공업(功業)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비록 안목(眼目)이 높고 의논이 정묘하다 하더라도 마침내 학문에 힘쓰고 몸을 성실하게 하는 공효를 보지 못할 것이니,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자계 황씨(慈溪黃氏 황진(黃震))가 말하기를, “물을 퍼내려는 사람은 반드시 그 근원을 깊게 하니, 그 근원을 깊게 하는 것은 물을 퍼내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도리어 그 물을 내버려 두고 퍼내지 않는 것은 무슨 뜻인가? 열매를 먹으려는 이는 반드시 그 뿌리에 물을 주니, 그 뿌리에 물을 주는 것은 그 열매를 먹기 위한 일이다. 그런데 도리어 그 열매를 버리고 먹지 아니하는 것은 무슨 생각인가? 몸소 바르게 실천하려는 이는 반드시 성리학(性理學)을 정밀히 해야 할 것이니, 성리학을 정밀히 하는 것은 몸소 바르게 실천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도리어 몸소 실천하는 것을 불문에 붙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였습니다. 이런 말은 매우 절실하니, 전하께서는 유념(留念)하시옵소서.



 

[주D-001]군자는 …… 숭상한다 : 《중용장구(中庸章句)》제27장에 보인다.
[주D-002]공자께서 …… 하였다 : 《논어》 〈옹야(雍也)〉에 보인다.
[주D-003]공자께서 …… 하였다 : 《논어》 〈술이(述而)〉에 보인다.
[주D-004]맹자께서 …… 일컬었다 :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보인다.
[주D-005]천지를 …… 열었다 : 《장자전서(張子全書)》 〈성리습유(性理拾遺)〉에 보인다.
[주D-006]공자께서 …… 하였다 : 《논어》 〈술이(述而)〉에 보인다.
[주D-007]진실로 …… 없어진다 : 《논어》 〈이인(里仁)〉에 보인다.
[주D-008]양기(陽氣)가 …… 못하겠는가 : 《주자어류(朱子語類)》 〈학이(學二) 총론위학지방(總論爲學之方) 양록(驤錄)〉에 보인다.
[주D-009]맹자께서 …… 하였다 :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보인다.
[주D-010]육적(六籍) : 《시경(詩經)》ㆍ《서경(書經)》ㆍ《주역(周易)》ㆍ《춘추(春秋)》ㆍ《예기(禮記)》ㆍ《악기(樂記)》를 말한다.
[주D-011]공자께서 …… 하였다 : 《논어》 〈학이(學而)〉에 보인다.
[주D-012]군자의 …… 삼간다 : 《예기》 〈옥조(玉藻)〉에 보인다.
[주D-013]기기제율(蘷蘷齊慄) :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나오는 말로 ‘몸가짐을 삼가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는 것’을 말한다.
[주D-014]공자께서 …… 하였다 : 《예기》 〈치의(緇衣)〉에 보인다.
[주D-015]군자는 …… 있겠는가 :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보인다.
[주D-016]오만함은 …… 된다 :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보인다.
[주D-017]맹자께서 …… 하였다 :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보인다.
[주D-018]함양(涵養)은 …… 있다 : 《이정유서(二程遺書)》 〈유원승수(劉元承手)〉에 보인다.
[주D-019]정(貞)하면 …… 것이니 : 원(元)ㆍ형(亨)ㆍ이(利)ㆍ정(貞)은 순회하는 천리(天理)이다. 정(貞)하면 다시 원으로 돌아가는 원리에 대해 말한 것이다.
[주D-020]자하(子夏)가 …… 하였다 : 《논어》 〈자장(子張)〉에 보인다.
[주D-021]공자께서 …… 것이다 : 《논어》 〈위정(爲政)〉에 보인다.
[주D-022]착한 …… 못한다 : 《중용장구》제20장에 보인다.
[주D-023]유자(劉子) : 중국 남북조 시대의 유협(劉脅)이 지은 책으로 총 10권이다. 《신론(新論)》 《유자신론(劉子新論)》 《유자(流子)》 라고도 한다.
[주D-024]공자께서 …… 하였다 : 《논어》 〈계씨(季氏)〉에 보인다.
[주D-025]의리에 …… 한다 : 《장자전서(張子全書)》 〈학대원 하(學大原下)〉에 보인다.
[주D-026]앎을 …… 없다 : 《이정외서(二程外書)》 〈주공섬문학습유(朱公掞問學拾遺)〉에 보인다.
[주D-027]주역에 …… 하였다 : 《주역》 〈대축괘(大畜卦) 상(象)〉에 보인다.
[주D-028]본심(本心)이 …… 것이다 : 《회암집(晦菴集)》 〈답왕근사(答王近思)〉에 보인다.
[주D-029]7년이다 …… 100년이다 : 모두 《논어》 〈자로(子路)〉에 보이는 말이다. 7년은 “선한 사람이 7년 동안 백성을 가르치면 전쟁에 내보낼 수 있다.”고 한 구절을, 1세(世)는 “왕 노릇 할 자가 있더라도 반드시 한 세대가 지나야 백성이 어질어질 것이다.”라고 한 구절을, 100년은 “선한 사람이 1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린다면 횡포한 것을 물리치고 사형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한 구절을 가리켜 한 말이다.
[주D-030]주자의 …… 않는다 : 《소학집주(小學集註)》 〈총론(總論)〉에 보인다.
[주D-031]처음 …… 없다 : 《정씨유서(程氏遺書)》 〈이천어록(伊川語錄)〉에 보인다.
[주D-032]논어(論語)라는 …… 한다 :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설(序說)〉 소주(小註)에 보인다.
[주D-033]당에 …… 정도 : 《논어(論語)》 〈선진(先進)〉에 공자가 제자 자로(子路)의 학문 수준을 두고 말하기를, “당에는 올랐고 아직 실에는 들어가지 못했다.[升堂矣 未入室也]”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로, 학문의 수준이 점점 깊어지는 과정을 나타낸 말이다.
[주D-034]성인의 …… 것이다 : 《창려문집(昌黎文集)》 〈송왕훈수재서(送王塤秀才序)〉에 보인다.
[주D-035]논어와 …… 하겠는가 : 《이정유서(二程遺書)》 〈이선생어육(二先生語六)〉에 보인다.
[주D-036]중용(中庸)은 …… 것이다 : 《주자어류(朱子語類)》 〈대학(大學)1 덕명록(德明錄)〉에 보인다.
[주D-037]공자께서 …… 하였다 : 《논어》 〈양화(陽貨)〉에 보인다.
[주D-038]공자께서 …… 못한다 : 《논어》 〈자로(子路)〉에 보인다.
[주D-039]덕(德)이라는 …… 없다 : 《예기(禮記)》 〈악기(樂記)〉에 보인다.
[주D-040]서경을 …… 한다 : 《이정유서(二程遺書)》 〈이천선생어십(伊川先生語十)〉에 보인다.
[주D-041]공자께서 …… 하였다 :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보인다.
[주D-042]서리(黍離) : 《시경》 〈왕풍(王風)〉의 편명이다. 동주(東周)의 대부(大夫)가 행역(行役)을 나가는 길에 이미 멸망한 서주(西周)의 옛 도읍인 호경(鎬京)을 지나가다가 옛 궁실과 종묘가 폐허로 변한 채 메기장과 잡초만이 우거진 것을 보고 비감에 젖어 탄식하며 부른 노래이다. 여기서는 이 시가 제후 국가의 노래를 모은 국풍에 실리게 된 것을 두고 시가 없어졌다고 말한 것이다.
[주D-043]사기(史記)를 …… 격물(格物)이다 : 《이정유서(二程遺書)》 〈이천선생어오(伊川先生語五) 양준도록(楊遵道錄)〉에 보인다.
[주D-044]원(元) …… 강(綱)이다 : 《소학집주(小學集註)》 〈소학제사(小學題辭)〉에 보인다.
[주D-045]귀신이라는 …… 것이다 : 《장주전서(張朱全書)》 〈정몽(正蒙)〉에 보인다.
[주D-046]맹자께서 …… 하였다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보인다.
[주D-047]마음은 …… 것이다 : 《장자전서(張子全書)》 〈성리습유(性理拾遺)〉에 보인다.
[주D-048]그 …… 된다 :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보인다.
[주D-049]맹자께서 …… 하였다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보인다.
[주D-050]공자께서 …… 하였다 : 《논어》 〈위정(爲政)〉에 보인다.
[주D-051]맹자께서 …… 하였다 :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보인다.
[주D-052]노자(老子)를 …… 않는다 : 《사기(史記)》 〈노장신한열전(老莊申韓列傳)〉에 보인다.
[주D-053]불교(佛敎)는 …… 법(法)이다 : 《창려문집(昌黎文集)》 〈불골표(佛骨表)〉에 보인다.
[주D-054]불씨(佛氏)의 …… 된다 :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에는 이천(伊川) 선생 정이(程頤)의 말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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