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 통설(統說)
신이 생각건대, 성현의 말씀은 횡(橫)으로 말하기도 하고 종(縱)으로 말하기도 하여, 한마디 말로 체(體)와 용(用)을 다한 것도 있으며, 여러 가지 말을 했지만 한 가지 실마리에 대해서만 말한 것도 있사옵니다. 이제 체와 용을 총괄한 말씀을 취하여 첫 편[首篇]으로 삼았사옵니다.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대로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 《중용(中庸)》 1장(章). 아래도 이와 같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하늘이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으로 만물을 내실 적에 기(氣)로써 형체를 이루고, 이(理) 역시 부여한 것이
이(理)와 기(氣)는 원래 서로 떠나지 못하는 것이니, 기에 나아가면 이가 그 가운데에 있다. 이는 음양으로 만물이 생겨난다는 말을 이어서 한 것이라 기로 형태를 이루고 이 역시 부여한 것이라 한 것이니, 기가 있은 뒤에 이가 있다고 한 것은 아니다. 말로써 뜻을 해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마치 명령을 내린 것과 같다. 이에 따라 사람과 사물이 생겨나면서 각각 그 부여한 이를 얻어서, 건순(健順)과 오상(五常)의 덕(德)을 삼는 것이 이른바 성(性)이다.
건(健)은 양(陽)의 이(理)이고 순(順)은 음(陰)의 이(理)이다. 오상의 덕(德)은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이니, 이것이 오행(五行)의 이이다. 솔(率)은 따른다는 뜻이요, 도(道)는 길과 같은 것이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각각 그 성품의 자연스러움을 따르면, 그 일상생활하는 사이에 각각 행해야 할 길이 있을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도(道)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솔성(率性)은 사람이 솔(率)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나의 본연(本然)의 성품을 따르는 데 허다한 도리가 자연히 있을 뿐이다. 혹 솔성을 두고 성명(性命)의 이를 따르는 것이라 한다면 이는 도가 사람으로 인하여 생겨나는 것이 된다.” 하였다. 수(修)는 품절(品節)하는 것이다. 성(性)과 도(道)는 같으나 기품(氣稟)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차이가 생기기 때문에 성인은 인물(人物)이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를 품절해서 천하의 법으로 삼았다. 이것이 교(敎)라 하는 것인데, 예(禮)ㆍ악(樂)ㆍ형(刑)ㆍ정(政) 따위가 이것이다. 대개 사람들은 자기에게 성(性)이 있는 줄은 알아도 그것이 하늘에서 나온 줄을 알지 못하며, 일에 도(道)가 있는 줄은 알아도 그것이 성품에서 나온 줄을 알지 못하며, 성인(聖人)의 교(敎)가 있는 줄은 알아도 그것이 내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것을 통해 마련된 것인 줄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사(子思)가 이것을 맨 처음에 밝힌 것이다. 동자(董子
동중서(董仲舒))가 이른바,
‘도(道)의 큰 근원이 하늘에서 나왔다.[道之大原出於天]’ 한 것도 이 뜻이다.” 하였다.
도(道)라는 것은 잠시도 떠나지 못하니 만일 떠난다면 도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는 그 보지 못하는 바에도 경계하며, 그 듣지 못하는 바에도 두려워한다.
주자가 말하기를, “도라는 것은 일상생활 속에서 사물(事物)이 마땅히 행해야 할 이치이다. 모두 성품의 덕이 마음에 갖추어져, 이 이치가 있지 않은 물건이 없고 어느 때고 이치 아닐 때가 없는 까닭에, 잠깐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이탈된다면 어찌 솔성(率性)이라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군자의 마음은 항상 경계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비록 보고 듣지 못했더라도 감히 소홀히 하지 아니하니, 이것이 천리(天理) 본연(本然)의 성품을 내 마음에 두어서, 잠시라도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어두운 것보다 더 나타나는 것이 없으며 세미한 것보다 더 드러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일 때를 삼간다.
주자가 말하기를, “은(隱)은 어두운 곳이고, 미(微)는 세미한 일이요, 독(獨)은 남이 알지 못하고 자기 혼자만 아는 경지이다. 말하자면 깊숙한[幽暗] 곳과 세미한 일은 자취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나, 기미는 이미 동하였고 남들은 아직 알지 못하나 자기 혼자만은 알고 있는 것이니, 천하의 일로 이보다 더 환히 드러나고 밝게 나타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항상 경계하고 조심하되 이런 때에 더욱 삼가니, 사람의 욕심이 싹트려는 것을 막아서 은미(隱微)한 가운데서 가만히 자라나서 도에서 멀리 떨어지는 데 이르지 않도록 한다.” 하였다. ○
도향 추씨(道鄕鄒氏 추호(鄒浩))가 말하기를, “홀로일 때를 삼가는 것이 도에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요령이다. 이른바 독(獨)이라는 것은 다만 조용한 곳에 한가히 거처(居處)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마음에 싹트는 것도 독(獨)이라 한다. 능히 이에 힘을 쓰면 잘못되는 일이 없을 수 있다. 그러므로 《중용》에서 이 말로써 머리 편(篇)을 삼았다.” 하였다. ○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천덕(天德)이 있으면 왕도(王道)를 말할 수 있으니, 요체는 다만 신독(愼獨)하는 데 있다.” 하였다.
천덕은 몸을 닦는 공효(功效)이고, 왕도는 집을 바르게 하고 정치를 하는 법도이며, 신독(愼獨)은 몸을 닦고 집을 바르게 하고 정치를 하는 이 세 가지의 핵심[樞紐]이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발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하고,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 중이라는 것은 천하의 큰 근본[大本]이요, 화라는 것은 천하의 통달한 도[達道]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희로애락은 정(情)이요, 그 발하지 않은 것은 성(性)이다. 그것이 치우치고 기울어짐이 없기 때문에 중(中)이라 이른다. 발하여 절도(節度)에 맞는 것은 정(情)의 바른 것이다. 그것이 어긋나고 잘못됨이 없기 때문에 화(和)라고 이른다. 큰 근본[大本]이라는 것은 하늘이 명령한 성으로, 천하의 이치가 다 이것으로부터 나오게 되니, 도(道)의 체(體)이다. 통달한 도[達道]라는 것은 성품을 따르는 것으로, 천하고금이 공통적으로 말미암는 바이니, 도의 용(用)이 된다. 이것은 성정(性情)의 덕(德)을 말하며 중(中)은 성품의 덕이 되고, 화(和)는 정(情)의 덕이 된다. 도는 떠날 수 없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이것은 성정의 덕의 체단(體段)이 이와 같은 것을 말한 것이고, 공부를 가리켜서 말한 것이 아니다. 윗글의 계구(戒懼)와 신독(愼獨)은 곧 아래 글의 중화(中和)를 이루는 공부이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마음은 몸의 주재가 되어 동정(動靜) 간에 차이가 없다. 그것이 정(情)할 때는 사물이 이르지 않고 생각이 싹트지 않아서, 일성(一性)이 혼연(渾然)하여 도의(道義)를 완전히 갖추었다. 이른바 중(中)이란 마음의 체(體)로서 적연(寂然)히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동(動)하게 되면 사물이 서로 이르고 생각이 싹터서, 칠정(七情)이 서로 작용하여 각각 주(主)된 바가 있다. 이른바 화(和)란 마음의 용(用)으로 감동하여 통하는 것이다.” 하였다.
○ 호계수(胡季隨 호대시(胡大時))가 말하기를, “계구(戒懼)라는 것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발하기 전에 함양(涵養)하는 것이고, 신독(愼獨)이라는 것은 희로애락이 발한 뒤에 성찰(省察)하는 것이다.” 하였다. 함양(涵養)과 성찰(省察)이란 말이 여기에 처음 나타났는데, 다음 정심장(正心章)에 자세히 보인다.
중(中)ㆍ화(和)를 이루면 천지(天地)가 안정되며 만물이 생육한다.
주자가 말하기를, “이룬다[致]라는 것은 미루어서 끝까지 가는 것이요, 안정된다[位]라는 것은 있는 곳을 편안히 여기는 것이요, 생육한다[育]라는 것은 그 생(生)을 완수하는 것이다. 계구(戒懼)로부터 시작하여 요약해 나가 지극히 고요한 중(中)에 이르러 편벽되고 기울어진 바가 없고 그 지키는 것을 잃지 아니하면, 그 중을 지극히 하여서 천지가 안정될 것이다. 신독(愼獨)으로부터 시작하여 정밀히 살펴 나가 사물을 대하는 곳에 이르러 조금도 어긋나는 것이 없고 가는 데마다 그렇지 않은 것이 없으면, 그 화(和)를 지극히 하여서 만물이 다 생육할 것이다. 대개 천지와 만물은 본래 나와 일체(一體)이니, 나의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도 또한 바루어지고, 나의 기(氣)가 순하면 천지의 기도 또한 순해진다. 그러므로 그 효험이 이와 같은 데 이르는 것이니, 이것은 학문의 지극한 공효요 성인(聖人)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외부에서 기다릴 것이 아니니, 도를 닦는 교(敎)가 또한 그 가운데 있다. 이것이 비록 하나는 체(體)가 되고 하나는 용(用)이 되어 동정(動靜)의 차이는 있으나, 반드시 그 체가 선 뒤에 용이 행해지게 되는 것이라, 그 실제는 또한 두 가지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합쳐 말하여 윗글의 뜻을 맺은 것이다.” 하였다.
○ 서산 진씨(西山眞氏
진덕수(眞德修))가 말하기를, “중화(中和)를 이루는 공부는 경(敬)을 말할 뿐이다. 계구(戒懼)하는 것은 정(靜)한 때의 경이요, 신독(愼獨)하는 것은 동(動)한 때의 경이다. 정(靜)해도 경이 아닌 것이 없는 것은 중(中)을 이루는 것이요, 동(動)해도 경이 아닌 것이 없는 것은 화를 이룩하는 것이다. 자연히 천지가 안정되고 만물이 생육되니,
동중서(董仲舒)가 말한, ‘임금이 마음을 바르게 하여 조정과 백관과 만민을 바르게 하면, 음양이 조화롭고 풍우(風雨)가 제때에 맞춰서 모든 복이 이른다.’ 한 것이 바로 이러한 이치이다.” 하였다.
이 책에서는 여기에서 처음으로 경(敬)을 말하였다. 이야말로 몸을 닦고 사람을 다스리는 강령(綱領)이다.
○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이상은 자사(子思)가 도를 전한 뜻을 서술하여 말을 세운 것[立言]으로, 공자가 증자에게 도를 전하고, 증자가 자사에게 전하였다. 그러므로 전한 뜻을 기술한 것이다. 첫머리에서 도의 본원은 하늘에서 나왔기 때문에 바꿀 수 없다는 것과 그 실체(實體)가 몸에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떠날 수 없다는 것을 밝혔다. 다음은 존양(存養)하고 성찰(省察)하는 요령을 말한 것이다. 끝에는 성신(聖神)의 공화(功化)가 극진한 것을 말한 것이다. 이는 배우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돌이켜 구하게 하여, 스스로 체득해서 외부에서 유혹하는 사사로움을 제거하고, 그 본연의 착한 것을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 《대학》의 도는 명덕(明德)을 밝히는 데[明明德]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新民] 있으며, 지극히 착한 데에 머묾[止於至善]에 있다. 《대학(大學)》 경(經) 1장. 아래도 이와 같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친(親) 자는 신(新) 자가 되어야 한다.”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대학》이라는 것은, 대인(大人)의 학이다. 명(明)은 밝힌다는 뜻이요, 명덕(明德)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것으로 허령(虛靈)하여 어둡지 않으면서[不昧], 모든 이치를 갖추어 만사에 응하는 것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허령(虛靈)해서 어둡지 않은 것이 마음이요. 이 이치가 마음에 갖추어져 있어 조금도 결함이 없는 것이 성(性)이요, 느낌을 따라 감동하는 것이 정(情)이다.” 하였다. 옥계 노씨(玉溪盧氏 노효손(盧孝孫))가 말하기를, “명덕(明德)이라는 것은 다만 본래의 마음이다.” 하였다. 다만 기품(氣稟)에 구애(拘碍)되고 인욕(人欲)에 가려 가끔 어두워지는 수가 있으나, 그 밝은 본체(本體)는 쉰 적이 없다. 그러므로 배우는 이는 마땅히 그 발하는 바를 인하여 밝혀서 그 처음을 회복해야 한다. 주자가 말하기를, “명덕(明德)은 쉰 적이 없이 일상생활하는 속에서 시시때때로 나타나니,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는 것과, 의(義)가 아닌 것을 보고 부끄러워하는 것과, 어진 사람을 보고 공경하는 것과, 착한 일을 보고 기뻐해서 사모하는 것 모두가 명덕의 발현이다. 비록 아주 악한 사람이라도 때로는 착한 생각이 발하는 수가 있는데, 마땅히 그 발한 실마리를 통해 계속하여 그것을 빛나게 밝혀야 할 것이다.” 하였다. 신(新)이라는 것은 옛것을 개혁함을 이름이니, 스스로 그 명덕(明德)을 밝혔으면 또 그것을 미루어 남에게 미치게 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옛날의 잘못을 버리게 해야 하는 것을 말한다. 머문다[止]는 것은 반드시 이에 이르러 옮기지 않는다는 뜻이요, 지선(至善)이라는 것은 사리(事理)로 보아 마땅한 것의 당연한 극치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지선(至善)이란 지극히 좋은 도리란 말과 같다. 그 도리를 십분 다한 그곳에 선(善)이 있다.” 하였다. 명덕(明德)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모두 지극히 착한 경지에 머물러 옮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니, 이는 반드시 그 천리(天理)의 지극한 것을 다하여 털끝만큼도 사사로운 인욕(人欲)이 없게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지선(至善)이라는 것은 이 명덕(明德) 밖에 따로 선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명덕(明德) 가운데에서 극처(極處)에 이르는 것이라 해도 됩니까?” 하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명덕 가운데도 지선이 있고 신민(新民) 가운데도 지선이 있으니, 모두 그 극처에 이르러야 한다. 다만 극처를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극처를 행해야 한다.” 하였다. 이 세 가지는《대학》의 강령(綱領)이다.” 하였다.
옛날에, 명덕을 천하에 밝히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나라를 다스리고, 그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가정을 다스리고, 그 가정을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몸을 닦고, 그 몸을 닦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뜻을 성실하게 하고, 그 뜻을 성실하게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지식을 이룩했으니, 지식을 이룩함은 사물을 궁구하는 것에 있다.
주자가 말하기를, “명덕을 천하에 밝힌다는 것은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그 명덕을 밝히게 하는 것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그 체(體)와 용(用)의 전체를 극진히 하여 한마디로 말한 것이다.” 하였다. 신은 생각건대 자기의 덕을 밝히는 것은 체요 백성의 덕을 새롭게 하는 것은 용인데, 명덕을 천하에 밝힌다는 것은 체와 용을 합하여 말한 것이라고 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몸을 주재하는 것이다. 성(誠)은 진실한 것이요 의(意)는 마음의 발하는 바인데, 그 마음의 발하는 바를 성실히 하는 것은 반드시 스스로 흐뭇하여 속임이 없고자 하는 것이다. 치(致)는 미루어 극진히 함이요, 지(知)는 식(識)과 같은 것이니, 나의 지식을 미루어 극진히 하는 것은 그 아는 바가 지극하지 않음이 없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격(格)은 이른다는 뜻이요, 물(物)은 일[事]과 같으니,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그 극진한 곳에 도달하지 않음이 없게 하는 것이다. 격(格) 자는 궁(窮)과 지(至) 두 가지 뜻이 있는데, 격물(格物)의 격(格)은 궁(窮) 자의 뜻이 많고, 물격(物格)의 격(格)은 지(至) 자의 뜻만 있다. 이 여덟 가지는 《대학》의 조목(條目)이다.” 하였다. 이상은 근원으로 거슬러 미루어 가는 공부이다.
○ 또 말하기를, “격물(格物)은 몽(夢)과 각(覺)의 관문[關]이요, 성의(誠意)는 이 인(人)과 귀(鬼)의 관문이다. 이 두 관문을 지나고 나면 앞으로의 공부가 더욱 쉬워져서,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에 이르러서는 발걸음이 더욱 거침없어 질 것이다. 그러나 잘 살펴보아야만 그렇게 될 수 있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치지(致知)와 격물(格物)은 이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요, 성의(誠意)와 정심(正心)과 수신(修身)은 이 이치를 체득하는 것이요, 제가(齊家)와 치국과 평천하는 이 이치를 미루어 나아가는 것이니, 3절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격물(格物)로부터 평천하(平天下)에 이르기까지는, 성인이 대략 선후를 나누어서 사람에게 보여 준 것이요, 한 가지를 남김없이 말끔히 다한 뒤라야 다른 한 가지를 행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이렇게 한다면 언제나 성취(成就)를 하겠는가.” 하였다.
물(物)이 격(格)한 뒤에 지혜가 이르고, 지혜가 이른 뒤에 뜻이 성실해지고, 뜻이 성실해진 뒤에 마음이 바르게 되고, 마음이 바르게 된 뒤에 몸이 닦아지고, 몸이 닦아진 뒤에 가정이 다스려지고, 가정이 다스려진 뒤에 나라가 다스려지고, 나라가 다스려진 뒤에 천하가 태평해진다.
주자가 말하기를, “물격(物格)이라는 것은 사물이 이치의 극진한 곳에 이르지 않음이 없는 것이고, 이 구절은 아래 구절과 상대하여 말한 것이기 때문에 글을 만든 것이 이와 같으나, 그 뜻은 사물의 이치가 그 지극한 곳에 이르지 않음이 없다는 것이다. 지지(知至)라는 것은 나의 마음의 아는 바가 다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이다. 물격(物格)과 지지(知至)는 한 가지 일이지마는 사물의 이치로써 말하면 물격(物格)이라 하니, 사물의 이치가 각각 그 지극한 곳에 도달함을 말함이요, 나의 마음으로써 말하면 지지(知至)라 하니, 나의 마음이 가는 바에 따라서 극진하지 않음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아는 것이 지극해지면 뜻이 성실해질 수 있고, 뜻이 성실해지면 곧 마음이 바르게 될 수 있으니, 수신(修身) 이상은 명덕(明德)을 밝히는 일이요, 제가(齊家) 이하는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이다.” 하였다. 이상은 공효(功效)를 순차적으로 미루어 가는 것이다.
○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치신(治身)과 제가(齊家)로부터 평천하(平天下)에 이르기까지는 다스림의 도(道)요, 정치의 기강을 세우고 백 가지 직책을 나누어 바르게 하여 천시(天時)를 따라 일을 처리하고, 제도와 법도를 만들어서 천하의 일을 다하는 것은 다스림의 법(法)이니, 성인이 천하를 다스리는 도는 오직 이 두 가지뿐이다.” 하였다. 건안 섭씨(建安葉氏 섭식(葉湜))가 말하기를, “도(道)라는 것은 다스리는 근본이요, 법이라는 것은 다스리는 도구로, 한쪽이라도 폐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또한 반드시 근본이 선[立] 뒤에 그 도구를 들 수 있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성현의 학문은 몸을 닦고 사람을 다스리는 데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이제 《중용》과 《대학》 첫 장의 말씀을 엮으니, 실제로 서로 표리(表裏)가 되어 몸을 닦고 사람을 다스리는 도가 다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대개 천명(天命)의 성(性)은 명덕(明德)이 갖춘 바이요, 솔성(率性)의 도는 명덕이 행하는 바이며, 수도(修道)의 교(敎)는 신민(新民)의 법도(法度)입니다. 계구(戒懼)라는 것은 고요히 있으면서 마음을 바르게 하는 유이며, 신독(愼獨)이라는 것은 움직이며 성찰하여 뜻을 정성스럽게 하는 유이며, 중화(中和)를 이룩하여 천지가 자리 잡고 만물이 자란다는 것은, 명덕(明德)ㆍ신민(新民)이 지극히 착한 데에 머물러, 명덕을 천하에 밝히는 것을 말합니다. 다만 미치는 바에 많고 적음이 있으며, 공효(功效)에 넓고 좁은 것이 있을 뿐입니다. 중화(中和)의 공이 한 가정에 머물면 곧 한 가정의 천지가 안정되고, 만물이 생육하여 한 가정에서 명덕(明德)이 밝아질 것이고, 한 가정에 천지와 만물이 어찌 따로 있겠습니까. 다만 부자(父子)와 부부(夫婦)와 형제(兄弟)가 각각 그 분수를 바르게 하면, 이것이 천지가 안정된 기상이며, 자애와 효도, 우애와 공경, 부부간의 호흡이 각각 그 정을 다하면 이것이 만물이 생육하는 기상입니다. 한 나라에 이르면 한 나라의 천지가 안정되고 만물이 생육하여 명덕이 한 나라에 밝아질 것이며, 천하에 미친다면 곧 천하의 천지가 안정되고 만물이 생육하여 명덕이 천하에 밝아질 것입니다. 삼대 이후에 한 집안이 자리 잡고 발전한 일은 세상에 간혹 있었지마는, 한 나라와 천하가 자리 잡고 발전했다는 것은 전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전하께 깊이 바라는 바가 있사옵니다.
[자료:한국고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