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헌선생문집 제9권_

기(記)_

 

모원당(慕遠堂)에 대한 기문

 

모원당(慕遠堂)은 나의 당이니, 당의 터는 옥산부(玉山府)의 남산(南山) 아래이다. 옥산(玉山)은 바로 우리 장씨(張氏)가 20여 대 대를 이어 살아온 고을이며, 남산의 아래는 나의 5대 조(祖)로부터 처음 거주하였다. 나는 하찮은 후손으로 이곳에서 생장한 지가 39년이었는데 마침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만나니, 왜란의 참혹함은 우리 나라가 생긴 이래로 이 때처럼 혹독한 변고는 일찍이 없었다.
온 경내가 왜적이 오고 가는 적침로(敵侵路)가 되고 온 성(城)이 도륙(屠戮)을 당하여, 여러 영(營)이 적의 소굴이 된 지가 거의 1년 반에 이른다. 마을이 모두 불타 갈대밭으로 변하였다. 사람들은 칼날에 죽어 시신이 도랑과 골짝에 버려진 나머지 천백 명 중에 한두 명이 겨우 생존하였는데, 이들이 유리(流離)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적이 물러간 지 10년에 이른 뒤에야 하나 둘 차츰 모이니, 우리 장씨 성(姓) 가운데 5, 6명도 이 가운데 들어 있다.
가시나무를 베고 불탄 재를 쓸어 내고는 풀을 엮어 장막을 둘러치면서 오히려 각자 우리의 땅을 편안한 곳으로 여겼으나 나는 특별히 졸렬하여 스스로 돌아올 계책이 없었다. 그러므로 고향에 와도 의지하여 머물 곳이 없어 황당해서 곧바로 떠나기를 여러 번 하였다.
우리 집안들은 나를 가련하게 여긴 나머지 생존해 돌아온 고향 친구들과 도모하여 재목을 거두고 물력(物力)을 내어 나의 옛 터에다가 집을 경영하였다. 그리하여 방과 대청을 각각 두 칸씩 만들었으며, 지주(地主)인 유 사군(柳使君)이 군청(郡廳)의 남은 기와를 주어 지붕을 덮었으니, 이상은 내가 이 당을 소유하게 된 내력이다.
당에 거처하면서 아득히 생각을 떠올리면 옥산의 땅은 이 역시 축회(丑會)에서 개벽할 때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이후로 한사군(漢四郡)으로 나뉘었다가 두 도독부(都督府)가 되고 다시 삼한(三韓 삼국)으로 나누어진 것이 홍황(洪荒)하고 질박 간략한 가운데에 있었는데, 이 지역에 태어나 스스로 살 곳으로 삼은 자가 몇 대이며, 주(州)와 부(府), 군(郡)과 현(縣)의 칭호를 가지고 있으면서 혹 인습하고 혹 개혁한 것이 몇 번이며, 그간 인물의 성쇠(盛衰)와 풍속의 선악(善惡)이 몇 번이나 변했으며, 혹 도적의 창칼에 소탕되고 무너진 것이 또한 이와 같은 때가 있었는가.
우리 선대가 이 지방에서 사신 것은 지금에 미쳐 알 수 있는 것이 10여 대 뿐이다. 10여 대 이상은 본래 이곳에 적(籍)을 두고 살았으나 아득히 멀어 전하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혹 처음에 딴 지역에 거주하여 이 땅을 관향(貫鄕)으로 삼지 않아서 전하지 않는 것인가? 아득히 증거할 곳이 없어 모두 전하지 않는다. 무릇 몇 번이나 쇠하고 왕성함을 거쳤으며, 몇 번이나 나쁘고 좋음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가.
덕업(德業)의 융성하고 쇠미함과 선(善)을 쌓음의 깊고 얕음을 진실로 규명하여 알 길이 없으나 우선 귀와 눈으로 듣고 보아 아는 것을 가지고 헤아려 보면 우리 성(姓)이 한 나라에 알려진 것이 드러나지 않은 것이 아니며, 분파(分派)가 사방에 흩어져 있는 것이 번성하지 않은 것이 아니니, 그렇다면 어찌 근원이 깊어 흐름이 멀고 뿌리가 튼튼하여 가지가 무성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 본토(本土)에 거주하는 자와 사방에 흩어져 사는 자들이 원래는 모두가 한 몸에서 나뉘어졌으니, 기맥(氣脈)이 같으므로 정(情) 또한 통한다. 그 어찌 멀고 가까움과 저 사람과 이 사람의 간격이 있겠는가. 그러나 사방에 흩어져 사는 자들은 형세가 막혀 정(情)만 있을 뿐 어찌할 수가 없으며, 다행히 본토에 남아 있는 자들은 우리 당에 오르면 어찌 나와 선조(先祖)에 대한 생각을 함께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생각함이 어찌 밖에서 연유하겠는가. 누구나 이 몸을 간직하고 있고 이 몸을 간직한 자들은 누구나 자기 몸을 아낄 줄 모르는 자가 없으니, 그 몸이 아낄 만함을 알아 이 몸의 소종래(所從來)를 찾는다면 그 생각이 영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를 낳은 자는 부모(父母)이고 나의 부모를 낳은 자는 조부모(祖父母)이고 나의 조부모를 낳은 자는 증조부모(曾祖父母)이니, 미루어 올라가면 십 대, 백 대, 천 대, 만 대로부터 저 옛날 원초(原初)에 인류(人類)를 낳은 조상에 이르러 다한다. 그렇다면 원초에 인류를 낳은 조상은 바로 우리의 이 몸이 처음 시작하여 생겨난 것이니, 그 이하 백, 천, 만 대가 쌓여 내려옴은 다만 그 신체를 바꾸었을 뿐이다. 오직 그 기맥(氣脈)은 백, 천, 만 대를 내려오면서도 한 기맥을 전하였는데, 형세가 미치지 못함이 있고 정이 다하기 어려움이 있다. 그러므로 제사(祭祀)는 한계가 있고 효도(孝道)는 미치기 어려우나 무궁한 이치와 무한한 효성은 어찌 대가 쌓였다 하여 혹 그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천자(天子)와 공(公), 후(侯), 경(卿), 대부(大夫)의 존귀함으로도 사당은 아홉 개, 일곱개, 다섯 개, 세 개의 등분(等分)에 그쳐 더 이상 모실 수 없으니, 하물며 이보다 낮아 사(士)와 서인(庶人)이 된 자에 있어서랴. 비록 이보다 더 하려고 하더라도 선왕(先王)의 제도에 제한이 있어 이미 미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자신에게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이 다할 수 있는 것을 다할 뿐이다. 다할 수 있다는 것은 굳이 만종(萬鍾)의 녹(祿)을 누리고 희생(犧牲)을 여러 솥에 진열하고 많은 제품(祭品)을 올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나의 분수에 할 수 있는 예(禮)와 나의 힘이 미칠 수 있는 일에 정성을 다할 뿐이다.
그리고 분수에 할 수 없고 힘이 미칠 수 없는 곳에 이르러도 또한 스스로 효성을 다할 길이 있으니, 이 또한 나의 한 몸을 아낌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나의 한 몸은 비록 내 스스로 가지고 있으나 실로 백, 천, 만 대의 선조가 유전(遺傳)하여 남겨 주신 것이니, 어찌 감히 내 몸이 나의 것이라 하여 가벼이 여기고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나의 몸을 가벼이 여김은 바로 나의 선조를 가벼이 여기는 것이요, 나의 몸을 소홀히 함은 바로 나의 선조를 소홀히 하는 것이니, 하물며 가벼이 여기고 소홀히 할 뿐만 아니라 혹 그 몸을 욕되게 하고 혹 그 몸을 실패하게 한다면 이는 모두가 그 선조를 욕되게 하고 그 선조를 실패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조에게 사랑의 이치를 다하고 효성의 도를 지극히 하는 것이 과연 자기 몸을 아껴 공경하고 소중히 함에 벗어나겠는가.
선조가 서로 교체한 몸은 비록 백, 천, 만 대의 이전에 이미 없어졌더라도 선조가 서로 전해주는 기맥은 바로 나의 한 몸에 있다. 이 몸은 바로 선조의 몸이니, 이 몸을 공경하고 소중히 함은 바로 우리 선조를 공경하고 소중히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수에 일정한 예(禮)는 넘을 수 없고 힘이 미칠 수 없는 일은 능히 할 수 없으나, 이 몸을 공경하고 소중히 하는 도리는 사람마다 능하지 못한 이가 없고 어느 시대이든 끝날 수 없으니, 사람의 자손이 되어 선조에게 추효(追孝)하는 것이 무엇이 이보다 크겠는가.
이미 자기 몸을 아껴 공경하고 소중히 할 줄을 안다면, 나와 똑같이 한 기운을 받아 함께 선조의 성(姓)을 전하는 자에 있어, 형세가 비록 소원함에 이르고 일이 혹 잘못을 저질러 원망한다 하더라도 어찌 소원하다 하여 잊고 잘못을 저질렀다 하여 원수로 여기겠는가.
나는 세상 사람들이 혹 심히 소원함에 이르지 않고 다만 약간 소원한 처지에 있는데도 곧 외면하며, 혹 굳이 깊은 원망이 있지 않고 다만 작은 혐의가 있을 뿐인데도 틈이 크게 벌어지는 것을 한탄하곤 한다.
아! 만약 선조께서 부모의 입장이 되어 두 사람을 보신다면 일찍이 한 번 꾸짖고 한 번 종아리치고 그칠 뿐인데, 자손이 된 자들은 선조가 함께 사랑하시는 은혜를 체득하지 않고 수많은 가지가 한 뿌리에서 나온 의리를 생각하지 아니하여, 노여움을 마음 속에 감춰 두고 원한을 묵혀 두니, 이것이 과연 동기간을 대하는 도리이겠는가. 이는 우리 종족(宗族)들이 마땅히 경계하여야 할 일이다.
아! 산은 옛날 산 그대로이고 냇물은 옛 냇물 그대로이며 골목도 모두 옛날 골목 그대로인데, 옛날과 지금이 바뀌고 인물이 변역(變易)하여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나지 못하고 없어진 자는 다시 생겨나지 못하여 고인(古人)을 다시 볼 수 없으니, 선조께서 남겨 주신 이 몸으로 선조께서 거주하시던 시골에 살면서 선조를 생각하여 사모하는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저 전야(田野)를 보면 바로 선조께서 밭 갈고 수확하시던 전야이며, 도로는바로 선조께서 밟고 다니시던 도로이며, 강산(江山)은 바로 선조께서 놀고 감상하시던 강산이다. 저 선조께서 적덕(積德)한 남은 음덕(陰德)을 입어 자손들이 또한 이 전야를 갈고 수확하며 이 도로를 밟고 다니며 이 강산에서 놀고 감상하니, 사람들이 과연 스스로 밭 갈고 스스로 수확하며 스스로 밟고 스스로 다니며 스스로 놀고 스스로 감상할 수 있겠는가. 이는 모두가 선조께서 남겨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추효(追孝)의 정성을 다하는 것을 어찌 삼가지 않겠는가.
한 번 사려(思慮)할 적에 선조를 생각하여 선조의 마음에 위배됨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한 번 말할 적에 선조를 생각하여 선조의 덕에 위배됨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한 번 동작할 적에 선조를 생각하여 선조의 도에 위배됨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전전긍긍(戰戰兢兢)하여 항상 깊은 못에 임한 듯이 여기고 살얼음을 밟는 듯이 여긴다면 우리 성을 함께한 자들이 거의 선조의 남겨 주신 가르침을 실추하지 않을 것이요, 우리 선조들 또한 훌륭한 자손을 두었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이에 나의 당을 이름하여 모원(慕遠)이라 하였다.

[주D-001]두 도독부(都督府) : 평주(平州)와 동부(東府)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 당시에는 도독부가 있지 않았으며, 동부도위(東府都尉)가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두 도독부로 보는 근거는 우리나라 학자들이 대체로 우리나라 역사에 관심이 부족하였다. 박세무(朴世茂)가 지은 《동몽선습(童蒙先習)》에 “한(漢) 나라 무제(武帝)가 위만 조선(衛滿朝鮮)을 토벌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낙랑(樂浪), 임둔(臨屯), 현도(玄菟), 진번(眞蕃)의 사군(四郡)을 설치하였으며 소제(昭帝)가 평나(平那)와 현도로 평주를 만들고 임둔과 낙랑으로 동부를 만들어 두 도독부를 설치하였다.” 하였는바, 대부분 이 기록을 그대로 믿어왔다고 추측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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