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헌선생문집 제9권_

기(記)_

 

자성정(自醒亭)에 대한 기문

 

골짝의 어귀와 연못의 언덕에 정자(亭子)가 있으니, 바로 나의 아우인 사거(斯擧)가 지은 것이다. 사거는 난리를 겪은 뒤에 처음 돌아와 우연히 이 골짝에 터를 잡고 그 편리함을 따라 거처하는 별처(別處)로 삼으니, 곧 이 정자였다. 연못도 주인이 직접 쌓은 것인데 제방이 바위를 이용하였으므로 그 바위에다가 주추를 세우고 정자를 지으니, 이 때문에 연못에 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는 내가 아우를 정자 위로 방문하였더니, 술이 몇 순배 돌자 아우는 나에게 정자 이름을 청하였다. 나는 마침내 취한 김에 정자를 돌아보고 이름을 생각해 내니, 곧 이른바 정자의 이름이다. 이 이름은 어찌하여 생각하였는가? 이 골짝의 어귀가 긴 바람을 이끌어 오기 쉽고 연못의 둑에 상쾌한 기운이 많기 때문이다.
정자 위에서 여러 병의 술을 기울여 마시고 한 몸이 정자 위에 쓰러져 있으면 손님은 흩어져 돌아가고 뜰은 비어 있으며 연못은 고요하고 물고기는 한가롭다. 마주 있는 높은 봉우리에는 밝은 빛을 드날리는 둥근 달이 떠오르고, 바위 사이에 졸졸 흐르는 물은 베개 위에 옥소리를 들려온다. 그렇다면 이 몸이 이 때에 술에서 깨지 않으려 하나, 될 수 있겠는가.
술을 깨고 나서 살펴 보면 내 마음을 한심스럽게 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두건(頭巾)을 삐딱하게 쓰고 있는 것은 내 무슨 몰골이며, 고함치고 시끄럽게 떠든 것은 내 무슨 목소리인가. 천둥과 벼락이 귓전에 울리는데도 그 누가 나로 하여금 듣지 못하게 하며, 깊은 구덩이가 눈 앞에 있는데도 그 누가 나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였는가. 만일 이보다 더하면 이 몸이 거의 이 몸이 되지 못할 것이다.
술에 취했을 때에는 무슨 마음이며 술을 깨었을 때에는 무슨 마음인가. 이미 술이 깬 뒤의 마음으로 술에 취해 있을 때의 마음을 생각해 보면 진실로 딴 사람과 같다. 내가 취하여 만일 빨리 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면 내 마땅히 이 긴긴 밤을 어둡게 지날 터인데, 나를 속히 술에서 깨어나도록 하는 것은 이 정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뒤에야 이 정자가 주인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진실로 많음을 알 수 있으니, 주인이 이 정자를 가지고 있음은 실로 또한 꿈을 꾸느냐 꿈을 깨느냐의 큰 기회이다. 내 이 이름으로 응하는 것이 주인의 생각에 부합하지 않겠는가.
주인이 말하기를, “예, 그렇습니다. 형은 과연 저의 뜻을 아십니다. 저의 뜻을 아십니다.” 하였다. 그리고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의 자식과 조카들도 꽤 술을 좋아하며 정자 위로 찾아오는 손님들도 날로 모이니, 만약 이 말을 써서 벽 위에 걸어 놓지 않는다면 우리 정자의 이름에 걸맞지 않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온 세상이 취하여 일생을 마친 뒤에 그치니, 그렇다면 어찌 다만 우리들이 한 밤의 취함일 뿐이겠습니까. 저의 정자의 이름을 듣는 자들은 혹 두려워하여 스스로 반성함이 있을 것입니다.”

이에 나는 정자에 훌륭한 주인이 있는 것을 기뻐하여 마침내 이것을 쓰게 되었다.
현익 섭제격(玄黓攝提格) 양월(陽月) 생명후(生明後)4일에 여헌(旅軒)은 쓰다.

[주D-001]현익 섭제격(玄黓攝提格) 양월(陽月) 생명후(生明後) : 현익 섭제격은 고간지(古干支)로 현익은 임(壬)이고 섭제격은 인(寅)인바, 선조(宣祖) 35년인 1602년이다. 양월(陽月)은 10월을 가리키며 생명은 밝은 달이 생기는 것으로 초사흘을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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