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풍현 왜적 침략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고려사절요 제32권 > 신우 3(辛禑三)

계해신우 9년(1383), 대명 홍무 16년

 

○ 봄 정월에 해도(海道) 부원수 정지가 왜적을 쳐서 크게 격파시키자, 금대(金帶) 한 벌과 백금 50냥을 내려 주었다.
○ 나하추가 문합라불화(文哈刺不花)를 보내어, 예전의 우호관계를 회복하자고 청하였다.
○ 정몽주 등이 요동에 이르니, 도사(都司)가 칙명이 있다 하며 들이지 않고 바치는 예물만 받았다. 칙서에 이르기를, “하늘이 덮고 땅이 싣고 일월이 임하는 곳에 만민의 임금이 되었으니, 봉한 지역은 비록 크고 작은 것이 다르나, 백성을 다스리는 도는 모두 마찬가지다. 온 천하의 백성들을 옛날부터 지금까지 어찌 한 임금이 두루 잘 길렀으랴. 전에 삼한의 추장이 백성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죽인 뒤에도 거듭 와서 짐에게 아뢰고 신하로서 조공하는 것을 평상시와 같이 하였다. 두 번 세 번 물리쳤으나 그치지 않아, 특별히 세공 문제로 그들을 곤란하게 하면 반드시 그치리라 생각하였다. 이제 그치지 않고 굳이 청하므로, 과거 수년 동안 바치지 아니한 자잘한 공물까지 모두 합하여 수효를 만들어서 그들을 암암리에 우롱하고 모욕하려 한다. 그러나 삼한의 지역이 중국의 동쪽, 창해의 밖에 있는데, 짐이 우리 중국의 서적을 보였다. 그 지방 사람들은 은혜를 생각지 않고 화를 얽기를 좋아한다 하였다. 비록 잠깐 신하 노릇을 할지라도 무슨 소용이 있으랴. 너희 요동을 지키는 여러 장수들은 굳게 내 강토를 지키되, 견주거나 청구하지 말라. 이제 수년 동안의 물건을 합하여 하나로 만들어서, '칙명과 같이 하라.' 하고, 그 뜻이 정성스럽지 못하거든 부서(符書)가 이르는 날에 전과 같이 저지하여 돌려보내어, 국경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 다만 스스로 교화가 되도록 하라." 하였다.
○ 오랑캐 발도가 와서 이성(泥城)을 노략하다가 날아오는 화살을 맞고 달아났다.
○ 요동 도사가 통첩을 보내기를, “고려가 대명을 신하로서 섬기니, 나하추와 화친을 통하지 않아야 할 터인데, 이제 듣건대, '나하추가 문합라불화를 보내어 화친을 청하자, 고려가 후하게 대접하여 그를 위로하였다.' 하니, 신하로서 대명을 섬기는 의리로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만일 죄를 면하고자 하거든, 문합라불화를 잡아 보내어 그 정성을 드러내라. 그렇지 않으면 비록 후환이 있더라도 후회막급이리라." 하였다.
○ 2월에 양광도 안렴 유극서(柳克恕)와 교주도 안렴 최자(崔資)에게 나라 마구의 말을 각각 한 필씩 주었다. 두 사람은 모두 간사하고 영리하며 아첨하는 사람으로, 우가 남쪽으로 순행했을 때에 백성의 고혈을 짜서 맛있는 음식을 극진히 올렸고, 권세가에 뇌물을 주어 아첨하고 기쁘게 하였으므로, 이것을 하사한 것이다.
○ 우가 송경에 돌아왔다.
○ 좌사에서 의논하여 권근(權近) 등이 상소하기를, “관작이라는 것은, 덕이 있는 사람에게 명하고 공이 있는 사람을 상주는 것이기 때문에, 어진 자가 자리에 있고 능한 자가 직책에 있어야 하니, 공이 없는 사람은 함부로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근년 이래로 사방에 병란이 일어나 국가의 재정이 고갈되어, 싸움에서 승리한 공이 있는 사람이 있어도 돈과 재물이 모두 상주기에 부족하였고, 관작은 다 주기 어려웠습니다. 선왕께서는 임시로 첨직(添職)을 마련하여 일정한 수를 두어 공이 있는 사람에게 상으로 주었으며, 전공이 없으면 감히 헛되이 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공이 있는 자는 더욱 격려되었으며, 공이 없는 자는 감히 바라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지금은 첨직이 너무 많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게 되어, 공이 있고 없는 것이 서로 혼돈되고, 요행을 바라는 길이 날마다 열려, 공인ㆍ장사꾼ㆍ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함부로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공이 있는 자는 비록 얻더라도 기뻐하지 않으며, 공이 없는 자는 함부로 구하기를 그치지 않아, 관작의 천함이 진흙같이 되었으니,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지금 국가가 의지하는 것은, 공 있는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것으로 사람의 마음을 잡아매는 것은 오직 관작뿐인데, 관작이 중하지 아니하여 사람마다 모두 그것을 가볍게 여기면, 뒤에 비록 공이 있더라도 무엇으로 상을 베풀 것입니까. 또 전장에서 싸우는 군사가 어찌 가볍고 천한 벼슬에 보태지기를 바라고 측량하기 어려운 위태 땅으로 달려가겠습니까.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공이 있는 사람을 상주기 위해서 첨설한 관직은 한결같이 선왕께서 정한 수에 의거하여, 싸움에 나가 공이 있는 군관(軍官)을 제외하고는 제수를 허여하지 마옵소서. 여자에게 택주(宅主)를 봉하는 것과, 중에게 제군(諸君)을 봉하고 법호(法號)를 주는 것과, 양부 외에 봉군하는 것은 모두 벼슬이 가볍고 천하게 되는 데에 관계되므로, 아울러 금지하옵소서.
국가의 안위가 주ㆍ현의 성쇠에 달려 있는데, 근년 이래로 지방 고을의 아전들이 본역을 면하기를 꾀하여 명서업(明書業)ㆍ지리업ㆍ의율업(醫律業)을 한다고 핑계대나, 모두 진정한 재능 없이 관직에 나아가 역사를 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골 아전이 날마다 줄어서 공무를 집행하기 어렵고, 수령들은 부리고 시킬 사람이 없게까지 되었으며, 여러 업으로 관직에 나아간 자들은 고향으로 물러나 앉아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행하여도 수령이 이를 어떻게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ㆍ현에 약간 남아 있는 아전들도 모두 분에 넘치는 생각을 가지게 되니, 각 고을이 이로 인하여 더욱 쇠할까 두렵습니다. 바라건대, 동당(東堂)의 제업(諸業)과 감시(監試)의 명경(明鏡)을 모두 폐지하옵소서. 옛 책에 이르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재물은 백성의 마음이므로, 그 마음을 잃으면 백성이 흩어지고, 그 근본을 잃으면 나라가 위태하다." 하였습니다. 근년 이래로 전쟁이 그치지 않고 수재와 한재가 겹쳐서 백성들에게 주린 기색이 있고 들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있으며, 게다가 밭 하나에 주인이 두셋씩 되어서 각각 그 도조를 징수하여 백성을 괴롭혀도 그 곳 관사(官司)들이 이를 꾸짖어 금하지 못하니, 지금부터는 한결같이 본국의 전법(田法)에 의거하여 서울 안에서는 판도사가, 지방에서는 안렴사가 판단 결정하여, 백성이 소생하여 쉬게 하고, 만일 어기는 자가 있거든 철저히 금지하옵소서.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옛 교훈을 배워야 이로써 일을 세울 수 있다.' 하였으니, 옛날부터 어진 임금이 배우지 않고서 온갖 정사를 잘 다스린 분은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처음 즉위하셨을 적에는 배움에 뜻을 두어 먼저 서연(書筵)을 개설하시니, 국인이 서로 치하하고 태평을 기대했었는데, 근년 이래로 하다가 말다가 하시어, 사람들이 모두 실망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처음 뜻을 잊지 마시고 다시 서연을 열어, 대신에게 건의하도록 명하기도 하고, 측근의 신하로 하여금 강논하게 하기도 하여, 경학에 실린 의리의 종지를 통달하시고, 고금에 걸친 치란의 변천을 관찰하시어, 삼한 신민의 소망에 부응하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 3월 사헌부에서 글을 올려 아뢰기를, “본조에서는 벼슬에 복무한 기간과 노력의 실적을 가지고 자격에 따라 계급을 올려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상주는데, 근년 이래로 분주하게 경쟁하는 것이 풍속이 되어 관작이 날로 천해져서, 공로가 있는 자는 승진하지 못하고 공이 없는 자는 함부로 받으니, 자세히 조사고 차례에 따라 서용하여, 인사 행정의 법을 밝히소서. 수령은 백성을 가까이하는 직책이니 더욱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되는데, 근래에 간사하고 아첨하며 탐하고 사나운 무리들이 권세가에 붙어 수령이 되어 멋대로 불법을 행하므로, 주ㆍ부와 군ㆍ현이 나날이 피폐해지니, 대성(臺省)과 6조에 청렴하고 정직하며 근검한 자를 천거하게 하여 군ㆍ현에 나누어 보내고, 도순문사와 안렴사에게 어진 사람은 올리고 나쁜 사람은 내치어 상과 벌을 밝히게 하며, 만일 잘못 천거한 것이 있거든, 죄가 천거한 사람에게까지 미치게 하옵소서." 하였다. 우가 그 말을 받아들였다.
○ 우가 정비의 대궐에 갔다. 이 뒤로부터 왕래가 매우 잦았는데, 어떤 때는 들어가지 못하였다. 갈 적마다 희롱하기를, “나의 궁녀들은 어쩐지 어머니의 인물만 못합니다." 하였다.
○ 좌사의 권근 등이 상소하기를, “전하가 오로지 노는 것만 일삼고 동작에 절도가 없어, 낮이나 밤이나 기사 두어 명을 데리고 길을 달리시니, 백성이 용안을 바라보고 아는 자는 깜짝 놀라 실망하여, '전하가 어찌 이렇게까지 하시는가.' 하며, 알지 못하는 자는 난봉꾼으로 생각하여 손가락질하며 모욕하고 비웃습니다. 지금 사방에 병란이 일어나고 흉년이 거듭 들어서, 백성의 생업이 탕진되고 나라 형세가 장차 위태롭게 될 것이니, 이때야말로 밤낮으로 근심하고 부지런히 정신을 가다듬고 정사를 할 때입니다. 전하께서는 조금도 유의하지 않고 밤늦도록 놀고 아침 늦게 일어나며, 안에서는 향락에 빠지고 밖에서는 말 달리며 돌아다니시어 작은 재미를 즐기고 장래의 걱정을 잊으시니, 갑자기 급한 일이 생기면 장차 어떻게 이를 처리하시렵니까. 더구나 향락에 빠져 뜻을 방탕하게 하고, 말을 달리어 몸을 수고롭게 하는 것은, 진실로 정신을 수양하여 수명을 보전하는 방법이 아니옵니다. 전하께서 한창 젊어서 혈기가 굳지 않았사오니, 이 또한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부터는 감히 경솔히 나가서 길에서 달리지 마시고, 밤이 되거든 자고 아침이 되거든 단정히 앉아 높이 손을 모아 쥐고, 대신을 가까이하시어 시국 정치의 잘잘못을 묻고 고금의 치란을 문의하시며, 조용히 담소하고 덕성을 함양하셔서, 법이 아닌 것은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닌 것은 행하지 말아, 하루하루 더욱 조심하고 아무리 쉬고 싶더라도 쉬지 마옵소서. 그러면 전하께서는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고 착한 것을 좋아하시는 미덕이 생기고, 뜻을 방탕하게 하고 몸을 괴롭히는 근심이 없어져 천위(天位)는 더욱 높아지고 왕업은 더욱 오래 갈 것입니다." 하였다.
○ 문하시중 홍영통(洪永通)이 은퇴하기를 청하니, 조민수를 시중으로, 임견미를 수시중으로 삼고, 견미ㆍ도길부ㆍ우현보ㆍ이존성을 시켜 정방(政房)을 제조하게 하였다. 전례에 시중이 인사 행정을 맡았었는데, 영통과 민수가 시중이 되어도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견미가 권세를 독차지했기 때문이었다.
○ 여름 4월에 가뭄으로 이죄(二罪) 이하를 사면하였다.
○ 김한로(金漢老) 등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5월에 전 판사 한중보(韓仲寶), 상호군 한중량(韓仲良)에게 장형을 행하고 변방에 귀양보냈다. 중보는 일찍이 제주 안무사로 있으면서 임금의 명령을 가장하고 마음대로 욕심을 부린 죄로 순군옥에 갇히었으며, 그 아우 중량은 본래 중보와 우애가 없었는데, 중보가 형을 당하는 것을 기뻐하고 형의 죄악을 열거하여 이존성의 집에 익명으로 투서하였으므로, 아울러 중량도 옥에 가두어 죄를 주었다.
○ 해도 원수 정지가 남해현(南海縣)에서 왜적을 쳐서 크게 파하였다. 이때에 정지가 거느린 전함은 겨우 47척이었는데, 나주와 목포에 머물러 있었다.
적선 1백 20척이 크게 이르자, 경상도 바닷가의 고을들이 매우 동요하였다. 합포 원수 유만수(柳曼殊)가 위급함을 고하므로, 정지가 밤낮으로 배 몰기를 독려하여 손수 노를 젓기도 하니, 노 젓는 군사들이 더욱 힘을 다하였다. 섬진(蟾津)에 도착하여 합포의 군사들을 징집하니, 적이 이미 남해의 관음포(觀音浦)에 이르렀는데, 형세가 대단히 성하여 사면으로 둘러싸고 전진하였다. 정지가 군사를 독려하여 나가 박두양(朴頭洋)에 이르니, 적이 큰 배 20척마다 강한 군사 1백 40명씩을 태워 선봉으로 삼았다. 정지가 진격하여 크게 깨뜨려 적선 17척을 불태우니, 뜬 시체가 바다를 덮었다. 병마사 윤송(尹松)이 화살에 맞아 죽었다.
○ 우가 몰래 호곶(壺串)에 가서 말 먹이는 것을 보았는데, 숙위하는 자들이 아무도 간 곳을 몰랐었다.
○ 6월에 교주ㆍ강릉도 수척(水尺)ㆍ재인(才人)이 가짜 왜적이 되어 평창ㆍ원주ㆍ영주ㆍ순흥 등지를 약탈하니, 원수 김입견(金立堅)과 체찰사 최공철(崔公哲)이 50여 명을 잡아 죽이고, 그 처자를 각 고을에 나누어 귀양보냈다.
○ 대간이 번갈아 글을 올려 아뢰기를, “우리 태조가 삼한을 통일하자 자손이 서로 계승함에 반드시 옛 일을 본받았습니다. 임금이 출입하는 것은 반드시 종묘의 제사나 국제간의 회합이나 외국 빈객의 접대 같은 일에 의하였고, 일없이 함부로 다닌 적이 없었습니다. 영릉(永陵 충혜왕)에 이르러 조종(祖宗)의 법을 따르지 않으며, 간신(諫臣)의 말을 듣지 않고 날마다 여러 소인과 더불어 마을에 돌아다니며 놀다가, 그 소문이 상국에까지 들려 마침내 악양(岳陽)의 행차가 있었습니다. 지금 전하가 놀러 다니심이 절도가 없어, 기사 두어 명을 데리고 말달리며 다니시지 않는 곳이 없으니, 신민이 기대를 잃고 있습니다. 위로는 하늘의 명을 두렵게 여기시고, 아래로는 조종을 본받아 출입하는 것이 절도가 있으며, 시위는 의장을 갖추어 혹시라도 가볍게 나다니지 마시어, 신민의 기대에 응하여 주옵소서." 하였다.
○ 왜적이 경상도 길안(吉安)ㆍ안강(安康)ㆍ기계(杞溪)ㆍ영주(永州)ㆍ신녕(新寧)ㆍ장수(長守)ㆍ의흥(義興)ㆍ의성(義城)ㆍ선주(善州) 등지를 침략하고, 또 단양(丹陽)ㆍ제주(堤州)를 침략하였다. 전의령(典儀令) 우하(禹夏)를 경상도에 보내어, 원수들이 왜적을 막는 태도를 감독하고 시찰하게 하였다.
○ 가을 7월에 우하가 여러 병마사를 독려하여 의성에서 왜적을 쳐서 3급을 베고, 또 예안(禮安)ㆍ순흥(順興)에서 싸워 14급을 베었다.
○ 지순주사 황안신(黃安信)이 군량 운반을 감독하다가 쌀 70여 석을 절취하였다. 유사가 법으로 처단하려 했는데, 우의 인척인 관계로 관직만 삭탈하였다.
○ 왜적이 대구(大丘)ㆍ경산부(京山府)ㆍ선주(善州)ㆍ인동(仁同)ㆍ지례(知禮)ㆍ김산(金山) 등지를 침략하였다.
○ 양광도 원수 왕안덕(王安德)이 괴주(槐州)에서 왜적을 쳐서 3급을 베었다.
○ 요동 심양의 비적 40여 기가 단주에 침입하니, 단주 만호 육여(陸麗)와 청주 만호 황희석(黃希碩)과 천호 이두란(李豆蘭) 등이 추격하여 서주위(西州衛)ㆍ해양(海陽) 등지에 이르러 괴수 여섯 명을 베니, 나머지는 모두 도망가 버렸다.
○ 교주ㆍ강릉도 도체찰사 최공철이 방림역(芳林驛)에서 왜적을 쳐서 8급을 베었다.
○ 8월에 문하찬성사 조인벽(趙仁璧)을 동북면 체찰사로, 판개성 부사 한방언(韓邦彦)을 상원수로, 문하찬성사 김용휘(金用輝)를 서북면 도순찰사로, 전 판도판서 안사조(安思祖)를 강계 만호로 삼아 변경을 방비하게 하였다.
○ 왜적이 비옥(比屋)ㆍ의성 등지를 침략하는데, 적은 많고 아군은 적어 여러 번 싸웠으나 불리하였다. 부원수 윤가관(尹可觀)이 안동ㆍ예안 등지에서 싸워 패하였다.
○ 왜적이 거령(居寧)ㆍ장수(長水) 등의 현을 함락시키고 군사를 나누어 전주를 침략하려 하는 것을, 부원수 황보림이 여현(礪峴)에서 싸워 물리쳤다.
○ 우가 밀직제학 조준(趙浚)을 불러 이르기를, “양광ㆍ경상도에 왜적이 매우 성한데, 원수와 도순문사가 약하고 겁내어 싸우지 못하니, 경이 가서 전쟁의 상황을 살펴야 되겠다." 하니, 준이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만일 신에게 두 도를 맡게 하시려면, 그 장수로서 머뭇거리거나 패전한 자는 신의 조처에 맡기셔야 합니다. 그러하지 않으면 원수와 도순문사의 직위가 신의 위에 있는데, 어찌 신을 두려워하여 죽을 땅에 나가려 하겠습니까." 하였다. 장수의 족속들이 이를 꺼리어 우에게 사뢰어 그만두게 하고, 마침내 문하평리 문달한(文達漢)을 양광ㆍ경상도 도체찰사로 삼고 명령하기를, “가서 장수의 부지런함과 태만함, 사기의 왕성함과 쇠약함 것을 살피어, 머뭇거리고 전진하지 않는 자가 있거든 원수는 잡아 가두고 보고하여, 그 나머지는 군율에 의하여 곧장 처단하라." 하였다.
○ 왜적 2백여 기가 괴주(槐州) 장연현(長延縣)을 침략하니, 원수 왕안덕ㆍ김사혁(金思革)ㆍ도흥(都興)이 적과 싸워 3급을 베었다.
○ 왜적 1천여 명이 춘양(春陽)ㆍ영월(寧越)ㆍ정선(旌善) 등의 군ㆍ현을 침략하였다.
○ 좌사의 권근 등이 글을 올려 아뢰기를, “우리 태조께서 근심하고 부지런하시여 만대에 전통을 내려 주셨고, 여러 성군이 서로 계승하여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에게 부지런히 하며 법과 제도를 준수하여 차차 태평을 이루었습니다. 선대에서 수백 년 동안 쌓아올려 어렵게 이룬 왕업이 전하여 전하에게 이르렀으니, 물려받으신 책임이 무겁다 할 수 있습니다. 임금의 지위는 어려울 뿐이며, 관계되는 것이 지극히 소중하여, 한 생각이라도 삼가지 않으면 사해에 근심을 끼치기도 하고, 하루라도 삼가지 않으면 백 년의 걱정을 이루기도 하니, 비록 정치가 잘 되고 일이 없는 때라도 오히려 마땅히 두려워하며 조심하여 뜻밖의 변에 대비하여야 할 것인데, 하물며 국가의 위급한 시기를 당하여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나라는 수재와 한재가 잇달아 일어나고 기근과 유행병이 겹쳐, 나라에는 몇 달을 지탱할 저축이 없고, 백성은 하루저녁거리도 없어, 늙고 약한 자는 죽어서 개천과 구렁에 뒹굴고, 굶어죽은 시체가 길거리에 널려 있습니다. 게다가 이웃나라가 국경 가까이에 군사를 주둔하여 우리의 영토를 침범하며, 우리의 인민을 꾀어 가고, 또 왜적이 깊이 들어와 약탈해서 각 고을이 쓸어낸 듯 버려져 적의 구혈이 되었어도, 수령이 막지 못하고 장수가 제어하지 못하니, 자고로 위란의 지극함이 이때보다 더 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섶을 쌓아 놓고 불을 지르는 것도 현재의 다급함에 비유하기에 부족하고, 침상을 깎아 살갗에까지 재앙이 미친다는 것도 현재의 절박함을 비유하기에 부족합니다. 시국을 구제하기가 급함이 마치 새는 물을 타는 불에 붓는 것같이 하더라도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두려우니, 이제는 참으로 전하가 두려워하여 닦고 살피며 밤낮으로 근심하고 부지런하며 분발하여 일을 하여야 할 때입니다.
지난번에 신등이 사헌부와 함께 글을 올려 미행(微行)을 간하였더니, 전하께서 영명하고 과단하신 덕으로 넉넉히 용납하여 어기지 아니하시고 곧 이를 받아들이시어, 궁중에 단정히 계시고 두어 달 동안을 나다니지 아니하셨습니다. 간하는 말을 좇으시는 덕과 허물을 고치는 아름다움이 오늘날에 빛나고 옛날보다 뛰어나서 일월이 빛을 더하니, 신하들은 조정에서 서로 경사로 여기며, 백성들은 들에서 서로 기뻐하여, 안팎이 한결같이 정치가 잘될 것을 기대한 지가 한 달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위태하고 어지러워 어려움 많은 시기를 당하여, 반성하고 조심하며 두려워하는 태도를 생각지 아니하시고 다시 나다니심만을 일삼아 밤낮으로 말을 달리며 돌아다니십니다. 높으신 왕의 몸으로 말 한 필을 타고 다니시어 자주 깊은 궁중을 떠나서 거리를 달리시니, 시위하는 신하들은 활과 칼을 끼고 빈 궁을 지키고 있으며, 공경과 백관들은 전하의 계신 곳을 알지 못합니다. 틈을 엿보고 내응하는 도적이나, 첩자와 자객이 이 나라 안에 있지 않을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만일 강하고 사나운 무리가 기회를 노리고 몰래 일어난다면 창졸간에 변이 일어날까 매우 두렵습니다. 이것이 신등이 밤낮으로 마음 아프게 생각하며, 깊이 전하를 위하여 위태롭게 여기는 바입니다.
옛날부터 인심은 헤아리기 어렵고, 화란은 일정한 것이 없습니다. 위태로움은 반드시 편안한 데서 생기고, 변은 반드시 소홀히 여기는 데서 생기는 것이니, 환란을 방비하는 도를 참으로 엄하게 하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잘 다스릴 때에도 오히려 변이 날까 두려운데, 하물며 지금은 도적이 많은 때이므로 더욱 한심합니다. 전하께서는 선조가 쌓아올린 어려운 왕업을 계승하고 계시니, 비록 자신은 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장차 종묘 사직을 어찌 하시렵니까. 잘못인 줄 알면서 간하는 말을 좇지 않음은 허물을 늘리는 것이고, 위태한 줄을 알면서 정사를 닦지 않음은 망함을 재촉하는 것입니다. 이 소문이 만일 나돌아 사방에 번진다면, 틈을 타려는 도적이 어찌 다행스럽게 여기지 않겠으며, 적을 막으러 간 장수가 어찌 실망을 하지 않겠으며, 백성의 마음이 어찌 더욱 분산되지 않겠으며, 나라 형세가 어찌 더욱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신등이 밤이 되어도 자지 못하고 밥을 대해도 탄식하면서, 가슴을 치며 슬픔을 금하지 못하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감히 안락하지만 마시 만기(萬機)의 정사를 도모하시고, 감히 놀러 나다니지 마시어 비상한 변고를 방비하시며, 간하는 말대로 반드시 행하시어, 혹시라도 신용을 잃지 마시며, 단정히 앉아 높이 손을 모아 잡으시어 재신들을 가까이해서 나라를 다스리는 계획과 도적을 막는 방책을 널리 물어 보시고, 밤낮으로 근심하고 부지런하시며 정신을 가다듬고 다스리기를 꾀하며, 덕을 닦고 정사를 행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상과 벌을 엄정하게 주시어 나라의 법전을 밝히시면, 장수와 병사는 저절로 분발하고 도적은 저절로 그칠 것이며, 이웃 나라가 감히 꾀하지 못하며 강포한 자가 감히 방자하지 못하여, 조종의 업이 영원히 전할 것입니다." 하였다. 우가 마을로 말을 달리며 돌아다니면서 그래도 대간을 두려워하고 꺼렸었는데, 환관들이 말하기를, “대간도 모두 상감께서 제수한 것이온데, 만일 뜻에 거슬리면 갈아 치우는 것이 어찌 어렵겠습니까." 하였다. 이로부터 우가 더욱 대간을 가볍게 여기어 다시 기탄 없이 노닐며 사냥하기에 쉴 날이 없었다.
○ 왜적이 임실현을 침략하였다.
○ 호발도(胡拔都)가 와서 단주를 침략하니, 부만호 김동불화(金同不花)가 이에 내응하여, 재물을 모두 차지하고 뒤에 거짓으로 붙잡혔다. 상만호 육여(陸麗)와 청주 상만호 황희석(黃希碩) 등이 여러 번 싸워 모두 패하였다. 그때에 이두란이 어머니의 상복을 입고 청주에 있었다. 이태조가 사람을 시켜 불러와서 그에게 이르기를, “국가의 일이 급하여 그대가 복을 입고 집에 있을 수 없다. 상복을 벗고 나를 따르라." 하였다. 두란이 상복을 벗고, 하늘에 울면서 절하여 고하고 나서 활과 화살을 차고 따라갔다. 발도와 길주평(吉州平)에서 만나, 두란이 선봉이 되어 먼저 싸우다가 크게 패하여 돌아왔다. 태조가 조금 뒤에 이르니, 호발도가 세 겹이나 되는 두꺼운 갑옷에 붉은 털옷을 껴입고, 검정 암말을 탄 채 진을 가로막고 기다리고 있다가, 태조를 가볍게 생각하고 군사는 머물러 두고 칼을 뽑아서 몸을 던져 달려 나왔다. 태조 또한 단기로 칼을 뽑아 들고 달려 나가서 검을 휘두르며 서로 쳤는데, 둘 다 날쌔게 비키어 맞히지 못하였다. 호발도가 미처 말을 가누지 못하고 있을 때에, 태조가 급히 말을 돌리며 활을 당겨 그 등을 쏘았으나, 갑옷이 두꺼워 화살이 깊이 들어가지 않았다. 곧 또 그 말을 쏘아 관통시키니, 말이 거꾸러지며 호발도가 떨어졌다. 태조가 또 쏘려 하자, 그 휘하들이 몰려들어 구원하니, 우리 군사들도 쫓아나왔다. 태조가 군사를 놓아 크게 쳐서 깨뜨리니, 호발도는 겨우 몸만 빠져 도망갔다.
○ 찬성사 김유를 보내어 성절을 하례하고 시호와 승습(承襲)을 청하는 진정표를 올리고, 밀직부사 이자용(李子庸)은 천추절을 하례하게 하였다. 앞서 요동을 경유하다가 번번히 도달하지 못하였으므로, 유 등으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가게 하였다.
○ 좌사의 권근 등이 간하기를, “지금 왜구가 사방을 침략하여 소란하고, 첩자와 자객이 경성에 왕래하는데, 전하께서는 기사 두어 명을 데리고 길거리를 달리시며 밤새도록 돌아오지 아니하시니, 신들은 전하를 위하여 매우 위태롭게 여깁니다." 하니, 우가 말하기를, “내가 정말 이런 잘못이 있다. 경들이 아니면 누가 말하겠는가." 하였다.
○ 우리 태조가 변방을 편안히 하는 계책을 올렸는데, 아뢰기를, “북계(北界)는 여진ㆍ달달ㆍ요동ㆍ심양의 지역과 서로 연하였으니, 실로 국가의 중요한 땅입니다. 비록 일이 없는 때라도 반드시 양식을 저축하고 군사를 길러 의외의 사태에 대비하여야 하겠는데, 이제 그 곳 주민들이 매양 저 사람들과 서로 물자를 교역하여 날마다 서로 친압하여 혼인을 맺기까지 하여 저쪽에 있는 족속이 유인하여 가고, 또 앞잡이가 되어 들어와 약탈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말과 같이, 이것은 동북 한 방면의 걱정일 뿐만이 아닙니다. 또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유리한 지리를 차지하느냐 못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저쪽 군사들이 점령한 곳이 우리의 서북쪽에 가까운데 내버려 두고 도모하지 않으므로, 마침내 중한 이익을 노려 멀리 우리 오읍초ㆍ갑주ㆍ해양의 백성들을 꾀어서 유인하여 가고, 지금 또 단주 독로올(禿魯兀)의 땅에 쳐들어와서 사람과 물건을 몰아가니, 이것으로 본다면 우리 요해의 지리 사정을 저쪽에서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신이한 방면의 임무를 맡고 있는 터에 앉아서 보기만 할 수 없어서, 삼가 국경 경비의 방책을 계획하여 보고하나이다.
도적을 막는 방법은 군사를 훈련시켜 일제히 공격하는 데 있사온데, 지금은 훈련시키지 않은 군사들을 먼 땅에 분산시켜 놓았다가 도적이 들어온 뒤에야 황급하게 불러들이는데, 군사가 올 때쯤 되면, 도적은 벌써 노략질하여 물러난 뒤입니다. 비록 시기에 이르러 싸운다 하더라도, 전술에 서투르며, 싸움에 익숙하지 못한데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제부터는 병졸을 훈련시켜 약속을 엄하게 세우고 호령을 거듭 밝혀, 변을 기다렸다가 곧 출동해서 사기(事機)를 잃지 말게 하옵소서.
군사의 생명은 양식에 달려 있으니, 비록 백만 군사가 있다 할지라도 하루 동안의 식량이 있어야 하루의 군사가 될 수 있고, 한 달 동안의 식량이 있어야 한 달의 군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은 하루도 먹는 것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도의 군사에게는 과거에는 경상ㆍ강릉ㆍ교주의 양곡을 운반하여 공급하였는데, 지금은 도내의 지세로 이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근래에 수재ㆍ한재로 인하여 관청과 민간이 모두 텅 비었고, 게다가 놀고 먹는 중과 무뢰배들이 불사를 칭탁하여 함부로 권세가의 편지를 받아서, 각 고을에 간청하여 백성에게 쌀 한 말과 베 한 자를 꾼다고 하고는 섬곡식과 10여 자의 베를 거두는데, 명목을 '반동(反同)'이라 하여 징수하기를 빚받아 내는 것처럼 하니, 백성들이 이때문에 기한에 시달리고, 또 여러 관청과 여러 원수(元帥)가 보낸 사람들이 떼를 지어 다니며, 이집저집에서 돌려 가며 먹어서 살을 깎아 내고 뼈를 망치질하듯 하니, 백성들이 고통을 참지 못하여 흩어지고 도망치는 자가 열에 여덟, 아홉입니다. 그리하여 군사의 식량이 나올 데가 없으니, 모두 금하여 없애어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옵소서.
또 도내의 고을들이 산과 바다에 끼어 있어서 땅이 좁고 또 척박한데, 지금 그 세를 거두는 것이 경작하는 토지가 많고 적은 것은 묻지 않고, 오직 호구가 크고 작은 것만을 보아서 책정합니다. 화령(和寧)은 도내에서 땅이 넓고 풍요한데, 모두 아전들의 녹전이어서 그곳의 지세는 관청에서 거두지 못하므로, 백성에게서 받아들이는 것이 고르지 못하고 군사를 먹이는 것은 족하지 못하오니, 금후로는 도내 여러 고을과 화령을 모두 경작하는 토지의 많고 적음에 준하여 과세함으로써 관청이나 민간이 다 편하게 하옵소서.
군사와 백성은 통속이 있지 않으면 급한 일이 있을 때에 서로 보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선왕의 병신년 하교에, 세 집으로 한 호(戶)를 만들고, 백 호로 통을 만들며, 통주(統主)는 원수의 영(營)에 소속시키고, 일이 없으면 세 집이 차례로 번을 서며, 일이 있으면 다 나오고, 일이 급하면 집안의 장정을 모두 징발하였으니, 진실로 훌륭한 법이었습니다. 근래에 법이 폐지되어 소속된 곳이 없어서, 징발할 때마다 흩어져 사는 백성들이 산골로 도피하여 불러 모으기가 어렵습니다. 지금은 또 한재와 기근으로 민심이 더욱 이탈되는데, 저들은 돈과 식량으로 미끼를 삼아 불러들이고, 군사를 숨기고 와서 노략질하여 돌아가기 때문에, 한 지역의 궁한 백성들이 이미 일정한 마음이 없고, 또 종족이 서로 섞여 있어서 이리저리 관망하다가 유리한 쪽으로만 따르니, 실로 보존하기가 어렵습니다. 병신년 하교에 의하여 다시 군호(軍戶)를 정해서 통속이 있게 하여 굳게 그 마음을 결속하게 하옵소서.
백성이 잘살고 못사는 것은 수령에게 달려 있고, 군하의 용감하고 비겁함은 장수에게 달렸습니다. 지금 고을을 다스리는 자가 권세가의 문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세력을 믿고 그 직책을 삼가지 않아서, 군사는 그 수요가 부족하고 백성은 그 생업을 잃게 되어 호구가 줄고 창고가 텅 비니, 이제부터는 청렴하고 부지런하며 정직한 자를 공정하게 선발하여 백성에 게 임해서는 홀아비와 과부를 돌보아 주게 하며, 또 장수가 될 만한 자를 선택하여 군사를 거느려 국가를 방위하게 하옵소서." 하였다.
○ 왜적 1천여 명이 옥주(沃州)ㆍ보령(報令) 등의 고을을 함락시키고, 마침내 개태사(開泰寺)로 들어가서 계룡산에 웅거하였다. 문달한(文達漢)ㆍ왕안덕(王安德)ㆍ도흥(都興)이 나가서 공격하니, 적이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공주 목사 최유경(崔有慶)과 판관 송자호(宋子浩)가 구점(仇岾)에서 싸워 자호는 패하여 죽고, 달한ㆍ김사혁(金斯革)ㆍ안덕ㆍ도흥ㆍ안경(安慶)ㆍ박수년(朴壽年) 등은 공주 반룡사(盤龍寺)에서 싸워 8급을 베고, 사혁은 목천(木川)ㆍ흑점(黑岾)까지 추격하여 20급을 베었다.
○ 문하평리 지용기를 전라도 도원수로 삼았다.
○ 9월에 지문하사 이을진을 강릉도 원수로 삼았다.
○ 일본이 포로로 잡힌 우리 백성 1백 12명을 돌려보냈다.
○ 대호군 정승가(鄭承可)를 오도 체복사로 삼아서, 군사 진용의 허실과 접전의 근태(勤怠)를 조사하였다.
○ 사헌부가, 환관 예의 판서 조순(曹恂)이 우를 인도하여 황음한 짓을 하게 한 것을 논핵하여 전라도 내상(內廂)에 귀양보냈다.
○ 왜적이 강릉부와 김화현(金化縣)을 침략하고 또 회양부(淮陽府)와 평강현(平康縣)을 함락하니, 경성에 계엄을 실시하고 평양과 서해도의 정병을 불러들여와 호위하게 하며, 전 정당상의 남좌시(南佐時), 지밀직 안소(安紹), 밀직상의 왕승귀(王承貴)ㆍ왕승보(王承寶)ㆍ정희계(鄭熙啓)ㆍ인해(印海), 개성군 왕복명(王福命), 판개부성사 곽선(郭璇) 등을 보내어 그들을 치도록 하였으나 김화에서 싸워 패전하였다.
○ 왜적이 홍천현(洪川縣)을 함락하니, 원수 김입견(金立堅)ㆍ이을진(李乙珍)이 적과 싸워 5급을 베었다.
○ 진병법석(鎭兵法席)을 중앙과 지방의 사찰 도합 1백 51개소에 크게 베풀었는데, 공급하는 비용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방어에 나가는 군사는 식량을 각자 준비하였다.
○ 밀직 김세덕(金世德)의 처 윤씨가 보국사의 중과 간통하니, 사언부가 적발하여 다스리려 하였으나, 세력이 강한 족속이기 때문에 면하였다.
○ 겨울 10월에 도체찰사 최공철(崔公哲)이 낭천(狼川)에 이르렀는데, 왜적이 갑자기 나와 습격하여 그 아들을 사로잡았다. 체복사 정승가가 왜적과 양구에서 싸우다가 패전하여 물러가 춘주에 주둔하니, 적이 춘주까지 추격하여 함락시키고, 드디어 가평현(加平縣)에 침입하였다. 원수 박충간(朴忠幹)이 싸워서 쫓아 버리고 머리 6급을 베었는데, 적은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가 웅거하였다. 찬성사 상의 우인열(禹仁烈)을 도체찰사로 삼고, 전 밀직 임대광(林大匡)을 조전원수로 삼아, 가서 적을 치게 하였다.
○ 이성 만호(泥城萬戶)가 보고하기를, “요동 총병관이 아뢰기를, '달달(韃韃)이 문합라불화(文哈剌不花)를 고려에 보내어 함께 요동을 치려 하니, 군사를 보내어 이를 구원하소서.' 하니, 황제가 손도독(孫都督)에게 명하여 전함 8천여 척을 거느리고 우리나라를 치게 하여, 요동에 이르렀다가 배가 떠나려 하는데, 마침 달달의 군사가 혼하구자(渾河口子)를 공격하므로, 도독의 군사가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하니, 우가 변방을 방비하여 지킬 것을 명령하였다.
○ 대간이 상소하기를, “근래에 이웃 나라의 경계가 있고, 해적이 깊이 들어와 첩자가 왕래하므로 사변이 있을까 두려운데, 전하께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단기로 돌아다니시니, 신들은 근심하고 위태롭게 여기어 두세 번이나 간하였는데, 곧 받아들이시면서도 환관과 내수(內豎)ㆍ위사ㆍ어인(圉人 말을 기르는 사람)이 뜻을 맞추어 아첨하여 주상을 예가 아닌 길로 인도하고, 도리어 전하로 하여금 무시로 출입하게 하여 나라에서 믿음을 잃게 하였으니, 충성스럽지 못하며 도리에 어그러짐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내승별감과 속고적(速古赤)ㆍ환관ㆍ내수 등의 일을 맡고 있는 자를 국문하여 뒷사람을 경계하게 하소서. 또 말[辭]을 맡은 자는 왕의 명령을 출납하는 것이어서 그 책임이 가볍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옛날에는 반드시 정직하고 근신하는 자 두 사람을 선택하여 그 임무에 충당하였는데, 지금은 두 사람을 더 두었으나 도리어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어 전하가 출입하는 것을 백관에게 고하지 않으니, 옛 제도에 의하여 두 사람만 선택하여 두고, 그 나머지는 도태시켜 버리소서." 하였다. 소(疏)가 올라가니, 우가 환관 김길봉(金吉逢)에게 장형을 행하여 이산(泥山)에 귀양보내고 내수(內豎) 서양수(徐良守)를 쫓아내었으며, 내승별감 김천용(金千用)은 도망갔으므로 그를 수색하게 하였다.
○ 왜적이 안변부 흡곡현을 침략하고 사방으로 나와 무인지경을 밟듯이 노략하였다. 우가 밀직제학상의 조준(趙浚)을 강릉ㆍ교주도 도검찰사로 삼았다.
○ 이을진과 부원수 권현룡(權玄龍), 병마사 곽충보(郭忠輔)가 동산현(洞山縣)에서 왜적을 쳐서 20여 급을 베고 말 72필을 노획하니, 적은 남은 무리를 거두어 고성포에 물러가 정박하였다. 우가 을진 등에게 차등에 따라 백금을 내렸다.
○ 11월에 통역 장백(張伯)이 명나라 서울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황제가, 진하사 김유(金庾)ㆍ이자용(李子庸)이 시기가 지나서 이르렀다 하여 법사(法司)에 회부하였다." 하고, 예부에서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자문(咨文)을 보냈는데, 이르기를, “고려가 멀리 동쪽 변방으로부터 지난번에 와서 아뢰어 약속 듣기를 원하였으나, 속으로는 여러 가지로 거짓을 품어서 틈이 생기는 것을 예사로 여겼다. 짐이 그 때문에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스스로 교화가 되도록 허락하였는데, 그 뒤에도 자주 와서 허락하여 주기를 청하므로, 짐은 성의가 지극하다고 생각하여 세공을 한정해서 저들의 성의를 표하게 하였던 것이다. 간 뒤에 약속대로 조공하지 않은 지가 다섯 해나 되었는데, 이제 또 경하하는 예로 왔으니 정성스럽기는하나, 시기가 지나서 이르렀으니 어찌 심한 모욕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사신을 보낸 일로 말하면 고려 국왕과 그 신하의 잘못이 아니며, 사자가 고의로 무시하고 만홀히 하여 시기가 지나서 온 것이다. 지금 고려가 완전히 신하가 되었으니, 영구히 사대(事大)의 정성을 지킬 것이다. 온 사신은 이미 조회하는 예에 어긋났으므로 마땅히 법사에 회부하고, 바친 예물은 이미 시기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받아들이지 말며, 다시 고려에 문서를 주고, 반드시 약속 듣기를 원한다면, 지난 5년 동안 바치지 않은 세공으로 말 5천 필, 금 5백 근, 은 5만 냥, 베 5만 필을 한꺼번에 가져와야만 곧 성의가 인정되며, 다른 날에 사자를 데려가기 위한 군사의 출동을 면할 것이다." 하였다. 이에 진헌반전색(進獻盤纏色)을 두어 세공을 준비하였다.
○ 왜적이 청풍군(淸風郡)을 침략하니, 도순찰사 한방언(韓邦彦)이 금곡촌(金谷村)에서 그들과 싸워 8급을 베었다.
○ 문하평리 홍상재(洪尙載)와 전공판서 주겸(周謙)을 경사로 보내어 신정을 하례하였다.
○ 지문하부사 정지가 여러 도에서 전함을 만들어 왜구를 방비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좇았다.
○ 12월에 정지를 해도 도원수, 양광ㆍ전라ㆍ경상ㆍ강릉도 도지휘 처치사로 삼았다.
○ 우가 노빈(盧贇)의 집에 갔다. 빈은 영수(英壽)의 아우인데, 우가 일찍이 빈의 처가 예쁜 것을 보고 이때부터 자주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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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月再向奈堤。舟行吟

한국문집총간 > 동토집(童土集) > 童土先生文集卷之一 > 詩

 

挐艇才乘漢。

培風已滿帆。

泠然趨淨界。

邈爾謝塵凡。

綠漲葡萄浪。

紅層躑躅巖。

扣舷歌孺子。

誰復問彭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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送李 培廸 迪夫知子春縣序

 

 

한국문집총간 > 어우집(於于集) > 於于集後集卷之三 > 序

 

 

昔余與子同若干友。棲于北部之安國坊。當時人事混沌未判。又焉知他日有窮達夭壽之分哉。如使其時我夢我卜曰。階崇二品。錄勳而封君。亞京兆尹。我必以爲吉夢吉卜。子於此時夢之卜之曰。六旬一麾。出宰于縣邑。子必以爲惡夢惡卜。以今觀之。今日之我與子。俱是昔日之我與子。其達也何益於我躬。其窮也何損於子身。追憶當時。同榻之舊。一半爲松下之塵。吾雖在世乎。童頭白鬚。已成衰063_513d艾之狀。而子獨鬢如漆顔如丹。唶胾骨脆若蔓菁。看螘子鉅若車輪。雖丁年食蓼於草野。其晩歲享祿。也必獨久。矧今子春。山水之縣也。丹厓翠壁。複江重洲。皆在軒圉之內。而人蔘松芝。朱草白蜜。千尋百圍之名材。亦皆園庭之物也。加以山氓俗朴。簿領甚簡。其日日所課之政。除江魚山雉野鹿之供。則終日閑眠於鈴閣耳。是子晩享淸勝之福。雖使今日卜我以宰子春。夢我以宰子春。其必曰吉夢吉卜。而將我之軺帶。換子之一麾。亦且甘心焉。子毋以階卑齒暮爲嫌。吁京兆,子春。倘來寄於吾與子者也。若我者。宦游之倦客也。曩卜菟裘於南溟。擬長往而未就。今將再履063_514a前跡。自放於山海之鄕。其角巾南歸也。舟于淸風。溯于赤城。過乙河而達奈堤。期子於龜潭島潭丹丘峽之間。連床共唔。復作安國坊之會。此時當得從頌。姑與子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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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촌집(漁村集) > 漁村集卷之三 > 詩

 

館學三年薦宿儒。

奈堤風俗化蘇湖。

今日使君好官去。

道中又見鬼邪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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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州)와 군(郡)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연려실기술 별집 제16권 > 지리전고(地理典故)

 

신라의 9주(九州) : 경덕왕(景德王) 16년 정유(757)에 비로소 9주를 두고 주(州)와 군(郡)의 이름을 고쳤다. 상주 왕성 동북쪽에 있으니, 옛이름은 사벌주(沙伐州)고, 군 10과 현 31을 거느렸다., 양주(良州) 왕성 남쪽에 있으니, 옛이름은 삽량주(歃良州)며 지금의 양산(梁山)이니, 소경(小京) 1과 군 12와 현 34와 정소(停所)를 거느리고 있다., 강주(康州) 왕성 서쪽에 있으니, 옛이름은 청주(菁州)이며, 지금은 청주(靑州)이다.군 11과 현 30을 거느리고 있다. 의 3주(三州)는 본래 신라 땅이다. 한주(漢州) 서쪽에 있으니, 고구려의 남쪽 경계로서 옛이름은 한산주(漢山州)고, 지금은 광주(廣州)이다. 소경 1과 군 28, 현 49를 거느리고 있다., 삭주 한주 동쪽에 있으니, 옛이름은 수약주(首若州)며, 지금은 춘천이다. 소경 1과 군 12, 현 26을 거느리고 있다. 와 명주 삭주 동쪽에 있으니, 옛이름은 서주(西州)며 지금은 강릉이다.군 9와 현 25를 거느리고 있다. 의 3주(三州)는 옛 고구려 땅이다. 웅주(熊州) 백제 고성(古城) 북쪽에 있으니, 옛이름은 웅천주(熊川州)이며, 지금은 공주이다. 소경(小京) 1과 군 13과 현 39를 거느리고 있다., 전주 웅주(熊州) 서남쪽에 있으니, 옛이름은 완산주(完山州)이다. 소경(小京) 1과 군 10과 현 31을 거느리고 있다., 무주(武州) 전주의 남쪽에 있으니, 옛이름은 무진주(武珍州)며, 지금은 광주이다. 군15와 현 43을 거느리고 있다. 의 3주(州)는 옛 백제 땅이다. ○ 주(州), 군(郡), 현(縣)은 도합 4백 48이다. 주 9와 소경(小京) 5, 군 1백 20, 현 3백 8, 정소(停所) 6이다.
○ 고려의 10도(十道) : 성종(成宗) 14년 을미(995)에 경내를 나누어서 10도를 만들었다. 개성부 적현(赤縣) 6과 기현(畿縣) 7을 거느렸다.ㆍ관내도(關內道) 양주ㆍ광주(廣州)ㆍ황주(黃州)ㆍ해주 등에 소속된 군과 현으로 도(道)를 만들었으니, 주 29와 현 82를 거느리고 있다.ㆍ중원도(中原道) 충주ㆍ청주 등에 소속된 군과 현으로 도(道)를 만들었으니, 주 13과 현 42를 거느리고 있다.ㆍ하남도(河南道) 공주ㆍ운주(運州)와 지금의 홍주 등에 소속된 군과 현으로 도를 만들었으니, 주 11과 현 34를 거느리고 있다.ㆍ강남도 전주ㆍ영주(瀛州)와 지금의 고부(古阜)ㆍ순주(淳州)ㆍ마주(馬州) 등에 소속된 군과 현으로 도를 만들었으니 주 9, 현 49를 거느리고 있다.ㆍ영남도 상주에 소속된 군과 현으로 도를 만들었으니, 주 12와 현 48을 거느렸다.ㆍ영동도 경주ㆍ금주(金州)와 지금의 김해 등에 소속된 군과 현으로 도를 만들었으니, 주 9와 현 48을 거느리고 있다.ㆍ산남도(山南道) 진주에 소속된 군과 현으로 도를 만들었으니 주 10과 현 37을 거느리고 있다.ㆍ해양도(海陽道) 나주ㆍ광주ㆍ정주(靜州)와 지금의 영광ㆍ승주(昇州), 지금의 순천ㆍ패주(貝州), 지금의 보성ㆍ담주(潭州), 지금의 담양ㆍ낭주(朗州), 지금의 영암 등에 소속된 군과 현으로 도를 만들었으니, 주 14와 현 62를 거느리고 있다.ㆍ삭방도 춘주(春州)와 지금의 춘천ㆍ화주(和州)와 지금의 영흥(永興)ㆍ명주(溟州), 지금의 강릉 등에 소속된 군현으로 도(道)를 만들었으니, 주 7과 현 72를 거느리고 있다.ㆍ패서도(浿西道) 서경에 소속된 군과 현으로 도를 만들었으니, 주 14, 현 4, 진 7을 거느리고 있다. 이니 주ㆍ현ㆍ진이 모두 6백 26이다. 주가 1백 28이요, 현이 4백 91이며, 진이 7이다.
○ 고려의 8도(八道) : 현종(顯宗) 3년 임자(1012)에 주와 현을 더하고 줄여서 8도를 만들었다.
○ 개성부(開城府) 군 1과 현 12를 거느렸다. ○ 현종 9년 무오에 부(府)를 혁파하고 현을 두어 속현 3을 거느리게 했고, 또 장단현은 속현 7을 거느리게 하여 모두 직접 상서도성(尙書都省)에 예속시키고 경도(京都)라 이름했다. ○ 문종 16년 임인에 다시 부(府)를 두어 11현을 도로 예속시키고, 또 우봉군(牛峯郡)을 나누어 예속시켰다.○ 공양왕 2년 경오에 경기도를 나누어 좌ㆍ우도를 만들었는데, 장단(長湍) 등 8읍(邑)은 좌도가 되고, 개성(開城) 등 5읍(邑)은 우도가 되었다.ㆍ양광도ㆍ충청도 양광도는 경(京) 1, 소경 1목(牧) 5, 도호부 6, 군 1, 현 75를 거느렸다. ○ 예종 원년 병술에 관내(關內)ㆍ중원(中原)ㆍ하남(河南)의 3도를 합쳐서 양광ㆍ충청의 주도(州道)를 만들었다. ○ 명종 원년 신묘에 나누어 2도(道)를 만들었다. ○ 충숙왕(忠肅王) 원년 갑인에 양광도를 만들었다.○ 공민왕 5년 병신에 충주ㆍ청주 등에 소속된 주현을 나누어 충청도를 만들고 소경 1, 목(牧) 5, 도호부 3, 군 14, 현 70을 거느리게 했다. ○ 공양왕 2년 경오에 양광도를 나누어 둘을 만들고, 한양 등 11읍과 교주도(交州道)ㆍ철원 등 6읍으로 좌도를 삼고, 부평(富平) 등 5읍과 서해도 연안(延安) 등 9읍으로 우도를 삼았다.ㆍ경상도 경(京) 10, 대도호부 1, 목 2, 도호부 6, 군 16, 현 1백 5를 거느리게 하였다.○ 예종 병술년에 영남ㆍ영동ㆍ산남(山南)의 3도를 합쳐서 경상ㆍ진주도(晉州道)를 만들었다. ○ 명종(明宗) 신묘년에 나누어 경상ㆍ진합천(晉陜川) 2도(道)를 만들었다. ○ 16년 병오에 나누어서 경상주도를 만들었다. ○ 신종(神宗) 7년 갑자에 상진(尙晉)ㆍ안동도라 일컬었다. ○ 그 후에 또 경상진안도(慶尙晉安道)라고 일컬었다. ○ 충숙왕 갑인년에 경상도가 되었다.ㆍ전라도 부 1, 대도호부 1, 목 2, 도호부 3, 군 12, 현 85를 거느리게 하였다. ○ 현종 무오년에 강남ㆍ해남 2도를 합쳐서 전라도를 만들었다.ㆍ교주도(交州道) 도호부 2ㆍ군 3ㆍ현 23을 거느리게 하였다. ○ 명종 8년 무술에 삭방도에 소속된 춘주(春州) 등의 주와 현으로 춘주도(春州道)를 만들었다.○ 뒤에 동주도(東州道)라고 일컬었다. ○ 원종(元宗) 4년 계해에 교주도(交州道)라고 일컬었다. ○ 충숙왕 갑인년에 회양도(淮陽道)라고 일컬었다. ○ 신우 14년 무진에 영동ㆍ영서를 합하여 교주강릉도(交州江陵道)를 만들었다.ㆍ서해도 목 1, 도호부 1, 군 8, 현 13, 진 1을 거느리게 하였다. ○ 관내도(關內道)에 소속된 황주(黃州)ㆍ해주 등의 주와 현으로 서해도를 만들었는데, 연대는 자세하지 않다. 동계 대도호부 1, 목 1, 도호부 2, 만호부 3, 군 12, 현 24, 진 9를 거느리게 하였다. ○ 정종(靖宗) 2년 병자에 삭방도에 소속된 화주(和州)ㆍ명주 등의 주와 현을 동계라고 일컬었다. ○ 문종 원년 정해에 동북면이라 일컬었고, 혹은 동면ㆍ동로ㆍ동북로ㆍ동북계라고 일컬었다. ○ 명종 무진년에 연해명주도(沿海溟州道)라고 일컬었다. ○ 원종 계해년에 강릉도라고 일컬었다. ○ 공민왕 병신년에 강릉삭방도(江陵朔方道)라고 일컬었다. ○ 같은 해에 다시 동북면이라는 이름을 회복했다. ○ 9년 경자에 삭방강릉도라고 일컬었다. 북계 경1, 대도호부1, 목 1, 도호부 2, 만호부 3, 군 20, 현 18, 진 9를 거느리게 하였다. ○ 패서도(浿西道)를 북계라고 일컬었으나, 연대는 상세하지 않다. ○ 숙종 7년 임오에 서북계라고 일컬었다. 등 합하여 5백 15이다. 경(京) 3, 소경 1, 부 1, 대도호부 4, 목 12, 도부로 22, 만호부 6, 군 88, 현 3백 59, 진 19이다.
○ 우리나라의 8도는 도합 3백 33고을[官]이다.
○ 경기도 동계(東界)와 동쪽 강원도 경계의 동남쪽, 남쪽 충청도 경계와 서남쪽 충청도 경계, 큰 바다 서쪽과 서북쪽, 큰 바다 북쪽, 황해ㆍ강원 2도의 경계이다. 는 38고을이다. 좌도 23고을ㆍ우도 15고을이다. 고조선의 땅과 마한(馬韓)의 지역이니, 4군(四郡)으로 있을 때는 낙랑군(樂浪郡) 관할이었다. 그 후에 남쪽 경계는 백제의 소유가 되었다가 다시 고구려와 신라가 나누어 점령했었고, 뒤에는 모두 신라가 병합하였으며 한주(漢州)를 두었다. 말기에는 궁예가 점령하였다. 고려 성종(成宗)이 관내도(關內道)를 두었고, 현종(顯宗)은 경기와 양광도로 나누어 두었으나 충숙왕이 양광도를 만들었으며, 공양왕이 비로소 경기좌도ㆍ우도로 나누어 만들었다. 장단ㆍ임강(臨江)ㆍ토산(兔山)ㆍ임진ㆍ송림(松林)ㆍ마전(麻田)ㆍ적성(積城)ㆍ파평은 좌도가 되었고, 개성ㆍ강음(江陰)ㆍ해풍(海豐)ㆍ덕수(德水)ㆍ우봉은 우도가 되었다. 한양ㆍ남양(南陽)ㆍ인천ㆍ안산(安山)ㆍ교하(交河)ㆍ양천(陽川)ㆍ금천(衿川)ㆍ과천ㆍ포천ㆍ서원(瑞原)ㆍ고봉(高峯)ㆍ철원ㆍ영평(永平)ㆍ이주(伊州)ㆍ안협(安峽)ㆍ연주(漣州)ㆍ삭녕(朔寧)은 좌도(左道)에 예속되었고, 부평ㆍ강화ㆍ교동(喬桐)ㆍ김포ㆍ통진ㆍ연안ㆍ평주(平州)ㆍ백주(白州)ㆍ곡주(谷州)ㆍ수안(遂安)ㆍ재령(載寧)ㆍ서흥(瑞興)ㆍ신은(新恩)ㆍ협계(俠溪)는 우도(右道)에 예속되었다. 태조 을해년에 고쳐서 좌도와 우도를 두었다. 평주(平州)ㆍ수안(遂安)ㆍ곡주(谷州)ㆍ재령(載寧)ㆍ서흥(瑞興)ㆍ신은(新恩)ㆍ협계(俠溪)는 새 서울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도로 서해도에 예속시키고, 광주(廣州)ㆍ수원ㆍ양근(楊根)ㆍ쌍부(雙阜)ㆍ용구(龍駒)ㆍ처인(處仁)ㆍ이천(利川)ㆍ천녕(川寧)ㆍ지평(砥平)을 나누어 좌ㆍ우도로 만들었다가 무인년에 또 충청도 진위현(振威縣)을 나누어 좌도에 예속시켰다. 태종 임오년에 양도(兩道)를 합해서 경기 좌ㆍ우도라고 부르다가 계사년에 좌ㆍ우도를 합하였다. 도ㆍ리(道里)의 원근을 참작해서 연안(延安)ㆍ백주(白州)ㆍ우봉(牛峯)ㆍ강음(江陰)ㆍ토산(兔山)은 도로 풍해도(豐海道)에 예속시키고, 이천(伊川)은 도로 강원도에 예속시키며, 또 충청도의 여흥(驪興)ㆍ안성(安城)ㆍ양지(陽智)ㆍ양성(陽城)ㆍ음죽(陰竹)과 강원도 가평현(加平縣)을 분할하여 예속시켰다. ○ 세종 갑인년에 다시 철원ㆍ안협(安峽)을 강원도에 옮겨 예속시켰다.
○ 한성부 : 고구려 때의 북한산군(北漢山郡)이니, 백제 온조왕(溫祚王)이 성을 쌓았고, 근초고왕이 도읍을 옮겼으며,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북한산에 와서 지경을 정하고 북한산주(北漢山州)의 군주(軍主)를 두었다. 경덕왕이 한양군이라 고쳤고, 고려 초기에 고쳐서 양주라 하였으며, 성종이 좌신책군(左神策軍)이란 이름을 지어서 해주와 함께 좌우이보(左右二輔)를 삼았다.문종이 승격시켜 남경(南京)이라 하였고, 이웃 군(郡) 백성을 옮겨다가 채웠다. 숙종이 장차 도읍을 옮기려 하여 윤관(尹瓘)이 공역을 맡은 지 5년 만에 준공하였다. 충렬왕이 고쳐서 한양부(漢陽府)라 하였고, 우리 태조가 도읍을 정하여 한성부라고 고쳤다. ○ 남평양(南平壤) : 광릉(廣陵)이라 부른다.
○ 좌도 강화부 : 성이 있다. 고구려 때 여혈군(麗穴郡) 혹은 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도 한다. 이니,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해구(海口)라 고쳤고, 고려 초기에 고쳐서 강화현이 되었으며, 고종이 강도(江都)라 이름하였다. 몽고 군사를 피하여 이곳에 들어가서 도읍했기 때문이다. ○ 심주(沁州)라고도 부른다. 17면(面)이며 서울과의 거리가 1백 35리이다.
○ 진강(鎭江)은 폐현(廢縣)이며 고구려 때 수지현(首智縣)이다. 하음(河陰)도 폐현이다. 고구려 때 동음내현(冬陰奈縣)이다.
○ 광주부(廣州府) : 백제의 고도 남한산성이니, 신라 때에 고쳐서 한산주(漢山州)라 하였고, 경덕왕이 한주(漢州)라 고쳤으며, 고려 초기에 광주라 고쳤고, 성종이 봉국군(奉國軍)이라 이름하였다. ○ 회안(淮安)이라고도 부른다. 23면(面)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5리이다.
○ 화성부(華城府) : 성이 있다. 고구려 때의 매홀군(買忽郡)이요, 신라 때의 수성(水城)이니, 고려 태조가 승격시켜 수주(水州)라 하였고, 뒤에 수원으로 고쳤다. ○ 한남(漢南) : 수성(隋城)이라고도 부른다. 52면(面)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88리이다. 옛날 송수부곡(松水部曲)이다. ○ 정송(貞松)과 광덕(廣德)은 폐현이다.
○ 여주 : 고구려 때 골내근현(骨乃斤縣)이니, 신라 때는 황요(黃驍)라 고쳤고, 고려 초기에 황려(黃驪)로 고쳤으며, 뒤에 또 영의(永義)라 고쳤다가 다시 승격시켜 여흥군(驪興郡)이 되었고, 뒤에 신우(辛禑) 때에 와서 황려부(黃驪府)로 승격되었다가 다시 군으로 강등시켰다. 태종이 다시 부 원경왕후(元敬王后)의 고향 로 승격시켰더니, 예종 기축년에 여주목 영릉(英陵)으로 옮겼다. 으로 고쳤다. ○ 여강(驪江)ㆍ여성(驪城)ㆍ황리(黃利)라고도 부른다. 13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90리이다. ○ 천녕(川寧)은 폐현이다. 고구려 때의 술천군(述川郡)이니, 일명 성지매(省知買)이다. 신라 때에 고쳐서 기천(沂川)이라 하였고, 예종이 주에 합쳤다.
○ 부평 : 고구려 때 주부토군(主夫吐郡)인데, 신라 때에 장제(長堤)라 고쳤고, 고려 초기에 수주(樹州)로 고쳤다가 뒤에 안남계양(安南桂陽)으로 고쳤으며, 길주목(吉州牧)으로 승격시켰다가 부평부로 강등시켰다. 15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55리이다.
○ 남양 : 고구려 때의 당성군(唐城郡)인데, 신라 때에 당은(唐恩)이라 고쳤고, 고려 때에는 수주(水州)와 인주(仁州)에 속해 있다가 뒤에 현을 두었다. 다시 익주(益州)로 승격시켰다가 강남(江南)ㆍ안양(安陽) 등으로 고치고 남양부가 되었다. ○ 영제(寧堤) : 과포(戈浦)라고 한다. 12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5리이다. ○ 재양(載陽)은 폐현이다. 옛 안양현(安陽縣)이다.
○ 이천(利川) : 고구려 때의 남천현(南川縣)인데 혹은 남매(南買)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 황무(黃武)라 고쳤다가 고려 태조가 이천군으로 고치고 뒤에 영창(永昌)이라 고쳤다. 우리 태조 계유년에 다시 이천현이라 하고, 세종 갑자년에 부로 승격시켰다. 14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41리이다.
○ 인천 : 고구려 때의 매소홀현(買召忽縣)인데, 혹은 미추홀(彌趨忽)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는 소성(邵城)이라 고쳤다가 고려 때에 수주(樹州)에 예속시켰고, 뒤에 경원군(慶源郡)으로 승격시켰으며, 다시 인천이라 고쳤다. 공양왕이 경원부(慶源府)로 승격시켰다가 7대(代)조의 고향이라 하여 호장과 홍혜(紅鞋)를 하사하였다. 우리 태조 원년에 다시 인주(仁州)라고 하였는데, 군을 강등시켜 현이라 하였다. 태종이 인주군(仁州郡)이라 고쳤고, 세조 경진년(1460)에 다시 부(府)로 승격시켰다.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외향(外鄕)이다. 10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7리이다.
○ 통진 : 고구려 때의 평회압현(平淮押縣)인데, 혹은 비사성(比史城)이라고도 하고, 또는 별사파의(別史波衣)라고도 한다. 신라 때 분진(分津)이라 고쳤고, 고려 때에는 통진이라 고쳤으며, 숙종 갑술년에 현을 부로 승격시켰다. ○ 11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14리이다. ○ 동성(童城)은 폐현이고 고구려 때의 동자홀현(童子忽縣)인데, 혹은 당산현(幢山縣)이라고도 하고, 또는 구사파의(仇斯波衣)라고도 하는데, 공양왕 때에 통진에 속했다. 수안(守安)도 폐현이다. 고구려 때의 수이홀(首爾忽)인데, 신라 때에 수성(戍城)이라 고쳤다.
○ 죽산 : 고구려 때의 개차산군(皆次山郡)인데, 신라 때 개산(介山)이라 고쳤고, 고려 때에 죽주(竹州)로 고쳤으며, 우리 태종이 죽산이라 고쳤다. ○ 음평(陰平)ㆍ연창(延昌)이라고 한다. ○ 1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70리이다. ○ 양근(楊根) : 고구려 때의 양근군(楊根郡)이니, 혹은 항양(恒陽)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 빈양(濱陽)이라 고쳤고, 고려 때는 영화(永化)라고 일컬었다. 뒤에 익화(益和)로 승격시켰다가 지금 명칭으로 다시 고쳤다. ○ 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16리이다. ○ 미원(迷原)은 속현이다. 공민왕이 국사(國師) 보우(普愚)로 하여금 군(郡)의 미원장(迷原莊) 소설암(小雪庵)에 살게 하고, 장(莊)을 현(縣)으로 만들고 감무(監務)를 승격시켰더니, 조금 후에 그곳은 땅이 좁고 사람이 드물다 하여 다시 군에 예속시켰다.
○ 안산 : 고구려 때의 장항구현(獐項口縣)이니, 신라 때 장구군(獐口郡)이라 고쳤고, 고려 초기에 안산으로 고쳤다. ○ 연성(蓮城)이라고 한다. ○ 6면(面)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2리이다. ○ 장항(獐項)은 폐현이다.
○ 안성 : 고구려 때의 제혜홀(祭兮忽)이니, 신라 때 백성군(白城郡)이라 고쳤고, 고려 때 안성현(安城縣)이라 고쳤다. 뒤에 수주(水州) 천안에 예속시켰다가 또 현을 두고 군으로 승격시켰다. 홍건적의 난리에 임금이 남쪽으로 피난하니, 여러 고을이 항복했으나 오직 안성(安城) 사람이 거짓 항복하는 체하고 잔치를 베풀어 취한 것을 이용하여 괴수 6명을 목베어 죽였다. ○ 1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52리이다.
○ 김포 : 고구려 때의 금포현(黔浦縣)이니, 신라 때 김포로 고쳤다. 태종이 양천(陽川)을 나누어서 이 현에 합치고 이름을 금양(金陽)이라 하였더니, 뒤에 양천을 또 금천(衿川)에 합병시키고, 김포는 부평에 합병시켰다가 그 후 2년에 다시 현을 만들었다. ○ 8면(面)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0리이다. ○ 금릉(金陵)이라고 한다.
○ 용인 : 용구(龍駒)는 본래 고구려 때의 구성(駒城)인데, 혹은 멸오(滅烏)라고도 하였다. 신라 때 거서(巨黍)라 고쳤다가 고려 초기에 용구(龍駒)라 고쳤다. 처인현(處仁縣)은 본래 수원의 처인부곡(處仁部曲)이니, 태조가 처음으로 현을 설치하였다. 태종이 2현을 합해서 용인으로 고쳤다. ○ 1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0리이다.
○ 진위(振威) : 고구려 때의 부산현(釜山縣)이니, 신라 때 진위로 고쳤다. ○ 연달(淵達) : 송촌(松村)ㆍ활달(活達)이라고 한다. ○ 11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18리이다. ○ 영신(永新)은 폐현이다. 또는 영풍(永豐)이라고도 한다. 송장부곡(松莊部曲)이라고도 한다.
○ 양천 : 고구려 때의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이니, 신라 때 공암(孔巖)으로, 고려 때 양천으로 고쳤다. ○ 제양(齊陽)ㆍ파릉(巴陵)이라고도 한다. ○ 양평(陽平)ㆍ양원(陽原)이라고도 한다. ○ 4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1리이다.
○ 지평(砥平) : 고구려 때의 지현현(砥峴縣)이니, 신라 때 지평으로 고쳤다. ○ 지제(砥堤)라고도 한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62리이다.
○ 과천 : 고구려 때의 율목군(栗木郡)이니, 신라 때 율진(栗津)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과주로 고쳤다. 태종이 과천으로 고치고, 또 금천(衿川)과 합쳐서 금과(衿果)라고 부르다가 조금 후에 다시 복구하였다.
○ 동사혜(冬斯盻) : 부림(富林)ㆍ부안(富安)이라고도 한다. ○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0리이다.
○ 금천(衿川) : 고구려 때의 잉벌노현(仍伐奴縣)이니 신라 때 곡양(穀壤)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금주(衿州)로 고쳤는데, 혹은 금주(黔州)라고도 한다. 태종 때 금과(衿果)가 되고 또 양천과 합쳐서 금양(衿陽)이 되었다. ○ 시흥(始興)이라고도 한다. ○ 14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1리이다.
○ 음죽(陰竹) : 고구려 때의 노음죽현(奴音竹縣)이니, 신라 때 음죽으로 고쳤다. ○ 설성(雪城)이라고 한다. ○ 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95리이다.
○ 양성(陽城) : 고구려 때의 사복홀(沙伏忽)이니, 신라 때 적성(赤城)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양성(陽城)으로 고쳤다. ○ 사파을(沙巴乙)이라고 한다. ○ 14면(面)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14리이다.
○ 양지(陽智) : 본래 수주(水州) 양양부곡(陽良部曲)이니, 정종이 승격시켜 현을 만들고 양지로 고쳤으며, 태종이 현의 관아를 추계(秋溪)로 옮겼었다. ○ 양산(陽山)이라고 한다. ○ 10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11리이다.
○ 우도 개성부(開城府) : 고구려 때의 부소압(扶蘇押)이니 신라 때 송악군(松岳郡)으로 고쳤고, 고구려 때 동비홀(冬比忽)을 고쳐서 개성군(開城郡)을 만들었다. 고려 태조가 2군을 합친 이 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개주(開州)라 하였다가 뒤에 개성부라 고쳤다.정주(貞州)ㆍ덕수(德水)ㆍ강음(江陰)ㆍ장단ㆍ송림(松林)ㆍ임진ㆍ토산(兔山)ㆍ임강(臨江)ㆍ적성(積城)ㆍ파평ㆍ마전(麻田)의 11현을 관할하였다. 또 서해도ㆍ우봉군(牛峯郡)을 분할하여 이에 예속시켰더니 우리 태조가 도읍을 옮기고 송도라 고쳤다.
○ 개경 : 황도(皇道)ㆍ촉막군(蜀莫郡)이라고도 한다. 《송사(宋史)》에, “고려왕이 개주(開州) 촉막군(蜀莫郡)에 살아 이곳을 개성부라고 하는데, 산을 의지해서 궁실을 짓고, 성벽을 세워서 그 산을 신숭산(神嵩山)이라 하였다.” 하였다.
○ 사부(四部) 동부는 인흥방(仁興坊)이고, 남부는 예안방(禮安坊)이며, 서부는 의흥방(義興坊)이요, 북부는 지안방(智安坊)이다. 또 5부(部) 35방(坊)을 개정하였다. 동부 7방은 안정(安定)ㆍ봉향(奉香)ㆍ영창(令昌)ㆍ철령(哲令)ㆍ양제(楊堤)ㆍ홍인(弘仁)ㆍ창령(倉令)이요,남부 5방은 덕수(德水)ㆍ덕풍(德豐)ㆍ안흥(安興)ㆍ덕산(德山)ㆍ안신(安申)이요, 서부 5방은 삼송(森松)ㆍ오정(五正)ㆍ건복(乾福)ㆍ진안(鎭安)ㆍ향천(香川)이요, 북부 10방은 정원(正元)ㆍ법왕(法王)ㆍ흥국(興國)ㆍ오관(五冠)ㆍ자운(慈雲)ㆍ왕륜(王輪)ㆍ제상(堤上)ㆍ사내(舍乃)ㆍ사자(獅子)ㆍ암내(巖內)ㆍ천왕(天王)이요, 중부(中部) 8방은 남계(南溪)ㆍ흥원(興元)ㆍ홍도(弘道)ㆍ앵계(鸚溪)ㆍ유암(由巖)ㆍ변양(變羊)ㆍ광덕(廣德)ㆍ성화(星化)이다. 우리 세조가 개성은 외관(外官)이므로, 옛 제도 그대로 둘 수 없다 하여 드디어 이것을 줄여서 4부 4방 17면으로 만들었다.○ 서울과의 거리가 1백 66리이다. ○ 전팔경(前八景) 곡령춘청(鵠嶺春晴)ㆍ용산추만(龍山秋晩)ㆍ자동심승(紫洞尋僧)ㆍ청교송객(靑郊送客)ㆍ웅천계음(熊川禊飮)ㆍ용야심춘(龍野尋春)ㆍ남포연사(南浦煙簑)ㆍ서강월정(西江月艇)이다. ○ 후팔경(後八景) 자동심승(紫洞尋僧)ㆍ청교송객(靑郊送客)ㆍ북산연우(北山煙雨)ㆍ서강풍설(西江風雪)ㆍ백악청운(白岳晴雲)ㆍ황교만조(黃郊晩照)ㆍ장단석벽(長湍石壁)ㆍ박연폭포이다.
○ 파주 : 파평현(坡平縣)은 고구려 때의 파해평사현(坡害平史縣)이니, 액봉(頟逢)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파평으로 고쳤다. 서원군(瑞原郡)은 고구려 때의 술매홀현(述尒忽縣)이니, 신라 때 봉성(峯城)으로 고쳤고, 고려 때 다시 고쳐서 서원(瑞原)이 되었다.태조 무인년에 서원(瑞原)ㆍ파평을 합쳐서 원평군(原平郡)이 되었다. 태종 을미년에 부사로 승격시키고, 세조 경진년에 이름을 파주목 왕비의 고향이다. 이라 고쳤었는데, 연산군 때에 주(州)를 파하여, 그 땅이 비었던 것을 중종(中宗)이 다시 설치하였다. ○ 영평(鈴平)ㆍ곡성(曲城)이라고 한다. ○ 11면(面)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82리이다.
○ 양주(楊州) : 고구려 때의 매성군(買省郡)이니 또는 창화(昌化)라고도 한다. 신라 때 내소(來蘇)라 고쳤고, 고려 초기에 견주(見州)로 승격시켰다. 우리 태조 갑술년에 부(府)의 관아를 동촌(東村)으로 옮기고 양주로 강등시켰다. 태종 을미년에 부로 승격시켰다. 세조 경진년에 목(牧)으로 승격시켰고, 연산군 때 주(州)를 파하여 이 땅이 비었던 것을 중종(中宗)이 다시 설치하였다. ○ 33면(面)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0리이다. 풍양(豐壤)은 속현이고, 고구려 때 골의노현(骨衣奴縣)이니, 신라 때 황양(荒壤)으로 고쳤고, 고려 때 풍덕(豐德)으로 고쳤는데, 세종 때 와서 양주에 예속시켰다. 사천(沙川)은 폐현이다. 고구려 때의 내을매현(內乙買縣)이니, 또는 내매미(內尒米)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 사천(沙川)으로 고쳤다.
○ 장단(長湍) : 고구려 때의 장천성현(長淺城縣)이니 신라 때 장단으로 고쳤고, 고려 때 단주(端州)로 승격시켰으며, 태종이 임강현(臨江縣)과 합쳐서 장림(長臨)이라 하였다. 뒤에 다시 장단과 임진을 합쳐서 임단(臨湍)이라고 불렀는데, 세종 기해년에 다시 장단현이 되었다. 세조 기묘년에 군으로 승격시키고, 중궁의 증조 이상의 3묘(墓)가 있다. 관아를 도원역(桃源驛)으로 옮겼더니 예종 기축년에 부로 승격시켰다.○ 습천(隰川)ㆍ야야(耶耶)ㆍ야아(夜牙)라고도 한다. ○ 24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20리이다. ○ 임강(臨江)은 폐현이고 고구려 때의 장항현(獐項縣)이니 또는 고사야홀차(古斯也忽次)라고도 한다., 송림(松林)도 폐현이다. 고구려 때의 약지(若只)ㆍ두치현(頭恥縣)이니, 또는 지섬(之蟾)ㆍ삭두(朔頭)라고도 한다. 신라 때 여비(如羆)로 고쳤다. 임진은 폐현이다. 고구려 때 진림성현(津臨城縣)이니, 또는 오아홀(烏阿忽)이라고도 한다.
○ 풍덕(豐德) : 고구려 때의 정주(貞州)이니, 고려 때 승천부(昇天府)로 승격시켰다가 뒤에 해풍군(海豐郡)으로 강등시켰다. 태종이 군을 줄여 개성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다시 군을 만들었고, 세종이 덕수현(德水縣)과 합쳐서 이름을 풍덕이라고 고쳤으며, 효종 기축년(1649)에 부로 승격시켰다.○ 하원(河源)이라고도 한다. ○ 8면(面)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80리이다. ○ 덕수(德水)는 폐현이다. ○ 고구려 때의 덕물현(德勿縣)이니, 또는 인물(仁物)이라고도 한다.
○ 교동(喬桐) : 성이 있다. 고구려 때의 고목근현(高木根縣)이니, 대운도(戴雲島) 또는 고림(高林) 또는 달을신(達乙新)이라고도 한다. 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 교동으로 고쳤다. 태조가 만호를 두었으며 뒤에 현으로 승격시켰고, 인조 기사년에 부로 승격시켰다. ○ 4면(面)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육로로 1백 20리고, 수로로는 50리이다. ○ 삭녕(朔寧) : 고구려 때의 소읍(所邑)ㆍ두현(豆縣)이니 고려 때 삭녕ㆍ승령현(僧領縣)으로 고쳤다. 고구려 승량현(僧梁縣) 또는 빗물(非勿)이라고도 한다. 을 신라 때 동량(㠉梁)으로 고쳤다. 고려 현종 때에 2현을 모두 동주(東州)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승령현(僧嶺縣)을 두고 삭녕과 합쳤다. 태종 계미년에 군으로 승격시키고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외향(外鄕)이다. 또 안협현(安峽縣)을 줄여서 예속시켜 안삭군(安朔郡)을 만들었더니 조금 뒤에 복구하였다. ○ 7면(面)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95리이다.
○ 마전(麻田) : 고구려 때의 마전천현(麻田淺縣)이니, 신라 때 임단(臨湍)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마전으로 고쳤다. 문종 임신년에 군으로 승격시켰다. 숭의전(崇義殿)이 있기 때문이다. ○ 6면(面)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25리이다. ○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서울과의 거리는 1백 79리이다.” 하였다.
○ 고양(高陽) : 고구려 때의 달을성현(達乙省縣)이니 신라 때 고봉(高峯)이라고 개칭했고, 고구려 때 개백현(皆伯縣)을 신라 때 우왕(遇王)이라고 고쳤는데, 또는 왕봉(王逢)이라고도 하였다. 고려 때 행주(幸州)로 개칭하였으며, 현종 때에 2현을 모두 양주에 예속시켰다. 태조 갑술년에 비로소 고봉현을 두고, 행주와 부원(富原)ㆍ황조(荒調)를 이에 예속시켰다.태종 계사년에 고양이라 개칭하고, 고봉ㆍ덕양(德陽) 성종 신묘년에 군으로 승격시켰다. ○ 8면(面)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87리이다. ○ 고봉고현(高峯古縣)이라고도 한다. 김부식이 말하기를, “한씨(漢氏)의 미녀가 달을성현(達乙省縣) 높은 산꼭대기에서 봉화를 놓고 안장왕(安藏王)을 맞이했기 때문에 뒤에 이름을 고봉이라 하였다.” 하였다. 왕봉(王逢)은 폐현이고 바로 행주(幸州) 한씨의 미녀가 안장왕(安藏王)을 개백현(皆伯縣)에서 맞았으므로 이름을 고쳐서 왕봉(王逢)이라 하였다. 부원(富原)도 폐현이다. 본래 과주(果州) 용산처(龍山處)인데, 지금은 한성부에 예속되었다. 황조향(荒調鄕) 본래 부평에 예속되었으니 바로 주엽리(注葉里)이다.
○ 교하(交河) : 고구려 때의 천정구현(泉井口縣)이니 또는 굴화(屈火)라고도 한다. 신라 때 교하군(交河郡)이라 고쳤고, 고려 때 양주에 예속시켰는데, 태조 갑술년에 비로소 현을 두고 심악(深岳)ㆍ석천(石淺) 부평의 속향 을 여기에 예속시켰으며 영종(英宗) 계축년에 군으로 승격시켰다. ○ 선성(宣城)ㆍ원정(原井)이라고도 한다. ○ 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90리이다. ○ 심악(深岳)은 폐현이다. 옛날의 보신향(寶新鄕)이다.
○ 가평 : 고구려 때의 근평군(斤平郡)인데, 병평(幷平)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가평이라 고쳤으며, 가평(嘉平)이라고도 한다. 고려 때 춘주(春州)에 예속시켰는데 태조 병자년에 비로소 현을 두었으며 중종 정묘년에 군으로 승격시켰다. ○ 4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37리이다. ○ 조종(朝宗)은 속현이다. 고구려 때의 심천현(深川縣)이니 또는 복사매(伏斯買)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 준천(浚川)이라고 고쳤다.
○ 영평 : 고구려 때의 양골현(梁骨縣)이니, 신라 때 동음(洞陰)이라 고쳤고, 고려 때 영흥(永興)으로 승격시켰으며, 태조 갑술년에 영평이라 고쳤다. ○ 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40리이다.
○ 포천 : 고구려 때의 마홀군(馬忽郡)이니 신라 때 견성(堅城)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포천으로 고쳤으며, 태종 계사년에 포천현으로 고쳤다.
○ 명음(命音) : 청화(淸化)라고도 한다. ○ 광해군 무오년(1618)에 영평(永平)과 합하여 부사로 승격시켰다가 계해년에 도로 혁파하였다. ○ 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97리이다.
○ 적성(積城) : 고구려 때의 칠중현(七重縣)이니, 신라 때 중성(重城)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적성(積城)으로 고쳤다. ○ 내별(乃別)이라고도 한다. ○ 5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20리이다.
○ 연천(漣川) : 고구려 때의 공목달현(工木達縣)이니, 웅섬산(熊閃山)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공성(功成)이라 고쳤고, 고려 때 장주(漳州)ㆍ연천이라 고쳤으며, 태종 갑오년에 마전(麻田)과 합해서 마련현(麻漣縣)을 만들었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나누어 연천현을 만들었다. ○ 장포(獐浦)라고도 한다. ○ 5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43리이다.
○ 충청도 : 동북쪽은 강원도와 경계요, 동쪽은 경상도와 경계로 동남쪽은 경상ㆍ전라 양도의 경계로, 남쪽은 전라도와 경계로 서남쪽 및 서쪽ㆍ서북쪽은 모두 큰 바다이며, 북쪽은 경기도와 경계이다. 54고을 좌도 21고을, 우도 33고을 이니, 옛 마한(馬韓)의 땅으로서 고구려와 백제가 나누어 점거하였다가 뒤에 모두 신라에 병합되었다. 웅주를 두었다. 말기에는 궁예와 견훤이 나누어 점거하였다. 고려 성종이 중원도(中原道)ㆍ하남도(河南道)를 두었는데, 예종이 관내도(關內道)에 합쳐서 양광충청주도(楊廣忠淸州道)라 일컬었다. 다시 명종이 나누어 2도를 만들었고, 충숙왕이 다시 합쳐서 1도로 만들어 양광도(楊廣道)라 하였고, 공민왕이 충청도라고 불렀다. 신우가 평창군(平昌郡)을 나누어서 교주도(交州道)에 옮겨 예속시켰다. 우리 태조 을해년에 양광주(楊廣州)가 거느린 군현을 경기에 예속시키고, 그 나머지는 그대로 충청도라 일컬었다. 태조 무인년에 진위현을 나누어 경기도에 예속시켰고, 정종은 영월군을 나누어 강원도에 예속시켰으며, 강원도 영춘현(永春縣)을 충청도에 예속시켰다. 태종 계사년에 영흥(永興)ㆍ안성(安城)ㆍ음죽(陰竹)ㆍ양성(陽城)ㆍ양지(陽智)를 경기도에 예속시키고, 경상도의 옥천(沃川)ㆍ영동(永同)ㆍ황간(黃澗)ㆍ보은ㆍ청산을 충청도에 예속시켰다.
○ 좌도 충주 : 성(城)이 있다. 고구려 때의 국원성(國原城) 또는 미을성(未乙省)이라고도 하며, 난장성(亂長省)이라고도 한다. 이니, 신라 진흥왕이 소경(小京) 귀족 자제들과 6부(部)의 호민(豪民)들을 옮겨다가 채웠다. 을 두었으며 뒤에 중원경(中原京)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가 고쳐서 충주라 하였고, 성종은 창화군(昌化軍)이라 이름하였다. 세종 기사년에 관찰사로서 목사(牧使)를 겸하게 했다가 얼마 안 되어 혁파하였다. ○ 대원(大原) 결(缺) 예(蘂)는 본래 고구려의 원성(原城)인데, 신라 때 병합하고 진흥왕이 소경을 두었고, 경덕왕이 중원(中原)이라 하였으며, 고려 때 충주라 고쳤다.
○ 청주 : 성이 있다. 백제 때 상당현(上黨縣)이니, 또는 낭비성(娘臂城) 또는 낭우곡(娘于谷)이라 한다. 이라 한다. 신라 때 서경ㆍ소경(小京)을 두었으며, 고려 태조가 청주라 고쳤다가 뒤에 전절군(全節軍)으로 삼았다. 세종 기사년에 관찰사로서 목사를 겸하게 했다가 얼마 안 되어 파하였다.○ 청주ㆍ낭성(琅城)이라고도 한다. ○ 23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리가 된다. ○ 청주는 속현이다. 옛날 살매현(薩買縣)이니, 또는 청천(淸川)이라고도 한다.
○ 청풍(淸風) : 고구려 때의 사열이현(沙熱伊縣)이니, 신라 때 청풍이라 고쳤고, 현종 경자년에 군을 부로 승격시켰다. ○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55리이다.
○ 단양 : 고구려 때 적산현(赤山縣)이니 적성(赤城)이라고도 한다. 고려 때 단산(丹山)이라 고쳤다가 또 단양으로 고치고, 군으로 승격시켰다. ○ 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80리이다.
○ 천안 : 본래 동서(東西) 도솔(兜率)의 땅이니, 고려 태조가 병합하여 천안부를 만들었고, 성종이 환주(歡州)라고 고쳤는데 뒤에 영주(寧州)로 고쳤다. 태종 계사년에 영산군(寧山郡)이라 고쳤다가 조금 후에 천안으로 고쳤다. ○ 임환(任歡)이라고도 한다. ○ 15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19리이다. 풍세(豐歲)는 폐현이다. 백제 때 감매현(甘買縣)이니, 또는 제천(稊川)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순치(馴稚)라 고쳤다.
○ 괴산 : 고구려 때의 잉근내군(仍斤內郡)이니, 신라 때 괴양(槐壤)으로 고쳤고, 고려에서는 괴주(槐州)라 고쳤는데, 태종 계사년에 괴산군으로 고쳤다. ○ 시안(始安)이라고도 한다. ○ 12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80리이다.
○ 옥천 : 신라 때 고시산군(古尸山郡)이니 뒤에 관성(管城)이라 고쳤고, 고려 때 옥주(沃州)로 승격시켰으며, 태종 계사년에 옥천군(沃川郡)으로 고쳤다. ○ 11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10리이다. ○ 이산(利山)은 속현이다. 신라 때의 소리산현(所利山縣)이다. 안읍현(安邑縣) 신라 때의 아동혜군(阿東兮郡)이니 안정(安貞)이라 고쳤다. 양산현(陽山縣) 신라 때의 조차천현(助此川縣)이니, 고려 충선왕 때 3현을 나누어 여기에 예속시켰다.
○ 문의(文義) : 백제 때의 일모산군(一牟山郡)이니, 신라 때 연산(燕山)으로 고쳤고, 고려 때에는 문의현이라 고쳐서 가림(嘉林)과 합쳤다가 얼마 안 되어 복구하였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26리이다.
○ 제천 : 고구려 때의 내토군(奈吐郡)이니, 신라 때 내제(奈堤)로 고쳤고, 고려 때에는 제주(堤州)라 고쳤는데, 태종 계사년에 제천현(堤川縣)으로 고쳤다. ○ 의천(義川)이라고도 한다. ○ 의원(義原)이라고도 한다. ○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20리이다.
○ 직산(稷山) : 본래는 위례성(慰禮城)이니 백제가 도읍을 세웠고, 고구려는 이곳을 차지하여 사산현(蛇山縣)이라 하였으며, 고려 초기에 직산으로 고쳤다. 태조 계유년에 군으로 승격시켰고, 태종 신사년에 다시 강등시켰으며, 연산군 때 경기도로 옮겨 예속시켰다가 중종 때 복원하였다. ○ 12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83리이다. ○ 경양(慶陽)은 폐현이다. 고려 때 하양창(河陽倉)이다.
○ 회인(懷仁) : 백제 때의 미곡현(未谷縣)이니, 신라 때 매곡(昧谷)이라 고쳤고, 고려 때에는 회인이라 고쳤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46리이다.
○ 연풍(延豐) : 고구려 때의 상모현(上芼縣)이니, 고려 때에 장연(長延)이라 고쳤고, 태조 갑술년에 장풍현(長豐縣)과 합쳤으며, 태종 계미년에 연풍으로 고쳤다. ○ 4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62리이다. ○ 장풍(長豐)은 폐현이다.
○ 음성(陰城) : 고구려 때의 잉홀현(仍忽縣)이니, 신라 때 음성으로 고쳤다. ○ 설성(雪城)이라고도 한다. ○ 잉근내(仍斤內)는 선조 임진년에 혁파했다가 광해군 무오년에 다시 두었다. ○ 4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48리이다.
○ 청안(淸安) : 청당현(淸塘縣)이니 청연(淸淵)이라고도 하는데, 고려 때 도안(道安)과 겸하여 다스렸다. 도안현(道安縣)은 본래 고구려 때 도서현(道西縣)이니 신라 때에는 도서(都西)로 고쳤다. 태종 을유년에 양현(兩縣)을 합쳐서 청안으로 고쳤다. ○ 청당(淸塘)이라고도 한다.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93리이다.
○ 진천(鎭川) : 고구려 때의 금물노군(今勿奴郡)이니, 만노(萬弩)라고도 하며 수지(首知) 혹은 신지(新知)라고도 한다. 신라 때 흑양(黑壤)으로 고쳤는데 또는 황양(黃壤)이라고도 한다.고려 초기에 강주(降州)라 일컬었다가 진주(鎭州)로 고쳤으며, 창의(彰義) 의령(義寧)으로 승격시켰다. 태조 계사년에 진천현으로 고쳤고, 연산군이 경기도로 옮겨 예속시켰는데 중종이 복원하였다. ○ 상산(常山)이라고도 한다. ○ 15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34리이다.
○ 목천(木川) : 백제 때 대목악군(大木岳郡)이니 신라 때 대록(大麓)이라 고쳤고, 고려 때에는 목주(木州)로 고쳤다. 태종 계사년에 목천현이라 고쳤다. ○ 신정(新定)이라고도 한다. ○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47리이다.
○ 영춘(永春) : 고구려 때의 을아단현(乙阿旦縣)이니, 신라 때 자춘(子春)으로 고쳤고, 고려 때 영춘으로 고쳤으며, 정종 기묘년에 옮겨 예속시키고 현(縣)을 설치하였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90리이다.
○ 보은(報恩) : 신라 때 삼년산군(三年山郡)을 삼년으로 고쳤고, 고려 때 보령(保齡)으로 고쳤으며, 태종 병술년에 보은현으로 고쳤다. 보령(保寧)과 음(音)이 서로 같기 때문이다. 삼산(三山) ○ 10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76리이다.
○ 영동(永同) : 신라 때 길동군(吉同郡)을 영동으로 고쳤고, 고려 때 계주(稽州)로 승격시켰다가 도로 폐하여 현으로 하였다. ○ 영산(永山)ㆍ계산(稽山)이라고도 한다. ○ 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60리이다.
○ 황간(黃澗) : 신라 때의 소라현(召羅縣)이니, 황간 신라 때 수영(水永)에 속해 있었다. 이라 고쳤고, 태종 갑오년(1414, 태종 14)에 청산(靑山)과 합쳐서 황청현(黃靑縣)을 만들었다가 얼마 안 되어 이전 상태로 회복하였다. ○ 황계(黃溪)라고도 한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90리이다.
○ 청산(靑山) : 신라 때의 굴산현(屈山縣) 삼년군(三年郡)에 속해 있었다. 이니, 돌산(堗山)이라고도 하는데 기산(耆山)이라 고쳤고, 고려 때 청산으로 고쳤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23리이다. ○ 주성(酒城)은 속현이다. 보은 북촌(北村)에 들어갔다가 땅이 작다 해서 분할하여 부속시켰다.
○ 우도 공주 : 백제 때의 웅천(熊川)이니, 문주왕(文周王)이 북쪽 한수(漢水)로부터 도읍을 이곳에 옮겼는데,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멸하고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었다. 신라 때 웅천주(熊川州)라 고쳤다가 또 웅주(熊州)로 고쳤고, 고려 태조가 공주로 고쳤다가 뒤에 안절군(安節軍)이라 일컬었다.○ 회도(懷道)라고도 한다. ○ 2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23리이다. 유성(儒城)은 속현이다. 백제 때 노사지현(奴斯只縣)이다. 덕진(德津)은 폐현이고, 백제 때 소비포현(所比浦縣)이요, 신라 때의 적조(赤鳥)이다. 신풍(新豐)도 폐현이다. 백제 때의 벌음지현(伐音只縣)이니, 또는 무부(武夫)라 했다. 신라 때 청음(淸音)으로 고쳤다.
○ 홍주(洪州) : 성(城)이 있다. 고려 때의 운주(運州)이니, 홍주라 고쳤다.
○ 안평(安平)ㆍ해풍(海豐)ㆍ해흥(海興)ㆍ홍양(洪陽)이라고 한다. ○ 2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93리이다. 신평(新平)은 속현이다. 면천(沔川)ㆍ동촌(東村)으로 들어갔으니, 백제 때 사평현(沙平縣)이다. 여양(驪陽)은 폐현이고 백제 때의 사시량현(沙尸良縣), 또는 사라(沙羅)라고도 하는데, 신라가 신량(新良)이라 고쳤다. 고구(高丘)도 폐현이며 백제 때의 우견현(牛見縣)이니, 신라 때에 목우(目牛)로 고쳤다. 흥양(興陽)도 폐현이고, 옛 이름은 원군(遠軍)이다. 합덕(合德)도 폐현이다. 본래는 덕풍현(德豐縣)에 속하여 부곡이 되었다.
○ 임천(林川) : 백제 때의 가림군(加林郡)이니, 신라 때 가림으로 고쳤고, 고려 때 임주(林州)를 두었다. 태조 갑술년에 군으로 승격시켰다가 태종 신사년(1401, 태종 1)에 도로 강등시켰으며, 계미년에 또 다시 승격했다가 갑신년에 도로 강등시키고, 계사년에 임천(林川)으로 고쳤다. ○ 21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19리이다.
○ 태안 : 백제 때의 성대혜현(省大兮縣)이다. 신라 때 소태(蘇泰)로 고쳤고, 고려 때 태안군으로 고쳤다. ○ 전성(蓴城)이라고도 한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18리이다.
○ 한산(韓山)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마산현(馬山縣)인데, 고려 때 한주(韓州)로 승격시켰고, 태종 계사년에 한산군으로 고쳤다. ○ 마읍(馬邑)ㆍ아주(鵞州)라고도 한다. ○ 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40리이다.
○ 서천(舒川) : 백제 때의 설림군(舌林郡)이니, 남양(南陽)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서림(西林)으로 고쳤고, 고려 때 서주(西州)로 승격시켰으며, 태종 계사년(1413, 태종 13)에 서천군으로 고쳤다. ○ 10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70리이다.
○ 면천(沔川) : 백제 때의 혜군(槥郡)이니, 신라 때 혜성(槥城)이라 고쳤고, 고려 때 면주(沔州)로 승격시켰으며, 태종 계사년에 면천군으로 고쳤다. ○ 마산(馬山)ㆍ해종(海宗)이라고도 한다. ○ 14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80리이다.
○ 서산 : 백제 때의 기군(基郡)이니, 신라 때 부성(富城)으로 고쳤고, 고려 때 서산으로 고쳤으며, 서주(瑞州)로 승격시켰다가 서령부(瑞寧府)로 강등시켰었는데, 태종 계사년에 다시 서산군이 되었다. ○ 1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88리이다. ○ 지곡(地谷)은 폐현이다. 백제 때의 지륙현(知六縣)이니, 신라 때 지육(地育)이라 고쳤다.
○ 온양 : 백제 때의 탕정군(湯井郡)이니, 신라 때 주로 승격시켰고 고려 초기에 온수군(溫水郡)으로 고쳤다. 태종 갑오년에 신창(新昌)과 합쳐서 온창(溫昌)이라 일컫다가 병신년에 그전 이름을 회복했고, 세종 임술년에 온양군으로 고쳤다. ○ 온천(溫泉)이라고도 한다. ○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33리이다.
○ 대흥(大興) : 백제 때 임존성(任存城)이니 금주(今州)라고도 한다. 신라 때 임성군(任城郡)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대흥으로 고쳐서 현을 만들었다. 숙종 신유년에 군으로 승격시켰다. ○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83리이다.
○ 홍산 : 백제 때의 대산현(大山縣)이니, 신라 때 한산(翰山)으로 고쳤고, 고려 때 홍산으로 고쳤다. ○ 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22리이다.
○ 덕산(德山) 덕풍현(德豐縣) : 백제 때의 금물현(今勿縣)이니, 신라 때 금무(今武)로 고쳤고, 고려 때 덕풍(德豐)으로 고쳤다. 이산현(伊山縣)은 백제 때의 마시산군(馬尸山郡)이니, 신라 때 이산(伊山)으로 고쳤고, 고려 때 현으로 만들었다. 태종 을유년(1405, 태종 5)에 이산의 인물(人物)이 쇠잔하다 하여 두 현을 합쳐서 덕산을 만들었다. ○ 12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93리이다.
○ 평택 : 고하팔현(古河八縣)이니, 고려 때 평택으로 고쳤고, 연산군이 경기도로 이속시키더니 중종이 이전대로 회복시켰다. ○ 팽택(彭澤) 《여지승람》에는 실려 있지 않다. 은 선조 병신년에 혁파하였다가 광해군 무오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73리이다.
○ 정산(定山) : 백제 때의 열기현(悅己縣)이니, 두릉윤성(豆陵尹城)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열성(悅城)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정산으로 고쳤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49리이다.
○ 청양 : 백제 때의 고량부리현(古良夫里縣)이니, 신라 때 청무(靑武)로 고쳤고, 고려 때 청양으로 고쳤다. ○ 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33리이다.
○ 은진(恩津) : 덕은군(德恩郡)이니, 백제 때의 덕근군(德近郡)이며, 신라 때 덕은(德殷)으로 고쳤고, 고려 때 덕은(德恩)으로 고쳤다. 시진현(市津縣)은 백제 때 가지내현(加知奈縣)이니, 또는 가을내(加乙乃)라고도 하고, 또는 신포(薪浦)라고도 한다.신라 때 시진(市津)으로 고쳤는데, 고려 때 모두 공주에 예속시켰다. 태조 정축년에 두 현을 합해서 덕은으로 하였다. 세종이 은진으로 고쳤더니, 인조 병술년에 이성(尼城)ㆍ연산을 합쳐서 은산(恩山)을 만들었고, 효종 병신년(1656, 효종 7)에 이전 이름을 회복했다. ○ 14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12리이다.
○ 회덕 : 백제 때의 우술군(雨述郡)이니, 오천(汚淺)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비풍(比豐)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회덕현으로 고쳤다. ○ 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81리이다.
○ 진잠(鎭岑) : 백제 때의 진현현(眞峴縣)이니 정현(貞峴)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진령(鎭嶺)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진잠으로 고쳤다. ○ 기성(杞城)이라고도 한다. ○ 5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51리이다.
○ 연산 : 백제 때의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이니, 신라 때 황산(黃山)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연산현으로 고쳤다.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6리이다.
○ 이성(尼城) : 백제 때의 열야산군(熱也山郡)이니, 신라 때 이산(尼山)으로 고쳤다. 태종 갑오년에 석성(石城)과 합쳐서 이산성이라 일컫다가 다시 나누었다. ○ 노산(魯山)ㆍ노성(魯城)이라고도 한다. ○ 11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77리이다.
○ 부여 : 백제 때의 소부리군(所夫里郡)이니, 사비(泗沘)라고도 한다. 성왕(聖王)이 이곳에 와서 도읍하고 이름을 남부여라 하였는데, 신라 때 부여군으로 고쳤다. ○ 반월(半月)ㆍ여주(餘州)라고도 한다. ○ 10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96리이다.
○ 석성(石城) : 백제 때의 진악산현(珍惡山縣)이니, 신라 때 석산(石山)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석성으로 고쳤다. 태종 갑오년(1414, 태종 14)에 이산(尼山)과 합쳐서 이성(尼城)을 만들었더니, 얼마 후에 고다진(古多津)이 왕래하는 요충지라 해서 다시 나누어서 현을 만들었다. ○ 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93리이다.
○ 비인(庇仁)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비중현(比衆縣)이니, 신라 때 비인으로 고쳤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43리이다.
○ 남포(藍浦)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사포현(寺浦縣)이니, 신라 때 남포로 고쳤고 공양왕이 진(鎭)을 두었는데, 세조가 진을 없애고 현을 두었다. ○ 마산(馬山)이라고도 한다. ○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93리이다.
○ 결성(結城)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결기현(結己縣)이니, 신라 때 결성(潔城)으로 고쳤고, 고려 때 또 결성으로 고쳤다. ○ 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23리이다.
○ 보령(保寧)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신촌현(新村縣)이니, 사촌(沙村)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신읍(新邑)으로 고쳤고, 고려 때 보령으로 고쳤으며, 효종 임진년(1652 효종 3)에 부로 승격시켰다가 을미년에 도로 강등시켰다. ○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73리이다.
○ 해미(海美) : 정해현(貞海縣) 세상에서 전하기를, “고려 태조 때, 몽웅역(夢熊驛) 역리(驛吏) 한씨 성을 가진 자가 큰 공이 있어서 대광(大匡)이라고 공호를 하사하고, 고구현(高丘縣) 땅을 나누어 정해현(貞海縣)을 만들었다.” 하였다.ㆍ여미현(餘美縣)은 백제 때의 여촌현(餘村縣)이니, 신라 때 여읍(餘邑)으로 고쳤다. 태종 정해년에 두 현을 합쳐서 해미를 만들었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53리이다. ○ 여미고현(餘美古縣)이라고도 한다.
○ 당진 : 백제 때의 벌수지현(伐首只縣)이니, 부지나(夫只那)라고도 한다. 신라 때 당진으로 고쳤다. ○ 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33리이다.
○ 신창(新昌) : 백제 때의 굴직현(屈直縣)이니, 신라 때 기량(祈梁)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신창으로 고쳤으며, 공양왕이 장포(獐浦)에 성을 쌓고, 이웃 주ㆍ현의 조세를 거두어 비로소 만호(萬戶) 겸 감무(監務)를 두었다. 태조 무신년에 만호를 없앴다. ○ 온창(溫昌)이라고도 한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33리이다.
○ 예산 : 백제 때의 오산현(烏山縣)이니, 신라 때 고산(孤山)으로 고쳤고, 고려 태조가 예산으로 고쳤다. ○ 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63리이다.
○ 전의(全義) : 백제 때의 구지현(仇知縣)이니, 신라 때 금지(金池) 혹은 금지(金地)라고도 한다. 로 고쳤고, 고려 때 전의(全義)로 고쳐서 청주에 예속시켰다. 태조 을해년에 현을 두었고, 태종 갑오년(1414, 태종 14)에 연기와 합쳐서 이름을 전기(全岐)라 하였다가 병신년에 이전 이름으로 회복했다. ○ 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91리이다.
○ 연기(燕岐) : 백제 때의 두잉지현(豆仍只縣)이니, 신라 때 연기로 고쳤고, 고려 때 목주(木州)를 여기에 합쳤다. 태종 병술년(1406, 태종 6)에 다시 나누었으며, 갑오년(1414)에 전의(全義)와 합쳤다가 얼마 안 되어 이전대로 하였다. ○ 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91리이다.
○ 아산 : 백제 때의 아술현(牙述縣)이니, 신라 때 음봉(陰峯)으로 고쳤는데, 음잠(陰岑)이라고도 한다. 고려 초기에 인주(仁州)ㆍ아주(牙州)로 고쳤고, 태종 계사년(1413, 태종 13)에 아산현(牙山縣)으로 고쳤다. 세조 기묘년(1459, 세조 5)에 군(郡)을 줄여서 온양(溫陽)ㆍ평택(平澤)ㆍ신창(新昌) 세 읍(邑)에 나누어 예속시켰다가 을유년에 이전대로 하였다. ○ 영인(寧仁)이라고도 한다. ○ 11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24리이다.
○ 전라도 : 동북쪽은 충청ㆍ경상 두 도와 경계를 이루며, 동쪽은 경상도와 경계를 이루고, 동남쪽은 경상도와 큰 바다로 경계를 이루며, 남쪽과 서남쪽 및 서쪽은 모두 큰 바다이며, 서북쪽은 큰 바다 및 충청도와 경계를 이루고, 북쪽은 충청도와 경계를 이룬다. 56고을 좌도 23고을, 우도 33고을 이니, 본래 변한(卞韓) 땅으로서 백제의 소유였으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쳐서 멸하고 나누어서 5도독부를 두었다. 당 나라 군사가 본국으로 돌아가자, 신라가 그 땅을 모두 병합해서 뒤에 전주ㆍ무주(武州) 두 주를 두었다.그 말기에는 견훤과 궁예가 나누어 차지했는데, 고려 태조가 신검(神劍)을 멸하였다. 성종이 강남도(江南道)ㆍ해양도(海陽道)를 두었으나, 현종이 합쳐서 전라도를 만들었는데 본조에서도 이를 그대로 두었다.
○ 좌도 능천(綾川) : 백제 때의 이릉부리군(尒陵夫里郡)이니, 또는 죽수부리(竹樹夫里) 인부리(仁夫里)라고도 한다. 라고도 한다. 신라 때 능성(陵城)으로 고쳤고, 고려 때 나주에 예속시켰다. 태종 병신년(1416, 태종 16)에 화순현과 합쳐서 순성(順城)이라고 일컬었으나 조금 있다가 도로 회복했다.인조 임신년(1632, 인조 10)에 능주목(綾州牧)으로 승격시켰다. 왕비의 고향이다. ○ 연주(連珠)라고도 한다. ○ 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58리이다.
○ 남원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고룡군(古龍郡)이니, 뒤에 한 나라 대방군(帶方郡)이 되었고, 조위(曹魏) 때 남대방(南帶方)이 되었으며, 신라 때 소경(小京)을 두고 남원으로 고쳤다. ○ 용성(龍城)ㆍ일신(一新)이라고도 한다. ○ 40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55리이다.○ 유곡(楡曲)은 속현이다. 백제 때의 구차례현(仇次禮縣)이니 지금의 구례(求禮)이다. 거령(居寧)은 폐현이다. 거령이라고도 하니, 백제 때의 거사물현(居斯勿縣)이요, 신라 때의 청웅(靑雄)인데, 별호는 영성(寧城)이다. 유인궤성(劉仁軌城) 소정방이 백제를 멸하니 당(唐)에서 유인궤에게 조서를 내려 검교대방자사(檢校帶方刺使) 겸 도독(都督)으로 임명하여 읍내 이전(里廛)에 정전(井田)을 본받아 9구(區)를 만들었으니 그 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 장흥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오차현(烏次縣)이니 신라 때 오아(烏兒)로 고쳤고, 고려 때 정안(定安)으로 고쳤다가 다시 장흥부(長興府)로 고치고, 회주목(懷州牧)으로 승격시켰으나 조금 후에 이전대로 하였다. 태종 계사년에 관아를 수령(遂寧)으로 옮겼다. ○ 정주(定州)ㆍ관산(冠山)이라고도 한다. ○ 15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8백 86리이다. ○ 회령(會寧)은 폐현이며, 백제 때의 마사량현(馬斯良縣)이니 신라 때 벌로(伐勞)로 고쳤다. 수령도 폐현이다. 백제 때의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이니, 신라 때 마읍(馬邑)으로 고쳤다. ○ 장택(長澤)도 폐현이다. 백제 때의 계천현(季川縣)이니, 신라 때 계수(季水)로 고쳤다. ○ 옛날 장흥은 천관산(天冠山) 남쪽에 있었다.
○ 순천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염평군(欿平郡)이니, 사평(沙平)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승평(昇平)이라 고쳤고, 고려 때는 승주(昇州), 연해군(兗海軍)으로 고쳤는데, 승화(昇化)라고도 한다. 뒤에 순천부로 고쳤다. ○ 평양(平陽)이라고도 한다. ○ 20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96리이다.○ 여수는 폐현이다. 백제 때의 원촌현(猿村縣)이니 신라 때 해읍(海邑)으로 고쳤다. 돌산(突山)도 폐현이다. 백제 때의 돌산(突山)이니, 신라 때 여산(盧山)으로 고쳤다. 부유(富有)도 폐현이다. 백제 때의 둔지현(遁支縣)이다.
○ 담양 : 백제 때의 추자혜군(秋子兮郡)이니, 신라 때 추성(秋成)으로 고쳤고, 고려 때 담주(潭州)로 고쳤다가 뒤에 담양으로 고쳤으며, 정종이 부(府)로 승격시켰다. 중궁 김씨의 외향(外鄕)이다. ○ 12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76리이다.
○ 무주(茂朱) : 무풍현(茂豐縣)인데 신라 때의 무산현(茂山縣)이니, 무풍으로 고쳤고, 고려 때 진례현(進禮縣)에 예속시켰다. 주계(朱溪)는 백제 때의 적천현(赤川縣)이니, 신라 때 단천(丹川)으로 고쳐서 진례현에 예속시켰는데, 고려 때 주계(朱溪)로 고쳤고, 공양왕이 무풍과 병합시켰다. 태종 갑오년에 무주현으로 고쳤고, 현종 갑인년(1674, 현종 15)에 부(府)로 승격시켰다. ○ 12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5백 26리이다.
○ 보성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복홀군(伏忽郡)이니, 신라 때 보성으로 고쳤고, 고려 때 패주(貝州)로 고쳤으나 조금 후에 이전대로 하였다. ○ 산양(山陽)이라고도 한다. ○ 1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8백 51리이다. ○ 조양(兆陽)은 폐현이다. 백제 때의 동로현(冬老縣)이다. 복성(福城)도 폐현이다. 백제 때의 파부리군(波夫里郡)이니, 신라 때 부리(夫里)로 고쳤다.
○ 낙안(樂安)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분차군(分嵯郡)이니, 분사(分沙)라고도 한다. 신라 때 분령(分嶺)으로 고쳤고, 고려 때 낙안으로 고쳤는데, 이는 양악(陽岳)이라고도 한다. ○ 부차(浮槎)ㆍ낙천(洛川)이라고도 한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86리이다.
○ 순창(淳昌) : 백제 때의 도실군(道實郡)이니, 신라 때 순화(淳化)라 고쳤고, 고려 때 순창으로 고쳤다. ○ 오산(烏山)ㆍ옥천(玉川)이라고도 한다. ○ 1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36리이다. ○ 복흥(福興)은 폐현이며, 적성(赤城)도 폐현이다. 백제 때 역평현(礫坪縣)이다.
○ 창평(昌平) : 백제 때의 굴지현(屈支縣)이니, 신라 때 석양(析陽)으로 고쳤고, 고려 때 창평으로 고쳤는데, 명평(鳴平)이라고도 한다. 성종 5년 이 이를 없애고, 광주에 예속시켰다가 10년에 이전대로 하였다. ○ 명양(鳴陽)이라고도 한다. ○ 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6리이다.
○ 용담(龍潭) : 백제 때의 물거현(勿居縣)이니, 신라 때 청거(淸渠)로 고쳤고, 고려 때 용담으로 고쳤다. ○ 옥천(玉川)이라고도 한다. ○ 4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5백 36리이다.
○ 광양(光陽)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마로현(馬老縣)이니, 신라 때 희양(晞陽)으로 고쳤고, 고려 때 광양으로 고쳤다. ○ 12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8백 20리이다.
○ 강진 : 성이 있다. 도강현(道康縣)은 백제 때의 도무군(道武郡)이니 신라 때 양무(陽武)로, 고려 때 도강현으로 고쳤다. 탐진현(耽津縣)은 백제 때의 동음현(冬音縣)이니, 신라 때 탐진으로 고쳤다. 태종 정유년(1417, 태종 17)에 병영을 도강 옛 관아로 옮기고, 두 현을 합쳐서 강진을 만들었다. ○ 금릉(金陵)ㆍ오산(鰲山)이라고 한다. ○ 21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8백 76리이다.
○ 옥과(玉果) : 백제 때의 과지현(果支縣)이니, 과혜(果兮)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 옥과로 고쳤다. ○ 설산(雪山)이라고도 한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66리이다.
○ 구례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구차례현(仇次禮縣)이니, 신라 때 이름을 구례라 고쳤고, 고려 초기에 남원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현을 두었다. 중종 경오년에 현을 폐지하고 유곡부곡(楡谷部曲)을 만들어 다시 남원에 예속시켰다. 고을에 사는 백성 배목인(裵目仁)ㆍ문빈(文彬) 등이 참언으로 여러 사람을 꾀어 모아서 반역할 것을 모의하다가 죽음을 당했다. ○ 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66리이다. ○ 《여지승람》에는 남원의 속현에 들어 있다.
○ 곡성(谷城) : 백제 때의 욕내군(欲乃郡)이니, 신라 때 곡성으로 고쳤고, 고려 때 현을 두었다. ○ 욕천(浴川)은 선조 정유년에 없앴다가 광해군 기유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76리이다.
○ 운봉(雲峯) : 신라 때의 모산현(母山縣)이니, 경덕(景德) 또는 아영성(阿英城) 아막(阿莫)이라고도 한다. 이라고도 하는데, 뒤에 운봉으로 고쳤다. 고려 때 남원에 예속시키고 태조 임신년에 현을 두었는데, 선조 경자년에 없앴다가 광해군 신해년에 다시 두었다. ○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86리이다.
○ 임실 : 백제 때의 임실군(任實郡)이니, 신라 때 이를 그대로 두었고, 고려 때 현을 두었다. ○ 운수(雲水)라고도 한다. ○ 1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5백 82리이다.
○ 구고(九皐)는 폐현이다. 백제 때의 돌평현(堗坪縣)이니 누평(淚坪)이라고도 한다.
○ 장수(長水) : 백제 때의 우평현(雨坪縣)이니, 통일 신라 때 고택(高澤)으로 고쳤고, 고려 때 장수로 고쳐서 장계(長溪)까지 겸해서 맡겼다. 태조 임신년에 다시 나누어 장수라고 하였다. ○ 장천(長川)이라고도 한다. ○ 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68리이다. ○ 장계는 속현이다. 백제 때의 백해군(百海郡)이니, 신라 때 벽계(璧溪)로 고쳤는데, 따로 장세(長世)라고도 한다.
○ 진안(鎭安) : 백제 때의 난진아현(難珍阿峴)이다. 또는 월량(月良)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 진안으로 고쳤다. ○ 월랑(越浪) 월량(月良)이 이렇게 전해졌다. ○ 13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5백 86리이다. ○ 마령(馬靈)은 폐현이다. 백제 때의 마돌현(馬突縣)이니, 마진(馬珍)이라고도 하고, 마등량(馬等良)이라고도 하는데 별명은 영천군(頴川郡)이다.
○ 동복(同福) : 백제 때의 두부지현(豆夫只縣)이니, 신라 때 동복으로 고쳤다. 태조 갑술년에 화순(和順)까지 겸하여 정무를 감독하게 했으며, 태종 을유년(1405, 태종 5)에 화순과 합쳐서 복순(福順)이라 하였고, 병신년에 다시 이전대로 하였다. ○ 구성(龜城)ㆍ옹성(甕城)ㆍ복천(福川)ㆍ나복(蘿葍)이라고도 한다. ○ 11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26리이다. ○ 수촌(水村)은 폐현(廢縣)이고, 압곡(鴨谷)도 폐현이다.
○ 화순(和順) : 백제 때의 잉리아현(仍利阿縣)이니, 신라 때 여미(汝湄)로 고쳤는데, 여빈(汝濱)이라고도 한다. 고려 때 화순으로 고쳤고, 뒤에 남평(南平)을 겸해서 맡겼다. 태조 갑술년에 나누어서 두 현을 만들었고, 태종 때 동복(同福)과 합쳤다가 다시 동복은 분리하고 능성(綾城)과 합하여 순성(順城)이라 일컬었는데, 얼마 후에 이전대로 하였다. 선조 갑오년에 폐하였다가 광해군 신해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 해빈(海濱)ㆍ오성(烏城)ㆍ산양(山陽)이라고도 한다. ○ 3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53리이다.
○ 흥양(興陽) : 본래 장흥부(長興府) 고이부곡(高伊部曲) 방언(方言)으로는 묘(猫)라 한다. 이니, 고려 때 고흥현(高興縣)으로 승격시켰고, 태조 을해년에 왜구의 침입으로 인하여 진을 설치하였다. 세종 때에 첨사(僉使)로 고쳤으나 곧 흥양현으로 고쳤다. ○ 고양(高陽)이라고도 한다. 13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8백 96리이다.○ 남양(南陽)은 폐현이다. 백제 때의 조조례현(助助禮縣)이니, 신라 때 충렬(忠烈)로 고쳤다. 태강(泰江)도 폐현이다. 백제 때의 비사현(比史縣)이니, 신라 때 백주(柏舟)로 고쳤다. ○ 풍안(豐安)도 폐현이다. 보성군 식촌부곡(食村部曲)이니, 고려 충선왕 때에 현으로 승격시켰다. 도화(道化)도 폐현이다. 보성군 타주부곡(他州部曲)이다. 두원(荳原)도 폐현이다. 백제 때 두혜현(豆盻縣)이니, 신라 때 강원(薑原)으로 고쳤다. 도양(道陽)도 폐현이다. 장흥부 도량도부곡(道良道部曲)이니, 세종조 때 병합하여 목장을 만들었다. 고흥(高興)도 폐현이다. 묘부곡(猫部曲)이니 고려 때 묘부곡 사람이 조정에 벼슬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참언이 있었다.
○ 우도 전주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완산(完山)이니, 비사성(比斯城) 혹은 비자화(比自火)라고도 한다. 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 완산주를 두었고, 뒤에 전주로 고쳤다. 견훤이 도읍을 세우고 후백제라고 일컬었다. 고려 태조가 신검(神劍)을 쳐서 평정한 후에 안남(安南)으로 고쳤다.뒤에 또 승화(承化)라 부르고 순의군(順義軍)이라고도 하였다. 태조 임신년에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승격시켰고, 태종 계미년(1403, 태종 3)에 전주 부윤으로 고쳤다. ○ 진성(甄城)이라고도 한다. ○ 3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5백 16리이다. ○ 우주(紆州)는 폐현이다. 백제 때의 우소저현(于召渚縣)이다. 이성(伊城)은 폐현이다. 백제 때의 두이현(豆伊縣)이니, 왕무(往武)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에 두성(杜城)으로 고쳤다. 이성(利城)은 폐현이다. 백제 때 내리아현(乃利阿縣)이다.
○ 나주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발라군(發羅郡)이니, 통의(通義)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 금산군(錦山郡)으로 고쳤다. 금성이라고도 한다. 고려 태조가 수군을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여 점령하고, 나주로 고쳤으며, 뒤에 진해군(鎭海軍)이라 일컬었고, 목(牧)으로 승격시켰다. ○ 3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가 7백 42리이다.○ 영산(榮山)은 폐현이다. 흑산도 사람이 육지로 나와 남포(南浦)에 살아서 영산현(榮山縣)이라 일컬었는데, 공민왕이 승격시켜 군을 만들었다. 압해(壓海)는 폐현이다. 압해(狎海)라고도 하는데 바다 가운데의 섬이다. 백제 때의 아차산군(阿次山郡)이다. 여황(艅艎)은 폐현이다. 백제 때의 수천현(水川縣)이니, 수입이(水入伊)라고도 한다. 회진(會津)은 폐현이다. 백제 때의 두혜현(豆盻縣)이다. 안로(安老)도 폐현이다. 백제 때의 아로곡현(阿老谷縣)이니, 신라 때 야로(野老)로 고쳤다. 복룡(伏龍)은 폐현이다. 배룡(杯龍)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 용산(龍山)으로 고쳤다. 반남(潘南)은 폐현이다. 백제 때의 반내부리현(半奈夫里縣)이다. 장산(長山)은 폐현이다. 안릉(安陵)이라고도 하는데 바다 가운데의 섬이다. 백제 때의 거지산현(居知山縣)인데, 신라 때 안파(安波)로 고쳤다.
○ 제주 : 성이 있다. 본래 탐라국이니, 혹은 탁라(乇羅)라고도 한다. 신라 때의 이름은 성주(星州)라고 하는데, 고려 때 고쳐서 군을 만들었다가 현으로 낮추었다. 충렬왕 때에 원(元) 나라에서 말을 기르는 목장을 만들었으나 조금 후에 도로 고쳐서 제주목(濟州牧)으로 하였다. 태종 임오년에 좌우도지관(左右都知管)을 두었고, 세종 을축년에 상부진무(上副鎭撫)로 고쳤으며, 세조 병술년에 절제사를 두었고, 예종 기축년에 목사(牧使)로 고쳤다.○ 탐탁라(眈乇羅)ㆍ동영주(東瀛州)라고도 한다. ○ 10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육로(陸路)로 9백 36리이고, 수로(水路)로 9백 70리이다. ○ 고내현(高內縣)ㆍ애월현(涯月縣)ㆍ곽지현(郭支縣)ㆍ귀덕현(歸德縣)ㆍ명월현(明月縣)ㆍ신촌현(新村縣)ㆍ함덕현(咸德縣)ㆍ금령현(金寧縣) 이상의 각현(各縣)은 모두 직촌(直村)이다.
○ 광주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무진주(武珍州)이니, 노지(奴只)라고도 한다. 신라 때 무주(武州)로 고쳤고, 고려 태조가 광주로 고쳤으며, 뒤에 해양현(海陽縣)으로 낮추었다가 다시 익주(翼州)로 승격시켰다. 또 화평부(化平府)로 낮추었다가 무진부(茂珍府) 혜종(惠宗)의 휘(諱)는 무(武)이다. 로 고쳤고, 뒤에 광주라 일컬었다. 세종 경술년에 무진군으로 낮추었고, 문종 신미년에 이전대로 하였으며, 성종 기유년에 낮추어 광산현(光山縣)을 만들었다가 연산군 신유년에 이전대로 하였다. ○ 익양(翼陽)ㆍ서석(瑞石)이라고도 한다. ○ 40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25리이다.
○ 여산(礪山) : 여량현(礪良縣) 또는 양(陽)이라 한다. 은 백제 때의 지량초현(只良肖縣)이니, 신라 때 여량(礪良)으로 고쳤고, 고려 때 전주에 예속시키고 낭산(朗山)까지 겸하여 맡았다. 낭산현은 백제 때의 알야산현(閼也山縣)이니, 신라 때 야산(野山)으로 고쳤다. 정종 경진년에 2현의 이름을 떼어다가 여산이라고 일컬었다.세종 병진년(1436, 세종 18)에 군으로 승격시켰고 원경왕후(元敬王后)의 외향(外鄕)이다. 충청도로 이속되었다가 조금 후에 도로 전라도에 속했으며, 숙종 기묘년에 부사로 승격시켰다. ○ 호산(壺山)이라고도 한다. ○ 11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36리이다. ○ 낭산(朗山)은 폐현이다. 군(郡) 서쪽 토성(土城)의 옛터이다.
○ 장성 : 백제 때의 고시이현(古尸伊縣)이니, 신라 때 압성군(押城郡)으로 고쳤고, 고려 때 장성으로 고쳤으며, 본조에서 현으로 고쳤다. 선조 정유년에 진원(珍原)과 합쳤고, 효종 을미년(1655, 효종 6)에 부로 승격시켰다. ○ 오산(鰲山)ㆍ이성(伊城)이라고도 한다. ○ 15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66리이다. ○ 진원(珍原)은 폐현이다. 백제 때의 구사진혜현(丘斯珍兮縣)이니, 신라 때 진원(珍原)으로 고쳤는데, 구진(丘珍)이라고도 한다.
○ 익산 : 본래 마한국(馬韓國)이니, 온조왕(溫祚王)이 땅을 병합해서 이름을 금마저(金馬渚)라 하였고, 신라 때 금마군(金馬郡)으로 고쳤다. 고려 때 익주(益州)로 승격시켰으며, 태종 계사년에 익산군으로 고쳤다. ○ 10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56리이다.
○ 고부(古阜)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고사부리현(古沙夫里縣)이니, 신라 때 고부로 고쳤고, 고려 태조 때 영주(瀛州)라 일컬었다. 뒤에 안남(安南)으로 고쳐서 영광과 합쳤다가 조금 후에 다시 이전대로 하였다. ○ 1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가 6백 6리이다.
○ 영암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월내군(月奈郡)이니, 신라 때 영암으로 고쳤고, 고려 때 낭주(郞州)ㆍ안남(安南)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낮추었다. ○ 낭산(郞山)이라고도 한다. ○ 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8백 22리이다. ○ 곤미(昆湄)는 폐현이다. 백제 때의 고미현(古彌縣)이다.
○ 영광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무시이부(武尸伊部)이니, 신라 때 무령(武靈)으로 고쳤고, 고려 때 영광으로 고쳤다. ○ 오성(筽城)ㆍ정주(靜州)라고도 한다. ○ 2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99리이다. ○ 삼계(森溪)는 폐현이며, 백제 때의 소비혜현(所非兮縣)이니, 소을부(所乙夫)라고도 한다. 임치(臨淄)도 폐현이다. 백제 때의 고록지현(古祿只縣)이니, 신라 때 염해(鹽海)로 고쳤다. 육창향(陸昌鄕) 백제 때의 아로현(阿老縣)이니, 갈초(葛草)ㆍ가위(加位)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 갈도현(碣島縣)으로 고쳤다.
○ 진도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인진도군(因珍島郡)이니, 신라 때 진도로 고쳤다. 태종 기축년에 해남현과 합하여 해진군(海珍郡)으로 하였다가 세종조에 이전대로 하였다. ○ 옥주(沃州)라고도 한다. ○ 13면, 서울과의 거리는 1천 20리이다. ○ 가흥현(嘉興縣) 백제 때의 도산현(徒山縣)이니 원산(猿山)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뇌산(牢山)이라고 고쳤다. 이 있다. 임회(臨淮)는 폐현이다. 백제 때 여기에 구리현(九里縣)을 두었고 신라 때 첨탐(瞻眈)으로 고쳤다.
○ 금산(錦山) :백제 때의 진내군(進乃郡) 진잉을(進仍乙)이라고도 한다. 이니 신라 때 진례(進禮)로 고쳤고, 고려 때 금주(錦州)로 올렸다. 태종 계사년에 금산군으로 고쳤다. ○ 경양(景陽)ㆍ금계(錦溪)라고도 부른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86리이다. ○ 부리(富利)는 폐현이다. 백제 때의 두시이현(豆尸伊縣)ㆍ부시이(富尸伊)라고도 한다. 신라 때 이성(伊城)으로 고쳤다.
○ 진산(珍山) : 백제 때의 진동현(珍同縣)이니 신라 때에도 그대로다. 태조 때 진주로 승격시켰고 왕실의 탯줄을 안치하였다. 태종 때에 진산군으로 고쳤다. ○ 옥계(玉溪)라고도 부른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56리이다.
○ 김제(金堤) : 백제 때의 벽골군(碧骨郡)이니 신라 때 김제라고 고쳤다. 고려 때 현으로 하였으나 태종 계미년에 군으로 승격시켰다. ○ 23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41리이다. ○ 회원고현(會原古縣)이라고도 부른다. ○ 평고(平皐)는 폐현이다. 백제 때의 수동산현(首冬山縣)이다.
○ 임피(臨陂)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시산군(屎山郡)이니 피산(陂山)ㆍ흔문(忻文)ㆍ소도(所島)ㆍ실조출(失鳥出)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임피라고 고쳤다. 고려 때 군을 현으로 낮추었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96리이다.
○ 만경(萬頃)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두내산현(豆乃山縣)을 만경으로 고쳤다. 광해군 경신년에 고을을 없앴다가 인조 정축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 두산(杜山)이라고도 부른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16리이다. ○ 부윤(富潤)은 폐현이다. 백제 때의 무근촌현(武斤村縣)이니, 신라 때 무읍(武邑)으로 고쳤다.
○ 금구(金溝) : 백제 때의 구지지산현(仇知只山縣)이니, 신라 때 금구라고 고쳤다. ○ 봉산(鳳山)ㆍ금계(金鷄)라고도 부른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26리이다. ○ 거야(巨野)는 폐현이다. 백제 때의 야서이현(也西伊縣)이니, 신라 때 야서(野西)로 고쳤다. 역양(櫟陽)도 폐현이다.
○ 용안(龍安) : 고려 때 함열현(咸悅縣)의 도내산은소(道乃山銀所) 창산소(蒼山所)라고도 한다. 이니 충숙왕(忠肅王)이 용안현으로 승격시켰다. 태종 기축년(1409, 태종 9)에 함열과 합하여 안열(安悅)이라고 부르다가 병신년에 이전대로 회복시켰다. ○ 칠성(七城)이라고도 부른다. ○ 3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48리이다. ○ 풍제(豐堤)는 폐현이다. 풍성(豐城)이라고도 한다. 공양왕 때에 속현이 되었다.
○ 함열(咸悅) : 백제 때의 감물아현(甘勿阿縣)이니, 신라 때 함열로 고쳤다. 태종 기축년에 용안(龍安)과 합하였다가 곧 다시 이전대로 고쳤다. ○ 함라(咸羅)라고도 부른다. 9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66리이다.
○ 부안(扶安) : 성이 있다. 부령현(扶寧縣)은 백제 때의 개화현(皆火縣)이니 신라 때 부령(扶寧)으로 고쳤다. 혹은 계발(戒發)이라고도 일컬었다. 보안현(保安縣)은 백제 때의 흠량매현(欽良買縣)이니, 신라 때 희안(喜安)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이 두 고을을 나누기도 하고 합하기도 하였다.태종 병신년(1416, 태종 16)에 합하여 부안현으로 하였으며, 다음해에 부안현을 폐지하고 흥덕진(興德鎭)으로 옮겼으며, 부안진(扶安鎭)을 설치하였다가 뒤에 현감으로 고쳤다. ○ 낭주(浪州)라고도 부른다. ○ 20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77리이다. ○ 보안(保安)은 폐현이다. 현의 남쪽 30리의 거리에 있다.
○ 함평(咸平) : 함풍현(咸豐縣)은 백제 때의 굴내현(屈乃縣)이니 신라 때 함풍으로 고쳤다. 모평현(牟平縣)은 백제 때의 다지현(多只縣)이니 신라 때 다기(多岐)로 고쳤다. 태종 기축년에 두 현을 합하여 함평현으로 하였다. ○ 모양(牟陽)ㆍ기성(箕城)이라고도 부른다. ○ 4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62리이다. ○ 해제(海際)는 폐현이다. 백제 때의 도제현(道際縣)이니 음해(陰海)ㆍ운화(云火)라고도 한다.
○ 고산(高山) : 백제 때의 고산현(高山縣)이니 또는 난등량(難等良)이라고도 한다. ○ 봉산(鳳山)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76리이다. ○ 운제(雲梯)는 폐현이다. 또는 운산(雲山)이라고도 한다. 백제 때의 지벌지현(只伐只縣)이다.
○ 태인(泰仁) : 태산군(太山郡)은 백제 때의 대시산군(大尸山郡)이니, 신라 때 태산(太山)으로 고쳤다. 인의현(仁義縣)은 백제 때 빈굴현(賓屈縣)이니 부성(賦城)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무성(武城)으로 고쳤다. 태종 기축년에 두 고을을 합하여 태인현으로 하였다. ○ 19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63리이다. ○ 인의(仁義)는 폐현이다.
○ 옥구(沃溝)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마서량현(馬西良縣)이니 신라 때 옥구로 고쳤다. 태조 때 진을 두었고 세종 계묘년에 현으로 고쳤다. ○ 옥산(玉山)이라고도 부른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23리이다. ○ 회미(澮尾)는 폐현이다. 일명 연강(連江)이라고도 한다. 백제 때의 시부리현(矢夫里縣)이다.
○ 남평(南平) : 백제 때의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이니, 신라 때 현웅(玄雄)으로 고쳤고, 고려 때 남평(南平)으로 고쳤다. ○ 오산(烏山)ㆍ영평(永平)이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46리이다. ○ 철야(鐵冶)는 폐현이다. 백제 때의 실어산현(實於山縣)이다.
○ 흥덕(興德) : 백제 때의 상칠현(上漆縣)이니, 신라 때 상질(尙質)로 고쳤고, 고려 때는 장덕(章德) 창덕(昌德)이라고도 한다. 으로 하였다가, 흥덕으로 고쳤다. ○ 흥성(興城)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36리이다.
○ 정읍 : 백제 때의 정촌현(井村縣)이니, 신라 때 정읍으로 고쳤다. ○ 정촌(井村)ㆍ초산(楚山)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91리이다.
○ 고창(高敞)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모량부리현(毛良夫里縣)이니 신라 때 고창으로 고쳤다. ○ 모양(牟陽)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28리이다.
○ 무장(茂長) : 무송현(茂松縣)이니 백제 때의 송미지현(松彌知縣)이며, 신라 때 무송으로 고쳤다. 장사현(長沙縣)은 백제 때의 상로현(上老縣)이니 신라 때 장사로 고쳤다. 태종 정유년(1417, 태종 17)에 두 고을을 합하여 무장진을 두었다가 뒤에 고쳐서 현으로 하였다. ○ 송산(松山)ㆍ사도(沙島)라고도 한다. ○ 16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76리이다.
○ 무안 : 백제 때의 물아혜군(勿阿兮郡)이니, 신라 때 무안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 물량(勿良)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무안이라 고치고 현으로 하였다. ○ 면주(緜州)라고도 한다. ○ 13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96리이다.
○ 해남 : 백제 때의 새금현(塞琴縣)이니, 신라 때 침명(浸溟)으로 고쳤는데 투빈(投濱)이라고도 한다. 고려 때 해남으로 고쳤다. 태종 기축년에 진도(珍島)와 합하여 해진(海珍)이라고 하였다가 세종 정미년에 다시 이전대로 하였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96리이다.
○ 정의(旌義) : 본래는 제주의 동도(東道)인데, 태종 병신년에 제주 안무사(濟州按撫使) 오식(吳湜)의 건의를 받아들여 한라산 남쪽의 넓이 90여 리의 땅을 나누어 동쪽을 정의, 서쪽을 대정(大靜)이라고 하여 현을 두었다. ○ 3면, 제주와의 거리는 1백 30리이다. ○ 토산현(兎山縣)ㆍ호아현(狐兒縣)ㆍ홍로현(洪爐縣)이라고도 한다.
○ 대정(大靜) : 본래 제주의 서도(西道)이다. ○ 4면, 제주와의 거리는 백 40리이다. ○ 예래현(猊來縣)이라고도 한다.
○ 경상도 동북은 강원도 경계와 바다이고, 동남과 남은 모두 바다이며, 서남은 바다와 전라도 경계이고, 서쪽은 전라도 경계, 서북쪽은 충청도 경계, 북쪽이 강원도 경계다. 71고을 좌도 40고을, 우도 31고을 본래 진국(辰國)의 땅으로 북쪽은 진한(辰韓)이 되고 남쪽은 변한(卞韓)이 되었었다.신라가 그 땅을 모두 차지하고, 통합한 뒤에 상주ㆍ양주(良州)ㆍ강주(康州)의 3주(州)를 두었다. 말기에는 궁예와 견훤이 상주와 양주 두 고을을 나누어 점거하였다. 고려 태조는 여기에 동남도(東南道)를 두고 관사를 경주에 두었다. 성종 때는 영남도ㆍ영동도(嶺東道)ㆍ산남도(山南道)의 3도로 나누었으며, 예종 때는 경상진주도(慶尙晉州道)라고 하였고, 명종 때는 경상주도(慶尙州道)와 진합주도(晉陜州道)로 나누었으며, 신종(神宗) 때는 상진안동도(尙晉安東道)라고 고쳤다가 또 경상진안도(慶尙晉安道)로 고쳤다. 고종 때 명주도(溟州道)의 화주(和州)ㆍ등주(登州)ㆍ정주(定州)ㆍ장주(長州)의 네 주를 몽고에게 빼앗겼으므로 본도의 평해(平海)ㆍ영덕(盈德)ㆍ덕원(德原)ㆍ송생(松生)을 떼내어 명주도에 예속시켰고, 충렬왕은 또 덕원ㆍ영덕ㆍ송생을 옮겨 동계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본도로 돌려주었다. 충숙왕(忠肅王)이 경상도라고 정하였고, 본조에서 이를 그대로 수용하였다. 태종 계사년에 옥천(沃川)ㆍ영동(永同)ㆍ황간(黃澗)ㆍ보은ㆍ청산(靑山)을 충청도에 이속시켰다.
○ 좌도 경주 : 성(城)이 있다. 신라의 옛 수도이다. 국호를 서야벌(徐耶伐) 혹은 사라(斯羅)라고 부르고, 또 사로(斯盧)라고도 일컬었다. 뒤에 신라라고 일컬었고, 탈해왕(脫解王) 때에는 다시 계림(鷄林)이라고 이름하였다. 고려 태조 때, 신라가 없어지면서 경주로 되었다. 뒤에 동경유수라고 고쳤으며, 또 계림부라고 고쳤다. 태종 때에 다시 경주라고 불렀다. ○ 진한(辰韓)ㆍ낙랑(樂浪)ㆍ월성(月城)ㆍ금오(金鰲)ㆍ문천(蚊川)이라고도 한다. ○ 18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80리이다. ○ 안강현(安康縣)은 속현이다. 신라 때의 비화현(比火縣)이다. 기계현(杞溪縣)이 있고, 신라 때의 모혜현(芼兮縣)이니 화계(化鷄)라고도 한다. 자인(慈仁)은 폐현이다. 현재 다시 현을 두었다. 다음에 나온다. 신광현(神光縣) 신라 때의 동잉음현(東仍音縣)이니, 신을(神乙)이라고도 한다. 뒤에 이어진(眤於鎭)ㆍ신광진(神光鎭)이라고 일컬었다.ㆍ진량현(珍良縣) 신라 때의 진량현이니 여량(餘粮)이라고 고쳤다가 뒤에 구사부곡(仇史部曲)으로 강등시켰다.ㆍ장진현(長鎭縣)이 있다. 신라 때의 장진현이니 고려 때 죽장부곡(竹長部曲)으로 낮추었다.
○ 안동 : 성이 있다. 신라 때는 고타야군(古陁耶郡)이라 하다가 고창(古昌)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가 안동부로 승격시켰다가 뒤에 영가군(永嘉郡)으로 고치고, 길주(吉州)ㆍ복주(福州)로 고쳤으며, 다시 안동부로 승격시켰다. ○ 능라(綾羅)ㆍ지평(地平)ㆍ석릉(石陵)ㆍ일계(一界)ㆍ화산(花山)ㆍ고장(古藏)ㆍ창녕(昌寧) 옛 창녕국ㆍ고령(古寧)이라고도 한다. ○ 24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14리이다. ○ 임하현(臨河縣)은 속현이다. 고구려 때의 굴화군(屈火郡)이니 신라 때 곡성(曲城)이라 고쳤다. 풍산현(豐山縣) 신라 때의 하지현(下枝縣)이니, 영안(永安)으로 고쳤으며, 순주(順州)로 승격시켰다가 뒤에 현으로 낮추었다. 신라 때에는 예천에 예속되었다.ㆍ일직현(一直縣) 신라 때의 일직현인데 뒤에 직녕(直寧)으로 고쳤다. 도 속현이고, 감천현(甘泉縣)ㆍ길안현(吉安縣) 원래는 부곡이다.ㆍ내성현(奈城縣) 퇴곶부곡(退串部曲)인데 고려 때 현으로 승격시켰다.ㆍ춘양현(春陽縣) 가야향(加也鄕)인데 고려 때 현으로 올렸다.ㆍ재산현(才山縣) 덕산부곡(德山部曲)인데 고려 때 현으로 올렸다.ㆍ일계현(日谿縣)이 있다. 본래는 열혜현(熱兮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 영해(寧海) : 고구려 때의 우시군(于尸郡)이니 신라 때에 유린(有隣)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예주(禮州)로 고쳤으며 덕원부(德原府)로 올렸다가 영해부로 고쳤다. ○ 덕원(德原)이라고도 한다. ○ 4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45리이다. ○ 청기(靑杞)는 속현이다. 대청부곡(大淸部曲)이니, 예전에는 청도현(靑島縣)에 예속되었다. 고려 때 청기현(靑杞縣)을 두었다. 다른 이름으로 청계(靑溪)라고도 한다.
○ 밀양 : 성이 있다. 신라 때의 추화군(推火郡)인데 밀성(密城)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밀주(密州)로 고쳤다가 귀화부곡(歸化部曲)으로 낮추어 계림에 예속시켰으며, 뒤에 밀성현이라고 하다가 밀양부로 고쳤다. 태조 때에 도로 밀성군으로 하였다가 뒤에 밀양부로 올렸다. 태종 때에 군(郡)으로 낮추었다가 곧 다시 올렸다.○ 응천(凝川)ㆍ밀산(密山)이라고도 한다. ○ 16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12리이다. ○ 수산현(守山縣)은 속현이다. 천산부곡(穿山部曲)인데 고려 때 현으로 올렸다. 풍각현(豐角縣)이 있다. 상화촌현(上火村縣)이니, 다른 이름은 유산(幽山)이다. 중종 무인년에 현으로 낮추고 부(府)의 땅을 나누어 청도(淸道)ㆍ경산(慶山)ㆍ영산(靈山)ㆍ현풍(玄風)에 예속시켰다. 밀양부의 사람이 그의 아비를 죽인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임오년에 도로 이전대로 하였다. ○ 밀진현(密津縣) 죽산(竹山)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이 있다. ○ 신라에서는 불[火] 자를 넣은 고을 이름이 많다. 불[火]자는 곧 불(佛)의 전음(轉音)이요, 불(佛)은 곧 벌(伐)의 전음이다. 방언에 들판을 벌이라고 한다.
○ 청송(靑松) : 고구려 때의 청기현(靑己縣)이니, 신라 때에 적선(積善)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는 부이(鳧伊)라고 하였고, 또 운봉(雲鳳)으로 고쳤다가 청부(靑鳧)로 고쳤다. 태조 갑술년에 진보현(眞寶縣)과 합하였고, 세종 기해년(1419, 세종1)에는 청보군(靑寶郡)으로 올렸다. 소헌왕후(昭憲王后)의 고향이다. 뒤에 진보(眞寶)를 떼내고 송생현(松生縣)과 합하여 청송이라 고쳤으며, 세조 때에 부(府)로 올렸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30리이다. ○ 안덕(安德)은 속현이고 고구려 때의 이화혜현(伊火兮縣)이니, 신라에서 연무(緣武)라고 고쳤다. 송생(松生)은 폐현이다.
○ 대구 : 성이 있다. 신라 때의 달구화현(達句火縣)이니 달불성(達弗城)이라고도 하다가 대구로 고쳤다. 세종 때에 군으로 올렸고, 세조 때에 부로 올렸다. ○ 달성(達城)이라고도 한다. ○ 33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70리이다. ○ 수성현(壽城縣)은 속현이다. 계화군(界火郡)인데 상촌창군(上村昌郡)이라고도 한다. 수창군(壽昌郡)으로 고쳤다. 가창(嘉昌)이라고도 한다. 해안현(解顔縣) 치성화현(雉省火縣)인데 미리(美里)라고도 한다.ㆍ하빈현(河濱縣) 다사지현(多斯知縣)인데 답지(沓只)라고도 한다. 이 있다.
○ 울산 : 신라 때의 굴아화촌(屈阿火村)이니, 뒤에 현을 두고 이름을 하곡(河曲) 하서(河西)라고도 한다. 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가 흥려부(興麗府)로 올렸다가, 뒤에 공화현(恭化縣)으로 낮추고, 울주(蔚州)로 고쳤다. 태조 때에 진을 두었고, 태종 계사년에 울산군으로 고쳤다. 세종 정사년에 부(府)로 올렸다가 도로 낮추었으며, 선조 무술년에 다시 부로 올렸다.○ 학성(鶴城)ㆍ개지변(皆知邊)ㆍ화성(火城)이라고도 한다. ○ 11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50리이다. ○ 우풍(虞風)은 고현(古縣)이다. 우화(亏火)는 우불(于佛)이 바뀐 말이다. 경덕왕(景德王)이 현으로 고쳐서 안동에 예속시켰다. 동진(東津) 율포현(栗浦縣) 도 고현이다.
○ 동래(東萊) : 성이 있다. 옛날의 장산국(萇山國) 내산(萊山)이라고도 한다. 인데, 신라가 차지하여 거칠산군(居漆山郡)을 두었다가 동래로 고쳤다. 태조 때에 진을 두었고, 세종 때에 첨사(僉使)를 두었다가 뒤에 현령으로 고쳤다. 명종 정미년에 부로 올렸다. 선조 때 현으로 낮추었다가 곧 다시 올렸으며, 임진년에 또 낮추었다가 기해년에 다시 올렸다.○ 봉래(蓬萊)ㆍ봉산(蓬山)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9백 62리이다. ○ 동평(東平)은 속현이다. 신라 때의 대증현(大甑縣)이다.
○ 인동(仁同) : 신라 때의 사동화현(斯同火縣)인데, 인동으로 고쳤다. 선조 갑진년에 부로 올렸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리이다. ○ 수동(壽同)ㆍ옥산(玉山)이라고도 한다. 약목현(若木縣)은 속현이고, 신라 때의 대목현(大木縣)이니, 칠촌(七村) 또는 곤산(昆山)이라고도 한다. 계자현(谿子縣)이라고 고쳤다. 소목현(小木縣)이 있다. 견훤이 벽진(碧珍)을 침공할 때, 대목ㆍ소목 두 고을의 곡식을 베어 버렸다고 하였는데 지금 어디인지 상세하지 않다.
○ 순흥(順興) : 성이 있다. 고구려 때의 급벌산군(及伐山郡)이니, 신라 때에 급산(岌山)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흥주(興州)로 고쳤다가 순정(順政)으로 고쳤다. 뒤에 순안(順安)에 이속되었다. 흥녕현(興寧縣)으로 고치고 흥주(興州)라고 올렸으며 또 순흥부로 고쳤다.세조 정축년에 고을을 폐지하여 마아령(馬兒嶺)의 물 동쪽 땅은 영주(榮州)에 예속시키고, 문수산(文殊山)의 물 동쪽 땅은 봉화(奉化)에 예속시켰다. 풍기(豐基)에 예속시켰다가 숙종 계해년에 이전대로 하였다. ○ 13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47리이다. ○《여지승람》에는 풍기군의 폐촌에 들어 있다.
○ 칠곡(漆谷) : 성이 있다. 신라 때의 팔거현(八居縣)이니, 인리(仁里)라고도 하다가 팔리(八里)로 고쳤다. 고려 때에 다시 팔거(八居)라고 일컬었는데 바뀌어 팔거(八莒)가 되었다. 칠곡(七谷)이라고도 한다. 뒤에 성주(星州)에 예속되었다. 인조 경진년에 비로소 부를 두었다. ○ 가산(架山)이라고도 한다. ○ 10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70리이다. ○ 《동국여지승람》에는 팔거는 성주(星州)의 속현이라 하였다.
○ 청도(淸道) : 성이 있다. 이서소국(伊西小國)인데 신라가 벌취(伐取)하고 구도성(仇刀城)의 경내에 있는 솔이산(率伊山)ㆍ경산(驚山) 가산(笳山)이라고도 한다.ㆍ오도산(烏刀山) 등의 3성(城) 3성은 신라 때 밀성(密城)에 속해 있었다. 을 합하여 대성군(大城郡)을 두었다. 경덕왕 때, 구도는 오악현(烏岳縣)이라 고쳤고, 경산은 형산현(荊山縣)으로, 솔이산은 소산현(蘇山縣)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3성을 합하여 청도군을 만들었다. ○ 도주(道州)ㆍ오산(鰲山)ㆍ마악(馬岳)이라고도 한다. ○ 13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42리이다.
○ 영천(永川) : 신라 때에 절야화군(切也火郡)이라고 하다가 임고(臨皐)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도동(道同)과 임천(臨川)의 두 현을 합하여 영주(永州)로 고쳤는데 고울부(高鬱府)라고도 일컬었다. 태종 계사년(1413, 태종 13)에 영천군으로 고쳤다.○ 익양(益陽)ㆍ영양(永陽)이라고도 한다. ○ 20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87리이다. ○ 도동(道同)은 폐현이며, 신라 때의 도동대현(刀冬大縣)이다. 임천도 폐현이다. 골화소국(骨火小國)이니 신라 때에 현을 두었다.
○ 영천(榮川) : 고구려 때의 내기군(奈己郡) 혹은 내기(己)로 쓴다. 이니, 신라 때에 내령(奈靈)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강주(剛州)로 고쳤다가 순안현(順安縣)이라 고쳤으며, 영주(榮州)로 올렸다. 태종 계사년(1413, 태종13)에 영천군으로 고쳤다.○ 구성(龜城)이라고도 한다. ○ 13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70리이다. ○ 선곡현(善谷縣)이 있다. 고구려 때의 고곡현(賈谷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 예천(醴泉) : 신라 때에 수주현(水酒縣)이라 하다가 예천군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보주 (甫州)로 고쳤다가 기양현(基陽縣)으로 고쳤다. 태종 계사년에 보주군으로 고쳤다가 곧 다시 예천이라고 하였다. ○ 청하(淸河)ㆍ양양(襄陽)이라고도 한다. ○ 23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98리이다.○ 다인(多仁)은 속현이며, 신라 때의 달기현(達己縣)이니 혹은 다기(多己)라고도 한다. 용궁(龍宮)의 동촌(東村) 너머[越]에 있다. 인양(仁陽)이라고도 한다.신라 때는 상주에 속하였다. 안인(安仁)은 폐현이다. 난산현(蘭山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 흥해(興海) : 성이 있다. 신라 때에 퇴화군(退火郡)이라고 하다가 의창(義昌)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흥해로 고쳤다. ○ 미질부성(彌秩夫城)ㆍ곡강(曲江)ㆍ오산(鰲山)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26리이다.
○ 양산(梁山) : 성이 있다. 신라 때에 상주(上州)와 하주(下州)의 땅을 나누어서 삽량주(歃良州)를 두었다가 뒤에 양주(良州)로 고쳤다. 고려 태조가 양주(梁州)라고 고쳤으며 뒤에 밀성(密城)과 합하였다가 곧 다시 이전대로 하였다. 태종 때에 위산군(爲山郡)으로 고쳤고, 선조 임진년에 동래와 합쳤다가 갑진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90리이다.
○ 풍기(豐基) : 신라 때의 기목진(基木鎭)이다. 고려 초기에는 기주(基州)라고 일컬었으며, 뒤에 은풍(殷豐)을 예속시키고 기천현(基川縣)으로 고쳤다. 문종 때에 풍기군으로 올렸다. 은풍에 태실(胎室)을 봉안하였기 때문이다.○ 영정(永定)ㆍ안정(安定)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40리이다. ○ 은풍현은 속현이며, 신라 때에 적아현(赤牙縣)이라 하다가 은정(殷正)이라고 고쳤다. 다른 이름은 은산(殷山)이다. 인풍현(鄰豐縣)이 있다. 고구려 때의 이벌지현(伊伐支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 경산(慶山) : 성이 있다. 압량소국(押梁小國)이니, 압독(押督)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 군을 두었는데, 뒤에 장산(獐山)으로 고쳤다. 고구려 초기에 장산(章山)으로 고쳤다가 경산으로 고쳤다. 태조 때에 현으로 낮추었고, 선조 신축년에 폐읍하였다가 정미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 옥산(玉山)이라고도 한다. ○ 5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10리이다. ○ 신라 때에 고포성(古浦城)ㆍ금성(金城)ㆍ우곡성(亏谷城)의 3성을 합하여 압량군(押梁郡)으로 하였다.
○ 의성(義城) : 소문국(召文國)이었는데, 신라가 차지하여 문소군(聞韶郡)으로 만들었다. 고려 초기에 의성부로 고쳤다가 뒤에 곧 다시 현으로 낮추었다. 또 대구와 합하였다가 곧 다시 이전대로 회복시켰다. 19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90리이다. ○ 고구(高丘)는 고현(古縣)이다. 신라 때에 구화현(仇火縣)을 고쳐서 고구로 하였다. 혹은 고근(高近)이라고도 한다.
○ 영덕(盈德) : 성이 있다. 고구려 때의 야시홀군(也尸忽郡)이니, 신라 때에 야성(野城)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영덕현으로 고쳤다. ○ 5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4리이다.
○ 하양(河陽) : 고려 때에 하주(河州)라 하다가 뒤에 하양현으로 고쳤다. ○ 화성(花城)이라고도 한다. 선조 신축년에 고을을 폐지하였다가 정미년에 다시 두었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42리이다.
○ 용궁(龍宮) : 신라 때의 축산(竺山)이니, 원산(園山)이라고도 한다. 고려 때 용주(龍州)로 승격시켰다가 또 용궁현으로 고쳤다. ○ 10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44리이다.
○ 봉화 : 고구려 때의 고사마현(古斯馬縣)이니, 신라 때에 옥마(玉馬)로 고쳤고, 고려 때는 봉화로 고쳤다. ○ 10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20리이다. ○ 봉성(鳳城)이라고도 한다.
○ 청하(淸河) : 성이 있다. 고구려 때의 아혜현(阿兮縣)이니, 신라 때에 해아(海阿)로 고쳤고, 고려 때에는 청하로 고쳤다가 뒤에 경주에 예속시켰다.태조 때에 비로소 현을 두었다. ○ 덕성(德城)이라고도 한다. ○ 5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41리이다.
○ 언양(彦陽) : 성이 있다. 신라 때에 거지화현(居知火縣)이라 하다가 헌양(巘陽)으로 고쳤고, 고려 때에 언양으로 고쳤다. 헌산(巘山)이라고도 한다. 선조 기해년에 고을을 폐지하였다가 광해군 임자년(1612, 광해군 4)에 이전대로 하였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47리이다.
○ 진보(眞寶) : 칠파화현(漆巴火縣)을 신라 때에 진보로 고쳤고, 조람현(助攬縣)은 진안(眞安)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두 고을을 합하여 남성부(南城府)를 두었는데, 재암성(載巖城)이라고도 한다.태조 때에 보성현(甫城縣)을 두었고, 세종 때에 청부(靑鳧)에 합하여 청보(靑寶)라고 이름했다가 곧 폐지하고 진보현으로 고쳤다. 성종 때에 폐읍하였다가 지방 사람들의 진정에 의하여 다시 현을 두었다. ○ 재암(載巖)ㆍ진해(眞海)라고도 한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16리이다.
○ 현풍(玄風) : 신라 때에 추량화현(推良火縣)이라고 하다가 현효(玄驍)로 고쳤으며 고려 때 현풍으로 고쳤다. ○ 포산(苞山)ㆍ현풍(玄豐)이라고도 한다. ○ 17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80리이다. ○ 신라 때에는 지금의 창녕(昌寧)인 화왕군(火王郡)에 속하였다.
○ 군위(軍威) : 신라 때에 노동멱현(奴同覔縣)이라 하다가 군위로 고쳤다. ○ 적라(赤羅)라고도 한다. ○ 10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75리이다. ○ 효령(孝靈)은 속현이다. 효령(孝令)이라고 쓰기도 한다. 신라 때의 모혜현(芼兮縣)이다.
○ 비안(比安) : 신라 때의 아화옥현(阿火屋縣)이니, 또는 병옥(幷屋)이라고도 한다. 비옥(比屋)으로 고쳤으며, 뒤에 안정현(安貞縣)과 합하였다. 세종 신축년(1421, 세종 3)에 비안이라고 개칭하였다. ○ 병산(屛山)이라고도 한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38리이다. ○ 안정(安貞)은 속현이다. 신라 때 아시혜현(阿尸兮縣)이니 안현(安賢)이라 고쳤다. 세종 때에 안비(安比)라고 고쳤으며, 뒤에 고을의 관아를 비옥(比屋)으로 옮기고 비안이라고 개칭하였다.
○ 의흥(義興) : 고려 때의 의흥군이니, 뒤에 안동에 예속시켰다가 다시 현을 두었다. ○ 구산(龜山)ㆍ구성(龜城)이라고도 한다. ○ 11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26리이다. ○ 부계(缶溪)는 속현이다. 삼국 시대의 부림현(缶林縣)이다.
○ 신녕(新寧) : 신라 때에 사정화현(史丁火縣)이라 하다가 신녕으로 고쳤다. 연산군 정사년에 폐읍하였다. 현의 아전이 현감 길수(吉脩)의 엄격하고 사나운 것을 싫어하여, 고을을 비우고 도망한 일이 있었으므로, 폐읍하여 영천(永川)에 예속시키고, 땅을 분할하여 의성ㆍ하양(河陽)ㆍ의흥(義興)에 나누어 예속시켰다. 계해년에 다시 고을을 설치하였다. ○ 화산(花山)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50리이다. ○ 민백현(黽白縣)이 있다. 신라 때의 매열차현(買熱次縣)이니, 민백으로 고쳤다. 신녕과 합하였다. 이지(梨旨)는 폐현이다. 영주(永州)의 이지은소(梨旨銀所)이니, 고려 때에 현으로 하였고 태조 때 신녕(新寧)의 속현이 되었다.
○ 예안(禮安) : 고구려 때의 매곡현(買谷縣)이니, 신라 때 선곡(善谷)으로 고쳤으며, 고려 태조 때 예안군으로 고쳤다. 우왕(禑王) 때 주(州)로 승격시켰다가 왕실의 태(胎)를 간직해 두는 곳이기 때문이다. 곧 현으로 고쳤다. ○ 선성(宣城)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45리이다. ○ 의인(宜仁)은 폐현이다. 안덕현(安德縣)의 지도보부곡(知道保部曲)이다.
○ 장기(長鬐) : 성이 있다. 신라 때 지답현(只沓縣)이라고 하다가 기립(鬐立)으로 고쳤고, 고려 때 장기로 고쳤다. ○ 봉산(峯山)이라고도 한다. ○ 3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20리이다.
○ 영일(迎日) : 성이 있다. 신라 때의 근오지현(斤烏支縣)이니 오량우(烏良友)라고도 한다. 임정(臨汀)으로 고쳤으며 고려 때 영일로 고쳤다. 태종 때 진을 두었다가 세종 때 첨사로 고쳤고 뒤에 현감으로 고쳤다. ○ 오천(烏川)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80리이다.
○ 창녕(昌寧) : 신라 때의 비자화군(比自火郡)이니 비사벌(比斯伐)이라고도 한다. 뒤에 하주(下州)를 두었다가 곧 폐지하고 화왕군(火王郡)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가 창녕으로 고쳤고 뒤에 진(鎭)으로 삼았다. ○ 창산(昌山)ㆍ창성(昌城)ㆍ하성(夏城)ㆍ하산(夏山)이라고도 한다. ○ 13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20리이다.
○ 영산(靈山) : 신라 때 서화현(西火縣)이라고 하다가 상약(尙藥)으로 고쳤으며, 고려 때 영산으로 고쳤다. ○ 취산(鷲山)ㆍ취성(鷲城)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50리이다. ○ 계성(桂城)은 폐현이다.
○ 기장(機張) : 신라 때 갑화양곡현(甲火良谷縣)이라고 하다가 기장으로 고쳤다. ○ 거성(車城)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9백 40리이다. ○ 신라 때에는 동래에 속하였다.
○ 자인(慈仁) : 신라 때의 노사화현(奴斯火縣)이니 기화(其火)라고도 한다. 자인으로 고쳤고 경주에 예속시켰다. 인조 정축년에 비로소 현을 두었다. ○ 자주(慈州)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30리이다. ○ 《동국여지승람》에는 경주 조에 들어 있다.
○ 영양(英陽) : 고은현(古隱縣)이라고 하다가 뒤에 영양군으로 고쳤다. 연양(延陽)이라고도 쓴다. 고려 때는 예주(禮州)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현을 두었으며 다시 영해(寧海)에 예속시켰다. 숙종 병진년에 비로소 현을 설치하였다가 정사년에 도로 폐지하였고, 계해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50리이다. ○ 《동국여지승람》에는 영해 조에 들어 있다.
○ 우도 창원 : 성이 있다. 의창현(義昌縣)은 신라 때 굴자군(屈自郡)이라고 하다가 의안(義安)으로 고쳤으며, 회원현(會原縣)은 신라 때 골포현(骨浦縣)이라고 하다가 합포(合浦)로 고치었다. 고려 때에 의창(義昌)ㆍ회원의 두 고을로 하다가 태종 때 합하여 창원부라 하였다. ○ 회산(檜山)ㆍ환주(還珠)라고도 한다. ○ 16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44리이다.
○ 상주(尙州) : 성이 있다. 사벌국(沙伐國)이니 또는 사불(沙佛)이라고도 한다. 신라가 차지하여 주(州)로 하였다가 상주(上州)로 고치고 군주(軍主)를 두었는데, 상락군(上洛郡)으로 고쳤고 또 상주(尙州)ㆍ사벌주(沙伐州)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상주로 고쳤고, 절도사를 두어 귀덕군(歸德軍)이라고 부르다가 또 상주로 고쳤다.세종 때 관찰사로서 목사를 겸임하게 하다가 곧 폐지하였다. 세조 때 진(鎭)을 두고 목사로서 우도병마부사(右道兵馬副使)를 겸임하게 하였다가 곧 폐지하였다. ○ 사량벌(沙梁伐)ㆍ상산(商山)ㆍ타아(陁阿)라고도 한다. ○ 34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77리이다. ○ 화령현(化寧縣)은 속현이다. 신라 때의 □ 달비군(達匕郡)이니 화령으로 고쳤다. 중모현(中牟縣) 신라 때의 도량현(刀良縣)이니 도안(道安)이라 고쳤다.ㆍ단밀현(丹密縣) 신라 때의 무동미지현(武冬彌知縣)이니 갈동미지(曷冬彌知)라고도 한다.ㆍ산양현(山陽縣) 신라 때의 근품현(近品縣)이니 근암(近巖)이라고도 쓴다. 가유(嘉猷)로 고쳤다.ㆍ화창현(化昌縣) 지내미지현(知乃彌知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이 있다. 공성(功成)은 폐현이고, 신라 때의 대병부곡(大幷部曲)이다. 영순(永順)도 폐현이며 북면 임하촌(林下村)인데 고려 때에 태(太)씨라는 이 마을 사람이 도적을 잡아 공로가 있었으므로 현으로 승격시켰다. 청리(靑里)도 폐현이다. 신라 때의 석리대현(昔里大縣)이니, 청려(靑驢)ㆍ고려(高驢)ㆍ청리라 고쳤다.
○ 성주(星州) : 성이 있다. 신라 때 본피현(本彼縣)이라고 하다가 신안(新安)으로 고쳐 성산군(星山郡)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벽진(碧珍)으로 고치고, 고려 태조 때 경산부(京山府)로 고쳤다. 광평군(廣平郡)으로 낮추었다가 대주(垈州)로 고쳤고, 흥안부(興安府)로 올렸다. 뒤에 성산목으로 고쳤다가 부(府)로 강등시켰으며, 태종 때 목으로 올렸다. 조곡산(祖谷山)에 왕실의 탯줄을 봉안하였다. ○ 가야(伽倻)라고도 한다. 성산가야(星山伽倻)는 6가야 중의 하나이다. ○ 40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27리이다. ○ 가리현(加利縣) 신라 때의 일리현(一利縣)이니 이름을 성산군(星山郡)이라 고쳤다. 기성(岐城)이라고도 한다.ㆍ팔거현(八莒縣) 지금의 칠곡부이다.ㆍ화원현(花園縣) 신라 때의 설화현(舌火縣)이니 금성(錦城)이라고도 한다.ㆍ도산현(都山縣) 적산현(狄山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이 있다.
○ 진주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거열성(居列城)인데 거타(居陁)라고도 한다. 신라가 차지하여 진주(晉州)라고 하였다가 강주(康州)ㆍ청구(菁州)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절도사를 두고 정해군(定海軍)이라고 불렀다. 태조 때 진양부(晉陽府)로 올렸다가 현비(顯妣)의 고향이다. 태종 때 다시 진주목으로 하였다. ○ 청주(菁州)ㆍ진산(晉山)ㆍ진강(晉康)이라고도 한다. ○ 70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66리이다. ○ 반성현(班城縣)은 속현이다. 편월(片月)이라고도 한다. 수선현(水善縣) 신라 때의 일선현(一善縣)이니 상선(尙善)이라 고쳤다.ㆍ악양현(岳陽縣) 신라 때의 소다사현(小多沙縣)이다.ㆍ화개현(花開縣)이 있다. ○흥선(興善)은 폐현이다. 흥선도(興善島)이니 고려 때의 유질부곡(有疾部曲)이다. 창선현(彰善縣)으로 고쳤는데 지금의 직촌(直村)이다. 굴촌(屈村)도 폐현이다. 《삼국사》에서도 상세하지 않다고 하였다.
○ 김해 : 성이 있다. 가락국(駕洛國)이니 혹은 가야(伽倻)라고도 일컬었다. 뒤에 금관국(金官國)으로 고쳤다. 신라 때에 금관군을 두었으며 뒤에 소경을 두었고, 다시 김해라 고쳤다.고려 태조 때 낮추어 부로 하였다가 뒤에 낮추어 임해현(臨海縣)으로 하였다. 군으로 올렸다가 금주(金州)로 고쳤고 금녕부(金寧府)ㆍ금주목(金州牧)으로 올렸는데 다시 김해부로 하였다. ○ 분성(盆城)이라고도 한다. ○ 18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84리이다.
○ 태산(太山)은 속현이다. 엄산(嚴山)이라고도 한다.
○ 선산(善山) : 성이 있다. 신라 때 일선군(一善郡)이니 주(州)로 올렸다가 숭선군(嵩善郡)으로 고쳤고, 고려 때 선주(善州)로 고쳤다. 태종 때 선산군으로 고쳤으며 뒤에 부(府)로 올렸다. ○ 화의(和義)라고도 한다. ○ 18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36리이다. ○ 해평(海平)은 속현이다. 파징(波澄)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의 병평현(竝平縣)인데 고려 초기에 평군(平郡)이라 고쳤다.
○ 거제(巨濟) : 성이 있다. 바다 가운데의 섬이다. 신라 때 상군(裳郡)이라고 하다가 거제로 고쳤다. 뒤에 관성(管城)과 합하였다가 곧 폐지하였다. 태종 갑오년에 폐읍하고 거창에 합하여 제창현(濟昌縣)이라고 부르다가 또 곧 폐지하였다. 세종 임자년에 다시 현을 두었고 숙종 신묘년에 부로 올렸다. ○ 기성(岐城)이라고도 한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1천 44리이다. ○ 아주(鵞州)는 폐현이며 신라 때의 거로현(居老縣)이다. 송변(松邊)도 폐현이며 신라 때 남수(南垂)라 고쳤다. 명진(溟珍)도 폐현이다. 신라 때의 매진이현(買珍伊縣)이다. 정종 때 강성현(江城縣)과 합하여 진성(珍城)이라고 일컬었다.
○ 하동(河東) : 신라 때 한다사군(韓多沙郡)이라고 하다가 하동으로 고쳤다. 고려 때 현을 두었다. 태종 때 남해현(南海縣)과 합하여 하남현(河南縣)이라고 불렀으나 뒤에 다시 분할하였다. 숙종 갑신년에 부로 올렸다. ○ 청하(淸河)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36리이다.
○ 함양(咸陽) : 성이 있다. 신라 때의 속함군(速含郡)이니 함성(含城)이라고도 하다가 천령(天嶺)으로 고쳤다. 고려 때 허주(許州)로 올렸다가 함양군(含陽郡)으로 낮추었으며, 뒤에 함양으로 고치고 현으로 낮추었다. 태조 을해년에 군으로 올리고 영종 기유년에 부로 올렸다. ○ 18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46리이다.
○ 거창(居昌) : 신라 때의 거열군(居烈郡)이니 거타(居陁)라고도 하다가 거창으로 고쳤다. 고려 때 현을 두었다. 태종 때 거제와 합하여 제창(濟昌)이라고 부르다가 곧 이전대로 회복시켰다. 연산군 초기에 군으로 올렸다. 왕비의 고향이다. 중종 병인년에 다시 현으로 낮추었다가 영종 기유년에 부로 올렸다. 거창 신씨(愼氏)인 단경왕후(端敬王后)가 복위한 때문이다. ○ 아림(娥林)이라고도 한다. ○ 22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35리이다. ○ 가조(加祚)는 속현이다. 신라 때의 가소현(加召縣)이니 함음(咸陰)이라고 고쳤다.
○ 초계(草溪) : 신라 때 초팔혜현(草八兮縣)이라고 하다가 팔계(八溪)로 고치었다. 고려 때 초계로 고치고 군으로 올렸다. ○ 청계(淸溪)라고도 한다. ○ 11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45리이다.
○ 함안(咸安) : 성이 있다. 아시량현(阿尸良縣)이다. ○ 18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10리이다. ○ 현무현(玄武縣)이 있다. 신라 때의 소다현(召多縣)인데 뒤에 낮추어 부곡으로 하였다.
○ 금산(金山) : 신라 때의 금산현(金山縣)이다. 정종 때 군으로 올렸다. 왕실의 태(胎)를 봉안(奉安)하였다. ○ 금릉(金陵)이라고도 한다. ○ 16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13리이다. ○ 어모(禦侮)는 폐현이다. 신라 때의 금물현(今勿縣)이니 음달(陰達)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는 개령(開寧)에 속하였다.
○ 곤양(昆陽) : 성이 있다. 고려 때의 곤명현(昆明縣)인데 신라 때의 이름은 상세히 알 수 없다. 세종 때 남해현(南海縣)과 합하여 곤남군(昆南郡)으로 올렸다. 왕실의 태(胎)를 고을의 북쪽 소곡산(所谷山)에 봉안하였다. 정사년에 다시 나누어 남해군을 두고, 진주의 금양부곡(金陽部曲)과 합하여 곤양으로 고쳤다.
○ 철성(鐵城)ㆍ곤산(昆山)이라고도 한다. ○ 10면, 서울과의 거리는 9백 6리이다. 하읍(河邑)은 폐현이다. 포촌현(浦村縣)이다.
○ 합천 : 신라 때 대량주군(大良州郡)이라고 하다가 대야주군(大耶州郡)이라고도 쓴다. 강양(江陽)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 합주(陜州)로 올렸으며, 태종 때 합천군으로 고쳤다. ○ 20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35리이다. ○ 야로(冶爐)는 속현이다. 신라 때의 적화현(赤火縣)이다.
○ 고성(固城) : 성이 있다. 본래 가야국(伽倻國)이니, 신라가 차지하여 고자군(古自郡)을 만들었다가 고성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 고주(固州)로 고쳤다가 뒤에 현으로 낮추었다. 또 남해와 합하였다가 곧 이전대로 하였다. ○ 철성이라고도 한다. ○ 14면, 서울과의 거리는 9백 10리이다. ○ 교화량(蛟火良)은 폐현이다.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 남해(南海) : 성이 있다. 바다 가운데의 섬이다. 신라 때 전야산군(轉也山郡)이라고 하다가 남해로 고쳤다. 고려 때에 현을 두었다. 태종 때 하동(河東)과 합하여 하남현(河南縣)이라고 하다가 뒤에 분할하여 해양현(海陽縣)이라고 일컬었다. 진주의 금양부곡(金陽部曲)을 예속시켰다가 얼마 안 가서 도로 진주에 환속시켰다. 세종 때 곤명현(昆明縣)과 합쳤다가 다시 분할하였다.○ 전산(轉山)ㆍ화전(花田)ㆍ윤산(輪山)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1천 45리이다. ○ 난포(蘭浦)는 폐현이며 신라 때의 내포현(內浦縣)이다. 평산(平山)도 폐현이다. 신라 때의 평서산현(平西山縣)인데 서평(西平)이라고도 한다.
○ 삼가(三嘉) : 성이 있다. 삼기현(三岐縣)은 신라 때 삼지현(三支縣)이라고도 하고 마장(麻杖)이라고도 하다가 삼기로 고쳤다. 태조 때 군으로 올렸다가 태종 때 현으로 낮추었다.가수현(嘉壽縣)은 신라 때 가주화현(加主火縣)이라고 하다가 가수라고 고쳤으며, 가수(嘉樹)라고도 한다. 태종 때 두 고을을 합하여 삼가현으로 하였다. ○ 기산(岐山)ㆍ봉성(鳳城)이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83리이다.
○ 의령(宜寧) : 성이 있다. 신라 때 장함현(獐含縣)이라고 하다가 의령으로 고쳤다. ○ 의춘(宜春)ㆍ의산(宜山)이라고도 한다. ○ 19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95리이다. ○ 신번(新繁)은 속현이다. 신라 때 신니현(辛尒縣)이니 주오촌(朱烏村)이라고도 하고, 천천현(泉川縣)이라고도 하다가 의상(宜桑)으로 고쳤다.
○ 칠원 : 성이 있다. 신라 때 칠토현(漆吐縣)이라고 하다가 칠제(漆堤)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칠원(漆原)으로 고쳤다. 칠원(漆園)이라고 쓰기도 한다.
○ 구성(龜城)ㆍ무릉(武陵)이라고도 한다. ○ 4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80리이다. 구산(龜山)은 속현이다. 본래 성법부곡(省法部曲)이니 고려 때 올려서 현을 만들었다. 은산(銀山)이라고도 한다. 창원부의 서촌(西村)에 넘어서 들어 있다.
○ 진해(鎭海) : 성이 있다. 고려 때의 진해현이다. 선조 신축년에 폐읍하였다가 광해군 때 다시 두었고, 인조 정묘년에 폐읍하였다가 기묘년에 다시 두었다. ○ 팔진(八鎭)ㆍ우산(牛山)이라고도 한다. ○ 3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87리이다.
○ 문경(聞慶) : 신라 때의 관문현(冠文縣)이니 고사갈이성(高思曷伊城)이라고도 하다가 관현(冠縣)으로 고치고 또 관산(冠山)으로 고쳤다. 고려 때 문희군(聞喜郡)으로 고쳤다가 뒤에 문경으로 고쳤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77리이다. ○ 가은(加恩)은 속현이다. 신라 때 가해현(加害縣)이라고 하다가 가선(嘉善)이라고 고쳤다. 호계(虎溪)는 폐현이다. 신라 때의 호측현(虎側縣)인데 신라 때에는 고령에 예속되었었다. 배산성(拜山城)이라고도 한다.
○ 함창(咸昌) : 본래 고령가야국(古寧伽倻國)이니 신라가 차지하여 고동람군(古冬攬郡)으로 만들었다. 고릉(古陵)이라고도 하다가 고령(古寧)으로 고쳤다. 고려 때 함령(咸寧)으로 고쳤고 또 함창으로 고쳤다. 6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37리이다.
○ 지례(知禮) :신라 때 지품천현(知品川縣)이라고 하다가 지례로 고쳤다. ○ 구성이라고도 한다. ○ 4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24리이다. ○ 두의곡부곡(頭衣谷部曲)은 속현이다.
○ 고령(高靈) : 본래 대가야국(大伽倻國)이니 신라가 차지하여 대가야군을 만들었다가 고령으로 고쳤다. ○ 고양(高陽)ㆍ영천(靈川)이라고도 한다. ○ 14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84리이다.
○ 단성(丹城) : 강성현(江城縣)은 신라 때 궐지군(闕支郡)이라고 하다가 궐성(闕城)으로 고쳤고, 고려 때에는 강성현(江城縣)으로 고쳤다. 태종 때 영선(永善)에 임시 예속되어 있던 명진현(溟珍縣)과 합하여 진성현(珍城縣)이라고 불렀다. 단계현(丹溪縣)은 신라 때 적촌현(赤村縣)이라고 하다가 단읍(丹邑)으로 고쳤고, 고려 때 단계(丹溪)로 고쳤으며, 공양왕 때에는 강성(江城)에 예속시켰었다.세종 때 두 고을의 이름을 따서 단성으로 고쳤다. 선조 기해년에 폐읍하였다가 광해군 계축년에 다시 두었다. ○ 구성(龜城)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46리이다. ○ 단계는 폐현이다.
○ 개령(開寧) : 감문소국(甘文小國)이니 신라가 차지하여 청주(淸州)를 설치하고 군주(軍主)를 두었다가 감문군(甘文郡)으로 고쳤고 개령으로 또 고쳤다. 고려 때 현으로 고쳤다. ○ 감주(甘州)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58리이다.
○ 사천(泗川) : 성이 있다. 신라 때 사물현(史勿縣)이라고 하다가 사수(泗水)로 고쳤는데, 고려 때에 사주(泗州)로 고쳤다. 태종 때 사천현으로 고쳤다가 뒤에 진을 설치하였다. 첨사로 삼았다. 뒤에 다시 현으로 고쳤다. ○ 동성(東城)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86리이다.
○ 웅천(熊川) : 성이 있다. 신라 때 웅지현(熊只縣)이라고 하다가 웅신(熊神)으로 고쳤다. 고려 때는 금주(金州)에 예속되었다. 세종 때는 이 고을에 요새지를 설치하고 첨사를 두었다. 문종 때 웅천현으로 고쳤으며, 중종(中宗) 5년에 부로 올렸다가 왜구를 평정한 곳이기 때문이다. 곧 이전대로 하였다. ○ 웅구(熊口)ㆍ병산(屛山)ㆍ웅산(熊山)이라고도 한다. ○ 5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70리이다.
○ 안의(安義) : 이안현(利安縣)은 신라 때 마리현(馬利縣)이라고 하다가 이안으로 고쳤다. 고려 말기에는 감음(感陰)에 이속시켰다. 감음현은 신라 때 남내현(南內縣)이라고 하다가 여선(餘善)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감음이라고 고쳤으며, 뒤에는 부곡으로 낮추었다가 다시 현으로 하였다. 태종 때 관아를 이안에 옮기고 안음(安陰)이라고 하였다.영종 기유년에 폐읍하였다가 종단(終丹)이라는 계집아이가 7세에 아들을 낳았다 병진년에 다시 현을 두고 이름을 안의로 고쳤다. ○ 화림(花林)이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52리이다. ○ 감음은 폐현이다.
○ 산청(山淸) : 신라 때 지품천현(知品川縣)이라고 하다가 산음(山陰)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합천에 예속되었다가 공양왕 때에 현을 설치하였다. 영종 때 산청으로 고쳤다. ○ 산양(山陽)이라고도 한다. ○ 14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6리이다.
○ 강원도 : 동북쪽과 동쪽은 바다이고, 동남쪽은 경상도와 경계이며 남쪽은 경상도와 충청도의 경계이고, 서남쪽은 충청도와 경계, 서쪽은 경기도와 경계이며 서북쪽은 경기ㆍ황해도의 경계이고, 북쪽은 함경도와 경계이다. 26고을이다. 동도 9고을, 서도 17고을 본래 예맥(濊貊)의 땅인데 한4군(漢四郡) 때에 임둔(臨屯)이 되었다가 뒤에 고구려와 신라가 차지하게 되었고, 신라가 통합하여 명주(溟州)ㆍ삭주(朔州)의 두 주를 두었다. 말기에 궁예가 점거하였다. 고려 때에는 삭방도를 두었다. 성종이 화주(和州)ㆍ명주 등의 군ㆍ현으로 삭방도를 만들고 춘주(春州) 등의 군ㆍ현에 예속시켰다. 뒤에 연해명주도(沿海溟州道)라고 고쳤고, 춘주(春州) 등의 군ㆍ현은 비로소 춘주도 혹은 동주도(東州道)라고 불렀다. 명종 때 명주도(溟州道)를 강릉도로 고쳤고, 동주도를 교주도(交州道)라 하였다. 뒤에 또 교주도를 고쳐 회양도(淮陽道)라고 부르고, 강릉도를 고쳐서 강릉삭방도라고 불렀다. 우왕 때 비로소 강릉도를 분할하여 교주도와 합하여 드디어 교주강릉도(交州江陵道)라고 불렀다. 충주의 관할인 평창군(平昌郡)을 교주강릉도에 예속시켰으며, 공양왕은 철원ㆍ영평(永平) 등의 현을 옮겨서 경기에 예속시켰다. 태조 을해년에 강원도라고 개칭하였다. 정종 때 영춘(永春)과 영월을 서로 교환하였으며, 태종 때 가평(加平)과 조종(朝宗)을 분리시켜 경기도에 예속시키고, 경기도의 이천(伊川)을 강원도에 예속시켰다. 세종 때 철원과 안협(安峽)을 도로 강원도에 예속시켰다.
○ 동도 강릉 : 성이 있다. 본래 예국(濊國) 철국(鐵國) 또는 예국(蘂國)이라고도 한다. 이니 한 무제의 한4군(漢四郡) 때에는 임둔(臨屯)이었다. 고구려 때에는 하서량(河西良)이라고 일컬었는데 하슬라주(河瑟羅州)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는 소경으로 하였다가 뒤에 명주(溟州)로 고쳤다.고려 태조는 동원경(東原京)이라고 이름했다가 뒤에 하서부(河西府)라고 일컬었다. 명주목으로 고쳤으며, 경흥도호부로 올렸다가 다시 강릉부로 고쳤다. 본조에서도 이를 그대로 하였다. ○ 임영(臨瀛)ㆍ동온(東溫)ㆍ명원(溟源)ㆍ예국 이하는 이곡(李穀)의 <염양정기(艶陽亭記)>에 나온다.ㆍ철국(鐵國)ㆍ도원경(桃源京)ㆍ북빈경(北濱京)이라고도 한다. ○ 18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30리이다. ○ 연곡(連谷)은 속현이다. 고구려의 지산현(支山縣)이니 양곡(陽谷)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는 명주의 영현(領縣)이었다. 우계(羽溪)는 속현이다. 고구려 때의 우곡현(羽谷縣)이니 옥당(玉堂)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는 삼척군의 영현이었다.
○ 양양(襄陽) : 고구려 때의 익현현(翼峴縣)이니 이문(伊文)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는 익령현(翼嶺縣)으로 고쳤고, 고려 때에는 양주(襄州)로 올렸다가 덕령현(德寧縣)으로 낮추었으며 다시 양주(襄州)라 일컬었다. 태조 정축년에 부로 올렸다. 임금의 외향(外鄕)이다. 태종 때 양양으로 고쳤다. ○ 양산(襄山)이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50리이다. ○ 동산(洞山)은 속현이다. 고구려 때의 혈산현(穴山縣)이니 신라 때 동산(洞山)이라 고쳤다.
○ 삼척 : 성이 있다. 실직국(悉直國)이니 신라 때 실직주군주(悉直州軍主)를 두었다가 뒤에 삼척군으로 고쳤다. 고려 때 척주(陟州)로 고쳤다. 뒤에 현으로 낮추었다가 또 군으로 올렸다가 태조 계유년에 부로 올렸다. 목조(穆祖)의 외향(外鄕)이다. ○ 직주(直珠)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32리이다. ○ 죽령은 고현(古縣)이다. 고구려 때의 죽현현(竹峴縣)이니 신라 때 죽령이라고 고쳤다. 만경현(滿卿縣) 만경현이라고도 한다. 고구려 때의 만방현(滿芳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ㆍ해리현(海利縣) 고구려 때의 파리현(陂利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등으로 되어 있다.
○ 평해(平海) : 성이 있다. 고구려 때의 근을어군(斤乙於郡)이다. 고려 초기에 평해군으로 고쳤다. ○ 기성(箕城)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80리이다.
○ 통천(通川) : 고구려 때의 휴양군(休壤郡)이니 금뇌(金惱)라고도 한다. 신라 때 금양(金壤)으로 고쳤다. 고려 때 현을 두었다가 통주(通州)로 올렸다. 태종 계사년(1413, 태종 13)에 통천군으로 고쳤다. ○ 금란(金蘭)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40리이다. ○ 임도(臨道)는 폐현이고 고구려 때의 도림현(道林縣)이니 조을포(助乙浦)라고도 한다. 벽산(碧山)도 폐현이며 고구려 때의 토상현(吐上縣)이니 신라 때 제상(堤上)으로 고쳤다. 운암(雲巖)도 폐현이다. 고구려 때의 평진현(平珍縣)이니 변현(邊縣)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편검(偏儉)이라 고쳤다.
○ 고성(高城) : 고구려 때의 달홀(達忽)이니 신라 때 달홀주군주(達忽州軍主)를 두었다. 뒤에 고성군으로 고쳤다. 고려 때 현으로 고쳤다. 세종 때 군으로 올렸다. ○ 풍암(豐巖)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99리이다.
○ 간성(杆城) : 고구려 때의 변성군(邊城郡)이니 가라홀(加邏忽)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수성군(守城郡)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간성현으로 고쳤으며, 뒤에 군으로 올렸고 고성(高城)을 겸임시켰다가 조금 후에 다시 분할하였다. ○ 수성(水城)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55리이다.
○ 울진(蔚珍) : 성이 있다. 고구려 때의 우진야현(于珍也縣)이니 고우이군(古亏伊郡)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울진으로 고쳤고, 고려 때에는 현으로 낮추었다. ○ 선차(仙槎)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85리이다. ○ 해곡현(海曲縣) 고구려 때의 파조현(波朝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이 있다.
○ 흡곡(歙谷) : 고구려 때의 습비곡현(習比谷縣) 곡(谷)을 탄(呑)으로 쓰기도 한다. 이니 신라 때 습계(習磎)로 고쳤고, 고려 때에 흡곡으로 고쳤다. 선조 병신년에 폐읍하였다가 무술년에 다시 두었다. ○ 학림(鶴林)이라고도 한다. 3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70리이다.
○ 서도(西道) 원주 : 고구려 때의 평원군(平原郡)이니 신라 때 북원소경(北原小京)을 두었다. 고려 태조 때 원주로 고쳤다. 뒤에 낮추어 일신현(一新縣)으로 하였다가 조금 후에 이전대로 하였다. 또 정원부(靖原府)로 올렸다가 익흥부(益興府)로 고치고, 성안부(成安府)로 고쳤으며 다시 원주목으로 하였다.○ 평량경(平涼京)이라고도 한다. ○ 20면, 서울과의 거리는 3백 82리이다. ○ 주천(酒泉)은 속현이다. 학성(鶴城)이라고도 한다. 고구려 때의 주연현(酒淵縣)이니 신라 때 주천(酒泉)이라 고쳤다.
○ 회양(淮陽) : 고구려 때의 각련성군(各連城郡)이니 가혜아(加兮牙)라고도 한다. 신라 때 연성(連城)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이물성(伊勿城)이라고 부르다가 교주(交州)로 고쳤다. 회주목(淮州牧)으로 올렸다가 회양부로 낮추었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3백 80리이다. ○ 화천(和川)은 속현이다. 고구려 때의 수왕천현(藪往川縣)이니 신라 때 수천(藪川)으로 고쳤다. 남곡현(嵐谷縣) 고구려 때의 적목진(赤木鎭)이니 사비근을(沙非斤乙)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단송(丹松)으로 고쳤다. 이 있다. 질운(軼雲)은 고현이고 고구려 때의 관술현(管述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희령(稀嶺)도 고현이다. 고구려 때의 저수현현(猪守峴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 춘천 : 본래 맥국(貊國)이었는데, 신라 때 우수주(牛首州) 우두주(牛頭州)라고도 한다. 를 설치하고 군주(軍主)를 두었다가 수약주(首若州)로 고쳤는데 오근내(烏斤乃)ㆍ수차약(首次若)이라고도 한다. 뒤에 삭주로 고치고, 광해주(光海州)로 고쳤다.고려 태조 때에는 춘주(春州)라고 하였다가 안양부(安陽府)로 올렸다. 태종 계사년(1413, 태종 13)에 춘천군으로 고쳤고 을미년에 부로 승격시켰다. ○ 수춘(壽春)ㆍ봉산(鳳山)이라고도 한다. ○ 11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5리이다. ○ 기린(基鱗)은 속현이다. 고구려 때의 기지군(基知郡)이다. 난산(蘭山)은 고현이다. 고구려 때의 석달현(昔達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 철원(鐵原) : 고구려 때의 철원군(鐵圓郡)이니 또는 모을동비(毛乙冬非)라고도 한다. 신라 때 철성(鐵城)이라고 고쳤다. 궁예가 와서 도읍을 정하고 태봉(泰封)이라고 이름하였다. 고려 태조 때 동주(東州)로 고쳤다. 뒤에 현으로 낮추었다가 또 목으로 올렸으며, 철원부로 고쳤다. ○ 육창(陸昌)ㆍ창원(昌原)이라고도 한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21리이다.
○ 영월 : 고구려 때의 내생군(奈生郡)이니 신라 때 내성군(奈城郡)으로 고쳤고 고려 때 영월군으로 고쳤다. 숙종 기묘년에 부로 올렸다. 단종을 복위하였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37리이다.
○ 이천(伊川) : 고구려 때의 이진매현(伊珍買縣)이니 신라 때 이천으로 고쳤다. 광해군 초년에 부로 올렸고, 인조 계해년에는 도로 낮추었다가 숙종 정묘년(1687, 숙종13)에 다시 올렸다. ○ 화산(花山)이라고도 한다. ○ 10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80리이다.
○ 정선(旌善) : 고구려 때의 잉매현(仍買縣)이니 신라 때에 정선으로 고쳤고, 고려 때 군으로 올렸다. ○ 삼봉(三鳳)ㆍ주진도원(朱陳桃源)ㆍ침봉(沈鳳)이라고도 한다. ○ 4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30리이다.
○ 평창(平昌) : 고구려 때의 욱오현(郁烏縣)이니 우오(于烏)라고도 한다. 신라 때 백오(白烏)로 고치고, 고려 때에는 평창으로 고쳤다. 뒤에 군으로 올렸다가 도로 현(縣)으로 낮추고 태조 임신년에 다시 군으로 올렸다. 목조(穆祖)의 왕비 효비(孝妃)의 고향이다. ○ 노산(魯山)이라고도 한다. ○ 5면, 서울과의 거리는 3백 70리이다.
○ 금성(金城) : 고구려 때의 모성군(母城郡)이니 야차홀(也次忽)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익성(益城)으로 고쳤다가 뒤에 금성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현으로 낮추고 또 도령(道寧)이라고 일컬었다. 본조에서 다시 금성이라고 하였다. ○ 금양(金壤)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70리이다. ○ 통구(通溝)는 속현이다. 통구(通口)라고도 쓴다. 고구려 때의 수입현(水入縣)이니 매이(買伊)라고도 한다. ○ 기성(岐城)은 폐현이다. 고구려 때의 동사홀군(冬斯忽郡)이다.
○ 평강(平康) : 고구려 때의 부양현(斧壤縣)이니 어사내(於斯內)라고도 한다. 신라 때 광평(廣平)으로 고쳤고, 고려 때 평강으로 고쳤다. ○ 평강(平江)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40리이다.
○ 금화(金化) : 고구려 때의 부여군(夫如郡)인데 신라 때 부평(富平)으로 고치고, 고려 때 금화로 고쳤다. ○ 화산(花山)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20리이다.
○ 낭천(狼川) : 고구려 때의 생천군(狌川郡)인데 야시매(也尸買)라고도 한다. 신라 때 낭천으로 고쳤고, 고려 때에 현(縣)으로 하고 양구를 겸임했다. 본조에서는 도로 분할하였다. 인조 갑신년에 폐읍하였다가 효종 계사년(1653, 효종 4)에 다시 설치하였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35리이다.
○ 홍천(洪川) : 고구려 때의 벌력천현(伐力川縣)인데 신라 때 녹요(綠繞)로 고쳤고, 고려 때에 홍천으로 고쳐 현을 두었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30리이다.
○ 양구(楊口) : 고구려 때의 양구군인데 요은홀차(要隱忽次)라고도 한다. 신라 때 양록(楊麓)으로 고쳤고 고려 때에는 양구(楊溝)로 고쳤다가 양구로 고쳤다. 뒤에 낭천과 병합하였다가 태조 계유년에 도로 분할하였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3백 10리이다. ○ 방산(方山)은 속현이다. 고구려 때의 삼현현(三峴縣)인데 밀파혜(密波兮)라고도 하였다. 신라 때 삼령현(三嶺縣)으로 고쳤다.
○ 인제(麟蹄) : 고구려 때의 저족현(猪足縣)인데 오사회(烏斯回)라고도 한다. 신라 때 희제(狶蹄)로 고쳤고, 고려 때 인제로 고쳤다. 4면, 서울과의 거리는 3백 67리이다. ○ 서화(瑞和)는 속현이다. 서화(瑞禾)라고 쓰기도 하며, 서성(瑞城)이라고도 한다. 고구려 때의 옥기현(玉岐縣)인데 신라 때 치도(馳道)로 고쳤다.
○ 횡성(橫城) : 고구려 때의 횡천현(橫川縣)인데 또는 어사매(於斯買)라고도 한다. 신라 때 횡주(橫州)로 고쳤고, 고려 때에는 횡천이라고 일컬었다. 태종 갑오년에 홍천(洪川)과 발음이 비슷하다고 하여 횡성으로 고쳤다. ○ 화전(花田)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30리이다.
○ 안협(安峽) : 고구려 때의 아진압현(阿珍押縣)인데 궁악(窮岳)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안협(安峽)으로 고쳤다. 태종 갑오년에 경기도의 삭녕과 합쳐서 안삭(安朔)이라고 부르다가 병신년(1416, 태종 16)에 도로 이전대로 하였다. ○ 3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20리이다.
○ 황해도 : 남과 북은 함경도의 경계요, 동은 강원도 경계이며 동남은 강원도와 경기도의 경계이고, 남은 경기도의 경계이며, 서남과 서는 바다이고, 서북은 바다와 평안도의 경계이며, 북은 평안도의 경계이다. 23고을이다. 좌도 14고을, 우도 9고을 조선과 마한의 옛 땅이니 한4군(漢四郡) 때에는 낙랑군(樂浪郡)의 관할이었다. 뒤에 고구려가 차지하였는데 당(唐) 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니 그 땅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마침내 신라가 이 땅을 병합하였다. 한주(漢州)를 두었다. 신라의 말기에는 궁예가 점거하였다. 고려 때에는 관내도(關內道)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서해도로 고쳤다. 뒤에 수안(遂安)ㆍ곡주(谷州)ㆍ은율(殷栗) 등의 고을을 원(元) 나라에 빼앗겼다가 충렬왕 4년에 원 나라에서 돌려 주었다. 뒤에 황주목ㆍ안악군(安岳郡)ㆍ철화현(鐵和縣)ㆍ장명진(長命鎭) 등을 서북면에 옮겨 예속시켰다가 우왕 때에 도로 본도에 예속시켰다. 태조 을해년에 풍해도(豐海道)로 고쳤고, 태종 정유년에 황해도로 고쳤다. 태조 을해년에 평주(平州)ㆍ수안(遂安)ㆍ곡주(谷州)ㆍ재령(載寧)ㆍ서흥(瑞興)ㆍ신계(新溪)ㆍ협계(俠溪)를 경기도로부터 도로 본도에 예속시켰다. 태종 계사년에 연안ㆍ배천ㆍ우봉ㆍ강음(江陰)ㆍ토산(兔山)을 경기도로부터 도로 본도에 예속시켰다.
○ 좌도 황주(黃州) : 성이 있다. 고구려 때의 동홀(冬忽)인데 우동어홀(于冬於忽)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취성(取城)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황주로 고쳤다가, 뒤에는 절도사를 두고 천덕군(天德軍)이라고 일컬었다. 고령군(固寧郡)으로 낮추었다가 다시 황주목이라고 일컬었다. ○ 제안(齊安)ㆍ용흥(龍興)ㆍ성성(聖城)ㆍ대룡(大龍)ㆍ동울(冬鬱)ㆍ대홀(大忽)이라고도 한다. ○ 18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65리이다. ○ 철화(鐵和)는 폐현이다. 고려 때 현을 두었다가 뒤에 폐지하였고, 태조 병자년에 다시 현을 두었다가 태종 때 또 폐지하였다.
○ 평산(平山) :고구려 때의 대곡군(大谷郡)인데 다지홀(多知忽)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영풍(永豐)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평주(平州)로 고쳤으며 부흥군(復興郡)과 합하였다가 조금 후에 이전대로 하였다. 태종 계사년에 평산부로 고쳤다. ○ 연덕(延德)ㆍ동양(東陽)이라고도 한다. ○ 17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71리이다.
○ 서흥(瑞興) : 고구려 때의 오곡군(五谷郡)인데 우차탄홀(于次呑忽)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오관(五關)이라 고쳤다. 고려 때는 동주(洞州)로 고쳤다가 서흥현으로 고쳤다. 태종 을미년에는 군으로 올렸고 세종 갑진년(1424, 세종 6)에는 부(府)로 올렸다. 현종 신해년에는 백년 동안 현으로 낮추라는 처분이 있었다. □ 부로 올렸다. ○ 농서(隴西)ㆍ서성(瑞城)ㆍ옥곡(玉谷)이라고도 한다. ○ 13면, 서울과의 거리는 3백 45리이다
○ 곡산(谷山) : 고구려 때의 십곡성(十谷城)이니 덕돈홀(德頓忽)이라고도 하고, 곡성(谷城)이라고도 한다. 고곡군(古谷郡)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 진서(鎭瑞)로 고쳤고 고려 때에는 곡주(谷州)로 고쳤다.태조 계유년(1393, 태조2)에 곡산부로 고쳤다. 현비(顯妣) 강씨(康氏)의 고향이다. 태종 임오년에 군으로 낮추었다가 현종 기유년에 다시 올렸다. 본관이 곡산인 신덕(神德)왕후가 복위하였기 때문이다. ○ 상산(象山)이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34리이다.
○ 봉산(鳳山) : 고구려 때의 휴암군(鵂巖郡)인데 휴류성(鵂鶹城)이라고도 하고, 조파의(租坡衣)라고도 한다. 신라 때 서암(棲巖)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는 봉주(鳳州)로 일컫다가 봉양(鳳陽)으로 고쳤으며, 태종 계사년(1413, 태종 13)에 봉산군으로 고쳤다. ○ 지하(池河)라고도 한다. ○ 15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20리이다.
○ 안악(安岳) : 고구려 때의 양악군(楊岳郡)인데 고려 때 안악으로 고쳤다. 뒤에 현으로 하였다가 군으로 올렸다. ○ 양산(楊山)이라고도 한다. ○ 18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86리이다.
○ 재령(載寧) : 고구려 때의 식성군(息城郡)인데 한성(漢城)이라고도 하고, 내홀(乃忽)이라고도 하며, 한홀(漢忽)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중반(重盤)으로 고쳤다.고려 초기에 안주(安州)라고 일컬었고 뒤에는 현을 두었고 재령으로 고쳤다. 태종 을미년에 군으로 올렸다. 중종 때 옛 읍에 질병이 많이 유행한다고 하여 관아를 옛 고을의 서쪽 60리 되는 곳에 옮겼다. ○ 안릉(安陵)ㆍ안풍(安風)이라고도 한다. ○ 13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65리이다. ○ 삼지(三支)는 폐현이다.
○ 수안(遂安) : 고구려 때의 장새현(璋塞縣)인데 고소어(古所於)라고도 한다. 고려 초기에 수안으로 고쳤고, 수주(遂州)로 올렸다. 본조에서 수안군으로 고쳤다. ○ 저새(猪塞)ㆍ요산(遼山)ㆍ장률(獐栗)이라고도 한다. ○ 13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35리이다.
○ 신천(信川) : 고구려 때의 승산군(升山郡)인데 고려 때에는 신주(信州)로 고쳤다가 뒤에 현으로 하였다. 태종 계사년에 신천으로 고쳤고 예종 기축년에 군으로 올렸다. ○ 신안(信安)ㆍ신성(信城)ㆍ화산(花山)ㆍ승주(升州)라고도 한다. ○ 10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95리이다.
○ 금천(金川) : 우봉현(牛峯縣)은 고구려 때 우잠군(牛岑郡)이니 우령(牛嶺)이라고도 하고, 수지의(首知衣)라고도 한다. 신라 때 우봉(牛峯)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 평주(平州)에 예속 되었다가 개성부에 예속되었으며 뒤에 현을 두었다. 태종 계사년에 본도에 예속되었다.강음현(江陰縣)은 고구려 때의 굴압현(屈押縣)이니 강서(江西)라고도 한다. 신라 때 강음(江陰)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개성부에 예속되었다가 뒤에 현을 두었다. 태종 계사년에는 본도에 예속되었다. 효종 신묘년에 두 현을 합하여 금천군을 만들었다. ○ 금릉(金陵)이라고도 한다. ○ 16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5리이다.
○ 신계(新溪) : 고려 때의 신은현(新恩縣)인데 담주(覃州)로 고쳤다가 뒤에 옛 이름대로 회복하고 곡주(谷州)에 예속시켰다. 태조 병자년에 비로소 현을 두었으며 협계(俠溪)를 여기에 예속시켰다. 세종 을축년(1445, 세종 27)에 두 현의 이름을 따서 신계라고 하였다.○ 신성(新城)이라고도 한다. ○ 13면, 서울과의 거리는 3백 48리이다. ○ 협계(俠溪)는 폐현이다. 고구려 때의 수곡성현(水谷城縣)이니 매차홀(買且忽)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단계(丹溪)로 고쳤다.
○ 문화(文化) : 고구려 때의 관구현(關口縣)인데 고려 때 유주(儒州)로 고쳤다. 뒤에 현으로 하였으며 문화로 고쳤다. ○ 시령(始寧)ㆍ문성(文城)이라고도 한다. 중종 경진년에는 관아자리에 질병이 많다고 하여 관아를 현의 남쪽 13리로 옮겼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25리이다.
○ 장련(長連) : 장명진(長命鎭)은 본래 황주(黃州)에 예속되었고, 연풍장(連豐莊)은 본래 안악(安嶽)에 속하였었다. 태조 병자년에 장명진을 폐지하고 연풍에 예속시켰으며, 태종 갑오년(1414 태종 14)에 장련현으로 고쳤다.
○ 토산(兔山) : 고구려 때의 오사함달현(烏斯含達縣)인데 신라 때 토산(兔山)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개성부에 예속되었으며, 태종 계사년에 본도에 예속시켰다. ○ 월성(月城)이라고도 한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30리이다.
○ 우도 해주 : 성이 있다. 고구려 때의 내미홀군(內未忽郡)인데 지성(池城)이라고도 하고, 장지(長池)라고도 한다. 신라 때 폭지(瀑池)로 고쳤고, 고려 태조 때 해주로 고쳤다. 뒤에 절도사를 두고 우신책군(右神策軍)이라고 일컬었다. 양주(楊州)와 더불어 좌우보(左右輔)가 되었다. 안서(安西)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해주목으로 하였다. ○ 대령(大寧)ㆍ서해(西海)ㆍ수양(首陽)ㆍ고죽(孤竹)이라고도 한다. ○ 35면, 서울과의 거리는 3백 65리이다.
○ 연안(延安) : 성이 있다. 고구려 때의 동음홀(冬音忽)인데 시염성(豉鹽城)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해고군(海皐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염주(鹽州)라 일컬었고 뒤에 영응현(永膺縣)이라고도 하였다.복주(復州)로 올렸다가 석주(碩州)로 고쳤으며 온주목(溫州牧)으로 올렸다가 또 낮추어 연안부로 하였다. 태종 계사년(1413, 태종 13)에 도로 본도에 예속시켰다. ○ 오원(五原)ㆍ양원(陽原)이라고도 한다. ○ 22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55리이다.
○ 풍천(豐川) : 고구려 때의 구을현(仇乙縣)인데 굴천(屈遷)이라고도 한다. 고려 초기에 풍주(豐州)로 고쳤다. 태조 정축년에 비로소 진(鎭)을 두었으며, 태종 계사년에 풍천군으로 하였다. 은율(殷栗)과 합하여 풍율(豐栗)이라고 일컫다가 얼마 안 되어 폐지하였다. 예종 기축년에 부로 올렸다. 왕후의 외가의 고향이다. ○ 서하(西河)ㆍ성해(成海)ㆍ안주(安州)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35리이다.
○ 옹진(甕津) : 성이 있다. 고구려 때의 옹천(甕遷)인데 고려 초기에 옹진으로 고치고 현을 두었다. 태조 정축년에 진을 두었다가 세종 때 다시 현을 두었으며 숙종 기해년(1719, 숙종45)에 부로 올렸다. ○ 5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85리이다.
○ 장연(長淵) : 고구려 때의 장연인데 신라ㆍ고려가 모두 그대로 따랐다. 태조 임신년에 만호를 두었으며, 태종 때에 영강현(永康縣)과 합하여 연강(淵康)이라고 일컬었으나 얼마 안 되어 폐지하였다. 세종 5년에 첨사를 두었다가 뒤에 현으로 하였고, 광해군 계해년에 부로 올렸다. ○장담(長潭)이라고도 한다. ○ 11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13리이다. ○ 해령(海寧)은 폐현이다. 고려 때 현을 두었다가 뒤에 청송에 예속시켰다. 태종 병신년에 그 땅을 장연현의 서쪽 경계에 예속시켜 직촌(直村)이라 하고 해령현의 아전들은 송화(松禾)에 배속시켰다.
○ 배천(白川) : 고구려 때의 도랍현(刀臘縣)이니 치악성(雉嶽城)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구택(雊澤)으로 고쳤었다. 고려 초기에 백주(白州)라고 일컬었으며 개흥부(開興府)로 올렸다가 뒤에 이전대로 하였다. 충익현(忠翊縣)으로 고쳤다가 부흥군(復興郡)으로 올렸다. 태종 계사년에는 배천군으로 고치고 도로 본도에 예속시켰다. 중종 병술년에 현으로 낮추었다가 도로 회복시켰다. ○ 은천(銀川)이라고도 한다. ○ 16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35리이다.
○ 송화(松禾) : 청송현은 고구려 때의 마경이(麻耕伊)이고, 가화현(嘉禾縣)은 고구려 때의 판마곶(板麻串)인데, 고려 때에는 두 곳에다 각각 현을 두었었다. 태종 무자년에 두 고을을 합하여 송화라고 하였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95리이다. ○ 영녕(永寧)은 폐현이다. 고구려 때의 웅한이(熊閑伊)이다. 가화(嘉禾)는 고현(古縣)이다.
○ 강령(康翎) : 영강현(永康縣)은 고구려 때의 부진이(付珍伊)인데 고려 초기에 영강(永康)으로 고치고 현을 두었다. 태종 갑오년에 장연(長淵)과 합하였다가 얼마 후에 이전대로 하였다. 백령도(白翎島)는 고구려 때의 곡도(鵠島)인데 고려 때에는 백령진을 두었다. 세종 무신년(1428, 세종 10)에 영강(永康)과 백령을 합하여 강령현으로 하였다. 백령은 고려 공민왕 때에 곡령도의 수로가 험하다고 하여 진(鎭)이 육지로 나와 문화현의 동촌 가을산(加乙山)에 임시로 붙여 그곳을 그냥 백령이라고 일컫고 본섬을 백령에 예속시켰다. 인조(仁祖) 정축년에 폐읍하였다가 효종 기해년에 다시 현을 두었다. ○ 5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55리이다.
○ 은율(殷栗) : 고구려 때의 율구(栗口)인데 또는 율천(栗川)이라고도 한다. 고려 때 은율로 고쳤고, 태조 병자년에 비로소 현을 두었다. 태종 갑오년(1414, 태종 14)에 풍천(豐川)에 병합하였다가 얼마 후에 다시 현을 두었다. 숙종 무진년에 폐읍하였다가 경오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 4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85리이다.
○ 함경도 : 동북과 동은 두만강이고, 동남과 남은 바다이며, 서남은 강원도 경계이고, 서와 서북은 평안도 경계이며, 북은 여진의 경계이다. 23고을이다. 남도(南道)가 13고을이었는데, 지금은 14고을이고, 북도가 10고을이다. 본래는 옥저(沃沮)의 땅인데 한4군(漢四郡) 때에는 현도군(玄菟郡)이 되었다가 뒤에 고구려가 소유하였는데 신라가 3국을 통합할 때 남쪽 지방만을 차지하고, 명주(溟州)를 두었다. 북쪽 땅은 발해가 차지하였다. 고려 때는 삭방도라고 하다가 뒤에 동계(東界)로 개칭하였고, 또 동북면이라고도 일컬었다. 뒤에 함주(咸州) 이북은 동여진에게 빼앗겼다. 윤관이 개척하여 9성을 쌓았으며, 뒤에 연해명주도(沿海溟州道)라고 일컬었으나 후에 화주(和州) 이북을 원(元) 나라에 빼앗기게 되니, 원 나라에서 쌍성총관부를 두었다. 공민왕이 쌍성을 쳐서 함락하고 다시 동북면이라고 이름하다가, 또 강릉삭방도라고 일컬었으며 삭방강릉도로 고쳤다.공양왕 때에 비로소 강릉도와 분할하여 한 도(道)를 이루었다. 태종 계사년에 영길도(永吉道)로 고쳤으며, 또 함길도로 고쳤다. 성종 때에는 영안도(永安道)로 고치고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으로 인하여 길주를 낮추어 현을 만들었고, 함흥을 낮추어 군으로 하였다. 감영을 영흥으로 옮겼다가 중종 기사년(1509 중종4)에 함흥을 부로 복구시키고 감영을 옮겨왔으며 함경도라고 개칭하였다.
○ 남도(南道) 함흥 : 고구려의 옛 땅인데 오랫동안 동여진이 점거하였다. 고려 예종 때에 윤관이 여진을 쫓아내고 함주를 두었다가 대도독부를 두어 진동군(鎭東郡)이라고 부르고 성(城)을 쌓았다. 남쪽 지방의 장정 1천 9백 48호를 옮겨다가 채웠다. 다음해에 성을 철폐하고 그 땅을 여진에게 돌려주었다.뒤에 원 나라가 차지하여 합란부(哈蘭府)라고 일컬었다. 환조(桓祖)가 쌍성을 쳐서 깨뜨렸다. 뒤에 함주로 고쳤다가 얼마 후에 만호부로 고쳤으며 또 목(牧)으로 올렸다. 태종 병신년에 함흥부로 고치고 감영을 두었다. 성종 때 군으로 낮추었다가 중종 때 이전대로 하였다. ○ 함평(咸平)ㆍ함산(咸山)이라고도 한다. ○ 24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20리이다.
○ 영흥(永興) : 고구려 때의 장령진(長嶺鎭)인데 혹은 당문(唐文)이라고도 하고 혹은 박평군(博平郡)이라고도 한다. 고려 초기에 화주(和州)라고 하였고 성과 보루를 쌓았다. 원 나라가 여기에 쌍성총관부를 두었으며 등주(登州)에 합하였다가 뒤에는 통주(通州)에 합하였다. 수복한 뒤에는 화주라고 하였고 화령부(和寧府)로 올렸다.태조 계유년에 영흥으로 고쳤다. 외조 최씨(崔氏)의 고향이다. 태종 계미년에 군으로 낮추었다가 다음해에 이전대로 하였으며, 병신년에는 화주목으로 낮추었다가 세종 병오년에 영흥부로 고쳤다. 성종 경인년에 감영을 설치하고 부윤으로 올렸다가 연산군 무오년에 도로 낮추었다. ○ 역양(歷陽)이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85리이다. ○ 평주진(平州鎭) 본래는 영흥진인데 태조 때 평주(平州)로 고쳤다.ㆍ정변진(靜邊鎭)ㆍ영인진(寧仁鎭) 청원(淸源)이라고도 한다.ㆍ장평진(長平鎭) 예전에는 고질달(古叱達)이라고 일컬었다. 공민왕이 현으로 고쳤다.ㆍ요덕진(耀德鎭) 본래는 현덕진(顯德鎭)인데 공민왕이 현으로 고쳤다. 이 있다.
○ 안변(安邊) : 고구려 때의 비열홀군(比列忽郡)인데 천성(淺城)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비열주(比列州)라 하고 군주(軍主)를 두었다가 삭정군(朔庭郡)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등주안변부(登州安邊府)로 고쳤다. 태종 계미년에 현으로 낮추었다가 부(府)의 사람 조사의(趙思義)가 반란을 일으켰다. 다음 해에 도로 부로 복구하였다.○ 삭방ㆍ학성(鶴城)이라고도 한다. ○ 25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10리이다. ○ 학포(鶴浦)는 속현이며, 고구려 때의 곡포현(鵠浦縣)이다. 영풍현(永豐縣) 본래 증대이(甑大伊)인데 고려 때 진을 두었다가 뒤에 현으로 고쳤다.ㆍ문산현(文山縣)은 폐현이고 고구려 때의 가지달현(加支達縣)으로 신라 때 청산(菁山)으로 고쳤다. 익곡(翼谷)도 폐현이며, 고구려 때의 어지탄현(於支呑縣)인데 신라 때 익계(翊溪)로 고쳤다. 서곡(瑞谷)도 폐현이고, 고구려 때의 원곡현(原谷縣)이다. 궁탄(弓呑)이라고도 한다. 파천(派川)도 폐현이다. 고구려 때의 기연현(岐淵縣)이다. 위산(衛山)도 폐현이고, 복령(福令)도 폐현이며, 복령(福靈)이라고 쓰기도 한다. 복평향(福平鄕)이다. 상음(霜陰)도 폐현이다. 고구려 때의 살한현(薩寒縣)이다.
○ 북청(北靑) : 고구려의 옛 땅인데 오랫동안 여진이 점거한 지역이었다. 윤관이 9성을 쌓을 때의 칭호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뒤에 원 나라에 빼앗겨 삼살(三撒)이라고 일컬었다. 공민왕 때 안북천호(安北千戶)를 두었다가 북청주(北靑州)로 고쳤다. 태조 무인년에는 청주부(靑州府)로 고쳤고, 태종 때 다시 북청이라 일컬었다. 청주와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세조 때 남도병영(南道兵營)을 두었다. ○ 청해(靑海)라고도 한다. ○ 19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10리이다.
○ 덕원(德源) : 고구려 때의 천정군(泉井郡)인데 어을매(於乙買)라고도 한다. 신라 때 정천(井泉)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 용주(湧州)라고 일컬었고 뒤에 의주(宜州)로 고쳤다. 태종 계사년에 의천(宜川)으로 고쳤다. 세종 정사년에 덕원군으로 고쳤고 을축년에 부로 올렸다. 사조(四祖)의 고향이다. ○ 덕주(德州)ㆍ동모(東牟)ㆍ의춘(宜春)ㆍ의성(宜城)ㆍ춘성(春城)이라고도 한다. ○ 20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60리이다. ○ 진명(鎭溟)은 폐현이고 원산현(圓山縣)이라고도 하고 수강(水江)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진명사(鎭溟社)라 한다. 용진(龍津)도 폐현이다. 고호포(古狐浦)이다. 고려 때 용진진(龍津鎭)으로 고쳤고 뒤에 현을 두었다. 세조 때 나누어 덕원과 문천(文川)에 예속시켰다.
○ 정평(定平) : 옛날에는 파지(巴只)라고 일컬었으며 선위(宣威)라고도 한다. 고려 때 천정만호부(千丁萬戶府)를 두었고, 뒤에 성을 쌓고 관문을 설치하여 정주(定州)라고 하였다. 태종 계사년에 정평부로 고쳤다. 평안도의 정주와 이름이 같기 때문이다. ○ 중산(中山)이라고도 한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70리이다. ○ 장곡(長谷)은 폐현이며, 고려 때의 장주(長州)이니 가림(椵林)ㆍ단곡(端谷)이라고도 한다. 세종 때 폐읍하고 사(社)로 하였다. ○ 예원(預原)도 폐현이다. 고려 때 생천(牲川)에 성을 쌓아 원흥진(元興鎭)이라 하고, 또 예주(預州)에 성을 쌓아 방어사를 두었다. 태조 때 예주와 원흥을 합하여 예원군(預原郡)을 만들었다. 세조 무인년에 군을 폐지하고 정평에 예속시켜 독산사(禿山社)라고 일컬었다. 원성(原城)이라고도 한다.
○ 갑산(甲山) : 성이 있다. 본래 허천부(虛川府)인데 오랫동안 여진에게 점거되었다. 여러 차례 병화를 겪어 사람이 살고 있지 아니하였다. 공양왕이 처음으로 갑주만호부(甲州萬戶府)를 두었다. 태종 계사년에 갑산군으로 고쳤고 세종 때 진을 두었으며, 세조 신사년에 부로 올렸다. ○ 이산(夷山)이라고도 한다. ○ 13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2백 75리이다.
○ 삼수(三水) : 성이 있다. 본래 갑산군 삼수보(三水堡)인데 세종 신유년에 만호를 두어 적병의 길목을 막게 하였고, 병인년에 다시 삼수군을 두었다. 단종 갑술년에 다시 만호로 하였다. 세조 임오년에 부로 올렸고 갑신년에 다시 군으로 낮추었다가 숙종 경인년에 다시 부로 올렸다. ○ 삼강(三江)이라고도 한다. ○ 3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3백 65리이다.
○ 단천(端川) : 성이 있다. 본래 오림금촌(吳林金村)인데 오랫동안 여진에게 점거되었었다. 윤관이 성을 쌓고 복주(福州)를 두었다가 얼마 후에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뒤에 원 나라에 빼앗겨 원 나라가 이곳을 독로올(禿魯兀)이라고 일컬었다. 우왕 때에 단천으로 고쳤고, 태종 계사년에 단천군으로 고쳤으며, 숙종 경자년에 부로 올렸다. ○ 증산(甑山)이라고도 한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2백 5리이다.
○ 고원(高原) : 옛날의 덕녕진(德寧鎭)이니 홍원군(洪源郡)이라고도 한다. 고려 때 성을 쌓고 고주(高州)라고 하였다. 태종 계사년에 고원군으로 고쳤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45리이다.
○ 문천(文川) : 옛날에는 매성(妹城)이라고 불렀는데 고려 때 성을 쌓고 문주(文州)라고 하였다. 뒤에 의주(宜州)와 합하였다가 얼마 후에 다시 분할하였다. 태종 계사년에 문천군으로 고쳤다. ○ 이균(伊均)이라고도 한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95리이다.
○ 홍원(洪原) : 옛날에는 홍긍(洪肯)이라고 일컬었으며 혹은 홍헌(洪獻)이라고도 한다. 고려 말기에 현을 두었으나 태조 무인년에 홍원으로 고치고 함흥에 예속시켰다. 태종 임오년에 다시 분할하여 현을 두었다가 얼마 후에 폐읍하고 도로 함흥에 예속시켰다. 세종 계축년(1433 세종 15)에 다시 현을 두었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9백 20리이다.
○ 이성(利城) : 옛날에는 시리(時利)라고 일컬었다. 고려 때에는 복주(福州)에 예속되었다. 세종 병진년에 단천의 마운령(磨雲嶺) 남쪽에 있는 두 사(社)와 동사(東社)를 떼내어 이성현을 두었다. ○ 시질간(時叱間)ㆍ다보(多甫)ㆍ아사(阿沙)ㆍ관성(觀城)이라고도 한다. ○ 3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백 15리이다.
○ 장진(長津) 결(缺)
○ 북도(北道) 길주(吉州) : 성이 있다. 고구려의 옛 땅인데 오랫동안 여진에 점거되었다. 윤관이 여진을 쫓아내고 국경선을 획정하니 동쪽은 화곶령(火串嶺)에 이르고, 북쪽은 궁한령(弓漢嶺)에 이르며 서쪽은 몽라골령(蒙羅骨嶺)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강토가 되었다. 궁한촌(弓漢村)에 6백 70칸(間)을 쌓고 길주라고 이름하였다가, 얼마 후에 여진에 돌려 주었다.뒤에 원 나라에 빼앗겨 해양(海洋)이라고 일컬었다. 공양왕이 길주 등처관 군민 만호부(吉州等處管軍民萬戶府)를 두고 영주(英州)ㆍ선화(宣化) 등의 진을 모두 여기에 예속시켰다. 태조 무인년에 길주목으로 고쳤다. 예종 기축년에 현으로 낮추어 길성(吉城)이라고 부르고, 이 주(州) 북쪽 영평 등 땅을 분할하여 따로 명천현(明川縣)을 두었다가 중종 임신년(1512, 중종 7)에 다시 올렸다. 선조 을사년에 다시 올렸다. ○ 삼해(三海) 혹은 삼양(三洋)이라고도 하였다.ㆍ웅성(雄城)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3백 85리이다.
○ 옛 웅주(雄州) 윤관이 여진을 쫓아내고 화곶령(火串嶺) 아래에 성을 쌓은 뒤 영해군웅주방어사(寧海郡雄州防禦使)를 두었다. 공양왕 때 길주(吉州)와 합하였다.《고려사》에 이르기를, “길주는 북쪽에 있고 웅주는 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지금 그 땅을 상세히 알 수 없다. 가 있고, 옛 영주(英州) 윤관이 몽라골령 아래에 성을 쌓고 안령군 영주 방어사(安嶺軍英州防禦使)를 두었다. 지금 그 땅을 상세히 알 수 없다. 가 있으며, ○ 옛 선화진(宣化鎭) 윤관이 진을 두었다. 공민왕 때 수복하여 길주와 합하였다. 이 있다.
○ 경원(慶源) : 성이 있다. 옛날의 공주(孔州)인데 광주(匡州)라고도 한다. 오랫동안 여진에 점거되었었다. 윤관이 성채를 설치하고 공험진(公險鎭)이라고 하였다. 태조 무인년에 경원부로 고쳤다. 경성(鏡城)ㆍ용성(龍城) 이북을 분리시켜 여기에 예속시켰다. 태종 기축년에 관아를 소다로(蘇多老)의 옛 진영에 옮기고 경인년에 민가들을 옮겨 경성에 합하고 마침내 그 땅을 비우게 하였다.정축년에는 경성의 두롱이현(豆籠耳峴) 이북 땅을 분리시켜 부가참(富家站)에 다시 고을을 설치하였다. 세종 무신년에는 또 부의 관아를 회질가(會叱家)의 땅 남쪽 지방의 백성들을 옮겨다가 이곳에 채웠다. 추성(楸城)에 옮겼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2천 2백 9리이다. ○ 거양성(巨陽城)이 있다.
○ 회령(會寧) : 성이 있다. 고구려의 옛 땅 알목하(斡木河)이니 오음회(吾音會)라고도 한다. 태종 때 알타리(斡朶里)의 동맹가(童孟哥)가 허술함을 틈타서 들어와 살았다. 세종 갑인년에 알목하에 성과 보루를 설치하고 영북진(寧北鎭)으로 하여금 겸하여 관장하게 하였다.이해 여름에 따로 진을 두어 회령진이라고 일컫고 첨사를 두었다. 겨울에 부로 승격시켰다. ○ 오산(鰲山)ㆍ회산(會山)이라고도 한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9백 35리다. 공험령(公嶮嶺)이 있다. 지금은 상고 할 수 없다.
○ 종성(鐘城) : 성이 있다. 수주(愁州)이다. 세종 을묘년(1435, 세종 17)에 영북 본진(寧北本鎭)에 군을 두고 백안수소(伯顔愁所)이다. 종성이라고 불렀다. 경신년에 관아를 수주(愁州)로 옮기고, 본진은 도절제사의 행영으로 하였다. 신유년에 부로 올렸다. ○ 종산(鐘山)이라고도 한다. ○ 5면, 서울과의 거리는 2천 32리이다.
○ 온성(穩城) : 성이 있다. 다온평(多溫平)이다. 세종 경신년에 처음으로 군을 두어 온성으로 고치고 신유년에 부로 올렸다. ○ 전성(氈城)이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2천 백 2리이다.
○ 경흥(慶興) : 성이 있다. 옛 공주(孔州)의 땅이다. 경원의 관아를 회질가(會叱家)로 옮겨 공주의 옛 성에 만호를 두었다. 을묘년에 따로 현을 두어 공성현(孔城縣)이라고 일컫다가 정사년에 군으로 올렸다. 목조(穆祖)가 처음으로 터전을 마련한 곳이다. 경흥으로 고치고 계해년에 부(府)로 올렸다. ○ 공성(孔城)ㆍ광성(匡城)이라고도 한다. ○ 서울과의 거리는 2천 3백 64리이다.
○ 부령(富寧) : 성이 있다. 경성군 석막(石幕)의 땅이다. 세종 신해년에 처음으로 영북진(寧北鎭)을 두고 경성을 겸하여 관장하게 하였다. 갑인년에 진을 백안수소(伯顔愁所)로 옮기고, 석막의 옛 땅을 토착 관리인 천호(千戶)가 지켰다.기사년에 부거현(富居縣)을 폐지하고 백성들을 석막으로 옮겨 부령부라고 이름하였다. ○ 영산(寧山)이라고도 한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6백 95리이다. ○ 부거(富居)는 폐현이다. 경성의 부가참(富家站)이니 지금의 회수역(懷綏驛)이다.
○ 명천(明川) : 성이 있다. 길주(吉州)의 명원역(明原驛)이다. 예종 기축년에 길주의 장덕산(長德山) 이북의 땅을 분할하여 따로 명천현을 두고 명원을 관아로 삼았다.중종 임신년에 현을 폐지하고 길주에 예속시켰다가, 계유년에 다시 분할하고 고을을 두었으며 선조 을사년에 부로 올렸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4백 55리이다.
○ 무산(茂山) : 성이 있다. 숙종 갑자년에 처음으로 부를 두었다. ○ 삼산(三山)ㆍ오대(鰲戴)라고도 한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8백 40리이다.
○ 경성(鏡城) : 성이 있다. 우롱이(亐籠耳)인데 목랑고(木郞古)라고도 한다. 태조 무인년에 처음으로 경성이라고 일컫고 만호를 두었다. 정종 경진년에 군으로 올렸고 세종 병진년(1436 세종 18)에 부로 올렸다. 세조 정해년에 북병영을 두었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5백 95리이다.
○ 평안도 : 동북과 동은 함경도의 경계이고, 동남은 함경도ㆍ황해도 두 도(道)의 경계이며, 남은 황해도의 경계이고, 서남과 서는 바다이고, 서북은 압록강, 북은 여진(女眞)의 경계이다. 42 고을, 남도 22고을, 북도 20고을 본래 조선 땅인데 한4군 때에는 낙랑군(樂浪郡)이다. 뒤에 고구려의 땅이 되었다.신라 문무왕(文武王)이 당 나라의 장수 이적(李勣)과 더불어 고구려를 쳐서 멸망시키고 마침내 그 땅을 병합하였다. 패강(浿江) 대동강 이남의 땅은 한주(漢州)에 예속되고 강 북쪽은 모두 발해와 여진에 들어갔다. 신라 말기에 궁예가 이 땅을 나누어 패서(浿西) 13진(鎭)을 두었다. 고려가 점차로 수복하여 성종 때에는 패서도를 두었다.뒤에 북계(北界)라고 일컬었고 숙종 때에는 서북면이라고 일컬었다. 뒤에 황주목(黃州牧)ㆍ안악군(安岳郡)ㆍ철화현(鐵和縣)ㆍ장명진(長命鎭)을 여기에 예속시켰다. 우왕 때에 다시 예속하였다. 본조의 초기에 압록강 안의 땅을 모조리 개척하였다. 태종 계사년에 평안도로 고쳤다. 병신년에 여연군(閭延郡)을 설치하였고, 세종 때에 자성(慈城)ㆍ우예(虞芮)ㆍ무창(茂昌)을 설치하였다. 여연ㆍ무창ㆍ우예는 본래 영길도(永吉道)ㆍ갑산(甲山)의 땅인데 여기에 예속시켰다. 세조 을해년에 모두 폐지하고 그 땅을 비워버렸다.
○ 남도 평양 : 성이 있다. 단군이 평양에 도읍을 정하여 전조선(前朝鮮)이 되었고, 기자(箕子)가 와서 여기에 도읍을 정하여 후조선(後朝鮮)이 되었으며, 위만(衛滿)이 왕험성(王險城) 왕검성(王儉城)이라고도 한다. 에 도읍을 정하여 위만조선(衛滿朝鮮)이 되었다. 한 무제가 왕검성을 낙랑군으로 삼았다.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이 국내성(國內城)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적(李勣)이 신라와 합력하여 고구려를 쳐서 멸망시키고 여기에 안동도호부를 두었다.고려 태조 때에는 서경이라고 하였다. 평양이 황폐하다고 하여 염주(鹽州)ㆍ백주(白州)ㆍ황주(黃州)ㆍ해주(海州)ㆍ봉주(鳳州) 등 여러 고을의 백성들을 옮겨다가 이곳을 채웠다. 뒤에 서도(西都)로 고쳤다. 혹은 호경(鎬京)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뒤에 몽고에 빼앗겨 동녕부(東寧府)라 하였고 파령(岊嶺)을 경계로 삼았다. 원 나라가 우리에게 돌려주어 다시 서경이 되었다. 공민왕이 여기에 만호부(萬戶府)를 두었고 뒤에 평양부로 고쳤다. 본조에서는 감영을 설치하였다. ○ 기성(箕城)ㆍ장안(長安)ㆍ유경(柳京)이라고도 한다. ○ 36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66리이다.
○ 안주(安州) : 성이 있다. 고구려 때의 식성군(息城郡)인데 신라 때 중반군(重盤郡)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팽원군(彭原郡)으로 고쳤으며, 또 안북부(安北府)를 두었다가 영주 안북부(寧州安北府)로 고쳤다. 공민왕이 안주 만호부를 두었다가 뒤에 목(牧)으로 올렸다. ○ 안릉(安陵)ㆍ밀성(密城)이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36리이다. ○ 옛날의 맹주(孟州) 맹산(孟山)이 본주의 속향일 때의 관아이다. 이다.
○ 성천(成川) : 비류왕 송양(松讓)의 옛 수도인데 고구려의 동명왕이 다물도(多勿都)를 두었다. 송양을 다물후로 봉하였다. 고려 태조가 여기에 강덕진(剛德鎭)을 두고 뒤에 성천군으로 고쳤으며 태종 을미년에 성천부로 고쳤다. ○ 졸본 부여(卒本扶餘)라고도 한다. ○ 25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6리이다.
○ 숙천(肅川) : 고려 때의 평원군(平原郡)인데 태조가 진국성(鎭國城)을 이곳으로 옮겨 쌓고 통덕진(通德鎭)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뒤에 숙주(肅州)라고 일컫다가 군으로 고쳤다. 태종 병신년에 숙천부로 올렸다. ○ 평원(平原)이라고도 한다. ○ 14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76리이다.
○ 중화(中和) : 고구려 때의 가화압(加火押)인데 신라 때 당악현(唐岳縣)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서경의 속촌이 되었다가 뒤에 중화현으로 하였다. 묘청의 반란이 있은 뒤에 경기의 4도(四道)를 나누어 6현으로 하였다. 뒤에 군으로 올렸다가 선조 임진년에 부로 올렸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16리이다. ○ 송현(松峴)은 폐현이다. ○ 고구려의 부사파의현(夫斯波衣縣)이다.
○ 자산(慈山) : 고려 때의 문성군(文城郡)인데 태안주(太安州)로 고쳤다가 자주(慈州)로 고쳤으며 다시 군으로 하였다. 태종 계사년에 자산으로 고쳤다. 연산군 을축년에 폐읍하였다가 중종 초년에 다시 그전대로 두었다. 숙종 계미년(1703, 숙종 29)에 부로 올렸다. ○ 자모(慈母)라고도 한다. ○ 10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56리이다.
○ 삼화(三和) : 고려 때 경기를 나누어 삼화현을 만들었다. 금당(金堂)ㆍ호산(呼山)ㆍ칠정(漆井)의 세 부곡을 합한 것이다. 숙종 병인년(1686, 숙종 12)에 부로 올렸다. ○ 11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36리이다.
○ 상원(祥原) : 고구려 때의 식달현(息達縣)인데 신라 때에는 토산(土山)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황주(黃州)에 예속시켰다가 상원군이라 고쳤고 뒤에 본도에 예속시켰다. ○ 금달(今達)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36리이다.
○ 함종(咸從) : 고려 때의 아선성(牙善城)인데 뒤에 함종현으로 고쳤다. 경종 신축년에 부로 올렸다. ○ 아산이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36리이다.
○ 덕천(德川) : 고려 때의 요원군(遼原郡)인데 장덕진(長德鎭)이라고도 한다. 덕주(德州)로 고쳤다가 태종 계사년에 덕천으로 고쳤다. 얼마 안되어 맹산과 합하여 덕맹현(德孟縣)이라고 일컫다가 얼마 후에 이전대로 하였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46리이다. ○ 옛 무산현(撫山縣) 옛날에는 영변에 예속되었으나 세조 때에 덕천에 예속되었다. 이 있다.
○ 개천(价川) : 고려 때의 안수진(安水鎭)인데 연주(連州)로 고쳤다가 조양진(朝陽鎭)으로 고치고, 다시 익주(翼州)로 고쳤으며 또 개주(价州)로 고쳤다. 태종 계사년에 개천군으로 고쳤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91리이다.
○ 순천(順川) : 고려 때의 정융군(靜戎郡)인데 순주(順州)로 고쳤다. 뒤에 덕주(德州)에 합하였다가 다시 나누어 군으로 하였고 태종 계사년(1413, 태종 13)에 순천군으로 고쳤다. ○ 15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21리이다.
○ 용강(龍岡) : 옛날의 황국(黃國)인데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고려 때에는 황룡성(黃龍城)이라고 일컬었고 군악(軍岳)이라고도 한다. 뒤에 용강현으로 고쳤다. ○ 오산(烏山)이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56리이다.
○ 영유(永柔) : 고려 때의 정수현(定水縣)인데 뒤에 영청(永淸)으로 고쳐 용강(龍岡)에 예속시켰으며, 또 현을 폐지하고 안인(安仁)의 진장(鎭將)이 겸임하게 하였다. 태조 계유년에 안인진을 안주(安州)에 이속시키고 통해현(通海縣)과 영원(寧遠)ㆍ유원(柔遠) 두 진(鎭)과 합쳐서 영녕현이라고 일컬었다.세종 계묘년(1423, 세종 5)에 영유로 고쳤다. ○ 청계(淸溪)라고도 한다. ○ 14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36리이다. ○ 유원진(柔遠鎭)이 있고 고려 때의 평로진(平虜鎭)이다. ○ 옛 영원이 있다. 세조가 영원은 요해지라고 하여 별도로 군을 두었다. 통해(通海)는 폐현이다.
○ 증산(甑山) : 본래 강서현(江西縣)의 증산향인데 태조 갑술년에 분할하여 현으로 하였다. ○ 서하(西河)라고도 한다. ○ 선조 을미년에 폐읍하였다가 정미년에 다시 두었다. ○ 5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56리이다.
○ 삼등(三登) : 고려 때 서경기(西京畿)에서 분할한 성주(成州)의 삼부곡(三部曲) 신성(新城)ㆍ나평(蘿坪)ㆍ구아(狗牙) 을 합하여 삼등현(三登縣)을 만들었다. 6현(縣) 중의 하나이다. 세종 때 강동현(江東縣)과 합하였다가 세조 을해년에 폐지하였다. ○ 능성(能城)이라고도 하고 양양(陽壤)이라고도 한다. ○ 3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56리이다.
○ 순안(順安) : 고려 때 서경기(西京畿)에서 분할하여 순화현(順和縣)을 만들었다. 6현 중의 하나이다. 태조 병자년에 관아를 평양의 안정참(安定站)으로 옮겼다. ○ 평교(平郊)라고도 한다. ○ 10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60리이다.
○ 강서(江西) : 고려 때 서경기(西京畿)에서 분할하여 강서현을 만들었다. 6현 중의 하나이다. 태조 갑술년에 증산향(甑山鄕)을 나누어 따로 증산현을 만들었다. ○ 무학(舞鶴)이라고도 한다. ○ 11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16리이다.
○ 양덕(陽德) : 본래 고려 때의 양암(陽巖)ㆍ수덕(樹德) 두 진인데, 태조 병자년에 합하여 양덕현을 만들었다. ○ 동양(東陽)이라고도 한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96리이다.
○ 맹산(孟山) : 고려 때의 철옹현(鐵甕縣)인데 뒤에 맹주(孟州) 맹주(猛州)라고도 쓴다. 라고 일컬었다. 뒤에 은주(殷州)에 합하였다가 또 나누어 현을 두었다. 태종 신사년에 안주와 합하였다가 갑오년에 다시 예전대로 하였다. 또 맹주ㆍ덕주(德州)와 합하여 덕맹(德孟)이라고 일컫다가 다음해에 분할하여 맹산현으로 하였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46리이다.
○ 강동(江東) : 고려 때 서경기(西京畿)에서 분리하여 강동현을 만들었다. 6현 중의 하나이다. 뒤에 성주에 예속되었다가 다시 현을 두었다. 세종 을묘년에 폐읍하고 삼등에 예속시켰으며, 삼등현의 관아를 이 고을에 옮겼다. 성종 임인년에 다시 현을 두었다. ○ 송양(松壤)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56리이다.
○ 은산(殷山) : 고려 때의 흥덕군(興德郡)인데 동창(同昌)이라고도 한다. 뒤에 은주(殷州)라고 일컬었다. 태종 갑오년에 폐읍하고 자산(慈山)에 예속시켰다가 을미년에 분할하여 은산현으로 하였다. 인조 계미년(1643, 인조 21)에 부로 올렸다가 얼마 후에 도로 낮추었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86리이다.
○ 북도(北道) 의주 : 성이 있다. 고려 때의 용만현(龍灣縣)인데 화의(和義)라고도 한다. 거란이 압록강의 동쪽 언덕에 성을 쌓고 보주(保州)라고 일컬었으며, 또 궁구문(弓口門)을 설치하고 포주(抱州)라고 일컬었다. 파주(把州)라고도 한다. 그곳의 요(遼) 나라 사람이 우리나라에 귀화하였으므로 의주(義州)라고 고치고, 남쪽 지방 사람들을 데려다가 이곳을 채웠다. 다시 압록강을 경계로 삼았다. 뒤에 낮추어 함신(咸新)이라고 일컫다가 얼마 후에 복구하고 또 목(牧)으로 올렸다. 또 만호부를 두고 좌정(左精)ㆍ우정(右精)ㆍ충신(忠信)ㆍ의용(義勇)의 4군(軍)을 두었다. 선조 계사년에 부윤으로 올렸다. 태종 임오년에 정주(靜州)와 함원진(咸遠鎭)을 예속시켰다. ○ 송산(松山)이라고도 한다. ○ 21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96리이다.

국내성(國內城) : 불이성(不而城)이라고도 한다. 고구려의 유리왕이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겨서 위나암성(尉那岩城)을 쌓고 4백년을 지나다가 장수왕 때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 정인지(鄭麟趾)의 《고려지리지(高麗地理志)》에는, “인주(麟州)에 긴 성터가 있으니 덕종조 때 유소(柳韶)가 축조한 것이다. 압록강이 바다에 흘러 들어간 곳을 기점으로 하고 있다.”고 하였다.또 <병지>에는 “서해빈(西海濱)의 옛날 국내성의 경계인 압록강이 바다에 들어간 곳을 기점으로 하였다.” 하니, 국내성은 당연히 옛 인주의 경내에 있는 것이다. 김부식의 《고구려지지(高句麗地志)》에는 “국내성은 어디에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압록강 이북의 한(漢) 나라 현도군(玄菟郡)의 경계인 요동경(遼東京) 요양(遼陽)의 동쪽에 있었을 것이다.”고 하였다. 어느 설이 옳은지 상세히 알 수 없다.

옛 정주(靜州) : 본래 고려의 송산현(松山縣)인데 덕종(德宗) 때 성을 쌓고 정주진이라고 하였다. 태종 때 의주(義州)에 예속시켰다. 세종 때에 또 석성(石城)을 쌓았다.
옛 인주 : 본래 고려의 영제현(靈蹄縣)인데 현종 때 인주(麟州)라고 일컬었고 토성을 쌓았다. 세상에서는 오여(烏餘)라고 불렀다. 뒤에 함인군(含仁郡)이라 낮추어 불렀고, 본조에서는 의주에 예속시켰다가 세종 때 인산진을 두었다.
옛 영주(靈州) : 본래, 고려 때의 흥화진(興化鎭)인데 현종 때에 영주로 올렸다.
옛 정령현(定寧縣) : 태종 5년에 현령을 두었다. 세종 때 방산(方山)으로 옮기고 군으로 올렸다. 세조 원년에 옛 읍으로 돌아왔으나 2년에 폐읍하고 의주에 예속시켰다.
○ 영변(寧邊) : 성이 있다. 영주(迎州)는 고려 때의 밀운군(密雲郡)인데 연주(延州)로 고쳤다가 연산부(延山府)로 올렸다. 무주(撫州)는 고려 때의 운남군(雲南郡)인데 또는 고청산(古靑山)이라고도 한다. 뒤에 현을 두었다. 태종 계사년에 무산현(撫山縣)으로 고쳤다. 세종 기유년에 영산(迎山)과 무산(撫山)을 합하여 영변부라 하고 약산성(藥山城)에 읍(邑)을 두었다. 단종 때 병영을 설치하였다. 세조 때 옛 연주의 땅을 분할하여 운산(雲山)에 예속시켰다. ○ 안삭고청산(安朔古靑山)이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96리이다. ○ 옛 위주(渭州)가 있으며 낙릉군(樂陵郡)인데 옛날에는 덕성(德城)이라고도 하였다. 고려 때 위주로 고쳤으며, 위천성이 있다. 행인국(荇人國)이 있다. 태백산의 동쪽에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 그 땅을 자세히 알 수 없다.
○ 정주(定州) : 성이 있다. 고려 때의 구천군(龜川郡)인데 정원부(定遠府)로 올리고 또 정주목으로 고쳤다. 세조 을해년에 분할하여 옛 구주(龜州)의 땅에 구성군(龜城郡)을 두고 정주의 관아를 수주(隨州)로 옮기고 마침내 수천군(隨川郡)을 폐하였다. ○ 조천(鳥川)이라고도 한다. ○ 19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56리이다. ○ 수천(隨川)은 폐현이다. 고려 때의 수주이니 곽주(郭州)를 겸하게 하였다가 뒤에 다시 분할하여 곽주를 두었다. 태종 계사년에 수천군으로 고쳤고, 세조 때 폐읍하고 정주의 관아를 이곳으로 옮겨 왔다.
○ 강계(江界) : 성이 있다. 옛날에는 독로강(禿魯江)이라고 일컬었다. 고려 때에는 만호를 두고 강계로 고쳤다. 진변(鎭邊)ㆍ진성(鎭城)ㆍ진안(鎭安)ㆍ진녕(鎭寧)의 네 군을 만들었다. 태종 신사년에 입석(立石)ㆍ등이언(等伊彦)의 두 땅을 합하여 석주(石州)라고 일컫고 부로 고쳤다. 세종 때 도절제사의 진영을 두었으나 조금 후에 폐지하였다. ○ 청원(淸源)이라고도 한다. ○ 11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3백 46리이다. ○ 여연(閭延)은 폐부이며 본래 함길도 갑산부(甲山府)의 여연촌인데, 태종 병신년에 부(府)와의 거리가 너무 멀다고 하여 소훈두(小薰豆)의 서쪽을 떼내어 여연군을 만들어 본도에 예속시켰다. 세종 때 부(府)로 올렸으며, 세조 을해년에는 그 땅을 비워 버리고 그곳의 백성들을 구성으로 옮겼다. 무창(茂昌)은 폐군이고, 본래 여연부의 상무로보(上無路堡)인데 세종 병진년에 만호를 두었다. 뒤에 또 무창현을 두었다가 군으로 올렸다. 세조 때 그 땅을 비워 버렸다. 우예(虞芮)도 폐군이며 본래는 여연보(閭延堡)이니 처음에 만호(萬戶)를 두었다가 세종 때 우예군을 두었다. 세조 때 그 땅을 비워 버리고 그곳의 백성을 부로 옮겼다. 자성(慈城)도 폐군이다. 본래 여연 때, 번강(番江)의 자작리(慈作里)였다. 세종 때 자성군을 두었으며 세조 때 그 땅을 비워버렸다.
○ 창성(昌城) : 성이 있다. 창주(昌州)는 고려 때의 장정현(長靜縣)인데 창주로 고쳤으며, 이성부(泥城府)에는 만호를 설치하였다. 진평(鎭平)ㆍ진강(鎭康)ㆍ진정(鎭靜)ㆍ진원(鎭遠)의 4군(四軍)을 만들었다. 태종 임오년에 이성을 창주에 합하여 창성군으로 고쳤다. 계사년에 현으로 고쳤다가 세종 때 부(府)로 올렸다. 7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백 6리이다.
○ 삭주(朔州) : 성이 있다. 고려 때의 영새현(寧塞縣)인데 삭주로 고쳤다가 부로 올렸다. 태조 갑술년에 땅의 경계가 서로 어긋난다 하여 옛 구주와 그 부근의 12촌(村)을 분리하여 여기에 합쳤다. 군으로 낮추었다가 태종 계사년에 부로 올렸다. 세종 기미년에 군으로 낮추었다가 경신년에 다시 부로 올렸다. 세조 병술년에는 고을의 관아를 소삭주(小朔州)로 옮겼다. ○ 3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36리이다.
○ 구성(龜城) : 성이 있다. 고려 때의 만년군(萬年郡)이며 구주(龜州)로 고쳤다. 정원부로 올렸다가 또 정주목으로 고쳤다. 뒤에 주의 관아를 마산(馬山)의 남쪽으로 옮겼다. 세조 을해년에 옛 구주를 떼내어 구성군을 만들고 여연과 무창을 없애고, 그곳의 백성들을 구성군으로 옮겨 왔다. 병술년에 부로 올렸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96리이다. ○ 안의진(安義鎭)이 있다. 옛날에는 수주에 예속시켰다가 세조 때 구성에 예속시켰다.
○ 선천(宣川) : 성이 있다. 본래 안화군(安化郡)인데 고려 초기에 통주(通州)로 고쳤다가 선주(宣州)로 고쳤다. 태종 계사년에 선천군으로 고쳤으며, 명종 계해년에 부로 올렸다가 조금 후에 도로 낮추었으나 인조 계해년에 다시 올렸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9백 23리이다. ○ 동림성(東林城)이 있다. 옛 선주성(宣州城)이다.
○ 철산(鐵山) : 고려 때의 장녕현(長寧縣)인데 동산(銅山)이라고도 한다. 철주(鐵州)로 고쳤다가 태조 임신년에 지주(知州)라 하고 영삭 만호(寧朔 萬戶)를 겸하게 하였다.태종 계사년에 철산으로 고쳤다. 을미년에 만호를 폐지하고 그대로 군으로 하였다. 광해군 임술년(1622, 광해군 14)에 부로 올렸다. ○ 철천(鐵川)이라고도 한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9백 76리이다. ○ 옛 영삭성(寧朔城)이 있다. 옛날에는 만호영(萬戶營)이 있었다.
○ 용천(龍川) : 성이 있다. 고려 때의 안흥군(安興郡)인데 용천으로 고쳤다가 용만부로 고쳤다. 태종 계사년에 용천으로 고쳤고 광해군 경신년에 부로 올렸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6리이다. ○ 유등정(柳等井)은 폐현이다.
○ 초산(楚山) : 성이 있다. 본래 여진이 살던 두목리(豆木里)이다. 태종 임오년에 산양회(山羊會) 등의 땅을 합하여 이주(理州)라고 하였다가 계사년에 이산(理山)으로 고쳤다. 세종 때 관아를 앙상리(央上里)로 옮겼다. 경종 갑진년에 군을 부로 올렸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백 96리이다.
○ 가산(嘉山) : 고려 때의 신도군(信都郡)인데 고덕현(古德縣)이라고도 한다. 가주(嘉州)로 올렸다가 무령(撫寧)이라고 낮추어 불렀다. 태종 계사년에 가산군으로 고쳤다. ○ 고덕진(古德鎭)이라고도 한다. ○ 5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96리이다.
○ 곽산(郭山) : 고려 때의 장리현(長利縣)인데 곽주(郭州)로 고쳤다가 정양(定襄)이라고 낮추어 불렀었다. 태종 계사년에 곽산군으로 고쳤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86리이다.
○ 희천(熙川) : 고려 때의 청새진(淸塞鎭)인데 위주(威州)로 올렸다가 희주(熙州)로 고치고 개주(价州)에서 겸하여 관리하게 하였는데, 태조 병자년에 분할하고 군을 두었다. 태종 계사년에 희천으로 고쳤다. ○ 위성(威城)이라고도 한다. 8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1리이다. ○ 봉단성(鳳丹城)이 있다.
○ 벽동(碧潼) : 성이 있다. 여진이 살던 임토(林土)ㆍ벽단(碧團)의 땅인데 공민왕이 이성만호(泥城萬戶) 김진(金進) 등을 보내어 쳐서 쫓아버리고 임토를 음동(陰潼)이라고 고친 뒤에 벽단을 여기에 예속시켰다. 남쪽 지방의 사람들을 뽑아 이곳을 채웠다. 태종 계미년에 벽동군(碧潼郡)으로 고쳤다. ○ 10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백 21리이다.
○ 운산(雲山) : 고려 때의 운중군인데 고원화진(古遠化鎭)이라고도 한다. 위화진(威化鎭)으로 고쳤다가 운주(雲州)로 개칭하고 태종 계사년에 운산으로 고쳤다. 운양(雲陽)이라고도 한다. 세조 기묘년에 폐읍하고 영변부에 예속시켰다가 임오년에 복구하였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56리이다.
○ 박천(博川) :고려 때의 박릉군(博陵郡)인데 고덕창(古德昌)이라고도 한다. 박주(博州)로 고쳤다가 태종 계사년(1413, 태종 13)에 박천으로 고쳤다. 세조 기묘년에 폐읍하고 영변부에 예속시켰다가 갑신년에 예전대로 하였다. ○ 5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76리이다.
○ 위원(渭原) : 본래 초산군(楚山郡)의 도을한보(都乙漢堡)인데, 세종 계해년(1443 세종 25)에 사방이 모두 멀리 떨어진 곳이어서,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을 때에 구원하기 어렵다고 하여, 강계ㆍ초산(楚山)의 땅을 분할하여 위원군을 만들었다. 세조 경진년에 폐읍하고 이산(理山)에 예속시켰다가 계미년에 이전대로 하였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2백 36리이다. ○ 봉화대(烽火臺) 보루가 있다.
○ 영원(寧遠) : 고려 때의 영원진인데 태조 병자년에 영청현(永淸縣)과 합하여 영령(永寧)이라고 일컫다가 세조 병술년에 옛 영원 땅에 따로 군을 두었다. ○ 요원(遼原)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91리이다.
○ 태천(泰川) : 고려 때의 광화현(光化縣)인데 영삭(寧朔)ㆍ연삭(連朔)이라고도 하였는데 태주(泰州)라고 고쳤다. 공민왕 때 무주(撫州)ㆍ위주(渭州) 두 주를 이 군에 예속시켰고 뒤에 다시 분할하여 두 주를 두었다. 태종 계사년(1413, 태종 13)에 태천군으로 고쳤고, 성종 임인년에 현으로 낮추었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36리이다.

 

 

 

청풍군(淸風郡)

신증동국여지승람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 충청도(忠淸道)

 

동쪽으로 단양군(丹陽郡) 경계까지 39리이고, 남쪽으로 경상도(慶尙道) 문경현(聞慶縣) 경계까지 60리이고, 서쪽으로 충주(忠州) 경계까지 40리이고, 북쪽으로 제천현(堤川縣) 경계까지 17리이고, 서울까지의 거리는 3백 5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사열이현(沙熱伊縣)인데, 신라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쳐 내제군(奈堤郡)의 영현(領縣)을 삼았다. 고려 현종(顯宗) 9년에 충주(忠州)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충숙왕(忠肅王) 4년에 현(縣)의 중 청공(淸恭)이 왕사(王師)가 되었으므로 지군사(知郡事)로 승격시켰는데 본조(本朝)에서 인습하였다.
【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사열이(沙熱伊).
【성씨】 본군 유(劉)ㆍ전(全) 김(金)이라 하기도 한다. 장(莊)ㆍ장(張) 단양(丹陽)
【풍속】 풍속이 화전(火田)을 숭상한다. 정추(鄭樞)의 시에, “풍속이 불로 가는 것[火耕]을 숭상하여 조를 많이 심는다.” 하였다.
【형승】 산천이 기이하고 빼어나서 남도(南道)의 으뜸이 된다. 송처관(宋處寬)의 한벽루기(寒碧樓記). 한 줄기 맑은 강 정추(鄭樞)의 시에, “천년 교목(喬木)은 일천 봉우리가 합하고, 한 줄기의 맑은 강은 한 고을로 전한다.” 하였다.
【산천】 인지산(因地山) 군 남쪽 1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무암산(茂巖山) 군 동쪽 10리에 있다. 창고(倉庫)의 예전 터가 있는데, 고려 때에 경상도의 전부(田賦)를 이곳에 옮겼다. 삼방산(三方山) 군 북쪽 3리에 있다. 금곡산(金谷山) 군 서쪽 26리에 있다. 저성산(猪城山) 군 동쪽 5리에 있는데, 돌 성이 있다. 병풍산(屛風山) 군 북쪽 1리에 있는데, 바람 구멍이 있다. 부산(婦山) 군 서쪽 15리에 있다. 성황산(城隍山) 군 동쪽 3리에 있다. 월악산(月岳山) 군 남쪽 50리에 있다. 신라에서는 월형산(月兄山)이라고 일컬었다. 소사(小祀)로 되었다. 전산(箭山) 전소산(箭所山)에 있다. 백야산(白夜山) 군 남쪽 33리에 있다. 쌍암산(雙巖山) 군 동쪽 5리에 있다. 취산(鷲山) 군 남쪽 2리에 있는데, 군창(軍倉)이 있다. 장선현(長善峴) 군 서쪽 20리에 있다. 가라현(加羅峴) 군 서쪽 16리에 있는데, 지극히 험하고 막히었다. 북진(北津) 병풍산 밑에 있다. 근원이 강릉부(江陵府) 오대산(五臺山)에서 나와서 금천(金遷)으로 흘러 들어간다. 고교천(高橋川) 군 북쪽 8리에 있다. 근원이 제천현(堤川縣) 경계에서 나와서 북진(北津)으로 들어간다. 월천(月川) 군 서쪽 40리에 있다. 근원이 부덕산(夫德山)에서 나와 충주(忠州) 진포(辰浦)로 흘러 들어간다. 『신증』 엄성천(嚴城遷) 군 서쪽 20리에 있다. ○ 최숙생의 시에, “산허리에 돌 길이 열렸으니, 말 발이 밟는다. 돌을 포개어 천 길을 임하였고, 구름을 뚫고 만 층을 오른다. 응당 오정(五丁)의 파는 것을 번거롭게 하였으리라. 정히 구천(九天)에 오르는 것 같다. 눈에 가득한 것이 모두 맑은 경치이니, 시를 써서 나의 지난 것을 기록한다.” 하였다.
【토산】 사(絲)ㆍ주철[水鐵] 군 동쪽 평등산(平登山)에서 산출된다. 송이[松蕈]ㆍ대추[棗]ㆍ꿀[蜂蜜]ㆍ지치[紫草]ㆍ석이버섯[石蕈]ㆍ인삼(人蔘)ㆍ복령(茯苓)ㆍ산무애뱀[白花蛇]ㆍ영양(羚羊)ㆍ먹[墨]ㆍ석유황(石硫黃) 전산(箭山)ㆍ백야산(白夜山)ㆍ쌍암산(雙巖山)ㆍ논양리(論陽里) 등지에서 난다. 석종유(石鍾乳) 군 북쪽 풍혈(風穴)과 군 남쪽 저전리(苧田里) 석혈(石穴)에서 산출된다. 『신증』 청토(靑土) 군 동쪽 목동(木洞)에서 난다. 녹반(綠礬) 군 북쪽 전산에서 난다.
【봉수】 오현 봉수(吾峴烽燧) 군 남쪽에 있다. 동쪽으로 단양군(丹陽郡) 소이산(所伊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충주(忠州) 심항산(心項山)에 응한다.
【누정】 한벽루(寒碧樓) 객관(客館) 동쪽에 있어 큰 강을 굽어 임하였다. ○ 하륜(河崙)의 기에, “내가 옛날에 여러 번 죽령 길을 지났는데, 청풍 군수(淸風郡守)가 매양 길옆에서 맞이하고 전송하였다. 고을의 형세를 물으니, 한벽루(寒碧樓)를 일컫고 또 주 문절공(朱文節公)이 네 구절의 시를 읊었다. 나는 듣고 즐거웠으나 바빴기 때문에 한 번 들어가서 올라가 구경할 여가가 없었다. 지금 정군 수홍(鄭君守弘)이 편지로 내게 청하기를, ‘이 고을의 한벽루가 한 방면에서 이름나 참으로 기이하니 구경할 만한데, 수십 년 동안 비에 젖고 바람에 깎여 거의 장차 못쓰게 될 지경이었다. 내가 고을에 이르러 다행히 나라가 한가한 때를 만나서 금년 가을에 공장을 불러 수리하여 들보ㆍ도리ㆍ기둥ㆍ마루의 썩고 기울어진 것을 새 재목으로 바꾸지 않은 것이 없으니, 청컨대 그대는 다행히 기를 지어서 뒤에 오는 사람에게 보여라.’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누정(樓亭)을 수리하는 것은 수령으로서 말단의 일일 뿐이다. 그러나 그 흉하고 폐하는 것이 실상 세도(世道)와 서로 관계된다. 세도가 오르고 내림이 있으매 민생이 즐겁고 불안함이 같지 않고 누정의 흥폐(興廢)가 이에 따르니, 한 누각의 흥하고 폐함으로써 한 고을의 즐겁고 불안함을 알 수 있고, 한 고을의 즐겁고 불안함으로 세도의 오르내림을 알 수 있으니, 어찌 서로 관계됨이 심한 것이 아닌가. 지금 이 누각이 수십 년 꺾이고 썩은 나머지 정군이 정사하는 날에 이르러 중수하여 새롭게 하였으니, 세도가 수십 년 전과 다름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군현(郡縣)에 아직 수리하지 않은 누정이 있으니, 또한 어찌 다만 세도의 탓이랴. 정군 같은 이는 세도에 순응하여 다스림을 하는 사람이라 이를 만하다. 내가 옛날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있을 때에 정군은 바야흐로 지안성 군사(知安城郡事)로 있어서 이름이 치적(治績)의 최(最)에 있었기 때문에 내가 비로소 그 사람됨을 알았다. 그러므로 이것을 써서 기(記)를 삼는다. 또 계산(溪山)의 승경(勝景)과 누각의 제도의 아름다움은 눈으로 보지 않으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청풍(淸風)의 칭호와 한벽(寒碧)의 이름은 듣기만 해도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뼈가 서늘하게 한다. 훗날 혹 능히 적송자(赤松子)와 함께 놀 소원을 이루어 다시 죽령 길을 지나게 된다면, 마땅히 군을 위하여 한 번 들어가 올라서 주 문절(朱文節)의 시를 읊어 그 사람을 수백 년 위에 상상하여 보고, 또 군의 유애시(遺愛詩) 한 편을 짓고 가리라.” 하였다.
○ 주열(朱悅)의 시에, “물빛이 맑고 맑아 거울 아닌 거울이요, 산 기운이 자욱하여 연기 아닌 연기로다. 차고[寒] 푸름[碧] 서로 엉기어 한 고을 되었거늘, 맑은 바람[淸風]을 만고에 전할 이 없네.” 하였다.
○ 양숙(梁肅)의 시에, “다락 밖에 어지러이 붉은 것은 붉은 살구꽃 비요, 시냇가에 연푸른 것은 푸른 버들 연기로다. 한 지경의 밝은 달 맑은 바람 좋은 경치를 세속 사람 향하여 쉽게 전하지 마소.” 하였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호남(湖南)의 50성(城)을 두루 다녀 보았지만, 경치 좋은 땅 오늘에야 그윽한 정취에 맞네, 백 척의 푸른 누각 바람을 내려다보아 산뜻하고, 푸른 벽 천 길이나 쇠를 깎아 만든 듯 싶다. 산이 좋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납극(蠟屐)을 생각하게 하고, 강이 맑으니 나를 불러서 먼지 낀 갓끈을 씻게 한다. 도원(桃源)이 반드시 인간 세상 아닌 것이 아니니, 고기잡이 늙은이를 따라 이 생을 보내려 한다.” 하였다.
『신증』 최숙생(崔叔生)의 시에, “산이 컴컴하니 반쪽에 급한 비가 뛰고, 강이 맑으니 한쪽에 가벼운 연기가 덮였다. 괴이하게도 불 같은 더위가 모두 사라져 없어지니, 홀연히 긴 바람이 일만 골짜기에 전하노라.” 하였다.
○ 유운(柳雲)의 시에, “산협을 쪼개어 강을 달리는 것이 거령(巨靈)의 힘이라. 피곤하여 서성거리니 손의 혼이 깬다. 여울 소리가 귀를 흔드니 찬 것이 베개에서 나고, 산 기운이 창에 가득하니 푸른 것이 병풍이 되었다. 비가 씻으니 갈매기의 모래는 밝기가 눈 같고, 달이 잠기니 고기잡이 불이 어지럽기가 반딧불 같다. 무단히 만리의 외로운 배 피리 소리에, 한 조각 돌아갈 마음이 동정호(洞庭湖)에 아득하다.” 하였다.

『신증』 명월정(明月亭) 한벽루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군 남쪽 1리에 있다.
【역원】 황강역(黃江驛) 군 서쪽 35리에 있다. 수산역(壽山驛) 군 남쪽 26리에 있다. 안음역(安陰驛) 옛 이름은 안성(安城)이다. 군 북쪽 5리에 있다. 권일원(權一院) 군 남쪽 26리에 있다. 논양원(論陽院) 군 서쪽 33리에 있다. 주병원(酒餠院) 군 서쪽 25리에 있다.
【불우】 월악사(月岳寺) 월악산(月岳山)에 있다. 산방사(山房寺)ㆍ무암사(霧巖寺) 모두 백야산(白夜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군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군 남쪽에 있다. 여단(厲壇) 군 북쪽에 있다.
【고적】 목촌소(木村所) 군 북쪽 1리에 있다. 전산소(箭山所) 군 북쪽 17리에 있다. 결매소(結買所) 군 북쪽 2리에 있다.
【명환】 고려 안종원(安宗源) 공민왕(恭愍王) 때의 지군사(知郡事).
본조 송처관(宋處寬) 지군사 『신증』 김연수(金延壽) 정치에 맑고 간략한 것을 숭상하였다. 처음에 고을 사람이 나무로 만든 허수아비를 얻자 신(神)이라 하여 매년 5, 6월 사이에 객사 대청에 받들어 두고 크게 제사를 벌리니, 온 경내가 모두 모여 들어서 폐단이 된 지가 오래었다. 연수가 관에 부임하매 곧 무당과 그 일을 시초한 자를 잡아서 곤장을 때리고, 드디어 그 나무 허수아비를 불태우니 요망한 제사가 끊어졌다. 송담(宋譚).
【인물】 본조 김길통(金吉通) 임자년(1432)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다. 성종(成宗) 때에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월천군(月川君)을 봉하고, 벼슬이 호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평(文平)이다. 아들 순명(順命)이 과거에 오르고, 적개공신(敵愾功臣)에 참여하여 청릉군(淸陵君)을 봉하였다.
『신증』 【효자】 본조 유자하(柳自河) 부모를 지성으로 섬겨 아버지 병이 위급하자 똥을 맛보아 죽고 살지를 증험하였다. 일이 조정에 들리매 정려(旌閭)하였다.
【제영】 도화촌로신선경(桃花村路神仙境) 정인지(鄭麟趾)의 시에, “복사꽃 촌 길은 신선의 지경이요, 단풍잎 시내와 산은 금수(錦繡)의 병풍이다.” 하였다. 입운조도통인연(入雲鳥道通人煙) 안극인(安克仁)의 시에, “물을 끼고 있는 백성의 삶은 곧 신선 지경이로구나. 구름에 치달은 새 길[鳥道]은 인가의 연기와 통한다.” 하였다. 대강서주흡운연(大江西走吸雲煙) 정추(鄭樞)의 시에, “늘어선 멧부리가 동으로 돌아서 해와 달을 맞이하고, 큰 강이 서쪽으로 달아나면서 구름과 연기를 흡수한다.” 하였다. 일강미우수생연(一江微雨水生煙) 김백영(金伯英)의 시에, “9월의 맑은 서리에 산이 비단이 되었고, 한 강의 부슬비에 물에서 연기가 난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1895)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현종 9년(1668)에 중궁전하 김씨(金氏) 명성왕후(明聖王后) 의 관향(貫鄕)이라하여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켰다.
【관원】 도호부사(都護府使) 충주진관 병마동첨절제사(忠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를 겸한다. 한 사람.
【방면】 읍내(邑內) 끝이 5리. 근남(近南) 처음이 10리, 끝이 30리. 원남(遠南) 처음이 20리, 끝이 40리. 근서(近西) 처음이 5리, 끝이 30리. 원서(遠西) 처음이 30리, 끝이 55리. 동면(東面) 처음이 10리, 끝이 20리. 북면(北面) 처음이 5리, 끝이 15리. 수화(水化)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
【성지】 고성(古城) 저성(猪城)이라 칭하는데, 동쪽으로 5리에 있으며, 옛터가 있다. 고성(古城) 성황산(城隍山)에 있었는데, 유적(遺跡)이 있다.
【신라】 문무왕(文武王) 13년(673)에 사열산성(沙熱山城)을 증축하였다.
【진도】 북강진(北江津) 북쪽으로 5리에 있는데, 제천(堤川)으로 통한다. 황강진(黃江津) 역북(驛北)에 있으며, 원주(原州)로 통한다.
【토산】 누치[訥魚]ㆍ쏘가리[錦鱗魚]ㆍ자라[鼈]
【사원】 봉강서원(鳳岡書院) 현종 신해년(1671)에 세웠고, 임자년(1672)에 사액하였다. 김식(金湜) 자는 노천(老泉), 본관은 청풍(淸風), 중종 경신년(1520)에 자살하였다. 벼슬은 부제학,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의(文懿). 김권(金權) 자는 이중(而中), 김식의 손자. 광해주 임술년(1622)에 귀양가서 죽었다. 벼슬은 이조 판서,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간(忠簡). 김육(金堉) 개성(開城)에 보인다. ○ 황강서원(黃江書院) 영종 병오년(1726)에 세웠고 정미년(1727)에 사액하였다. 권상하(權尙夏) 충주(忠州)에 보인다.

오정(五丁)의 파는 것 : 옛날에 진 나라가 촉 나라를 치려고 하니, 산이 험하여 길이 통하지 못하자, 금(金)을 똥으로 누는 소[牛]가 있어, 촉 나라에 선사하겠다 하니, 촉왕이 속아서 다섯 명의 역사[五丁]를 시켜서 산을 파서 길을 내었다.
납극(蠟屐) : 진(晉) 나라 완부(阮孚)는 나무신을 좋아하여 손수 나무신에 납(蠟)을 발라서 윤택하게 하였고, 사영운(謝靈運)은 산에 오를 때에 반드시 나무신을 신었는데, 오를 때에는 앞 굽을 떼고 내려올 때는 뒷 굽을 떼었다.
갓끈 :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에,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 하였다.
도원(桃源) :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무릉(武陵)의 고기잡이하는 사람이 어선을 타고 도화원에 들어가 진(秦)나라 때에 피난 와서 사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참 살기 좋은 곳이었다. 돌아올 때에 곳곳에 표시를 하고 다시 찾아갔으나 찾지 못하였다.” 하였다.

제천현(堤川縣)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 충청도(忠淸道)

 

동쪽으로 강원도 영월군(寧越郡) 경계까지 17리이고, 영춘현(永春縣) 경계까지 18리이고, 남쪽으로 청풍군(淸風郡) 경계까지 20리이고, 단양군(丹陽郡) 경계까지 20리이고, 서쪽으로 충주(忠州) 경계까지 43리이고, 북쪽으로 강원도 원주(原州) 경계까지 36리이고, 서울까지의 거리는 3백 91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내토군(奈吐郡)인데 신라에서 내제(奈堤)로 고쳤고, 고려 초에 제주(堤州)로 고쳤다. 성종(成宗) 14년(995)에 자사(刺史)를 두었다가 목종(穆宗) 8년(1005)에 파하였고, 현종(顯宗) 9년(1018)에 원주(原州)에 붙였고, 예종(睿宗) 원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本朝) 태종(太宗) 13년(1413)에 규례에 따라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현감을 만들었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내토(奈吐)ㆍ내제(奈堤)ㆍ의천(義川)ㆍ의원(義原).
【성씨】 본현 지(智)ㆍ안(安)ㆍ석(石)ㆍ강(姜)ㆍ나(那).
【풍속】 백성의 풍속이 소박하고 간략하다 권근(權近)의 향교기(鄕校記)에 있다.
【형승】 지세(地勢)가 가장 높다 정인지(鄭麟趾)의 시에, 물은 겹겹이요 산은 거듭거듭이다.신개(申槩)의 시에, “갈수록 물은 겹겹이요, 또 산은 거듭거듭인데, 약간의 민가는 그림 속이로다.” 하였다.
【산천】 용두산(龍頭山) 현 북쪽 12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대덕산(大德山) 현 북쪽 21리에 있다. 박달산(朴達山) 현 서쪽 35리에 있다. 감암산(紺巖山) 현 북쪽 40리에 있다. 부곡산(釜谷山) 현 동쪽 12리 영춘현(永春縣) 경계에 있다. 주유산(舟遊山) 현 서쪽 15리에 있다. 두모곡산(豆毛谷山) 현 서쪽 15리에 있다. 주유산과 서로 마주 대하였다. 가질문산(加叱文山) 현 서쪽 61리 강원도 원주 경계에 있다. 호명산(虎鳴山) 현 동남쪽 17리에 있다. 말응달산(末應達山) 현 남쪽 10리에 있다. 벌을산(伐乙山) 현 동쪽 2리에 있다. 제비랑산(齊非郞山) 현 서쪽 15리에 있다. 광탄(廣灘) 현 서쪽 21리에 있다. 근원이 원주(原州) 치악산(雉岳山)에서 나와서 청풍군(淸風郡) 북진(北津) 아래로 흘러 들어간다. 사계(沙溪) 현 남쪽 5리에 있다. 부곡산(釜谷山)에서 나와서 또 서쪽으로 흘러 광탄(廣灘)에 들어간다. 둔지천(屯池川) 현 서쪽 43리에 있다. 가질문산(加叱文山)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흘러 청풍군 북진으로 들어간다. 의림지(義林池) 현 북쪽 10리에 있다. 그 깊이가 헤아릴 수 없고, 관개(灌漑)하는 것이 대단히 넓다.
【토산】 순채[蓴] 의림지(義林池)에서 난다. 철(鐵) 현 북쪽 미고개(未古介)에서 난다. 대추[棗]ㆍ꿀[蜂蜜]ㆍ송이[松蕈]ㆍ지치[紫草]ㆍ산무애뱀[白花蛇]ㆍ안식향(安息香)ㆍ복령(茯苓)ㆍ신감채(辛甘菜). 『신증』 영양각(羚羊角)ㆍ방풍(防風).
『신증』 【궁실】 치헌(癡軒) 객관(客館) 서쪽에 있다. ○ 김일손(金馹孫)의 기(記)에, “내 벗 권자범(權子汎)이 이 고을을 다스린 지 3년 만에 객관의 서쪽 낭무(廊廡)를 수리하여 헌(軒)을 만들고 나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내가 자범에게 말하기를, ‘먼저 이름을 짓고 뒤에 기를 써도 되겠는가? 치헌(癡軒)이라고 이름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자범이 치(癡)의 뜻을 묻거늘, 내가 웃고 대답하지 않자, 자범이 자못 불쾌한 모양이었다. 한참 만에 내가 감히 고하기를, ‘왕숙(王叔)의 어리석음과 왕연(王椽)의 어리석음은 은덕(隱德)의 어리석음이요, 간사한 어리석음과 투기하는 어리석음은 교활한 자의 어리석음이요, 문(文)으로 해서 서치(書癡)가 되고 무(武)로 해서 호치(虎癡)가 되는 것은 재주가 특이하여 어리석은 것이다. 술을 끊는 자도 어리석은 것이고, 관(官)의 일을 잘하는 자도 또한 어리석은 것이다. 옛날에 어리석음으로 이름한 것이 하나가 아닌데 자네의 어리석음도 또한 하나만이 아니다. 세상 사람은 말에 영리한데 자네는 유독 말에 어리석어서 말을 하면 기휘(忌諱)에 저촉되고, 세상 사람은 모양을 차리기에 능란한데 자네는 유독 행동거지가 어리석어 사람으로 하여금 미움이 생기게 하고, 세상 사람은 출세하는 데에 교묘하여 한 자급(資級)만 얻으면 잃을까봐 근심하는데, 자네는 교리의 청반(淸班)으로서 스스로 낮추어 궁벽한 고을의 현감이 되었으니, 이것은 벼슬에 어리석은 것이다. 세상 사람은 사무에 응함에 민첩하여 백성에 임하는데는 명예를 우선으로 하고 윗사람을 받드는데는 칭찬을 우선으로 삼는데, 자네는 홀로 아무 일 없이 재각(齋閣)에 앉아 휘파람이나 불고 억센 호족(豪族)과 교활한 자를 탄압하고 불쌍한 홀아비와 과부를 어루만지는 것으로 마음을 삼으며 부세(賦稅)를 독촉하는 데에는 졸(拙)하니, 이것은 정사에 어리석은 것이다. 세상의 관리된 자가 용렬한 자는 백성을 수고롭힌다는 것으로 핑계를 삼아서 관사가 낡은 것을 보고도 기울고 허물어지는 대로 내버려 두어서 스스로 간이(簡易)한 정치를 행한다고 말을 드러내고, 일에 재간이 있는 자는 높은 집과 아로새긴 담장을 쌓지 않는 것이 없어서, 그것이 토목(土木)의 요망한 것이 되는 줄을 알지 못하고 부지런하고 일 잘한다는 명성을 크게 날리는데, 자네는 제천에 있어서 낡은 집을 수리하였으니 이미 용렬한 자가 되지 못하였고 또 능력이 있는 자도 되지 못하였다. 노는 사람을 부리고 백성을 수고롭히지 않으려고 도리어 자기의 마음을 수고롭히니, 이것은 일을 하는데에 어리석은 것이다. 자네의 어리석음을 합하여 이 헌(軒)에 편액(扁額)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 자범이 말하기를, ‘어리석은 것으로 나를 조롱하는 것은 마땅하지만, 나의 어리석음으로 해서 공관(公館)에 욕이 되게 하는 것은 좋지 않다.’ 하자, 내가 말하기를, ‘아, 천지간의 만물을 모두 조물주가 주장하니, 통달하여 본다면 어떤 물건이 공(公)이 아니며, 만일 한 물건에 집착한다면 사(私) 아닌 것이 없다. 만일 사로 여긴다면 한 고을의 물건이 6기(期) 동안의 사물(私物)이 되고, 공(公)으로 여긴다면 한 몸과 한 집도 백년의 공물(公物)일 뿐이다. 유종원(柳宗元)도 오히려 유주(柳州)의 시내[溪]를 우(愚)로 이름하였으니, 지금 어찌 제천의 헌(軒)을 치(癡)로 이름하지 못하겠는가. 치라는 것은 우(愚)와 비슷한 것인데, 또 바꾸면 졸(拙)이 된다. 안연(顔淵)의 우(愚)와 고시(高柴)의 우(愚)와 영무자(甯武子)의 우(愚)가 모두 공자(孔子) 문하에서 칭찬을 받았고, 주무숙(周茂叔)의 졸(拙)은 형벌이 맑아지고 폐단이 끊어지는 데에 이르렀으니, 그렇다면 치로 헌을 이름짓는 것이 헌의 욕이 아니라 바로 헌의 영광이다. 어리석은 현감을 얻었으니 조물주도 또한 이 헌에 대하여 다행으로 여길 것이요, 세상의 지교(智巧)로 이름난 자로 비록 이 헌을 만들고 싶어도 하지 못할 것이다.’ 하니, 자범이 말하기를, ‘좋다. 장차 치(癡)를 지켜 몸을 바치겠다.’ 하였다. 한참 있다가 또 고하기를, ‘고자고(高子羔)가 지름길로 가지도 않고 구멍으로 나가지도 않은 것이 공자가 미복(微服)으로 송(宋) 나라를 지난 것과 어떠한가? 여단(呂端)의 호도(糊塗)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 같으나 왕계은(王繼恩)을 가둔 것은 임금을 섬김에 어리석지 않은 것이요, 사마백강(司馬伯康) 형제가 실지(實地)를 밟아서 평생에 거짓이 없었으나 장사(葬師)에게 뇌물을 주어서 일가 사람들을 속인 것은 어버이를 섬김에 어리석지 않은 것이다. 역(易)은 기이한 것을 숭상하고 예(禮)는 변화를 숭상하나니, 옛날 성현이 변화에 맞추어 능히 통하게 한 이런 종류가 한 가지가 아니다. 자네도 또 오로지 치(癡)만 지켜서는 안 된다.’ 하니, 자범이 말하기를, ‘내가 세상의 교(巧)한 것을 싫어하여 나의 치를 지키려고 하는데, 자네의 말과 같이 한다면 대중(大中)에 이르지도 못하고 나의 치가 뒤섞이게 될까 두렵다.’ 하자,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자네는 참으로 어리석다.’ 하니, 자범이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대답하지 않고 난간에 기대어 졸았다.” 하였다.

【학교】 향교 현 동쪽 2리에 있다. ○ 권근(權近)의 기에, “제주(堤州)가 양광도(楊廣道)에 있어서 땅이 가장 궁벽하고 백성이 순박하고 간략하다.
관(官)은 감무(監務)이어서 과직이 또한 심히 낮고, 학교는 폐한 지가 이미 오래다. 홍무(洪武) 무진년(1388)에 여러 주(州)의 현령과 감무를 승격시켜 모두 참상관(參上官)으로 임명하게 하고, 또 학교를 일으키라는 명령이 있었고, 금상(今上)께서 즉위하자 더욱 학교를 중하게 여겼다. 기사년(1389) 겨울에 우리 동향(同鄕) 사람 김유(金綏)가 관찰판관(觀察判官)으로서 밭을 측량하여 직무를 잘하였으므로 발탁되어 이 고을의 감무에 보직되었다. 고을을 다스린 지 1년이 넘으매 폐단이 없어지고 백성이 편안하여 공역(功役)을 일으킬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여러 사람들에게 상의하기를, ‘백성을 다스리는 데는 교화(敎化)로써 근본을 삼는다. 이 고을이 비록 작으나 학교가 없으니 만일 영건(營建)하여 인재를 기르지 않는다면 결코 국가에서 학교를 일으키는 것을 위임한 뜻이 아니다.’ 하고, 묵은 터를 살펴보아 가시덤불을 베고 사토(砂土)를 제거하고 재목을 수집하고 기와를 구어서 집 한 칸을 세우고, 전후 좌우에 처마를 달아서 선성(先聖)의 신위(神位)를 봉안하여 석전(釋奠)하는 전(殿)으로 만들고, 동서에 낭무(廊廡) 각각 4칸을 두어 여러 생도들의 학업을 강마하는 장소로 삼고, 그 남쪽에 문 한 칸을 세우고 옆에 주방을 두되 또한 4칸으로 하였다. 이어 온돌방을 꾸며 교관(敎官)이 편히 휴식하는 곳으로 만들었으니, 제도가 간단하면서도 위치가 갖춰지고 공역(工役)이 간략하면서도 일이 완성되었다. 신미년(1391) 정월부터 역사를 시작하여 가을이 되어 끝이 났다. 이에 고을 안의 자제 약간 명을 모아서 가르치니, 재물은 호마다 거두지 않고 힘은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60여 년 동안 폐한 학교를 일으켰으니, 매우 아름다운 일이다. 그 해 겨울에 사람을 양촌(陽村)에 보내어 시말을 기록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내가 사양하다 못하여 배우는 자들에게 고하기를, ‘천성 민이(天性民彝)는 고금과 먼 변방의 다름이 없으니, 10집이 되는 고을에도 반드시 충신(忠信)한 사람이 있는 것이다. 다만 학문을 강마하지 않는 것이 걱정이다. 다행히 이제 거룩한 임금과 어진 정승을 만나 정치를 중흥하여 교화가 크게 행해지는데, 김군이 위로 국가의 아름다운 뜻을 본받아 폐한 학교를 영건하여 새롭게 하여 가르치고 기르기를 이렇게 지극히 하니, 너희 제생(諸生)들이 만일 학업에 힘쓰지 않는다면 이것은 스스로를 버리는 것[自棄]이다. 학문을 하는 방법은 책에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그 요법은 다만 심술(心術)을 바르게 하는데 있을 뿐이다. 심술이 바르게 된 연후에야 어버이를 섬기고 임금을 섬기고 공무를 다스리고 백성을 다스려서 온갖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성현의 글을 읽고 화려한 문장을 잘하더라도 마침내는 소인 선비[小人儒]가 되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니,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했다.

【역원】 천남역(泉南驛) 현 서쪽 6리에 있다. 보통원(寶通院) 현 안에 있다. 유원(楡院) 현 동쪽 15리에 있다. 박달원(朴達院) 박달현(朴達峴) 밑에 있다. 황간원(黃澗院) 현 서북쪽 27리에 있다.
『신증』 둔지원(屯池院) 현 서쪽 43리에 있다.
【불우】 소악사(小岳寺) 대덕산(大德山)에 있다. 공전사(公田寺) 박달산(朴達山)에 있다. 의암사(義巖寺) 대덕산에 있다. 감암사(紺巖寺) 감암산(紺巖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용두산(龍頭山)에 있다. 여단(厲壇)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의천루(義泉樓) 예전에 객관 동쪽에 있었다. 원림부곡(員林部曲) 현 남쪽 20리에 있다. 양성부곡(陽城部曲) 현 북쪽 25리에 있다. 소당부곡(小堂部曲) 현 서쪽 20리에 있다. 지금은 소탕리(所湯里)라고 일컫는다. 산척처(山尺處) 현 서쪽 41리에 있다. 공재소(空梓所) 현 서쪽 51리에 있다.
【제영】 천종무저두(泉從無底竇) 정인지(鄭麟趾)의 시에, “지세는 가장 높은 곳이요, 백성이 사는 곳은 궁벽한 시골이로다. 샘이 밑 없는 구멍으로부터 나와 펑펑 솟아서 절로 못을 이룬다.” 하였다. 야활전다옥(野闊田多沃)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골짜기 가운데에 네 고을이 열렸는데, 이 고을만이 넓고 평평한 곳을 차지했네. 들이 넓으니 밭이 대부분 비옥하고, 산이 깊으니 물이 저절로 맑다. 관청이 쓸쓸하니 지나는 손이 드물고, 땅이 궁벽하니 백성이 적다. 고을 원은 응당 일이 없어서, 울리는 거문고가 자리 위에 빗겨 있으리라.” 하였다. 소경연애일선통(小逕沿崖一線通)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작은 길이 비탈을 따라 한 오라기 실끝같이 통하였고, 돌은 톱니 같아 모양이 뾰족뾰족하다. 말굽은 엎어지기 쉽고 앞길은 먼데, 또 산 서쪽에 지는 해가 붉구나.” 하였다. 『신증』 한계포야류(寒溪抱野流)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고을은 예스러운데 강산은 좋고, 정자가 새로우니 경치도 많다. 연기 빛은 땅 위에 뜨고, 산 빛은 담장 머리에 나온다. 늙은 나무는 하늘에 닿아 서 있고, 찬 시내는 들을 안고 흐른다. 손이 와서 이틀 밤을 머물러 자니, 시 생각이 더욱 유유(悠悠)하도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동면(東面) 처음이 5리, 끝이 20리이다. 남면(南面) 위와 같다. 북면(北面)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현좌(縣左) 동쪽으로 끝이 10리이다. 현우(縣右) 서쪽으로 끝이 30리이다. 근좌(近左) 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40리이다. 근우(近右)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원서(遠西) 서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70리이다. ○ 원림부곡(員林部曲)은 남쪽으로 20리, 양성부곡(陽城部曲)은 북쪽으로 25리, 소당부곡(小堂部曲)은 서쪽으로 20리인데, 지금은 소탕리(所湯里). 산척처(山尺處)는 서쪽으로 40리, 공재소(空梓所)는 서쪽으로 50리이다.
【성지】 고성(古城) 현의 북쪽이다. 제비랑 고성(齊非郞古城)ㆍ대덕산 고성(大德山古城)ㆍ감악산 고성(紺岳山古城) 둘레가 2천 6백 척인데 너무 험해서 쌓을 수 없다.

왕숙(王叔)의 어리석음 : 진(晉) 나라 왕담(王湛)을 온 집안이 모두 치(癡)라 하였다. 무제(武帝)가 왕담의 조카 제(濟)에게 묻기를, ‘경의 집의 치숙(癡叔)이 죽었는가?’ 하자, 왕제는 치하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서치(書癡) : 두위(竇威)의 집이 대대로 훈귀(勳貴)하고 여러 형제들이 모두 무예(武藝)를 숭상했는데, 두위는 문사(文史)를 탐독하므로 여러 형들이 서치(書癡)라고 하였다.
유종원(柳宗元)도……이름하였으니 : 유종원이 유주자사(柳州刺史)로 있을 때에 우계서(愚溪序)를 지었다.
여단(呂端)의 호도(糊塗)한 것 : 송 태종(宋太宗)이 여단으로 정승을 삼으려 하니, 혹자가 말하기를, “여단은 호도(糊塗 어물어물)하다.” 하자 태종이 말하기를, “여단은 작은 일에는 호도하지만 큰 일에는 호도하지 않다.” 하고, 정승을 삼았다.
[주D-005]사마백강(司馬伯康)……주어서 : 사마광(司馬光) 형제가 그 아버지를 장사하는데 족인들이 장사(葬師)를 청하자고 고집하자, 형 백강(伯康)이 장사를 청하여 후하게 주고 자기 뜻을 장사의 뜻으로 꾸며 족인들에게 발표하니, 족인들이 기뻐하였다.

 

 

 

 

출처 :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글쓴이 : 매일하우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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