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조선왕조실록 > 숙종 9년 계해(1683,강희 22) > 10월16일 (계축) > 최종기사

 

고려 좨주 우탁의 서원에 역동이란 액호를 내리다

 

고려(高麗) 좨주(祭酒) 우탁(禹倬)의 서원(書院)에 역동(易東)이란 액호(額號)를 내렸다.


【원전】 38 집 664 면
【분류】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왕실-사급(賜給)


국역승정원일기 > 고종 38년 신축(1901, 광무 5) > 12월27일 (기미, 양력 2월 5일) >

 

공자를 대성선사로 고쳐 쓸 것 등의 의견을 진달하는 봉상사 제조 김태제의 상소

 

○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 김태제(金台濟)가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은 지난번에 난잡한 글을 외람되이 올려 온화한 비답을 받았으므로 너무도 황송하고 감격하여 살아서는 목숨을 바치고 죽어서도 결초보은(結草報恩)하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삼가 생각건대, 선성(先聖)과 선현(先賢)의 위호(位號)를 바르게 하고 공자(孔子)와 기자(箕子)의 후손들을 봉하며 교경당(校經堂)을 창설하는 문제는, 어느 것이나 모두 종교(宗敎 유교(儒敎)를 가리킴)를 육성하고 확립하는 방도이니, 오직 가져다 시행하면 될 뿐이므로 지금 다시 아뢰어 성상을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전의 진언(進言)에 아직도 미진한 점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감히 추가해서 아룁니다.
삼가 《숙종보감(肅宗寶鑑)》을 상고해 보니, 우의정 이상진(李尙眞)이 현종(玄宗)이 공자에게 문선왕(文宣王)이라는 시호(諡號)를 준 잘못에 대해 논하기를, ‘스스로 황제라고 하면서 신자(臣子)로 봉한 사람에게 억지로 왕이라는 칭호를 준 것은 성인을 존중하는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맨 처음에 주공(周公)을 선성(先聖)이라 부르고 공자를 선사(先師)라고 부른 것은 진실로 성인을 높이는 데에 마땅한 일이었고, 그 뒤에 공자를 선성이라 부르고 안자(顔子)를 선사라고 부른 것도 정도(正道)에 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당(唐) 나라 때에 옛것을 고쳐 왕으로 봉한 것은 후세의 시비를 면하기 어려운 일이었으니, 명(明) 나라 때에 왕이라는 칭호를 사(師)로 고친 것은 잘못을 단번에 바로잡았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신의 소견에는 아주 좋기는 하나 완전히 좋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대성문선(大成文宣)’이라는 칭호를 없앤 이상 ‘지성(至聖)’만을 남겨 두어서는 안 되니, 지금 만약 신주에 ‘대성선사(大聖先師)’ 또는 ‘대성종사(大聖宗師)’라는 네 글자로 특별히 고쳐 쓴다면 스승을 높이는 데에 부합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배향(配享)하는 네 분을 여전히 복성(復聖), 종성(宗聖), 술성(述聖), 아성(亞聖) 등의 칭호로 부르는 것은 사실 평가하는 말에서 나온 것인 만큼 공경심이 부족한 것 같으니, 모두 버리고 단지 선사(先師) 혹은 선성(先聖), 선철(先哲)로 통틀어 부르는 것이 올바를 것 같습니다. 십철(十哲)과 배향하는 신위(神位)에 이르러서는 명 나라 제도대로 단지 선현(先賢)과 선유(先儒)로 고치고, 우리나라 선정(先正)의 신위 또한 선생(先生)이나 선정(先正)으로 써야지 작호(爵號)와 시호(諡號)를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을 참으로 나란히 놓아서는 안 되는데, 동무(東廡)의 54번째 신위 선정신(先正臣) 김장생(金長生)과 55번째 신위 선정신 김집(金集)이 부자간이어서 온당치 못한 듯하니 역시 의논하여 고쳐야 할 것입니다.
또 태학(太學)은, 공자의 사당이라는 견지에서 말하면 묘궁(廟宮)처럼 보아야 할 것이고 성균관(成均館)이라는 견지에서 말하면 다른 관각(館閣)처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참으로 하나의 관청으로 두어서 자립하게 해야 하는데, 지금은 학부(學部) 안에 소속되어 허다한 학교(學校)들과 뒤섞여 구별이 없으니, 바로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삼가 생각건대, 성인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 그 도(道)를 연구하는 일은 남긴 경서(經書)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 차례 화재를 겪고 여기저기 흩어져서 《십삼경주소(十三經註疏)》와 《설문해자(說文解字)》는 아예 말할 것도 없고, 우선 통용되는 영락(永樂) 연간의 사서(四書)와 삼경(三經)으로 말하더라도 각판(刻板)과 활판(活板)의 틀린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이른바 언해본(諺解本)은 오직 본조(本朝)에만 있는데 선정신 이황(李滉)이 편찬한 것으로 잘못 전해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으며, 그 해석이 모두 꼭 들어맞는 것이 아니어서 정자(程子)나 주자(朱子)의 본의와 차이나는 것이 없지 않고 잘못된 음과 뜻도 매우 많습니다. 또 사서는 일찍이 선정신 이이(李珥)의 언해본이 있었는데 지금은 전습(傳習)되지 않으니, 어찌 한스럽지 않겠습니까.
대체로 교경당(校經堂)은 한대(漢代)에 처음 만들어졌으니, 장안(長安)의 석거각(石渠閣)이나 낙양(洛陽)의 백호관(白虎觀)이 다 오경(五經)을 강론하여 결정하던 곳입니다. 이런 이유로 신은 교경당을 설치하자고 청하는 것입니다. 아, 근래에 학교가 날로 달로 늘어나서 거의 그 종교를 분간할 수 없게 되었는데, 다행히 성상의 조칙이 특별히 내려져 백성들의 뜻이 비로소 정해졌습니다. 이에 현자를 초치하는 일을 참으로 늦출 수 없으며, 배향할 만한 선유(先儒)를 이때에 배향하는 것이 또한 종교를 육성하고 확립하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중국과 우리나라 역대 왕조의 배향할 만한 선유를 거의 빠뜨리지 않고 배향하였는데 오직 명 나라 선유만 빠졌으니, 일찍이 ‘당당한 정통(正統)을 가지고 200년간 인재를 배양(培養)한 명 나라가 원(元) 나라만 못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전에 출향(黜享)한 사람에 대해 비록 논의할 것이 없지는 않지만 크게 보면 모두 공자의 무리가 될 만하니, 전부 빼는 것은 부당할 듯합니다.
그리고 고려조(高麗朝)의 문헌공(文憲公) 최충(崔冲)은 생전에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불렀고, 문희공(文僖公) 우탁(禹倬)은 온 나라 사람들이 역동선생(易東先生)이라고 불렀습니다. 아조(我朝)의 선정신 정구(鄭逑)는 숙묘(肅廟)가 제문(祭文)에 처음으로 선정이라고 썼는데, 그후에 문묘(文廟)에 배향하기를 상소하여 청한 것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선정신 김상헌(金尙憲)은 정묘(正廟)가 전교하기를, ‘도학(道學)이 바르고 절의(節義)가 높은 데 대하여 우리나라 사람들만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청(淸) 나라 사람들까지도 공경하므로 나는 죽은 정승[故相]이라 하지 않고 선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정묘의 하교가 지당합니다. 그런데도 양무(兩廡)에 올려 제사 지내는 일을 질질 끌어 왔으니, 어찌 많은 사람들이 억울해하지 않겠습니까. 서기(徐起)와 송익필(宋翼弼)로 말하면 도학과 실제의 덕행이 모두 배향할 만한데도 단지 출신 때문에 애초에 논의되지 않았으니, 성학(聖學)에 있어서 어찌 문벌을 따지겠습니까.
그리고 인사를 취하는 것으로 논하건대, 향학(鄕學)에서 육덕(六德), 육행(六行), 육예(六藝) 세 종류를 가르쳐서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빈객의 예로 공경하고 왕에게 천거하던 것은 주(周) 나라의 좋은 제도이고, 시(詩)와 부(賦)를 가지고 과거를 보던 것은 수(隋) 나라에서 처음 만든 제도입니다. 지금 과거 제도를 폐지한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지만, 공거(貢擧)를 행하지 않는 것은 실로 미처 시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니, 신은 삼가 현량과(賢良科) 등의 제도를 회복하고 강경(講經)과 제술(製述)의 제도를 참작해서 우수한 사람을 뽑아 벼슬에 임명하는 것이 인재를 권장하는 데에 일조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지금 전후에 아뢴 바대로 경서를 교정하고 유교를 육성하고 확립하면 기자와 공자의 도를 밝히고 성조(聖祖)의 뜻을 이어 나가는 것이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비록 배운 것은 없지만 종교에 대한 일념은 늙었어도 해이해지지 않은바, 다행히 문명(文明)한 때를 만나 감히 어리석은 생각을 아룁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미천한 사람의 말이라 하여 버리지 마시고 조정의 신료들에게 이 상소를 내려 의견을 수합하시어 가령 채택할 만하다고 하면 채택하여 시행해 주소서. 그렇게 해 주신다면 신이 비록 하루를 살다가 죽는다 하더라도 일 년을 더 산 것과 같을 것입니다. ……” 하였다.

양촌선생문집 제35권_

동현사략(東賢事略)_

 

좨주(祭酒) 우탁(禹倬)

 

공은 본관은 단산(丹山)인데, 할아버지 중(仲)은 호장(戶長)을 지냈고 아버지 천규(天珪)는 진사(進士)를 지냈다.
공이 처음 급제하여 영해 사록(寧海司錄)에 임명되었다. 고을에 팔령(八鈴)이라는 요망한 신사(神祠)가 있었는데, 백성이 신괴(神怪)한 데 현혹되어 제사받들기를 매우 번거롭게 하였으므로, 공이 이르자마자 부수어서 바다에 던지니 음사(淫祠 사신(邪神)을 제사지내는 사당이다)가 드디어 근절되었다. 여러 번 승진하여 감찰규정(監察糾正)에 이르렀다. 당시에 충선왕이 내실(內失)이 있자 공이 백의(白衣)로 도끼를 들고 거적자리를 메고서 대궐에 나아가 소(疏)를 올려 과감하게 간하니, 근신(近臣)이 소 읽기를 망설이므로 공이 목소리를 가다듬어,

“경이 근신이 되어 능히 임금의 잘못을 바루어 과실을 구제하지 못하고서 봉악(逢惡)함이 이러하니 경은 자신의 죄를 아는가.”

하니, 좌우가 두려워 떨었고 왕은 부끄러워하여 너그러이 용서하고 행실을 고치매, 온 나라 사람이 훌륭하게 여겼다. 뒤에 퇴관(退官)하여 복주(福州)의 예안(禮安)에서 노년을 보냈는데, 충숙왕이 그의 충의를 가상히 여겨 두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공은 경사(經史)에 통달하였고, 역학(易學)에 더욱 조예가 깊어 복서(卜筮)에 맞히지 않는 것이 없었다. 정전(程傳)이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에는 이해하는 이가 없었는데, 공이 문을 닫고 한 달 남짓 연구한 끝에 마침내 깨쳤다. 그리하여 생도(生徒)들을 가르치니 의리의 학이 비로소 시행되었다. 벼슬이 성균 좨주에 이르러 치사(致仕)하였으며, 지정(至正 원 순제(元順帝)의 연호) 정해년(1347, 충목왕3)에 죽으니 81세였다.

[주D-001]충선왕(忠宣王)이……있자 : 충렬왕이 비(妃)인 숙창원비(淑昌院妃) 김씨(金氏)와 불의(不義)의 관계를 맺었던 일을 말한다. 《高麗史 卷22 禹倬列傳》
[주D-002]봉악(逢惡) : 임금의 악한 마음이 아직 싹트지 않았는데 신하가 악으로 유도하는 것을 말한다. 《맹자(孟子)》 고자 하(告子下)에 “임금의 악함을 순종하는 자는 그 죄가 작고, 임금을 악으로 유도하는 자는 그 죄가 크다.” 하였다.

고려사절요 제23권

충렬왕 5(忠烈王五)

무신 34년(1308) 원 무종(武宗) 지대(至大) 원년

 

○ 봄 정월에 동지밀직 조서(趙瑞)를 원 나라에 보내어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게 했다.
○ 2월에 원 나라에서 보낸 사자가 와서 연호를 고친 조서를 반포하였다.
○ 연등대회(燃燈大會)에서 시신들이 축하하는 술잔을 올리니, 왕이 답배(答杯)를 주며 이르기를, “오늘의 관등(觀燈)이 나의 마지막 관등이니 경 등은 마땅히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시신들이 모두 다 잔을 비웠다.
○ 황제가 왕에게 포도주를 하사하였다.
○ 여름 4월에 원 나라에서 사자를 보내어 향을 주고, 또 황태후의 명으로 처녀를 뽑았다.
○ 왕이 진봉산(進奉山)에서 사냥하였다.
○ 내고에서 왕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 평양군(平壤君) 조인규(趙仁規)가 졸하였다. 조인규는 상원군(祥原郡) 사람인데,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뛰어났었다. 몽고어를 베우는데 동배들보다 뛰어나지 못하다 하여 문을 닫고 3년 동안 밤낮으로 외우고 익혀서 드디어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주청할 일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조인규를 보내니 사신으로 간 적이 모두 30번이나 되었으며, 전대(專對)한 공적이 자못 많았다. 그러나 전민(田民)을 많이 모아 부자가 되었고, 또 왕비의 아버지로서 권세가 한 세상에 진동하였으며, 아들과 사위가 모두 장군과 재상의 지위에 있었다. 병이 들어 자제들이 명의를 데려다가 진찰을 하니 조인규가 말하기를, “내가 한 졸병에서 입신하여 벼슬이 더할 수 없는 품계에 이르고, 나이도 70을 넘었다. 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린 것이니 의원은 무엇하겠는가." 하였다. 그때 여러 아들들은 원 나라에 있고 오직 조연(趙璉)만이 간호하고 있었는데, 그에게 말하기를, “너희 형제 자매가 9명이나 되는데, 서로 다투어서 남에게 비웃음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근신하여라. 집안에서부터 나라일에 이르기까지 이 도리를 따를 것이며, 너희 형제들이 오기를 기다려 고루 타일러서 길이 가법으로 하여라." 하였다. 그러나 그의 딸이 염세충(廉世忠)의 아내가 되었는데, 구종(驅從)하는 종 배삼(裵三)과 간통하여 추문이 퍼졌다.
○ 5월 병인일에 왕이 병이 있어 김문연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 지밀직사사 박선(朴瑄)이 원 나라에서 돌아왔다. 황제가 전왕에게 정책(定策 새 임금을 세울 때에 계책을 도움)한 공훈이 있다고 하여 특히 개부의동삼사 태자태부 상주국 부마도위(開府儀同三司太子太傅上柱國駙馬都尉)로 제수하고 승진시켜 심양왕에 봉하였으며 또 중서성에 들어가 정사에 참의하게 하고, 금호부(金虎符)ㆍ옥대ㆍ칠보대(七寶帶)ㆍ벽전금대(碧鈿金帶)와 황금 5백 냥ㆍ은 5천 냥을 하사하였다. 황후와 황태자도 전왕을 총애하여 사금한 보물과 비단을 이루 다 셀 수 없었다.
○ 전왕이 관제를 개정하여 이혼(李混)ㆍ최균(崔鈞) 등을 보내어 관제와 비판(批判)을 선포하였다.
○ 6월에 원 나라에서 사자를 보내어 모든 왕족과 부마(駙馬)가 역마의 차자(箚子)를 사사로이 발급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 가을 7월에 재상과 추신들이 자운사(慈雲寺)에 모였는데, 어떤 사람이 익명으로 투서를 하여 말하기를, “중호(中護) 이혼이 전왕의 처소에 나아가 전선(銓選)의 방법을 의논할 때, 자기의 두 아들을 발탁하여 승진시켰으며, 그 밖에도 친척과 친구를 천거한 것이 많았습니다. 전하를 속이고 사심을 행했으니 임용하여서는 안 됩니다." 하니, 이혼이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 기사일에 왕이 신효사(神孝寺)에서 흥하였다. 유교(遺敎)에 이르기를, “불곡(不穀 왕이 자기를 낮추어서 하는 말)이 천지와 조종의 도움을 입어 외람되게 왕위에 있은 지 이제 35년이 되었다. 그 사이에 나라에 어려움이 많아 백성은 생업에 안정을 얻지 못하였다. 사악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이 함께 나왔고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들은 스스로 물러갔으니, 이것은 모두 나의 무덕함이 그렇게 만든 것으로 마음에 매우 부끄럽다. 그러나 다행히도 하늘의 도움을 입어 향년 73세가 되었다. 이제 깊은 병을 얻었는데 여러 달 동안 낫지를 않는다. 다만 심양왕을 한 번 보고 싶어서 일찍이 서신을 보내어 오기를 재촉하였는데, 죽을 때가 되었으니 어찌 기다릴 수가 있겠는가. 슬프다. 삶이 있으면 죽임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며, 아비가 전하는 것을 아들이 받는 것은 지금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예부터 그러하였다. 조종의 기업과 나라의 기무를 일체 심양왕에게 맡기니, 오직 너희 신료들은 각각 직책을 지키며 심양왕이 오기를 기다려 나의 유훈(遺訓)을 전달하여 유실함이 없게 하라." 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충경왕(忠敬王 원종(元宗)) 때에 안으로는 권신이 정권을 제멋대로 휘두르고, 밖으로는 강적이 와서 침략당하니, 온 나라의 백성들이 학정에 죽지 않으면 반드시 난리에 죽게 되어 화변이 극도에 이르렀다. 하루 아침에 화를 내린 것을 후회하여 권신들을 베어 죽이고 상국에 귀부하게 하니, 천자가 가상하게 여기고 공주를 하가시켰다. 공주가 이르자, 부로들이 즐거워하여 서로 경하하기를,'백 년 동안의 전쟁 끝에 태평한 시기를 다시 보니,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던 일이다'하였다. 왕이 또 두 번이나 원 나라의 조정에 들어가 조현(朝見)하여 우리 나라의 피폐한 것을 아뢰니 황제가 이미 윤허하였고, 관군을 소환하여 우리나라의 백성들이 안정되었으니, 이 때는 진정 왕이 제대로 일할 수 있는 때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교만한 마음이 갑자기 생겼는가. 놀이와 사냥에 빠져 응방(鷹坊)을 널리 설치하여 간악한 소인 이정(李貞) 등 으로 하여금 고을들을 침노하여 횡포를 부리게 하였으며, 연락(宴樂)에 빠져 궁궐에서 부르고 화답하여 중 조영(祖英) 등으로 하여금 좌우에 가까이하게 하니, 공주와 세자가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고, 재상과 대성(臺省)이 간하여도 좇지 않았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좌우의 참소를 너무 많이 들어 적자를 폐하고 그의 조카를 세우고자 하기에 이르렀으니, 그가 세자로 있을 때에 비록 전고를 밝게 익히고 글을 읽어서 대의를 알았다고 하나 과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아, '처음이 없는 이는 없으나, 끝을 잘 마무리 하는 이는 드물다'한 것은 충렬왕을 두고 한 말이 아닌가." 하였다.

○ 신미일에 첨의평리 김이용(金利用)을 원 나라에 보내어 국상을 고하였다.
○ 8월에 시가(市街)의 장랑(長廊)이 낙성되었다.
○ 임자일에 전왕이 원 나라에서 와서 분상(奔喪)하였는데, 길을 재촉하여 10여 일만에 도착하였다. 빈전(殯殿)에 들어가 곡하고 전제(奠祭)를 행하니, 모든 관원들은 현관(顯冠)과 소복차림으로 시립하였다.
○ 갑인일에 왕이 경령전(景靈殿)에 나아가 왕위의 전승을 고하고, 드디어 수녕궁(壽寧宮)에서 즉위하여 여러 신하들의 조하를 받았는데, 반열의 순서는 오른쪽을 높였다. 예식을 마치기 전에 하늘에서 큰 우레와 번개가 일어나고 우박이 내렸다. 갠 뒤에 첨의사(僉議司)에서 왕에게 연회를 베풀고, 재신 이하의 여러 신하가 모두 백마를 바쳤다.
○ 9월에 양현고(養賢庫)에 은 50근을 하사하고, 예문관(藝文館)으로 하여금 군ㆍ현에서 뛰어나게 재주있는 자들을 불러 모으게 하여 직첩을 주어 훈도(訓導)에 임명하였다.
○ 언부의랑(讞部議郞) 한중희(韓仲熙)를 궁문에서 곤장을 쳤는데 사람들이 그의 죄를 알지 못하였다. 그 뒤에 중희를 불러서 위무하였다.
○ 경오일에 신효사(神孝寺)에 행차하여 황제를 위하여 복을 빌었다.
○ 무인일에 신효사에 행차하였다가 드디어 왕륜사(王輪寺)까지 들렸는데, 주지 인조(仁照)가 차를 드리고 고기반찬을 올렸다.
○ 예문사백(藝文詞伯) 오형(吳詗) 등에게 명하여 여러 궁과 내료의 관직 명칭을 고치게 하였다.
○ 용화지(龍化池)에 행차하니, 중호 김심(金深)이 왕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 수녕궁에서 중과 여승 2천 2백여 명을 공양하였다.
○ 모든 관원들이 왕의 생일을 축하하고 각각 다과를 드렸는데, 전의시(典儀寺)는 미처 드리지 못하였고 서운관(書雲觀)은 배 한 그릇 뿐이어서 전의겸관(典儀兼官) 이언충(李彦忠)과 서운제점(書雲提點) 최실(崔實)에게 모두 은 1근씩을 징수하였다.
○ 겨울 10월에 중문에 방을 붙여 이르기를, “왕륜사의 주지 인조(仁照), 용암사(龍巖寺)의 주지 용선(用宣), 선암사(仙巖寺)의 주지 약굉(若宏)과 최단(崔湍)ㆍ권한공(權漢功)ㆍ김지겸(金之謙)ㆍ김사원(金士元)ㆍ최실(崔實)ㆍ환이(桓頣)ㆍ오현량(吳玄良)ㆍ강방언(姜邦彦)ㆍ이진(李珍)ㆍ강융(姜融)ㆍ조통(趙通)ㆍ조적(曹頔)ㆍ조석(曹碩)ㆍ최현(崔玄)ㆍ정자우(鄭子羽)ㆍ최중공(崔仲公)ㆍ문점(文坫)ㆍ이백겸(李伯謙)을 제외한 사람들은 특별히 부르지 아니하면 들어오지 못한다."고 하였다.
○ 고릉(高陵)을 배알하고, 능터를 불길한 데에 정했다 하여 터를 선정한 밀직부사로 치사한 강헌(姜軒)과 고 찬성사 오윤부(伍允孚)의 사위 강미(姜美)와 외손 2명을 순군옥에 가두고, 마침내 새 능에 가서 호작관(護作官)과 공역하는 무리들에게 술을 하사하여 노고를 위로하였다.
○ 비로서 5부로 하여금 호구를 점검하게 하였다.
○ 낙랑군(樂浪君) 김혼(金琿)이 왕을 맞이하여 남산서재(男山書齋)에서 연회를 베푸니, 재신과 추신과 중들이 날마다 음식을 올리는데 호화하고 사치하기를 다툼이 심했다.
○ 심양노인(瀋陽路人)이 왕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 계사일에 왕이 빈전에 제사드리고 드디어 김문연(金文衍)의 집에 행차하여 숙창원비(淑昌院妃)와 더불어 한참동안 있으니, 사람들이 비로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숙창원비는 문연의 누이이다.
○ 유사가 대행왕의 시호를 올릴 것을 의논하니, 왕이 옳지 않다고 하며 이르기를, “상국이 있으니, 내가 장차 청하겠다. 죽책(竹冊)ㆍ옥책(玉冊)이 또한 예에 맞는가." 하니, '순성수정상승대왕(純誠守正上昇大王)'이라는 호만을 올렸다.
○ 정유일에 경릉(慶陵)에 장사지냈다. 영구가 처음 떠날 때 왕은 최질(衰絰)의 차림으로 손수 향로를 받들고 걸어서 십천교(十川橋)에 이르러서야 견여(肩輿)를 탔다. 산릉(山陵)에 이르러 장사를 마치고 왕이 능에 갔다가 곧 돌아와 상복을 벗었다. 옛 관례는 중승(中丞)이 서명하고 임금의 능을 봉하는 법인데, 항간에 전하기를, 능을 봉한 사람은 좋지 못하다고 하였다. 이날 집의 이언충(李彦忠)이 사퇴하였으므로 왕이 집의 최성지(崔誠之)에게 명하여 봉하게 하고, 또 말하기를, “너의 앞날이 내게 있지 않느냐." 하였다. 성지는 바로 최실(崔實)이다.
○ 원 나라의 황태자가 사신을 보내어 즉위를 축하하였다.
○ 왕이 각 도의 무농사(務農使) 이후(李厚)ㆍ육희지(陸希摯)ㆍ최백륜(崔伯倫) 등을 불러 효유하기를, “내가 전농사(典農司)를 둔 것은 한(漢) 나라의 상평창을 본받아 백성과 더불어 곡물을 사고 팔아 백성들의 급한 것을 구하려는 것이지 사사로운 이익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다. 또 나라에 3년을 대비할 만한 저축이 없다면 나라가 나라답게 될 수 없다. 만약 급한 일이 있게 되어 갑자기 백성에게서 색출한다면, 백성의 원망없이 일을 이루고자 한들 될 수 있겠는가. 무릇 백성으로서 세력이 강한 집에 붙은 자는 날로 부유하고 안일해지며, 외롭고 잔약한 백성은 부렴(賦斂)에 곤란을 겪고 있다. 이것은 오로지 명을 받들어 행하는 자가 사를 따르고 공을 저버린 까닭이니, 내가 매우 민망하게 여긴다. 너희들은 나의 뜻을 체득하여 그 폐단을 통렬히 개혁하되, 좇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가 범한 바에 따라 처단한 뒤에 첨의부(僉議府)에 보고하라." 하였다.
○ 재신 원관(元灌)이 수녕궁에서 왕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 병오일에 정안군(定安君) 허종(許琮)의 집에 행차하여 잔치를 베풀었으니, 허종이 새 집에 입주한 것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날 고 평양공(平陽公) 현(眩)의 아내 허씨(許氏)를 들이고 순비(順妃)라고 하였다.
○ 기유일에 김문연의 집에 행차하여 숙창원비(淑昌院妃)에게 음행하였다. 이튿날 감찰규정 우탁(禹倬)이 흰옷을 입고 도끼를 갖고 짚을 묶어 놓고 글을 올려 왕의 난행을 간하였다. 근신(近臣)이 상소문을 펴들고 감히 읽지 못하니, 우탁이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근신으로서 임금의 그릇된 것을 바로잡지 못하고 악을 유도하여 이 지경이 이르게 하였으니, 그 죄를 아는가." 하였다. 좌우들은 두려워하여 몸을 떨고, 왕은 부끄러워하였다. 얼마 안 되어 숙창원비를 승진시켜 숙비(淑妃)로 봉하였다. 우탁은 단산(丹山 단양(丹陽))사람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일찍이 영해 사록(寧海司錄)이 되었는데, 군에 요신(妖神)의 신사가 있어 이름을 팔령(八鈴)이라고 하였다. 백성들이 영험하고 괴이한 것에 미혹되어 제사를 받드는 것이 매우 번거로웠는데, 탁이 부임하자 즉시 부수어 바다에 던져 버리니 음사(淫祀)가 마침내 없어졌다. 뒤에 복주(福州)의 예안(禮安)에 늙어서 퇴임하니, 충숙왕이 그의 충의를 높게 여겨 두 번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우탁은 경과 사에 능통하고, 더욱이 역학(易學)에 깊어서 점치는 것은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정자(程子)의 역전(易傳)이 처음으로 전해졌을 때, 우리 나라에 잘 아는 이가 없었다. 우탁이 곧 문을 닫고 월여를 연구하여 드디어 해득하고 생도들에게 교수하여서 우리나라에 의리(義理)의 학문이 처음으로 행해지게 되었다. 벼슬이 성균좨주(成均祭酒)에 이르렀으며, 치사한 뒤에 81세로 졸하였다.
○ 원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서 왕을 책봉하여 정동행중서성 우승상 고려국왕을 삼고 전과 같이 개부의 동삼사 태사태자 상주국 부마도위 심양왕으로 하였다.
○ 원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와서 왕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 11월 갑자일에 팔관회(八關會)를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전달 기유일부터 왕이 김문연의 집으로 옯겨 거처하였다. 숙비가 밤낮으로 갖은 아양을 부리니 왕이 매혹되어 친히 정사를 처리하지 아니하더니 이런 명이 있었다.
○ 크게 사면령을 반포하고, 교하기를, “내가 부덕하여 두려워하고 겁내는 마음으로 감히 편안할 겨를이 없다. 돌이켜 생각건대, 조왕(祖王)께서 나라를 창건한 처음에는 법도가 모두 갖추어졌었는데, 후대에 내려오면서 점차로 무너졌으니, 근년에는 또 간신이 세력을 잡아 국권을 우롱하고 기강을 문란하게 하여 공사(公私)의 전민(田民)을 모두 빼앗겼으니, 백성들은 먹고살기가 어렵고 나라의 창고는 텅 비게 되었으나 사삿집의 부는 넘치니, 내가 매우 통탄하는 바이다. 이에 사자를 뽑아 보내어 백성의 전지를 조사하여 조(租)와 부(賦)를 균평하게 부과해서 옛날의 방식을 따르려고 한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나라의 경비를 충분히 준비하기 위함이며, 한편으로는 봉록을 넉넉히 주기 위함이고, 한편으로는 백성의 살림살이를 풍족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더구나 새로 왕위에 오른 때이니, 마땅히 특별한 은택을 베풀어야 하겠다." 하였다.
○ 임신일에 왕이 원 나라에 갔다. 제안대군(齊安大君) 숙(淑)을 명하여 권서정동성사(權署征東省事)로 삼았다.
○ 윤월에 외종형제(外從兄弟)와 통혼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 원 나라에서 보낸 직성사인(直省舍人) 첩가대(帖哥歹) 등이 와서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 12월에 평리 조연(趙璉)을 원 나라에 보내어 신년을 축하하게 하였다.
○ 왕의 이름과 음(音)이 같은 이름을 금지하였다.

 

출처 : 한국고전종합DB

월천집 ( 月川集 )
  형태서지
권수제  月川先生文集
판심제  月川先生文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666年刊
권책  原集 6권, 年譜, 附錄 합 3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0×16.3(㎝)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奎4583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38
 저자
성명  조목(趙穆)
생년  1524년(중종 19)
몰년  1606년(선조 39)
 士敬
 月川, 東皐
본관  橫城
특기사항  退溪 李滉의 門人
 가계도
 趙瓊
 
 趙大春
 
 安東權氏
 權受益의 女
 趙肅
 
 趙穆
 
 安東權氏
 權盖世의 女
 趙龜朋
 早卒
 女
 
 金裕吉
 
 女
 
 權昞
 
 女
 
 金光纉
 
 側室 宣城金氏
 金鳳齡의 女
 趙壽朋
 進士
 趙錫朋
 主簿
 女
 
 女
 
 琴憙
 
 女
 
 權重器
 
 女
 
 琴蘭秀
 
 側室
 
 趙老得
 
 趙末得
 

기사전거 : 世系圖, 神道碑銘(鄭蘊 撰), 趙大春墓碣(趙穆 撰)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중종 19 1524 갑신 嘉靖 3 1 3월 23일, 禮安縣 月川里에서 태어나다.
중종 30 1535 을미 嘉靖 14 12 四書三經을 모두 읽다.
중종 33 1538 무술 嘉靖 17 15 겨울, 退溪 李滉의 문하에 들어가 受業하다.
중종 36 1541 신축 嘉靖 20 18 1월, 淸凉山에서 독서하다. ○ 가을, 향시에 합격하고 이어 생원시에 합격하다. ○ 11월 石臺庵에서 독서하다.
중종 37 1542 임인 嘉靖 21 19 6월, 安東黌舍를 유람하다.
중종 38 1543 계묘 嘉靖 22 20 1월, 玄沙寺에서 독서하다. ○ 10월, 廣興寺에서 독서하다.
중종 39 1544 갑진 嘉靖 23 21 11월, 豐基 郡守로 부임한 愼齋 周世鵬을 찾아보다.
인종 1 1545 을사 嘉靖 24 22 白雲洞書院을 유람하다.
명종 1 1546 병오 嘉靖 25 23 5월, 모부인 權氏喪을 당하다.
명종 4 1549 기유 嘉靖 28 26 參奉 權盖世의 女와 혼인하다. ○ 5월, 豐基에서 퇴계선생을 배알하고 이어 백운동서원에 머물다.
명종 5 1550 경술 嘉靖 29 27 퇴계선생에게 經書를 質疑하다.
명종 6 1551 신해 嘉靖 30 28 鄕試와 生員試에 합격하다.
명종 7 1552 임자 嘉靖 31 29 봄, 生員會試에 합격하다. ○ 12월, 玄沙寺에서 脩契하다.
명종 8 1553 계축 嘉靖 32 30 12월, 성균관에 유학하다.
명종 9 1554 갑인 嘉靖 33 31 4월, 고향으로 돌아오다. ○ 9월, 愼齋 周世鵬의 상에 곡하다.
명종 10 1555 을묘 嘉靖 34 32 6월, 聾巖 李賢輔의 상에 곡하다. ○ 12월, 鄕擧別試에 응시하여 5등하다.
명종 12 1557 정사 嘉靖 36 34 4월, 성균관에 유학하다.
명종 13 1558 무오 嘉靖 37 35 5월, 月瀾寺에서 독서하다.
명종 14 1559 기미 嘉靖 38 36 3월, 淸遠臺를 짓다.
명종 15 1560 경신 嘉靖 39 37 퇴계선생을 모시고 芙蓉山에 올라가 精舍의 터를 정하다. ○ 4월, 月瀾寺에서 독서하다. ○ 퇴계선생을 모시고 孤山을 유람하다.
명종 17 1562 임술 嘉靖 41 39 3월, 퇴계선생을 모시고 翠微峰에 오르다.
명종 18 1563 계해 嘉靖 42 40 8월, 퇴계선생을 배알하고 이어 陶山에 머물며 經學을 講論하다.
명종 19 1564 갑자 嘉靖 43 41 퇴계선생을 모시고 紫霞峯에 오르다.
명종 20 1565 을축 嘉靖 44 42 9월, 퇴계선생을 모시고 歷川의 남쪽에 있는 凌雲臺와 鰲潭 등을 유람하다.
명종 21 1566 병인 嘉靖 45 43 2월, 將仕郞 恭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7월, 퇴계선생에게 「心經」을 질의하다.
선조 1 1568 무진 隆慶 2 45 6월, 集慶殿 參奉이 되다. ○ 12월, 휴가를 받아 돌아온 후에 사직하고 출사하지 아니하다.
선조 3 1570 경오 隆慶 4 47 7월, 퇴계선생을 모시고 諸生과 함께 易東書院에 모여 「心經」을 강론하다. ○ 8월, 禹倬선생을 역동서원에 봉안하다. ○ 11월, 溪上에서 퇴계선생을 간병하다. ○ 12월, 퇴계선생의 상을 당하다.
선조 4 1571 신미 隆慶 5 48 퇴계선생의 장례에 참여하다.
선조 5 1572 임신 隆慶 6 49 童蒙敎官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4월, 동문과 함께 尙德祠를 도산에 건립하는 일을 의논하다. ○ 5월, 〈退溪先生言行總錄〉을 짓고, 동문과 함께 의논하여 연보의 초고를 잡다.
선조 6 1573 계유 萬曆 1 50 4월, 부친상을 당하다. ○ 6월, 三公과 吏曹가 함께 의논하여 學行이 뛰어난 인물을 천거하는데 首薦에 들다. 함께 천거된 인물은 李之蓾, 鄭仁弘, 崔永慶, 金千鎰이다. 이에 參上에 오르다.
선조 8 1575 을해 萬曆 3 52 6월, 造紙署 司紙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공조 좌랑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7월, 造紙署 司紙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선조 9 1576 병자 萬曆 4 53 5월, 「理學通錄」의 跋을 짓다. ○ 10월, 奉化 縣監이 되다.
선조 11 1578 무인 萬曆 6 55 3월, 文殊山을 유람하다. ○ 4월, 淸凉山을 유람하다. ○ 8월, 陶山의 享祀에 참여하다. ○ 小白山을 유람하다.
선조 12 1579 기묘 萬曆 7 56 7월, 체직되어 돌아오다. ○ 9월, 제생과 함께 淸凉山을 유람하다. ○ 月川書堂에서 강학하다.
선조 13 1580 경진 萬曆 8 57 「朱子大全」을 한 책으로 抄錄하고 「朱書抄」라고 명명하다. 또 〈困知雜錄〉을 만들다. ○ 6월, 공조 좌랑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7월, 全羅 都事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도산에서 제생을 모아 강학하다. ○ 10월, 宜寧 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선조 14 1581 신사 萬曆 9 58 1월, 역동서원에서 제생을 모아 강학하다. ○ 高靈 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4월, 忠淸道 都事가 되다. ○ 8월, 휴가를 받아 귀향하고는 사직하고 출사하지 않다.
선조 15 1582 임오 萬曆 10 59 형조 좌랑에 제수되고, 이어 공조 좌랑으로 바뀌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선조 16 1583 계미 萬曆 11 60 新寧 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선조 17 1584 갑신 萬曆 12 61 9월, 퇴계선생문집을 편집하다. ○ 盈德 縣監에 제수되었으나 豐基에 도착하여 사직소를 올리고 부임하지 않다.
선조 18 1585 을유 萬曆 13 62 1월, 工曹佐郞 兼 校正廳郞廳이 되다. ○ 2월, 공조 정랑에 移拜되다. ○ 5월, 典牲署主簿 兼 校正廳郞廳이 되다. ○ 11월 工曹正郞 兼 校正廳郞廳이 되다.
선조 19 1586 병술 萬曆 14 63 9월, 尙瑞院 判官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10월, 錦山 郡守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선조 20 1587 정해 萬曆 15 64 1월, 丹陽 郡守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4월, 掌苑署 掌苑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5월, 廬江書院에서 동문들과 퇴계집을 교정하다. ○ 11월, 陜川 郡守가 되다.
선조 21 1588 무자 萬曆 16 65 8월, 釋菜禮를 거행하다. ○ 鰲山書院을 방문하다.
선조 22 1589 기축 萬曆 17 66 鄕校를 重修하다. ○ 8월, 釋菜禮를 거행하다. ○ 10월, 伽倻山을 유람하다.
선조 23 1590 경인 萬曆 18 67 5월, 귀향하다. ○ 9월, 月川書堂을 중수하다.
선조 24 1591 신묘 萬曆 19 68 4월, 涉趣園을 짓다.
선조 25 1592 임진 萬曆 20 69 2월, 濟用監 僉正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선조 27 1594 갑오 萬曆 22 71 6월, 易東書院에 머물며 제생과 함께 「心經」을 강학하다. ○ 9월, 歙谷 縣令이 되다. ○ 10월, 軍資監主簿에 제수되었으나 사은숙배하고 바로 사직소를 올리다. ○ 월천서당으로 돌아오다. ○ 11월, 掌樂院 正이 되다.
선조 28 1595 을미 萬曆 23 72 5월, 襄陽 府使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9월, 掌樂院 正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12월, 司膽寺 正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선조 29 1596 병신 萬曆 24 73 體察使 李元翼이 來訪하다.
선조 30 1597 정유 萬曆 25 74 西厓 柳成龍에게 편지하여 主和의 잘못을 논하다.
선조 32 1599 기해 萬曆 27 76 1월, 도산서원의 묘에 배알하다. ○ 7월, 白雲洞書院을 유람하다.
선조 33 1600 경자 萬曆 28 77 5월, 도산서원에서 퇴계선생문집의 간행을 마치고 告廟하다.
선조 34 1601 신축 萬曆 29 78 1월, 司宰監 正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10월, 天淵臺 三大字를 刻하고 告廟하다. ○ 校正廳郞廳으로 부르는 召命에 따라 入城하려 하였으나 병으로 呈狀하고 부임하지 않다. ○ 11월, 淸凉山을 유람하다.
선조 35 1602 임인 萬曆 30 79 2월, 尙衣院 正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禮賓寺 正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윤2월, 折衝將軍 義興衛 副護軍에 특별히 승진되다. ○ 3월, 校正廳 堂上으로 부르는 召命에 따라 入城하려 하였으나 병으로 呈狀하고 부임하지 않다. ○ 工曹 參議가 되다.
선조 37 1604 갑진 萬曆 32 81 1월, 도산서원과 역동서원의 廟에 배알하다. ○ 2월, 琴蘭秀의 상에 곡하다. ○ 3월, 도산서원에서 기거하다. ○ 7월, 嘉善大夫 龍驤衛 副護軍에 특별히 승진하다. ○ 윤9월, 芙蓉精舍가 낙성되다. ○ 11월, 공조 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선조 39 1606 병오 萬曆 34 83 1월, 도산서원의 묘에 배알하다. ○ 10월, 졸하다.
선조 40 1607 정미 萬曆 35 - 1월, 芙蓉山 남쪽에 장사 지내다.
광해군 5 1613 계축 萬曆 41 - 禮安 儒生 등이 감사 尹暉에게 呈文하여 趙穆의 도산서원 從享을 請하다.

기사전거 : 年譜(金澤龍 撰)에 의함
 편찬 및 간행
본집의 편찬에 관한 중요한 기록은 1662년 許穆의 序文이다. 許穆은 이 서문에서 禮安 縣監 李碩寬의 청탁에 따라 저자의 子 趙錫朋이 소장한 草稿 4권을 刪定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미수 특유의 서체로 쓰여진 본집 서문의 기사와 「眉叟記言」의 〈月川集序〉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즉 「眉叟記言」에 수록된 서문 말미에 “又以言行記神道碑文附焉”의 11자가 본집에 수록된 서문에는 빠져 있다. 「眉叟記言」은 自編稿이므로 變改를 상정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본집이 간행되면서 그 부분이 삭제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본집의 간행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다. 즉 위의 기사는 眉叟가 본집을 산정하면서 부록 부분의 처리를 언급한 것으로 “언행기와 신도비문을 부록으로 첨부한다.”는 뜻이다. 현재 본집의 부록에는 桐溪 鄭蘊이 지은 신도비문은 수록되어 있으나 언행기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미수가 산정한 초고본에 수록되어 있던 언행기가 간행의 과정에서 삭제되고 그와 함께 본 서문에서도 관계기사가 삭제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言行記는 月川의 문인인 金澤龍(1547~1627)이 지은 〈月川言行錄〉으로서 이 언행록의 기사 중에는 月川이 西厓를 “主和誤國”으로 비판하여 보낸 이른바 정유년(1597) 편지가 장황하게 기술되어 있었으며, 이것이 바로 월천의 문도와 서애의 문도 사이에 분쟁을 야기시킨 것으로서 서애의 문도인 鶴沙 金應祖의 〈西厓辨誣錄〉 (鶴沙集 卷5)에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월천의 高弟인 김택룡과 서애의 고제인 김응조를 대표로 하여 야기된 분쟁은 당시에 파문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월천 문도에게 있어서 이렇게 중요한 言行記가 삭제되어 있으며, 전존된 것이 확실한 정유년 편지도 본집에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김택룡이 찬한 연보에서도 정유년의 기록은 西厓 柳相國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간단한 기사 아래에 細註로 “論和議之非”라고만 하여 간행 당시의 상황을 엿보게 한다. 더욱이 이 「月川集」의 발문을 金應祖가 찬하고 있다는 점은 본집에서 서애와 관련된 기록이 대부분 삭제되거나 완화될 수밖에 없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아울러 이는 「月川集」 간행의 전제조건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하여튼 眉叟가 말한 초고 4권은 미수의 산정을 거치고, 이어 서애 비판 관계 기록이 정리된 후에 1666년경 禮安에서 목판으로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초간본》이 초간본은 규장각(奎4583),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299),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D1-A681)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초간본으로 규장각장본이다.

기사전거 : 序(許穆 撰), 跋(金應祖 撰)에 의함
 구성과 내용
권수에는 許穆이 쓴 序가 있고 이어서 본집의 目錄, 世圖, 年譜가 실려 있다.
본집은 詩, 疏, 書, 辨疑, 雜著, 跋, 祝文, 祭文, 墓碣, 墓誌 그리고 論의 순서로 「退溪集」의 편차와 매우 흡사하다. 권1의 시는 대략 저작 시대에 따랐으며, 퇴계선생 및 그 문도들과의 수창시가 많다. 권2의 상소는 대부분이 사직소인데, 이 중 〈甲午陳情疏〉는 왜구와의 강화를 극력 반대하는 상소문이다.
권3의 書는 客體의 비중에 따라 편차하였는데 모두 21편이다. 특히 退溪에게 보낸 편지는 5편에 불과한데, 이는 전란으로 대부분 유실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與同門諸契論朱書節要刊本曲折”은 「朱子書節要」의 간행에 즈음하여 저자의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서책의 크기와 자체의 형태까지 하나 하나 언급하고 있어 당시 서책의 간행과 관련한 정서를 엿볼 수 있다. 이어 동문에게 퇴계선생의 碣文과 誌文의 내용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한 편지가 있는데, 이는 高峯 奇大升이 찬한 것에 대한 것이다.
권4의 「心經稟質」, 「朱書節要稟質」, 「尙書疑義」, 「家禮疑義」는 모두 퇴계와 여러 가지 경서에 대하여 논한 것으로서 저자가 묻고 퇴계가 답하는 일문일답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중 퇴계가 답한 부분을 「退溪集」의 서간과 대조해 보면 대부분 “先生答曰”의 형식적인 문자를 제외하고는 한 자도 틀림없이 동일하다. (예를 들면 〈心經稟質〉의 앞부분은 「退溪集」권23의 23판과 27판의 편지와 동일하며, 〈朱書節要稟質〉은 권23의 33판 〈答趙士敬問目〉과 뒤의 “問仁義不足以盡道” 이하 몇 줄을 제외하고는 동일함) 따라서 저자가 陶山에서 직접 講經하며 기록한 것이라기보다는 「退溪集」에서 추출한 것으로 보인다.
권5의 雜著와 권6의 跋, 祝文, 祭文에는 퇴계와 관련된 글들이 산견된다. 특히 도산서원에 관한 여러 가지 축문, 〈退溪集告成文〉 및 〈告退溪埋誌文〉은 저자가 갖는 퇴계 문도에서의 위치를 보여 주는 것들이다. 끝으로 말미에 실린 두 개의 論은 荀彧을 비판한 〈荀彧論〉과 부정적인 붕당관을 주장한 〈朔蜀洛三黨論〉이다.
부록에는 신도비명과 賜祭文, 祭文, 挽詞 등이 실려 있으며 권미에 金應祖가 쓴 跋文이 실려 있다.

필자 : 徐廷文

 

고종 38년 신축(1901, 광무 5)

 

공자를 대성선사로 고쳐 쓸 것 등의 의견을 진달하는 봉상사 제조 김태제의 상소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 김태제(金台濟)가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은 지난번에 난잡한 글을 외람되이 올려 온화한 비답을 받았으므로 너무도 황송하고 감격하여 살아서는 목숨을 바치고 죽어서도 결초보은(結草報恩)하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삼가 생각건대, 선성(先聖)과 선현(先賢)의 위호(位號)를 바르게 하고 공자(孔子)와 기자(箕子)의 후손들을 봉하며 교경당(校經堂)을 창설하는 문제는, 어느 것이나 모두 종교(宗敎 유교(儒敎)를 가리킴)를 육성하고 확립하는 방도이니, 오직 가져다 시행하면 될 뿐이므로 지금 다시 아뢰어 성상을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전의 진언(進言)에 아직도 미진한 점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감히 추가해서 아룁니다.
삼가 《숙종보감(肅宗寶鑑)》을 상고해 보니, 우의정 이상진(李尙眞)이 현종(玄宗)이 공자에게 문선왕(文宣王)이라는 시호(諡號)를 준 잘못에 대해 논하기를, ‘스스로 황제라고 하면서 신자(臣子)로 봉한 사람에게 억지로 왕이라는 칭호를 준 것은 성인을 존중하는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맨 처음에 주공(周公)을 선성(先聖)이라 부르고 공자를 선사(先師)라고 부른 것은 진실로 성인을 높이는 데에 마땅한 일이었고, 그 뒤에 공자를 선성이라 부르고 안자(顔子)를 선사라고 부른 것도 정도(正道)에 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당(唐) 나라 때에 옛것을 고쳐 왕으로 봉한 것은 후세의 시비를 면하기 어려운 일이었으니, 명(明) 나라 때에 왕이라는 칭호를 사(師)로 고친 것은 잘못을 단번에 바로잡았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신의 소견에는 아주 좋기는 하나 완전히 좋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대성문선(大成文宣)’이라는 칭호를 없앤 이상 ‘지성(至聖)’만을 남겨 두어서는 안 되니, 지금 만약 신주에 ‘대성선사(大聖先師)’ 또는 ‘대성종사(大聖宗師)’라는 네 글자로 특별히 고쳐 쓴다면 스승을 높이는 데에 부합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배향(配享)하는 네 분을 여전히 복성(復聖), 종성(宗聖), 술성(述聖), 아성(亞聖) 등의 칭호로 부르는 것은 사실 평가하는 말에서 나온 것인 만큼 공경심이 부족한 것 같으니, 모두 버리고 단지 선사(先師) 혹은 선성(先聖), 선철(先哲)로 통틀어 부르는 것이 올바를 것 같습니다. 십철(十哲)과 배향하는 신위(神位)에 이르러서는 명 나라 제도대로 단지 선현(先賢)과 선유(先儒)로 고치고, 우리나라 선정(先正)의 신위 또한 선생(先生)이나 선정(先正)으로 써야지 작호(爵號)와 시호(諡號)를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을 참으로 나란히 놓아서는 안 되는데, 동무(東廡)의 54번째 신위 선정신(先正臣) 김장생(金長生)과 55번째 신위 선정신 김집(金集)이 부자간이어서 온당치 못한 듯하니 역시 의논하여 고쳐야 할 것입니다.
또 태학(太學)은, 공자의 사당이라는 견지에서 말하면 묘궁(廟宮)처럼 보아야 할 것이고 성균관(成均館)이라는 견지에서 말하면 다른 관각(館閣)처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참으로 하나의 관청으로 두어서 자립하게 해야 하는데, 지금은 학부(學部) 안에 소속되어 허다한 학교(學校)들과 뒤섞여 구별이 없으니, 바로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삼가 생각건대, 성인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 그 도(道)를 연구하는 일은 남긴 경서(經書)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 차례 화재를 겪고 여기저기 흩어져서 《십삼경주소(十三經註疏)》와 《설문해자(說文解字)》는 아예 말할 것도 없고, 우선 통용되는 영락(永樂) 연간의 사서(四書)와 삼경(三經)으로 말하더라도 각판(刻板)과 활판(活板)의 틀린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이른바 언해본(諺解本)은 오직 본조(本朝)에만 있는데 선정신 이황(李滉)이 편찬한 것으로 잘못 전해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으며, 그 해석이 모두 꼭 들어맞는 것이 아니어서 정자(程子)나 주자(朱子)의 본의와 차이나는 것이 없지 않고 잘못된 음과 뜻도 매우 많습니다. 또 사서는 일찍이 선정신 이이(李珥)의 언해본이 있었는데 지금은 전습(傳習)되지 않으니, 어찌 한스럽지 않겠습니까.
대체로 교경당(校經堂)은 한대(漢代)에 처음 만들어졌으니, 장안(長安)의 석거각(石渠閣)이나 낙양(洛陽)의 백호관(白虎觀)이 다 오경(五經)을 강론하여 결정하던 곳입니다. 이런 이유로 신은 교경당을 설치하자고 청하는 것입니다. 아, 근래에 학교가 날로 달로 늘어나서 거의 그 종교를 분간할 수 없게 되었는데, 다행히 성상의 조칙이 특별히 내려져 백성들의 뜻이 비로소 정해졌습니다. 이에 현자를 초치하는 일을 참으로 늦출 수 없으며, 배향할 만한 선유(先儒)를 이때에 배향하는 것이 또한 종교를 육성하고 확립하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중국과 우리나라 역대 왕조의 배향할 만한 선유를 거의 빠뜨리지 않고 배향하였는데 오직 명 나라 선유만 빠졌으니, 일찍이 ‘당당한 정통(正統)을 가지고 200년간 인재를 배양(培養)한 명 나라가 원(元) 나라만 못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전에 출향(黜享)한 사람에 대해 비록 논의할 것이 없지는 않지만 크게 보면 모두 공자의 무리가 될 만하니, 전부 빼는 것은 부당할 듯합니다.
그리고 고려조(高麗朝)의 문헌공(文憲公) 최충(崔冲)은 생전에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불렀고, 문희공(文僖公) 우탁(禹倬)은 온 나라 사람들이 역동선생(易東先生)이라고 불렀습니다. 아조(我朝)의 선정신 정구(鄭逑)는 숙묘(肅廟)가 제문(祭文)에 처음으로 선정이라고 썼는데, 그후에 문묘(文廟)에 배향하기를 상소하여 청한 것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선정신 김상헌(金尙憲)은 정묘(正廟)가 전교하기를, ‘도학(道學)이 바르고 절의(節義)가 높은 데 대하여 우리나라 사람들만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청(淸) 나라 사람들까지도 공경하므로 나는 죽은 정승[故相]이라 하지 않고 선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정묘의 하교가 지당합니다. 그런데도 양무(兩廡)에 올려 제사 지내는 일을 질질 끌어 왔으니, 어찌 많은 사람들이 억울해하지 않겠습니까. 서기(徐起)와 송익필(宋翼弼)로 말하면 도학과 실제의 덕행이 모두 배향할 만한데도 단지 출신 때문에 애초에 논의되지 않았으니, 성학(聖學)에 있어서 어찌 문벌을 따지겠습니까.
그리고 인사를 취하는 것으로 논하건대, 향학(鄕學)에서 육덕(六德), 육행(六行), 육예(六藝) 세 종류를 가르쳐서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빈객의 예로 공경하고 왕에게 천거하던 것은 주(周) 나라의 좋은 제도이고, 시(詩)와 부(賦)를 가지고 과거를 보던 것은 수(隋) 나라에서 처음 만든 제도입니다. 지금 과거 제도를 폐지한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지만, 공거(貢擧)를 행하지 않는 것은 실로 미처 시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니, 신은 삼가 현량과(賢良科) 등의 제도를 회복하고 강경(講經)과 제술(製述)의 제도를 참작해서 우수한 사람을 뽑아 벼슬에 임명하는 것이 인재를 권장하는 데에 일조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지금 전후에 아뢴 바대로 경서를 교정하고 유교를 육성하고 확립하면 기자와 공자의 도를 밝히고 성조(聖祖)의 뜻을 이어 나가는 것이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비록 배운 것은 없지만 종교에 대한 일념은 늙었어도 해이해지지 않은바, 다행히 문명(文明)한 때를 만나 감히 어리석은 생각을 아룁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미천한 사람의 말이라 하여 버리지 마시고 조정의 신료들에게 이 상소를 내려 의견을 수합하시어 가령 채택할 만하다고 하면 채택하여 시행해 주소서. 그렇게 해 주신다면 신이 비록 하루를 살다가 죽는다 하더라도 일 년을 더 산 것과 같을 것입니다. ……”

하였다.

논사록 하권 / 윤6월 7일

 

 

상이 문정전(文政殿)에서 소대(召對)하고, 《논어》〈양화(陽貨)〉 편의 “공자가 무성에 가서〔子之武城〕”부터 “그가 반드시 고칠 수 없음을 알았다.〔知其必不能改也〕”까지 강하였다. 선생이 글을 대하여 아뢰기를,

“예악(禮樂)을 잠시라도 몸에서 떠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예악이 차례를 잃으면 만사가 전도됩니다. 고례(古禮)와 고악(古樂)을 지금 다시 볼 수는 없으나, 그 마음을 배우고 그 소리를 찾아볼 수는 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10실(室)밖에 안 되는 작은 고을도 예악을 가르치면 사람들이 서로 읍(揖)하고 양보하게 됩니다. 근래 20년 전만 해도 한 도(道)의 책임을 맡은 자가 혹 알성(謁聖)하는 예를 행하였는데, 을묘왜변(乙卯倭變)이 난 뒤로는 군기(軍器)의 적간(摘奸)에만 전념하여 다시는 유학을 흥기시키고 권장하는 일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마음을 다한다고 하는 자들도 겨우 서원이나 보수하고 유생들의 음식을 공급하는 데 불과할 뿐 선한 데로 나아가게끔 교도한다는 말은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훌륭한 치도를 이룩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교화가 있은 뒤에야 사람들이 보고 감동하는 아름다움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고는 하나 가르치지 않으면 성취시킬 수가 없습니다. 전조(前朝) 공민왕 때에 이색(李穡)이 선비들을 모아 가르쳤기 때문에 충신과 의사들이 많이 나왔는데, 근래에는 흥기하는 선비를 보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이에 유념하시어 인재가 없다고 하지 마시고 오래도록 성심껏 시행하신다면 교화가 점점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조의 이색은 선한 사람인가?”

하니, 선생이 나아가 대답하기를,

“이색에 대한 인물 평가는 매우 많으나 대체로 범상하지는 않습니다. 이색은 젊었을 때 중원에 들어가서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원나라에서 벼슬하였는데, 박학하고 재질이 뛰어난 인물로서 그의 학문은 문장(文章)을 위주로 하였으나 예문(禮文)과 유자(儒者)의 학문에도 견해가 훌륭하여 교회(敎誨)하는 일에 무척이나 공력을 들였습니다. 정몽주(鄭夢周)가 전적으로 이색에게서 배운 것은 아니지만 또한 그로부터 장려ㆍ권면되어 흥기함으로써 성취되었습니다. 고려가 망할 무렵 유배되어 외지에 있었는데, 태조가 즉위한 다음 즉시 명하여 석방하고는 불러 보고 예우하며 또 그로 하여금 벼슬하도록 하였으나 뜻을 굽히지 않고 그대로 죽었습니다. 단 고려 시대에는 불교를 숭상했고 이 사람의 문장이 무척 뛰어났기 때문에 사찰(寺刹)의 기문(記文)과 불경(佛經)의 서문(序文) 같은 것이 모두 이 사람의 손에서 나왔으므로 연소한 유자(儒者)들이 그가 불교를 숭상했다 하여 헐뜯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비록 학문한 사람은 아니나 기절이 매우 높으니, 실로 우리나라 학문의 원류(源流)라 할 것입니다.”

하고, 윤근수(尹根壽)와 정탁(鄭琢) 등도 이색이 대절(大節)을 훼손하지 않았던 의리를 개진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아뢴 말씀이 모두 옳습니다. 우리 조정을 섬기지 않은 그 의사(意思)는 무척 고결합니다. 그런데 입조(立朝)했을 때에 천 길 암벽이 우뚝 서 있는 것 같은 기상이 없고 시속(時俗)에 부침(浮沈)한 병통이 없지 않아 《고려사(高麗史)》에서는 이 때문에 그를 과소평가했지만, 과연 그 논평이 공적(公的)인 측면에서 나온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따져 본다면 그의 장단점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윤근수가 아뢰기를,

“어제 경연 석상에서 전교하신 말씀을 삼가 듣건대 지극히 황공합니다.-어제 윤근수가 경연 석상에서 우리나라의 인심(人心)이 본시 중국만 못하다고 논했는데, 어제 그런 의논은 바르지 못하여 폐단이 있다고 하는 상의 하교가 있었으므로 윤근수가 이처럼 아뢴 것이다.- 소신의 의중으로는 20여 년 동안 사람들이 윤원형(尹元衡)의 포악함을 두려워하여 감히 한마디도 말을 하지 못한 채 그저 마음속으로만 분개하고 개탄했다고 여겼기 때문에 아뢰었던 것인데, 그 말을 생각해 보니 과연 폐단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제 내가 말했던 것은 저번에 아뢴 것이 뒷날 폐단이 없지 않겠기에 그 실수를 바로잡아 주려고 한 것이지 비난하기 위해서 한 것은 아니었다.”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일시적으로 편벽되게 아뢰었던 것에 대해 상께서 이처럼 유념하시고 기억해 주시니, 모든 일에 생각을 더하신다면 성상의 학문이 갈수록 고명해질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학문은 기자(箕子) 때의 일은 서적이 없어 상고하기 어렵고, 삼국 시대에는 천품은 비록 순수하고 아름다웠지만 학문의 공이 없었으며, 고려 때에는 학문을 하긴 했지만 단지 사장학(詞章學)을 위주로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고려 말에 이르러 우탁(禹倬)과 정몽주(鄭夢周) 이후로 비로소 성리학(性理學)을 알게 되었고, 급기야 우리 세종조에 이르러 예악과 문물이 찬란하게 일신(一新)되었습니다.

동방의 학문이 전해진 순서로 말한다면, 정몽주가 동방 이학(理學)의 비조(鼻祖)로, 길재(吉再)는 정몽주에게 배웠고, 김숙자(金叔滋)는 길재에게 배웠으며, 김종직(金宗直)은 김숙자에게 배웠고, 김굉필(金宏弼)은 김종직에게 배웠으며, 조광조(趙光祖)는 김굉필에게 배웠으니 본래 원류(源流)가 있습니다. 그 이후로 유사(儒士)들이 성현의 학문을 하고자 하게 되었으니, 상께서 교화를 주장하실 수 있다면 지금이야말로 복고(復古)할 수 있는 기회라 하겠습니다. 학문에 힘쓰는 사람들이 비록 많지 않은 듯하나 지금 의논을 들어 보면 학문을 아는 장자(長者)들이 기묘년에 비해 많다고들 합니다.”

하고, 윤근수가 아뢰기를,

“기묘년 이후로 사람들이 선(善)을 향하려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은 대개 조광조가 쏟은 공력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고, 선생이 아뢰기를,

“근래 여항(閭巷)의 하천배(下賤輩)까지도 상례(喪禮)를 닦아 거행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더러 청상과부가 개가(改嫁)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모두 기묘년의 사림들이 진작시킨 효과입니다. 다만 조광조는 나이가 38세에 그쳤고 당시 조정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술을 하여 후세에 전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학문의 깊이는 알 수 없지만 그가 한 일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모두 흠앙(欽仰)하고 있습니다.”

하고, 윤근수가 아뢰기를,

“소신이 전해 들으니, 하루는 명종께서 전교하시기를 ‘여항에서 마땅히 《소학》을 읽어야 한다.’ 하시자, 윤개(尹漑)가 정승으로 있다가 이 전교를 듣고 찬양하였다 합니다. 그러자 윤원형(尹元衡)이 ‘사람은 마땅히 마음속으로 선을 하여야 한다. 기묘년에 《소학》을 숭상하였으나 신사년에 난리가 났고 을사년에 또 난역(亂逆)이 생겼으니 《소학》은 난역의 글이다.’ 하였는데, 윤개가 이 말을 듣고 벌벌 떨었다 하니 윤원형의 심술을 여기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윤원형이 국가에 죄를 지은 것이 이루 말할 수가 없는데, 이제 이 말은 내가 정말 모르고 있었다. 이 말을 듣고 보니, 선현들을 모두 비방하였는바 그는 참으로 만세(萬世)에 죄를 지은 자이다.”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한탁주(韓侂冑)는 주자(朱子)를 위학(僞學)이라고 비난했는데,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윤원형이 당시에 저지른 일을 보면 이 정도는 실로 심상한 일로서 괴이하게 여길 것도 못 됩니다. 윤원형의 악행에 대해서는 어제 대략 아뢰었습니다. 윤원로(尹元老)와 윤원형은 바로 형제간인데 모두 간사하고 악독하였습니다. 명종이 즉위 하신 초년에 곧바로 윤원로를 축출하였기 때문에 윤원로가 공신에 끼지 못해 윤원형을 원망하였습니다. 이에 윤원형은 윤춘년(尹春年)을 사주하여 소장을 올리게 하여 그를 쫓아내고는 죽였습니다. 윤원로의 죄는 죽어 마땅하나 그를 죽인 자는 윤원형이었습니다. 지친(至親)인 형제간에도 오히려 이와 같았으니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겁내는 것이 어찌 다함이 있었겠습니까. 자고로 윤원형보다 더한 소인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날 유생이 상소하여 ‘바야흐로 위세가 천지를 진동하던 때였다.’라고 하였는데, 이와 같았기 때문에 감히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전교가 지극하십니다. 지난 일을 잊지 않는 것은 뒷일의 귀감이 되기 때문입니다. 윤원형 같은 소인은 진실로 드물지만 아무리 소소한 소인이라도 틈을 타 들어온다면 또한 성치(聖治)에 누가 될 것입니다. 사욕을 극복하고 선을 따라 어진 선비들을 가까이하소서. 그러면 세상이 좋아질 것입니다.”

하고, 윤근수가 아뢰기를,

“을사년에 죄를 받은 사람 중에 권벌(權橃)과 이언적(李彦迪)은 이미 표창과 증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또 송인수(宋麟壽)란 사람이 있는데, 그는 바로 선인군자(善人君子)였습니다. 종사한 학문의 깊이는 알 수 없지만 일가의 효행이 탁월하였는데, 얼굴빛을 바르게 하고 조정에서 벼슬하다가 원흉들에게 거슬려 죄를 받고 죽었습니다. 이 사람의 훌륭함은 권벌이나 이언적과 같은 수준에서 논해야 합니다.”

하고, 선생이 아뢰기를,

“처음에는 그를 부박(浮薄)한 무리의 영수라 하여 파직하였고, 뒤에는 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 사건으로 인하여 사약을 내리기까지 하였습니다. 상께서 이미 신원(伸冤)해 주셨습니다만 이 사람의 훌륭함에 대해 상께서 잘 아시지 못하여 사림에서 원통하게 여기는 것이 매우 우려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회맹문(會盟文)에는 모반했다고 적기까지 하였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송인수는 일생 동안 기묘년의 여러 현인들을 흠모하였습니다. 계묘년(1543, 중종38)과 갑진년(1544)에는 전라 감사가 되어서 《소학》을 읽을 것을 권면하고 후생들을 이끌어 주었으니, 그 당시 《소학》을 읽게 된 것은 모두 송인수의 공로입니다.

오늘 낮에 천둥이 쳤는데 이것이 아무리 현재의 절기에 있을 수 있는 현상이라 하더라도 성상의 분부에 미안하게 여기셨으니, 지극하다고 할 만합니다. 여름철이 비록 천둥이 치고 비가 오는 때라고는 하나, 장마가 너무 지나쳐서 호남과 영남에 수재가 극히 참혹합니다. 봄에는 한해(旱害)가 있었고 여름에는 수해가 있어서 벼와 곡식이 상했으니, 백성들이 무엇을 의지해 살겠습니까. 이것은 천지의 나쁜 기운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니, 상께서 각별히 살피고 유념하셔야 합니다. 군주의 한 생각이 천지의 조화를 도와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용》에 이르기를 ‘중화(中和)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를 찾고 만물이 잘 길러진다.’ 하였습니다.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정밀하게 하고 단속하여 내 마음이 바루어져 천지의 마음도 바루어지고 내 기운이 순해져 천지의 기운도 순하게 되면, 비 오고 볕 나는 것이 때에 맞아서 천지가 제자리를 찾게 될 것입니다. 삼대(三代)의 융성하던 시기에는 새와 짐승, 어류에 이르기까지 모두 잘 자랐으니, 천지의 기운이 화(和)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효과를 이룬 것입니다. 당 태종 때에 수재와 한해가 있었어도 백성들이 원망하지 않았는데, 이는 군주가 걱정하고 부지런히 힘써서 백성들을 위무(慰撫)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끝내는 풍년이 들어 쌀 한 말에 3전(錢) 하는 효과를 거두었으니, 그가 인의(仁義)를 진심으로 행하지 않고 겉으로만 행하였다고는 하나 이 또한 위징(魏徵)이 선정을 행하도록 권면한 소치입니다.

즉위하시고 나서 봄ㆍ여름의 교체기에는 비와 바람이 순조로워서 대풍(大豊)의 경사를 기대하게 하더니, 가을에 들어서면서 풍재(風災)가 끊이지 않아 밭농사는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논농사는 그래도 조금 수확할 수 있어 아사(餓死)할 우려는 간신히 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봄부터 강우량이 제대로 맞지 않더니 여름이 되면서 더욱 심해져 민생에 대한 일이 지극히 어렵고 괴롭게 되었으니, 각별히 살피고 유념하시어 미진한 일이 있거든 수성(修省)하는 데 극진히 힘써서 천심을 되돌리셔야 할 것입니다. 하늘이 만민을 내었으나 스스로 다스릴 수 없기에 임금을 세워 만민의 주인이 되게 하였고, 임금은 또 혼자서 다스릴 수 없기에 수령과 근심을 나눠 가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수령이 백성을 잘 다스리지 못하여 백성에게 원망이 있게 되면 임금이 반드시 벌을 주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성실하지 못하여 유리(流離)하여 살 곳이 없게 만든다면 천심이 어찌 진노하지 않겠습니까. 억조창생 위에 군림하고 있는 군주로서는 다른 것은 두려워할 게 없으나 황천(皇天)이 위에서 환히 살펴보고 계시니, 한 생각이라도 잘못될 때마다 상제가 진노할 것을 두려워하신다면 천심이 기뻐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이 지당하다.”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소신이 우연히 생각난 것을 계달했는데 성상의 분부가 이와 같으시니 감격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성상께서 한가로울 때에도 조금도 중단하지 않으신다면 덕이 성인과 동등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주D-001]우탁(禹倬) : 1263~1342. 고려 말 정주학(程朱學) 수용 초기의 유학자로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천장(天章) 또는 탁보(卓甫), 호는 백운(白雲) 또는 단암(丹巖),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성균 좨주(成均祭酒)로 치사(致仕)한 뒤 예안(禮安)에 은거하면서 후진 교육에 전념하였다. 경사(經史)에 통달하였고 역학(易學)에 더욱 조예가 깊어 세상에서 ‘역동 선생(易東先生)’이라 일컬어졌다.
[주D-002]길재(吉再) : 1353~1419.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 또는 금오산인(金烏山人), 시호는 충절(忠節)이다. 후학의 교육에 힘써 그의 문하에서 김숙자(金叔滋) 등 많은 학자가 배출되어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로 그 학통이 이어졌다.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인동(仁同)의 오산서원(吳山書院)에 향사되었고, 이색ㆍ정몽주와 함께 고려의 삼은(三隱)으로 일컬어졌다. 저서에 《야은집》이 있고, 언행록인 《야은 언행 습유록(冶隱言行拾遺錄)》이 전한다.
[주D-003]김숙자(金叔滋) : 1389~1456.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자배(子培), 호는 강호산인(江湖散人),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16세기에 사림에 의하여 확립된 도통(道統)의 계보에서 길재의 학문을 아들 종직(宗直)으로 하여금 잇게 하였다. 선산의 낙봉서원(洛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주D-004]윤개(尹漑) : 1494~1566.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여옥(汝沃), 호는 회재(晦齋) 또는 서파(西坡)이다. 한어(漢語)에 능통하여 명나라와의 외교 활동에 이바지하였다. 윤원형(尹元衡)에게 가담하여 추성위사홍제보익 공신(推誠衛社弘濟保翼功臣) 2등에 책록되고 영평군(鈴平君)에 봉해졌으나, 선조 초에 녹훈이 삭탈되었다.
[주D-005]신사년에……생겼으니 : 신사년의 난리는 1521년(중종16)에 일어난 신사무옥(辛巳誣獄)을 가리킨다. 기묘사화 이후 심정(沈貞), 남곤(南袞) 등이 세력을 떨치자 안당(安瑭)의 아들 안처겸(安處謙)이 이정숙(李正叔) 등과 함께 남곤과 심정이 사림을 해치고 국정을 망친다 하여 제거할 것을 모의하였다. 이때 함께 있던 송사련(宋祀連)이 안처겸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작성한 조객록(弔客錄)을 가지고 고변(告變)하여 대신을 모해하려 한다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안씨 일족과 이약빙(李若氷) 등 수많은 사람이 처형되었다. 을사년의 난역은 을사사화를 가리킨다.
[주D-006]한탁주(韓侂冑) : ?~1207. 하남성(河南省) 안양(安陽) 사람으로 한기(韓琦)의 증손이다. 영종(寧宗) 옹립에 공을 세우고 외척으로서 정계에 등장하였다. 우승상 조여우(趙如愚)와 대립하여 그를 지방으로 유배 보내고, 조여우가 추천한 주자와 그 학파를 위학(僞學)으로 몰아 추방함으로써 ‘경원(慶元)의 당금(黨禁)’을 일으켰다. 이후 14년간 정권을 자의로 전단하였으며, 권세 확장을 위하여 금(金)나라 정벌군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자 문책을 받고 사미원(史彌遠)에게 살해당하였다. 그 수급(首級)은 금나라로 보내졌다.
[주D-007]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 사건 : 1547년(명종2)에 정언각(鄭彦慤)이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양재역에서 “여주(女主 : 문정왕후)가 집권하고 간신 이기(李芑) 등이 권력을 남용하여 나라가 망하려 하니 한심하지 않은가.”라는 익명의 벽서를 발견하고 이기, 윤인경(尹仁鏡), 정순붕(鄭順朋) 등에게 알리자, 반대파들의 소행으로 몰아 사림을 대거 숙청하고 권력을 독점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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