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사록 하권 / 윤6월 7일
상이 문정전(文政殿)에서 소대(召對)하고, 《논어》〈양화(陽貨)〉 편의 “공자가 무성에 가서〔子之武城〕”부터 “그가 반드시 고칠 수 없음을 알았다.〔知其必不能改也〕”까지 강하였다. 선생이 글을 대하여 아뢰기를,
“예악(禮樂)을 잠시라도 몸에서 떠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예악이 차례를 잃으면 만사가 전도됩니다. 고례(古禮)와 고악(古樂)을 지금 다시 볼 수는 없으나, 그 마음을 배우고 그 소리를 찾아볼 수는 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10실(室)밖에 안 되는 작은 고을도 예악을 가르치면 사람들이 서로 읍(揖)하고 양보하게 됩니다. 근래 20년 전만 해도 한 도(道)의 책임을 맡은 자가 혹 알성(謁聖)하는 예를 행하였는데, 을묘왜변(乙卯倭變)이 난 뒤로는 군기(軍器)의 적간(摘奸)에만 전념하여 다시는 유학을 흥기시키고 권장하는 일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마음을 다한다고 하는 자들도 겨우 서원이나 보수하고 유생들의 음식을 공급하는 데 불과할 뿐 선한 데로 나아가게끔 교도한다는 말은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훌륭한 치도를 이룩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교화가 있은 뒤에야 사람들이 보고 감동하는 아름다움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고는 하나 가르치지 않으면 성취시킬 수가 없습니다. 전조(前朝) 공민왕 때에 이색(李穡)이 선비들을 모아 가르쳤기 때문에 충신과 의사들이 많이 나왔는데, 근래에는 흥기하는 선비를 보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이에 유념하시어 인재가 없다고 하지 마시고 오래도록 성심껏 시행하신다면 교화가 점점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조의 이색은 선한 사람인가?”
하니, 선생이 나아가 대답하기를,
“이색에 대한 인물 평가는 매우 많으나 대체로 범상하지는 않습니다. 이색은 젊었을 때 중원에 들어가서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원나라에서 벼슬하였는데, 박학하고 재질이 뛰어난 인물로서 그의 학문은 문장(文章)을 위주로 하였으나 예문(禮文)과 유자(儒者)의 학문에도 견해가 훌륭하여 교회(敎誨)하는 일에 무척이나 공력을 들였습니다. 정몽주(鄭夢周)가 전적으로 이색에게서 배운 것은 아니지만 또한 그로부터 장려ㆍ권면되어 흥기함으로써 성취되었습니다. 고려가 망할 무렵 유배되어 외지에 있었는데, 태조가 즉위한 다음 즉시 명하여 석방하고는 불러 보고 예우하며 또 그로 하여금 벼슬하도록 하였으나 뜻을 굽히지 않고 그대로 죽었습니다. 단 고려 시대에는 불교를 숭상했고 이 사람의 문장이 무척 뛰어났기 때문에 사찰(寺刹)의 기문(記文)과 불경(佛經)의 서문(序文) 같은 것이 모두 이 사람의 손에서 나왔으므로 연소한 유자(儒者)들이 그가 불교를 숭상했다 하여 헐뜯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비록 학문한 사람은 아니나 기절이 매우 높으니, 실로 우리나라 학문의 원류(源流)라 할 것입니다.”
하고, 윤근수(尹根壽)와 정탁(鄭琢) 등도 이색이 대절(大節)을 훼손하지 않았던 의리를 개진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아뢴 말씀이 모두 옳습니다. 우리 조정을 섬기지 않은 그 의사(意思)는 무척 고결합니다. 그런데 입조(立朝)했을 때에 천 길 암벽이 우뚝 서 있는 것 같은 기상이 없고 시속(時俗)에 부침(浮沈)한 병통이 없지 않아 《고려사(高麗史)》에서는 이 때문에 그를 과소평가했지만, 과연 그 논평이 공적(公的)인 측면에서 나온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따져 본다면 그의 장단점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윤근수가 아뢰기를,
“어제 경연 석상에서 전교하신 말씀을 삼가 듣건대 지극히 황공합니다.-어제 윤근수가 경연 석상에서 우리나라의 인심(人心)이 본시 중국만 못하다고 논했는데, 어제 그런 의논은 바르지 못하여 폐단이 있다고 하는 상의 하교가 있었으므로 윤근수가 이처럼 아뢴 것이다.- 소신의 의중으로는 20여 년 동안 사람들이 윤원형(尹元衡)의 포악함을 두려워하여 감히 한마디도 말을 하지 못한 채 그저 마음속으로만 분개하고 개탄했다고 여겼기 때문에 아뢰었던 것인데, 그 말을 생각해 보니 과연 폐단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제 내가 말했던 것은 저번에 아뢴 것이 뒷날 폐단이 없지 않겠기에 그 실수를 바로잡아 주려고 한 것이지 비난하기 위해서 한 것은 아니었다.”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일시적으로 편벽되게 아뢰었던 것에 대해 상께서 이처럼 유념하시고 기억해 주시니, 모든 일에 생각을 더하신다면 성상의 학문이 갈수록 고명해질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학문은 기자(箕子) 때의 일은 서적이 없어 상고하기 어렵고, 삼국 시대에는 천품은 비록 순수하고 아름다웠지만 학문의 공이 없었으며, 고려 때에는 학문을 하긴 했지만 단지 사장학(詞章學)을 위주로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고려 말에 이르러
우탁(禹倬)과 정몽주(鄭夢周) 이후로 비로소 성리학(性理學)을 알게 되었고, 급기야 우리 세종조에 이르러 예악과 문물이 찬란하게 일신(一新)되었습니다.
동방의 학문이 전해진 순서로 말한다면, 정몽주가 동방 이학(理學)의 비조(鼻祖)로,
길재(吉再)는 정몽주에게 배웠고,
김숙자(金叔滋)는 길재에게 배웠으며, 김종직(金宗直)은 김숙자에게 배웠고, 김굉필(金宏弼)은 김종직에게 배웠으며, 조광조(趙光祖)는 김굉필에게 배웠으니 본래 원류(源流)가 있습니다. 그 이후로 유사(儒士)들이 성현의 학문을 하고자 하게 되었으니, 상께서 교화를 주장하실 수 있다면 지금이야말로 복고(復古)할 수 있는 기회라 하겠습니다. 학문에 힘쓰는 사람들이 비록 많지 않은 듯하나 지금 의논을 들어 보면 학문을 아는 장자(長者)들이 기묘년에 비해 많다고들 합니다.”
하고, 윤근수가 아뢰기를,
“기묘년 이후로 사람들이 선(善)을 향하려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은 대개 조광조가 쏟은 공력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고, 선생이 아뢰기를,
“근래 여항(閭巷)의 하천배(下賤輩)까지도 상례(喪禮)를 닦아 거행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더러 청상과부가 개가(改嫁)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모두 기묘년의 사림들이 진작시킨 효과입니다. 다만 조광조는 나이가 38세에 그쳤고 당시 조정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술을 하여 후세에 전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학문의 깊이는 알 수 없지만 그가 한 일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모두 흠앙(欽仰)하고 있습니다.”
하고, 윤근수가 아뢰기를,
“소신이 전해 들으니, 하루는 명종께서 전교하시기를 ‘여항에서 마땅히 《소학》을 읽어야 한다.’ 하시자,
윤개(尹漑)가 정승으로 있다가 이 전교를 듣고 찬양하였다 합니다. 그러자 윤원형(尹元衡)이 ‘사람은 마땅히 마음속으로 선을 하여야 한다. 기묘년에 《소학》을 숭상하였으나
신사년에 난리가 났고 을사년에 또 난역(亂逆)이 생겼으니 《소학》은 난역의 글이다.’ 하였는데, 윤개가 이 말을 듣고 벌벌 떨었다 하니 윤원형의 심술을 여기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윤원형이 국가에 죄를 지은 것이 이루 말할 수가 없는데, 이제 이 말은 내가 정말 모르고 있었다. 이 말을 듣고 보니, 선현들을 모두 비방하였는바 그는 참으로 만세(萬世)에 죄를 지은 자이다.”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
한탁주(韓侂冑)는 주자(朱子)를 위학(僞學)이라고 비난했는데,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윤원형이 당시에 저지른 일을 보면 이 정도는 실로 심상한 일로서 괴이하게 여길 것도 못 됩니다. 윤원형의 악행에 대해서는 어제 대략 아뢰었습니다. 윤원로(尹元老)와 윤원형은 바로 형제간인데 모두 간사하고 악독하였습니다. 명종이 즉위 하신 초년에 곧바로 윤원로를 축출하였기 때문에 윤원로가 공신에 끼지 못해 윤원형을 원망하였습니다. 이에 윤원형은 윤춘년(尹春年)을 사주하여 소장을 올리게 하여 그를 쫓아내고는 죽였습니다. 윤원로의 죄는 죽어 마땅하나 그를 죽인 자는 윤원형이었습니다. 지친(至親)인 형제간에도 오히려 이와 같았으니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겁내는 것이 어찌 다함이 있었겠습니까. 자고로 윤원형보다 더한 소인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날 유생이 상소하여 ‘바야흐로 위세가 천지를 진동하던 때였다.’라고 하였는데, 이와 같았기 때문에 감히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전교가 지극하십니다. 지난 일을 잊지 않는 것은 뒷일의 귀감이 되기 때문입니다. 윤원형 같은 소인은 진실로 드물지만 아무리 소소한 소인이라도 틈을 타 들어온다면 또한 성치(聖治)에 누가 될 것입니다. 사욕을 극복하고 선을 따라 어진 선비들을 가까이하소서. 그러면 세상이 좋아질 것입니다.”
하고, 윤근수가 아뢰기를,
“을사년에 죄를 받은 사람 중에 권벌(權橃)과 이언적(李彦迪)은 이미 표창과 증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또 송인수(宋麟壽)란 사람이 있는데, 그는 바로 선인군자(善人君子)였습니다. 종사한 학문의 깊이는 알 수 없지만 일가의 효행이 탁월하였는데, 얼굴빛을 바르게 하고 조정에서 벼슬하다가 원흉들에게 거슬려 죄를 받고 죽었습니다. 이 사람의 훌륭함은 권벌이나 이언적과 같은 수준에서 논해야 합니다.”
하고, 선생이 아뢰기를,
“처음에는 그를 부박(浮薄)한 무리의 영수라 하여 파직하였고, 뒤에는
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 사건으로 인하여 사약을 내리기까지 하였습니다. 상께서 이미 신원(伸冤)해 주셨습니다만 이 사람의 훌륭함에 대해 상께서 잘 아시지 못하여 사림에서 원통하게 여기는 것이 매우 우려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회맹문(會盟文)에는 모반했다고 적기까지 하였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송인수는 일생 동안 기묘년의 여러 현인들을 흠모하였습니다. 계묘년(1543, 중종38)과 갑진년(1544)에는 전라 감사가 되어서 《소학》을 읽을 것을 권면하고 후생들을 이끌어 주었으니, 그 당시 《소학》을 읽게 된 것은 모두 송인수의 공로입니다.
오늘 낮에 천둥이 쳤는데 이것이 아무리 현재의 절기에 있을 수 있는 현상이라 하더라도 성상의 분부에 미안하게 여기셨으니, 지극하다고 할 만합니다. 여름철이 비록 천둥이 치고 비가 오는 때라고는 하나, 장마가 너무 지나쳐서 호남과 영남에 수재가 극히 참혹합니다. 봄에는 한해(旱害)가 있었고 여름에는 수해가 있어서 벼와 곡식이 상했으니, 백성들이 무엇을 의지해 살겠습니까. 이것은 천지의 나쁜 기운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니, 상께서 각별히 살피고 유념하셔야 합니다. 군주의 한 생각이 천지의 조화를 도와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용》에 이르기를 ‘중화(中和)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를 찾고 만물이 잘 길러진다.’ 하였습니다.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정밀하게 하고 단속하여 내 마음이 바루어져 천지의 마음도 바루어지고 내 기운이 순해져 천지의 기운도 순하게 되면, 비 오고 볕 나는 것이 때에 맞아서 천지가 제자리를 찾게 될 것입니다. 삼대(三代)의 융성하던 시기에는 새와 짐승, 어류에 이르기까지 모두 잘 자랐으니, 천지의 기운이 화(和)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효과를 이룬 것입니다. 당 태종 때에 수재와 한해가 있었어도 백성들이 원망하지 않았는데, 이는 군주가 걱정하고 부지런히 힘써서 백성들을 위무(慰撫)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끝내는 풍년이 들어 쌀 한 말에 3전(錢) 하는 효과를 거두었으니, 그가 인의(仁義)를 진심으로 행하지 않고 겉으로만 행하였다고는 하나 이 또한 위징(魏徵)이 선정을 행하도록 권면한 소치입니다.
즉위하시고 나서 봄ㆍ여름의 교체기에는 비와 바람이 순조로워서 대풍(大豊)의 경사를 기대하게 하더니, 가을에 들어서면서 풍재(風災)가 끊이지 않아 밭농사는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논농사는 그래도 조금 수확할 수 있어 아사(餓死)할 우려는 간신히 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봄부터 강우량이 제대로 맞지 않더니 여름이 되면서 더욱 심해져 민생에 대한 일이 지극히 어렵고 괴롭게 되었으니, 각별히 살피고 유념하시어 미진한 일이 있거든 수성(修省)하는 데 극진히 힘써서 천심을 되돌리셔야 할 것입니다. 하늘이 만민을 내었으나 스스로 다스릴 수 없기에 임금을 세워 만민의 주인이 되게 하였고, 임금은 또 혼자서 다스릴 수 없기에 수령과 근심을 나눠 가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수령이 백성을 잘 다스리지 못하여 백성에게 원망이 있게 되면 임금이 반드시 벌을 주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성실하지 못하여 유리(流離)하여 살 곳이 없게 만든다면 천심이 어찌 진노하지 않겠습니까. 억조창생 위에 군림하고 있는 군주로서는 다른 것은 두려워할 게 없으나 황천(皇天)이 위에서 환히 살펴보고 계시니, 한 생각이라도 잘못될 때마다 상제가 진노할 것을 두려워하신다면 천심이 기뻐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이 지당하다.”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소신이 우연히 생각난 것을 계달했는데 성상의 분부가 이와 같으시니 감격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성상께서 한가로울 때에도 조금도 중단하지 않으신다면 덕이 성인과 동등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주D-001]우탁(禹倬) : 1263~1342. 고려 말 정주학(程朱學) 수용 초기의 유학자로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천장(天章) 또는 탁보(卓甫), 호는 백운(白雲) 또는 단암(丹巖),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성균 좨주(成均祭酒)로 치사(致仕)한 뒤 예안(禮安)에 은거하면서 후진 교육에 전념하였다. 경사(經史)에 통달하였고 역학(易學)에 더욱 조예가 깊어 세상에서 ‘역동 선생(易東先生)’이라 일컬어졌다.[주D-002]길재(吉再) : 1353~1419.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 또는 금오산인(金烏山人), 시호는 충절(忠節)이다. 후학의 교육에 힘써 그의 문하에서 김숙자(金叔滋) 등 많은 학자가 배출되어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로 그 학통이 이어졌다.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인동(仁同)의 오산서원(吳山書院)에 향사되었고, 이색ㆍ정몽주와 함께 고려의 삼은(三隱)으로 일컬어졌다. 저서에 《야은집》이 있고, 언행록인 《야은 언행 습유록(冶隱言行拾遺錄)》이 전한다.[주D-003]김숙자(金叔滋) : 1389~1456.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자배(子培), 호는 강호산인(江湖散人),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16세기에 사림에 의하여 확립된 도통(道統)의 계보에서 길재의 학문을 아들 종직(宗直)으로 하여금 잇게 하였다. 선산의 낙봉서원(洛峯書院)에 제향되었다.[주D-004]윤개(尹漑) : 1494~1566.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여옥(汝沃), 호는 회재(晦齋) 또는 서파(西坡)이다. 한어(漢語)에 능통하여 명나라와의 외교 활동에 이바지하였다. 윤원형(尹元衡)에게 가담하여 추성위사홍제보익 공신(推誠衛社弘濟保翼功臣) 2등에 책록되고 영평군(鈴平君)에 봉해졌으나, 선조 초에 녹훈이 삭탈되었다.[주D-005]신사년에……생겼으니 : 신사년의 난리는 1521년(중종16)에 일어난 신사무옥(辛巳誣獄)을 가리킨다. 기묘사화 이후 심정(沈貞), 남곤(南袞) 등이 세력을 떨치자 안당(安瑭)의 아들 안처겸(安處謙)이 이정숙(李正叔) 등과 함께 남곤과 심정이 사림을 해치고 국정을 망친다 하여 제거할 것을 모의하였다. 이때 함께 있던 송사련(宋祀連)이 안처겸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작성한 조객록(弔客錄)을 가지고 고변(告變)하여 대신을 모해하려 한다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안씨 일족과 이약빙(李若氷) 등 수많은 사람이 처형되었다. 을사년의 난역은 을사사화를 가리킨다.[주D-006]한탁주(韓侂冑) : ?~1207. 하남성(河南省) 안양(安陽) 사람으로 한기(韓琦)의 증손이다. 영종(寧宗) 옹립에 공을 세우고 외척으로서 정계에 등장하였다. 우승상 조여우(趙如愚)와 대립하여 그를 지방으로 유배 보내고, 조여우가 추천한 주자와 그 학파를 위학(僞學)으로 몰아 추방함으로써 ‘경원(慶元)의 당금(黨禁)’을 일으켰다. 이후 14년간 정권을 자의로 전단하였으며, 권세 확장을 위하여 금(金)나라 정벌군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자 문책을 받고 사미원(史彌遠)에게 살해당하였다. 그 수급(首級)은 금나라로 보내졌다.[주D-007]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 사건 : 1547년(명종2)에 정언각(鄭彦慤)이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양재역에서 “여주(女主 : 문정왕후)가 집권하고 간신 이기(李芑) 등이 권력을 남용하여 나라가 망하려 하니 한심하지 않은가.”라는 익명의 벽서를 발견하고 이기, 윤인경(尹仁鏡), 정순붕(鄭順朋) 등에게 알리자, 반대파들의 소행으로 몰아 사림을 대거 숙청하고 권력을 독점한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