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헌선생문집 제10권_

논(論)_

 

공자(孔子)가 지위를 얻지 못한 데 대한 논

 

다음과 같이 논한다.
“하늘이 성인(聖人)을 낳음은 반드시 뜻이 있어서이니, 장차 그 도(道)를 행하고 그 덕(德)을 베풀어 천지(天地)가 자리를 잡고 만물(萬物)이 길러지는 사업을 이룩하여 천하로 하여금 올바른 천하가 되게 하려고 해서이다. 가령 천지와 만물이 있더라도 성인(聖人)이 그 사이에 태어나 능사(能事)를 다하지 않는다면 하늘이 하늘다운 하늘이 되지 못하고, 땅이 땅다운 땅이 되지 못하고 만물이 만물다운 만물이 되지 못할 것이니, 어찌 홀로 이 사람만이 사람다운 사람이 되지 못할 뿐이겠는가. 그렇다면 하늘이 성인을 낳은 까닭을 알 수 있다.
이미 성인이 있어 성인이 그 능사를 다하게 되는 이유는 지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지위를 얻는 것이 어찌 떳떳한 도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우주(宇宙)가 있어온 이래로 천지간의 대세(大勢)는 자연 고금(古今)과 전후(前後)의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그 형세가 반드시 한때의 천지를 편안히 하고 한때의 만물을 길러 한때의 천하로 하여금 천하다운 천하가 되게 하여야 할 경우에는, 하늘이 반드시 성인을 이 때에 탄생시키고, 마침내 한때의 지위를 주어서 한때의 능사를 다하게 한다.
그리고 그 형세가 반드시 만세(萬世)의 천지를 편안히 하고 만세의 만물을 길러 주어 만세의 천하로 하여금 천하다운 천하가 됨을 잃지 않게 하여야 할 경우에는, 하늘이 또 반드시 성인을 이 때에 탄생시키되 한때의 지위를 주지 않고, 마침내 만세의 지위를 주어 만세의 능사를 다하게 한다. 혹 한때의 지위를 얻기도 하고 혹 만세의 지위를 얻기도 하는 것은 이 모두가 하늘이 하는 것이다.
사람은 다만 한때의 지위가 지위가 됨을 알고 만세의 지위가 큰 지위가 됨을 알지 못하며, 또 다만 한때의 지위가 영화스러운 것인 줄만을 알고 만세의 지위가 지극한 영화가 됨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지위가 있는 지위는 그 높음을 측량할 수 있고 그 큼이 한계가 있으나, 지위가 없는 지위는 그 높음을 측량할 수 없고 그 큼이 한계가 없으니, 이 어찌 우주 사이에 다함이 없고 더 클 수 없는 지위가 아니겠는가. 오직 우리 부자(夫子 공자를 가리킴)가 마침내 이 지위를 소유하였으니, 어찌 지위를 얻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만약 한때의 지위를 가지고 상고해 보면 삼대(三代) 이전의 성인들은 모두 이 지위를 소유하였다. 삼황(三皇)을 상고(上古) 시대에 탄생시켜 상고 시대의 천지를 편안하게 하고 상고 시대의 만물을 길러 상고 시대의 천하로 하여금 상고 시대의 천하가 될 수 있게 하였으며, 오제(五帝)를 상고 이후 삼대 이전의 세대에 탄생시켜 상고 이후의 천지를 편안히 하고 상고 이후의 만물을 길러 상고 이후의 천하로 하여금 상고 이후의 천하가 되게 하였으며, 또 삼왕(三王)을 삼대의 시대에 탄생시켜 삼대의 천지를 편안히 하고 삼대의 만물을 길러 삼대의 천하로 하여금 삼대의 천하가 되게 하였다.
이 어찌 삼대 이전에는 우주의 큰 기수(氣數)가 그 때에 크게 왕성하여 양명(陽明)한 기운이 길이 성하고 음탁(陰濁)한 기운이 적게 나온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이 때에는 성인(聖人)이 교대로 나와서 혹 한때에 아울러 탄생하고 혹 대를 이어 탄생하였으며, 늦어도 5백 년을 지나지 않고 탄생하였다.
이는 천지 사이의 대세가 다만 한때의 천지를 편안히 하고 한때의 만물을 길러 한때의 천하로 하여금 천하가 되게 하면 충분하였기 때문이니, 이는 바로 삼대 이전에는 하늘이 한 성인을 낳고 반드시 한때의 지위를 주어 한때의 능사(能事)를 다하게 한 이유이다.
그러나 춘추(春秋) 시대에 이르러는 우주의 큰 기수가 이미 쇠하였다. 양명한 기운이 다시는 길게 성하지 못하고 음탁한 기운이 도리어 크게 왕성하니, 만세의 천지가 이로부터 장차 비색(否塞)해지고 만세의 만물이 이로부터 잔멸(殘滅)하여 만세의 천하가 장차 다시 천하가 될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하늘이 이 때에 다만 한때의 천하만을 생각하고 만세의 천하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이미 만세의 천하를 생각하여 만세의 천하로 하여금 만세에 천하가 됨을 잃지 않게 하고자 할진댄 하늘이 특별히 낳은 큰 성인이 있지 않고 이것을 능히 할 수 있겠는가. 이는 하늘이 반드시 전고(前古)에 일찍이 없었던 부자(夫子)를 춘추 시대에 탄생시키고 전고에 일찍이 없었던 지위를 부자의 몸에 주어 전고에 일찍이 없었던 사업을 만세에 하게 한 것이니, 하늘의 뜻이 원대하고 또 깊지 않겠는가.
부자로 하여금 한때의 지위를 얻지 못하고 만세의 지위를 얻게 하였다. 그러므로 만세의 아래에 하늘이 하늘다운 하늘이 되고, 땅이 땅다운 땅이 되고,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 물건이 물건다운 물건이 되어 천하가 지금에 이르도록 천하다운 천하가 된 것이다. 만약 부자가 단지 한때의 지위를 얻었더라면 한때의 천지는 진실로 편안히 할 수 있었겠으나 만세의 천지가 될 수 있었겠는가. 한때의 만물은 진실로 길러질 수 있었겠으나 만세의 만물은 만물이 될 수 있었겠는가. 천하가 천하다운 천하가 되지 못함이 이미 오래일 것이다.”
혹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대는 부자가 만세의 지위를 얻었다고 말하는데, 천자(天子)의 지위라는 것은 천하의 제일 높은 위에 있고 사해(四海)의 부유함을 소유하여 지존(至尊)의 귀함을 누리는 것이다. 그 복식(服飾)은 곤룡포(袞龍袍)와 면류관(冕旒冠)이고 그 거처는 궁전(宮殿)이며, 백관(百官)들이 신하가 되고 만백성이 백성이 되어 조회 오는 자가 만국(萬國)이고, 공물(貢物)을 바치는 자들이 사다리를 타고 산을 넘어오고 바다를 항해하여 온다.
그런데 이른바 부자의 지위라는 것은 과연 천자의 지위가 누리는 바를 소유하였는가. 수수(洙水)와 사수(泗水) 사이에서 거친 밥을 먹고 궐리(闕里)의 거주하는 곳에서 팔을 베개 삼아 누웠었다. 그리하여 자신은 ‘어쩔 수 없다’는 한탄을 발하였고, 사람들은 ‘덕(德)이 쇠했다’는 비난이 있었으니, 이 과연 지위를 소유하였다고 이를 수 있겠는가.”
이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높음이 없는 높음이 부자의 높음이며 부유함이 없는 부유함이 부자의 부유함이며 귀함이 없는 귀함이 부자의 귀함이니, 이는 부자의 지위 없는 지위가 그 부유함이 지극히 부유하고 그 귀함이 지극히 귀하고 그 높음이 지극히 높은 것이다. 만세가 높임이 어찌 한때에 높임과 같으며, 만세에 영화롭게 여김이 어찌 한때에 영화롭게 여김과 같겠는가. 도(道)가 만세의 교화에 행해지니 누가 그 귀함에 비견될 것이며, 덕이 만세의 사람과 물건에 입혀지니 누가 그 귀함에 비견되겠는가.
천지와 똑같이 유구(悠久)하니 부자의 지위가 이 때문에 장구하며, 일월(日月)과 똑같이 광명하니 부자의 지위가 이 때문에 드러난다. 땅에 붙어 있지 않고 만세에 붙어 있으며 지위를 지위로 여기지 않고 지위가 없는 것을 지위로 여기니, 이 때문에 공자가 되신 것이다.
문선왕(文宣王)이라고 칭호를 붙이고 태뢰(大牢)의 제향으로 제사하는 것으로 말하면, 또한 지엽적인 일일 뿐이다. 앞서 만고의 위에 있는 여러 성인의 지위가 부자의 지위를 얻어 그 광채를 더하고, 뒤로 만고의 아래에 있는 백왕(百王)의 지위가 부자의 지위를 의뢰하여 그 영화로움을 누리니, 부자의 지위가 여러 성인과 백왕의 지위를 겸한 것이 아니겠는가.
성인으로서 지위를 얻은 자를 칭할 적에 그 누가 삼황(三皇)과 오제(五帝)와 삼왕(三王)을 말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삼황은 모두 다만 한때의 삼황이 되었고, 오제는 모두 다만 한때의 오제가 되었고, 삼왕은 모두 다만 한때의 삼왕이 되었다. 그리하여 삼황은 오제의 사업을 겸할 수 없고 오제는 삼왕의 사업을 겸할 수 없었으나, 오직 우리 부자(夫子)는 삼황의 도를 행하고 오제의 덕을 얻고 삼왕의 공(功)을 공으로 여겨 도가 만세에 행해지고 덕이 만세에 입혀지고 공이 만세에 흐르니, 그렇다면 우리 부자는 만세의 삼황이요, 만세의 오제요, 만세의 삼왕인 것이다. 이것이 만세의 지위가 하는 바가 아니겠는가.
더구나 얻음이 있는 얻음은 혹 얻음을 잃을 수 있으나 얻지 않는 얻음은 그 얻음을 잃음이 없으며, 지위가 있는 지위는 그 지위가 끝이 있으나 지위가 없는 지위는 그 지위가 다함이 없으니, 이는 부자가 한때에 지위를 얻지 못한 것이 바로 만세에 지위를 얻게 된 것이다.”
혹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자의 지위는 그렇다 하거니와 그 지위의 사업은 무엇을 가지고 볼 수 있는가?”
이에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경(禮經)》, 《악경(樂經)》, 《주역(周易)》, 《춘추(春秋)》가 그것이다.”
삼가 논한다.

[주D-001]태뢰(大牢)의 제향 : 태뢰는 소, 양, 돼지의 세 가지 희생(犧牲)으로 성대한 제수이다. 한 고조(漢高祖)는 일찍이 노(魯) 지방을 지나면서 태뢰로 공자에게 제사하였는데, 이후로 역대 제왕들이 모두 태뢰로 성대히 제사하였다. 《史記 卷四十七 孔子世家》

여헌선생문집 제10권_

발(跋)_

 

신송계(申松溪)계성(季誠)의 여표 비명(閭表碑銘) 뒤에 쓰다.

 

남명(南冥) 조 선생(曺先生)은 기상(氣像)과 법도(法度)가 준엄하여 사람들을 허여함이 적었으나 마침내 공을 막역지교(莫逆之交)로 여겨 서로 왕래하고 종유(從遊)하였으며, 심성(心性)을 논하고 의리를 강론할 적에 일찍이 존중함을 지극히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또한 별세한 뒤에는 감히 잊지 못하고 묘표(墓表)를 지어 후세에 전하는 글을 만들었다. 낙천(洛川) 배신(裵紳) 역시 높은 학자인데 마침내 그 행실을 기록하여 전하니, 그 말씀은 과연 모두 착실하여 빈 말이 아니었다.
그 뒤에 부사(府使) 김극일(金克一)이 부(府)를 맡았을 적에 처음으로 선생의 덕의(德義)를 들었으며, 조남명의 갈문(碣文)과 배낙천의 행장(行狀)을 보고는 더욱 믿고 복종하였다. 그리하여 돌을 세워 표장(表章)할 것을 원하는 지방 사람들의 요청을 따라 마침내 글을 지어 새겼으나 이 비(碑)가 왜란(倭亂) 중에 부서져 없어짐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또다시 옛글을 새겨 복구하였다.
아! 아름다운 덕과 올바른 행실이 어찌 오랑캐의 침략과 병화(兵火)로 없어질 수 있겠는가. 병이(秉彛)의 천성(天性)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으니, 부의 선비로서 후생(後生)이 된 자가 각자 스스로 돌이켜 찾아서 자신을 위하는 옛 사람의 학문을 닦는 것이 어찌 이번 일로 인하여 진작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신 선생(申先生)의 남은 가르침이 영원한 세대에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부의 선비들은 또 우졸재(迂拙齋 박한주(朴漢柱)의 호)가 지은 새 비를 새겨 세우고 장차 서원(書院)을 새로 마련한 지역으로 옮겨 건립하려 하니 이는 선비들의 숙원(宿願)인바, 실로 모두 부백(府伯)이 현자(賢者)를 높이고 문교(文敎)를 숭상하는 특이한 업적에서 나온 것이다. 어찌 다만 한 부와 한때의 아름다운 일이겠는가.

 

여헌선생문집 제10권_

발(跋)_

 

신송계(申松溪)계성(季誠)의 여표 비명(閭表碑銘) 뒤에 쓰다.

 

남명(南冥) 조 선생(曺先生)은 기상(氣像)과 법도(法度)가 준엄하여 사람들을 허여함이 적었으나 마침내 공을 막역지교(莫逆之交)로 여겨 서로 왕래하고 종유(從遊)하였으며, 심성(心性)을 논하고 의리를 강론할 적에 일찍이 존중함을 지극히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또한 별세한 뒤에는 감히 잊지 못하고 묘표(墓表)를 지어 후세에 전하는 글을 만들었다. 낙천(洛川) 배신(裵紳) 역시 높은 학자인데 마침내 그 행실을 기록하여 전하니, 그 말씀은 과연 모두 착실하여 빈 말이 아니었다.
그 뒤에 부사(府使) 김극일(金克一)이 부(府)를 맡았을 적에 처음으로 선생의 덕의(德義)를 들었으며, 조남명의 갈문(碣文)과 배낙천의 행장(行狀)을 보고는 더욱 믿고 복종하였다. 그리하여 돌을 세워 표장(表章)할 것을 원하는 지방 사람들의 요청을 따라 마침내 글을 지어 새겼으나 이 비(碑)가 왜란(倭亂) 중에 부서져 없어짐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또다시 옛글을 새겨 복구하였다.
아! 아름다운 덕과 올바른 행실이 어찌 오랑캐의 침략과 병화(兵火)로 없어질 수 있겠는가. 병이(秉彛)의 천성(天性)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으니, 부의 선비로서 후생(後生)이 된 자가 각자 스스로 돌이켜 찾아서 자신을 위하는 옛 사람의 학문을 닦는 것이 어찌 이번 일로 인하여 진작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신 선생(申先生)의 남은 가르침이 영원한 세대에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부의 선비들은 또 우졸재(迂拙齋 박한주(朴漢柱)의 호)가 지은 새 비를 새겨 세우고 장차 서원(書院)을 새로 마련한 지역으로 옮겨 건립하려 하니 이는 선비들의 숙원(宿願)인바, 실로 모두 부백(府伯)이 현자(賢者)를 높이고 문교(文敎)를 숭상하는 특이한 업적에서 나온 것이다. 어찌 다만 한 부와 한때의 아름다운 일이겠는가.

 

여헌선생문집 제10권_

발(跋)_

 

신송계(申松溪)계성(季誠)의 여표 비명(閭表碑銘) 뒤에 쓰다.

 

남명(南冥) 조 선생(曺先生)은 기상(氣像)과 법도(法度)가 준엄하여 사람들을 허여함이 적었으나 마침내 공을 막역지교(莫逆之交)로 여겨 서로 왕래하고 종유(從遊)하였으며, 심성(心性)을 논하고 의리를 강론할 적에 일찍이 존중함을 지극히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또한 별세한 뒤에는 감히 잊지 못하고 묘표(墓表)를 지어 후세에 전하는 글을 만들었다. 낙천(洛川) 배신(裵紳) 역시 높은 학자인데 마침내 그 행실을 기록하여 전하니, 그 말씀은 과연 모두 착실하여 빈 말이 아니었다.
그 뒤에 부사(府使) 김극일(金克一)이 부(府)를 맡았을 적에 처음으로 선생의 덕의(德義)를 들었으며, 조남명의 갈문(碣文)과 배낙천의 행장(行狀)을 보고는 더욱 믿고 복종하였다. 그리하여 돌을 세워 표장(表章)할 것을 원하는 지방 사람들의 요청을 따라 마침내 글을 지어 새겼으나 이 비(碑)가 왜란(倭亂) 중에 부서져 없어짐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또다시 옛글을 새겨 복구하였다.
아! 아름다운 덕과 올바른 행실이 어찌 오랑캐의 침략과 병화(兵火)로 없어질 수 있겠는가. 병이(秉彛)의 천성(天性)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으니, 부의 선비로서 후생(後生)이 된 자가 각자 스스로 돌이켜 찾아서 자신을 위하는 옛 사람의 학문을 닦는 것이 어찌 이번 일로 인하여 진작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신 선생(申先生)의 남은 가르침이 영원한 세대에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부의 선비들은 또 우졸재(迂拙齋 박한주(朴漢柱)의 호)가 지은 새 비를 새겨 세우고 장차 서원(書院)을 새로 마련한 지역으로 옮겨 건립하려 하니 이는 선비들의 숙원(宿願)인바, 실로 모두 부백(府伯)이 현자(賢者)를 높이고 문교(文敎)를 숭상하는 특이한 업적에서 나온 것이다. 어찌 다만 한 부와 한때의 아름다운 일이겠는가.

 

여헌선생문집 제10권_

발(跋)_

 

신송계(申松溪)계성(季誠)의 여표 비명(閭表碑銘) 뒤에 쓰다.

 

남명(南冥) 조 선생(曺先生)은 기상(氣像)과 법도(法度)가 준엄하여 사람들을 허여함이 적었으나 마침내 공을 막역지교(莫逆之交)로 여겨 서로 왕래하고 종유(從遊)하였으며, 심성(心性)을 논하고 의리를 강론할 적에 일찍이 존중함을 지극히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또한 별세한 뒤에는 감히 잊지 못하고 묘표(墓表)를 지어 후세에 전하는 글을 만들었다. 낙천(洛川) 배신(裵紳) 역시 높은 학자인데 마침내 그 행실을 기록하여 전하니, 그 말씀은 과연 모두 착실하여 빈 말이 아니었다.
그 뒤에 부사(府使) 김극일(金克一)이 부(府)를 맡았을 적에 처음으로 선생의 덕의(德義)를 들었으며, 조남명의 갈문(碣文)과 배낙천의 행장(行狀)을 보고는 더욱 믿고 복종하였다. 그리하여 돌을 세워 표장(表章)할 것을 원하는 지방 사람들의 요청을 따라 마침내 글을 지어 새겼으나 이 비(碑)가 왜란(倭亂) 중에 부서져 없어짐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또다시 옛글을 새겨 복구하였다.
아! 아름다운 덕과 올바른 행실이 어찌 오랑캐의 침략과 병화(兵火)로 없어질 수 있겠는가. 병이(秉彛)의 천성(天性)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으니, 부의 선비로서 후생(後生)이 된 자가 각자 스스로 돌이켜 찾아서 자신을 위하는 옛 사람의 학문을 닦는 것이 어찌 이번 일로 인하여 진작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신 선생(申先生)의 남은 가르침이 영원한 세대에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부의 선비들은 또 우졸재(迂拙齋 박한주(朴漢柱)의 호)가 지은 새 비를 새겨 세우고 장차 서원(書院)을 새로 마련한 지역으로 옮겨 건립하려 하니 이는 선비들의 숙원(宿願)인바, 실로 모두 부백(府伯)이 현자(賢者)를 높이고 문교(文敎)를 숭상하는 특이한 업적에서 나온 것이다. 어찌 다만 한 부와 한때의 아름다운 일이겠는가.

 

여헌선생문집 제10권_

발(跋)_

 

포산 향약책(苞山鄕約冊)의 뒤에 쓰다.

 

아! 대학(大學)과 소학(小學)의 도(道)를 강(講)하지 아니하여 선비들이 올바른 학문을 잃고, 지방에 삼물(三物)의 가르침이 행해지지 아니하여 지방에 선(善)한 풍속이 없어졌으니, 백성들이 어찌 다시 삼대(三代)의 훌륭함을 볼 수 있겠는가. 교화의 근본과 학교의 거행은 바로 위에 있는 자의 책임이니, 위에 있는 자가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세상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향약(鄕約)을 만든 것으로 말하면 어찌 후세에 부득이하여 만든 규정이 아니겠는가. 병이(秉彛)의 천성(天性)과 윤기(倫紀)의 차례는 하늘이 똑같이 부여(賦與)하여 사람들이 함께 행하여야 하니, 단 하루도 이를 어겨서는 사람이 될 수 없고, 이를 거스르면서 세상에 있을 수 없다. 혹 호걸스러운 선비가 있어 문왕(文王)을 기다리지 않고 그 사이에 나와 이미 스스로 자기 몸을 선하게 하였으면 또 반드시 혼자만이 이루지 않고 반드시 함께 서려는 뜻을 두어야 하니, 이 때문에 지방에 약속이 있게 된 것이다.
지목하여 약(約)이라 하였으니, 약은 지방 사람들의 일이다. 그러나 그 도는 본성(本性)을 따르고 윤리(倫理)를 밝히고, 자신을 바로잡고 남을 바로잡는 요점이니, 비록 위에 있는 자의 정사에서 나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대학과 소학, 지방의 삼물의 도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 약속은 처음 송(宋) 나라 때의 남전 여씨(藍田呂氏)에게서 나왔는데, 우리 나라에는 본조(本朝)에 정암(靜庵) 조공(趙公)이 이것을 들어 시행할 것을 청하였으나 미처 마치지 못하였고, 그 뒤에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이 또한 일찍이 그 조항을 가감(加減)하여 영구히 통행할 수 있는 규정으로 삼았다. 그러나 함(咸), 영(英), 소(韶), 호(濩)의 훌륭한 음악은 말로(末路)의 귀와 눈에 합하기 어렵고, 대갱(大羹)과 현주(玄酒)는 후세의 잔치 자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끝내 한 세상에 미루어 행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유식한 자가 깊이 슬퍼하지 않겠는가.
지금 김후 세렴(金侯世濂)이 포산(苞山)의 원이 되어 마침내 이 일에 뜻을 다하고 전후의 과조(科條)를 찾아 전사(傳寫)하여 책을 만들되 먼저 학규(學規)를 향약의 첫머리에 놓고, 또 향약의 조항을 부연하여 본현(本縣)에 시험 삼아 시행하고 있으니, 참으로 보기 드문 일이다. 내 일찍이 치하(治下)의 사람을 만나 들으니, 아직 몇 달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자못 새로운 효험이 있다고 말하였다. 병이(秉彛)의 천성을 진실로 속일 수 있겠는가.
나는 향약의 글을 한 번 보았으면 하였는데, 마침내 보내 주어 그 머리와 끝을 보게 되었다. 포산 사람들이 과연 시종 이 약속과 같이 한다면 한 고을이 어찌 집집마다 봉작(封爵)을 받을 만한 아름다움이 있지 않겠는가. 다만 생각하건대, 이러한 일을 세속의 사람들은 우활(迂闊)하다 하여 괴이하게 여기고 업신여기지 않는 자가 드물 것이니, 뜻이 있는 자는 세속 사람들이 비웃고 업신여긴다 하여 스스로 저상(沮喪)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옛날에 주회암(朱晦庵)은 이미 《소학(小學)》 책을 짓고 책 머리에 “혹자들은 옛날과 지금은 마땅함이 다르다고 말하고 있으나 옛날과 지금의 차이가 없는 것은 진실로 일찍이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참으로 알지 못한다.” 하였다. 이 향약 가운데의 절목(節目)은 성분(性分)과 직분(職分)에 벗어난 것이 없으니, 이는 높은 지위에 있는 자가 먼저 그 정성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바라건대 어진 김후(金侯)는 주회암의 이 말씀을 함께 약속한 사람들에게 말해줄 수 있겠는가.

[주D-001]삼물(三物)의 가르침 : 삼물은 세 가지 일로 육덕(六德)과 육행(六行)과 육예(六藝)를 가리킨다. 여헌선생문집 제9권 기(記) “향사당(鄕射堂)에 대한 기문” 중 ‘삼물(三物)의 가르침’ 주 참조.
[주D-002]함(咸), 영(英), 소(韶), 호(濩) : 모두 고대의 훌륭한 음악이다. 함은 함지(咸池)로 황제(黃帝)의 음악이고, 영은 육영(六英)으로 제곡(帝嚳)의 음악이며, 소는 순(舜) 임금의 음악이고, 호는 대호(大濩)로 탕(湯) 임금의 음악이다.
[주D-003]대갱(大羹)과 현주(玄酒) : 대갱은 종묘(宗廟) 제사에 올리는 쇠고기국이고, 현주는 정화수(井華水)인데 옛날 술이 없을 때에 대신 올렸다. 대갱은 원래 간을 맞추지 않고, 현주 역시 이름만 술이지 아무런 맛이 없으므로 말한 것이다.

여헌선생문집 제10권_

발(跋)_

 

동강 선생(東岡先生)의 행장 뒤에 쓰다.

 

이상은 한강(寒岡) 정 선생(鄭先生)이 동강 선생(東岡先生) 김공(金公 김우옹(金宇顒)을 가리킴)의 행실을 기록한 것인데, 미처 글을 끝마치지 못하였다.
이미 공(公)의 훌륭한 덕업(德業)이 있다면 진실로 이에 대한 행장이 없을 수 없는데, 공을 잘 안 분이 정 선생보다 더한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공의 사자(嗣子)인 효가(孝可)가 정 선생에게 나아가 청하니, 정 선생은 곧 승낙하며 말씀하기를, “아! 공의 행실을 기록하는 것을 내 어찌 사양하겠는가.” 하고, 이에 그 세계(世系)와 출생한 향리(鄕里), 생졸(生卒)의 연월과 재주를 이루고 발신(發身)한 내력 및 벼슬하고 그만두고 나아가고 물러간 대략을 기술하였는데, 원고를 미처 탈고(脫稿)하기 전에 정 선생의 만년의 병이 이미 발하여 끝내 미완성의 글이 됨을 면치 못하였으니, 어찌 영원한 한(恨)이 되지 않겠는가.
지금 효가는 내가 또한 일찍이 공에게 인정을 받았으며, 또한 정 선생이 공에게 뜻이 깊이 부합하고 서로 허여(許與)함이 중하여 심상치 않음을 안다 해서 나로 하여금 그 행장의 끝을 추보(追補)하여 끝마치지 못한 말씀을 보충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아! 한강 선생의 붓으로 동강 선생의 행실을 기록하여 영원한 세상에 전하여 보이는 것이 참으로 어떠한 일인데, 내가 감히 그 글의 뒤에 붓을 함부로 놀려 글을 쓸 수 있겠는가. 또, 정 선생이 이미 기술한 글을 자세히 보면 김공의 실적(實跡)이 처음과 끝이 이미 구비되었고, 다만 미진한 것은 오직 아름다운 덕을 거듭 드러내어 남은 쌓임을 다시 나타내는 내용뿐이다. 그렇다면 후세에 덕을 아는 자가 이 글을 살펴 보면 또한 충분히 공의 행실과 사업을 알 것이다. 이에 굳이 딴 손으로 보충하여 천근한 말을 엮을 필요가 없다고 여겨진다.
다만 생각하건대, 이 글은 바로 정 선생이 미처 탈고하지 못하신 것이니, 또한 그 말을 적어 한스러움을 표하지 않을 수 없는바, 또 정 선생이 일찍이 공에게 제사(祭祀)한 글이 있으니, 그 글을 보면 또한 정 선생이 공을 기뻐하고 복종하여 성대히 칭찬한 것을 알 것이다. 비록 이 행장(行狀)에는 그 말을 다 하지 않았으나 오직 그 찬양하고 발휘한 뜻은 그 제문(祭文)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제문에 “천자(天資)가 초매(超邁)하고 기우(氣宇)가 온수(溫粹)하여 깨끗한 물과 달속의 금회(襟懷)요, 빙상(氷上)과 같은 풍치(風致)였다. 화(和)하면서 강(剛)하니 실로 하늘이 완전히 품부(稟賦)해 준 것이다.”라는 내용이 있으니, 이는 그 품수(稟受)가 빼어남을 말씀한 것이다.
“일찍 가학(家學)을 이어 뜻을 쓸 바를 알았으며, 곧바로 도가 있는 분의 문하(門下)에 올라 가르침을 받았으며, 퇴도(退陶 퇴계 선생)를 흠모하여 항상 공경하고 바라는 마음 간절하였네. 이천(伊川)과 회암(晦庵)의 정맥(正脈)은 경(敬)과 의(義)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주서(朱書)를 반복하여 익숙히 읽어 잠시도 떠나지 않았네.”라는 내용이 있으니, 이는 학문의 연원(淵源)을 말씀한 것이다.
또 “이미 과거(科擧)에 오르고는 물러나 스스로 은둔하여 오직 천석(泉石)과 구림(丘林)에 뜻을 두고 세로(世路)의 분화(紛華)를 부운(浮雲)과 헌신짝처럼 여겼네.”라는 내용이 있으니, 이는 평소의 뜻이 정해졌음을 말씀한 것이다.
“편안하고 깨끗하고 소탈하여 물건에 물들지 않았네. 젊었을 때로부터 늙음에 이르기까지 분하게 여기는 모양을 보지 못하였으며, 서책(書冊) 이외에는 한 가지도 좋아하는 것이 없었네.”라는 내용이 있으니, 이는 소양(素養)이 바름을 말씀한 것이다.
“일에 임하면 강개(慷慨)하여 돌아보고 꺼리는 바가 없었네. 간곡한 계책과 당당한 의논으로 충성스럽고 곧고 강직하여 육지(陸贄)와 배합되었네.” 한 것은 군주를 섬기는 의리를 말씀한 것이며, “특히 충신과 간신을 엄격히 구별하고, 또한 의(義)와 이(利)의 구분을 삼가서 착한 사람들은 위로받고 간사한 도당(徒黨)들은 두려워했네.” 한 것은 조정에 있을 때의 바름을 말씀한 것이다.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비록 간절하나 벼슬하려는 마음이 없어 매양 관직을 받으면 곧 사양하여 나아가기를 어렵게 여기고 피하듯이 하였네.” 한 것은 편안히 물러난 용맹이며, “깨끗한 한 방에서 외물(外物)의 얽매임을 깨끗이 씻어버리고 세상의 일에 담박(淡泊)하여 뜻이 없는 것과 같았네.” 한 것은 평소 행실의 편안함이다. “평생 도를 곧게 행하다가 이것이 화근(禍根)이 되어 천리(千里) 먼 변방으로 3년 동안 유배(流配)되니, 세상을 걱정하고 군주를 그리워하여 깨끗한 눈물을 몇 번이나 뿌렸으며, 멀리 군주를 따라 친히 여섯 고삐를 받들었네. 의리에 어려움을 사양하지 않고, 먼 길에 넘어지고 쓰러졌네.” 한 것은 평탄하거나 험할 때에 절개가 똑같음을 말씀한 것이다.
“차자(箚子)를 올려 억울함을 밝히고 지난날의 간사한 자들을 추후(追後)에 배척하니 의리가 곧고 마음이 공정(公正)하여 공평함이 저울추와 같았으며, 붓이 청상(淸霜)처럼 엄하여 듣는 자가 간담(肝膽)이 서늘하였네. 사기(士氣)가 이 때문에 건장해지고, 사책(史冊)이 빛을 더했네.” 한 것은 좋아하고 미워함의 바름을 말씀한 것이다.
“마음을 전원(田園)과 채전(菜田)에 붙이고 화초(花草)와 약초(藥草)를 섞어 심으니 어찌 여름을 보내기 위하여 장기 놀이를 하는 자와 같겠는가.” 한 것은 감추고 숨은 자취이며, “ 《속강목(續綱目)》을 만들어 그윽함을 밝히고 깊음을 드러내니 장차 세상의 가르침에 도움이 되어 말씀이 엄정하고 의리가 갖추었네.” 한 것은 진유(眞儒)의 사업이다.
또 “공의 만년(晩年)에 사람들은 더욱 멋대로 미워하여 혹 서로 조소(嘲笑)하고 꾸짖으며 혹 서로 모함하고 시기하였으나 공이 어찌 여기에 마음을 쓰겠는가. 저들의 약삭빠름과 아첨함을 내버려 두었네.” 한 것은 확고하게 지켜서 흔들리지 않음을 말씀한 것이며, “오직 깨끗한 의논이 공을 향하여 그치지 않았네. 공이 다시 기용되어 끝내 베풀던 것을 다하여 공론(公論)을 확장하고 이 백성들을 비호해 주기를 바랐네.” 한 것은 사람들의 의논이 공을 소중히 여겼음을 말씀한 것이다.
“천도(天道)는 어찌하여 한 가지 병이 빌미가 되었는가. 이 한 노인(老人)을 일찍이 남겨 두지 아니하여 선비들은 의지할 데가 없음을 애통해하고, 나라는 곤궁함이 더하네.” 한 것은 지위와 수(壽)가 충만하지 못함을 애통하게 여긴 것이다.
이 글을 들어 잘 이해하면 공의 덕행과 사업을 거의 다 알 것이다. 설령 행장의 서술을 다 쓴다 하더라도 그 대략이 어찌 이 글의 말한 바에 벗어남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행장의 글을 완비하지 못함을 한하는 자들은 어찌하여 이 글의 전편(全篇)을 연구하여 함께 보지 않겠는가.
나 역시 공에 대하여 과연 일찍이 보고 감동함이 있었다. 지금에 그 순수한 모양과 온화한 얼굴, 깨끗한 거동과 평탄한 회포를 추념(追念)해 보면 어찌 세상에 드문 빼어난 영걸(英傑)이 아니겠는가. 어찌 진세(塵世)를 초월하고 세속을 벗어난 기개(氣槪)가 아니겠는가. 어찌 침잠(沈潛)하고 함양(涵養)하여 공력(功力)을 얻음이 참으로 깊고 많은 의표(儀表)가 아니겠는가.
온화하고 평탄한 가운데에 스스로 과단성 있고 확고한 지킴이 있었으며, 편안하고 안정한 가운데에 또한 규범의 정함이 있었다. 그리하여 정채(精彩)가 빼어나고 겉과 속이 환히 통하였으니, 이는 모두가 천진(天眞)이 드러나 발로된 것이요, 덕성(德性)의 자연스러움이었다.
비단 마음이 서로 같고 덕이 같은 자만이 공을 사랑하고 중히 여긴 것이 아니요, 비록 무부(武夫)와 세속의 무리에 이르러도 바라보고 나아가면 감히 군자다운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공의 자질이 아름답고 학문이 밝으며, 마음이 공정하고 도가 정직하였으므로 마음속에 쌓여 외모에 나타남이 자연 이와 같았던 것이다.
이제 그 주의(奏議)와 소차(疏箚 상소문과 차자)가 현재 남아 있는 것이 겨우 열에 서넛에 불과한데 이것을 취하여 읽어 보면 또한 그 문장의 올바름과 위대함을 상상하여 알 수 있다. 자기의 덕을 겸손함에 있어서는 비어 있는 듯하고 없는 듯하여 한결같이 겸손하고 굽혔으나 군주에게 기대하여 인도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요(堯)와 순(舜)의 도로써 하였으며, 집에 거처하는 계책에 있어서는 졸렬함을 따라 분수를 지켜 조금도 경영함이 없었으나 나라에 봉직하여 직책을 맡음에 있어서는 반드시 당(唐)과 우(虞)의 사업으로써 하였다.
그리하여 작은 절개에 급급하지 않고 대의(大義)를 세움에 늠름하였다. 그러므로 의리가 있는 곳에는 비록 천둥과 벼락이 위에 있고 맹분(孟賁)과 하육(夏育)과 같은 장사(壯士)가 힘을 쓰더라도 그 지킴을 빼앗을 수 없었다. 또한 작은 행실에 급급하지 않고 큰 계책의 올바름에 정성을 다하였다. 그러므로 계책을 결단할 만할 일이 있으면 비록 칼과 톱이 앞에 있고 소진(蘇秦)과 장의(張儀)와 같은 변사(辯士)가 언변을 구사하더라도 그 지킴을 동요시킬 수 없었다.
군주에게 아뢴 것은 선(善)한 말이었고 군주에게 바란 것은 성군(聖君)이 되는 일이어서 아는 것을 말하지 않음이 없고 마음속의 생각을 아뢰지 않음이 없었으니, 이는 군주를 사랑하는 충성이었다. 군주가 잘못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돕고, 빠뜨린 것이 있으면 반드시 수습하며, 은미함에 나아가 미리 방비하고, 조짐을 보면 막을 것을 생각하였으니, 이는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이었다.
학문을 논하면 반드시 성현(聖賢)의 심법(心法)에 연연하여 일찍이 속유(俗儒)들의 장구(章句)에 구구(區區)히 얽매이지 않았으며, 일을 논하면 근본과 끝을 겸하여 들고 강령(綱領)과 조목(條目)을 모두 구비하여 무익(無益)하고 간절하지 않은 말을 하지 않았으며, 인물을 논하면 선한 자를 훌륭하게 여기고 악한 자를 미워함이 바로 그 강령이었다. 그러나 소장(所長)이 많다 하여 그 부족한 것을 엄폐하지 않고, 부족한 점이 많다 하여 그 소장을 버리지 아니하여, 매양 “좋아하면서도 나쁜 점을 알고, 미워하면서도 그 아름다움을 알라.[好而知其惡 惡而知其美]”는 말에 대하여 일찍이 반복하여 생각하지 않음이 없었다.
저울대가 이미 평평함에 물건의 경중(輕重)이 스스로 나타나고, 깨끗한 물과 밝은 거울이 정(情)이 없으나 사람의 아름답고 추악함이 스스로 나타나듯 하였다. 그리하여 의리를 털끝만한 사이에 분석하여, 사람들이 옳다 하거나 그르다 한다 하여 부화뇌동하지 않았으며, 위험과 혼란을 기미(幾微)의 즈음에 살펴, 나타나지 않고 드러나지 않았다 하여 경계심을 풀지 아니하였다.
의논과 사설(詞說)이 가슴속에서 나온 것이 평정(平正)하면서도 간절하고 명창(明暢)하면서도 깊으니, 진실로 덕이 있는 자의 말씀이었다. 그러나 군주를 사랑하는 충성이 비록 지극하였지만 의(義)에 편안하지 못함이 있으면 몸을 받들고 물러나 하루가 마치기를 기다리지 않는 자에 가까웠으며,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이 비록 깊었지만 때에 불가(不可)함이 있으면 전원(田園)에 돌아가 즐거워해서 그대로 일생을 마칠 듯이 여겼다.
벼슬에서 물러나 한가로이 있을 때에 조용히 서적(書籍)을 보며 임천(林泉)에 마음을 붙인 것을 보면 쓸쓸하게 한 야인(野人)이 되었을 뿐이며, 청자(靑紫)의 관복을 입은 지취(旨趣)가 있음을 볼 수 없었다. 이는 진실로 인품이 높고 뜻이 고아해서이며, 거짓으로 모양과 정을 꾸미는 자와 똑같이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참다운 사업을 이룩한 것은 또 오로지 《속강목(續綱目)》을 지음에 있었으니, 자주자(子朱子)가 소왕(素王 공자(孔子)를 가리킴)의 사업을 계승하여 만세의 떳떳한 법을 세운 것을 공이 그 권형(權衡)을 얻었다. 또 주자의 《통감강목(通鑑綱目)》 전서(全書)를 가지고 마침내 그 요점을 절취(節取)하여 열람하기에 편리하게 하였는데 책을 미처 이루지 못하고 별안간 별세하였으며, 마침내 그 초고(草稿)마저 뜻밖의 화재(火災)에 소실되어 보전하지 못하니, 아! 애석하다.
다행히 그 주의(奏議)와 소차(疏箚) 약간 권 및 《속강목》한 질이 아직 남아 있으니, 만일 다시 이것을 실추하지 않고 혹 간행하게 된다면 공의 뜻이 후세에 드러날 수 있을 것이며, 세상의 도에 보탬이 있음이 또한 어찌 적겠는가.
공이 전수(傳授)한 학문은 가정(家庭)에서 얻은 것이 이미 본령(本領)이 되었으니, 그렇다면 효도하고 공경하는 도가 그 가운데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 나머지는 모두 이것을 가지고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무릇 이상은 실로 내가 일찍이 보고 느낀 것이며, 여기에 듣고 징험한 것을 덧붙였다.
공은 부인에게서 자녀를 생산하지 못하고 공의 셋째 형인 감찰(監察) 우용(宇容)의 둘째 아들을 취하여 양자(養子)로 삼아 후사(後嗣)를 이으니, 바로 효가(孝可)로 일찍이 강음 현감(江陰縣監)을 역임하였다. 부인은 공보다 8년 뒤에 별세하였는데 장례하여 부묘(祔墓)하였다. 현감은 1남 3녀를 두었는바, 아들 욱(頊)은 진사(進士)이고 사위는 하산(夏山) 성초벽(成楚璧), 서하(西河) 노형필(盧亨弼), 광산(光山) 노사영(盧思永)이다. 욱은 남녀(男女)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며, 공의 측실(側室)에 딸이 하나 있다.
나는 행장을 뒤이어 지으라는 강음(江陰 효가를 가리킴)의 요청에 부응할 수 없기에 마침내 정 선생(鄭先生)이 공에게 제사한 글을 외워 정 선생의 뜻을 밝히고, 인하여 내가 보고 들은 바의 대략을 그 끝에 덧붙이는 바이다.
숭정(崇禎) 2년(1629) 정월(正月) 일(日)에 옥산(玉山) 장현광(張顯光)은 쓰다.

 

여헌선생문집 제10권_

발(跋)_

 

태극논변서(太極論辨書) 발문

 

도(道)를 밝히고 도를 호위함은 모두 이 도를 자임(自任)하는 자의 책임이다. 나는 생각하건대 도를 밝히는 공이 참으로 크나 도를 호위하는 공도 이와 똑같다고 여겨진다. 도를 밝히지 않으면 도가 어두워지니, 반드시 모름지기 도를 밝힌 뒤에야 그 가르침이 해와 별이 하늘에 있는 것처럼 되어 사람들이 보고 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를 밝히는 공이 그 얼마나 위대한가.


그러나 그 사이에 혹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반론을 제기하여 분명한 뜻과 바꿀 수 없는 말씀으로 하여금 드러나지 못하게 하여 후학들의 의혹을 야기(惹起)시킨다면 이 도도 따라서 어두워지고 만다. 이에 이것을 논변하여 밝히고 열어 넓혀 잘못된 의논이 행해지지 못하게 하니, 도를 호위하는 공이 또한 위대하지 않겠는가.

염계주자(濂溪周子 주돈이(周敦頤)를 가리킴)가 말씀한 무극(無極)이라는 두 글자는 태극(太極)의 묘한 이치를 발명하였는바, 그 뜻이 참으로 분명하고 그 공이 과연 지극하다. 도를 밝힌 공이 실로 복희(伏羲), 문왕(文王), 주공(周公), 공자(孔子) 네 성인(聖人)을 이을 수 있다.

그런데 감히 얕은 소견을 가지고 무극(無極)을 헐뜯고 비난한 자는 앞서는 중국의 육씨(陸氏 상산(象山) 육구연(陸九淵)을 가리킴)가 있었고, 스스로 잘못 인식하여 태극을 함부로 말한 자는 뒤로는 우리 나라에 조씨(曺氏)가 있었으니, 주 부자(朱夫子)가 육씨의 말을 분석하고, 회재공(晦齋公 회재는 이언적(李彦迪)의 호)이 조씨의 말을 논변함이 있지 않았다면 무극과 태극의 이치가 다시 두 말 때문에 어두워져서 공자(孔子)와 주자(周子)의 뜻이 혹 이로 말미암아 밝아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도를 호위한 공이 어떠하다 하겠는가.

지금 전후에 논변(論辨)한 글을 모아 합하여 한 책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사문(斯文)의 선비들로 하여금 상하(上下)의 편(篇)을 참고하여 회재(晦齋)의 학문이 회암(晦庵) 주 부자(朱夫子)에게서 얻었으므로 이 도를 호위함이 또한 회암 주 부자와 부합함을 알게 하였으니, 이 일이 어찌 훌륭하지 않겠는가.

이 선생(李先生 회재 이언적을 가리킴)이 논변한 글을 선생의 손자인 준(浚)이 일찍이 스스로 한 책을 정사(精寫)하여 퇴계 선생(退溪先生)의 문하(門下)로 가지고 가서 올려 질정(質正)하였는데, 퇴계 선생은 손수 펴 보고 받들어 읽는 즈음에 자신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고 공경심을 표하며 말씀하기를, “선생의 학문이 그 조예가 이에 이를 줄은 내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하고, 반복하여 칭찬하고 감탄하기를 마지 않았다. 퇴계 선생이 회재의 학문에 대하여 그 실재를 알게 된 것이 여기에서 더욱 깊어진 것이다.


준은 그 후 또다시 이러한 곡절을 가지고 한강(寒岡) 정 선생(鄭先生)에게 받들어 아뢰었는데, 선생은 준에게 말씀하기를, “주 부자 역시 이 무극과 태극의 말을 가지고 육상산(陸象山)과 논변한 것이 모두 약간 편이 있으니, 만약 두 선생의 전후의 논변을 나누어 상하편으로 엮어서 합하여 한 질(帙)을 만들어 간행(刊行)한다면 이 도에 크게 관계되지 않겠는가.” 하였다.

준은 한강 선생의 명령을 받들어 이것을 완성할 것을 청하고 인하여 주 부자의 글을 청하여 아울러 등사하였으며, 간행에 임박하여 또다시 서문(序文)과 발문(跋文)을 한강 선생에게 청하려 하였는데, 한강 선생이 별안간 별세하였다. 그리하여 이제 마침내 나에게 발문을 부탁하고 간청한 것이 이미 여러 번이었고, 또 그 뜻이 견고하였다.


나는 진실로 전후 여러 선생께서 도를 붙들고 도를 밝힌 글의 뒤에 천박한 말을 늘어놓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으나 또한 굳이 사양하기 어려우므로 감히 거친 말을 붙이고, 따라서 또 그 전말(顚末)을 기록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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