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헌선생문집 제10권_

발(跋)_

 

야은선생문집(冶隱先生文集) 발문

 

옛날에 한 문공 퇴지(韓文公退之)가 백이(伯夷)를 칭송하여 이르기를, “밝은 해와 달이 족히 밝음이 될 수 없고, 높은 태산(泰山)이 족히 높음이 될 수 없고, 위대한 천지(天地)가 족히 용납함이 될 수 없다.” 하였다
밝음은 해와 달보다 더 밝은 것이 없고, 높음은 태산보다 더 높은 것이 없고, 용납함은 천지보다 더 용납하는 것이 없는데 사람의 청성(淸聖)에 백이라는 분이 있으니, 일월(日月)의 밝음과 태산의 높음과 천지의 용납함이 모두 부족함이 되고 말았다. 이는 백이의 의(義)가 해와 달보다도 밝고, 백이의 절개(節槪)가 태산보다도 높고, 백이의 도(道)를 천지가 능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니, 만약 특별히 서고 독특하게 행한 것이 아니라면 이 말에 해당되겠는가.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은 한 문공의 필력(筆力)이 아니라면 형용함이 이에 이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후인(後人)으로서 이 문장을 보는 자들은 스스로 찬탄(贊嘆)하기에 겨를이 없어 지나친 의논이라고 말한 자가 일찍이 없었다.
그런데 우리 동방(東方)의 절의(節義)를 논하는 자들은 마침내 야은 선생(冶隱先生)을 동방의 백이라고 칭하고 있으니, 오직 백이를 아는 자만이 선생을 알 것이다.
지금 해와 달의 밝음이 옛날과 똑같고, 태산의 높음이 옛날과 똑같고, 천지의 용납함이 옛날과 똑같다. 그리하여 어리석은 지아비와 어리석은 지어미들도 모두 우러러보고 있으니, 우러러보는 자들은 해와 달이 족히 밝음이 될 수 없고, 태산이 족히 높음이 될 수 없고, 천지가 족히 용납할 수 없는 기상(氣像)을 상상해 본다면 백이가 천지(天地)를 다하고 만세(萬世)에 뻗쳐도 남의 시비(是非)를 돌아보지 않았다는 뜻을 인하여 알 것이다. 선생의 의는 바로 백이의 의이고, 선생의 절개는 바로 백이의 절개였으니, 선생을 동방의 백이라고 칭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내가 들으니, 중하(中夏)의 절의를 사모하는 자들이 지주중류(砥柱中流)라는 네 글자를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사당 아래 흐르는 물가에 우뚝이 솟아 있는 돌에 크게 새겼는데, 우리 동방의 절의를 사모하는 자들이 또 그 네 글자를 모사(模寫)하여 선생의 묘소 아래인 낙동강(洛東江)의 강안(江岸)에 비석(碑石)을 세우고 이것을 새겨 걸었다 한다. 이는 진실로 천하의 큰 한계를 세우고 만세의 강상(綱常)을 보전한 것이 중하에는 백이이고 우리 동방에는 선생이기 때문이다.
이는 참으로 병이(秉彛)의 천성(天性)이 또한 천지와 해와 달과 태산과 함께 없어지지 아니하여, 예와 지금의 구별이 없고 오랑캐와 중하의 차이가 없이 덕을 좋아하는 마음이 종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세상이 이미 오래 되었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법과 빛나는 광채를 비록 멀리 거슬러 올라가 접할 수 없으나, 다행히 그 유문(遺文)과 남긴 말씀이 혹 세상에 전하는 것이 있으면 이것을 외고 읊어 감발(感發)함을 또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선생의 제술(製述)의 많고 적음을 지금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오래 되어 흩어진 나머지 전하는 것이 얼마 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시문(詩文) 약간 편과 행장(行狀) 및 전후 여러 사람들이 칭찬하여 읊은 시(詩)를 합하여 한 책으로 만든 것이 일찍이 이미 간행되었는데, 근래 병화(兵火)를 당하던 날에 아울러 잃고 말았다.
이제 선생의 6대손인 흥선(興先)과 종선(宗先) 등은 겨우 보존된 것 한 건(件)을 구하고는 다시 발간하여 반포해서 그 전함을 영원히 할 것을 바랐으며, 또 열성조(列聖朝)에서 사제(賜祭)한 제문(祭文)과 금오산(金烏山)에 두 서원(書院)을 창건한 사실을 모아 중(中)과 하(下) 두 편에 함께 기재하였다. 이들은 판각(板刻)이 끝나자, 마침내 이 책을 중간(重刊)하는 뜻을 대략 서술하여 권의 끝에 두려고 하였다.
아! 선생의 높은 의(義)와 큰 절개는 사람들의 칭송한 글이 책 속에 모여 있으니 충분히 전할 만하며, 창려(昌黎)가 백이를 칭송한 말을 외며 다시 생각해 보면 거듭 감탄하는 바가 있으니, 우리들이 마땅히 생각을 다해야 할 것이다.
내가 행장(行狀)의 글을 읽어 보니, 선생의 충의(忠義)는 실로 효도하고 우애하는 도리에서 근본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어찌 집안에서 효도와 우애를 하지 않고서 나라에 충성과 의리를 다한 자가 있겠는가. 백이 역시 일찍이 고죽국(孤竹國)에서 아버지의 명을 지킨 자였다.우리들은 혹시라도 선생이 만난 환경을 한집안에서 만난다면 과연 한결같이 선생처럼 스스로 다할 수 있겠는가.
그 글을 읽고 그 시를 외며 그 절의를 사모하면서도 만약 각기 자기의 몸에 돌이켜 감동하고 분발하지 않는다면 비록 글을 읽고 시를 외운들 어찌 유익함이 있겠는가. 또 어찌 이 책을 간행한 자의 바람이겠는가.
만력(萬曆) 을묘년(1615,광해군7) 5월 병오(丙午)에 옥산(玉山) 장현광(張顯光)은 쓰다.

[주D-001]한 문공 퇴지(韓文公退之)가……하였다 : 문공(文公)은 당(唐) 나라의 문장가인 한유(韓愈)의 시호이며 퇴지(退之)는 그의 자인바, 이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그가 지은 백이송(伯夷頌)의 앞 부분을 다음에 소개한다. “선비가 독립 특행(獨立特行)하여 의(義)에 맞게 할 뿐이요, 남의 시비를 돌아보지 않음은 모두 호걸스런 선비가 도(道)에 대한 믿음이 돈독하고 스스로 알기를 밝게 하는 자이다. 한 집안이 비난하더라도 힘써 행하고 의혹하지 않는 자가 적으며, 한 나라와 한 고을이 비난하더라도 힘써 행하고 의혹하지 않는 자에 이르러서는 천하에 한 사람밖에 없으며, 만일 온 세상이 비난하더라도 힘써 행하고 의혹하지 않는 자는 천백 년에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백이로 말하면 천지(天地)를 다하고 만세(萬世)에 뻗치도록 사람들이 그르다 하여도 돌아보지 않을 자이다. 밝은 해와 달이 족히 밝음이 될 수 없고, 높은 태산(泰山)이 족히 높음이 될 수 없고, 위대한 천지(天地)가 족히 용납함이 될 수 없다.”
[주D-002]청성(淸聖) : 깨끗한 성인(聖人)이라는 뜻으로, 맹자(孟子)는 일찍이 이윤(伊尹)과 백이(伯夷), 유하혜(柳下惠)와 공자(孔子)의 행적을 열거하고, “이윤은 성인 중에 천하를 구제하기로 자임한 자이고, 백이는 성인 중에 깨끗한 자이고, 유하혜는 성인 중에 화(和)한 자이고, 공자는 성인 중에 때에 알맞게 행한 자이다.[伊尹聖之任者也 伯夷聖之淸者也 柳下惠聖之和者也 孔子聖之時者也]” 하였다. 《孟子 萬章下》
[주D-003]지주중류(砥柱中流) : 지주는 돌기둥이라는 뜻으로 중국의 산서성(山西省) 평륙현(平陸縣) 동남쪽에 있는 산 이름인데, 황하(黃河)가 침식하여 흙이 모두 씻겨 나가고 이 돌산이 홀로 황하의 중류에 버티고 있다. 이 때문에 지절(志節)이 크고 높은 것을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주D-004]백이 역시……자였다. : 고죽국(孤竹國)은 은(殷) 나라 말기에 있었던 나라로 중국의 하남성(河南省) 노룡현(盧龍縣)과 열하성(熱河省) 조양현(朝陽縣) 일대에 있었다 한다. 백이는 일찍이 고죽국 왕의 장자(長子)였는데 부왕(父王)이 막내아들인 숙제(叔齊)를 후계자로 세우려 하였다. 그 후 부왕이 죽자 숙제는 “형님이 마땅히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 하고 왕위를 사양하였으나 백이는 “이는 아버지의 유명(遺命)이다.” 하고 끝내 거절하였으므로 말한 것이다. 《史記 卷六十一 伯夷傳》

여헌선생문집 제10권_

발(跋)_

 

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발문

 

사람은 다섯 가지 떳떳한 성(性)을 간직하고 있는데 예(禮)가 인(仁)의 다음인바, 하늘에 있으면 형(亨)의 도가 된다.고요(皐陶)가 계책을 아뢸 적에 예(禮)를 쓰는 것으로써 떳떳한 법을 돈독히 함에 뒤이었으니,떳떳한 법(法)을 하늘이 편 것이라 하고, 예(禮)를 하늘의 질서라 말한 것은 그 이치가 하늘에 근본함을 이른다. 하늘이 편 떳떳한 법을 돈독히 함은 요컨대 하늘의 질서인 예를 씀에 달려 있는데, 그 의장(儀章)과 도수(度數)가 주(周) 나라에 이르러 분명하고 또 갖추어졌다.
공자(孔子)가 가르침을 베풀 적에 예(禮)로 요약하는 것으로써 끝을 맺었고, 인(仁)을 행하는 것은 예로 돌아가는 것이라 하였으며, 덕(德)에 나아감은 예에 서는 것이라 하였으니,그렇다면 우리 인간의 성(性)을 따르는 도(道)와 도를 품절(品節)한 가르침은 그 규범이 모두 예에 있는 것이다.
사람은 단 하루라도 예를 떠나서는 안 되며 천하와 국가는 단 하루라도 예가 없어서는 안 되니, 이른바 예가 다스려지면 나라가 다스려지고, 예가 혼란하면 나라가 혼란하며, 예가 보존되면 나라가 보존되고, 예가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이 어찌 확고한 의논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가르침은 예교(禮敎)보다 먼저할 것이 없고, 배움은 예학(禮學)보다 간절한 것이 없으니, 예로부터 성인(聖人)이 예를 중히 여기심은 이 때문일 것이다.
아! 예서(禮書)가 없어진 지 오래 되었다. 천착(穿鑿)하는 의논이 일어나 사람들은 서 있을 만한 자리를 분명히 알지 못하고 세상에는 모범이 될 만한 교화(敎化)를 일으키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상도(常道)에 처함에 있어서도 오히려 법을 어김이 많으니, 하물며 사변(事變)에 따라 대응함에 어찌 그 알맞음을 얻을 수 있겠는가. 인륜(人倫)이 확립되지 못하고 예속(禮俗)을 보지 못함이 진실로 당연하다.
송(宋) 나라의 다섯 선생이 차례로 나와 예(禮)를 강명(講明)하고 서로 이어 발휘(發揮)해서 거의 빠뜨리고 누락된 바가 없게 하지 않았더라면 후세의 사람들이 어떻게 성인(聖人)이 예를 제정한 본의를 연구하며, 때에 따라 사변(事變)에 대응하는 자가 어찌 시의(時宜)에 적절하게 저울질하여 절충하는 정론(定論)을 알 수 있겠는가.
한강 선생(寒岡先生)은 우리 나라에 늦게 태어나 예학(禮學)에 유념한 지 여러 해였다. 비로소 마침내 여러 예서들을 모으고 분류하여 한 책을 만들고 이름하기를 《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이라 하였으니, 이로부터 천리(天理)의 절문(節文)과 인사(人事)의 의칙(儀則)이 서로 갖추어지고 상호 보완되었으며, 융회(融會)하고 관통(貫通)하여 현혹된 것이 밝혀지고, 의심스러운 것이 정해지고, 다투던 것이 종식되었다. 그 사문(斯文)에 공이 있음을 어찌 보통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생각하건대, 지(知)에 지나친 지혜로운 자와 행(行)에 지나친 어진 자는 혹 이 예를 번문욕례(繁文縟禮)라 하여 소홀히 하고, 이에 미치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와 불초한 자는 항상 이 예를 너무 높고 예[古]스럽다 하여 숭상하지 않는다. 우리들이 이 두 가지 병통에 걸리지 않는다면 마땅히 다섯 선생이 분명히 가르쳐 주심과 우리 한강 선생이 여러 가지를 모은 공을 알게 되어 이 책이 반드시 백세(百世)에 소중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다만, 다소의 한이 없지 못한 것은 선생의 말질(末疾)이 이미 고질이 되어 다시 손수 교정(校正)을 가하여 더욱 정하고 극진함을 다하지 못한 점이다. 그러나 보는 자가 유추(類推)하여 통하고, 또 본서(本書)를 취하여 참고하고 연구한다면 모두 이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의 문인(門人)인 이 사문 윤우(李斯文潤雨)가 호주(湖州)의 읍재(邑宰)가 되어 마침내 방백(方伯 도백(道伯)을 가리킴)에게 청하고 동지(同志)와 여러 수령(守令)들에게 두루 알려 책을 간행할 길을 마련하고, 인하여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 전말(顚末)을 기록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의리상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초고(草稿)를 써서 아뢰는 바이다.
숭정(崇禎) 2년 기사(1629,인조7) 중하(仲夏) 생명(生明 초사흘)에 후학(後學) 옥산(玉山) 장현광(張顯光)은 삼가 쓰다.

[주C-001]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 :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송(宋) 나라의 성리학자인 명도(明道) 정호(程顥), 이천(伊川) 정이(程頤), 사마광(司馬光), 횡거(橫渠) 장재(張載), 회암(晦菴) 주희(朱熹) 등의 예설(禮說)을 모아 만든 책이다. 관(冠), 혼(婚), 상(喪), 제(祭)와 잡례(雜禮) 등을 체계 있게 분류하여 전집(前集) 8권 3책, 후집(後集) 12권 4책으로 엮었는바, 전집은 주로 천자(天子)와 제후(諸侯)에 대한 예를 다루었고, 후집은 일반 사대부(士大夫)에 관한 예를 다루었다.
[주D-001]다섯 가지……도가 된다. : 다섯 가지 떳떳한 성(性)은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가리킨다. 《주역(周易)》 건괘(乾卦) 괘사(卦辭)에 “원(元), 형(亨), 이(利), 정(貞)이다.” 하였는데, 주자(朱子)는 “원은 사시(四時)에 있어서는 봄이 되고 사람에 있어서는 인이 되며, 형은 사시에 있어서는 여름이 되고 사람에 있어서는 예가 되며, 이는 사시에 있어서는 가을이 되고 사람에 있어서는 의가 되며, 정은 사시에 있어서는 겨울이 되고 사람에 있어서는 지가 된다.” 하였다. 이 중에 신(信)은 성실한 것으로 원, 형, 이, 정 모두에 해당된다. 《周易本義》
[주D-002]고요(皐陶)가……뒤이었으니, : 고요는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의 명신(名臣)으로 일찍이 순 임금에게 경계하기를, “하늘이 차례를 펴서 법을 두시니 우리 오전(五典)을 바로잡아 이 다섯 가지를 돈독하게 하시며, 하늘이 차례하여 예를 두시니 우리 오례(五禮)를 따라 다섯 가지 예를 떳떳하게 쓰소서.[天敍有典 勅我五典 五惇哉 天秩有禮 自我五禮 五庸哉]” 하였으므로 말한 것이다. 후세에서는 이에 근거하여 천서(天敍) 천질(天秩)과 돈전(惇典) 용례(庸禮)란 말을 자주 쓰는바, 주자(朱子)는 서(敍)는 군신, 부자, 형제, 부부, 붕우의 윤서(倫敍)이고, 질(秩)은 존비(尊卑)와 귀천(貴賤)에 대한 등급의 높고 낮은 품질(品秩)이며, 돈(惇)은 돈독함이요, 용(庸)은 떳떳이 쓰는 것으로 풀이하였다. 오전은 바로 인간의 오륜(五倫)이며, 오례는 이 오륜에 대한 예절을 가리킨다. 《書經 皐陶謨》
[주D-003]공자(孔子)가……하였으니, : 예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공자는 일찍이 “문(文)에 대하여 널리 배우고 몸을 예(禮)로 묶으면 또한 도에 위배되지 않는다.” 하였으며, 또 안연(顔淵)은 공자의 가르침을 말하면서 “선생님께서는 차근차근 사람을 잘 인도하시어 나에게 문을 넓게 가르쳐 주시고 몸을 예로 묶게 했다.” 하였다. 또 공자는 인(仁)을 행하는 방법을 묻는 안연에게 “자신의 사욕(私慾)을 이겨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을 하는 것이다.[克己復禮爲仁]”라고 대답하였으며, 또 학문하는 방법을 말하면서 “시(詩)에 흥기하고, 예에 서고, 음악에 완성한다.” 하였으므로 말한 것이다. 《論語 雍也, 子罕, 顔淵, 泰伯》
[주D-004]말질(末疾) : 말초의 병으로 수족이 마비되는 등의 병을 이른다.
[주D-005]호주(湖州)의 읍재(邑宰) : 호서(湖西) 지방인 충청도의 원이 되었던 것으로 추측되나 자세하지 않다.

여헌선생문집 제9권_

기(記)_

 

자성정(自醒亭)에 대한 기문

 

골짝의 어귀와 연못의 언덕에 정자(亭子)가 있으니, 바로 나의 아우인 사거(斯擧)가 지은 것이다. 사거는 난리를 겪은 뒤에 처음 돌아와 우연히 이 골짝에 터를 잡고 그 편리함을 따라 거처하는 별처(別處)로 삼으니, 곧 이 정자였다. 연못도 주인이 직접 쌓은 것인데 제방이 바위를 이용하였으므로 그 바위에다가 주추를 세우고 정자를 지으니, 이 때문에 연못에 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는 내가 아우를 정자 위로 방문하였더니, 술이 몇 순배 돌자 아우는 나에게 정자 이름을 청하였다. 나는 마침내 취한 김에 정자를 돌아보고 이름을 생각해 내니, 곧 이른바 정자의 이름이다. 이 이름은 어찌하여 생각하였는가? 이 골짝의 어귀가 긴 바람을 이끌어 오기 쉽고 연못의 둑에 상쾌한 기운이 많기 때문이다.
정자 위에서 여러 병의 술을 기울여 마시고 한 몸이 정자 위에 쓰러져 있으면 손님은 흩어져 돌아가고 뜰은 비어 있으며 연못은 고요하고 물고기는 한가롭다. 마주 있는 높은 봉우리에는 밝은 빛을 드날리는 둥근 달이 떠오르고, 바위 사이에 졸졸 흐르는 물은 베개 위에 옥소리를 들려온다. 그렇다면 이 몸이 이 때에 술에서 깨지 않으려 하나, 될 수 있겠는가.
술을 깨고 나서 살펴 보면 내 마음을 한심스럽게 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두건(頭巾)을 삐딱하게 쓰고 있는 것은 내 무슨 몰골이며, 고함치고 시끄럽게 떠든 것은 내 무슨 목소리인가. 천둥과 벼락이 귓전에 울리는데도 그 누가 나로 하여금 듣지 못하게 하며, 깊은 구덩이가 눈 앞에 있는데도 그 누가 나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였는가. 만일 이보다 더하면 이 몸이 거의 이 몸이 되지 못할 것이다.
술에 취했을 때에는 무슨 마음이며 술을 깨었을 때에는 무슨 마음인가. 이미 술이 깬 뒤의 마음으로 술에 취해 있을 때의 마음을 생각해 보면 진실로 딴 사람과 같다. 내가 취하여 만일 빨리 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면 내 마땅히 이 긴긴 밤을 어둡게 지날 터인데, 나를 속히 술에서 깨어나도록 하는 것은 이 정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뒤에야 이 정자가 주인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진실로 많음을 알 수 있으니, 주인이 이 정자를 가지고 있음은 실로 또한 꿈을 꾸느냐 꿈을 깨느냐의 큰 기회이다. 내 이 이름으로 응하는 것이 주인의 생각에 부합하지 않겠는가.
주인이 말하기를, “예, 그렇습니다. 형은 과연 저의 뜻을 아십니다. 저의 뜻을 아십니다.” 하였다. 그리고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의 자식과 조카들도 꽤 술을 좋아하며 정자 위로 찾아오는 손님들도 날로 모이니, 만약 이 말을 써서 벽 위에 걸어 놓지 않는다면 우리 정자의 이름에 걸맞지 않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온 세상이 취하여 일생을 마친 뒤에 그치니, 그렇다면 어찌 다만 우리들이 한 밤의 취함일 뿐이겠습니까. 저의 정자의 이름을 듣는 자들은 혹 두려워하여 스스로 반성함이 있을 것입니다.”

이에 나는 정자에 훌륭한 주인이 있는 것을 기뻐하여 마침내 이것을 쓰게 되었다.
현익 섭제격(玄黓攝提格) 양월(陽月) 생명후(生明後)4일에 여헌(旅軒)은 쓰다.

[주D-001]현익 섭제격(玄黓攝提格) 양월(陽月) 생명후(生明後) : 현익 섭제격은 고간지(古干支)로 현익은 임(壬)이고 섭제격은 인(寅)인바, 선조(宣祖) 35년인 1602년이다. 양월(陽月)은 10월을 가리키며 생명은 밝은 달이 생기는 것으로 초사흘을 이른다.

여헌선생문집 제9권_

기(記)_

 

모원당(慕遠堂)에 대한 기문

 

모원당(慕遠堂)은 나의 당이니, 당의 터는 옥산부(玉山府)의 남산(南山) 아래이다. 옥산(玉山)은 바로 우리 장씨(張氏)가 20여 대 대를 이어 살아온 고을이며, 남산의 아래는 나의 5대 조(祖)로부터 처음 거주하였다. 나는 하찮은 후손으로 이곳에서 생장한 지가 39년이었는데 마침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만나니, 왜란의 참혹함은 우리 나라가 생긴 이래로 이 때처럼 혹독한 변고는 일찍이 없었다.
온 경내가 왜적이 오고 가는 적침로(敵侵路)가 되고 온 성(城)이 도륙(屠戮)을 당하여, 여러 영(營)이 적의 소굴이 된 지가 거의 1년 반에 이른다. 마을이 모두 불타 갈대밭으로 변하였다. 사람들은 칼날에 죽어 시신이 도랑과 골짝에 버려진 나머지 천백 명 중에 한두 명이 겨우 생존하였는데, 이들이 유리(流離)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적이 물러간 지 10년에 이른 뒤에야 하나 둘 차츰 모이니, 우리 장씨 성(姓) 가운데 5, 6명도 이 가운데 들어 있다.
가시나무를 베고 불탄 재를 쓸어 내고는 풀을 엮어 장막을 둘러치면서 오히려 각자 우리의 땅을 편안한 곳으로 여겼으나 나는 특별히 졸렬하여 스스로 돌아올 계책이 없었다. 그러므로 고향에 와도 의지하여 머물 곳이 없어 황당해서 곧바로 떠나기를 여러 번 하였다.
우리 집안들은 나를 가련하게 여긴 나머지 생존해 돌아온 고향 친구들과 도모하여 재목을 거두고 물력(物力)을 내어 나의 옛 터에다가 집을 경영하였다. 그리하여 방과 대청을 각각 두 칸씩 만들었으며, 지주(地主)인 유 사군(柳使君)이 군청(郡廳)의 남은 기와를 주어 지붕을 덮었으니, 이상은 내가 이 당을 소유하게 된 내력이다.
당에 거처하면서 아득히 생각을 떠올리면 옥산의 땅은 이 역시 축회(丑會)에서 개벽할 때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이후로 한사군(漢四郡)으로 나뉘었다가 두 도독부(都督府)가 되고 다시 삼한(三韓 삼국)으로 나누어진 것이 홍황(洪荒)하고 질박 간략한 가운데에 있었는데, 이 지역에 태어나 스스로 살 곳으로 삼은 자가 몇 대이며, 주(州)와 부(府), 군(郡)과 현(縣)의 칭호를 가지고 있으면서 혹 인습하고 혹 개혁한 것이 몇 번이며, 그간 인물의 성쇠(盛衰)와 풍속의 선악(善惡)이 몇 번이나 변했으며, 혹 도적의 창칼에 소탕되고 무너진 것이 또한 이와 같은 때가 있었는가.
우리 선대가 이 지방에서 사신 것은 지금에 미쳐 알 수 있는 것이 10여 대 뿐이다. 10여 대 이상은 본래 이곳에 적(籍)을 두고 살았으나 아득히 멀어 전하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혹 처음에 딴 지역에 거주하여 이 땅을 관향(貫鄕)으로 삼지 않아서 전하지 않는 것인가? 아득히 증거할 곳이 없어 모두 전하지 않는다. 무릇 몇 번이나 쇠하고 왕성함을 거쳤으며, 몇 번이나 나쁘고 좋음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가.
덕업(德業)의 융성하고 쇠미함과 선(善)을 쌓음의 깊고 얕음을 진실로 규명하여 알 길이 없으나 우선 귀와 눈으로 듣고 보아 아는 것을 가지고 헤아려 보면 우리 성(姓)이 한 나라에 알려진 것이 드러나지 않은 것이 아니며, 분파(分派)가 사방에 흩어져 있는 것이 번성하지 않은 것이 아니니, 그렇다면 어찌 근원이 깊어 흐름이 멀고 뿌리가 튼튼하여 가지가 무성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 본토(本土)에 거주하는 자와 사방에 흩어져 사는 자들이 원래는 모두가 한 몸에서 나뉘어졌으니, 기맥(氣脈)이 같으므로 정(情) 또한 통한다. 그 어찌 멀고 가까움과 저 사람과 이 사람의 간격이 있겠는가. 그러나 사방에 흩어져 사는 자들은 형세가 막혀 정(情)만 있을 뿐 어찌할 수가 없으며, 다행히 본토에 남아 있는 자들은 우리 당에 오르면 어찌 나와 선조(先祖)에 대한 생각을 함께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생각함이 어찌 밖에서 연유하겠는가. 누구나 이 몸을 간직하고 있고 이 몸을 간직한 자들은 누구나 자기 몸을 아낄 줄 모르는 자가 없으니, 그 몸이 아낄 만함을 알아 이 몸의 소종래(所從來)를 찾는다면 그 생각이 영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를 낳은 자는 부모(父母)이고 나의 부모를 낳은 자는 조부모(祖父母)이고 나의 조부모를 낳은 자는 증조부모(曾祖父母)이니, 미루어 올라가면 십 대, 백 대, 천 대, 만 대로부터 저 옛날 원초(原初)에 인류(人類)를 낳은 조상에 이르러 다한다. 그렇다면 원초에 인류를 낳은 조상은 바로 우리의 이 몸이 처음 시작하여 생겨난 것이니, 그 이하 백, 천, 만 대가 쌓여 내려옴은 다만 그 신체를 바꾸었을 뿐이다. 오직 그 기맥(氣脈)은 백, 천, 만 대를 내려오면서도 한 기맥을 전하였는데, 형세가 미치지 못함이 있고 정이 다하기 어려움이 있다. 그러므로 제사(祭祀)는 한계가 있고 효도(孝道)는 미치기 어려우나 무궁한 이치와 무한한 효성은 어찌 대가 쌓였다 하여 혹 그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천자(天子)와 공(公), 후(侯), 경(卿), 대부(大夫)의 존귀함으로도 사당은 아홉 개, 일곱개, 다섯 개, 세 개의 등분(等分)에 그쳐 더 이상 모실 수 없으니, 하물며 이보다 낮아 사(士)와 서인(庶人)이 된 자에 있어서랴. 비록 이보다 더 하려고 하더라도 선왕(先王)의 제도에 제한이 있어 이미 미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자신에게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이 다할 수 있는 것을 다할 뿐이다. 다할 수 있다는 것은 굳이 만종(萬鍾)의 녹(祿)을 누리고 희생(犧牲)을 여러 솥에 진열하고 많은 제품(祭品)을 올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나의 분수에 할 수 있는 예(禮)와 나의 힘이 미칠 수 있는 일에 정성을 다할 뿐이다.
그리고 분수에 할 수 없고 힘이 미칠 수 없는 곳에 이르러도 또한 스스로 효성을 다할 길이 있으니, 이 또한 나의 한 몸을 아낌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나의 한 몸은 비록 내 스스로 가지고 있으나 실로 백, 천, 만 대의 선조가 유전(遺傳)하여 남겨 주신 것이니, 어찌 감히 내 몸이 나의 것이라 하여 가벼이 여기고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나의 몸을 가벼이 여김은 바로 나의 선조를 가벼이 여기는 것이요, 나의 몸을 소홀히 함은 바로 나의 선조를 소홀히 하는 것이니, 하물며 가벼이 여기고 소홀히 할 뿐만 아니라 혹 그 몸을 욕되게 하고 혹 그 몸을 실패하게 한다면 이는 모두가 그 선조를 욕되게 하고 그 선조를 실패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조에게 사랑의 이치를 다하고 효성의 도를 지극히 하는 것이 과연 자기 몸을 아껴 공경하고 소중히 함에 벗어나겠는가.
선조가 서로 교체한 몸은 비록 백, 천, 만 대의 이전에 이미 없어졌더라도 선조가 서로 전해주는 기맥은 바로 나의 한 몸에 있다. 이 몸은 바로 선조의 몸이니, 이 몸을 공경하고 소중히 함은 바로 우리 선조를 공경하고 소중히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수에 일정한 예(禮)는 넘을 수 없고 힘이 미칠 수 없는 일은 능히 할 수 없으나, 이 몸을 공경하고 소중히 하는 도리는 사람마다 능하지 못한 이가 없고 어느 시대이든 끝날 수 없으니, 사람의 자손이 되어 선조에게 추효(追孝)하는 것이 무엇이 이보다 크겠는가.
이미 자기 몸을 아껴 공경하고 소중히 할 줄을 안다면, 나와 똑같이 한 기운을 받아 함께 선조의 성(姓)을 전하는 자에 있어, 형세가 비록 소원함에 이르고 일이 혹 잘못을 저질러 원망한다 하더라도 어찌 소원하다 하여 잊고 잘못을 저질렀다 하여 원수로 여기겠는가.
나는 세상 사람들이 혹 심히 소원함에 이르지 않고 다만 약간 소원한 처지에 있는데도 곧 외면하며, 혹 굳이 깊은 원망이 있지 않고 다만 작은 혐의가 있을 뿐인데도 틈이 크게 벌어지는 것을 한탄하곤 한다.
아! 만약 선조께서 부모의 입장이 되어 두 사람을 보신다면 일찍이 한 번 꾸짖고 한 번 종아리치고 그칠 뿐인데, 자손이 된 자들은 선조가 함께 사랑하시는 은혜를 체득하지 않고 수많은 가지가 한 뿌리에서 나온 의리를 생각하지 아니하여, 노여움을 마음 속에 감춰 두고 원한을 묵혀 두니, 이것이 과연 동기간을 대하는 도리이겠는가. 이는 우리 종족(宗族)들이 마땅히 경계하여야 할 일이다.
아! 산은 옛날 산 그대로이고 냇물은 옛 냇물 그대로이며 골목도 모두 옛날 골목 그대로인데, 옛날과 지금이 바뀌고 인물이 변역(變易)하여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나지 못하고 없어진 자는 다시 생겨나지 못하여 고인(古人)을 다시 볼 수 없으니, 선조께서 남겨 주신 이 몸으로 선조께서 거주하시던 시골에 살면서 선조를 생각하여 사모하는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저 전야(田野)를 보면 바로 선조께서 밭 갈고 수확하시던 전야이며, 도로는바로 선조께서 밟고 다니시던 도로이며, 강산(江山)은 바로 선조께서 놀고 감상하시던 강산이다. 저 선조께서 적덕(積德)한 남은 음덕(陰德)을 입어 자손들이 또한 이 전야를 갈고 수확하며 이 도로를 밟고 다니며 이 강산에서 놀고 감상하니, 사람들이 과연 스스로 밭 갈고 스스로 수확하며 스스로 밟고 스스로 다니며 스스로 놀고 스스로 감상할 수 있겠는가. 이는 모두가 선조께서 남겨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추효(追孝)의 정성을 다하는 것을 어찌 삼가지 않겠는가.
한 번 사려(思慮)할 적에 선조를 생각하여 선조의 마음에 위배됨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한 번 말할 적에 선조를 생각하여 선조의 덕에 위배됨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한 번 동작할 적에 선조를 생각하여 선조의 도에 위배됨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전전긍긍(戰戰兢兢)하여 항상 깊은 못에 임한 듯이 여기고 살얼음을 밟는 듯이 여긴다면 우리 성을 함께한 자들이 거의 선조의 남겨 주신 가르침을 실추하지 않을 것이요, 우리 선조들 또한 훌륭한 자손을 두었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이에 나의 당을 이름하여 모원(慕遠)이라 하였다.

[주D-001]두 도독부(都督府) : 평주(平州)와 동부(東府)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 당시에는 도독부가 있지 않았으며, 동부도위(東府都尉)가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두 도독부로 보는 근거는 우리나라 학자들이 대체로 우리나라 역사에 관심이 부족하였다. 박세무(朴世茂)가 지은 《동몽선습(童蒙先習)》에 “한(漢) 나라 무제(武帝)가 위만 조선(衛滿朝鮮)을 토벌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낙랑(樂浪), 임둔(臨屯), 현도(玄菟), 진번(眞蕃)의 사군(四郡)을 설치하였으며 소제(昭帝)가 평나(平那)와 현도로 평주를 만들고 임둔과 낙랑으로 동부를 만들어 두 도독부를 설치하였다.” 하였는바, 대부분 이 기록을 그대로 믿어왔다고 추측되기 때문이다.

여헌선생문집 제9권_

기(記)_

 

향사당(鄕射堂)에 대한 기문

 

장현광(張顯光)은 이 지방 사람이다. 국가가 태평한 시대에 생장하였는데 지금은 병란(兵亂)으로 외로운 가운데 늙고 병들어 있다. 이리저리 유리(流離)하여 떠돌아다닌 뒤에 돌아와 이 해를 옛 마을에서 보내었는데, 하루는 향수(鄕首)인 이군 성춘(李君成春)이 찾아와 나를 보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 지방은 예부터 향사당(鄕射堂)이 있었는데, 병화(兵火)가 일어나는 날에 따라서 불타고 말았습니다. 지방 사람으로 겨우 생존하여 돌아온 자들은 아직도 다시 칭하기를 좌수(座首)라 하고 별감(別監)이라 하옵는바, 이는 우리 나라 향읍(鄕邑)의 예부터 내려오는 규칙으로 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무(事務)를 결재받기 위하여 부(府)의 아래로 와서 대령하는 자들이 물러가 쉴 곳이 없으므로 마침내 초가 몇 칸을 만들고 임시로 우거(寓居)하여 구차히 지내온 것이 20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한두 지방 노인들의 희사(喜捨)로 인하여, 새 터를 부성(府城)의 남쪽에 잡아 기둥에 주추를 세우고 지붕을 기와로 덮은 다음 두 기둥 사이에 당(堂)을 만들고 양 옆에 방(房)을 설치하니, 모두 10칸의 집이 되옵니다. 부엌과 창고와 마굿간은 힘이 미치지 못하므로 우선 후일을 기다리옵니다.
그러나 한 당을 완성한 것은 우리 지방의 힘으로 보면 또한 매우 다행입니다. 또 탕진(蕩盡)한 뒤에 중건(重建)하니 한편으로는 감회가 일고 한편으로는 위로됨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폐지되고 일어나게 된 자취를 말하여 벽에 걸어두어 후세에 알리기를 바라오니, 이것을 기록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나는 생각하건대 옛날에 이른바 향(鄕 지방)이란 것은 나라의 경도(京都) 밖에 있어 비려(比閭)와 족당(族黨)의 위에 위치하였으니, 교화가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은 이를 따라 아래로 펴지고, 풍속이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이로 말미암아 위에 믿어지게 되었다. 이는 성인(聖人)이 향(鄕)에 치중하여 향음주(鄕飮酒)와 향사(鄕射)의 예(禮)를 만들어 어른을 섬기고 현자(賢者)를 높이는 의리를 알게 하고, 귀천의 높고 낮은 예절과 사양하고 화락(和樂)한 도를 알게 하여, 게으르고 위미(委靡)한 풍속과 탐욕스럽고 음벽(淫僻)한 마음과 포악하고 위태로운 습관을 사라지게 한 것이다. 공자(孔子)께서 이른바 “내 향(鄕)을 보면 왕도(王道)의 화평함을 안다”는 것이 이것이다.
지금에 이른바 향은 옛날의 1만 2천 5백 가(家)의 제도와 달라 고을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모두 각기 향이라고 칭하는데, 향이 국가에 관계됨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중요하다. 향음주와 향사의 예를 후세에는 폐지하여 강(講)하지 않으니, 교화가 옛날처럼 성함을 볼 수 없어 풍속이 반드시 날로 낮아지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다.
우리 지방은 비록 작으나 그 유래가 멀다. 고을의 이름을 인(仁)이라 하였으니, 이름은 반드시 그 실재를 따른다. 그렇다면 평소 아름다운 풍속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주(九疇)의 교화가 유행되고 삼물(三物)의 가르침이 행해질 때에 육덕(六德)을 갖춘 자가 몇 사람이었으며, 육행(六行)을 돈독히 행한 자가 몇 사람이었으며, 육예(六藝)를 통달한 자가 몇사람이었는가? 이는 증거할 만한 문헌이 없어 알 수 없다.
지금 국가가 다시 회복하는 시운(時運)을 만나 구구(區區)한 작은 고을도 모양을 갖추고 향사당(鄕射堂)이라는 것이 이미 복구되었으니, 제군(諸君)들은 어찌 서로 그 이름을 돌아보아 공경하고 소중히 하여 이 당(堂)에 처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옛날의 예(禮)는 진실로 쉽게 행할 수 없으나 고인(古人)이 덕을 숭상한 뜻은 그 이름이 남아 있음으로 인하여 상상할 수 있다. 국가에서 향소(鄕所)를 설치하고 향임(鄕任)을 둔 것은 그 관계되는 바를 중히 여긴 것이다.
구중 궁궐(九重宮闕)에 계신 임금님의 걱정을 나누어 한 지방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읍주(邑主)인데, 읍주는 임기가 한정되어 있어 교체가 무상하다. 그리하여 항상 생소(生疎)한 사람이 되어 차례를 잃는 조처가 있음을 면치 못하므로 비록 가장 백성들의 일에 유념하는 자라도 장구한 계책에 실험하고 자세히 할 겨를이 없다.
그러므로 반드시 각각 지방으로 하여금 충성스럽고 부지런하고 일에 숙달한 사람을 가려 뽑아 한 지방의 기강(紀綱)을 맡겨 그 곳에 있으면서 그 임무를 살피게 하였으니, 이렇게 한 뒤에야 읍주가 의지하여 이목(耳目)으로 삼고 고을의 백성들이 믿어 추뉴(樞紐)로 여기게 된다. 그렇다면 이 당에 거한 자들이 그 임무를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국가에서 우리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그 도는 선(善)을 권면하고 악(惡)을 징계하는 것이며 그 일은 이로운 일을 일으키고 해로운 일을 제거하는 것이니, 향임을 맡은 자는 그 사이에 있으면서 국가에서 권면하는 것을 받들어 권면하여 한 지방으로 하여금 모두 선에 돌아가게 하고, 국가에서 징계하는 것을 받들어 징계하여 한 지방으로 하여금 모두 악에서 면하게 하며, 이익이 백성에게 있어 마땅히 일으켜야 할 것은 반드시 아뢰어 일으키게 하고, 해로움이 백성에게 있어서 마땅히 제거하여야 할 것은 반드시 아뢰어 제거하게 하는 것이 그 책무가 아니겠는가.


권면하는 바의 선은 곧 이른바 육덕(六德), 육행(六行), 육예(六藝)란 것이며, 징계하여야 할 바의 악은 곧 이른바 팔형(八刑)으로 살핀다는 것이다. 이른바 이로운 일로 마땅히 일으켜야 할 것이라는 것은 바로 백성들이 배부르고자 하면 배부르게 해 주고 따듯하고자 하면 따듯하게 해 주고 편안하고자 하면 편안하게 해 주고 오래 살고자 하면 오래 살게 해 주는 것이 이것이니, 부역을 가볍게 하고 세금을 적게 거두는 것이 근본이다. 이른바 해로운 일로 마땅히 제거하여야 할 것이라는 것은 곧 배부르게 하지 못하고 따듯하게 하지 못하고 편안하게 하지 못하고 오래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이것이니, 부역을 번거롭게 하고 세금을 무겁게 거두는 것이 또한 그 근본이다.
무릇 이 네 가지는 모두 위의 교화와 정령(政令)에 달려 있으니, 이것은 읍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향임을 맡은 자가 어쩔 수 있겠는가. 다만 그 힘이 미치는 바에 따라 스스로 다한다면 거의 일푼(一分)의 도움이 있을 것이다.
당이 이루어졌으니, 한 고을의 사람들이 반드시 눈을 씻고 함께 바라보며 말하기를, “우리 고을에 다시 향사당이 있게 되었다.”라고 할 것이다. 이로부터 이 당에 거하는 자들은 반드시 옛 사람의 도를 생각하고 국가의 뜻을 체득하여, 항상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보존해서 힘써 규칙과 계획을 다한다면 지방의 아름다운 유풍(遺風)과 좋은 풍속이 마땅히 이 향사당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제군들은 한 고을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지어다. 노부(老夫)의 축원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주D-001]비려(比閭)와 족당(族黨) : 비려는 고대의 말단 행정 단위이며, 족당은 일족의 무리를 이른다. 옛날 다섯 가호를 비(比)로 만들고 다섯 비를 여(閭)로 만들어 이웃끼리 서로 돕게 하였으며, 다섯 족(族)을 당(黨)으로 만들어 서로 구원하게 하였다. 《周禮 地官 大司徒》
[주D-002]구주(九疇)의 교화 : 구주는 아홉 가지 종류로 홍범 구주(洪範九疇)를 가리킨다. 홍범은 천하를 다스리는 큰 법으로 첫번째는 오행(五行), 두 번째는 오사(五事), 세 번째는 팔정(八政), 네 번째는 오기(五紀), 다섯 번째는 황극(皇極), 여섯 번째는 삼덕(三德), 일곱 번째는 계의(稽疑), 여덟 번째는 서징(庶徵), 아홉 번째는 오복(五福)과 육극(六極)이다. 《書經 洪範》
[주D-003]삼물(三物)의 가르침 : 삼물은 세 가지 일로 육덕(六德), 육행(六行), 육예(六藝)를 가리킨다. 육덕은 여섯 가지 덕으로 지혜로움[智], 인자함[仁], 통명(通明)함[聖], 의로움[義], 충성스러움[忠], 화함[和]이다. 육행은 여섯 가지 행실로 효도함[孝], 우애함[友], 동성간(同姓間)에 화목함[睦], 이성간(異姓間)에 화목함[婣], 이웃간에 신실(信實)함[任], 서로 구휼함[恤]이다.육예는 여섯 가지 기예로 예(禮), 음악[樂], 활쏘기[射], 말몰기[御], 글[書], 수학[數]이다. 주(周) 나라 때에는 교육을 담당한 대사도(大司徒)가 각 지방에 이 세 가지를 가르쳐 잘하는 자가 있으면 예우하여 등용하였다. 《周禮 地官 大司徒》
[주D-004]팔형(八刑) : 여덟 가지 형벌로 첫번째는 불효에 대한 형벌, 두 번째는 동성간에 화목하지 않은 형벌, 세 번째는 이성간에 화목하지 않은 형벌, 네 번째는 어른을 공경하지 않은 형벌, 다섯 번째는 이웃간에 신실하지 않은 형벌, 여섯 번째는 서로 구휼하지 않은 형벌, 일곱 번째는 사실이 없는 말을 지어 만드는 형벌, 여덟 번째는 백성을 어지럽히는 형벌이다. 《周禮 地官 大司徒》

여헌선생문집 제9권_

기(記)_

 

입암 정사(立巖精舍)에 대한 기문

 

뜻이 같은 영양(永陽)의 네 친구들이 물의 북쪽 가장 깊고 궁벽한 곳에 나아가 한 골목을 얻으니, 골목의 입구에는 시냇물이 있고 시냇가에는 한 큰 바위가 10여 장(丈) 높이 솟아 있는바, 이것이 바로 입암(立巖)이다.
입암의 북쪽 10보(步)쯤 되는 곳에 끊긴 벼랑이 우뚝이 멈춰 있는데, 지형이 너르고 평평하여 무우(舞雩)에서 목욕하고 바람 쐬는 관동(冠童) 10여 명을 용납할 수 있는바, 몇 그루의 고송(古松)이 푸른 그늘을 짙게 깔고 있어 매우 시원하니, 이는 바로 계구대(戒懼臺)라고 이름한 곳이다.
계구대에서 다시 북쪽으로 약간 동쪽으로 가면 다소 높은 한 작은 석봉(石峯)이 있는데 기이하게 솟고 우뚝이 버티고 있어 은연(隱然)히 공동산(崆峒山)의 풍취가 있는바, 이름을 기여암(起予巖)이라 한다. 봉우리의 남쪽 밑에 옛터가 있는데 계단이 무너져 돌이 어지러이 널려 있으니, 어느 시대에 누가 쌓은 것인지 알 수 없다.
여러 친구들이 놀고 감상한 뒤에 마침내 서로 돌아보고 바라보니, 천 년의 늙은 거북이 적막한 물가에 형체를 드러내어 머리를 들고 공기를 마시느라 우뚝 버티고 바람과 해를 피하지 않는 듯한 것은 뒷봉우리가 현무(玄武)가 된 것이며, 산에서 군주 노릇을 하다가 이미 늙어 위엄과 소리를 거두고 발톱과 이빨을 거두고는 부자(父子)의 천성을 온전히 하고 장구히 꿇어앉아 떠나가지 않는 듯한 것은 대의 바위가 오른쪽에 백호(白虎)가 된 것이다.
잠겨 있던 물 속에서 나오고 숨겨진 곳을 떠나 처음에는 구불구불하다가 끝내는 서려 있어 마치 엎드려 있는 듯하고 일어난 듯하기도 하여 구름을 헤치고 여의주(如意珠)를 날리는 듯한 것은 토월봉(吐月峯)이 동쪽에서 청룡(靑龍)이 된 것이며, 큰 붕새[鵬]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9만 리 창공을 날다가 이미 지쳐 땅으로 내려오되 오히려 머리를 들고 창공을 바라보는 듯한 것은 구인봉(九仞峯)이 주작(朱雀)이 된 것이다.
또 산지(産芝), 함휘(含輝), 정운(停雲), 격진(隔塵) 등의 여러 봉우리가 눈앞에 병풍처럼 배열되어 있고 담처럼 가리고 있으며, 한 시냇물이 굽이굽이 돌아 흘러오는 것이 마치 띠가 감아돌고 옷깃이 싸고 있는 듯하여 들어가는 것만 보이고 가는 것은 보이지 않으니, 위아래 수십 리의 시냇물과 산의 맑고 깨끗한 기운이 모두 이곳에 모여 있다.
여러 친구들은 이곳을 즐거워하여 옛터를 다시 닦고 한 모재(茅齋 초가로 만든 서재)를 설치하여 머물고 휴식하는 장소로 삼았는데, 좌우에는 방을 마련하고 가운데에는 대청을 두었는바, 각각 한 칸씩이고 두 방의 북쪽에는 감실(龕室)을 지어 수백 권의 책을 보관할 만하였으며 앞뒤를 다소 넓혀 여러 화훼(花卉)를 심어 놓으니, 꽤 볼만 하였다.
졸렬한 나는 다행히 여러 친구들에게 버림을 받지 아니하여 또한 항상 이곳을 오가며 함께하였다. 그러므로 감히 벗들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청하였다.

“작은 서재가 이미 이루어졌으니, 우리들이 이곳에 거처하면서 마땅히 무엇을 닦아야 하고 무슨 일을 하여야 하겠는가. 세상에 정자(亭子)나 혹 당(堂)을 경치가 좋은 구역에 만들어 두는 자들은 그 하는 바가 똑같지 않다. 술과 여색을 좋아하는 자는 주색을 즐기는 장소로 삼고, 활쏘기에 성벽(性癖)이 있는 자는 고함치고 떠드는 다툼을 일삼고, 장기와 바둑을 좋아하는 자는 효로(梟盧 주사위의 일종)의 마당으로 삼는바, 이는 굳이 말할 것이 못 되니, 우리들은 이러한 것은 하지않을 것이다.

세속을 버려 인간의 일을 끊고 인륜을 버리며 공허(空虛)한 것을 말하고 현묘(玄妙)한 이치를 찾으며 숨은 것을 찾고 괴이한 짓을 행하여, 연하(煙霞)를 고향으로 삼고 바위와 골짝에 거하며 사슴과 멧돼지와 짝하고 도깨비와 벗삼는 자들이 혹 이러한 곳에서 은둔하고 감추니, 이 또한 좌도(左道)라서 유자(儒者)의 사모하는 바가 아니다.
오직 한 가지 일이 있으니, 세상의 분화(紛華)함을 등지고 말로(末路)의 부귀 영화에 치달림을 천하게 여겨, 책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 우리의 급선무임을 알고 몸을 닦고 성(性)을 기르는 것이 우리의 본업(本業)임을 아는 자들이 여기에 머물며 학문을 닦는다면 바름을 길러 성인(聖人)이 되는 공부가 산 아래의 물에 형상할 수 있고, 옛 성인들의 훌륭한 말씀과 행실을 많이 쌓는 것이 산 가운데의 하늘에 법받을 수 있을 것이다.
뜰 아래에 흐르는 물이 밤낮으로 쉬지 않으니 근원이 있어 다하지 않음을 알고, 앞산의 오솔길이 잠시만 쓰지 않으면 띠풀이 꽉 차 길을 막으니 힘써 행함이 가장 귀함을 알 수 있다. 오직 나의 책 속에 있는 성현들이 앉거나 서거나 항상 나타나 이미 스승과 벗이 엄하지 않음을 근심하지 않는다.
하물며 저 입암(立巖)은 아침저녁으로 마주 대할 때에 우뚝 솟아 있어 천만고(千萬古)를 지나도 항상 그대로이다. 그리하여 세찬 물결도 어지럽히지 못하고 미친 바람도 흔들지 못하며 장마비도 썩히지 못하고 뜨거운 불도 녹이지 못하니, 이는 《주역(周易)》의 이른바 “서는 바에 방위를 바꾸지 않고 홀로 서서 두려워하지 않는다.[立不易方 獨立不懼]”는 것이며, 《논어(論語)》에 이른바“더욱 높고 더욱 견고하여 드높이 서 있다.[彌高彌堅 卓爾所立]”는 것이며, 《중용(中庸)》에 이른바 “화하면서도 흐르지 아니하여 중립하고 기울지 않는다.[和而不流 中立不倚]”는 것이며, 《맹자(孟子)》에 이른바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하여 빈천이 뜻을 옮기지 못하고 부귀가 마음을 방탕하게 하지 못하고 위엄과 무력이 굽히지 못한다.[至大至剛 貧賤不能移 富貴不能淫 威武不能屈]”는 것을여기에서 인식할 것이니, 각자 분발하고 진작하여 함께 자신을 세울 곳으로삼을 것을 생각함이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이는 여러 친구들이 힘써야 할 것이다.
젊어서 배우지 못하고 늙어서 아는 것이 없어 이미 지나간 세월을 다시 돌릴 수 없고 이미 노쇠한 정력을 다시 강하게 할 수 없다. 다만 흰 머리의 나이에 수습하고 노년 시절에 스스로 힘쓰니, 다행히 밖으로 사모함이 없고 만년(晩年)에 취미가 있어 때와 시월(時月)의 사이에 만약 다시 만(萬)에 하나 전진이 있다면 이 또한 어찌 거처하는 곳의 도움이 아니겠는가. 이는 바로 노부(老夫)의 일이다.
혹 봄이 되어 산에 꽃이 만발하였는데 시원한 바람이 골짝에 가득하며, 여름이 되어 소나무 그늘에 저절로 바람이 불어와 뜨거운 햇볕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가을이 되어 단풍숲에 비단 물결이 떠올라 옥같은 시냇물에 붉은 단풍이 비추며, 겨울이 되어 눈꽃이 휘날려 골짝의 하늘이 아득하니, 이는 모두 사람과 함께하는 아름다운 흥취이다. 그리고 앞 들에 안개가 걷히고 동쪽 산에 달이 떠오르는 것은 아침저녁의 아름다운 경치이다.
마침내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마음 내키는 대로 발걸음을 옮기며 샘물로 양치질하고 돌 위에 앉으니, 어디든 적당하지 않은 곳이 없다. 작은 그물을 푸른 물결에 던지니 은빛의 생선이 쟁반에서 뛰며, 가느다란 연기가 바위 틈에 떠오르니 산중의 막걸리가 잔에 가득하다. 약간 취하여 높이 읊조리자 우주가 아득한 것은 어떠한 시절에 있어야 하는가. 이는 책을 다 읽고 강(講)을 마친 다음 정신을 쉬고 기운을 펴는 일인데 노부와 여러 친구들이 함께할 일이다.
그렇다면 이 서재에서 거처하는 우리들이 위로 우러러보거나 아래로 굽어봄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감히 이 약속을 위배하는 자가 있으면 이 입암이 지켜볼 것이다.”
이에 편액(扁額)하기를 입암 정사(立巖精舍)라 하였다.
만력(萬曆) 정미년(1607,선조40) 겨울에 쓰다.

[주D-001]무우(舞雩)에서 ……10여 명 : 무우는 하늘에 기도하고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는 곳이며, 관동(冠童)은 관을 쓴 어른과 동자를 이른다. 공자(孔子)가 제자들에게 뜻을 묻자, 딴 사람들은 모두 정치에 뜻을 두었으나 증점(曾點)은 “늦은 봄 봄옷이 이루어지면 관을 쓴 어른 5, 6명과 동자 6, 7명과 함께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쐬고 시 읊으며 돌아오겠다.” 하였다. 《論語 先進》
[주D-002]현무(玄武) : 북방(北方)의 신(神)으로 그 모양은 거북과 뱀이 어울려 있는 것이라 하는바, 동쪽인 왼쪽은 청룡(靑龍), 서쪽인 오른쪽은 백호(白虎), 앞인 남쪽은 주작(朱雀), 뒤인 북쪽은 현무이므로 말한 것이다.
[주D-003]바름을 길러……있을 것이다. : 《주역(周易)》의 몽괘(蒙卦)는 산(山)을 상징하는 간(艮)과 물을 상징하는 감(坎)이 모여 이루어졌는바, 사람에 비유하면 어려서 몽매함에 해당한다. 이 몽괘의 단전(彖傳)에 “산 아래에 험한 물이 있는 것이 몽괘이니……어렸을 때에 바름을 기르는 것이 성인(聖人)이 되는 공부이다.” 하였다. 또 대축괘(大畜卦)는 하늘을 상징하는 건(乾)과 산을 상징하는 간(艮)이 모여 이루어졌는바, 학문을 많이 쌓는 상(象)이 된다. 이 대축괘의 상전(象傳)에 “하늘이 산 가운데에 있는 것이 대축괘이니, 군자가 이것을 보고서 옛날의 훌륭한 말씀과 올바른 행실을 많이 기억하여 덕을 쌓는다.” 하였으므로 이 두 괘를 빌려 말한 것이다.

여헌선생문집 제9권_

기(記)_

 

입암(立巖)에 대한 기문

 

무릇 산과 들 사이에 바위가 혹 우뚝 솟아 있어 입암(立巖 선바위)이라고 이름하는 것을 내 많이 보았지만 가장 기이하고 특별하여 더불어 비견할 수 없는 것은 내 홀로 이 바위에서 보았다.
딴 바위에 이른바 ‘섰다[立]’는 것은 반드시 높으면서 크고 크면서 바르고 바르면서 곧지는 못하다. 혹 여러 바위 사이에 나열되어 있어서 홀로 서서 기울지 않은 상(象)이 있음을 볼 수 없고, 혹 산등성이와 벼랑 위에 자리하고 있어서 우뚝 솟아 스스로 빼어난 기이함이 있음을 볼 수 없으며, 혹 여러 층이 중첩되고 거듭 쌓여 높아져서 그 전체가 한 바탕이 아닌 것이 있고, 혹 어지러운 모서리와 기울어진 구멍이 있어서 기울고 벼랑이 있고 뚫려 있으며 좌우가 혹처럼 나와 모가 나 바르지 못한 것이 있으며, 혹 바위 밑부분이 거칠고 끝에 이르면 뾰족한 것이 있고, 혹 네모지고 둥근 것을 분별할 수 없어서 기울고 곧지 않은 것이 있다.
그리고 혹 바위는 기이하나 서 있는 곳이 제자리가 아니어서 만약 도시(都市)의 사이와 큰길 가에 있으면 번거로움을 싫어하는 자들이 혐의하며, 또 기상(氣像)이 이와 비슷한 자가 보고 즐길 줄을 아나 물을 좋아하는 지혜로운 자
그렇다면 바위가 서 있는 것을 얻기 어려우며, 이른바 서 있다는 것도 또한 품류(品類)가 많다. 그리하여 그 기이함이 한두 가지가 아니고 그 병통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기이함이 많고 병통이 적은 것을 쉽게 볼 수 없으니, 하물며 완전히 기이하고 병통이 없는 것은 천백 개 중에 하나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 다행히 여기에서 얻었으니, 이 바위는 참으로 기이하다.
사방의 높이가 10여 장(丈)이 될 만하고 상하의 둘레가 7, 8심(尋 8척(尺)을 이름)에 가깝다. 여러 바위 사이에 서 있지 않으니 이른바 홀로 서서 기울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형이 산등성이와 산기슭을 의지하지 않았으니 이른바 우뚝 솟아 스스로 빼어났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발끝부터 머리에 이르기까지 전체가 한 바탕이니 여러 층이 중첩되고 거듭 쌓여 구차히 높은 것이 아니며, 모서리지지 않고 구멍이 나지 않고 혹이 붙지 않고 움푹 꺼지지 않았으니, 기울고 결함이 있고 뚫려 있어 바르지 않은 것이 아니다.
아래로부터 위에 이르기까지 그 곧음이 똑같고 밑부분으로부터 머리에 이르기까지 그 큼이 똑고르니 바르다고 이를 만하며, 바라보면 둥근 듯하고 나아가 보면 네모진 듯하며 앞에서 보면 기울지 않고 뒤에서 돌아보면 치우치치 않으니 중정(中正)하다고 이를 만하다. 시장 곁이 아니고 큰 길거리가 아니며 깊은 산 가운데에 있으니 제자리에 서 있다고 할 것이요, 맑은 물을 끼고 깊은 못에 임해 있어서 지극히 고요한 것을 지극히 동(動)하는 가운데에 간직하고 있으니 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하는 자들이 모두 좋아한다. 나는 이 때문에 바위가 서 있는 것을 본 것이 많으나 지금 이 바위를 홀로 처음 보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비단 그 형체가 기이하고 서 있는 것이 특이하며 방위(方位)가 알맞는 곳을 점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한 바위가 가운데 서 있는데 여러 산들이 둘러 있고 여러 골짝이 싸고 있는바, 그 형세를 돕는 것은 뒤에는 운둔(雲屯)의 높은 바위가 있고 전면에는 우뚝 솟은 높은 봉우리가 있으며, 왼쪽에는 붕새[鵬] 부리의 뫼가 있고 오른쪽에는 거북이 엎드린 등성이가 있으며, 동구(洞口)에는 푸른 산이 중첩되어 있고 골짝 위에는 근원을 찾는 작은 오솔길이 있다.
그리하여 돌의 크고 작음을 따질 것 없이 모두 앉아서 잠을 잘 만하고, 나무의 늙고 어림을 막론하고 모두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을 쉬게 한다. 흐름을 따라 굽이가 있어서 모두가 바람을 이끌어 오는 자리이고, 돌에 부딪혀 못을 이루어서 모두가 낚싯대를 던질 만한 물결이다.
백운(白雲)은 무슨 마음으로 산마을을 덮고 있으며 푸른 송라(松蘿)는 무정한데 어이하여 들길을 막고 있나. 몇 두둑의 황폐한 밭은 콩을 심을 수 있고 천산(千山)의 새로운 산나물은 입맛을 돋을 수 있다. 구불구불한 돌길은 지팡이 소리를 아침저녁으로 울릴 수 있고, 지저귀는 새 소리는 제 스스로 울부짖는데 내 홀로 노래한다. 그리하여 물건을 만나 흥취를 이루고 눈을 붙여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비록 묘한 솜씨라도 다 그려낼 수 없고 비록 공교한 문장이라도 이것을 다 거두어 표현할 수 없으니, 그렇다면 한 바위가 간직하고 있는 기이한 경치를 이루 헤아릴 수 있겠는가.
바위 뒤에 작은 골짝이 있는데 땅이 그리 넓지 아니하여 수십 채의 초가(草家)를 용납할 만하며, 북, 동, 서 3면에는 모두 높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그 남쪽 어구는 곧 앞서 말한 운둔암(雲屯巖)이며 그 아래가 바로 이 입암(立巖)이다. 바위 아래에는 냇물이 있고 냇물 남쪽에는 또 봉우리가 있으며 봉우리 위에는 또 고개가 있다. 그리하여 지형이 이미 높으면서도 오목하게 파여서 냇물을 따라 가는 자들은 이곳에 마을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하니, 참으로 은자(隱者)가 살 만한 곳이다.
옛날에는 거주하는 사람이 없었고 혹 마을의 농부들이 이곳에 와서 농사짓는 자가 있었으나 땅이 척박하여 곡식을 경작하는 데 적합하지 않으므로 대부분 황폐한 채로 버려져 있었다. 임진년(1592,선조25)에 왜구(倭寇)가 쳐들어오자, 영양(永陽)의 선비 3, 4명이 뜻을 합하고 이 골짝에 들어와 사니, 3, 4명의 선비는 곧 나의 벗인 권군 강재(權君强哉), 손군 길보(孫君吉甫), 정군 여섭(鄭君汝燮)과 군섭(君燮) 형제였다.
네 친구들이 나를 보고 바위가 기이함을 극구 말하였으므로 나는 네 친구를 따라 지난해에 비로소 와서 구경하니, 과연 네 친구의 말이 허황된 칭찬이 아님을 징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금년에 또다시 찾아가 오랫동안 머물면서 지난해에 미처 보지 못한 곳을 두루 탐방(探訪)하니, 과연 볼수록 더욱 기이하고 오래 있을수록 더욱 싫지 않았다.
하루는 네 친구가 나를 보고 말하기를, “바위가 이처럼 신기하고 사는 곳이 이처럼 깊으므로 우리들은 이곳을 노년(老年)을 마칠 장소로 삼고자 하니, 공(公)은 우리들을 따르지 않겠는가? 또 우리들이 처음 취한 것은 이 바위가 신기하기 때문이었는데, 이 바위의 위아래와 사방에는 골짝과 시냇물과 돌이 모두가 아름다운 경치로서 이 바위의 도움이 되고 있으니, 곳에 따라 명칭을 붙여 우리들이 놀고 구경하며 탐상(探賞)하는 장소로 삼지 않겠는가?” 하였다.
나는 흥에 취하여 졸연(猝然)히 이를 승낙하고, 스스로 어리석고 졸렬하고 참람하고 망녕되며 또 시냇물과 산에 욕을 끼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미 이 바위와 산, 시냇물과 돌의 아름다운 경치를 얻었는데, 만일 깃들여 쉬고 거처하며 학문을 닦을 집을 만들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또 편안히 머물 곳이 없을 것이다. 또 처자식이 시끄럽게 떠드는 사이와 닭이나 개가 번잡하게 다니는 곳이 어찌 군자(君子)가 정신을 기르고 본성을 기를 수 있는 곳이겠는가.
이에 네 친구가 한 서재(書齋)를 설치하고자 하였는데, 바위 뒤 동쪽 가에 집 몇 칸을 세울 만한 곳이 있었다. 이 곳은 뒤는 마을과 막혀 있고 앞은 시냇물을 굽어보며, 바위를 등지고 서 있거나 바위 위에 걸터앉을 수 있어 앉고 누움에 그 모양을 모두 볼 수 있다. 또 바람을 막고 양지(陽地)를 향하여 비록 추운 겨울이라도 따뜻함을 취할 수 있다.
서재를 비록 세우지 않았으나 네 친구의 계책이 이미 정해졌으므로 나는 미리 이름을 짓기를 ‘우란재(友蘭齋)’라 할 것을 청하였다. 난초는 진실로 깊은 골짝에서 자라는 풀로 군자가 차고 다니니, 서재를 이름한 뜻을 네 친구는 묵묵히 알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바위로부터 북쪽으로 가다가 마을 집에 미치지 못하고 마을로부터 남쪽으로 가다가 입암에 미치지 못하는 곳에 한 바위가 우뚝이 산처럼 솟아 있으니, 그 높이가 또한 4, 5길이 될 만하고 그 주위가 대략 땅을 측량하는 자[尺]로 재면 또한 수십 척(尺)에 내리지 않는다. 높이 솟아 있고 우뚝하여 진실로 구름이 주둔[雲屯]해 있는 듯하였다.
그 위에는 오래된 소나무 수십 그루가 용(龍) 모양의 가지가 서로 얽혀 있고 바람에 시달린 잎이 앙상하여 높은 산과 큰 산악의 형체가 의연(依然)히 있고 신선이 사는 지역과 절정(絶頂)의 풍취(風趣)가 은연(隱然)히 있어 우러러보는 자들로 하여금 정신이 엄숙하고 상쾌하며 마음과 생각이 깨끗하고 원대하게 하여 자연히 흥기(興起)하는 바가 있었다. 그러므로 칭하기를 ‘기여암(起予巖)’이라 하였다.
북, 동, 서 3면의 언덕에는 모두 작은 길이 있어 산에 오를 수 있으나 남쪽 언덕은 또 높이가 배나 되어 가팔라 오를 수 없으며, 남쪽 언덕의 밑은 곧 우란재의 터이다. 또 입암의 위, 기여암의 아래 중간에 평평한 바위가 있는데, 입암과 기여암과의 거리가 각각 10여 보(步)쯤 된다. 사람들이 마을로부터 올 경우, 기여암의 서쪽 곁을 따라 오면 굳이 산을 오르지 않고도 평평히 걸어 이곳에 오를 수 있으며, 그 아래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또한 7, 8길[丈]이 되어 내려다 볼 수 없고 그 가운데는 평평하고 둥글다.
네 친구는 지형을 따라 터를 닦고 그 주위에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었다. 대의 좌우에는 두 그루의 높은 소나무가 있어 아침저녁의 햇빛을 가리울 수 있으며, 한낮에 그늘이 완전하지 않을 때가 있으므로 또 긴 나무를 두 소나무에 걸쳐 놓아 기둥을 삼고 딴 소나무의 먼 가지를 베어다가 덮어서 햇빛을 가리우지 못하는 부분을 보충하니, 종일토록 햇빛을 보지 않을 수 있었다. 대의 남쪽 귀퉁이에도 작은 소나무 몇 그루가 있는데 길이가 혹 몇 자쯤 된다. 네 친구들은 이 소나무를 사랑하고 보호하여 날마다 자라기를 기다리니, 이 소나무가 만약 자라면 굳이 딴 나뭇가지를 베어다가 덮지 않아도 그늘이 저절로 충분할 것이다.
대 위는 10여 명이 앉을 만하니 차를 끓이고 술을 데우는 데 모두 적당한 장소가 있으며, 따라온 노비(奴婢)와 어린이들도 각기 곁에 편안히 앉을 곳이 있다. 대 위에 앉으면 3면이 모두 높은 절벽이어서 반드시 항상 깊은 못에 임한 듯이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으므로 이 대를 이름하여 ‘계구(戒懼)’라 하였으니, 계구는 대가 된 형세인데 계구의 뜻은 참으로 많다.
이 대는 뒤에는 기여암이 있고 앞에는 입암이 있으니, 다만 두 바위만 가지고도 한 구역의 좋은 경치를 점령할 수 있는데, 하물며 좌우와 원근이 모두 기이한 구경거리이다. 그리하여 형형색색(形形色色)으로 크고 작은 것이 나열되어 있어 기이함을 다투고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서로 신기한 구경거리가 되고 있음에랴.
한 줄기 푸른 물이 동쪽 벼랑으로부터 흘러와서 굽이굽이 감돌아 입암의 아래를 부딪히고 지나가는데, 해가 오래고 세월이 흐를수록 그 부딪힘이 그치지 않아 지금 바위 밑에는 물에 깎인 흔적이 역력하다. 이 물이 이미 서쪽으로 흘러갔다가 다시 남쪽으로 돌아서 혹 숲을 돌아 숨기도 하고 혹 돌을 지나 나타나기도 하며, 혹 느리게 흘러 못이 되고 혹 급하게 흘러 여울이 되며, 혹 나뉘어 섬[島]이 되고 혹 굽어 물가를 이루었는바, 대 위에서 7, 8리를 볼 수 있다.
대의 바로 남쪽에는 큰 산 한 줄기가 점점 낮아져 가운데가 줄어들었는바, 서쪽에서 와서 북쪽으로 돌아 입암과 마주한 곳에 이르러 봉우리가 우뚝 솟았으며 벼랑의 돌이 높이 솟아 있다. 이 봉우리는 시냇물 남쪽에 있고 입암은 시냇물의 북쪽에 있어 마치 서로 손을 잡고 읍(揖)하는 듯한데 이름을 ‘구인봉(九仞峯)’이라 하였다. 구인봉은 그 높음을 말한 것이나 구인이란 말은 공자(孔子)의 산을 만드는 비유에서 나왔으니, 우리들은 한 삼태기의 흙을 더하지 아니하여 아홉 길의 산이 되지 못함을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의 동쪽에는 뒷산 한 줄기가 있는데 이 역시 온 것이 점점 낮아진 뒤에 다시 일어나 봉우리가 되었는바, 봉우리의 모양이 단정하고 둥글어 마치 부용(芙蓉)이 물 위로 나왔는데 꽃봉오리가 터지지 않은 듯하였다.
대 위에 해가 저물고 산중 사람들이 막 즐거워하여 등불을 켜려고 하나 구할 수가 없고 촛불을 밝히려고 하나 마땅치가 않다. 이 때에 함께 주목(注目)하고 동쪽을 바라보며 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는데 한 조각 얼음같은 둥근 달이 봉우리 위로부터 나와서 마치 봉우리가 둥근 달을 토해내는 듯하였다. 그러므로 이 봉우리를 이름하여 ‘토월(吐月)’이라 하였으니, 대 가운데의 밤 경치가 이 달을 얻어 밝아진다.
대의 서북쪽에는 가장 높은 한 뫼가 있는바, 산인(山人)들이 산을 나가지 않고 때로 울적한 회포를 펴고자 하면 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는 벼랑을 따라 등라(藤蘿)를 부여잡고 이 뫼에 한번 올라, 선니(宣尼 공자)께서 동산(東山)에 오르고 태산(泰山)에 오른 놀이를 따른다면 한 조그마한 청구(靑丘 우리 나라)가 일찍이 한번 보는 시야(視野)에 차지 못하니, 이 뫼를 어찌 ‘소로(小魯)’라고 이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토월봉(吐月峯)의 동쪽에 깊고 빼어난 고개가 있는데 반은 감추어져 있고 반은 드러나 있으며 울울창창(鬱鬱蒼蒼)하여 나무하는 지아비와 약초를 캐는 나그네들의 발자취도 미치기 어려우니, 이곳을 이름하여 ‘산지령(産芝嶺)’이라 하였다.
지초(芝草)가 반드시 이곳에서 생산되는 것은 아니나 산지(産芝)라고 이름한 것은 어째서인가? 옛날 상산(商山)의 사호(四皓)가 시서(詩書)를 불태우고 선비들을 묻어 죽이는 진(秦) 나라의 학정(虐政)을 피하여 몸과 세상을 상산의 깊은 골짜기에 부쳐 두고 홀로 멀리 당(唐), 우(虞)의 태평성세를 그리워하였으니, 천 년이 지난 뒤에 자지가(紫芝歌)를 외우고 읊어보면 또한 그 금회(襟懷)가 세속을 초탈하였음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들을 그리워하나 볼 수 없으니, 그의 뜻을 숭상하여 높이 읍(揖)하는 자가 눈을 붙여 회포를 펼 곳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고개 이름을 ‘산지’라 한 것이다.
산이 산지령에서 서쪽으로 간 것이 또 계구대(戒懼臺)의 동남쪽에 한 고개를 만들었으니, 곧 구인봉(九仞峯)이 온 곳이다. 대에서 바라보면 가장 가깝고 또 마주보고 있으며 둥글고 높고 농후(濃厚)하며 울창하고 밝게 드러났는바, 이곳을 이름하여 ‘함휘(含輝)’라 하였으니, 이는 주회암(朱晦庵 회암은 주희(朱熹)의 호)의 “옥이 묻혀 있으니 산이 빛을 머금고 있다.[玉蘊山含輝]”는 뜻을 취한 것이다.
이 산이 옥을 간직하고 있는지의 여부는 진실로 알 수 없으나 좋은 옥이 묻혀 있는 곳은 반드시 명산(名山)이며, 회옹(晦翁)의 이 시구(詩句)는 또 군자가 덕을 쌓아 순수함이 얼굴에 나타나고 덕스러운 모양이 등에 가득함을 비유한 것이니, 우리들은 이로부터 이 산을 바라보면서 반드시 그 이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들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 과연 덕이며 낯과 등에 나타나는 것이 과연 순수하고 가득할 것인가? 이 또한 어찌 스스로 닦는 도움이 아니겠는가. ‘함휘’라는 이름은 이것을 취한 것이다.
함휘령(含輝嶺)으로부터 남쪽으로 가면 또 한 고개가 아득한 사이에 높이 솟아 있으니, 계구대에 앉아 있는 자는 반드시 구인봉 위로 눈을 들어 올려다 본 뒤에야 이 곳을 바라볼 수 있다. 이 곳은 언제나 흰 구름이 정상에 모여 있어 혹은 관(冠)과 건(巾)을 머리에 쓴 듯하고, 혹은 빗긴 띠가 허리에 있는 듯하며, 혹은 벼랑과 골짝이 모두 가리워진 경우가 있고, 혹은 봉우리와 산이 반쯤 노출된 경우가 있으며, 혹은 처음에는 얇았다가 끝내는 빽빽하고 혹은 잠시 모였다가 곧바로 흩어지며, 아침에는 안개가 되고 저녁에는 노을이 된다. 그리하여 변화가 무상하고 가고 오는 흔적이 없는 것이 이 구름이다. 그러므로 이름을 ‘정운령(停雲嶺)’이라 하고 이에 도정절(陶靖節)의 “구름이 무심히 산을 나간다.[雲無心而出岫]”는 글을 읊으니, 또한 거두고 펴며 행하고 감추는 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무릇 사면(四面)의 산이 모두가 높고 큰데 그 중에도 서산(西山)이 가장 웅장하고 높다. 한 시냇물의 하류에 있고 한 골짝의 초입구(初入口)에 있어서 마치 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하므로 마침내 이름하기를 ‘격진령(隔塵嶺)’이라 하였다.
이미 이 고개가 있어 안과 바깥을 막고 차단하므로 우리 입암(立巖)의 시내와 산의 절경(絶景)이 스스로 한 구역의 비밀스러운 곳이 되어서 산 밖에 있는 진세(塵世)의 종적들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다. 한 골짝 가운데 고기잡고 나무하는 흥취를 다만 우리들이 홀로 즐길 수 있어 세상의 뜬구름과 같은 부귀(富貴)와 서로 바꿀 수 없으니, 이 고개를 ‘격진’으로 이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시냇물의 남쪽에는 한 들이 있는데 마을과의 거리가 겨우 1, 2리(里)에 불과하다. 이 들의 토지는 벼와 보리가 잘 자라고 기장과 수수도 잘 자라니, 만일 힘써 농사를 짓는다면 충분히 굶주림을 면할 것이다. 구름을 헤치고 밭을 갈며 비를 맞으면서 호미질하는 것은 진실로 산중의 좋은 일인데, 신야(莘野)에서 농사짓던 노인과 남양(南陽)의 와룡(臥龍)이 혹 요(堯), 순(舜)의 도를 즐거워하고 혹 관중(管仲)과 악의(樂毅)에게 자신을 비유하였으니,우리들이 홀로 이윤의 뜻을 뜻하고 와룡의 마음을 마음에 간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들의 이름을 ‘경운(耕雲)’이라 한 것은 이것을 사모해서이다.
시냇물이 흐르는 곁에 숲이 연하여 푸르러 스스로 낳고 스스로 자라 어지러이 무성하다. 마을 사람들이 아침저녁으로 밥을 짓거나 노는 손님들이 차[茶]를 끓이고 고기를 삶을 적에 푸른 연기 한 가닥이 작은 색깔을 야기(惹起)하여 시인(詩人)들의 입에 제공하고 혹 돌아가는 새의 눈을 혼미하게 하니, 이 때문에 숲을 ‘야연(惹煙)’이라 이름하였다.
골짜기가 맨 아래 어구에 있는 것은 ‘초은(招隱)’이라 이름하였으니 벼슬길에 혼미하고 빠져서 돌아오지 못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긴 것이며, 골짜기가 시내 위에 있는 것을 ‘심진(尋眞)’이라 이름하였으니 참을 간직하고 깊이 은둔하는 자를 그리워하나 만나볼 수가 없다는 뜻이다.
골짜기가 정운령(停雲嶺) 아래에 있는 것을 ‘채약(採藥)’이라 이름하였으니, 약은 반드시 방외(方外)의 인사들이 단사(丹砂)나 석수(石髓)를 가지고 사람을 그르치는 것처럼 하는 것이 아니다. 한가로이 거처하며 병을 치료하여 수양하고 성명(性命)을 보전하는 데에는 약물이 없을 수 없는데 이 골짝에는 이러한 약물이 많이 생산되므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입암의 밑 시냇물이 흐르는 가운데에 돌이 평평히 깔려있는바, 모가 나고 우뚝 솟은 것이 출몰하고 이리저리 종횡하며, 가운데에는 돌 틈이 있는데 길이와 넓이가 겨우 한 길쯤 된다. 흐르는 시냇물이 이곳에 멈추어 깊이 파이고 매우 맑아 한 작은 못이 되었다. 못의 위아래에는 돌이 노출되어 둥글게 서려 있는 곳이 있는데, 흐르는 물이 불어나면 침몰되고 수위(水位)가 떨어지면 나온다. 그러나 침몰될 때가 적고 나올 때가 많은바, 이 돌에 앉아 있으면 못을 굽어볼 수 있다. 혹 몸을 씻기도 하고 혹 양치질하면서 노는 물고기가 오고 가는 것을 구경할 수 있으므로 이에 이 돌을 이름하여 ‘경심대(鏡心臺)’라 하고, 이 못을 이름하여 ‘수어연(數魚淵)’이라 하였다.
바위 그림자가 못 속으로 거꾸로 드리워지고 파란 이끼와 푸른 숲이 마치 못의 물고기의 소굴이 된 듯하다. 다만 못이 다소 넓지 못하여 작은 배를 띄울 수 없고, 돌이 다소 높지 못하여 물이 불어나면 침몰됨을 면치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경심대로부터 시냇물을 거슬러 올라가 한 굽이를 지나면 물이 돌아 물굽이를 이루었는데, 물굽이는 구인봉(九仞峯)의 동쪽 언덕에 있다. 바위가 물가에 임하여 평평하고 또 넓어서 몇 칸의 초가(草家)를 세울 수 있으나 다만 다소 높지 못하여 물이 불어나면 침몰되므로 집을 지을 수가 없다. 그러나 뒤에는 높은 산을 등지고 있고 앞에는 험한 물을 굽어보며 또 구인봉이 가리고 있어 그윽하고 아늑하며 깊고 조용하여 아득히 외인(外人)과 서로 접하지 않는 듯하므로 마침내 이름하기를 ‘피세대(避世臺)’라 하였다.
또 피세대로부터 시냇물을 건너가서 채 1, 2리가 못 되는 곳에 물을 가로지르는 돌이 있어 스스로 돌다리를 이루니, 만약 물이 불어나지 않으면 발을 적시지 않고도 건널 수 있다. 가운데에 두 개의 큰 돌이 높이 솟고 넓어서 그 위에 앉고 누울 수 있으며, 또 그 남쪽 벼랑에는 바위 틈이 있어 또한 한 대(臺)를 이룰 수 있는바, 한 장의 깔자리를 펼 수 있다. 그리하여 곧바로 시내 못을 굽어보며 낚시하기에 가장 적합하므로 마침내 ‘상엄대(尙嚴臺)’라고 이름하였으니, 엄은 엄자릉(嚴子陵)이다.
이 분은 나와서 지존(至尊)인 천자(天子)를 가까이하면 천상(天上)의 별을 움직이고, 돌아가서 한 낚싯줄을 잡으면 한(漢) 나라의 구정(九鼎)을 붙들었으니, 진실로 또한 한 세상의 대장부(大丈夫)였다. 이 대를 명칭한 뜻은 그의 절개를 숭상한 것이다.
또 상엄대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몇 리쯤 되는 곳에 이르면 두 산 사이에 한 못이 있는데 못의 넓이는 중간 크기의 배를 띄울 만하며, 시냇물은 세 줄기로 흐르는데 폭포수가 떨어져 못 속의 물소리가 항상 들려온다. 못의 양 가에는 모두 반석(磐石)이 있는데 돌이 물에 씻기고 갈려서 너르고 평평하고 매끄러우며 빛나고 깨끗하므로 그 위에 앉아 있으면 마치 유리(琉璃) 자리를 깔아 놓은 듯하다. 동쪽 산에 있는 바위는 더욱 기이하고 장엄하여 파란 이끼와 푸른 등라(藤蘿)가 울창하게 덮고 있으니, 자못 세속 가운데의 사람이 놀고 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이 못을 ‘욕학(浴鶴)’이라 이름하였으니, 이 또한 반드시 그 실재가 있는 것이 아니요 수석(水石)의 기이하고 깨끗함을 나타낸 것이다.
만약 경심대(鏡心臺)로부터 흐름을 따라 내려오면 물이 서쪽 벼랑을 부딪혀작은 못을 이루었는데, 못 위에 바위가 있고 바위 위에 소나무가 있으므로 인하여 대를 삼았다. 이곳은 비록 스스로 기이하지는 못하나 여러 산과 여러 봉우리, 여러 바위와 여러 돌로 무릇 한눈에 거두어 볼 수 있는 것이 황홀하여 형용하기 어려우며 마치 그림 속에 있어 진면목(眞面目)이 아닌 듯하므로 이름하기를 ‘화리대(畵裏臺)’라 하였다.
화리대로부터 또 서남쪽으로 2리쯤 떨어져 있는 곳에 바위가 겹쳐 언덕을 이루어 이 시냇가에 임해 있는데, 북쪽 산에서 흘러오는 시냇물이 차츰 이 시내로 떠내려와서 그 앞에 합류하여 또다시 한 곱절의 값을 더한다. 네 친구들은 이 위에 정자를 짓고자 하나 힘이 미치지 못할까 우려된다. 이곳을 이름하여 ‘합류대(合流臺)’라 하였다.
대의 앞 합류하는 곳에 물이 자못 너르고 깊으며 돌이 기이하고 아름다운 것이 많으니, 중국의 명승지인 위수(渭水)의 북쪽이 과연 이보다 나은지 모르겠다. 마침내 이 여울물을 이름하기를 ‘조월(釣月)’이라 하였다. 이는 시내 위의 상류가 모두 산 밑에 있어 달빛을 받는 것이 가장 늦으나 이 여울은 동쪽 산과 멀리 떨어져 있어 달빛을 먼저 받으므로 진실로 밤낚시하기에 마땅하니, 낚시는 곧 강태공(姜太公)의 일이다. 강태공은 몸에 세상을 구제할 도구를 간직하고 있으면서 한가로이 강호(江湖)의 사이에서 늙어가며 손에 한 낚싯대를 잡아 이대로 일생을 마칠 듯이 하였으니, 이 분이 아니면 내 누구를 따르겠는가. 이것이 이 여울물을 이름한 의의이다.
여울물을 따라 내려가서 초은동(招隱洞)의 어구에 이르면 시냇물이 못을 이룬 것이 있는데, 그 크기가 상류의 것보다 배나 되는바, 외부 사람으로 이 골짝에 들어오는 자와 산중 사람으로 이 산을 나가는 자는 모두 이 못을 경유한다. 그리하여 진세(塵世)와 선계(仙界), 신선(神仙)과 범인(凡人)들이 여기에서 모두 나누어지므로 못 이름을 ‘세이(洗耳)’라 하였으니, 이는 마음에 소유(巢由)와 허부(許父)를 따르고자 해서이다.
무릇 여러 기이한 절경을 거두어 입암(立巖)의 총관(總管)으로 돌아오는 것은 위로 욕학연(浴鶴淵)으로부터 아래로 세이담(洗耳潭)에 이르러 그치니, 그 사이 한 모래섬과 한 돌이 모두 이름을 얻을 만한 것을 어찌 이루 다 셀 수 있겠는가마는 지금 명칭한 것은 다만 가장 빼어나고 가장 큰 것을 취했을 뿐이다.
바깥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오는 자들은 반드시 바위 아래로 흐르는 물을 건너기 마련인데 흰 돌이 옆으로 깔려 있어 쪽다리로 사용하는바, 다리를 밟을 즈음에 옥소리 같은 물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므로 이 다리의 이름을 ‘향옥(響玉)’이라 하였다.
계구대(戒懼臺)로부터 걸어 내려와 장차 경심대(鏡心臺)에서 고기를 구경하려고 한다면 들어올 때에 또한 반드시 한 돌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는 바위 밑 숲 속에 있어 돌바닥에 파란 이끼가 잘 자라므로 이 다리의 이름을 ‘답태(踏苔)’라 하였으니, 이 또한 그윽한 흥취를 돕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기여암(起予巖) 옆에 차갑고 또 시원한 우물이 있으니, 물건을 윤택하게 하는 공효(功效)가 넓지 않을 수 없으므로 《주역(周易)》의 정괘(井卦) 상육(上六) 효사(爻辭)를 취하여 ‘물멱(勿羃)’이라 이름하였으니, 우물에 덮개[羃]를 씌우면 우물의 공효를 베풀지 못한다.
입암의 곁에 돌이 일곱 개가 서 있는데 모양이 북두칠성(北斗七星)과 유사하므로 이름하기를 ‘상두석(象斗石)’이라 하였다. 사시(四時)의 운행과 해와 달의 운행이 모두 북두칠성에서 법을 취하니, 북두성은 성신(星辰)에 있어 그 관계가 가장 큰데 돌의 숫자와 상(象)이 마침 북두칠성과 부합하니, 이 역시 하나의 기이한 일이다.
이상 이름을 얻은 것이 스물여덟 곳인데 스물여덟 곳이 각자 좋은 경치가 있으니, 그렇다면 이러한 이름을 얻은 것은 진실로 당연하다. 그러나 한 입암의 기이함이 있지 않다면 스물여덟 곳이 스스로 좋은 경치를 자랑하지 못하여, 심상(尋常)한 가운데의 구릉과 골짝, 봉우리와 수석(水石)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니, 그 누가 명칭을 붙여 일컫겠는가. 그렇다면 스물여덟 곳의 좋은 경치는 입암을 얻어 드러나고, 입암의 빼어난 기이함은 스물여덟 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인하여 풍부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한 계구대(戒懼臺)가 있지 않다면 진실로 입암의 빼어난 기이함을 빛내어 스물여덟 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꾸미지 못했을 것이며, 또 스물여덟 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드러내어 입암의 빼어난 기이함을 돕지 못했을 것이니, 이는 입암이 있으면 계구대가 없을 수 없는 이유이다. 이는 마치 북극성(北極星)이 28수(宿)의 높이는 바가 되고 28수가 빙둘러 향하지 않으면 북극성이 또한 홀로 높음이 될 수 없으며, 28수는 비록 각자의 자리가 있으나 한 북극성의 높음이 있지 않으면 또한 빙둘러 향할 곳이 없는 것과 같다.
그리고 또 그 가운데에 한 각수(角宿)가 28수의 첫번째 별이 되어서 이 각수가 제자리를 얻은 뒤에야 나머지 27개의 별이 차례를 따라 진열하니, 이는 입암이 스물여덟 곳의 종주(宗主)가 되고 계구대가 또 스물일곱 곳의 우두머리가 되는 이유이다.
그러나 또 네 친구가 이곳에 나가 터를 잡지 않았더라면 입암의 빼어난 기이함을 또 누가 알겠는가. 사람이 알고 알지 못함은 입암에게 무슨 상관이 되겠는가마는 시내와 산, 물과 돌은 또한 천지 사이의 한 아름다운 기물이니, 천지가 이미 이러한 아름다운 기물을 가지고 있다면 어찌 한갓 스스로 아름다울 뿐이겠는가. 반드시 가장 귀하고 가장 영특한 인간으로 하여금 이것을 주관하게한 뒤에야 시내와 산, 물과 돌이 헛되이 버려지는 한 기물이 되지 아니하여 그 아름다움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네 친구가 이곳에 와서 터를 잡은 것은 그 또한 입암의 아름다운 만남일 것이다.
아! 천지(天地)가 개벽(開闢)된 이래로 곧 이 시내와 산이 있었건만 몇만 년 동안 황폐하여 매몰되었던 지역이 오늘날 비로소 우리들이 놀고 감상하는 곳이 되었으니, 운수가 그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또한 우리들의 먼 생각을 일으키게 한다.
혹자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내와 산은 아름다우나 시내와 산은 바로 조물옹(造物翁 조물주, 곧 하늘을 가리킴)의 공공(公共)한 물건이다. 또 애당초 정의(情意)가 없고 또 명칭이 없으니, 이곳에 사는 자들은 다만 밭을 갈고 물고기를 잡으며 나무를 하고 약초를 채취하여 자기에게 있는 즐거움을 즐길 뿐이며, 이곳에 노는 자들은 다만 다니며 보고 지나며 구경하여 한때의 눈을 상쾌하게 할 뿐이다. 이것이 조물옹의 공공한 마음을 순히 따르고 시내와 산의 자연의 본성을 온전히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마침내 정의가 없는 시내와 산에 정의를 가지고 시끄럽게 하고, 명칭이 없는 물과 돌에 명칭을 붙여 누를 끼쳐 공공한 시내와 산을 곧 자신의 물건으로 삼고자 하는가. 더구나 명칭이 그 실재를 따르지 않은 것이 많으니, 그렇다면 조물옹의 마음이 아니어서 시내와 산의 욕이 되지 않겠는가. 또 바깥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아 자신이 망녕되고 허탄한 짓을 하는 데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이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다. 그대의 말과 같다면 이는 산하(山河)의 대지가 우리 인간에게 관여되지 않는다고 여기고, 천지 사이의 만물이 이 몸에 관여함이 없다고 여겨 우리들로 하여금 형적(形跡)을 없애고 공허(空虛)와 현묘(玄妙)에 뜻한 뒤에야 그만두고자 하는 것이니, 이 어찌 평상(平常)한 이치이며 광대(光大)한 도이겠는가.

조물옹이 만물을 만든 이유가 어찌 한갓 조화의 공을 허비하여 다만 쓸모 없는 물건을 만들고자 함이었겠는가. 한 물건이 있으면 반드시 한 물건의 쓰임이 있고 만 가지 물건이 있으면 반드시 만 가지 물건의 쓰임이 있어 먼저 쓰일 이치가 있은 뒤에 이 물건이 있는 것이니, 만약 쓰일 이치가 없었다면 마땅히 이 물건을 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천지가 이미 만물을 내고 또 반드시 이 인간을 낸 것이니, 그런 뒤에야 인간이 만물을 주장하여 각각 그 쓰임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밭과 들에서 밭갈고 김매며 언덕과 육지에 거주하는 집을 마련하며 오곡(五穀)을 먹고 실과 삼[麻]을 짜서 옷을 입으니, 어찌 홀로 시내와 산만이 우리 인간에게 쓰임을 다하지 않겠는가. 물건이 있는데도 쓰지 않으면 도리어 물건을 만든 마음에 위배되는 것이다. 이른바 공공(公共)이라는 것은 이 물건을 헛되이 버리는 땅에 두는 것이 아니요 다만 사사로이 하지 않을 뿐이다.
시내와 산은 진실로 공공한 물건이나 내가 얻어 내가 즐거워하고 남이 얻어 남이 즐거워하고 천만 사람이 얻어 천만 사람이 모두 즐거워하여 각각 얻은 바에 따라 즐거워하니, 이 어찌 공공함에 해롭겠는가. 앞사람이 즐거워하고 뒷사람이 또한 즐거워하며 이 사람이 즐거워하고 저 사람 또한 즐거워하여 서로 사양하지 않고 모두 스스로 만족하니, 이 어찌 혐의할 것이 있겠는가. 또 만물이 어찌 반드시 정의(情意)가 있은 뒤에 사람의 쓰임이 되겠는가.
오곡은 사람의 밥이 되려는 뜻이 있지 않으나 사람들이 스스로 오곡을 먹고, 실과 삼은 사람의 옷이 되려는 뜻이 있지 않으나 사람들이 스스로 옷을 만들어 입으며, 밭과 들, 언덕과 육지에 이르러서도 또한 모두 밭갈고 김매는 곳이 되고 거주하는 집이 되려는 뜻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사람들이 스스로 밭갈고 김매고 거주하는 집을 짓는 것이니, 유정(有情)으로 무정(無情)과 사귀는 것이 한 이치가 감통(感通)하는 묘리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만물이 처음에 또 어찌 명칭이 있었겠는가. 명칭이 있는 것은 모두 우리 인간이 붙여준 것인데, 명칭을 붙이는 이유는 바로 쓰임을 다하기 위해서이다. 오직 이 시내와 산은 바로 깊고 궁벽한 한 구역이므로 또한 일찍이 명칭이 없었으며, 이미 명칭이 없었기 때문에 또한 일찍이 사람들이 놀고 감상하는 곳이 되지 못하였다. 우리들이 지금으로부터 비로소 명칭을 가(加)하고 영원히 놀고 감상하는 지역으로 삼아 헛되이 버려지는 시내와 돌이 되지 않게 하였으니, 이 또한 이 시내와 돌의 영광이 아니겠는가.
실재가 없으면서 물건에 명칭을 붙인 것으로 말하면 진실로 이러한 점이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시내와 산을 위하고 우리 사람들을 위하여 송축(頌祝)한 칭호이니, 또 어찌 나쁠 것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오늘날 명칭을 지은 것은 진실로 물건을 만든 쓰임을 이루어 시내와 산의 아름다움을 나타낸 것이다.”
혹자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명칭에 대한 뜻은 그러하나 다만 우리 인간의 사업이 과연 시내와 산, 구름과 돌 사이에 있어 그대가 마침내 이것으로 몸을 깃들이고 즐거움을 붙이는 장소로 삼는가?”

이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군자의 도는 넓으면서도 숨겨져 있으니, 어디를 간들 도가 되지 않으며 어느 것을 만난들 즐겁지 않겠는가. 어려서 학문을 배우고 장성하여 이것을 행하니, 그렇다면 천하 가운데에 서고 묘당(廟堂)의 위에 벼슬하여 그 군주를 요(堯), 순(舜) 같은 성군(聖君)으로 만들고 이 세상을 당(唐), 우(虞) 같은 태평성세를 만들어 위로는 천지를 편안히 하고 아래로는 만물을 길러주어야 이에 우리 인간의 능사(能事)를 다하는 것이다.

그리고 혹시라도 때를 만나지 못하면 물러나 산야(山野)에 살아 한 생애를 물 달, 바위와 시내 사이에 붙여 밭갈고 김매고 낚시질하고 고기잡는 것으로 일을 삼으며 바람과 구름, 꽃과 풀로 짝을 삼는 것이 또한 모두 이 도가 있는 것이니, 어찌 시내와 산에 자취를 멈추고 담박함에 마음을 두어 몸을 깨끗이 하기 위해 인륜을 어지럽혀 세상을 잊기를 과감히 하는 행위이겠는가.”
나는 이미 혹자의 논란에 대답하고 다시 네 친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내가 ‘계구(戒懼)’라고 대(臺)의 이름을 지은 뜻을 다 말할 것이니, 제군(諸君)들은 유념해 주겠는가. 한번 이 땅을 가지고 말하면 무릇 바윗돌이 이 바위보다 큰 것을 또 어찌 이루 다 셀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들이 반드시 이 바위를 취한 것은 이 바위가 우뚝 서 있기 때문이니, 모든 물건이 반드시 선 바가 있은 뒤에 딴 물건에게 동요되지 않고 빼앗김을 당하지 않는다.

백 길이 되는 돌기둥은 서 있는 것이 확고하기 때문에 황하(黃河)의 파도가 부딪혀도 만고(萬古)에 흔들리지 않고, 천 길이 되는 큰 나무는 심겨진 뿌리가 견고하기 때문에 폭풍이 사납게 진동하여도 수백 년 동안 뽑히지 않는다. 이제 이 입암 역시 천지와 더불어 함께 시작되었는데 이미 만고의 전(前)에 기울지 않았으니, 또 어찌 만고의 뒤에 흔들리겠는가. 더구나 높고 크고 바르고 곧음이 또 딴 바위에 비할 수 없지 않은가.
우리 인간은 천지의 사이에 서서 어찌 선 바가 없이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마음에 덕을 간직하여 본연(本然)의 정해진 성(性)을 간직하고, 몸에 도를 행하여 마땅히 행할 바른 이치가 있으니, 인의예지(仁義禮智)는 덕(德)의 조목이고, 효제충신(孝悌忠信)은 도(道)의 조목이다. 이 덕에 마음을 두어 변치 않고 이 도를 몸으로 행하여 옮기지 않은 뒤에야 서는 것이 마땅히 설 곳에 서게 된다.
이로써 빈천(貧賤)에 처하면 빈천이 나의 선 바를 옮기지 못하고, 이로써 부귀(富貴)에 처하면 부귀가 나의 선 바를 방탕하게 하지 못하고, 이로써 위엄과 무력을 만나면 위엄과 무력이 나의 선 바를 굽히지 못하여, 말재주가 소진(蘇秦), 장의(張儀)와 같아도 나의 뜻을 빼앗지 못하고, 용맹이 맹분(孟賁), 하육(夏育)과 같아도 나의 의지를 좌절시키지 못한다. 이는 성현들이 작은 몸으로천지에 참여되는 이유이니, 그 서 있는 바가 도덕이기 때문이다.
요(堯), 순(舜), 우(禹)가 세운 것은 중도(中道)였다. 그러므로 사흉(四凶)의 흉악함이 제요(帝堯)의 선 바를 흔들지 못하였고 천하의 안락(安樂)함이 순, 우의 선 바를 옮기지 못하였다.
탕(湯) 임금이 세운 것은 한 덕이요 문왕(文王)이 세운 것은 계속하고 밝히는 경(敬)이며, 무왕(武王)이 세운 것은 변치 않는 덕이었다.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의 유언비어가 동요시키지 못하였으니 주공(周公)의 세운 바가 어떠하며, 만세의 난신(亂臣)과 적자(賊子)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공자(孔子)의 세운 바가 어떠하며, 양주(楊朱), 묵적(墨翟)의 말이 용납되지 못하였으니 맹자(孟子)의 세운 바가 어떠한가.
한 절개와 한 행실이 뛰어난 선비에 이르러서도 또한 반드시 세운 바가 있은 뒤에야 그 사업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니, 세움을 귀하게 여김이 이와 같다. 그러므로 바위에도 또한 서 있는 것을 취한 것이다.
지금 우리들이 입암의 위에 나아가 놀고 쉬니, 각자 스스로 설 것을 생각하여 시종 우리 바위를 저버리지 않는다면 매우 다행일 것이다. 그러나 그 세우는 요점은 또한 대 이름의 ‘계구’에 지나지 않으니, 대 위의 계구는 몇 길의 벼랑 위에 높이 임해 있는 못 때문이다.
대 아래의 못은 눈으로 볼 수 있고 그 깊음을 헤아릴 수 있으나 우리 인간의 한 몸 곁에는 몇 길의 형체 없는 못이 있고 몇 길의 가없는 구덩이가 있음을 그 누가 알겠는가. 한 생각을 잘못하면 귀신의 지역으로 말[馬]을 달리고, 한 마디 말을 가볍게 내면 풍파가 당장 일며 한 발걸음을 함부로 걸으면 그물과 덫에 빠진다. 그 위험함이 이와 같으니, 계구하는 것을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계구라는 것은 공경함을 이르니, 반드시 고요할 때에도 공경하고 동(動)할 때에도 공경하고 말할 때에도 공경하고 행할 때에도 공경하여야 한다. 이렇게 한 뒤에야 나의 서 있는 바가 나의 인의예지의 덕이 되고 효제충신의 도가 될 것이니, 어디를 간들 나의 선 바를 잃겠는가. 이렇게 한 뒤에야 나의 선 바가 또한 천지에 참여될 수 있는 것이다.
바라건대 친구들이 조만간에 만약 우란재(友蘭齋)를 완성한다면 서로 더불어 이 이치를 강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뒤에야 입암을 대하고 스물여덟 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대함에 부끄러움이 없어 모두가 자신의 성정(性情)을 쾌적하게 할 것이다.”
마을은 바로 영양(永陽)의 경내(境內)인데 군(郡)과 몇백 리가 떨어져 있고 사방의 성읍(城邑)이 모두 본군(本郡)과 같이 머니, 참으로 궁벽한 곳이다. 내 이미 시내와 산의 명칭을 말하니, 네 친구가 인하여 그 말을 기록해 줄 것을 청하므로 마침내 혹자와 문답한 내용과 우리들이 서로 말한 것을 붙이는 바이다.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쓰다.

[주D-001]물을 좋아하는 지혜로운 자 : 공자는 일찍이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인(仁)한 자는 산을 좋아한다.[智者樂水 仁者樂山]” 하였으므로 이 말을 인용한 것이다. 《論語 雍也》는 이 곳을 버리고 저 곳으로 가니, 바위가 물가에 서 있지 않은 것은 또 궁벽하다.
[주D-002]공자(孔子)의 산을 만드는 비유 : 《서경(書經)》 여오(旅獒)에 “아홉 길의 산을 만드는 데 흙 한 삼태기가 부족하여 목표한 것을 달성하지 못한다.” 하였는데, 공자는 이것을 빌려 “산을 만들 적에 비록 흙 한 삼태기가 부족하여 산을 이루지 못하고 중지하는 것도 내가 중지하는 것이며, 비록 평지에 한 삼태기의 흙을 쏟아 부어 전진하더라도 내가 전진하는 것이다.” 하였다. 《論語 子罕》
[주D-003]상산(商山)의 사호(四皓) : 상산은 중국 섬서성(陝西省) 상현(商縣) 동쪽에 있는 산이며, 사호는 진(秦) 나라 말기 상산에 은둔해 있던 네 노인으로 동원공(東園公), 하황공(夏黃公), 기리계(綺里季), 녹리선생(甪里先生)을 이른다.
[주D-004]자지가(紫芝歌) : 악부(樂府)에 실려 있는 거문고 곡조의 가사. 자지는 먹으면 장생불사한다는 영지(靈芝)를 가리킨다. 상산(商山)에 은둔해 있던 네 노인들은 한 고조(漢高祖)가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이 자지가를 지어 불렀다 한다. 《古今樂錄》
[주D-005]도정절(陶靖節)의……나간다는 글 : 정절은 진(晉) 나라 말기 은사(隱士)인 도연명의 시호임. 이 내용은 그가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보인다.
[주D-006]신야(莘野)에서……비유하였으니, : 신야는 유신(有莘)이라는 나라의 들이고 농사짓던 노인은 이윤(伊尹)을 가리키며, 남양(南陽)은 하남성(河南省)에 있는 지명이고 와룡(臥龍)은 누워 있는 용이라는 뜻으로 제갈량(諸葛亮)을 가리킨다. 관중(管仲)은 춘추 시대 제(齊) 나라의 명재상이고 악의(樂毅)는 전국 시대 연(燕) 나라의 명재상이다. 《맹자(孟子)》 만장 상(萬章上)에 “이윤이 유신의 들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요(堯), 순(舜)의 도를 즐거워하였다.” 하였고, 《삼국지(三國志)》 촉지(蜀志) 제갈량전(諸葛亮傳)에 “제갈량이 남양의 융중(隆中)에 은거하여 스스로 관중과 악의에 비했다.” 하였다.
[주D-007]엄자릉(嚴子陵) : 자릉은 엄광(嚴光)의 자(字). 동한(東漢)의 고사(高士)로 일찍이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와 동문수학하였다. 광무제가 등극한 뒤에 그를 물색하여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제수하였으나 끝내 거절하고 부춘산(富春山)에 들어가 농사를 짓고 낚시질하며 일생을 마쳤다. 《後漢書 卷八十三 嚴光傳》
[주D-008]한(漢) 나라의 구정(九鼎) : 구정은 구주(九州)의 쇠를 모아 만들었다는 솥으로, 국가의 위신을 상징하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주D-009]세이(洗耳)라 하였으니……해서이다. : 세이는 추한 말을 들었다 하여 귀를 씻는 것이며, 허유(許由)와 소부(巢父)는 요(堯) 임금 때의 은사(隱士)이다. 요 임금이 허유를 초빙하여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려 하자 허유는 이에 응하지 않고 추한 말을 들었다 하여 영수(穎水)에서 귀를 씻었다. 소부는 소를 끌고 가다가 이 영수에서 물을 먹이려 하였으나 이것을 보고는 오염된 물이라 하여 소를 끌고 상류로 가서 물을 먹였다 한다. 《高士傳》
[주D-010]사흉(四凶) : 요(堯) 임금 때의 네 흉악한 사람으로 공공(共工), 환도(驩兜), 삼묘(三苗), 곤(鯀)이다. 공공은 관명이고 삼묘는 삼묘의 군주인데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순(舜) 임금은 섭정을 하면서 공공을 유주(幽州)로 귀양보내고 환도를 숭산(崇山)으로 추방하고 삼묘를 삼위(三危)에 가두고 곤을 우산(羽山)에 가두었다. 《書經 舜典》 《孟子 萬章上》

여헌선생문집 제9권_

기(記)_

부지암 정사(不知巖精舍)에 대한 기문

 

무릇 물건이 진실로 있으면 반드시 알려지게 된다. 형체가 있으면 눈으로 보는 자가 알고, 소리가 있으면 귀로 듣는 자가 알고, 냄새가 있으면 코로 맡는 자가 알고, 맛이 있으면 입으로 맛보는 자가 알고, 성(性)과 정(情)이 있으면 마음으로 생각하는 자가 안다. 이미 형체와 소리, 냄새와 맛, 성(性)과 정(情)이 있으면 어찌 귀와 눈, 입과 냄새 또는 마음과 생각이 미치는 바에 도피할 수 있겠는가.
아는 것은 있는 데에서 연유하고 알지 못하는 것은 없는 데에서 연유한다. 그러므로 있으면 알고 없으면 알지 못하는 것이 떳떳한 이치이니, 혹 있는데도 알지 못하여 본래 없는 것과 다름이 없다면 이는 바로 알지 못하는 자의 잘못이다. 그러나 있는 것은 그대로 있는 것이니, 사람이 알지 못한다 하여 어찌 감손(減損)이 되겠는가.


정사(精舍)는 부지암(不知巖)의 동남쪽 벼랑 위에 있으므로 인하여 이름하였다. 형체가 있는 것 중에 가장 확고하고 드러난 것이 바위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이 바위를 부지(不知)라고 이름한 까닭을 나는 과연 알지 못한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 바위가 본래 언덕의 흙 속에 감추어져 있어서 강물이 충돌하여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흙이 다 없어져 바위가 나오니, 이 언덕에 흙이 있을 때에 사람들이 바위가 있음을 알지 못했다 하여 이름한 것이다.”라고 하며, 혹자는 말하기를, “이 바위가 만약 강물이 크게 범람하여 침몰되면 파도 가운데에 감추어져 있다가 홍수가 지나가 물이 줄어든 뒤에야 바위가 비로소 나오니, 이는 물이 크게 불어났을 때에 사람들이 바위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 하여 이름한 것이다.”라고 한다. 이는 모두 바위가 숨고 드러남을 가지고 이름한 것이다.
그리고 혹자는 말하기를, “바위가 깊은 못 위와 끊긴 산기슭 아래에 있어 사방(四方)이 모두 보기 좋은 경치이고 사시(四時)가 모두 취미가 뛰어나다. 강에 배를 띄워도 절경(絶景)이고 바위에 자리를 깔고 앉아도 절경이어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 오는 낮과 밝은 달이 비추는 밤이 모두 좋은 경치이다. 강가의 위아래에 무릇 경치가 좋은 지역으로 이름난 곳이 여러 군데가 있지만 오직 이 곳이 가장 뛰어난 절경이다. 그리하여 이 바위와 비견할 만한 곳이 드문데, 심상한 가운데에 매몰되어 있고 물고기와 산새들의 마당으로 버려져 있어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기지 않으므로 일을 만들기 좋아하는 자들이 그 실제를 가지고 이름한 것이다.”라고 한다.


다만 정사(精舍)를 설치한 것은 비단 바위만을 취한 것이 아니다. 큰 강과 여러 산악, 먼 숲과 가까운 숲, 흰 모래와 아름다운 풀, 연기와 구름, 나는 새와 물 속의 고기가 있어 위아래와 좌우에 취할 만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도 굳이 홀로 바위에서 뜻을 취하여 그 이름을 따라 명칭한 것은 어째서인가? 이는 진실로 ‘부지(不知)’의 뜻이 풍부하고 원대하여 우리들이 이름을 취한 이유가 있으니, 한번 ‘부지’를 가지고 자신에게 있어서와 남에게 있어서의 경우를 나누어 말하겠다.
자신에게 있어서 알지 못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으니, 마땅히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 중에 좋은 것이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 중에 나쁜 것이다.


무엇을 마땅히 알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이르는가? 기이한 재주를 부리고 지나치게 공교로운 일과 사사로움을 경영하고 이익을 도모하는 방법으로 무릇 세상에 잡되고 자질구레한 일이 이것이니,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어찌 알지 못하는 것 중의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무엇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라고 이르는가? 천지(天地), 인물(人物)의 성(性)과 삼강(三綱), 오상(五常)의 도(道)로 크게는 천하가 다 싣지 못하고 작게는 천하가 깨뜨릴 수 없는 것이 이것이니,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귀와 눈, 입과 코를 지니고 지각(知覺)을 갖춘 인간이 될 수 있겠는가. 우리들은 자신에게 있는 두 가지의 알지 못하는 것 중에 마땅히 선택을 잘 하여야 할 것이다.


남에게 있어서 알지 못하는 것 역시 두 가지가 있으니, 내가 알아줌을 받을 만한 실재가 없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 남이 아니요 알아줌을 받을 만함이 없는 것이 나이니, 내가 남에게 어찌 괴이하게 여기겠는가. 그리고 내 이미 알아줌을 받을 만한 실재가 있는데도 사람들이 마침내 알지 못한다면 알지 못하는 것이 남에게 있다. 내 스스로 간직하고 있는 실재는 남이 알지 못한다 해서 상실되는 것이 아니니, 사람들이 알지 못함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무엇을 알아줌을 받을 만한 실재라고 이르는가? 곧 천지(天地), 인물(人物)의 성(性)을 연구하고 삼강(三綱), 오상(五常)의 도(道)를 다하여, 천하가 실을 수 없도록 커서 밖이 없고 천하가 깨뜨릴 수 없도록 작아서 안이 없는 것이 이것이다. 이 도(道)를 내 몸에 행하고 이 덕(德)을 내 마음에 간직한다면 사람의 능사(能事)가 이에 다하니, 과연 남에게 알아줌을 받는다면 이 도와 이 덕의 공용(功用)이 온 세상에 입혀져서 천지가 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잘 길러지는 효과를 이루지 못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이 혹 알아주지 못하면 이 도를 한 몸에 간직하고 이 덕을 한 마음에 즐거워하여 또한 천지와 만물의 사이에 부끄러움이 없고 홀로 서 있는 경지에 호연(浩然)할 것이다.


우리들은 남에게 있는 두 가지의 알지 못함에 있어 한결같이 자신에게 있는 것을 스스로 힘쓸 뿐이니, 이와 같이 한다면 알지 못함을 가지고 학문에 나아가고 세상에 대처하는 도로 삼는 것이 가(可)할 것이다.


학문에 나아가는 방도는, 안다고 자처하는 자는 알지 못하는 데로 돌아가고, 알지 못한다고 자처하는 자는 아는 데로 돌아간다. 안다고 자처하면 하나를 알면 하나를 아는 것을 만족하게 여겨 다시는 둘 이상의 분수(分數)를 알려고 하지 않고, 둘을 알면 둘을 아는 것을 만족하게 여겨 다시는 셋 이상의 분수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설령 여덟을 알고 아홉을 안다 하더라도 이에 그치고 다시는 아홉과 열의 분수를 알 수 없을 것이니, 하물며 여덟과 아홉의 분수에 미치지 못하고 스스로 만족해하는 자에 있어서랴. 이는 작은 것을 이루는 데 안주하여 한 귀퉁이만을 지키는 자이니, 알지 못하는 데로 돌아감이 당연하다.


만약 알지 못한다고 자처하면 항상 의리를 무궁하게 여긴다. 그리하여 앎이 이미 넓더라도 스스로 넓게 여기지 않고 더욱 넓히려고 노력하며, 앎이 이미 높더라도 스스로 높게 여기지 않고 더욱 높이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는 대순(大舜)이 묻기를 좋아하고 천근(淺近)한 말을 살피기를 좋아하며, 안자(顔子)가 능함으로써 능하지 못한 이에게 묻고 많음으로써 적은 이에게 물은 것이다. 그 앎의 큼을 진실로 이루 측량할 수 있겠는가.


세상에 대처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알려지기를 바라는 자는 끝내 알려지지 못하고, 알아주지 않음에 숨는 자는 끝내 반드시 알려지고 만다. 알려지기를 바랄 경우 잠시라도 작은 선(善)이 있으면 남에게 알려지기를 바라고, 겨우 한 재주에 능하면 세상에 자랑하려고 힘쓰는바, 알려지기를 바라고 자랑하기를 힘쓰는 사사로운 마음이 곧 천리(天理)의 올바름을 해친다. 그리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작은 선과 자신이 능한 한 가지 재주도 단지 남을 기쁘게 하고 세상에 팔아먹는 자료가 될 뿐이니, 어찌 다시 길게 전진할 희망이 있겠는가. 이는 재주를 자랑하고 선을 드러내며 이름을 구하고 명예를 바라는 자는 일시에는 비록 반짝하나 날로 없어지는 이유이다.


만약 알려지지 않음에 숨는 자는 학문이 천하에서 제일 높더라도 어리석음으로 지키고, 도덕이 한 세상에 으뜸이더라도 겸손함으로써 자처하여, 이름을 이루려 하지 않고 세상에 따라 바뀌지 아니하여 세상에 은둔하여도 근심하지 않고 남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여도 근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천하 사람들이 모두 인(仁)을 허여(許與)하여 백세(百世)에 사표(師表)가 되니, 이는 비단옷을 입고 그 위에 홑옷을 더하며 빛을 감추고 광채를 가리우는 자는 은은하면서도 날로 드러나는 이유이다.


이 바위가 처음에는 언덕의 흙 속에 묻혀 있어 사람들이 알지 못하다가 마침내 흙이 다 없어진 뒤에 드러났고, 중간에는 강물이 불어났을 때에 매몰되어 사람들이 알지 못하다가 마침내 강물이 줄어든 뒤에 나타났고, 부지(不知)라고 이름함에 이르러서는 또 버려지고 매몰된 가운데에 감추어져 알지 못하다가 지금 또 정사(精舍)를 건립함으로 말미암아 크게 드러났으니, 처음에 알려지지 못한 것은 진실로 일찍이 끝내 알려지지 않음이 없고, 부지(不知)라고 이름한 것은 또한 일찍이 실제로 알려지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떳떳한 진리가 아니겠는가.
바위는 무지(無知)한 돌이 어지럽게 쌓인 것이다. 강의 물결 속에 숨었다 나타났다 한 것이 몇만 년일 터인데 물건의 선악(善惡)과 성쇠(盛衰), 세상의 치란(治亂)과 흥망(興亡)에 관여한 바가 없었으니, 그렇다면 바위에게 어찌 마땅히 알아야 하고 마땅히 알지 않아야 할 일을 책하겠는가. 우뚝 솟아 있고 이리저리 벌여 있어 만고(萬古)에 응정(凝定)되어 비록 지각(知覺)과 언어(言語)와 운동(運動)이 없으나, 구름과 비를 일으켜 만물을 윤택하게 하고 물고기와 자라를 감추어 사람을 이롭게 하니, 이는 바위의 능사(能事)로서 그 공용(功用)을 크게 한 것이다. 사람들이 반드시 이것을 알지 못할 것이나 바위 또한 어찌 알아주고 알아주지 못함을 알겠는가.


이는 혈기(血氣)와 지각이 있는 것들은 정(情)이 조급히 동(動)하기 쉽고 마음이 자랑하거나 빛내려는 데에 있어 그 본성을 잃는 경우가 많고, 안정되어 조용히 버티고 있는 것들은 기이한 공을 나타내면서도 스스로 자랑하거나 과시하지 아니하여 그 본성을 온전히 하는 것이니, 정사(精舍)의 명칭을 취한 것이 어찌 이유가 없겠는가.


이제 정사가 이미 이루어졌고 이름을 이미 게시하였다. 이 당(堂)에 거처하면서 이 당의 이름을 돌아보고 부지(不知)의 뜻을 다하여, 자신에게 있어서는 마땅히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알려고 하지 아니하여 알지 못함을 한하지 말고,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을 알려고 하여 알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는다.
그리고 남에게 있어서는 항상 자신에게 있는 실재를 돌이켜 도가 과연 내 몸에 극진하지 못하고 덕이 과연 내 마음에 지극하지 못하면 마땅히 생각하기를,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은 나의 도와 나의 덕이 극진하지 못하고 지극하지 못함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없는 것을 있게 하려고 노력하고 작은 것을 크게 하려고 노력하며, 낮은 것을 높게 하려고 노력하고 얕은 것을 깊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리하여 이미 있고 이미 크고 이미 높고 이미 깊은 경지에 이르렀는데도 사람들이 또 알아주지 않으면 내 마땅히 노여워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고 저상(沮喪)하지 않고 중지하지 않을 뿐이다.


성인(聖人)은 천지(天地)와 덕이 합하여 천지가 알아주고, 일월(日月)과 밝음이 합하여 일월이 알아주고, 사시(四時)와 차례가 합하여 사시가 알아주고, 귀신(鬼神)과 길흉이 합하여 귀신이 알아준다. 나를 알아주는 자가 천지이고 일월이고 사시이고 귀신이니, 한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것이 과연 성인에게 감손(減損)이 될 수 있겠는가. 공자(孔子)와 맹자(孟子)는 당시에 알아줌을 받지 못하였으나 만세(萬世)에 알아줌을 받고 있으니, 그 알아줌의 크고 또 장구함이 어찌 공자와 맹자보다 더한 분이 있겠는가. 우리들은 이것을 잘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또 공부를 하는 요점으로 말하면 모름지기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자신만이 홀로 아는 곳으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대학(大學)》에 “악(惡)을 싫어하기를 악취(惡臭)를 미워하듯이 하고, 선(善)을 좋아하기를 아름다운 여색(女色)을 좋아하듯이 한다.[如惡惡臭 如好好色]”는 것과 《중용(中庸)》에 “숨은 곳보다 더 드러남이 없고 작은 일보다 더 나타남이 없다.[莫見乎隱 莫顯乎微]”는 것이 모두 신독(愼獨)을 맺는 한 말씀이다.


무릇 옛날 성인과 현인(賢人), 군자(君子)들이 공부한 것은 진실로 일찍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곳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이는 진실로 우리들이 함께 삼가야 할 바이다. 이것을 삼가 그치지 않는다면 학문에 나아감은 알지 못한다고 자처하나 끝내는 알지 못하는 바가 없음에 이르고, 세상에 대처함은 항상 알지 못하는 것으로 스스로 감추나 끝내 반드시 알려짐을 스스로 가리울 수 없을 것이니, 노여워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는 지극한 공부에 이르는 것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당(堂) 아래에 흐르는 강물은 바로 낙동강(洛東江)의 하류인데 이수(伊水)와 낙수(洛水)는 송(宋) 나라 제현(諸賢)들이 일어나신 지역이다. 강의 이름이 우연히 그와 같으니, 정맥(正脈)이 흐르는 물줄기를 생각하여 수수(洙水)와 사수(泗水)의 연원(淵源)을 거슬러 올라가며, 서쪽은 금오산(金烏山)인데 바로 길야은(吉冶隱 야은은 길재(吉再)의 호)이 은둔하신 곳으로 깨끗한 풍도(風度)와 높은 절개가 곧바로 수양산(首陽山)의 고죽(孤竹)과 서로 비추니, 이에 우러러보면 참으로 늠름함이 있다.
당을 지은 것은 대명(大明) 만력(萬曆) 경술년(1610,광해군2)이었다.

[주D-001]고죽(孤竹) : 은(殷) 나라 말기 중국의 열하(熱河) 일대에 있었던 나라.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바로 이 나라 왕자였는데, 은 나라가 망하고 주(周) 나라가 천자국이 되자, 주 나라 녹을 먹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수양산(首陽山)에 은둔하였으므로 곧 이들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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