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헌선생문집 제3권_
소(疏)_
진언소(進言疏)기사년 9월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은 금년 여름에 거듭 은혜로운 명령을 받았사온데, 스스로 심히 노쇠하고 기력이 쇠진하였으므로 명령에 달려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병을 아뢰는 즈음에 초정(椒井)에 목욕하겠다는 뜻을 감히 아뢰었사온데, 성상(聖上)의 비지(批旨)에 목욕을 한 뒤에 다시 올라오라는 분부가 계셨습니다.
신은 지극히 노쇠함을 헤아리지 않고 과연 가서 한번 목욕을 하였사오나 기력이 허약하고 살갗이 다 말라서 작은 효험도 보지 못하고 더욱 기력만 감소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몸을 싣고 거처하던 소굴로 돌아왔으나 병을 털고 일어날 계책이 없습니다. 다만 받든 명령을 마음속에 명심하였기에 다시 몸을 추스르고 조리하여 다소라도 몸을 기동할 수 있으면 모름지기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 어둔 정신을 가다듬고 쇠약한 몸을 부축하고 대궐 아래에 나아가서 쌓인 은혜를 한번 사례하고 오랜 소원을 다소 펴리라고 스스로 계획하였사온데, 두 달을 조리하였으나 소생할 기약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곤궁한 형세가 이에 이르렀사오니, 어쩔 수가 없어서 쓰러져 엎드려 울적해 할 뿐이옵니다.
설령 신이 대궐에 나아가더라도 지체(肢體)가 마비되고 절뚝거려 대궐의 뜰을 걷기 어렵고, 몰골이 추루하여 대열에 낄 수가 없으며, 귀먹음이 이미 심하여 성상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치아(齒牙)가 모두 빠져서 말해도 발음이 제대로 안 되며, 정신이 이미 나가서 말이 잘못됨이 많습니다. 이 한 흙덩어리와 썩은 나무등걸과 같은 몸을 가지고 장차 천위(天威)의 아래에서 어떻게 인간의 일을 하겠습니까. 신은 백 번 생각하고 천 번 계산하여도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몸은 이미 나아갈 수 없으나 정은 스스로 억제할 수 없으므로 감히 노망한 말에 의탁하여 작은 정성을 바칠까 도모하오니,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한번 굽어 살피소서.
우리 국가는 비록 궁벽하게 바다의 동쪽에 있으나 풍토의 아름다움과 산천의 빼어남이 원래 먼 변방의 딴 나라에 비할 것이 아니오며, 중간에 기자(箕子)의 홍범 구주(洪範九疇)의 교화를 입어서 풍속이 예의(禮義)를 지키고 겸양하며 돈후하고 올바른 풍습이 있으므로 소중화(小中華)라 칭해지고 혹은 동쪽의 노(魯) 나라라 칭해져 온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중국에서는 일찍이 오랑캐로 여겨 가벼이 대우하지 않았으며, 이웃 나라들은 감히 흠모하고 숭상하며 정성을 바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또 아조(我朝 조선조)에 들어온 이래로는 여러 선왕들이 대대로 계승하여 덕을 쌓고 교화를 밝히며 번병(藩屛)의 예(禮)를 지키고 직책을 다하여, 황조(皇朝 명 나라)에게 중한 대접을 받고 오랑캐와 왜적들에게 공경을 받아온 것이 또 전대(前代)에 미칠 바가 아닙니다.
불행히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온 나라가 탕진(蕩盡)되어 섬오랑캐들이 비로소 우리를 능멸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고,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양서(兩西) 지방이 패하자 손을 놓고 적과 싸우지 못하여 오랑캐들이 또 우리를 업신여기는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두 번 패전을 겪은 뒤로는 자립할 가망이 없어서 기미(覊縻)의 계책을 따라 오직 권도(權道)와 구차한 일을 일삼자, 명(明) 나라에서도 차츰 불만스럽게 여기고 소중히 여기지 않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우리를 우대하여 용납하고 드러내놓고 견책하지는 않으나 그들이 예우하는 것을 가만히 살펴보면 예전만 못하니, 이 어찌 본국의 수치가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때와 형세를 당하여 우리 나라의 군신(君臣)과 상하(上下)가 어찌 태연자약한 체 깊이 근심하고 멀리 생각하며 위태롭게 여기고 두려워하여 진작하고 분발할 줄을 알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만약 이러한 때에 스스로 자립할 방도와 영구한 계책을 세우지 않고, 오직 서쪽의 적이 이미 물러가 숨었고 남쪽의 요망한 기운이 이미 안정되었으며, 중국에서 때로 견책함이 없다 하여, 내외에 경보(警報)가 없고 우선 당장에 다소 편안함만을 요행으로 여겨서 모두 마음을 놓아 태평성대처럼 여기고 하루하루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면서 각려(刻勵)하는 바가 없다면, 비단 측량하지 못한 화가 혹 형체가 없는 데에서 싹틀 뿐만 아니라, 오랑캐들의 끝없는 욕심과 왜구의 측량할 수 없는 계략이 남쪽과 북쪽에서 이빨을 갈고 입술을 물면서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지 어찌 알았겠습니까.
더구나 우리 나라는 외지고 궁벽한 곳에 나라를 세우고 있으면서도 윤리강상(倫理綱常)이 문란하지 않고 예악(禮樂)과 문명(文明)이 볼 만한 것은 모두 중국이 자식처럼 보살펴 준 덕택입니다. 전후에 걸쳐 병력을 출동하여 위급하고 혼란한 때에 구원해 주어서 오늘날 옛 나라를 새롭게 하였으니, 그 은혜의 높고 깊음을 과연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만약 우리의 나약한 형세를 보고는 가벼이 여기고 도외시하려는 뜻을 품어 은혜를 내려주는 예전(禮典)을 줄여서 옛날처럼 자식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우리 나라의 불행함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이것을 바꾸어 진작하고 분발하는 기틀은 바로 오늘날에 달려 있으며 이것을 바꾸어 진작하고 분발하는 방법은 또한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도리를 다하고 자립함에 달려 있을 뿐이옵니다.
이른바 ‘도리를 다한다’는 것은 또한 마음을 세우기를 성실하게 하고 몸을 닦기를 공경으로 하며, 일을 하기를 바름으로 하고 정사를 내기를 공정하게 함에 불과할 뿐입니다. 마음을 세우기를 성실하게 하면 마음의 이치를 얻게 되고, 몸을 닦기를 공경으로 하면 몸의 이치를 얻게 되고, 일을 하기를 바름으로 하면 일의 이치를 얻게 되고, 정사를 내기를 공정하게 하면 정사의 이치를 얻게 되니, 자신에게 있는 이치를 얻지 않음이 없으면 밖에 대응하는 것이 순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이로써 하늘과 땅을 섬기면 하늘과 땅이 그 덕을 돕고, 이로써 신하와 백성을 통솔하면 신하와 백성이 그 교화에 복종하고, 이로써 상국(上國)을 섬기면 상국이 그 의(義)를 신임하고, 이로써 이웃 나라를 대하면 이웃 나라가 그 정성에 감화되니, 이것이 국가가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큰 도이며 영구히 할 수 있는 지극한 계책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큰 도를 세우고 지극한 계책을 세우는 것은 어찌 심상한 뜻과 생각으로 해낼 수 있겠습니까. 나라가 망할까 망할까 우려하여 단단한 뽕나무에 매어 놓듯이 나라를 튼튼하게 하는 것은 인군이 천하의 악을 멈추게 하는 덕이며, 군주만을 생각하고 자기 몸을 잊으며 국가만을 생각하고 자기 집을 잊으며 공(公)만을 생각하고 사(私)를 잊는 것은 신하가 의리를 다하는 도입니다.
위태로울까 우려하는 것은 그 지위를 편안하게 하는 것이요, 망할까 우려하는 것은 그 보존함을 간직하는 것이요, 혼란할까 우려하는 것은 그 다스림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편안하여도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보존하여도 망함을 잊지 않고 다스려져도 혼란함을 잊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몸이 편해지고 국가가 보전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편안하다 하여 위태로움을 잊으면 그 편안함을 잃게 되고, 보존한다 하여 망함을 잊으면 그 보존함을 잃게 되고, 다스려진다 하여 혼란함을 잊으면 그 다스려짐을 잃게 되니, 더구나 편안하지 않은데 편안하게 여기고 겨우 보존하면서 보존한다고 여기고 다스려지지 않는데 다스려진다고 여겨서 옛 것을 고치고 새 것을 도모하지 않는다면 위태로움과 혼란과 멸망을 면할 자가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군주를 원수(元首 머리)라 칭하고 신하를 이목(耳目)과 고굉(股肱)이라 칭하니, 신하가 이미 군주의 이목과 고굉이 되었으면 진실로 자기 집안을 생각하고 자기 몸을 돌보아 자신의 사사로움을 사사로이 할 겨를이 없습니다. 만약 신하가 자기 몸을 잊지 못한다면 반드시 군주를 섬김에 마음을 다하지 못할 것이요, 자기 집을 잊지 못한다면 반드시 나라를 보필함에 마음을 다하지 못할 것이니, 자기 몸을 잊지 못하고 자기 집을 잊지 못하여 마음이 사(私)에 매여 있으면 군주를 섬기고 나라를 보필하는 것은 한갓 껍데기일 뿐이요 지위만을 지키며 무릅쓰고 있을 뿐이니, 반드시 혈성(血誠)에서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이와 같고서 내수외양(內修外攘)의 사업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이 전하에게 바라는 것은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혼란함을 잊지 않고 망함을 잊지 않는 것이며,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에게 바라는 것은 자기 몸을 잊고 자기 집을 잊어서 사사로움을 잊는 것입니다.
인군은 이 세 가지 잊지 않는 것이 있은 뒤에야 군주의 도리를 다할 수 있으니, 인군이 이 세 가지를 잊지 않는다면 마음에 어찌 성실하지 않음이 있으며, 몸에 어찌 공정하지 않음이 있으며, 일에 어찌 바르지 않음이 있으며, 정사에 어찌 공경하지 않음이 있겠습니까. 신하는 이 세 가지 잊는 것이 있은 뒤에야 신하의 도리를 다할 수 있으니, 신하가 이 세 가지를 잊는다면 군주를 사랑함에 어찌 불충할 수 있으며, 나라를 보필함에 어찌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겠으며, 공무를 수행함에 어찌 진력하지 않음이 있겠습니까.
성(聖)스럽고 밝으신 전하(殿下)께서 어찌 인군된 도리와 훌륭한 제왕들이 마음에 간직하고 덕으로 여기신 것을 모르겠으며, 조정에 가득한 여러 현자(賢者)들 또한 어찌 신하된 도리와 훌륭한 공경(公卿)들이 자임(自任)한 바와 일삼은 바를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국가의 형세가 날로 쇠퇴해지고 세상의 도가 날로 나빠짐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신은 전하께서 세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을 혹 잊음이 있으시며, 여러 신하들이 세 가지 잊어야 할 것을 혹 잊지 않음이 있는가 염려스럽습니다.
전하께서 만일 먼저 진실한 덕을 다하여 항상 전복(顚覆)됨과 위태로움과 혼란과 멸망이 당장 앞에 닥쳐올 듯이 여기신다면 아랫사람들이 그 누가 마음을 하나로 하여 자기 몸을 생각하고 자기 집안을 생각하는 사사로운 마음을 잊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한 뒤에야 근본이 서서 도가 생기며, 도가 다하여 사업이 융성해질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서 뽕나무에 매어놓듯이 나라가 튼튼하기를 바라며 반석(磐石)과 같이 편안하기를 바란다면 이는 또 술 취하는 것을 싫어하면서 억지로 술을 마시며 뒷걸음질을 치면서 앞으로 나아가기를 도모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땅히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지 않고 마땅히 잊어야 할 것을 잊는 것은 모름지기 모두 올바른 성정(性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신이 이미 성정을 언급하였사오니, 자사(子思)의 가르침으로 감히 거듭 말씀드릴까 하옵니다.
《중용(中庸)》에 중(中)과 화(和)를 지극히 하는 것으로 천지가 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잘 길러지는 방도로 삼았습니다. 중(中)이라는 것은 기뻐하고 노여워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이 아직 발하지 않은 것이니, 이 마음의 체(體)가 확립되어 허(虛)하고 고요하고 광명(光明)하여 편벽되거나 치우침이 없음을 이르는바, 곧 천하의 대본(大本)입니다. 그리고 화(和)라는 것은 기뻐하고 노여워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이 이미 발한 것이니, 이 마음의 용(用)이 유행되어서 각기 그 절도에 맞아 어그러지거나 잘못됨이 없음을 이르는바, 곧 천하의 달도(達道)입니다. 그렇다면 중과 화는 우리 인간의 마음의 성(性)·정(情)에 불과할 뿐인데, 이것을 지극히 한 효험은 천지가 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잘 길러짐에 이릅니다. 그렇다면 또한 이것을 지극히 하지 않은 응험(應驗)은 천지가 자리를 잡지 못하고 만물이 잘 길러지지 못함에 이를 것입니다.
자사(子思)는 비록 기뻐하고 노여워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네 가지를 들었을 뿐이나 칠정(七情)의 사랑하고 미워하고 하고자 함이 모두 이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또 비록 다만 지극한 공효로 천지가 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잘 길러짐을 들었으나 그 사이에 여러 공적(功績)이 이루어지고 백 가지 응험이 순히 나오는 것을 모두 알 수 있습니다. 한 마음의 성(性)·정(情)에 나아가 모든 사람의 덕행과 사업이며 득실(得失)과 성패(成敗)의 변함과 길흉(吉凶)과 화복(禍福)의 응험이 여기에서 말미암지 않음이 없으니, 그렇다면 보통 사람들도 이 마음의 성·정을 삼가지 않을 수가 없는데, 하물며 인군의 성·정은 그 관계됨이 어떠하다 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모름지기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며 드러나지 않고 나타나지 않은 곳에 항상 존양(存養)과 성찰(省察)의 공부를 쏟으시어 정(情)이 아직 발하기 전에는 반드시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생각하기를 “이 마음이 편벽되거나 치우침이 있지 않은가?” 하여 하나라도 편벽되거나 치우침이 있으면 공경하여 마음을 곧게 하시며, 정(情)이 막 나오려 할 적에는 반드시 잘 살피고 삼가서 생각하기를 “이 정이 과(過)하거나 불급(不及)함이 있지 않은가?” 하여 하나라도 혹 과하거나 불급함이 있으면 의(義)로써 절제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반드시 때때로 본성(本性)을 돌아보아 보존하고, 생각할 때마다 더욱 살펴서 천하의 대본(大本)을 세우고 천하의 달도(達道)를 내신다면 아무리 넓은 천하라도 손바닥 위에 놓고 운용할 수가 있으니, 하물며 작은 한 나라이겠습니까.
천지가 편안하게 자리잡고 만물이 잘 길러지게 함은 비단 천하를 소유한 자에게만 이러한 사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에는 한 나라의 천지와 만물이 있고 집안에는 한 집안의 천지와 만물이 있으며, 몸에 이르러서도 또한 한 몸의 천지와 만물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른바 ‘성인(聖人)의 능사(能事)와 지극한 공효(功效)’라는 것은 실로 모두 사람마다 할 수 있는 분수 안의 일인데, 다만 그 중에도 특별히 큰 사업은 인군의 사업보다 더 큰 것이 없을 뿐입니다.
기자(箕子)의 홍범 구주(洪範九疇)에 이른바 탕탕(蕩蕩)하고 평평(平平)하며 정직(正直)한 방도가 모두 여기에 있으며, 황제(皇帝)의 극(極)을 세우고 구주(九疇)를 운용함도 바로 이 이치입니다. 이 이치를 체행함을 도(道)라 이르니, 도는 진실로 잠시도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어지럽고 경황없는 사이와 급박하고 곤궁한 가운데에 있더라도 이 이치 밖에는 따로 하늘을 돌리고 사람을 격려하여 전화위복(轉禍爲福)할 수 있는 방도가 있지 않습니다.
신이 아뢰는 것은 진실로 인간 세상을 초월한 기이한 계책이 아니오라, 실로 전하께서 경연(經筵)에 있는 유신(儒臣)들과 일찍이 강론하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가 다스려지고 혼란하며 흥하고 멸망하는 중요한 관건은 실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정교(政敎)와 풍화(風化)의 근원도 이 마음을 버리면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활함을 꺼리지 않고 공허한 말씀을 무릅쓰고 아뢰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자(聖慈)께서는 굽어 살피소서.
신은 감격하여 우러러보고 두려워하며 진동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와 삼가 죽을 죄를 무릅쓰고 아뢰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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