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헌선생문집 제7권_
잡저(雜著)_
여헌설(旅軒說)
사람이 헌호(軒號 당호)를 가진 것은 중고(中古) 시대로부터 시작되었다. 상고(上古) 시대 사람들은 이름이 없고 단지 목소리가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기만 하여 말도 분간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이름이 있을 수 있겠는가.
상상컨대 그 때에는 인문(人文)이 어둡고 인륜(人倫)이 드러나지 못하여 사람마다 각자 성명(性命)을 간직하고 스스로 살아가서 다만 서로 소리를 듣고 응답하며 얼굴을 보고 서로 식별할 뿐이었으니, 어찌 이름이 필요했겠는가. 비록 이름이 없더라도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풍기(風氣)가 차츰 개발되어 질박함이 점점 흩어지자, 인문이 밝아지지 않을 수 없고 인륜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성인(聖人)이 첫번째로 나와 발휘(發揮)해서 물건에 따라 글자를 만들고 사람에 따라 이름을 지은 뒤에야 가르침을 베풀 수 있고 일을 행할 수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이름이 나오게 된 이유이다.
그러나 사람마다 각기 한 이름을 가지고 있어도 자연 통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또 어찌 딴 이름을 덧붙일 필요가 있었겠는가.
세상이 또 더욱 내려와서는 존비(尊卑)의 등급을 밝히지 않을 수 없고 장유(長幼)의 차례를 밝히지 않을 수 없었으니, 도(道)가 한갓 그 질(質)만을 숭상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미 각기 이름이 있고 또 그 이름의 뜻을 따라 바꾸어 불렀으니, 이른바 자(字)라는 것이 이에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귀천에 관계 없이 이름이 있으면 반드시 또 그 자가 있었으니, 옛날에 비하면 자를 칭하는 것은 불필요한 군더더기인 것 같으나 이 자(字)가 없으면 존비와 장유의 사이에 혐의되고 함부로 하는 바가 없지 않을 것이다.
이는 성인(聖人)이 고금(古今)의 마땅함을 참작하여 사람에게 자를 지어주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이며, 공자(孔子)께서 《춘추(春秋)》를 기록할 때에도 반드시 이름을 쓰기도 하고 자를 쓰기도 하여 여탈(與奪)의 뜻을 부치신 것이니, 자가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름이 있고 자가 있을 뿐이었는데도 충분히 모든 것을 다하였는데, 또 내려와 후세가 되어서는 세상의 도가 밝지 못하고 다스려지는 날이 항상 적었다. 그리하여 천하에 혹 기이한 재주를 품고 진리를 간직하고 있는 선비가 만약 세상에 나와 뜻을 펴지 못하면 물러가서 산림(山林)과 강호(江湖)의 사이에 흩어져 사는 자들이 있었으니, 이들은 세상 사람들의 귀에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고 속인(俗人)들의 입에 자신의 자를 올리고 싶지 않으면 이름과 자의 밖으로 스스로 초탈하고 경쟁이 없는 땅에서 호(號)를 구하여, 혹은 사는 집의 이름을 따르고 혹은 거처하는 땅과 강호(江湖)와 지택(池澤), 계산(溪山)과 곡동(谷洞) 등 마음에 좋아하고 몸이 부쳐 있는 모든 물건 중에 취하는 것을 따라 호를 붙였으니, 이것을 총칭하여 헌호(軒號)라 하였다.
후생(後生)과 소자(小子)로서 그 분을 존모(尊慕)하는 자들은 감히 그 분의 이름과 자를 입으로 부르지 못하고 그 분의 헌호를 평상시 칭호로 삼는 경우가 많았으니, 헌호가 나온 것은 이 때문이며 헌호가 성행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송(宋) 나라의 여러 선생들도 각기 칭호가 없는 분이 없었으니, 이 어찌 일을 만들기 좋아하는 자의 행위와 같겠는가. 진실로 빛을 감추고 자취를 숨겨 조물주(造物主)와 똑같은 무리가 되어서 사람과 다투지 않고 물건에게 시기를 받지 않아 한 몸의 생애를 한 호에 부친 것이니, 옛사람의 뜻에 맞음이 있는 것이다.
금인(金印)을 차고 자주색 관복(官服)을 걸쳐서 이름이 묘당(廟堂)에 드러나며 살아서 공후(公侯)를 칭하고 죽어서 아름다운 시호(諡號)를 얻은 자들까지도 모두 헌호가 있었으며, 임천(林泉)과 호산(湖山)의 이름을 따서 세상을 속이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은 나는 옳은지 모르겠다.
나는 천지 사이에 하나의 좀벌레여서 공인(工人)도 아니요 상인(商人)도 아니요 농군도 아니요 선비도 아니다. 비록 일찍이 문자학(文字學)에 종사하여 실로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에 독실하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떳떳한 분수를 지키지 않고 거짓 이름을 도둑질하여 밝은 세상을 속이고 한 관직을 받았으니, 비록 자신의 분수가 아닌 줄을 알아 지금은 물러나 산야에서 편안히 쉬고 있으나 몸이 직접 밭을 갈지 않으면서 배불리 먹고 따뜻이 입고 살아가니, 나의 평생을 돌아보면 좀벌레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일찍이 서로 종유(從遊)하던 친구가 혹 헌호를 지을 것을 권하면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헌호를 나와 같은 자가 또한 어찌 간직할 수 있겠는가. 헌호는 그 사람이 충분히 호를 가질 만하여야 갖는 것이다. 자신이 자신을 돌아볼 적에 과연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있어 자부할 수 있으며, 남이 나를 볼 적에 또한 모두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있어 볼 만한 것이 있다고 말한 뒤에야 내 스스로 호를 갖는 것이 부끄럽지 않고 남들 또한 호를 부름에 욕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스스로 돌아보고 남들이 볼 적에 그 내면에 아무것도 없으면서 녹록(碌碌)한 몸으로 훌륭한 사람들의 칭호를 본받고 용렬한 지아비로서 고사(高士)들의 호를 무릅쓴다면, 비단 자신이 스스로 부끄러울 뿐만 아니라 남에게 부끄러움을 어쩔 것이며, 비단 남에게 부끄러울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강호(江湖)와 지택(池澤)을 더럽히고 우리의 계산(溪山)과 임천(林泉)을 욕되게 해서 조물주에게 죄를 얻음을 어찌하겠는가.
나는 실로 스스로 돌아보건대 아무것도 없고 남들이 보기에도 볼 만한 것이 없는 자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위치하고 삼재(三才)에 참여되었으나 이미 사람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사람의 형체를 그대로 실천하지 못하였으니, 사람이란 이름을 간직하고 있는 것도 오히려 위로 하늘에 부끄럽고 아래로 사람들에게 부끄럽거든 하물며 스스로 헌호를 가한단 말인가.
자식이 되어 효행(孝行)이 없는데 아버지께서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 준 것도 이미 스스로 부끄러우며, 붕우가 되어 신의(信義)의 도리가 없는데 벗들이 아름다운 자(字)를 붙여 준 것도 이미 부끄럽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비록 부끄럽고 무안하더라도 바꿀 수가 없으니, 마땅히 나라 사람들이 지목하기를 장현광(張顯光)이라 하고 친구들이 부르기를 덕회(德晦)라 하면 만족하다. 또 어찌 감히 딴 호를 갖겠는가.”
나는 이미 이러한 말로 거절하고 인하여 헌호를 갖지 않은 지가 지금 40여 년이 되었다. 그런데 이제 비로소 여헌(旅軒)이라고 호하였으니, 내 스스로 생각하건대 이 호를 나에게 가함은 참람함이 되지 않고 또 그 실제에 합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헌(軒)은 어느 곳에 있는가? 일정한 곳이 없다. 어찌하여 여(旅)라고 하였는가? 나는 항상 나그네[旅]가 되었기 때문이니, 나그네란 남의 손님이 됨을 이른다. 내가 《주역(周易)》을 보니, 여괘(旅卦)는 이(離)가 위에 있고 간(艮)이 아래에 있는바, 간(艮)인 산(山)은 멈추어서 옮기지 않고 이(離)인 화(火)는 가고 머물지 않아 떠나가고 머물지 않는 상(象)이 된다. 그러므로 괘의 이름을 여(旅)라 한 것이니, 만약 일정한 거처가 있어 밖에 돌아다니지 않는다면 어찌 나그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옥산(玉山) 사람인데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사방에 돌아다니며 배웠으니, 집안에 있지 못함은 어렸을 때부터 그러하였다. 그리고 지난 임진년(1592,선조25) 여름에 옥산은 왜적(倭賊)이 곧바로 올라오는 길목이 되었으며, 또 나의 집은 길가에 있었으므로 도망하여 달아남이 남들보다 가장 먼저였고 집이 병화(兵火)에 불타서 다만 빈터만 남아 있다. 그리하여 나는 왜구가 물러간 뒤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친척에 의탁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붕우에게 의지하여 처자를 이끌고 이곳으로 옮겨 가고 저곳으로 옮겨가, 혹 한 해에도 서너 번씩 옮겨 다녀 마침내 동서남북의 정처 없는 사람이 되었으니, 나그네가 됨이 그 누가 나보다 더한 자가 있겠는가. 이와 같다면 여헌이라고 호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혹자는 말하기를, “헌(軒)은 반드시 일정한 곳이 있은 뒤에야 인하여 호를 삼는 법인데, 이제 자네는 나그네이면서 헌이라고 호하였으니, 자네의 헌이 과연 일정한 곳이 있는가? 더구나 헌은 바로 주인이 가지고 있는 것인데, 자네가 나그네를 자신의 호로 삼는다면 자신의 소유가 아닌 것을 취함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이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헌이 일정한 곳이 없고 또 자신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에 여(旅)라고 헌을 이름한 것이니, 헌에 여라고 이름한 것은 명칭이 진실로 실제에 합당한 것이다. 헌이 일정한 곳이 없어 가는 곳에 따라 헌이 있다면 내가 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일정한 것이며, 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일정하나 한 헌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면 헌이 주인의 물건이 됨이 그대로인 것이다.
없으면서도 무(無)에 빠지지 않고 있으면서도 유(有)에 얽매이지 않으니, 이는 내가 항상 나그네가 되고 나그네이면서도 반드시 헌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헌이라고 칭호한 것을 어찌 자신의 소유가 아니면서 칭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혹자는 말하기를, “그대가 여헌이라고 호를 지은 것은 내 이미 이에 대한 설명을 들었으나, 우주 사이에는 오직 태극(太極)만이 일정한 방소(方所)가 없고 일정한 형체가 없으며, 기타 만물로 말하면 반드시 형체가 있고 반드시 방소가 있는 것이다. 이제 그대의 헌을 이미 헌이라고 이름한다면 어찌 말할 만한 형체가 없고 또 어찌 지적할 만한 방소가 없으며, 또 어찌 편안하고 즐거워할 만한 실제가 없겠는가.” 하였다.
이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의 헌은 이미 유(有)와 무(無)의 사이에 있으니, 어찌 일정한 형체가 있겠는가. 그러나 편안하고 즐거워할 만한 실제는 어느 때이든 그렇지 않음이 없고 어느 곳이든 그렇지 않음이 없다. 내 한번 이것을 말하겠다.
내가 있을 때에 혹은 동쪽 이웃에 있기도 하고 혹은 서쪽 이웃에 있기도 하며, 혹은 산의 남쪽에 있기도 하고 혹은 물의 북쪽에 있기도 하며, 혹은 천리(千里)의 밖에 있고 혹은 10보(步)의 안에 있으며, 혹은 호수와 바닷가에 있고 혹은 시내 두둑에 있으며, 혹은 깊은 산골짝에 있고 혹은 큰 들의 머리에 있어서, 굳이 검소한 것만을 취하지 않고 비록 높은 집과 넓은 집이라도 혹 편안히 여기며, 굳이 높고 넓은 것만을 취하지 않고 비록 초가집과 조그마한 방이라도 또한 즐거워하여 꽃나무와 대나무가 뜰에 가득하되 번거롭게 여기지 않고, 전원에 잡초가 무성하되 더럽게 여기지않는다.
또 비단 당우(堂宇)를 헌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시원한 그늘과 푸른 나무 아래에 이르러도 또한 나의 헌이며 흰 구름과 푸른 산 위도 또한 나의 헌이며 꽃다운 풀과 시냇가 또한 나의 헌이며 시원한 바람과 산 둔덕 또한 나의 헌이다.
나는 혹 하루 동안 머무는 헌이 있고 혹 며칠 동안 머무는 헌이 있고 혹 한 달을 머무는 헌이 있고 혹 한 철을 머무는 헌이 있고 혹 1년을 머무는 헌이 있고 혹 몇 년을 지내는 헌이 있다. 그리하여 헌이 있는 곳이 일정한 한 지역이 아니나 합하여 한 몸의 헌이 되고, 헌에 머무는 것이 일정한 한때가 아니나 쌓여서 일생의 헌이 되니, 내가 헌으로 여기는 곳은 일반인의 헌과는 다르다.
무릇 물건은 방소가 있으면 구역이 한번 정해져서 동서남북에 두루 통할 수가 없고, 형체가 있으면 규모가 한번 정해져서 대소(大小)와 허실(虛實)을 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일정한 방소가 있는 것은 그 형체가 반드시 좁으나 일정한 방소가 없는 것은 그 넓음이 무궁하며, 일정한 형체가 있는 것은 그 쓰임이 반드시 막히나 일정한 형체가 없는 것은 그 통함이 막힘이 없으니, 이는 나의 헌이 일정한 방소가 없는 방소에 처하여 천하의 명승(名勝)을 겸하고 형체가 없는 형체를 세워 사방의 경치를 구비한 것이니, 헌이 크지 않으며 풍부하지 않은가.
헌 가운데에 있는 물건으로 말하면 성현(聖賢)의 책 몇 권과 지(紙)·필(筆)·연(硯)·묵(墨)의 문방사우(文房四友)와 3척(尺)의 장검(長劍) 한 자루와 새벽에 머리를 빗는 빗 하나가 있으며, 헌 위에서 대하는 사람으로 말하면 혹 고도(古道)를 좋아하고 학문을 즐기는 선비와 혹 경학(經學)을 통달하고 사학(史學)을 공부하는 사람과 혹 풍월(風月)을 읊는 호걸과 혹 촌늙은이와 늙은 농부의 무리이다.
때로는 취향이 다른 손님과 낯모르는 사람이 오더라도 또한 서로 용납하며, 용렬하고 미천한 사람에 있어서는 더욱 가엾게 여겨 잘 대접한다. 헌에 종유(從遊)하는 사람이 적으면 두서너 명의 동자(童子)가 혹 좌우에서 심부름을 하고 혹 한가로운 때에 글자를 배워 일찍이 서로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여옹(旅翁)이 하는 일은 무슨 일인가? 동지(同志)를 보면 도의(道義)를 논하고 후생(後生)을 보면 학문(學問)을 권하며, 문인(文人)을 만나면 문장을 논하고 시인(詩人)을 만나면 시를 말하며, 야부(野夫)가 오면 누에치고 삼[麻]을 가꾸는 것을 말하고 어부(漁夫)가 이르면 고기잡고 자라잡는 것을 말하며, 혹 술을 권하면 반드시 취하도록 마시고 사양하지 않으며, 혹 촌로(村老)를 만나면 바둑을 두며 소일한다.
그리고 손님이 없으면 책을 펼치고 글을 보되 천고(千古)의 성현(聖賢)의 마음을 보는 듯하며, 이미 피곤하면 팔을 굽히고 한가로이 졸되 태고(太古) 시대의 덕이 지극한 세상에서 노는 듯하며, 이미 자다가 잠을 깨어 문을 열고 바라보면 천지가 아득하고 하늘에 나는 솔개와 물 속에 뛰노는 물고기가 생동감이 넘친다. 흥을 타고 산보(散步)하여 꽃을 찾고 버들을 따르면 마음속이 성대(盛大)하여 만물과 함께 봄을 느낀다.
그리고 흥이 다하여 돌아오면 내 헌(軒)은 그대로 고요한데 의관(衣冠)을 정돈하고 엄숙히 눈을 감고 있노라면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의 묘리가 과연 일상 생활하는 사이에 떠나지 않아 유형(有形)과 무형(無形)이 일찍이 두 가지 이치가 아니다. 선천(先天)의 역리(易理)와 후천(後天)의 역리(易理)를 마음과 눈의 사이에 묵묵히 생각하여 옛 성인과 후세의 성인이 본래 똑같이 한 도(道)이다. 이와 같이 날을 마치고 이와 같이 해를 마치는 것이 이것이 바로 이 여옹(旅翁)의 일이다. 그렇다면 내 헌의 즐거움이 지극하다고 이를 만할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그대의 즐거움은 참으로 즐거울 것이다. 그러나 나그네가 된 즐거움은 아무리 즐거워도 집에 있으면서 가난함만 못하다는 것이 바로 옛말이다. 그런데 그대는 홀로 나그네의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즐거움으로 삼으니, 인정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체(四體)를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고 오곡(五穀)을 구분하지 못하면서 가만히 앉아서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으며, 아내는 길쌈을 하지 않으면서 추위를 면하고 종들은 김을 매지 않으면서도 배를 채우니, 이는 또 수고롭지 않으면서 누리는 것을 달게 여기고 일없이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길 줄 모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이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는 과연 수고롭지 않으면서 누리고 일하지 않으면서 먹으며 사방을 집으로 삼고 나그네처럼 떠도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으니, 혹자의 비난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천지의 사이에는 사물의 이치를 다 따지기 어렵고 세상의 변을 다 말하기 어렵다. 그리하여 나무는 개똥나무와 상수리나무가 있고 흙은 모래와 자갈이 있는 것이다. 개똥나무와 상수리나무를 어찌 목재로 쓸 수 있겠는가마는 부질없이 우로(雨露)의 자양(滋養)을 받고, 모래와 자갈이 흙에 무슨 쓰임이 있겠는가마는 부질없이 한가롭게 버려진 흙이 되니, 그렇다면 물건은 진실로 쓸모가 없으면서 조물주(造物主)의 공력(功力)을 허비함이 있는 것이다. 사람에 있어서인들 홀로 나와 같은 자가 없겠는가.
또 이 병화(兵火)의 즈음에 비록 몸을 의뢰할 만한 훌륭한 계책이 있는 자라도 살 곳을 잃음을 면치 못하는데 하물며 졸렬한 나에 있어서랴. 마땅히 괴롭게 여겨야 할 터인데 괴롭게 여기지 않고 즐거운 것이 아닌데도 홀로 즐겁게 여기는 것으로 말하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인지상정(人之常情)에 위배되어서가 아니다. 내가 말하는 즐거움이라는 것은 나그네를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요 다만 나그네로 있으면서도 그 즐거움을 잃지 않을 뿐이다.
군자(君子)는 만나는 환경에 따라 편안하니, 어느 환경을 만난들 편안하지 않겠는가. 대인(大人)은 곤궁함에 처하여서도 형통하니, 어느 곤궁함인들 형통하지 않겠는가. 인간의 우환과 곤궁과 고통은 모두 밖으로부터 이르는 것이니, 다만 내가 여기에 대처하는 것이 그 도리를 잃지 않을 뿐이다.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 어찌 나의 마음을 얽매이게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자신에게 있는 이치가 부족함이 없고 결함이 없어 때와 장소에 따라 스스로 만족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우환에 한탄하고 곤궁과 고통에 서글퍼하여 항상 나그네가 된 어려움에 마음을 써서 언제나 나그네를 면하는 방도에 힘쓴다면, 도리를 잊고 의(義)를 잃음에 이르지 않는 자가 적을 것이다.
오직 우환과 곤궁과 고통의 밖으로 초연한 자는 가는 곳마다 자득(自得)하지 않음이 없다. 동쪽에 부쳐 있든 서쪽에 부쳐 있든 나는 항상 내가 되고, 저쪽으로 옮겨 가든 이쪽으로 옮겨 가든 나의 땅 아님이 없으니, 밖에서 그 살 곳을 잃었다 하여 내면마저 그 지킴을 잃어서는 안 된다.
또 천하가 나의 땅 아닌 곳이 없으며, 땅에 붙어 사는 사람들이 모두 나의 형제이다. 남자(男子)는 천하를 집으로 삼고 만물을 몸으로 삼으니, 세상이 만약 평화로우면 자기 마을을 마을로 삼고 자기 고을을 고을로 삼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나, 변란의 때를 만나면 진(秦) 나라 사람이 월(越) 나라 지방을 자기의 살 곳으로 삼고 촉(蜀) 땅의 나그네가 제(齊) 나라 선비와 벗삼는 것이 또한 이 도리인 것이다.
평상적인 데에 처하든 변란에 처하든 모두 이 도리대로 한다면 이곳에 머물든 저곳에 머물든 어디를 간들 불가(不可)하겠는가. 더구나 우리 동방(東方)은 작은 한 나라이다. 지금 내가 나그네로 살고 있는 곳은 붕우와 친족 사이에 벗어나지 않았고 다만 옥산(玉山)이 아닐 뿐이니, 어찌 나그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나그네라고 말한 것은 그 뜻을 취함이 원대(遠大)하다. 내 이미 내가 나그네가 된 이유를 다 말하였으니, 다시 나그네의 뜻을 더욱 미루어 넓히겠다. 내가 나그네가 된 것은 한 작은 나그네에 불과하다. 만약 천지를 가지고 관찰한다면 천지 사이에 붙어 사는 모든 물건이 어느 것인들 나그네가 아니겠는가.
천지는 만물의 역려(逆旅 여관)이다. 그 사이에 태어난 것들이 갑자기 왔다가 갑자기 죽어가서 가는 자가 지나가고 오는 자가 계속하여 일찍이 한 사람도 천지와 더불어 종시(終始)를 함께하는 자가 없으니, 그렇다면 나그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천지에 사는 자도 나그네라고 이른다면 그 도리를 다할 것을 생각하여 일생동안 천지간에 부끄럽지 않게 하는 것을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람이 인간에 나그네가 되어 한 세상을 지날 때에 도리를 지키고 의를 잃지 않아서 안으로는 자신의 마음에 부끄럽지 않고 밖으로는 또한 여관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한다면 내 자신에 있어 마음에 만족할 수 있으며 남들도 내가 나그네 노릇을 잘 한다고 칭찬할 것이다.
만약 도리를 지키지 못하여 구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하고 또 의를 편안히 여기지 못하여 마땅히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행해서 혹 남의 신을 훔치기도 하고 혹 남의 황금을 절취하는 일이 있다면 여관 사람들이 추하게 여기는 바가 되지 않겠는가. 비단 여관 사람들이 추하게 여기는 바가 될 뿐만 아니라, 만약 심한 경우에는 혹 옥사(獄事)를 불러들이고 형벌을 받아 그 몸을 망치고야 마는 자가 있을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고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천지에 나그네로 있는 것도 또한 그러하니, 물건은 굳이 말할 것이 없으며 가장 영특한 것이 우리 인간이다. 형체를 받아 인간이 되어 그 존귀함이 비할 데 없으니, 반드시 우리가 인간이 된 소이(所以)의 이치를 알고 내가 마땅히 행하여야 할 도리를 밝혀서 어려서 배우고 장성하여 행하며 늙어서 보존하고 죽어서 일생을 잘 마친다면 그 형체를 잘 실천하여 사람이 된 도리를 잃지 않았다고 이를 것이다. 이렇게 되면 당시 사람들은 모두 우러러 높이고 후세에서는 칭찬하고 사모할 것이니, 어찌 대장부로서 천지에 부끄럽지 않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혹시라도 사람이 된 도리를 잃고 사람에게 있는 윤리를 어지럽혀 집에 있으면서 효도하지 않고 공경하지 않으며, 시골에 있으면서 공손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으며, 나라에 있으면서 충성하지 않고 도를 행하지 않아서, 살아서는 억조 만백성에게 해독을 끼치고 죽어서는 만세(萬世)에 악취를 풍긴다면 나그네가 되어 몸을 삼가지 않아 옥사를 불러들이고 몸을 망친 자와 똑같지 않겠는가.
아! 인간의 일생은 잠시에 불과하고 백 년은 얼마 안 되는 기간인데, 자신의 정신을 소모하고 성명(性命)을 잃으면서 이익을 좇고 물욕을 탐하여 못하는 짓이 없는 자들은 자기 스스로는 심지(心志)를 다하고 욕망(慾望)을 마음껏 채워 일생에 대한 계책을 잘 세웠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하늘을 어기고 이치를 거역하여 밝게는 사람의 노여움을 사고 그윽하게는 귀신의 벌을 받을 것이니, 과연 잘했다고 이를 수 있겠는가.
나는 나의 헌에 있으면서 이러한 사람들을 보고는 마음에 안타깝게 여긴다. 나로 말하면 내 헌에 앉고 누워 있으면서 붕우들의 옷을 입고 붕우들의 밥을 먹으며 수석(水石)이 좋은 사이에서 뜻을 즐기고 풍월(風月)의 가운데에 정(情)을 풀어 놓아 다행히 내 정신(精神)이 스스로 완전하고 성정(性情)이 망가지지 않으니, 그대는 비록 나를 비웃으나 나는 즐거운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그대가 이제 하늘과 땅 사이의 사람과 물건을 들어 모두 나그네라고 말하니, 그렇다면 그 누가 주인이란 말인가? 자네는 그 몸을 스스로 외롭게 여기면서 미루어 그 유(類)를 넓히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만물이 모두 나그네라면 조물주가 바로 주인이란 말인가?” 하였다.
이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작게는 사람에 붙여 있고 크게는 천지에 붙여 있는데 그 이치가 똑같다. 그러므로 그 말이 같은 것이다. 또 천지도 항상 한 천지가 될 수 없다. 만물의 입장에서 본다면 하늘과 땅은 비록 그 시종(始終)을 볼 수 없으나 도의 입장에서 본다면 천지도 사라지고 불어나는 운수가 있는 것이다.
일원(一元)이 있은 뒤에는 지금의 천지는 곧 지나간 것이 되고 다음의 천지가 다시 올 것이니, 천지 역시 도(道) 가운데의 한 나그네가 될 뿐이다. 조물주가 어찌 일정한 주인이 될 수 있겠는가. 다만 밖에서 주인을 찾는다면 끝내 주장함이 있어 주인이 될 것이 없을 것이다. 오직 물건이 각자 스스로 돌이키면 스스로 주인이 될 도리가 있는데 사람들이 제 스스로 살피지 못할 뿐이다.
가장 영특한 우리 인간을 들어 말한다면 나의 형기(形氣)는 객(客)이고 이 마음의 이(理)는 곧 주인이며, 밖으로부터 이르는 화복(禍福)과 영욕(榮辱)은 객이고 내 마음에 지키는 것은 주인이다.
이치는 가는 곳마다 있지 않은 데가 없으므로 몸이 가는 곳마다 편안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니, 화복과 영욕이 나에게 어쩌겠는가. 저 혹시라도 이치가 형기에 제재를 받아, 형기가 한 몸의 주인이 되고 밖으로부터 오는 화복과 영욕이 내 마음의 지키는 바를 동요시켜 내 마음이 스스로 천명(天命)을 따르지 못한다면, 이는 한 몸이 주인을 잃어 육신(肉身)이 화복과 영욕의 객관(客館)이 되는 것이니, 가련하지 않겠는가.
이제 나는 이 한 몸은 비록 살 곳을 잃었으나 내 마음을 주관하는 것은 이치이다. 여헌의 즐거움이 모두 이 이치에서 근본하여 생기니, 이것이 이른바 ‘사람의 편안한 집’이라는 것이다. 나의 편안한 집이 있은 뒤에야 나의 여헌을 즐길 수 있으니, 만약 편안한 집의 즐거움이 없다면 여헌이 어찌 내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겠는가.”
혹자는 말하기를, “나그네가 된 도를 통하여 사람이 된 도를 알았으니, 오늘 들은 말은 참으로 훌륭한 말씀이다. 그렇다면 여헌의 여옹은 바로 편안한 집의 주인일 것이다.” 하였다.
이에 나는 또 사양하기를, “내가 이러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요, 다만 그 이치가 그러함을 말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여헌의 뜻은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였다.
만력(萬曆) 정유년(1597,선조30) 여름에 여헌은 청부(靑鳧)의 여헌에 있으면서 이 글을 쓰다.
[주D-001]일원(一元) : 12만 9천 6백 년을 이르는바, 소옹(邵雍)의 《황극경세(皇極經世)》에 근거한 것으로 일원이 지나면 천지가 다시 개벽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