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헌선생문집 제8권_

잡저(雜著)_

 

와유당설(臥遊堂說)

 

당(堂)의 주인은 곧 박군 진경 명술(朴君晉慶明述)이다. 주인은 몸에 재랑(齋郞 능재(陵齋)의 참봉(參奉)을 가리킴)의 임무를 띠고 있었는데 임소(任所)가 강도(江都)에 있으므로 날짜를 잡아 출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내가 와서 받들어 작별하고 그대로 머물며 당(堂)에서 병을 요양하였는데, 손자 아이들 몇 명이 곁에 있으면서 약을 공급하였다. 내가, “너희들이 당호(堂號)의 뜻을 아는가? 와유(臥遊)라고 이름한 것이 무슨 뜻인가?” 하고 물었으나 아이들 또한 자세히 말하지 못하였다. 내 이것을 가지고 생각해 보니, 나 역시 병석(病席)에 누워 있는바, 병석에 누워 있는 자가 어찌 놀 수 있겠는가. 노는 것은 비록 멀고 가까움의 차이가 있으나 반드시 모름지기 몸을 움직이고 발을 들어 옮겨놓은 뒤에야 갈 수 있는 것이니, 이 어찌 병석에 누운 자가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누워서 논다[臥遊]’는 말은 누구에게서 나왔는지 알 수 없으나 주인이 취하여 당호로 삼은 것은 그 뜻이 또한 반드시 있을 것이다.
우리가 천지(天地)의 사이에 남자(男子)로 태어났으니, 이미 다행한 일이다. 어찌 한 귀퉁이의 여염(閭閻) 사이에 동면(冬眠)하는 벌레처럼 숨어 있고 박[匏]처럼 매달려 있어 한바탕 취(醉)하여 살고 꿈 속에 죽어서 새와 짐승과 무리를 함께하고 초목과 함께 썩어갈 수 있겠는가.
반드시 문견(聞見)을 넓히고 마음과 가슴을 광대(廣大)하게 해서 나의 마음과 정신을 얻어 상하 사방(上下四方)의 우(宇)와 고왕 금래(古往今來)의 주(宙)에 이르지 않음이 없어 이른바 방외(方外), 물외(物外), 형외(形外), 상외(象外)란 것이 나의 마음 속 구역이 아님이 없게 하여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한 뒤에야 큰 놀이와 큰 구경이 되어서 남자로서의 포부와 사업을 저버리지 않음이 될 것이다.
아! 이 어찌 구애되는 사람과 세속의 선비와 함께 이 놀이와 이 구경을 논할 수 있겠는가. 지극한 사람이 아니면 그 누가 이 놀이와 이 구경을 다할 수 있겠는가. 그 다음을 말한다면 온 하늘의 아래와 사해(四海)의 안에 명산 대천(名山大川)과 큰 들[巨野]과 긴 들[長郊]이 무릇 몇천 개이며, 삼황(三皇), 오제(五帝), 삼왕(三王) 등 역대(歷代)의 경도(京都)의 고적(古蹟)이 모두 몇 곳이며, 달인(達人)과 석사(碩士), 명유(名儒)와 선철(先哲)이 아름다움을 전파하고 남긴 자취가 모두 몇 곳이나 되는가? 이 모두 남자가 한번 놀고 한번 구경함을 결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주인이 반드시 일찍이 여기에 뜻을 두었으나 늙고 또 병들어 이룰 수 없음을 알았다. 이에 마침내 와유(臥遊)라고 당호를 지었으니, 그 놀이가 어찌 보통 사람과 일반 친구들이 알 수 있는 것이겠는가.
해가 저물고 손님이 돌아가면 사립문을 거듭 닫는다. 곁에서 모시는 여러 아들들이 책을 잡고 각기 자기의 처소로 물러가면 주인은 남은 술기운이 아직 깨지 않아 베개 위에 졸고 있는 것이 바로 와유(臥遊)하는 때일 것이다.
내가 생각하건대, 천리(千里)를 순식간에 정신으로 구경하고 만고(萬古)를 삽시간에 눈으로 보는 것이 그 놀이가 아니겠는가. 무릇 사모할 만하고 숭상할 만하고 감동할 만하고 경계할 만한 것이 모두 생각을 일으키고 감회를 느낄 만한 자리일 것이니, 그 놀이가 또한 한결같이 허황한 데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주인이 이 당에 누웠을 때에 반드시 밖에 있는 먼 경치를 바라보는 것을 놀이로 여겼을 터인데, 지금은 멀리 강도(江都)의 적막한 재실(齋室)에 달려가 있으니, 이 당에 누워 놀지 못함을 자리 위에서 생각하지 않겠는가. 당 앞에 보이는 물건들을 나는 손자 아이들로 하여금 한 폭의 비단에 기록하게 하니, 멀리 생각하건대 이러한 각종의 여러 화훼(花卉)들은 주인의 마음과 눈에 삼삼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이에 애오라지 손자 아이들로 하여금 붓을 잡게 하고 불러 써서 후일에 반성하는 자료로 삼는 바이다.
숭정(崇禎) 갑술년(1634,인조12) 계하(季夏) 초순(初旬)에 여옹(旅翁)은 불러 쓰다.

 

여헌선생문집 제8권_

잡저(雜著)_

 

김 상사(金上舍)의 자설(字說)

 

상사(上舍)의 처음 자(字)는 자미(子美)이니, 그 이름인 휴(烋)를 아름답게 꾸민 것이다.
나는 생각하건대, 휴(烋)는 진실로 아름다움이 성대한 것이니, 자미라고 자를 지은 것은 과연 이름에 걸맞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여기기만 하고, 아름다움에 처하고 아름다움을 더하는 뜻을 다하지 않는다면 아름다운 것이 이것으로 그칠까 두려우니, 이는 길게 나아가는 도(道)가 아니다.
나는 짐작하건대, 선군자(先君子 상대방의 선친을 가리킴)께서 명명(命名)하신 뜻이 깊고 원대하니, 어찌 천근(淺近)한 데에 있겠는가. 우리 인간의 사업(事業)은 진실로 참되고 또 큰 것이 있으니, 사랑하는 어버이의 바람이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이른바 ‘길게 나아가는 도’라는 것은 비록 아름답더라도 스스로 아름답게 여기지 아니하여, 또 모름지기 스스로 감추고 스스로 힘쓰는 뜻이 있은 뒤에야 그 아름다움이 전(前)의 아름다움에 그치지 아니하여 반드시 극진한 아름다움에 이르는 것이다.
공자(孔子) 문하(門下)의 안자(顔子)는 이미 아성(亞聖)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자기 몸에 소유함이 어떠하며 마음 속에 충실한 것이 어떠하였겠는가. 그런데도 오히려 “있어도 없는 것처럼 여기고 충실하여도 빈 것처럼 여겼다.” 하였으니, 이는 이미 소유한 것을 소유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이미 충실한 것을 충실한 것으로 여기지 않아서 바야흐로 그만두고자 하여도 그만둘 수 없어 이미 그 재주를 다해서 반드시 성인(聖人)과 하늘의 경지에 이른 뒤에야 그만둔 것이다. 이 어찌 후학(後學)들이 숭앙(崇仰)할 바가 아니겠는가.
김 상사(金上舍)가 이에 자(字)를 고쳐줄 것을 청하므로 나는 겸가(謙可)로 대답하였더니, 김 상사는 또다시 그에 대한 해설을 청하였다. 김 상사는 내가 진실로 가장 애지중지(愛之重之)하는 사람이기에 마침내 그를 위해 위와 같이 서술하고 인하여 다시 다음과 같이 권면(勸勉)하는 바이다.

“김 상사는 일찍이 역학(易學)에 종사하였다. 겸괘(謙卦)의 괘효(卦爻)와 단상(彖象)에 그 내용이 갖추어져 있으니, 김 상사는 이 겸괘에 나아가 점(占)을 쳐서 새로 얻은 듯이 여겨 반복하고 깊이 생각하여 묵묵히 알고 체험한다면 아름다움에 대처하는 도(道)와 유익함을 받는 경사가 어찌 측량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장차 군자(君子)가 마침이 있는 형통함을 다하여 선친(先親)께서 명명하신 뜻을 능히 계승할 것이니, 이 한 겸(謙) 자에 스스로 허다한 길한 덕(德)의 근본이 있는 것이다. 김 상사는 마땅히 스스로 인식할 것이니, 내 굳이 거듭 그 말을 번거롭게 할 것이 있겠는가.”


 

[주D-001]군자(君子)가……형통함 : 《주역(周易)》 겸괘(謙卦)의 괘사(卦辭)에 “겸(謙)은 형통하니 군자가 마침이 있다.[謙亨 君子有終]” 하였는바, 이것은 군자가 끝을 잘 마쳐 유종의 미를 거둠을 말한 것이다.

여헌선생문집 제7권_

잡저(雜著)_

 

피대설(皮帒說)

 

나는 젊어서 제대로 학문을 하지 못하고 늦게야 비로소 깨닫고는 맨 처음 삼재(三才)의 이치를 연구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한 작은 책자를 만든 다음, 천지(天地)와 고금(古今), 인물(人物)과 사변(事變)의 제목을 배열하여 쓰고 명칭하기를 ‘우주요괄(宇宙要括)’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이 한 몸이 가는 곳에는 반드시 이 책을 휴대하고 그 제목을 보아 차례로 생각하고 연구하였는데, 혹 노상(路上)에 있어 항상 손에 두기가 어려우므로 반드시 이것을 차고 다니는 도구가 있어야 하였다.
이에 피대(皮帒 가죽 주머니)를 만들었는데, 피대를 만드는 제도는 먼저 얇은 판자를 사용하되 길이는 포백척(布帛尺)으로 한 자 남짓하고 넓이는 7, 8촌(寸)쯤 되는 것으로 등의 줄기를 삼은 다음 송아지 가죽으로 그 속을 붙여 펴고 등으로부터 싸서 배에 이르러 합하여 꿰맸으며, 그 밑을 막고 주둥이를 비워 물건을 받아 넣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또 한 작은 소가죽 조각을 잘라 한쪽을 둥글게 하고 그 밑을 등의 판자에 붙여서 배를 향해 늘어뜨려 주둥이를 막았으며, 주둥이 가까운 곳에 두 개의 단추를 만들고 겉가죽에 두 구멍을 내어서 단추를 받아 단단히 매어 두는 자료로 삼았다.
대(帒)가 이루어지니, 첩책(帖冊)을 차고 다니는 것이 이로부터 도구가 있게 되었다. 첩책이 이미 들어가고도 다소 남은 공간이 있어 딴 물건을 용납할 만하므로 딴 책 한두 권과 소첩(梳帖 빗을 넣어 두는 첩), 연갑(硯匣 벼루를 넣어 두는 갑)과 모자(帽子) 등의 물건을 또 따라서 넣어 두었다.
나는 언제나 외출하게 되면 반드시 이 피대를 가지고 다녔는데 그후 1, 2년이 지나 임진왜란이 일어나니, 나는 이때 상중(喪中)에 있으면서 도망하여 피난하였다. 그리하여 몸에 따르는 모든 집물(什物)들을 하나도 가지고 간 것이 없었으나, 유독 이 피대만은 마침내 한 동자(童子)로 하여금 지고 가게 하였으니, 여기에 넣은 것은 바로 첩책과 《역경(易經)》 2권, 《역회통(易會通)》 당본(唐本) 1권, 소첩, 연갑이었다.
산골짝에 도망하여 숨고 동서(東西)로 유리(流離)할 때에도 이 피대는 일찍이 나의 몸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누우면 베개가 되고 밥을 먹으면 밥상이 되고 책을 읽으면 책상이 되고 다닐 때에는 몸소 지고 다녔는바, 이렇게 한 것이 임진년(1592,선조25)으로부터 갑오년(1594,선조27)에 이르렀다.
난리가 다소 수그러들자, 나는 혹 사람들로부터 잔편(殘篇) 몇 권을 얻었고 혹 여러 경전(經傳)을 손수 써서 점점 쌓여 여러 권이 되니, 이 피대로는 다 넣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포대(布帒 삼베 주머니)를 사용하여 그 속을 넓히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이 뒤로는 피대가 점점 내 몸에서 가까워지지 못하였다.
이 피대는 다만 첩책과 소첩 등의 물건을 넣어 가지고 다닐 뿐이요 딴 큰 책과 거질(巨秩)을 용납할 수 없으며, 또 그 복판(腹板)이 단단하여 편안히 쓰기에 마땅하지 않으므로 더욱 소중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내 비록 편안히 쓰지는 않았으나 만드는 데 공력이 들었고 휴대한 지가 오래 되었으며 난리를 치를 때에 오직 이것을 사용하였으므로 또한 일찍이 가벼이 여기거나 천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실용에는 마땅하지 못한 지가 여러 해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며칠 전에, 몸에 가까이하는 사소한 여러 도구들을 거두어 넣을 만한 것이 없음을 생각하였다. 이에 이 피대가 쓰이지 않고 버려져 있는 것을 생각하고는 손수 꺼내어 먼지와 터럭을 털어 제거하고 더러운 때들을 씻어내고서 반복하여 살펴보니, 필경 만든 것이 졸렬하고 속의 공간이 너무 좁아서 비록 억지로 쓰려고 하나 끝내 온당치 못하였다.
이에 그 만든 것을 가지고 다소 변경하여 쓰임에 편리하게 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배에 꿰맨 것을 분해(分解)하되 주둥이로부터 절반쯤 되는 곳에 이르게 하여 출납하기가 다소 편하게 하였더니, 보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전에 쓰던 것보다 훨씬 낫다.” 하였다. 그러므로 또다시 두 개의 단추를 꿰맨 것을 분해한 좌우쪽에 달아서 넣는 물건을 거두어 닫게 하니, 이로부터 피대가 점차 다시 쓰여지려는가 보다.
나는 마침내 탄식하기를, “한 피대가 쓰여지고 버려지며 이용되고 폐기되는 것도 또한 운수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처음에는 첩책 때문에 이것을 만들었고, 나는 자못 필요한 물건이라고 여겨 출행할 때에는 반드시 가지고 다녔다. 그리하여 피난하는 날에 모든 문방구(文房具)의 백 가지 사용하는 것으로 이 피대보다 소중한 물건들이 일찍이 여러 가지가 있었건만 딴 물건은 하나도 보전하지 못하고 오직 이 피대만을 가지고 와서 시종 서로 버리지 않았으니, 피대가 쓰여져 이용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다가 중간에 이르러는 온당하게 쓸 수 없다고 생각하고 소원히 여겨 나갈 때에도 가지고 가지 않고 들어올 때에도 가까이 하지 않아서 책상에 버려 두고는 보아도 본 체하지 않아 거미가 그 주둥이에 그물을 치고 먼지가 그 꿰맨 곳에 가득히 쌓인 지가 거의 6, 7년이었으니, 이는 피대가 버림을 받아 부질없이 보관된 것이었다.
그러다가 이제 오늘날 내 쓸 만한 물건이 없어 형세가 이미 곤궁한 뒤에야 다시 취하여 수리하고 그 제도를 변경하여 다소 통하게 해서 다시 몸에 가까이 하는 물건으로 삼고자 하니, 이는 또 이 피대가 오늘로부터 쓰임을 받아 이용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똑같은 나인데도 이 피대에 대하여 혹 가까이하여 쓰고 혹 소원히하여 버리며, 피대는 똑같은 피대인데도 나에게 혹 쓰임을 당하여 이용되고 혹 버림을 받아 숨겨지니, 그 누가 이렇게 만드는 것이겠는가. 내 어찌 이것을 가까이하고 소원히하려는 뜻이 있었겠는가마는 자연히 가까이하고 소원히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피대가 어찌 한 번 나아가고 한 번 물러감에 뜻이 있었겠는가마는 자연히 나아가고 물러감이 없을 수 없었으니, 그 가까이하고 소원히하며 그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이 과연 누가 이렇게 하게 하는 것인가.
나는 사람으로서 이 피대를 주관하는 자이다. 이것을 만든 자도 나이고 이것을 고친 자도 나이고 쓰는 자도 나이고 버린 자도 나이다. 만들고 고치고 쓰고 버리되 나 역시 나로 하여금 이것을 만들고 또 나로 하여금 이것을 고치고 또 나로 하여금 이것을 쓰고 또 나로 하여금 이것을 버리며, 이미 나로 하여금 이것을 버렸다가 다시 나로 하여금 이것을 쓰게 한 것이 누군인지를 알지 못하니, 하물며 저 피대는 물건인데 나에게 또한 무슨 정이 있겠는가. 이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가까이하고 소원히하고 쓰고 버리며 나아가고 물러가고 나오고 감추는 것이 나도 아니고 피대도 아니고 오직 운수인 것이다.
내 이제 다시 이것을 거두어 장차 쓰려고 하나 다만 몇 년의 세월을 쓰다가 버릴는지 알 수 없다. 과연 버릴 것인가, 혹 버리지 않고 피대가 스스로 해져 다할 것인가. 아니면 영원히 버려지지는 않더라도 혹 절실하지 않은 물건이 될 것인가. 이를 모두 알 수 없으니, 나는 이에 대하여 감회가 없지 못하다. 그러므로 우선 이것을 만들고 고치고 내치고 받아들인 연고를 기록하여 후일의 참고로 삼는 바이다.
피대를 만든 공인(工人)은 바로 족생(族生) 정보(正甫)의 종[奴]으로 이름은 학경(鶴京)인데 왜란에 죽었다.

여헌선생문집 제7권_

잡저(雜著)_

 

봉대설(鳳臺說)

 

문소(聞韶 의성(義城)의 별칭)의 금성산(金城山) 서쪽에 한 시냇물이 있으니 이름을 하천(下川)이라 하고, 하천의 상류에 한 석벽(石壁)이 있으니 이름을 봉대(鳳臺)라 한다. 석벽의 높이는 몇 길[丈]이 될 만하고 길이는 높이에 비하여 10배나 된다. 냇물의 위아래 각각 20리 사이에는 모두 기이한 절경(絶景)이 없으므로 이 지역에 가까이 사는 사람들은 마침내 이 석벽을 제일 좋은 곳으로 여긴다. 나는 봉(鳳)으로 대(臺)를 이름한 뜻을 알지 못하여 옛 노인들에게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금성산 아래에 지금 소문리(召文里)가 있는데 소문은 바로 옛날의 국명(國名)이었다. 그 국명을 따라 지금 리(里)의 이름으로 삼았는데, 이 안에는 아직도 그 옛터라고 전해 오는 것이 있다.

 

처음 나라를 세웠을 때에 주산(主山)의 모양이 비봉형(飛鳳形 나는 봉황새의 모양)이라 하였으며, 봉(鳳)은 영특한 새인데 날아가면 머물지 않아서 복과 경사의 누림이 이에 따라 길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봉이 날아가지 않고 머물게 하는 방법을 모두 갖추어 설치하였는바, 그물을 높이 펼치면 날아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하여 남쪽에 횡으로 있는 산을 이름하여 백장산(百丈山)이라 칭하였고, 또 여기에 절을 설치하고 산명(山名)을 따라 백장사(百丈寺)라 칭하였으니, 이는 우리의 그물이 백 길이나 되어 봉황이 넘어갈 수 없다는 뜻이다.


봉황새는 서식(棲息)하는 곳을 가릴 때에 반드시 오동나무를 취한다 하여 서산(西山)의 봉우리를 칭하기를 오동령(梧桐嶺)이라 하였으니, 이미 그 둥지를 지키면 봉황이 딴 곳으로 가지 않는다는 뜻이며, 또 흙을 모아 알 모양을 만들어서 앞뒤에 펼쳐 놓고 이름하기를 봉란(鳳卵)이라 하였으니, 이곳에서 알을 까서 대대로 새끼가 끊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 그 동남쪽에 산이 돌고 물이 굽어서 땅이 넓고 사람이 많이 사는 곳이 있는데 이곳을 이름하여 가음(佳音)이라 하였으니, 봉황의 아름다운 울음소리가 항상 이곳에서 들린다는 뜻이며, 이 석벽은 한 경내의 절경이 되니, 봉황이 이 위에서 놀면 즐거운 곳이 될 수 있다 하여 마침내 봉대(鳳臺)라 이름하였으며, 봉황새가 이 땅을 즐거운 곳으로 여기면 감히 날아갈 뜻을 두지 못한다 하여 따라서 절을 설치하였다. 이는 백장(百丈), 동령(桐嶺), 가음(佳音) 등의 명칭이 나라가 멸한 뒤에도 없어지지 아니하여 봉대(鳳臺)의 명칭이 함께 전하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옛날 삼한(三韓)이 솥발처럼 서 있을 때에 각각 속국(屬國)이 있었는바, 그 속국들은 각기 구역이 나누어져 있고 각기 칭호를 붙여 큰 나라는 수백 리이고 작은 나라는 백여 리였다. 또한 이들을 칭하기를 나라라 하여 대국(大國)에 속하게 하였으니, 이른바 소문(召文)이라는 것이 어찌 또한 그러한 나라 중에 하나가 아니겠는가.

현(縣)의 별호(別號)도 문소(聞韶)라 하니, 이 또한 소문(召文) 비봉형(飛鳳形)의 설(說)에 따라 ‘구성(九成)에 와서 춤추었다’는 뜻을 취하여 이러한 칭호가 있었나 보다.
대체로 비봉형이라는 말은 그러한 이치가 없음이 분명하다. 산과 물의 이치는 축(丑)에서 땅이 개벽된 이래로 진실로 있었다. 그리하여 반드시 산 모양이 모여들고 물의 형세가 감싼 뒤에야 풍기(風氣)가 모여 인물이 많이 번성하였으니, 나라를 세우는 자가 진실로 지역을 가리지 않을 수 없으나 나라를 누림의 성쇠(盛衰)와 역년(歷年)의 길고 짧음으로 말하면 오로지 군덕(君德)의 후하고 박함과 정치의 잘하고 잘못함에 달려 있으니, 어찌 지리의 좋고 나쁨에 달려 있겠는가. 설령 길흉(吉凶)이 반드시 지리(地理)에 달려 있다 하더라도 어찌 명칭을 가칭(假稱)함으로써 풍기의 향하고 등짐을 제재할 수 있겠는가.

산맥이 이미 천지가 개벽한 초기에 뭉쳐져서 자연히 일정한 모양이 있으니, 우연히 그와 비슷한 것이요 실제 봉황새가 아니므로 진실로 날아갈 리가 없는 것이다. 가명(假名)의 봉황이 어찌 깃들여 사는 곳이 있겠으며 어찌 알을 깔 일이 있겠는가. 이미 울지 않는데 무슨 소리가 아름다우며, 이미 날지 않는데 무슨 그물을 설치하여 날아가는 것을 막겠는가. 그렇다면 이른바 봉대(鳳臺)라는 것도 어찌 참으로 봉황새가 노는 곳이었겠는가.

내가 들으니, 왕자(王者)가 진실한 덕이 있으면 참으로 이른바 봉황새라는 것이 올 수 있다고 한다. 옛날 주(周) 나라 문왕(文王)이 기산(岐山) 아래에 계실 적에 천지가 만물을 내는 마음을 체득하여 백성을 진심으로 사랑하였다. 그러므로 화(和)한 기운이 상서를 이루어 오채의 아름다운 깃털로 홰홰(噦噦)히 우는 것이 과연 기산에 이르렀다.
이때를 당하여 봉황새가 놀라게 해도 날지 않고 쫓아도 가지 않았으니 굳이 백장(百丈)의 그물 이름을 빌릴 필요가 없으며, 태화(太和)의 기운에 의하여 둥지를 삼았으니 굳이 오동나무의 이름을 빌릴 필요가 없으며, 성덕(聖德)의 가운데에 알을 까서 새끼치니 굳이 흙을 모아 알의 모양을 빌릴 필요가 없으며, 천하가 함께 그 우는 소리를 들으니 굳이 가음(佳音)으로 마을 이름을 지을 필요가 없으며, 스스로 왕의 조정에 와서 춤을 추니 또 하필 가명(假名)의 대(臺)를 만들 것이 있겠는가. 진짜 봉황새가 이르렀기 때문에 역년(歷年)이 장구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끝내 8백 년의 오랜 복록(福祿)을 누린 것이니, 이것이 실제 징험이 아니겠는가.

만일 소문국(召文國)의 군주가 스스로 문왕의 어진 정사를 행했더라면 기산의 봉황새가 다시 금성산(金城山)에서 울어 굳이 가명(假名)을 붙이지 않아도 저절로 주 나라 왕실의 복록이 있었을 것인지 어찌 알겠는가.

나는 소문국의 군주가 나라를 누린 것이 몇 대(代)였으며 망하게 된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산형(山形)이 가봉(假鳳)이라는 말을 가지고 미루어 보면 멸망을 재촉한 것이 가봉을 만든 때에서 비롯되지 않았는가 여겨진다. 깊이 믿은 것이 이미 지리(地理)에 있다면 그의 마음에 생각하기를, “나는 백장산(百丈山)을 가지고 있으니 내 봉황새가 도망할 수 없을 것이요, 나는 오동산(梧桐山)이 있으니 내 봉황새가 여기에서 서식(棲息)하고 알을 까서 새끼를 기를 것이요, 대(臺)가 있어 놀 수 있으니 내 봉황새의 아름다운 소리가 영원히 끊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여겼을 것이다.

이에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하여야 하고 국맥(國脈)을 길러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는 날마다 안일과 향락을 일삼고 사냥을 다녔을 것이니, 그렇다면 비봉의 모양이 백성들이 이산(離散)하고 하늘이 노여워하는 것을 구원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소문국의 군주가 반드시 이러한 일로 멸망에 이르렀다는 것이 아니요, 다만 대의 이름으로 인하여 그 미혹됨을 증명할 뿐이다.
지금 대 위에는 마을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으니, “봉황은 떠나가고 빈 대만 있는데 강물은 절로 흐른다.[鳳去臺空江自流]”는 옛 시구(詩句)를 나는 다시 오늘에 읊는 바이다.

[주D-001]구성(九成)에 와서 춤추었다 : 성(成)은 음악이 한 번 끝나는 것이므로 구성은 아홉 번 연주함을 이른다. 《서경(書經)》 익직(益稷)에 “소소(簫韶)를 아홉 번 연주하자, 봉황이 와서 춤을 추었다.[簫韶九成 鳳凰來儀]” 하였는데, 소소는 순(舜) 임금의 음악 이름이다.
[주D-002]축(丑)에서 땅이 개벽된 이래 : 축은 축회(丑會)를 가리킨다. 소옹(邵雍)의 《황극경세(皇極經世)》에 “30년을 1세(世)라 하고, 12세 즉 3백 60년을 1운(運), 30운 즉 1만 8백 년을 1회(會)라 하며, 회는 십이지(十二支)에 따라 모두 12회가 있는데, 하늘은 자회(子會)에서 열리고 땅은 축회에서 열리고 사람과 만물은 인회(寅會)에서 생겨났다.[天開於子 地闢於丑 人生於寅]” 하였으며, 12회 즉 12만 9천 6백 년을 1원(元)이라 하는데, 이 1원이 지나면 현재의 천지가 없어지고 새로운 천지가 개벽된다 하였다.
[주D-003]홰홰(噦噦)히 우는 것 : 홰홰는 새의 울음소리로 곧 봉황새를 가리킨 것이다.

여헌선생문집 제7권_

잡저(雜著)_

 

여헌설(旅軒說)

 

사람이 헌호(軒號 당호)를 가진 것은 중고(中古) 시대로부터 시작되었다. 상고(上古) 시대 사람들은 이름이 없고 단지 목소리가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기만 하여 말도 분간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이름이 있을 수 있겠는가.
상상컨대 그 때에는 인문(人文)이 어둡고 인륜(人倫)이 드러나지 못하여 사람마다 각자 성명(性命)을 간직하고 스스로 살아가서 다만 서로 소리를 듣고 응답하며 얼굴을 보고 서로 식별할 뿐이었으니, 어찌 이름이 필요했겠는가. 비록 이름이 없더라도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풍기(風氣)가 차츰 개발되어 질박함이 점점 흩어지자, 인문이 밝아지지 않을 수 없고 인륜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성인(聖人)이 첫번째로 나와 발휘(發揮)해서 물건에 따라 글자를 만들고 사람에 따라 이름을 지은 뒤에야 가르침을 베풀 수 있고 일을 행할 수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이름이 나오게 된 이유이다.
그러나 사람마다 각기 한 이름을 가지고 있어도 자연 통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또 어찌 딴 이름을 덧붙일 필요가 있었겠는가.
세상이 또 더욱 내려와서는 존비(尊卑)의 등급을 밝히지 않을 수 없고 장유(長幼)의 차례를 밝히지 않을 수 없었으니, 도(道)가 한갓 그 질(質)만을 숭상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미 각기 이름이 있고 또 그 이름의 뜻을 따라 바꾸어 불렀으니, 이른바 자(字)라는 것이 이에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귀천에 관계 없이 이름이 있으면 반드시 또 그 자가 있었으니, 옛날에 비하면 자를 칭하는 것은 불필요한 군더더기인 것 같으나 이 자(字)가 없으면 존비와 장유의 사이에 혐의되고 함부로 하는 바가 없지 않을 것이다.
이는 성인(聖人)이 고금(古今)의 마땅함을 참작하여 사람에게 자를 지어주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이며, 공자(孔子)께서 《춘추(春秋)》를 기록할 때에도 반드시 이름을 쓰기도 하고 자를 쓰기도 하여 여탈(與奪)의 뜻을 부치신 것이니, 자가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름이 있고 자가 있을 뿐이었는데도 충분히 모든 것을 다하였는데, 또 내려와 후세가 되어서는 세상의 도가 밝지 못하고 다스려지는 날이 항상 적었다. 그리하여 천하에 혹 기이한 재주를 품고 진리를 간직하고 있는 선비가 만약 세상에 나와 뜻을 펴지 못하면 물러가서 산림(山林)과 강호(江湖)의 사이에 흩어져 사는 자들이 있었으니, 이들은 세상 사람들의 귀에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고 속인(俗人)들의 입에 자신의 자를 올리고 싶지 않으면 이름과 자의 밖으로 스스로 초탈하고 경쟁이 없는 땅에서 호(號)를 구하여, 혹은 사는 집의 이름을 따르고 혹은 거처하는 땅과 강호(江湖)와 지택(池澤), 계산(溪山)과 곡동(谷洞) 등 마음에 좋아하고 몸이 부쳐 있는 모든 물건 중에 취하는 것을 따라 호를 붙였으니, 이것을 총칭하여 헌호(軒號)라 하였다.
후생(後生)과 소자(小子)로서 그 분을 존모(尊慕)하는 자들은 감히 그 분의 이름과 자를 입으로 부르지 못하고 그 분의 헌호를 평상시 칭호로 삼는 경우가 많았으니, 헌호가 나온 것은 이 때문이며 헌호가 성행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송(宋) 나라의 여러 선생들도 각기 칭호가 없는 분이 없었으니, 이 어찌 일을 만들기 좋아하는 자의 행위와 같겠는가. 진실로 빛을 감추고 자취를 숨겨 조물주(造物主)와 똑같은 무리가 되어서 사람과 다투지 않고 물건에게 시기를 받지 않아 한 몸의 생애를 한 호에 부친 것이니, 옛사람의 뜻에 맞음이 있는 것이다.
금인(金印)을 차고 자주색 관복(官服)을 걸쳐서 이름이 묘당(廟堂)에 드러나며 살아서 공후(公侯)를 칭하고 죽어서 아름다운 시호(諡號)를 얻은 자들까지도 모두 헌호가 있었으며, 임천(林泉)과 호산(湖山)의 이름을 따서 세상을 속이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은 나는 옳은지 모르겠다.
나는 천지 사이에 하나의 좀벌레여서 공인(工人)도 아니요 상인(商人)도 아니요 농군도 아니요 선비도 아니다. 비록 일찍이 문자학(文字學)에 종사하여 실로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에 독실하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떳떳한 분수를 지키지 않고 거짓 이름을 도둑질하여 밝은 세상을 속이고 한 관직을 받았으니, 비록 자신의 분수가 아닌 줄을 알아 지금은 물러나 산야에서 편안히 쉬고 있으나 몸이 직접 밭을 갈지 않으면서 배불리 먹고 따뜻이 입고 살아가니, 나의 평생을 돌아보면 좀벌레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일찍이 서로 종유(從遊)하던 친구가 혹 헌호를 지을 것을 권하면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헌호를 나와 같은 자가 또한 어찌 간직할 수 있겠는가. 헌호는 그 사람이 충분히 호를 가질 만하여야 갖는 것이다. 자신이 자신을 돌아볼 적에 과연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있어 자부할 수 있으며, 남이 나를 볼 적에 또한 모두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있어 볼 만한 것이 있다고 말한 뒤에야 내 스스로 호를 갖는 것이 부끄럽지 않고 남들 또한 호를 부름에 욕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스스로 돌아보고 남들이 볼 적에 그 내면에 아무것도 없으면서 녹록(碌碌)한 몸으로 훌륭한 사람들의 칭호를 본받고 용렬한 지아비로서 고사(高士)들의 호를 무릅쓴다면, 비단 자신이 스스로 부끄러울 뿐만 아니라 남에게 부끄러움을 어쩔 것이며, 비단 남에게 부끄러울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강호(江湖)와 지택(池澤)을 더럽히고 우리의 계산(溪山)과 임천(林泉)을 욕되게 해서 조물주에게 죄를 얻음을 어찌하겠는가.
나는 실로 스스로 돌아보건대 아무것도 없고 남들이 보기에도 볼 만한 것이 없는 자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위치하고 삼재(三才)에 참여되었으나 이미 사람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사람의 형체를 그대로 실천하지 못하였으니, 사람이란 이름을 간직하고 있는 것도 오히려 위로 하늘에 부끄럽고 아래로 사람들에게 부끄럽거든 하물며 스스로 헌호를 가한단 말인가.
자식이 되어 효행(孝行)이 없는데 아버지께서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 준 것도 이미 스스로 부끄러우며, 붕우가 되어 신의(信義)의 도리가 없는데 벗들이 아름다운 자(字)를 붙여 준 것도 이미 부끄럽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비록 부끄럽고 무안하더라도 바꿀 수가 없으니, 마땅히 나라 사람들이 지목하기를 장현광(張顯光)이라 하고 친구들이 부르기를 덕회(德晦)라 하면 만족하다. 또 어찌 감히 딴 호를 갖겠는가.”
나는 이미 이러한 말로 거절하고 인하여 헌호를 갖지 않은 지가 지금 40여 년이 되었다. 그런데 이제 비로소 여헌(旅軒)이라고 호하였으니, 내 스스로 생각하건대 이 호를 나에게 가함은 참람함이 되지 않고 또 그 실제에 합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헌(軒)은 어느 곳에 있는가? 일정한 곳이 없다. 어찌하여 여(旅)라고 하였는가? 나는 항상 나그네[旅]가 되었기 때문이니, 나그네란 남의 손님이 됨을 이른다. 내가 《주역(周易)》을 보니, 여괘(旅卦)는 이(離)가 위에 있고 간(艮)이 아래에 있는바, 간(艮)인 산(山)은 멈추어서 옮기지 않고 이(離)인 화(火)는 가고 머물지 않아 떠나가고 머물지 않는 상(象)이 된다. 그러므로 괘의 이름을 여(旅)라 한 것이니, 만약 일정한 거처가 있어 밖에 돌아다니지 않는다면 어찌 나그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옥산(玉山) 사람인데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사방에 돌아다니며 배웠으니, 집안에 있지 못함은 어렸을 때부터 그러하였다. 그리고 지난 임진년(1592,선조25) 여름에 옥산은 왜적(倭賊)이 곧바로 올라오는 길목이 되었으며, 또 나의 집은 길가에 있었으므로 도망하여 달아남이 남들보다 가장 먼저였고 집이 병화(兵火)에 불타서 다만 빈터만 남아 있다. 그리하여 나는 왜구가 물러간 뒤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친척에 의탁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붕우에게 의지하여 처자를 이끌고 이곳으로 옮겨 가고 저곳으로 옮겨가, 혹 한 해에도 서너 번씩 옮겨 다녀 마침내 동서남북의 정처 없는 사람이 되었으니, 나그네가 됨이 그 누가 나보다 더한 자가 있겠는가. 이와 같다면 여헌이라고 호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혹자는 말하기를, “헌(軒)은 반드시 일정한 곳이 있은 뒤에야 인하여 호를 삼는 법인데, 이제 자네는 나그네이면서 헌이라고 호하였으니, 자네의 헌이 과연 일정한 곳이 있는가? 더구나 헌은 바로 주인이 가지고 있는 것인데, 자네가 나그네를 자신의 호로 삼는다면 자신의 소유가 아닌 것을 취함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이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헌이 일정한 곳이 없고 또 자신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에 여(旅)라고 헌을 이름한 것이니, 헌에 여라고 이름한 것은 명칭이 진실로 실제에 합당한 것이다. 헌이 일정한 곳이 없어 가는 곳에 따라 헌이 있다면 내가 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일정한 것이며, 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일정하나 한 헌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면 헌이 주인의 물건이 됨이 그대로인 것이다.

없으면서도 무(無)에 빠지지 않고 있으면서도 유(有)에 얽매이지 않으니, 이는 내가 항상 나그네가 되고 나그네이면서도 반드시 헌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헌이라고 칭호한 것을 어찌 자신의 소유가 아니면서 칭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혹자는 말하기를, “그대가 여헌이라고 호를 지은 것은 내 이미 이에 대한 설명을 들었으나, 우주 사이에는 오직 태극(太極)만이 일정한 방소(方所)가 없고 일정한 형체가 없으며, 기타 만물로 말하면 반드시 형체가 있고 반드시 방소가 있는 것이다. 이제 그대의 헌을 이미 헌이라고 이름한다면 어찌 말할 만한 형체가 없고 또 어찌 지적할 만한 방소가 없으며, 또 어찌 편안하고 즐거워할 만한 실제가 없겠는가.” 하였다.
이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의 헌은 이미 유(有)와 무(無)의 사이에 있으니, 어찌 일정한 형체가 있겠는가. 그러나 편안하고 즐거워할 만한 실제는 어느 때이든 그렇지 않음이 없고 어느 곳이든 그렇지 않음이 없다. 내 한번 이것을 말하겠다.

내가 있을 때에 혹은 동쪽 이웃에 있기도 하고 혹은 서쪽 이웃에 있기도 하며, 혹은 산의 남쪽에 있기도 하고 혹은 물의 북쪽에 있기도 하며, 혹은 천리(千里)의 밖에 있고 혹은 10보(步)의 안에 있으며, 혹은 호수와 바닷가에 있고 혹은 시내 두둑에 있으며, 혹은 깊은 산골짝에 있고 혹은 큰 들의 머리에 있어서, 굳이 검소한 것만을 취하지 않고 비록 높은 집과 넓은 집이라도 혹 편안히 여기며, 굳이 높고 넓은 것만을 취하지 않고 비록 초가집과 조그마한 방이라도 또한 즐거워하여 꽃나무와 대나무가 뜰에 가득하되 번거롭게 여기지 않고, 전원에 잡초가 무성하되 더럽게 여기지않는다.
또 비단 당우(堂宇)를 헌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시원한 그늘과 푸른 나무 아래에 이르러도 또한 나의 헌이며 흰 구름과 푸른 산 위도 또한 나의 헌이며 꽃다운 풀과 시냇가 또한 나의 헌이며 시원한 바람과 산 둔덕 또한 나의 헌이다.
나는 혹 하루 동안 머무는 헌이 있고 혹 며칠 동안 머무는 헌이 있고 혹 한 달을 머무는 헌이 있고 혹 한 철을 머무는 헌이 있고 혹 1년을 머무는 헌이 있고 혹 몇 년을 지내는 헌이 있다. 그리하여 헌이 있는 곳이 일정한 한 지역이 아니나 합하여 한 몸의 헌이 되고, 헌에 머무는 것이 일정한 한때가 아니나 쌓여서 일생의 헌이 되니, 내가 헌으로 여기는 곳은 일반인의 헌과는 다르다.
무릇 물건은 방소가 있으면 구역이 한번 정해져서 동서남북에 두루 통할 수가 없고, 형체가 있으면 규모가 한번 정해져서 대소(大小)와 허실(虛實)을 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일정한 방소가 있는 것은 그 형체가 반드시 좁으나 일정한 방소가 없는 것은 그 넓음이 무궁하며, 일정한 형체가 있는 것은 그 쓰임이 반드시 막히나 일정한 형체가 없는 것은 그 통함이 막힘이 없으니, 이는 나의 헌이 일정한 방소가 없는 방소에 처하여 천하의 명승(名勝)을 겸하고 형체가 없는 형체를 세워 사방의 경치를 구비한 것이니, 헌이 크지 않으며 풍부하지 않은가.
헌 가운데에 있는 물건으로 말하면 성현(聖賢)의 책 몇 권과 지(紙)·필(筆)·연(硯)·묵(墨)의 문방사우(文房四友)와 3척(尺)의 장검(長劍) 한 자루와 새벽에 머리를 빗는 빗 하나가 있으며, 헌 위에서 대하는 사람으로 말하면 혹 고도(古道)를 좋아하고 학문을 즐기는 선비와 혹 경학(經學)을 통달하고 사학(史學)을 공부하는 사람과 혹 풍월(風月)을 읊는 호걸과 혹 촌늙은이와 늙은 농부의 무리이다.
때로는 취향이 다른 손님과 낯모르는 사람이 오더라도 또한 서로 용납하며, 용렬하고 미천한 사람에 있어서는 더욱 가엾게 여겨 잘 대접한다. 헌에 종유(從遊)하는 사람이 적으면 두서너 명의 동자(童子)가 혹 좌우에서 심부름을 하고 혹 한가로운 때에 글자를 배워 일찍이 서로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여옹(旅翁)이 하는 일은 무슨 일인가? 동지(同志)를 보면 도의(道義)를 논하고 후생(後生)을 보면 학문(學問)을 권하며, 문인(文人)을 만나면 문장을 논하고 시인(詩人)을 만나면 시를 말하며, 야부(野夫)가 오면 누에치고 삼[麻]을 가꾸는 것을 말하고 어부(漁夫)가 이르면 고기잡고 자라잡는 것을 말하며, 혹 술을 권하면 반드시 취하도록 마시고 사양하지 않으며, 혹 촌로(村老)를 만나면 바둑을 두며 소일한다.
그리고 손님이 없으면 책을 펼치고 글을 보되 천고(千古)의 성현(聖賢)의 마음을 보는 듯하며, 이미 피곤하면 팔을 굽히고 한가로이 졸되 태고(太古) 시대의 덕이 지극한 세상에서 노는 듯하며, 이미 자다가 잠을 깨어 문을 열고 바라보면 천지가 아득하고 하늘에 나는 솔개와 물 속에 뛰노는 물고기가 생동감이 넘친다. 흥을 타고 산보(散步)하여 꽃을 찾고 버들을 따르면 마음속이 성대(盛大)하여 만물과 함께 봄을 느낀다.
그리고 흥이 다하여 돌아오면 내 헌(軒)은 그대로 고요한데 의관(衣冠)을 정돈하고 엄숙히 눈을 감고 있노라면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의 묘리가 과연 일상 생활하는 사이에 떠나지 않아 유형(有形)과 무형(無形)이 일찍이 두 가지 이치가 아니다. 선천(先天)의 역리(易理)와 후천(後天)의 역리(易理)를 마음과 눈의 사이에 묵묵히 생각하여 옛 성인과 후세의 성인이 본래 똑같이 한 도(道)이다. 이와 같이 날을 마치고 이와 같이 해를 마치는 것이 이것이 바로 이 여옹(旅翁)의 일이다. 그렇다면 내 헌의 즐거움이 지극하다고 이를 만할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그대의 즐거움은 참으로 즐거울 것이다. 그러나 나그네가 된 즐거움은 아무리 즐거워도 집에 있으면서 가난함만 못하다는 것이 바로 옛말이다. 그런데 그대는 홀로 나그네의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즐거움으로 삼으니, 인정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체(四體)를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고 오곡(五穀)을 구분하지 못하면서 가만히 앉아서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으며, 아내는 길쌈을 하지 않으면서 추위를 면하고 종들은 김을 매지 않으면서도 배를 채우니, 이는 또 수고롭지 않으면서 누리는 것을 달게 여기고 일없이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길 줄 모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이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는 과연 수고롭지 않으면서 누리고 일하지 않으면서 먹으며 사방을 집으로 삼고 나그네처럼 떠도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으니, 혹자의 비난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천지의 사이에는 사물의 이치를 다 따지기 어렵고 세상의 변을 다 말하기 어렵다. 그리하여 나무는 개똥나무와 상수리나무가 있고 흙은 모래와 자갈이 있는 것이다. 개똥나무와 상수리나무를 어찌 목재로 쓸 수 있겠는가마는 부질없이 우로(雨露)의 자양(滋養)을 받고, 모래와 자갈이 흙에 무슨 쓰임이 있겠는가마는 부질없이 한가롭게 버려진 흙이 되니, 그렇다면 물건은 진실로 쓸모가 없으면서 조물주(造物主)의 공력(功力)을 허비함이 있는 것이다. 사람에 있어서인들 홀로 나와 같은 자가 없겠는가.

또 이 병화(兵火)의 즈음에 비록 몸을 의뢰할 만한 훌륭한 계책이 있는 자라도 살 곳을 잃음을 면치 못하는데 하물며 졸렬한 나에 있어서랴. 마땅히 괴롭게 여겨야 할 터인데 괴롭게 여기지 않고 즐거운 것이 아닌데도 홀로 즐겁게 여기는 것으로 말하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인지상정(人之常情)에 위배되어서가 아니다. 내가 말하는 즐거움이라는 것은 나그네를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요 다만 나그네로 있으면서도 그 즐거움을 잃지 않을 뿐이다.
군자(君子)는 만나는 환경에 따라 편안하니, 어느 환경을 만난들 편안하지 않겠는가. 대인(大人)은 곤궁함에 처하여서도 형통하니, 어느 곤궁함인들 형통하지 않겠는가. 인간의 우환과 곤궁과 고통은 모두 밖으로부터 이르는 것이니, 다만 내가 여기에 대처하는 것이 그 도리를 잃지 않을 뿐이다.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 어찌 나의 마음을 얽매이게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자신에게 있는 이치가 부족함이 없고 결함이 없어 때와 장소에 따라 스스로 만족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우환에 한탄하고 곤궁과 고통에 서글퍼하여 항상 나그네가 된 어려움에 마음을 써서 언제나 나그네를 면하는 방도에 힘쓴다면, 도리를 잊고 의(義)를 잃음에 이르지 않는 자가 적을 것이다.
오직 우환과 곤궁과 고통의 밖으로 초연한 자는 가는 곳마다 자득(自得)하지 않음이 없다. 동쪽에 부쳐 있든 서쪽에 부쳐 있든 나는 항상 내가 되고, 저쪽으로 옮겨 가든 이쪽으로 옮겨 가든 나의 땅 아님이 없으니, 밖에서 그 살 곳을 잃었다 하여 내면마저 그 지킴을 잃어서는 안 된다.
또 천하가 나의 땅 아닌 곳이 없으며, 땅에 붙어 사는 사람들이 모두 나의 형제이다. 남자(男子)는 천하를 집으로 삼고 만물을 몸으로 삼으니, 세상이 만약 평화로우면 자기 마을을 마을로 삼고 자기 고을을 고을로 삼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나, 변란의 때를 만나면 진(秦) 나라 사람이 월(越) 나라 지방을 자기의 살 곳으로 삼고 촉(蜀) 땅의 나그네가 제(齊) 나라 선비와 벗삼는 것이 또한 이 도리인 것이다.
평상적인 데에 처하든 변란에 처하든 모두 이 도리대로 한다면 이곳에 머물든 저곳에 머물든 어디를 간들 불가(不可)하겠는가. 더구나 우리 동방(東方)은 작은 한 나라이다. 지금 내가 나그네로 살고 있는 곳은 붕우와 친족 사이에 벗어나지 않았고 다만 옥산(玉山)이 아닐 뿐이니, 어찌 나그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나그네라고 말한 것은 그 뜻을 취함이 원대(遠大)하다. 내 이미 내가 나그네가 된 이유를 다 말하였으니, 다시 나그네의 뜻을 더욱 미루어 넓히겠다. 내가 나그네가 된 것은 한 작은 나그네에 불과하다. 만약 천지를 가지고 관찰한다면 천지 사이에 붙어 사는 모든 물건이 어느 것인들 나그네가 아니겠는가.
천지는 만물의 역려(逆旅 여관)이다. 그 사이에 태어난 것들이 갑자기 왔다가 갑자기 죽어가서 가는 자가 지나가고 오는 자가 계속하여 일찍이 한 사람도 천지와 더불어 종시(終始)를 함께하는 자가 없으니, 그렇다면 나그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천지에 사는 자도 나그네라고 이른다면 그 도리를 다할 것을 생각하여 일생동안 천지간에 부끄럽지 않게 하는 것을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람이 인간에 나그네가 되어 한 세상을 지날 때에 도리를 지키고 의를 잃지 않아서 안으로는 자신의 마음에 부끄럽지 않고 밖으로는 또한 여관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한다면 내 자신에 있어 마음에 만족할 수 있으며 남들도 내가 나그네 노릇을 잘 한다고 칭찬할 것이다.
만약 도리를 지키지 못하여 구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하고 또 의를 편안히 여기지 못하여 마땅히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행해서 혹 남의 신을 훔치기도 하고 혹 남의 황금을 절취하는 일이 있다면 여관 사람들이 추하게 여기는 바가 되지 않겠는가. 비단 여관 사람들이 추하게 여기는 바가 될 뿐만 아니라, 만약 심한 경우에는 혹 옥사(獄事)를 불러들이고 형벌을 받아 그 몸을 망치고야 마는 자가 있을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고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천지에 나그네로 있는 것도 또한 그러하니, 물건은 굳이 말할 것이 없으며 가장 영특한 것이 우리 인간이다. 형체를 받아 인간이 되어 그 존귀함이 비할 데 없으니, 반드시 우리가 인간이 된 소이(所以)의 이치를 알고 내가 마땅히 행하여야 할 도리를 밝혀서 어려서 배우고 장성하여 행하며 늙어서 보존하고 죽어서 일생을 잘 마친다면 그 형체를 잘 실천하여 사람이 된 도리를 잃지 않았다고 이를 것이다. 이렇게 되면 당시 사람들은 모두 우러러 높이고 후세에서는 칭찬하고 사모할 것이니, 어찌 대장부로서 천지에 부끄럽지 않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혹시라도 사람이 된 도리를 잃고 사람에게 있는 윤리를 어지럽혀 집에 있으면서 효도하지 않고 공경하지 않으며, 시골에 있으면서 공손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으며, 나라에 있으면서 충성하지 않고 도를 행하지 않아서, 살아서는 억조 만백성에게 해독을 끼치고 죽어서는 만세(萬世)에 악취를 풍긴다면 나그네가 되어 몸을 삼가지 않아 옥사를 불러들이고 몸을 망친 자와 똑같지 않겠는가.
아! 인간의 일생은 잠시에 불과하고 백 년은 얼마 안 되는 기간인데, 자신의 정신을 소모하고 성명(性命)을 잃으면서 이익을 좇고 물욕을 탐하여 못하는 짓이 없는 자들은 자기 스스로는 심지(心志)를 다하고 욕망(慾望)을 마음껏 채워 일생에 대한 계책을 잘 세웠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하늘을 어기고 이치를 거역하여 밝게는 사람의 노여움을 사고 그윽하게는 귀신의 벌을 받을 것이니, 과연 잘했다고 이를 수 있겠는가.
나는 나의 헌에 있으면서 이러한 사람들을 보고는 마음에 안타깝게 여긴다. 나로 말하면 내 헌에 앉고 누워 있으면서 붕우들의 옷을 입고 붕우들의 밥을 먹으며 수석(水石)이 좋은 사이에서 뜻을 즐기고 풍월(風月)의 가운데에 정(情)을 풀어 놓아 다행히 내 정신(精神)이 스스로 완전하고 성정(性情)이 망가지지 않으니, 그대는 비록 나를 비웃으나 나는 즐거운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그대가 이제 하늘과 땅 사이의 사람과 물건을 들어 모두 나그네라고 말하니, 그렇다면 그 누가 주인이란 말인가? 자네는 그 몸을 스스로 외롭게 여기면서 미루어 그 유(類)를 넓히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만물이 모두 나그네라면 조물주가 바로 주인이란 말인가?” 하였다.
이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작게는 사람에 붙여 있고 크게는 천지에 붙여 있는데 그 이치가 똑같다. 그러므로 그 말이 같은 것이다. 또 천지도 항상 한 천지가 될 수 없다. 만물의 입장에서 본다면 하늘과 땅은 비록 그 시종(始終)을 볼 수 없으나 도의 입장에서 본다면 천지도 사라지고 불어나는 운수가 있는 것이다.

일원(一元)이 있은 뒤에는 지금의 천지는 곧 지나간 것이 되고 다음의 천지가 다시 올 것이니, 천지 역시 도(道) 가운데의 한 나그네가 될 뿐이다. 조물주가 어찌 일정한 주인이 될 수 있겠는가. 다만 밖에서 주인을 찾는다면 끝내 주장함이 있어 주인이 될 것이 없을 것이다. 오직 물건이 각자 스스로 돌이키면 스스로 주인이 될 도리가 있는데 사람들이 제 스스로 살피지 못할 뿐이다.
가장 영특한 우리 인간을 들어 말한다면 나의 형기(形氣)는 객(客)이고 이 마음의 이(理)는 곧 주인이며, 밖으로부터 이르는 화복(禍福)과 영욕(榮辱)은 객이고 내 마음에 지키는 것은 주인이다.
이치는 가는 곳마다 있지 않은 데가 없으므로 몸이 가는 곳마다 편안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니, 화복과 영욕이 나에게 어쩌겠는가. 저 혹시라도 이치가 형기에 제재를 받아, 형기가 한 몸의 주인이 되고 밖으로부터 오는 화복과 영욕이 내 마음의 지키는 바를 동요시켜 내 마음이 스스로 천명(天命)을 따르지 못한다면, 이는 한 몸이 주인을 잃어 육신(肉身)이 화복과 영욕의 객관(客館)이 되는 것이니, 가련하지 않겠는가.
이제 나는 이 한 몸은 비록 살 곳을 잃었으나 내 마음을 주관하는 것은 이치이다. 여헌의 즐거움이 모두 이 이치에서 근본하여 생기니, 이것이 이른바 ‘사람의 편안한 집’이라는 것이다. 나의 편안한 집이 있은 뒤에야 나의 여헌을 즐길 수 있으니, 만약 편안한 집의 즐거움이 없다면 여헌이 어찌 내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겠는가.”
혹자는 말하기를, “나그네가 된 도를 통하여 사람이 된 도를 알았으니, 오늘 들은 말은 참으로 훌륭한 말씀이다. 그렇다면 여헌의 여옹은 바로 편안한 집의 주인일 것이다.” 하였다.
이에 나는 또 사양하기를, “내가 이러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요, 다만 그 이치가 그러함을 말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여헌의 뜻은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였다.
만력(萬曆) 정유년(1597,선조30) 여름에 여헌은 청부(靑鳧)의 여헌에 있으면서 이 글을 쓰다.

[주D-001]일원(一元) : 12만 9천 6백 년을 이르는바, 소옹(邵雍)의 《황극경세(皇極經世)》에 근거한 것으로 일원이 지나면 천지가 다시 개벽한다고 한다.

여헌선생문집 제7권_

잡저(雜著)_

 

서원설(書院說)

 

서원(書院)은 옛날에는 없었으니, 가장 후세에 이르러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처음으로 만든 것은 선대(先代) 제왕(帝王)의 국전(國典)에서 나온 것도 아니요 한때 조정(朝廷)의 정령(政令)에서 나온 것도 아니며, 다만 후현(後賢)들이 사사로이 의리(義理)로 만든 것일 뿐이다.
그 법식이 중국(中國)으로부터 나왔는바 《일통지(一統志)》에 자세히 보이니, 상고해 보면 모두 알수 있다. 그 제도는 중앙에는 사당(祠堂)을 세워 그 지역에서 숭상하는 사람을 제사하고 양 옆에는 당재(堂齋)를 설치하여 후학들이 학문을 닦는 장소로 삼았는바, 노사(老師)와 숙유(宿儒)로서 도를 간직하고 있는 자가 혹 제창하기도 하고 도에 뜻하고 학문을 향하는 수재(秀才)들이 또한 기꺼이 들어왔다.
이로부터 무릇 한 행실과 한 절개로 이름난 자가 혹 일찍이 그 경내(境內)에 거주하였거나 혹 유람하고 경력(經歷)한 자취가 있으면 모두 사당을 설치하고 당재를 만들고는 서원이라 칭하였으며, 비단 한 행실과 한 절개로 이름날 뿐만 아니라 예로부터 성현(聖賢)이 나온 지방 및 비록 성현이 나온 지방이 아니라도 특별히 사모하고 숭상하는 생각을 간직한 자가 있으면 또한 모두 별원(別院)을 창건하여 제향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하여 사당이 없는 현자(賢者)가 없고 서원이 없는 지역이 없게 되었다. 이는 바로 서원이 후세의 별학(別學 별도의 학교)이 된 이유이다.


옛날에 국도(國都)에는 태학(太學)이 있고 지방에는 향교(鄕校)가 있으며, 주(州)에는 서(序)가 있고 당(黨)에는 상(庠)이 있고 여(閭)에는 서숙(書塾)이 있었으니, 이는 삼대(三代)의 학교이다. 후세에 비록 흥체(興替)와 연혁(沿革)의 차이가 있었으나 떳떳한 법이 됨은 오히려 모두 대대로 지켜 왔고 이 이외에는 딴 학교가 없었으니, 지금의 서원은 또한 여(閭)에 있는 서숙(書塾)의 의의일 것이다.
옛날에 그 지방에 공덕(功德)이 있어 그 지방에서 잊을 수 없는 자이면 반드시 사(社)에 제사하는 일이 있었으니, 지금 서원에서 제향함도 또한 그러한 의의일 것이다. 도리로 헤아려 봄에 해로운 바가 없고 사기(士氣)를 진작함에 많은 보탬이 있기 때문에 선유(先儒)들이 모두 한 종류의 좋아할 만한 일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이것을 나쁘다고 여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더불어 협조하여 그 규모가 더욱 번창하고 또 넓어진 것이다.

우리 나라는 모든 일을 반드시 중국의 제도를 따른다. 그러므로 서원을 만든 것도 역시 중국에서 전해 온 것이니, 이것을 본받아 서원을 창설한 본의는 참으로 좋다. 그러나 그 일이 과연 모두 공의(公義)에서 나오고, 숭상하는 바의 사람이 실로 사문(斯文)에 공로가 있고 세교(世敎)에 보탬이 있어 제향을 받음에 부끄러움이 없으며 후세에 전함에 또한 충분히 사범(師範)이 될 만하다면 괜찮지만, 만일 혹 그렇지 못해서 구차한 데에 해당된다면 무궁한 후세에 수치와 후회스러움이 되지 않겠는가.
우리 나라 서원은 또한 몇 곳이나 되는지 알 수 없는데, 선대(先代)와 국조(國朝)의 명현(名賢)으로서 분명히 드러난 분에 있어서는 진실로 의논할 것이 없다. 그러나 그 나머지는 혹 아무 지역 사람들이 아무 분을 위하여 서원을 세웠다 하면 바로 그 후손들 아무아무가 제창한 것이며, 혹 아무 지방 사람들이 아무 분을 위하여 서원을 세웠다 하면 바로 그 문도(門徒) 아무아무가 제창한 것이다.
나는 생각하건대, 후손들이 그 선대의 조상이 과연 사람들이 잊을 수 없는 공덕이 있어서 지방 사람들이 함께 높이고 사모하여 공묘(公廟)에서 혈식(血食)을 받는다면 진실로 후손의 영광이겠으나, 만일 혹 그 의논이 공론에서 나오지 않고 후손들로부터 나왔다면, 제향을 받는 신(神)에게 미안할 뿐만 아니라 또한 후손의 후회스러운 일이 되지 않겠는가.
남의 후손이 된 자는 그 선대에 모범이 될 만한 행실과 후세에 남길 만한 가르침이 있으면 다만 스스로 한 집안의 법과 한 가정의 교훈으로 삼아 그대로 시행하고 폐하지 말아 선대의 뜻을 잘 따르며, 또 스스로 분수 안에 마땅히 행해야 할 제사에 정성을 다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아무 분이 훌륭한 자손을 두었다.”고 일컫게 한다면 이것이 효성을 다하는 도리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문도가 된 자에 있어서는 높여 스승으로 삼은 분이 과연 칭찬할 만한 도덕과 학문이 있고 내가 일찍이 그분의 가르침과 인도한 은혜를 입었다면, 내 직분에 마땅히 해야 할 것은 다만 스승이 간곡히 일러준 교훈을 돈독히 지키고 끝까지 가르쳐 준 은혜를 개발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그 도를 높이고 그 덕을 숭상하여 의발(衣鉢)을 전수하는 실제 사업인 것이다. 만약 마땅히 다해야 할 도리를 스스로 다하지 않고 반드시 바깥 사당에 제향을 받는 것을 힘쓴다면 어찌 스승을 높이는 도리를 다할 수 있겠는가.
또 서원은 애당초 국전(國典)과 국학(國學)의 떳떳한 준례가 아니고 바로 후세에 과외(科外)로 별도로 설치한 것이니, 그렇다면 규획(規畫)하는 요점과 받아 지키는 방도는 반드시 번거로움을 버리고 간략함을 힘쓰며 문(文)을 버리고 질(質)을 숭상하며 풍부함을 버리고 담박함을 취한 뒤에야 사리에 온당하고 후세에 오래도록 계승하여 선현들이 창설한 본의를 저버리지 않게 된다.
내 일찍이 이러한 의리를 한번 동지(同志)들과 경계하고자 하였는데, 이제 마침 지방의 서원에 와 있으므로 이 서원설(書院說)을 짓는 것이다.

 

여헌선생문집 제7권_

잡저(雜著)_

 

도통설(道統說)

 

도(道)는 우리 인간이 일상 생활에 항상 행하는 도이다. 어찌하여 도라 이르는가? 우리 인간이 천지의 형체(形體)를 받고 천지의 덕(德)을 받고 천지의 가운데에 위치하여 이로써 사람이 되었다. 이 형체가 없으면 이 덕을 실을 수 없고, 이 덕이 없으면 이 형체를 운용할 수 없고, 덕을 싣고 있는 형체와 형체를 운용하는 덕이 없으면 그 임무를 다할 수 없는 것이다.
형체가 덕을 싣고 있기 때문에 형체가 헛된 형체가 되지 않고, 덕이 형체를 운용하기 때문에 덕이 진실한 덕이 되며, 형체와 덕이 서로 걸맞기 때문에 곧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한 뒤에야 형체가 천지에서 받은 형체를 따르고 덕이 천지에서 받은 덕을 충만하고 지위가 천지 중간에 위치한 책임을 다하여, 그 도를 다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른바 도라는 것은 바로 이 도이니, 이것을 일상 생활에 떳떳이 행하는 것이라고 이름하는 까닭은 어째서인가? 진실로 사람이 사람이 될 때에 안에는 오장(五臟)과 육부(六腑)가 있고, 밖에는 머리와 배와 사지(四肢)가 있으며, 위에는 눈, 귀, 코, 입이 있고, 아래에는 손, 발, 손가락, 관절이 있어서 모두 각각 맡은 바가 있고 반드시 각각 이에 따른 법칙이 있는 것이다.
안에 있는 오장과 육부는 주장을 하고, 밖에 있는 머리와 배와 사지는 받들며, 위에 있는 눈, 귀 등은 살피고, 아래에 있는 손, 발 등은 공급하니, 그렇다면 안과 밖의 온갖 형체가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고 구비하지 않음이 없어서 합하여 완전한 형체가 된 것이 바로 이 몸이며, 크고 작은 온갖 형체가 각각 해야 할 직책을 맡고 각각 따라야 할 법칙을 본받아서 날로 쓰는 사업이 바로 이 도이니, 이는 형체를 따르고 덕을 충만하고 책임을 닦음을 이른다.
책임이란 무슨 사업을 하는 것인가? 바로 우주 안에 있는 사업이다. 우주 안에 있는 허다한 사업이 모두 우리 인간에게 있으니, 만약 우리 인간이 그 사업을 해내지 못한다면 우주는 빈 그릇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이미 사람이 되어 이 몸을 가지고 있으면 자연히 이에 대한 도리가 없을 수 없는 것이다. 몸은 도 때문에 몸이 되고 도는 몸을 얻어 도가 되어서 도와 몸을 합한 것을 사람이라 하니, 사람이 진실로 도를 떠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떳떳이 행하지 않을 수 없어 잠시도 떠날 수 없기 때문에 도라고 이름한 것이니, 도는 도로를 빌려 비유한 것이다. 저 도로의 도(道) 자를 빌려서 이 도리의 도를 비유하였으니, 그렇다면 사람은 마땅히 잠시도 도를 떠날 수 없는 묘함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통(統)이란 전수함이 있고 계승함이 있음을 이른다. 이른바 전수와 계승은 반드시 몸으로 전수하고 대면하여 계승하여야만 통(統)이라 이르는 것이 아니요, 그 심법(心法)과 덕업(德業)이 서로 합하면 비록 백세(百世)의 간격이 있고 천리(千里)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전수하고 계승할 수 있는 것이다.
지극히 성스럽고 지극히 성실하여 천지에 참여함이 있는 자가 아니면 이 도의 통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도는 비록 인간에게 있는 것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우리 인간을 낸 것은 하늘과 땅이니,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스스로 그 도를 도라고 하겠는가. 도의 본원(本原)은 바로 말미암아 나온 곳이 있는 것이다.
《서경(書經)》 탕고(湯誥)에 “훌륭하신 상제(上帝)가 충(衷)을 하민(下民)에게 내려주어 순히 하여 떳떳한 본성을 소유하였다.” 하였고, 자사자(子思子)는 말씀하기를,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고 도를 품절(品節)한 것을 가르침이라 한다.” 하였으며, 동자(董子 동중서(董仲舒)를 가리킴)는 말하기를, “도의 큰 근원이 하늘에서 나왔으니, 하늘이 망하지 않으면 도 역시 망하지 않는다.” 하였는바, 이는 모두 도의 근원이 하늘에서 나왔음을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을 낳은 것은 하늘과 땅이며 하늘과 땅을 낳은 것은 태극(太極)이니, 이른바 태극이라는 것이 어찌 도의 큰 근원이 아니겠는가. 태극은 바로 이 이치의 가장 위에 있는 원두(原頭)를 칭하니, 하늘과 땅이 생기기 이전에 이 이치가 스스로 항상 있었다. 이 이치가 스스로 항상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원기(元氣)를 내어서 위에 위치하고 있는 하늘을 내니 하늘이 이에 처음으로 생겨났고, 하늘이 이미 생겨나자 아래에 위치한 땅을 내니 땅이 이에 비로소 생긴 것이다. 하늘과 땅이 이미 모두 생겨나자 하늘은 위에서 동(動)하고 땅은 아래에서 정(靜)하니, 동(動)에 의뢰하여 시작되고 정(靜)에 의뢰하여 생겨서 조화가 유행한다. 이에 우리 인간과 만물이 또한 모두 각기 그 받은 것을 얻어서 하늘과 땅 두 사이에 인간과 만물이 태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태극의 이치가 자연히 하늘이 될 이치가 있었기 때문에 하늘이 하늘이 된 것이며, 또한 땅이 될 이치가 있었기 때문에 땅이 땅이 된 것이며, 또 모름지기 사람이 될 이치가 있었기 때문에 사람이 사람이 된 것이다. 비록 하찮은 만물에 이르러도 그 이치가 있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물건이 되었는데, 다만 만물은 모두 조화의 도구와 우리 인간의 쓰임이 될 뿐이다.
이에 하늘이 하늘이 된 이치를 순히 하는 것은 하늘의 도이고, 땅이 땅이 된 이치를 순히 하는 것은 땅의 도이고, 사람이 사람이 된 이치를 순히 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니, 그 도는 곧 한 태극의 이치이다. 그러므로 하늘이 그 이치를 순히 하여 하늘이 항상 하늘이 됨을 잃지 않고, 땅이 그 이치를 순히 하여 땅이 항상 땅이 됨을 잃지 않는 것이다.
오직 우리 인간은 기질(氣質)이 잡되고 물욕(物欲)의 유혹이 없지 않아서 혹 스스로 사람이 된 이치를 순히 하지 못하여 삼재(三才)에 참여된 도를 다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도(道)의 통(統)을 얻은 자만이 덕이 지극히 성스럽고 도가 지극히 성실한 사람이 되는 것이니, 그렇다면 사람으로서 지극히 성스럽고 지극히 성실한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이는 하늘과 땅이 우리 인간에게 부여한 것이 균등하지 않음이 있어서가 아니요, 인간이 태어나 우리 인간이 되어서 스스로 도리를 다하지 못한 자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도의 통이 스스로 돌아가는 곳이 있어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도통(道統)을 얻은 자가 몇 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도는, 하늘과 땅을 가지고 말하면 하늘은 음(陰)과 양(陽)이 있는데 음과 양은 또 대소(大小)로 나뉘고, 땅은 강(剛)과 유(柔)가 있는데 강과 유는 또 대소로 나뉘니, 해와 달과 별이 하늘에 형상하고, 물과 불과 흙과 돌이 땅의 형질을 간직하며, 낮과 밤, 추위와 더위가 교대로 운행하고, 비와 바람, 이슬과 우레가 때로 일어나며,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이 일정함이 있고, 낳고 자라며 거두고 감춤이 반드시 차례가 있는 것이 모두 이 도이다.
그리고 만물을 가지고 말하면, 성(性)과 정(情), 형(形)과 체(體)가 서로 인하고 나는 짐승과 달리는 짐승, 풀과 나무가 무리로 나누어지며, 약하고 건장하고 늙고 죽음이 필연적인 것과 귀하고 천하고 성하고 쇠함이 똑같지 않은 것이 모두 이 도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 인간을 가지고 말하면, 성(性)에 오상(五常)이 있으니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이고, 이것이 발하여 칠정(七情)이 되니 희(喜)·노(怒)·애(哀)·락(樂)·애(愛)·오(惡)·욕(欲)이며, 인륜에는 오품(五品)이 있으니 부자간의 친함과 군신간의 의와 부부간의 분별과 장유간의 차례와 붕우간의 믿음이며, 세상에는 네 가지 사업이 있으니 집안에 있어서는 집이 가지런해지고 나라에 있어서는 나라가 다스려지고 천하에 있어서는 천하가 고르게 되고 우주에 있어서는 옛 성인을 잇고 오는 후학들을 열어주는 것이다.
오상(五常)은 이 도의 체(體)이니 하늘에서 나온 것이고, 칠정(七情)은 이 도의 용(用)이니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며, 오륜(五倫)은 이 도의 조리(條理)이니 친소(親疎)를 두루 다하는 것이고, 네 가지 사업은 이 도의 공용(功用)이니 법이 가까운 곳과 먼 곳에 미치는 것이다. 그러하니 우리 인간의 도가 여기에서 벗어남이 있겠는가.
이른바 지극히 성스럽고 지극히 성실하다는 것은 이 도의 밖에 별도로 딴 도가 있는 것이 아니며, 성(聖)은 이 도를 통함으로써 성스러움이 되고 성실함은 이 도를 순수히 함으로써 성실함이 되는 것이니, 그렇다면 또한 이 성(性)을 온전히 하고 정(情)을 화하게 하며 윤리를 돈독히 하고 사업을 다하여 우리 인간의 도가 저절로 여기에서 다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곧 이른바 “천지(天地)와 그 덕이 합하고 일월(日月)과 그 밝음이 합하고 사시(四時)와 그 차례가 합하고 귀신(鬼神)과 그 길흉이 합한다”는 것과 또 이른바 “동함에 대대로 천하의 도가 되고 행함에 대대로 천하의 법이 되고 말함에 대대로 천하의 기준이 되어서 멀리 있으면 바라봄이 있고 가까이 있으면 싫지 않다.”는 것과 또 이른바 “총명(聰明) 예지(叡智)가 족히 임함이 있으니, 관유(寬裕)하고 온유(溫柔)함이 족히 포용함이 있으며, 발강(發强)하고 강의(剛毅)함이 족히 지킴이 있으며, 제장(齊莊)하고 중정(中正)함이 족히 공경함이 있으며, 문리(文理)와 밀찰(密察)함이 족히 분별함이 있다.”는 것과 또 이른바 “천하의 대경(大經)을 경륜하고 천하의 대본(大本)을 세우고 천지의 화육(化育)을 아니 어찌 치우친 바가 있겠느냐.”라고 말한 것이 이 통을 얻음이 되는 것이다.
창려(昌黎) 한자(韓子 한유(韓愈)를 가리킴)가 원도편(原道篇)을 지었는데 여기에 이르기를, “요(堯)는 이것을 순(舜)에게 전하고, 순은 이것을 우(禹)에게 전하고, 우는 이것을 탕(湯)에게 전하고, 탕은 이것을 문왕(文王), 무왕(武王), 주공(周公)에게 전하고, 문왕, 무왕, 주공은 이것을 공자(孔子)에게 전하고, 공자는 이것을 맹가(孟軻)에게 전하였는데, 맹가가 죽자 그 전함을 얻지 못하였다.” 하였다.
그런데 송(宋) 나라의 여러 선생들은 모두 한자(韓子)의 말을 옳다고 하였다. 상고(上古)로부터 후세에 이르기까지 영달(榮達)하여 높은 지위에 있어서 큰 군주가 되고 큰 신하가 된 자가 모두 몇 명이나 있는데, 제왕(帝王)에 있어서는 유독 요·순·우·탕·문왕·무왕을 들고 보상(輔相)에 있어서는 유독 주공만을 들며, 곤궁하여 낮은 지위에 있는 자 역시 수많은 군자(君子)가 있는데, 유독공자와 맹자를 들었으니, 그렇다면 도통의 전함에 참여될 수 있는 자가 항상 세상에 있지 않은 것이다.
반드시 마음에 간직하여 덕성(德性)이 되고 몸에 발하여 언행(言行)이 되고 세상에 베풀어 사업(事業)이 된 것이 한결같이 모두 천리(天理)에 순수하여 털끝만한 결함도 없고 털끝만한 지나침도 없고 털끝만한 치우침도 없은 뒤에야 비로소 도라고 이를 수 있으니, 이는 곧 당우(唐虞)의 중(中)이고 《대학(大學)》의 지선(至善)이고 《중용(中庸)》의 지성(至誠)이다.
그렇다면 도통의 전함을 세상에 유명한 성인(聖人)이 아니고서 얻을 수 있겠는가. 글이 있기 이전에는 비록 훌륭한 군주가 있고 훌륭한 신하가 있고 훌륭한 백성이 있었더라도 그 언행과 사업을 상고하여 알 길이 없으나, 다만 상상컨대 그 때에는 온 세상의 위아래가 모두 참된 본성과 순수한 덕을 간직한 자들이었을 것이니, 그렇다면 도가 저절로 그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어찌 도통이 있는 곳을 가리켜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리고 복희씨(伏羲氏) 이후에 이르러는 팔괘(八卦)가 그어지고 문자(文字)가 만들어지고 예법(禮法)이 지어지고 명분(名分)이 차등되고 정사(政事)가 행해져서 우리 인간의 도가 비로소 천명(闡明)되었고, 또다시 신농씨(神農氏)에 이르러는 생민(生民)의 본업과 화물(貨物)을 유통하는 큰 규칙과 백성을 오래 살게 하는 신묘한 의방(醫方)이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었으며, 또다시 황제(黃帝)에 이르러는 천지에 숨겨진 것이 모두 개발되고 조화의 은미한 것이 모두 나오고 경륜(經綸)의 관건(關鍵)이 모두 베풀어졌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을 경위(經緯)하며 신(神)을 감동시키고 백성을 교화하는 계책이 거행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그렇다면 우리 인간의 이 도의 근본이 복희, 신농, 황제 세 성인(聖人)의 세대에 크게 열려진 것이다. 자연 굳이 도통을 말하지 않아도 그 도가 삼재(三才)의 큰 강령(綱領)이 되고 만세(萬世)의 공통된 모범이 되는 것이니, 또한 통(統) 자(字)로써 다할 수 없는 것이다.
태극(太極)이 도가 된 것이 하늘에 있어 기(氣)가 되면 음양(陰陽)이라 하고, 땅에 있어 질(質)이 되면 유강(柔剛)이라 하고, 사람에 있어 덕(德)이 되면 인의(仁義)라 한다. 기가 기가 된 것도 이 이치 때문이고 질이 질이 된 것도 이 이치 때문이고 덕이 덕이 된 것도 이 이치 때문이니, 그렇다면 곧 이 이치 아닌 것이 없다. 이 때문에 모두 도라고 이르는 것이다.
기(氣)가 있지 않으면 조화의 기틀이 될 수 없으므로 위를 덮고 있는 하늘은 반드시 기를 도로 삼으며, 질(質)이 있지 않으면 조화의 공을 이룰 수 없으므로 아래에서 싣고 있는 땅은 반드시 질을 도로 삼으며, 덕(德)이 있지 않으면 화육(化育)의 도에 참여하여 재성 보상(裁成輔相)하는 사업을 낼 수 없으므로 중간에 위치한 인간은 반드시 덕을 도로 삼는다.
한갓 기(氣)만으로는 도가 될 수 없으므로 하늘이 있으면 반드시 땅이 있고, 한갓 기(氣)와 질(質)만으로는 도가 될 수 없으므로 하늘과 땅이 있으면 반드시 사람이 있으니, 그렇다면 삼재(三才)의 도가 반드시 우리 인간의 덕이 있은 뒤에야 비로소 구비되어 하늘이 하늘다운 하늘이 되고 땅이 땅다운 땅이 된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이 우리 인간을 얻은 뒤에야 비로소 덮어 주고 실어 주는 큰 조화를 하여 태극의 이치가 태극이 된 묘함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도통의 책임이 마침내 우리 인간에게 있는 것이니,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 몸을 가볍게 여겨 사람이 된 도를 스스로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주가 있은 이래로 이 도통을 계승한 자가 있었다. 그리하여 삼강(三綱)이 이 때문에 삼강이 되고 오륜(五倫)이 이 때문에 오륜이 되어서 세상이 문명(文明)한 세상이 되어, 새와 짐승이 모두 잘 살고 오랑캐들이 돌아와 교화되며 해와 달이 빛나고 사시가 차례를 순히 하며 음양이 조화롭고 비바람이 제때에 불어서, 하늘은 높고 밝은 하늘이 됨을 잃지 않고, 땅은 넓고 두터운 땅이 됨을 잃지 않으니, 이 도의 공용(功用)이 어떠한가.
만약 도통이 전함이 없었다면 삼강이 삼강이 되지 못하고 오륜이 오륜이 되지 못해서 세상이 혼란한 세상이 되어 짐승의 발자국과 새의 발자국이 국경에 교차하고, 오랑캐의 말[馬]과 오랑캐의 병사들이 중국에 횡행하여 해, 달, 별의 삼광(三光)이 빛을 잃고 기후가 바뀌어 음양이 어그러지고 비바람이 지나쳐 하늘이 재앙을 내리고 땅이 변괴가 많아 태평의 세대와 전혀 반대가 될 것이니, 이 어찌 우리 인간의 도가 이를 초래한 것이 아니겠는가.
삼대(三代) 이전에는 지극히 성스럽고 지극히 성실한 분이 대대로 나와 높은 자리에 있어서 이 도를 마음에 체득(體得)하고 이 도를 몸에 체행하고 이 도를 집과 나라와 천하에 밝혔다. 그러므로 그 군주를 삼황(三皇)·오제(五帝)·삼왕(三王)이라 하였고, 그 세대를 당(唐)·우(虞)·삼대(三代)라 하였는데, 이 뒤로는 이 도의 전통을 얻은 자가 공자와 맹자였으나 곤궁하여 낮은 자리에 있어서 도를 품고 일생을 마쳤으니, 사람들이 어찌 지극한 덕의 세상을 볼 수 있었겠는가.
영달(榮達)하여 높은 지위에 있는 자 중에는 비록 혹 한두 명 도에 가까운 군주가 있었으나 제왕(帝王)의 심법(心法)을 마음에 두지 않고 제왕의 법을 따르지 않아 모두 잡된 패도(霸道)를 도로 여겼으니, 어찌 도통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 하늘은 똑같은 한 하늘이고 땅은 똑같은 한 땅이다. 하늘과 땅이 일찍이 없어지지 않았으니, 도가 어찌 일찍이 망함이 있겠는가. 사람들이 제 스스로 사람의 도를 다하지 못하므로 도통이 끊겨서 이어지지 못하는 것이다.

[주D-001]천지(天地)와 그 덕이 합하고 일월(日月)과 그 밝음이 합하고 사시(四時)와 그 차례가 합하고 귀신(鬼神)과 그 길흉이 합한다 : 이 내용은 《주역(周易)》 건괘(乾卦) 문언전(文言傳)에 보인다.
[주D-002]동함에 대대로……있겠느냐. : 이 내용은 모두 《중용》에 보인다.
[주D-003]당우(唐虞)의 중(中) : 당은 요(堯) 임금의 국명(國名)이고 우는 순(舜) 임금의 국명이며, 중은 중도(中道)로 과(過)하거나 불급(不及)함이 없음을 이른다. 《논어(論語)》 요왈(堯曰)에는, “요 임금은 순 임금에게 훈계하기를 ‘진실로 그 중을 잡으라.[允執厥中]’ 했다.” 하였고,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는, “순 임금이 우 임금에게 훈계하기를 ‘인심(人心)은 위태롭고 도심(道心)은 미묘하니 정(精)하게 분별하고 한결같이 하여야 진실로 중을 잡을 수 있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했다.” 하였는바, 주자(朱子)는 이것을 성현이 심법(心法)을 전수해 준 도통(道統)이라 하여 매우 중요시하였다.

여헌선생문집 제7권_

잡저(雜著)_

 

공성(孔聖)

 

하늘이 공자(孔子)를 탄생하여 이미 그 도덕(道德)을 크게 하였으나 마침내 높은 지위를 주지 않은 것은 어찌 우연히 그러한 것이겠는가. 진실로 이치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째서 이렇게 말하는가 하면, 이 이(理)가 태극(太極)이 된 것은 본래 무극(無極)으로부터 왔는데, 기(氣)가 이 이(理)에서 나온 것은 반드시 이 이(理)에 배합함이 있고 이 극(極)에 맞음이 있어서이니, 이에 이(理)에서 기(氣)가 나오고 기에서 형(形)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반드시 위에 하늘이 있고 아래에 땅이 있고 그 가운데에 사람이 있어 삼재(三才)가 갖추어진다. 재(才)라는 것은 이기(理氣)를 합하여 조화가 되고 사업(事業)을 이룸을 말하며, 사업이란 그 도를 행하여 다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삼재가 모두 사업이 있는 것이니, 이런 뒤에야 삼재의 도를 다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늘은 하늘의 사업이 있고 땅은 땅의 사업이 있고 사람은 사람의 사업이 있으니, 삼재 중에 한 재가 없으면 우주가 우주다운 우주가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이 비록 하늘에 있고 땅에 있는 사업을 다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우리 인간이 사람에게 있는 사업을 다한 뒤에야 하늘과 땅의 사업이 그 사업을 이루고 우주가 우주다운 우주가 될 수 있는 것이니, 우리 인간의 사업이 크게 삼재에 참여되고 중하게 삼재를 꿰뚫고 있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이른바 우리 인간의 사업이란 것은 곧 본성(本性)을 다하고 천명(天命)에 이르며, 천지의 마땅함을 재성(裁成)하고 천지의 도를 보상(輔相)하며, 천지의 위육(位育)에 참여하여 돕는 도이다. 그 사업은 곧 삼황(三皇)이 삼황이 되고 오제(五帝)가 오제가 되고 삼왕(三王)이 삼왕이 된 것이 이것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과 사람과 물건이 있더라도, 상고(上古)에 삼황이 없었으면 되지 못하고 중고(中古)에 오제가 없었으면 되지 못하고 당우(唐虞) 이후에는 삼왕이 없었으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삼황이 없었으면 어찌 이 도가 성(性)이 됨을 다할 것이며, 오제가 없었으면 어찌 이 도가 덕(德)이 됨을 다할 것이며, 삼왕이 없었으면 어찌 이 도가 권도(權道)가 됨을 다하겠는가. 삼왕이 떠나가고 오패(五霸)에 들어와서는 도가 마음에서 나오지 아니하여 사업이 낮아지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 도가 성(性)이 되고 덕(德)이 되고 권도가 되어 우주로 하여금 우주다운 우주가 되게 하는 것이 없어짐에 가깝지 않겠는가.
만약 이러한 때에 공자가 없었더라면 우주 사이에 삼재의 도를 누가 붙들어 세우고 천명(闡明)하여 만세(萬世)를 하루와 같이 똑같게 하였겠는가. 이는 태극이 공자를 삼왕의 뒤에 탄생시키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인 것이다.
그렇다면 삼황이 죽었으나 삼황의 도가 망하지 않게 된 것은 오직 오제의 전함이 있었기 때문이요, 오제가 죽었으나 오제의 도가 망하지 않게 된 것은 삼왕의 전함이 있었기 때문이요, 삼왕이 죽었으나 삼왕의 도가 망하지 않게 된 것은 필경 공자의 전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령 공자가 삼왕의 뒤에 탄생하지 않았더라면 후세에 누가 삼왕의 도가 오제에 근본하고 오제의 도가 삼황에 근본하고 삼황의 도가 태극에 근본함을 알겠는가.
이 도를 당세에 행하는 것은 도가 있고 지위가 있는 자의 사업이다. 그러나 지위가 있는 자의 사업은 한때에 그치고 만다. 그러므로 삼황의 도는 삼황의 세대에만 행하고 그쳤고, 오제의 도는 오제의 세대에만 행하고 그쳤고, 삼왕의 도는 삼왕의 세대에만 행하고 그친 것이다. 그쳤다는 것은 그 규모(規模)와 조례(條例)를 말하는 것이요 성(性)에 있는 도가 그치는 것은 아니니, 이는 모두한때의 사업이다. 만약 이 도를 만세에 게시하여 유행하게 하는 것으로 말하면 도가 있고 지위가 없는 자만이 가능하다.
도가 있고 지위가 없는 자 역시 진실로 삼황의 마음을 마음에 간직하고 오제의 덕을 덕으로 여기고 삼왕의 도를 따르나 다만 그 몸이 삼황, 오제, 삼왕의 지위에 있지 않으니, 이 도를 한 세상에 행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를 위하여 책을 짓고 글을 써서 후세에 가르침을 남기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건대, 그 저술한 바의 책은 모두 삼황, 오제, 삼왕의 도가 실려 있는 것이요, 쓴 바의 글은 모두 삼황, 오제, 삼왕의 성인(聖人)이 전수(傳授)한 심법(心法)이니, 삼황, 오제, 삼왕이 마음에 두고 덕으로 여기고 도로 여긴 것은 바로 무극과 태극의 이치인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의 도가 만세에 유행되는 것은 비단 삼황이 삼황이 되고 오제가 오제가 되고 삼왕이 삼왕이 되는 도일 뿐만이 아니다. 바로 하늘이 하늘이 되고 땅이 땅이 되고 태극이 무극이 된 것이니, 이는 바로 대성인(大聖人)의 사업으로 실로 우주에 충만하고 천지가 끝나도록 무궁한 것이다.
이와 같다면 그 도덕과 사업은 바로 삼황이 삼황 시대에 다하지 못하고 오제가 오제 시대에 다하지 못하고 삼왕이 삼왕 시대에 다하지 못한 것이며, 하늘도 다 덮어 주지 못하고 땅도 다 실어 주지 못하는 것이니, 그 크고 영구함을 말로 이루 다 형용할 수 없고 붓으로 다 기록할 수 없다. 과연 여기에 비유할 만한 것이 있겠는가. 이는 마땅히 하늘과 고명(高明)함을 함께하고 땅과 박후(博厚)함을 함께하며 일월(日月)과 광채를 함께하고 사시(四時)와 떳떳함을 함께하는 것이다.
지금 천백 년이 지난 뒤에도 사람들이 마음에 간직한 성(性)과 몸에 따르는 도를 알아서 아버지는 아버지 노릇을 하고 자식은 자식 노릇을 하며, 형은 형 노릇을 하고 아우는 아우 노릇을 하며, 남편은 남편 노릇을 하고 부인은 부인 노릇을 하며, 붕우간은 붕우다운 붕우가 된 것이 그 누구의 교화이겠는가. 이는 바로 지위가 없는 지위이고 사업이 아닌 사업이니, 만분의 일도 인위(人爲)로써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작위(爵位)로써 이름할 수 있겠는가. 누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작위를 칭하며 손을 써서 올려 주겠는가. 이는 다만 스스로 분수를 알지 못함을 나타낼 뿐이다.
아! 훌륭하다. 마침내 명(明) 나라에 이르러 처음으로 이 이치를 발명하고 처음으로 이 의논을 내어, 전고(前古)에 공자에게 가하였던 관작을 통렬히 개혁하고 다만 선사 선성(先師先聖)이라는 칭호를 위판(位版)에 썼으니, 이 어찌 만고에 한번 상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주D-001]천지의 도를 보상(輔相)하며 : 《주역(周易)》 태괘(泰卦) 상전(象傳)에 보이는 내용으로, 재성(裁成)은 지나친 것을 억제하는 것이며, 보상은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 것이다.
[주D-002]천지의 위육(位育) : 위(位)는 천지가 자리를 편안히 하는 것이며 육(育)은 만물이 잘 길러지는 것으로, 《중용(中庸)》에 “중(中)과 화(和)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잘 길러진다.[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하였다.
[주D-003]삼황(三皇)이……삼왕이 된 : 모두 옛날의 훌륭한 군주로 삼황은 복희(伏羲)·신농(神農)·황제(黃帝)이고, 오제(五帝)는 소호(少昊)·전욱(顓頊)·제곡(帝嚳)·제요(帝堯)·제순(帝舜)이며, 삼왕은 하(夏)의 우왕(禹王), 상(商)의 탕왕(湯王), 주(周)의 문왕(文王)·무왕(武王)이다.
[주D-004]오패(五霸) : 춘추 시대(春秋時代) 다섯 명의 패자(霸者)로 제(齊)의 환공(桓公), 진(晉)의 문공(文公), 송(宋)의 양공(襄公), 진(秦)의 목공(穆公), 초(楚)의 장왕(莊王)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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