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전서 제105권

경사강의(經史講義) 42 ○ 역(易) 5 갑진년(1784, 정조8)에 선발된 이서구(李書九)ㆍ정동관(鄭東觀)ㆍ한치응(韓致應)ㆍ한상신(韓商新)ㆍ홍의호(洪義浩) 등이 답변한 것이다

 

[몽괘(蒙卦)]

 

육오(六五)를 ‘동몽(童蒙)’이라고 한 뜻을 자세히 말해 줄 수 있겠는가? 채허재(蔡虛齋 채청(蔡淸))의 말에 의하면 “육오의 동몽은 단사(彖辭)에서 말한 동몽과 같지 않다.”고 하였다. 그러나 단사에서 “내가 동몽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동몽이 나를 구한다.”고 한 것은 곧 구이(九二)가 육오(六五)를 가리켜 말한 것이니 단사와 효사(爻辭)에서 말한 ‘동몽’은 다른 뜻이 없을 것 같은데, 채씨(蔡氏)가 그렇게 말한 데에는 과연 견해가 있는가?

[한치응(韓致應)이 대답하였다.]
육오는 음효(陰爻)이고 또 간(艮)의 체(體)에 소남(少男)에 해당하므로 ‘동몽(童蒙)’이라고 한 것입니다. 대개 단사의 동몽은 몽매(蒙昧)한 것만을 말하였고, 효사의 동몽은 유약(柔弱)한 중(中)으로 순일(純一)한 덕이 있음을 말하였으니, 글의 표현은 비록 같으나 뜻은 조금 다릅니다.


동몽(童蒙)의 상이 있으면 그 점(占)이 반드시 길(吉)한 것은 어째서인가? 상전(象傳)에서 “동몽이 길한 것은 순하면서 겸손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대저 육오(六五)는 임금의 자리이니, 임금의 덕은 반드시 총명하고 지혜롭고 용기가 있고 강하고 굳건하고 분발하는 정신이 있어야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순하고 겸손함을 위주로 한다면 우유부단(優柔不斷)에 가깝지 않겠는가? 대체로 《역경》의 의례(義例)는 구(九)가 오(五)의 자리에 있고 육(六)이 이(二)의 자리에 있는 것을 가리켜 제자리라고 하고, 육이 오의 자리에 있고 구가 이의 자리에 있는 것을 가리켜 제자리가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제자리일 경우에는 그 효사에 어렵다는 것이 많고 제자리가 아닐 경우에는 그 효사에 길하다는 것이 많으니,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과연 반복하며 토론하여서 그 깊은 뜻을 밝혀 줄 수 있겠는가?

[한치응이 대답하였다.]
오(五)는 강건(剛健)한 체(體)가 있고 육(六)은 유순(柔順)한 덕(德)이 있습니다. 동몽(童蒙)을 길하다고 한 것은 대개 그 체는 강건하면서 행하는 것이 순하기 때문입니다. 명(明) 나라 학자 채청(蔡淸)은 일찍이 이춘지(李春之)의 말을 인용하여 연역(演繹)하기를, “임금은 강건함을 체로 삼고 중심(中心)을 비우는 것을 용(用)으로 삼으며, 신하는 유순함을 체로 삼고 중심을 강하게 하는 것을 용으로 삼으면 위아래가 어울려서 그 뜻이 같게 되는 것이니, 그것이 구이(九二)와 육오(六五)가 길함이 많은 이유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말이 깊이 경문(經文)의 뜻을 얻은 것입니다.


상구(上九)에서 “침략자가 되는 것은 이롭지 않고 침략자를 막는 것은 이롭다.”고 한 것은 어느 것을 가리켜서 말한 것인가? “이는 다만 상구의 ‘격몽(擊蒙)’이라는 글로 인하여 이렇게 가정적인 말을 함으로써 그 몽매(蒙昧)함을 다스림에 있어 너무 사납게 할까 경계한 것이지, 상구가 진실로 침입자를 막는 상(象)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자도 있는데, 이는 아마도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성인(聖人)이 설명을 붙일 적에는 모두 자연스러운 괘효(卦爻)의 상에 근본하여 말하였지, 언제 사리(事理)에 맞지 않은 것을 날조하여 가설적인 말을 하였겠는가. 대개 이 괘(卦)의 상효(上爻)가 구(九)를 얻어서 변하게 되면 몽괘(蒙卦)가 사괘(師卦)로 되어 전쟁을 하는 상이 있다. 또 상구는 육삼(六三)과 상응(相應)이 되는데, 육삼은 어리석은 몽(蒙)이니 침략자가 되고 상구는 그 몽을 다스리니 침략자를 막는 것이 된다. “성인은 군사를 받아들이기도 하고 군사를 쓰기도 하는 자이므로, 그 점사(占辭)를 두 가지로 만들어 침략자가 되는 것은 이롭지 않고 침략자를 막는 것은 이롭다고 한 것이다.”라고 한 이 말은 원(元) 나라 학자 오징(吳澄)의 찬언(纂言)에 있는 것인데, 과연 경문(經文)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것인가?

[한치응이 대답하였다.]
찬언(纂言)에서 《역경》을 풀이한 것은 상(象)의 변화만을 위주로 하였기 때문에 그 말이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로 오징(吳澄)의 학설을 따르게 되면 “침략자가 되는 것은 이롭지 않다.”고 한 것은 곧 육삼(六三)의 점사(占辭)이니, 상구(上九)와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서 군더더기 말이 됩니다. 아마도 경문의 간략하고 엄정한 체(體)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상은 몽괘(蒙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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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전서 제105권

경사강의(經史講義) 42 ○ 역(易) 5 갑진년(1784, 정조8)에 선발된 이서구(李書九)ㆍ정동관(鄭東觀)ㆍ한치응(韓致應)ㆍ한상신(韓商新)ㆍ홍의호(洪義浩) 등이 답변한 것이다

 

[곤괘(坤卦)]

 

“서와 남은 벗을 얻고 동과 북은 벗을 잃는다.”고 한 것은 무슨 말인가? 《정전(程傳)》과 《본의(本義)》에서는 모두 서와 남은 음방(陰方)이고 동과 북은 양방(陽方)이라고 하였는데, 저 동은 소양(少陽)에 해당하고 남은 태양(太陽)에 해당하며 서는 소음(少陰)에 해당하고 북은 태음(太陰)에 해당하는 것은 바꿀 수 없는 큰 원칙이거늘 남을 음방이라고 하고 북을 양방이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해석하는 자의 말에 의하면 “이는 후천팔괘(後天八卦)의 위치로 말한 것이다.”라고 하지만, 그것도 그렇지가 않다. 지금 문왕팔괘(文王八卦)를 고찰하여 보면 이(離)가 남에 있고 그 이는 화(火)에 해당하는데 그 화를 음이라고 할 수 있겠으며, 감(坎)이 북에 있고 그 감은 수(水)에 해당하는데 그 수를 양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서구(李書九)가 대답하였다.]
설괘전(說卦傳)에 보면 진(震)ㆍ감(坎)ㆍ간(艮)을 건(乾)의 세 아들이라고 하고, 손(巽)ㆍ이(離)ㆍ태(兌)를 곤(坤)의 세 딸이라고 하였으며, 소자(邵子)가 후천팔괘의 위치를 논하면서, “건은 동과 북에서 세 아들을 거느리고 있고 곤은 서와 남에서 세 딸을 거느리고 있다.”고 하였는데,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서와 남을 음방이라고 하고 동과 북을 양방이라고 한 것은 아마 여기에 근거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같은 무리의 벗을 잃게 되면 따돌림을 당하여 돕는 이가 없게 되므로 틀림없이 후회가 있게 마련인데, “마침내 경사가 있을 것이다.”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이서구가 대답하였다.]
음(陰)은 혼자서는 생물(生物)을 할 수가 없으므로 반드시 같은 무리를 떠나 양을 따라가야 화육(化育)의 성과를 이룰 수 있으므로, 마침내 길(吉)한 경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도리로 말하면, “서와 남은 벗을 얻는다.”고 한 것은 무리를 이끌고 양(陽)을 따르는 것이니 이는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도(道)이고, “동과 북은 벗을 잃는다.”고 한 것은 무리와 관계를 끊고 양을 따르는 것이니 이는 무리가 흩어지고 벗이 없어지는 도이다. 무릇 윗사람을 섬기는 도리는 어진 이를 추대하고 능한 이에게 양보하며 무리를 이끌어 주어 서로 앞서려고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고, 어진 이를 질투하고 능한 이를 미워하다가 따돌림을 당하여 외톨이가 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 없다. 그래서 여러 괘(卦)의 효사(爻辭)를 고찰하여 보면, ‘벗이 모인다’느니 ‘벗이 이른다’느니 ‘그 무리와 함께 간다’느니 ‘이웃과 함께한다’느니 하는 것들은 모두 길(吉)한 말에 해당하고, ‘벗이 없어진다’느니 ‘무리가 흩어진다’느니 ‘무리를 끊고 올라간다’느니 하는 것들은 대체로 후회하는 말이 많은데, 이는 바꿀 수 없는 이치이다. 그런데 유독 곤괘(坤卦)의 단사(彖辭)에서만, 벗을 잃는 것에 대하여서는 길하다고 말하고 벗을 얻는 것에 대하여서는 길하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정동관이 대답하였다.]
무리를 이끌어 주어 서로 앞세우려고 하는 것이라도 만약에 아부와 편당의 행위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길할 수 없고, 따돌림을 당하고 외톨이가 되었더라도 만약에 공정하기만 하다면 또한 마침내는 경사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래 글에서 종합하여 매듭짓기를 “안정(安貞)하여 길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벗을 얻은 것과 벗을 잃은 것을 막론하고 정도(正道)에 편안할 수만 있으면 길하다는 것입니다.


건(乾)ㆍ곤(坤) 두 괘(卦)에만 문언(文言)이 있고 다른 괘에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문단마다에 모두 ‘자왈(子曰)’이라고 하여 마치 후세 사람이 공자(孔子)의 말을 추송(追誦)하는 것처럼 하였으므로, 구양수(歐陽脩)도 문언은 공자가 지은 것이 아니라는 의심을 하였다. 이는 과연 분명한 증거가 있는가?

[이서구가 대답하였다.]
건과 곤은 《역경》의 시작이 되므로 공자께서 특별히 문언을 지어 더욱 자세하게 밝힌 것이니, 다른 괘는 이를 유추하여 알 수 있습니다. ‘자왈(子曰)’이라는 두 글자는 곧 후세의 학자들이 추가한 것으로 이는 마치 《맹자(孟子)》에서 ‘맹자왈(孟子曰)’이라고 한 것과 같은 예입니다. 구양수가 그것을 의심한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상은 곤괘(坤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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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전서 제105권

경사강의(經史講義) 42 ○ 역(易) 5 갑진년(1784, 정조8)에 선발된 이서구(李書九)ㆍ정동관(鄭東觀)ㆍ한치응(韓致應)ㆍ한상신(韓商新)ㆍ홍의호(洪義浩) 등이 답변한 것이다

 

[건괘(乾卦)]

 

건(乾)이라고 한 이름의 의의(意義)를 자세히 말해 줄 수 있겠는가?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성정(性情)으로 말할 때는 건이라고 한다.”고 하였는데, 그 성(性) 자는 오로지 이치로 말한 것인가, 아니면 기질(氣質)로 말한 것인가? 주자(朱子)는 논(論)하기를, “건은 하늘의 성정이다.”라고 하여 이치를 가리켜 말하였고, 또 말하기를, “강건(剛健)함은 바로 하늘의 품성(品性)이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의 성(性)은 사람의 기질과 같은 것이다. 이미 이치라고 하고 또 기질이라고 하였으니, 어쩌면 그렇게도 그 말의 앞뒤가 모순되는가? 주자가 또 말하기를, “정(靜)은 성(性)이고 동(動)은 정(情)이다.”라고 하였다. 저 강건하여 쉼이 없는 것을 건이라고 한다면 정이라고 할 경우 이는 곧 건이 아니다. 그리고 동함을 양(陽)이라 하고 정함을 음(陰)이라고 하는데 건은 순양괘(純陽卦)이니 동함은 있고 정함은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주자는 동정(動靜)을 겸하여 말한 것은 어째서인가?

[정동관(鄭東觀)이 대답하였다.]
건(乾)의 강건(剛健)함은 대개 그 순양(純陽)의 기(氣)로 말미암은 것이니, 여기서의 성(性) 자는 마땅히 기질(氣質)의 성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순양이 강건할 수 있는 것은 곧 자연의 이치이니, 주자의 앞뒤 논리는 신(臣)은 서로 밝혀 준 것이지 피차에 모순이 된다고 보지 않습니다. 이를 크게 나누면 동(動)은 양이고 정(靜)은 음이지만, 세밀하게 나누면 양 속에도 정이 있고 음 속에도 동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건괘(乾卦)로 말하면, 초구(初九)에서 “잠긴 용이니 쓰지 말라.”고 한 것은 곧 양 속의 정입니다. 그러나 그 지극히 정한 속에도 지극히 동하는 이치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강건한 사람은 비록 조용히 앉아 있을 때라도 항상 움직일 생각이 있는 것과 같으니, 그것이 이른바 “강건하여 쉼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원형이정(元亨利貞)’을 《정전(程傳)》에서는 네 가지 덕(德)으로 풀이하였는데, 주자(朱子)는 점사(占辭)로 보고서 “크게 형통하며 정고(貞固)함이 이롭다.”고 하였다. 이것은 책 첫머리의 제일가는 의의(意義)인데, 정자와 주자의 말이 이렇게 차이가 나니 어느 학설을 따라야 하겠는가? 문언(文言)에서는 “원(元)은 선(善)의 으뜸이고, 형(亨)은 아름다움의 모임이고, 이(利)는 의(義)의 조화이고, 정(貞)은 일의 근간이다.”라고 하였고, 한(漢) 나라와 당(唐) 나라 이후로 여러 학자들이 모두 네 가지 덕으로 설명한 것도 대개 전수(傳受)한 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자같이 성인(聖人)을 돈독하게 믿는 이로서 문언의 훈고를 따르지 않고, 아름답지 못하다는 비평을 감수하면서까지 당당하게 점사로 단정을 지은 것은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인데, 자세히 말해 줄 수 있겠는가?

[정동관이 대답하였다.]
주자가 반드시 점사로 풀이한 것은 다른 괘(卦)의 용례(用例)와 같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주자어류(朱子語類)》에 “문왕(文王)의 뜻은 ‘크게 형통하며 정고함이 이롭다’고만 말한 것이지 애당초 네 계절(季節)에 분배한 것이 아닌데, 공자(孔子)가 이 네 글자의 의미가 좋은 것을 발견하고 비로소 네 가지로 나누어 말하였으니, 공자의 역(易)은 문왕의 역과 약간 차이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주자의 《본의(本義)》는 애당초 문언(文言)의 뜻에 어긋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렇지가 않다. 여러 괘(卦)의 점사(占辭)를 고찰하여 보면 ‘원길(元吉)’이니 ‘광형(光亨)’이니 ‘무불리(無不利)’니 ‘안정(安貞)’이니 ‘간정(艱貞)’이니 하는 유(類)는 모두 네 가지로 나누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 오직 곤괘(坤卦) 단사(彖辭)에서 “암말의 정(貞)함이 이롭다.”고 한 것과 “서남(西南)은 벗을 얻음이니 이롭다.”고 한 것은 이(利) 자를 가지고 아래의 글을 거꾸로 해석한 것과 같다. 그러나 선대 학자들 가운데 ‘원형이(元亨利)’를 한 구(句)로, ‘빈마지정(牝馬之貞)’을 한 구로 보며, ‘득주리(得主利)’를 한 구로, ‘서남득붕(西南得朋)’을 한 구로 보는 이가 있는데, 이렇게 보면 문자(文字)가 순조로워 이치에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어찌 문왕의 본뜻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원형이정(元亨利貞)’의 네 글자가 여러 괘에 섞여 나오는 것에 대하여 모두 네 가지 덕으로 풀이하는 것도 무슨 불가함이 있겠는가? 그리고 《좌전(左傳)》에 목강(穆姜)이 점(占)으로 “원형이정하니 허물이 없을 것이다.”라고 한 수괘(隨卦)의 점사를 얻고서 말하기를, “네 가지 덕이 나에게는 모두 없으니 어떻게 허물이 없겠는가?” 하였다. 그때는 문언(文言)이 나오기도 전이었는데 목강이 그렇게 말할 수 있었으니, 네 가지 덕으로 보는 학설은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다. 어찌 문왕의 시대에는 본래 네 계절에 분배하지 않았던 것을 공자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네 가지로 말한 것이겠는가?

[정동관이 대답하였다.]
주자가 일찍이 “《주역》은 복서(卜筮)를 위해서 만든 책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본의》에서 풀이한 것은 점사를 위주로 한 것이 많습니다. 진실로 점사를 위주로 하면 건(乾)의 ‘원형이정(元亨利貞)’도 반드시 “크게 형통하며 정고(貞固)함이 이롭다.”고 풀이하여야 그 뜻이 더 정밀할 것 같습니다. 목강(穆姜)이 네 가지 덕을 말한 것과 같은 경우는 선대 학자가 이는 좌씨(左氏)가 꾸며 넣은 것이라고 하였으니, 아마도 그것을 증거로 삼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그 오직 성인(聖人)뿐인가. 진퇴(進退)와 존망(存亡)의 이치를 알아서 그 정도(正道)를 잃지 않는 이는 성인뿐이다.”라고 하였는데, 위아래의 몇 구절 안에서 ‘성인’을 거듭 말한 것은 무슨 뜻인가? 《본의(本義)》에서는 다만 처음에는 설문(設問)을 하고 마침내는 스스로 응답하는 것으로 풀이하였으나, 한상 주씨(漢上朱氏 주진(朱震))는 말하기를, “사람은 진실로 진퇴와 존망에 대해서 알고는 있으나, 그 도가 성인과 어긋나게 되면 반드시 정도(正道)를 얻을 수는 없다. 그러나 성인만은 진퇴와 존망의 기미를 알고 또 그 정도를 잃지 않을 수 있으므로, 성인이라는 말을 두 번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이 더 정밀한 것 같은데, 강원(講員)들의 뜻은 어떤지 모르겠다.

[홍의호가 대답하였다.]
이 구절의 처음과 끝에서 성인을 거듭 말한 것은 다만 기결(起結)의 문법입니다. 한상 주씨의 말은 교묘한 폐단이 있으니, 아마도 《본의》를 정론(正論)으로 삼아야 할 듯합니다.


 

이상은 건괘(乾卦)이다.


 

[주D-001]기결(起結) : 시문(詩文) 등의 기구(起句)와 결구(結句)를 가리키는 것으로, 시작한 말에 대해 결론을 맺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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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전서 제105권

경사강의(經史講義) 42 ○ 역(易) 5 갑진년(1784, 정조8)에 선발된 이서구(李書九)ㆍ정동관(鄭東觀)ㆍ한치응(韓致應)ㆍ한상신(韓商新)ㆍ홍의호(洪義浩) 등이 답변한 것이다

 

[총론(總論)]

 

《역경(易經)》의 근원은 하도(河圖)이다. 주자(朱子)가 《역학계몽(易學啓蒙)》을 지을 때에 반드시 본도서(本圖書)를 먼저 내세운 것은 아마 그 도서(圖書)가 역학(易學)의 문호(門戶)와 계제(階梯)가 되는 것이어서 《역경》을 설명함에 있어서는 도서를 먼저 밝히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하도(河圖)의 방위(方位)를 8괘(卦)의 방위에 분배시켜 보면 번번이 부합되기 어려운 것이 문제였다. 한(漢) 나라와 당(唐) 나라 이후로 많은 변설(辨說)이 나왔으나 끝내 명확한 이론이 없었는데, 오직 《역학계몽》에서 “네 방위의 합한 것을 나누어 건(乾)ㆍ곤(坤)ㆍ감(坎)ㆍ이(離)가 되게 하고, 네 모퉁이의 공간을 보완하여 태(兌)ㆍ진(震)ㆍ손(巽)ㆍ간(艮)이 되게 하였다.”고 한 말은 선대 학자들도 미처 밝히지 못했던 것으로서 후학(後學)들이 떠받드는 바가 되었다. 다만 이미 “합한 것을 나눈다.”고 한 것과 “공간을 보완한다.”고 한 것은 성인(聖人)의 지려(知慮)로써 한 것이므로 하도의 자연적인 상수(象數)는 아니다. 대개 포희씨(包羲氏)가 하도를 관찰할 적에 그 홀수와 짝수가 있음을 보고서 홀수는 양(陽)이 되고 짝수는 음(陰)이 됨을 알았으며, 그 홀수와 짝수가 안팎으로 끼어 있음을 보고서 양 속에 음이 섞여 있고 음 속에 양이 섞여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음 하나 양 하나의 양의(兩儀)의 획을 긋고 이를 곱하여 사상(四象)이 되게 하였는데, 서로 곱하며 상생(相生)을 시키고 확대해 가며 변화시켜서 사상에서 8괘가 나오고 8괘에서 64괘가 나왔으니, 이는 곧 자연의 추세이다. 그렇다면 성인이 하도를 법으로 삼은 것은 오직 홀수와 짝수의 점(點)으로 인하여 음양(陰陽)의 획을 창출하였을 뿐이고, 저 8괘의 방위와 같은 것은 별도로 포희씨가 잘 헤아려 변화를 이루어서 신령스럽게 밝힌 것이지 반드시 하도의 방위를 다 모방한 것은 아니다. 만약에 건남(乾南), 곤북(坤北), 이동(離東), 감서(坎西)의 방위가 용마(龍馬)의 등에 있는 선모(旋毛)로 된 점(點)에서 다 나타났다면 사람들은 누구든지 관찰할 수 있을 것인데, 또 어찌 신성(神聖)하신 포희씨를 기다릴 필요가 있었겠는가. 그래서 일찍이 이 문제에 대해 “8괘의 이수(理數)를 하도에서 구하는 것은 옳지만, 8괘의 방위를 하도에 배속시키려고 하면 마침내 억지로 부합시킴을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선대의 학자들도 “성인이 법으로 삼았다고 한 것은 그 이치가 부합하는 측면을 말한 것이다. 어찌 반드시 점과 획과 방위에 매달려서 부합함을 찾아야 하겠는가.” 하였으니, 그 말이 진실로 옳은 것 같은데 강원(講員)들의 생각은 어떤지 모르겠다.

[홍의호(洪義浩)가 대답하였다.]
괘(卦)와 그림의 방위의 차이에 대한 논의는 한 가지가 아니나, 마침내 그 핵심에는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臣)도 거기에 대하여 의심하면서도 정설(正說)을 얻지 못하였는데, 지금 성상(聖上)의 말씀을 듣고 충분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의 위치와 수(數)에 대해서 《역경》을 읽는 이는 자세하게 분변하지 않을 수 없다. 유흠(劉歆)이 말하기를, “하도와 낙서가 서로 경위(經緯)가 되고 8괘(卦)와 9장(章)이 서로 표리(表裏)가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하도는 둥근 것을 위주로 하고 낙서는 모난 것을 위주로 하며, 하도는 완전함을 위주로 하고 낙서는 변함을 위주로 한다. 그리고 하도는 생수(生數)를 위주로 하였는데 낙서는 홀수를 위주로 하였으며, 하도는 왼쪽으로 돌며 상생(相生)이 되는데 낙서는 오른쪽으로 돌며 상극(相克)이 된다. 따라서 그 상반(相反)되는 것만 볼 수 있지 부합되는 것은 볼 수 없는데, 그 서로 경위가 되고 표리가 된다는 의의(意義)가 어디에 있는가?
계사(繫辭)에서는 “황하(黃河)에서 하도가 나오고 낙수(洛水)에서 낙서가 나와서 성인이 법으로 삼았다.”고만 하였지, 복희(伏羲)와 우(禹)의 일을 말한 적은 없다. 그런데 유흠이 “복희는 하도를 받고 우(禹)는 낙서를 법으로 삼았다.”고 한 것은 과연 어디에 근거하여 그렇게 안 것인지 모르겠다. 구양수(歐陽脩)는 “하도와 낙서는 허망하여 믿을 수 없는 것이다.” 하였고, 유목(劉牧)은 “구수(九數)는 하도이고 십수(十數)는 낙서이다.” 하였으며, 자화자(子華子)는 하도를 논하면서 “2와 4는 9를 안고 올라가고 6과 8은 1을 밟고 내려간다.” 하였는데, 이는 또 낙서를 하도로 본 것이다. 선대 학자의 학설도 이렇게 여러 가지이니 어떻게 이를 절중(折中)해야 하겠는가?

[홍의호가 대답하였다.]
둥근 것을 위주로 하고 완전함을 위주로 하는 것은 하도(河圖)의 체(體)가 된 것이고, 모난 것을 위주로 하고 변함을 위주로 하는 것은 낙서(洛書)의 용(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는 체가 되고 하나는 용이 되어 서로 대대(對待)가 되니 이는 마치 음(陰)과 양(陽), 낮과 밤이 서로 기다리며 이루어지는 것과 같은데, 유흠이 말한 경위(經緯)는 바로 이런 것을 말한 것입니다. 하도의 수는 역(易)의 천일(天一)에서 지십(地十)의 수와 부합하니 진실로 복희의 역(易)이 거기에서 나왔고, 낙서의 수는 홍범(洪範)의 초일(初一)에서 차구(次九)의 수와 부합하니 진실로 우(禹)의 홍범이 근원으로 삼은 것입니다. 더구나 《상서(尙書)》와 《논어(論語)》에도 분명히 하도라는 글이 있으니, 구양수가 허망하다고 배척한 것은 옳지 못하다는 비평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주자가 일찍이 《대대례(大戴禮)》의 명당편(明堂篇)에 있는 글을 인용하여 구수(九數)는 낙서이고 십수(十數)는 하도라고 증명하였으니, 유목과 자화자의 의논도 굳이 많은 변론을 할 가치가 없을 듯합니다.


상경(上經)은 건괘(乾卦)와 곤괘(坤卦)로 시작하였고 하경(下經)은 함괘(咸卦)와 항괘(恒卦)로 시작하였는데, 그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이것은 《역경》의 큰 의례(義例)가 되는 것이니, 이 글을 읽는 사람은 강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홍의호가 대답하였다.]
건괘와 곤괘는 천지(天地) 기화(氣化)의 시작이므로 상경의 첫머리에 있고, 함괘와 항괘는 음양(陰陽) 형화(形化)의 시작이므로 하경의 첫머리에 있습니다.


그러면 건(乾)ㆍ곤(坤) 두 괘의 경우는 음양이 존재하는 바가 아니라는 것인가? 만약에 건ㆍ곤을 기화의 시작으로 보고 함ㆍ항을 형화의 시작으로 본다면 불가함이 없겠으나, 만약에 천지와 음양으로 나누어 말한다면 결국 말의 병폐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건ㆍ곤은 천지의 도이고 음양의 근본이기 때문에 상경(上經)의 첫머리가 되고, 함ㆍ항은 부부의 도이고 생육(生育)의 근본이기 때문에 하경(下經)의 첫머리가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소자(邵子)는 말하기를, “건ㆍ곤에서 감(坎)ㆍ이(離)까지는 천도(天道)이고, 함ㆍ항에서 기제(旣濟)ㆍ미제(未濟)까지는 인도(人道)이다.”라고 하였는데, 반드시 이렇게 논리를 세워야 비로소 말이 정밀하지 못하다는 비평을 받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감ㆍ이가 상경의 마지막이 되고 기제ㆍ미제가 하경의 마지막이 되는 것에도 반드시 정밀한 뜻이 존재할 것이니, 말하여 주기 바란다.

[홍의호가 대답하였다.]
감ㆍ이는 음양(陰陽)의 질(質)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상경의 마지막에 있는 것이고, 기제ㆍ미제는 음양의 공(功)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하경의 마지막에 있는 것입니다. 대개 미제는 감ㆍ이가 합한 것이고 기제는 감ㆍ이가 어울리는 것이니, 이를 통하여 상경과 하경이 반대되는 오묘한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이상은 총론(總論)이다.


 

[주D-001]본도서(本圖書) : 《역학계몽(易學啓蒙)》의 편명(篇名)으로,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를 가리키는 준말의 뜻으로 쓰인 것이다.
[주D-002]9장(章) : 여기서는 낙서(洛書)의 아홉 방위를 가리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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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전서 제104권

경사강의(經史講義) 41 ○ 역(易) 4

 

[잡괘전(雜卦傳)]

 

서괘(序卦)는 질서 정연한 순서가 있고, 잡괘(雜卦)는 어지럽게 섞여 있어 차례가 없으니 동일한 역인데도 이러한 차이가 있는 이유는 과연 어째서인가?

[성종인이 대답하였다.]
서괘에서는 역의 도의 변치 않음을 말하였고 잡괘에서는 역의 도의 변화를 말하였으니, 이것이 그 차이를 보이는 것입니다. 변치 않음과 변함은 매번 서로 원인이 되어 행해지니, 다른 것 속에 자연 같은 것이 있는 것입니다.


“풍(豐)은 일이 많다.”고 한 문세(文勢)를 가지고 예를 삼는다면 마땅히 “여(旅)는 친함이 적다.”고 해야 하는데 지금 도리어 “친함이 적다.”고 하는 말을 ‘여’보다 먼저 쓴 것은 어째서인가?

[성종인이 대답하였다.]
선대 학자들도 이 점에 대해서 의심했지만, 그것을 지적하여 말한 자는 없었습니다.


쾌(夬)의 때에 어떻게 군자의 도가 자라고 소인의 도는 근심이 되는 것인가?

[강세륜이 대답하였다.]
양은 군자이고 음은 소인입니다. 쾌괘(夬卦)는 다섯 양이 위로 나아가서 하나의 음을 결단하는 것이므로 군자의 도가 자라고 소인의 도는 근심이 된다고 한 것입니다.


 

이상은 잡괘전(雜卦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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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전서 제104권

경사강의(經史講義) 41 ○ 역(易) 4

 

[서괘전 상(序卦傳上)]

 

“물(物)이 쌓인 뒤에 예(禮)가 있다.”고 했는데, 물이 쌓이는 것과 예는 본래 서로 가깝지 않거늘 예라는 것이 어찌 반드시 쌓인 뒤에 행해지겠는가. “이행하여 태평한 뒤에 편안하다.”고 하니, 이행하는 것은 예인데 예가 태평해지는 이유가 되는 것은 어째서인가? 대체로 더하고 더는 것은 물리(物理)의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손괘(損卦)와 익괘(益卦), 박괘(剝卦)와 복괘(復卦) 따위의 괘를 서로 번갈아 가며 말한 것이다. 그런데 유독 비괘(比卦)로부터 태괘(泰卦)까지는 길만 있고 흉은 없으니, 전적으로 길괘만을 쓴 데에는 거기에 어떤 뜻이 있어서인가?

[성종인이 대답하였다.]
선대 학자들은 “이괘(履卦)가 소축괘(小畜卦)를 뒤이어 받은 것은 바로 ‘의식(衣食)이 풍족해야 예절을 안다’는 뜻이다. 예는 천리(天理)의 절문(節文)으로 이치를 순하게 따라 행하면 마음이 늘 태평하니, 태괘(泰卦)가 이괘를 이은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역경》은 일정한 규칙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더러는 길흉(吉凶)의 괘가 서로 끼어 있기도 하고 더러는 순수한 길괘가 연이어 있기도 하는 것이니, 이러한 데에서 역(易)의 도가 일찍이 고정된 적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서괘전 상(序卦傳上)이다.

 

 

[서괘전 하(序卦傳下)]

 

“믿음이 있는 자가 반드시 행한다.”고 한 것이 과연 어찌하여 소과(小過)가 되는 것인가? 사마 온공(司馬溫公)과 같은 분은 진정 독실하게 행하는 군자라고 할 수 있는데 주자(朱子)는 일찍이 지적(知的)인 측면이 부족하기 때문에 오히려 크게 행하지 못하는 뜻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 뜻에 대해 상세하게 말해 줄 수 있겠는가? 이러한 관점으로 본다면 믿음이 있은 뒤에 행함이 있다는 뜻을 과연 소과라고 할 수 있는가?

[조제로(趙濟魯)가 대답하였다.]
믿음이 있으면 자임(自任)하는 뜻이 있으니, 그 때문에 소과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자의 말씀은 온공(溫公)에게서 완벽하기를 바란 것입니다.


미제괘(未濟卦)로 끝을 맺은 것은 어째서인가?

[김계락(金啓洛)이 대답하였다.]
만약 기제괘(旣濟卦)로 끝맺는다면 비록 감(坎)과 이(離)가 생생(生生)하는 상(象)이 있기는 하지만 성인(聖人)은 오히려 한계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미제로 끝을 맺어 영원하다는 뜻을 보인 것이니, 여기에서도 손(損)ㆍ익(益)과 비(否)ㆍ태(泰)의 상을 볼 수 있습니다.


이상은 서괘전 하(序卦傳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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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전서 제104권

경사강의(經史講義) 41 ○ 역(易) 4

 

[설괘전(說卦傳) 제11장]

 

설괘(說卦)의 뜻에 대해 주자도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지만, 학자들로서는 한결같이 포기한 채 그 뜻을 궁구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곤(坤)은 곧 땅인데, 곤괘(坤卦)를 설명하면서 “땅에는 검은 것이 된다.”고 하였으니 무슨 말인가? 진괘(震卦)는 “푸른 대가 되고 갈대가 되고 발이 흰말이 되고 발을 나란히 하여 잘 뛰는 말이 되고 이마가 흰말이 된다.”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손괘(巽卦)는 “과단성이 없는 것이 되고 냄새가 되고 이익에 가까워서 세 배를 얻음이 되고 궁극에는 조급한 괘가 된다.”고 한 것은 무슨 말인가?

[신복이 대답하였다.]
대개 설괘(說卦)는 대부분 일시적으로 뜻을 취한 것으로서 어떤 것은 한 획의 뜻을 취하였고 어떤 것은 괘(卦)의 뜻을 취하였으니, 지금 그 뜻을 다 궁구하고자 한다면 천착(穿鑿)하게 될 것입니다. 선대 학자들이 해석한 것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곤(坤)은 땅이 되는데 “땅에는 검은 것이 된다.”고 한 것은 그 색깔을 말한 것입니다. 진괘(震卦)의 아래 획은 양(陽)이고 위의 두 획은 음(陰)이니 푸른 대나무와 갈대가 되는 이유이고, 발이 흰 것과 발을 나란히 하여 잘 뛴다는 것은 그 아래의 굳셈을 취한 것이고, 이마가 흰 것은 위의 허(虛)함을 취한 것입니다. 음(陰)의 성질은 유순하여 양강(陽剛)이 위로 전진하는 것만 못하니 과단성이 없음이 되는 것이고, 소리와 냄새는 양에 속하는데 위의 두 획이 양이니 냄새가 되는 것이며, 인색(吝嗇)의 성질은 이로움을 주장하니 3배의 이로움이 되는 것이고, 한 음이 나아가 장차 순음(純陰)으로 변화되면 부드럽고 조급한 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대략이니, 그 은미한 말과 심오한 뜻에 대해서는 신이 감히 지적하여 하나하나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이상은 설괘전(說卦傳) 제11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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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전서 제104권

경사강의(經史講義) 41 ○ 역(易) 4

 

[설괘전(說卦傳) 제6장]

 

“만물을 묘하게 한다.”고 할 때의 ‘묘하게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아야 그 뜻을 제대로 알 수 있는가?

[김희조가 대답하였다.]
이 구절의 ‘신(神)’이라는 글자는 곧 건곤(乾坤)을 가리킨 것이니, 우레로 움직이고 바람으로 흔들며, 불로 건조시키고 못으로 기쁘게 하며, 물로 적셔 주고 간(艮)으로 그치게 하는 이치를 관찰하면, 그 유행하고 왕래하여 능히 변화를 이룸이 모두 건곤이 하는 일입니다. ‘묘하게 한다’는 말은 바로 이러한 뜻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상은 설괘전(說卦傳) 제6장이다.

 

[설괘전(說卦傳) 제10장]

 

“진괘(震卦)는 한 번 구하여 남자를 얻고 손괘(巽卦)는 한 번 구하여 여자를 얻는다.”고 할 때 이른바 ‘한 번 구한다’는 것은 곧 어떤 뜻인가?

[이현도가 대답하였다.]
진괘가 한 번 구한다는 것은 곤(坤)이 건(乾)을 구하는 것이고, 손괘가 한 번 구한다는 것은 건이 곤을 구하는 것입니다.


진괘가 한 번 구하면 어떻게 남자를 얻고, 손괘가 한 번 구하면 어떻게 여자를 얻는가?

[이현도가 대답하였다.]
양은 음에 뿌리를 두기 때문에 남자를 얻고, 음은 양에 뿌리를 두기 때문에 여자를 얻는 것입니다.


이상은 설괘전(說卦傳) 제10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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