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전서 제104권

경사강의(經史講義) 41 ○ 역(易) 4

 

[계사전 하(繫辭傳下) 제5장]

 

천하의 이치는 굽히는 것과 펴는 것일 뿐이다. 천지를 가지고 말하면 태극(太極)이 동(動)하고 정(靜)하는 것, 해와 달이 왕래(往來)하는 것, 추위와 더위가 서로 밀어내는 것, 밤과 낮이 서로 대신하는 것들이 모두 굽히고 펴는 것이다. 사람의 몸을 가지고 말하면 나아가고 나아가지 않는 것, 말하고 침묵하는 것, 동하고 정하는 것,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 모두 굽히고 펴는 것이다. 굽히는 이유는 장차 펴고자 해서이니, 이는 조화의 예측할 수 없는 오묘함이고 원형이정(元亨利貞)이 돌면서 반복하는 기미이다. 그래서 “굽히고 펴는 것이 서로 감응하여 이로움이 생겨난다.”고 한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펴는 것이 이로운 줄만 알았지 굽히는 것이 이로운 줄은 모르니, 자벌레와 용과 뱀을 비유로 든 것은 굽히는 것이 이롭다는 사실을 밝혀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한 것이다. 유염(兪琰)은 “‘의리를 정미롭게 하여 신묘함에 들어감[精義入神]’은 안이고 ‘쓰임을 이루는 것[致用]’은 밖이니 안에서 밖에 이르는 것은 자벌레가 몸을 굽혀 펴기를 구하는 것과 같고, ‘쓰는 것을 이롭게 하여 몸을 편안히 함[利用安身]’은 밖이고 ‘덕을 높임[崇德]’은 안이니 용과 뱀이 겨울잠을 자면서 몸을 보존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고, 채청(蔡淸)은 “‘의리를 정미롭게 함[精義]’은 지혜로써 말한 것이고, ‘쓰는 것을 이롭게 함[利用]’은 행(行)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니, 앞의 설을 따르면 정의(精義)와 치용(致用), 이용(利用)과 숭덕(崇德)이 각각 체(體)와 용(用)이 되고, 뒤의 설을 따르면 정의와 이용이 체와 용이 된다. 두 주장이 비록 자세하고 소략한 차이는 있지만 또한 서로 통할 수 있는가?

[신복(申馥)이 대답하였다.]
느슨한 것은 팽팽한 것의 근본이고, 닫힌 것은 여는 것의 기틀이며, 굽힌 것은 펴는 것의 시작입니다. 초목이 싹틀 때에는 반드시 굽혔다가 펴지고, 흐르는 물이 웅덩이를 채울 때에는 반드시 고였다가 흐르니, 그것이 굽히고 펴지는 뜻입니다. 또 지극히 굳건한 것은 천지(天地)인데 굽히지 않고서 능히 펴질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으니, 양(陽)이 음(陰)에게 굽혀 있다가 복괘(復卦)가 되고, 해가 달에게 굽혀 있다가 낮이 되고, 더위가 추위에 굽혀 있다가 봄이 됩니다. 사람에게 있어서도 매한가지이니, 공자(孔子)는 지(止)할 적에는 굽히고 행(行)할 적에는 폈으며, 안자(顔子)는 숨어 있을 때에는 굽히고 쓰일 때에는 폈습니다. 비록 작은 예(例)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장량(張良)이 다리 아래로 내려가 신발을 주워 오고 한신(韓信)이 바짓가랑이 사이로 들어가는 모욕을 당한 것에 대하여 선대 학자들은 모두 “굽혔다가 능히 편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굽히는 것이 바로 펴는 것이 되며, 역(易)에서 용과 뱀 그리고 자벌레를 예로 들어 말한 뜻도 아마 이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펴는 것이 이로운 줄만 알았지 굽히는 것이 이로운 줄은 모르니, 그것이 바로 길거리에 고인 물은 바다에 이르지 못하고 소인의 행동은 확연하지만 날로 망하는 이유입니다. 두 선대 학자들의 ‘정의(精義)’와 ‘이용(利用)’에 대한 주장은 둘 다 타당한 점이 있습니다. 대개 아래 글의 ‘치용(致用)’과 ‘숭덕(崇德)’을 겸하여 가리켜 말하면 ‘정의’는 ‘치용’에 대하여, ‘이용’은 ‘숭덕’에 대하여 각각 체(體)와 용(用)이 되어 안팎이 서로 길러 주는 뜻이 되고, 위 글의 ‘정의’와 ‘이용’만을 가리켜 말한다면 ‘정의’와 ‘치용’이 또 그 자체로서 체와 용이 되어 지(知)와 행(行)이 서로 필요로 하는 뜻이 되니, 비록 서로 밝혀 준 것이라고 하더라도 괜찮습니다.


선대의 학자는 함괘(咸卦) 아래에 예시(例示)한 열 개의 효(爻)는 모두 함괘 구사(九四) 효의 뜻을 이어 이치의 정일(貞一)함을 밝힌 것으로 보았다. 왕래(往來)와 굴신(屈信)은 두 가지가 아니니, 예를 들어 열 개의 효를 가지고 나누어 말한다면 어느 것이 능히 동정(動靜)의 일치(一致)를 알 수 있는 것이고, 어느 것이 대소(大小)의 일치를 알 수 있는 것이며, 어느 것이 안위(安危)의 일치를 알 수 있는 것인가? 또 어느 것이 현미(顯微)의 일치를 알 수 있는 것이고, 어느 것이 손익(損益)의 일치를 알 수 있는 것이며, 어느 것이 굴신(屈信)의 도(道)에 어두워 흉함을 취하는 데 이르게 되는 것인가? 저 음양(陰陽)이 병행(竝行)은 하되 양을 임금으로 삼으니 그 권한을 임금에게 돌리는 것은 하나이고, 동정이 서로 순환은 하되 정(靜)을 주체로 삼으니 그 일을 전적으로 주인에게 돌리는 것은 하나이다. 이것이 천하의 동함이 결국은 항상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니, 정일의 뜻을 이런 관점에서 다 논할 수 있겠는가?

[윤행임이 대답하였다.]
동정(動靜)의 일치(一致)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면 해괘(解卦)의 상육(上六)에 “기구를 몸에 간직하였다가 때를 기다려 움직인다.”고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정(靜)한 속에서 동(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안위(安危)의 일치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면 비괘(否卦)의 구오(九五)에 “편안해도 위태로운 상황을 잊지 않고 보존되어도 망할 염려를 잊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위태로움 속에서 편안히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미(顯微)의 일치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면 예괘(豫卦)의 육이(六二)에 “은미함과 드러남을 알고 부드러움과 강함을 안다.”고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은미함 속에서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손익(損益)의 일치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면 손괘(損卦)의 육삼(六三)에 “세 사람이 가는 데에는 한 사람을 덜고 한 사람이 가는 데에는 벗을 얻는다.”고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더는 것 속에서 보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소(大小)의 일치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면 서합괘(噬嗑卦)의 초구(初九)에 “불의(不義)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작게 징계하여 크게 경계시킨다.”고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작은 것 속에서 크게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 복괘(復卦)의 초구와 같은 경우는 사실상 안위와 현미의 뜻을 겸했다고 할 수 있는데 안자(顔子)가 그것을 따라 행했기 때문에 공자가 “안씨(顔氏)의 아들은 거의 도에 가깝게 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니 그 점에 대해서는 신(臣)이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익괘(益卦) 상구의 “항상 하지 못한다.”고 한 것과 정괘(鼎卦) 구사(九四)의 “밥을 엎었다.”고 한 것과 서합괘 상구의 “형틀을 씌운다.”고 한 것과 곤괘(困卦) 육삼의 “돌에 곤란을 당한다.”고 한 것들은 바로 굴신(屈信)의 도에 어두워 스스로 흉함과 인색함을 취한 것이니, 굳이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 ‘정(貞)’에는 두 개의 뜻이 있습니다. 정형(貞亨)ㆍ정길(貞吉)ㆍ정무구(貞无咎)ㆍ정회망(貞悔亡)이라고 한 것은 대개 여기에 오래하면 형통하고 길하고 허물이 없고 후회가 없어지는 상이 있음을 말한 것이고, 정려(貞厲)ㆍ정린(貞吝)ㆍ정흉(貞凶)ㆍ불가정(不可貞)이라고 한 것은 여기에 오래하면 위태롭고 인색하고 흉하고 오래할 수 없는 상이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래했을 경우를 가리켜 말한 것이고, 이정(利貞)의 성정(性情)과 정고(貞固)의 간사(幹事)는 사덕(四德)을 가리켜 말한 것이니, 정일(貞一)의 뜻을 분변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이상은 계사전 하(繫辭傳下) 제5장이다.


 

[주D-001]공자(孔子)는 …… 폈습니다 : 여기서 지(止)와 행(行), 숨어 있을 때와 쓰일 때라는 것은 “벼슬할 만하면 벼슬하고 그만둘 만하면 그만둔다.[可以仕則仕 可以止則止]”는 것과 “쓰여지면 행하고 버림받으면 숨어 있는다.[用之則行 舍之則藏]”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孟子 公孫丑上》 《論語 述而》
[주D-002]장량(張良)이 …… 주워 오고 : 장량이 이교(圯橋)에서 황석공(黃石公)이 다리 밑에 떨어뜨린 신을 주워다가 그에게 신게 하고 태공(太公)의 병서를 받은 고사를 말한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주D-003]한신(韓信)이 …… 당한 것 : 한신이 젊은 시절에 회음(淮陰)의 한 백정에게서 받은 모욕을 말하는데, 이는 마음속에 큰 뜻을 품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큰 뜻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작은 모욕 정도는 달게 받음을 의미한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주D-004]정일(貞一) : 정부일(貞夫一)의 준말로, 사물(事物)의 변동(變動)은 무궁(無窮)하나 마침내 일리(一理)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周易 繫辭傳下 第1章》

홍재전서 제104권

경사강의(經史講義) 41 ○ 역(易) 4

 

[계사전 하(繫辭傳下) 제4장]

 

양괘(陽卦)는 마땅히 양이 많고 음괘(陰卦)는 마땅히 음이 많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두 개의 우(耦)와 하나의 기(奇)인 경우 굳이 기를 위주로 하고 두 개의 기와 하나의 우인 경우에는 반드시 우를 위주로 삼는 것은 어째서인가? 그 덕행(德行)이라고 한 것은 음양의 덕행을 가리킨 것인데, 굳이 덕행이라고 한 데에는 또 무슨 이유가 있는가?

[이곤수가 대답하였다.]
삼가 집설(集說)을 살펴보면, “적은 것은 많은 것이 종주로 삼는 대상이고 하나는 많은 무리가 귀의(歸依)하는 대상이다.”라고 했습니다. 양괘는 음이 둘이기 때문에 기가 그 주장이 되는 것이고 음괘는 양이 둘이기 때문에 우가 그 주장이 되는 것이니, 음양 및 기와 우의 많고 적은 점에 대해서는 선대 학자들이 이미 다 말하였습니다. 아래 장에서 말한 덕행은 비록 음양의 덕행을 가리킨 것이기는 하나 음양에 군민(君民)의 상이 있으니 또한 인사(人事)로 참고하여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음양이라고 하지 않고 덕행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상은 계사전 하(繫辭傳下) 제4장이다.


 

홍재전서 제104권

 

경사강의(經史講義) 41 ○ 역(易) 4
[계사전 하(繫辭傳下) 제3장]

 

길흉(吉凶)을 말할 때는 ‘생긴다’고 하고 회린(悔吝)을 말할 때는 ‘나타난다’고 한 것은 대개 일에 있을 때와 마음에 있을 때의 차이를 취한 것이다. 후회가 나타난 것이 길(吉)이 되고 인색함이 나타난 것이 흉(凶)이 되니 이는 길흉이 회린에서 생겨난다는 말인데, 여기에서는 도리어 “길흉이 생기고 회린이 나타난다.”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심진현이 대답하였다.]
선대 학자들이 이 부분에 대해 해석하기를, “그 처음을 근원하여 말하면 길흉(吉凶)이 회린(悔吝)에서 생겨나는 것이고, 그 마침을 추구하는 것으로 말하면 회린이 나타남으로 인하여 길흉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참으로 명확한 논리입니다. 대개 잘못을 고치는 것이 회(悔)이니 결국에 가서는 길하게 되는 이치가 있고, 잘못을 꾸며 대는 것이 인(吝)이니 반드시 흉하게 되는 도가 있습니다. 마음에서 후회하는 것은 비록 감추어져 있지만 그 일이 길하게 되는 점을 관찰한다면 결국에는 반드시 나타나고, 마음속에서 인색한 것은 비록 은미하지만 그 일이 흉하게 되는 것을 증거로 본다면 끝내는 반드시 나타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른바 “길흉이 생기고 회린이 나타난다.”는 것은 대개 “은미한 것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은 없으니 마땅히 그 은미할 때를 신중히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자 한 것입니다.


이상은 계사전 하(繫辭傳下) 제3장이다.


 

 홍재전서 제104권

경사강의(經史講義) 41 ○ 역(易) 4

 

[계사전 하(繫辭傳下) 제2장]

 

상(象)은 기(氣)로 말하고 법(法)은 형상으로 말한 것이다. 하늘에 상으로 나타난 것은 해ㆍ달ㆍ별 들로서 문채가 아닌 것이 없는데 다만 새와 짐승의 문채만을 말하였고, 땅에 드러난 것은 날짐승ㆍ들짐승ㆍ동식물 들이 형체가 아닌 것이 없는데 다만 마땅함[宜]만을 말한 것은 어째서인가? 또 새와 짐승의 문채는 하늘이 만들어 낸 물건으로 날아다니는 것은 양(陽)이고 걸어 다니는 것은 음(陰)이며, 땅의 마땅한 것은 바로 땅에서 생산된 물건으로 나무는 양이고 풀은 음이다. 그렇다면 상을 관찰하는 중에 법이 그 속에 들어 있고, 법을 관찰하는 중에 상이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인가?

[이면긍(李勉兢)이 대답하였다.]
하늘에서 상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은 해와 달, 별, 바람과 구름, 우레와 비, 추위와 더위, 밤과 낮 따위가 이것이고, 땅에서 법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산림(山林)과 천택(川澤), 금옥(金玉)과 흙, 돌, 흐르는 물과 솟은 언덕, 높고 낮은 땅 따위가 이것이니, 새와 짐승의 문채와 풀과 나무의 마땅함에 이르러서도 여기에서 취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왕소소(王昭素)가 “‘여(與)’와 ‘지(地)’ 사이에 천(天) 자가 있어야 한다.”고 한 주장을 비록 믿을 수는 없지만, 굳이 새와 짐승을 하늘에 소속시키고 마땅함[宜]을 땅에 소속시킨 것을 가지고 마치 대(對)를 들어 말한 것 같다고 할 필요도 없고, 날짐승과 들짐승, 풀과 나무를 음과 양으로 나누어 상(象)과 법(法)에 소속시킬 필요도 없습니다. 음 가운데 양이 있고 양 가운데 음이 있으니, 하나의 날짐승과 들짐승, 풀 한 포기와 나무 한 그루가 음양의 이치를 갖추지 않은 것이 없는데, 유독 날짐승과 나무를 양으로 보고 들짐승과 풀을 음으로 본단 말입니까. 시중항(柴中行)과 항안세(項安世)의 주장에 대해서는 굳이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장은 대개 성인이 8괘(卦)를 그려 백성들이 이용하기에 앞서 도구를 만들어 천하를 이롭게 한 일을 말한 것이다. 만약 13괘의 제작에 대한 의의를 가지고 성인께서 반드시 이들 괘를 보고서 그 이름과 형상을 취했다고 한다면 그 뜻이 통하지 않게 된다. 포희(庖羲)의 시대에는 다만 8괘의 이름과 형상이 있었을 뿐이고, 64괘의 이름과 형상은 문왕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황제(黃帝)와 신농(神農), 요(堯)와 순(舜)이 어찌 미리 그 이름과 형상을 취하여 제작할 수 있었겠는가. 경문(經文)에서 “대개 취하였다.”는 뜻은 아마도 이 때문인 것 같다. 또 그 제작이 결승(結繩)에서 시작되어 서계(書契)로 끝을 맺었는데, 그중 어떤 것은 괘상(卦象)을 취하기도 하였고 어떤 것은 괘덕(卦德)을 취하기도 하였으며 또 어떤 것은 괘의(卦義)를 취하기도 하였다. 상(象)과 덕(德)과 의(義)를 취한 이유와 저 선후의 순서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말해 줄 수 있겠는가? 중간의 한 장에서 통변(通變)과 신화(神化)의 성과를 말하면서 유독 황제(黃帝)와 요순(堯舜)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였는데, 황제와 요순을 말하면서 유독 건곤(乾坤)에서 의의를 취한 것은 무슨 의미인가?

[김희조가 대답하였다.]
복희(伏羲)가 그린 것은 8괘에 불과하고 64괘는 분명히 문왕이 추가로 그린 것이니, 상고 시대의 성인이 제작함에 각각 13괘 중에서 상을 취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의심스럽습니다. 혹자는 “복희(伏羲) 시대에 이미 64괘가 갖추어져 있었다.”고 하고, 또 “연산역(連山易)은 8만여 마디의 말인데 그 괘도 64개이고, 신농씨(神農氏)를 일명 열산씨(列山氏)라고 하니, 연산역은 바로 신농의 역(易)이다.”라고 합니다. 과연 이러하다면 문왕 이전의 여러 성인들이 도구를 만들 때 상을 취한 것은 진실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다만 위의 두 주장에 대해 주자는 “이것은 전거로 들만 한 것이 없으니 우선 빼놓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으니, 그렇게 되면 후인들의 의심은 끝내 풀릴 수 없게 됩니다. 어리석은 신 혼자의 생각으로서는 64괘는 진실로 문왕에게서 시작되었으나, 천지조화의 이치와 같은 것은 문왕 이전에 이미 갖추어졌기 때문에 여러 성인들의 가슴속에는 절로 이 한 부(部)의 괘와 상이 있게 되어 그 결과 그것으로 쟁기와 보습을 만들기도 하고, 배와 노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궁실(宮室)과 동우(棟宇)를 만들기도 한 것이니, 일찍이 13괘가 그려지기를 기다리지 않고서도 많은 제작이 이미 13괘의 상과 묵시적으로 서로 부합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렇게 말하면 경문에서 “대개 취하였다.”는 뜻은 막힘이 없을 것 같습니다.
상을 취하거나 의를 취한 것의 차이점과 먼저냐 뒤이냐의 순서에 대해서는 주석에서 이미 말하고 있으니, 신이 굳이 상세하게 덧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또 통변과 신화를 말하면서 유독 황제와 요순에 대해서만 상세하게 설명하고 황제와 요순을 말하면서 유독 건곤에서 의의를 취한 것에 대해서는 오징(吳澄)과 소준(蘇濬)의 다음과 같은 내용의 두 주장이 있습니다. 대개 신농(神農) 이전에는 백성들의 쓰임이 폭넓지 않고 인문(人文)이 열리지 않았었는데 황제와 요순의 시대로 넘어오면서 백성들의 쓰임이 날로 폭넓어지고 인문이 날로 열려 다시 소박함을 지킬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변화를 통하게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그것을 따르되 게으르지 않게 하였고 그 변화를 신령스럽게 하여 백성들이 마땅하게 여기면서도 그렇게 되는 것은 모르게 하였으니, 변통과 신화를 유독 상세히 말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건곤은 여러 괘의 종주인데, 황제와 요순의 정치는 천지의 운행에 꼭 맞아 태곳적의 미개함을 씻어 영원토록 성인의 종주가 되었으니, 건곤에서 취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주장이 어찌 우리를 속이기 위한 것이겠습니까.


 

이상은 계사전 하(繫辭傳下) 제2장이다.


 

[주D-001]13괘 : 계사전 하(繫辭傳下) 제2장에 “그물을 만드는 의의는 이괘(離卦)에서 취하였다.”고 하는 등의 13괘를 말한 것이다.

홍재전서 제104권

 

경사강의(經史講義) 41 ○ 역(易) 4

 

[계사전 하(繫辭傳下) 제1장]

 

“동(動)이 그 가운데 들어 있다.”고 할 때의 ‘동’과 “동하는 데에서 생겨난다.”고 할 때의 ‘동’에 대해 《본의(本義)》에서는 모두 ‘괘효(卦爻)의 동’으로 해석하였는데, 소준(蘇濬)은 “여기에 보이는 동과 아래 글에 보이는 동하는 데에서 생겨난다는 것과 천하의 동함이라는 세 개의 동은 다 같다. 역의 말은 본래 성인이 천하의 동하는 이치를 보고 붙인 것이다. 그래서 천하의 움직임[動]을 고무시키는 것은 말속에 들어 있다고 한 것이니, 이것은 바로 동이 그 속에 들어 있다는 말이지 괘효를 움직인다는 말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말뜻이 더욱 명확한 듯한데, 《본의》에서 취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김희조가 대답하였다.]
이 장에 보이는 세 개의 ‘동(動)’은 해석이 같지 않습니다. 주자는 대개 “동한다는 측면은 비록 같지만, 예를 들어 ‘덕(德)만이 하늘을 움직인다’고 한다면 그 움직임의 주체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고 ‘지금 하늘이 위엄을 보인다’고 한다면 그 움직임의 주체는 하늘에게 있는 것이므로, 한 가지 예로써 논할 수 없는 점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동이 그 속에 있다.”고 할 때의 동 자와 “동에서 생겨난다.”고 할 때의 동 자를 괘효(卦爻)의 ‘동’에 해당시키고, 하단에 보이는 “천하의 동함이다.”라고 할 때의 ‘동’을 사물의 동함에 귀속시킨 것이니, 이는 진실로 역의 진정한 의리를 설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 소씨(蘇氏)는 다만 우중상(虞仲翔 우번(虞翻))이 남긴 말만을 답습하여 마침내 세 개의 동 자의 의미가 모두 같다고 보았으니, 견해의 차이가 매우 심합니다. 옛날에 왕필(王弼)이 “천하의 동함이다.”라고 할 때의 ‘동’을 천하의 모든 일의 움직임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왕필도 오히려 이것을 알았는데 소씨가 도리어 알지 못하였으니, 《본의》에서 그의 말을 취하지 않은 것은 당연합니다.


길(吉)하고 흉(凶)함은 후회와 인색함이 쌓여 생긴 것이다. 천하의 일은 길이 아니면 흉이고 흉이 아니면 길인데, 늘상 이 둘은 서로 이기면서 그치지 않는다. 상승(常勝)이라는 말로 ‘정승(貞勝)’을 해석하는 것이 이미 여러 사람들의 정론(定論)인데, 장자(張子)는 ‘바른 것이 이긴다’고 보았으니 그것도 취할 만한 점이 있는가? “효(爻)와 상(象)이 안에서 움직이고 길함과 흉함은 밖으로 나타난다.”고 한 것을 《본의》에서는 시초와 괘의 안과 밖으로 해석하였는데, 혹자는 “효와 상은 움직이되 형체가 없기 때문에 안이라고 한 것이고, 길함과 흉함은 드러나서 자취가 있기 때문에 밖이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이 서로 밝혀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성종인이 대답하였다.]
길함과 흉함은 상(象)에 드러나고 이기고 지는 것은 수(數)에 들어 있는데, 천하에 일정한 상은 있어도 일정한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수와 상은 서로 이기는 것으로서 길(吉)이 흉(凶)을 이기기도 하고 흉이 길을 이기기도 하여 그 이치는 바르면서 일정함이 있고 일정하여 그치지 않는 것이니, 대개 그 역시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주자가 ‘상(常)’으로 ‘정(貞)’을 해석한 것은 이러한 뜻이었습니다. 장자(張子)의 주장은 전적으로 천하의 바른 것이 반드시 이기게 되어 그 끝을 추구하면 흉함이 길함을 이길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대개 ‘순(順)을 따르면 길하고 역(逆)을 따르면 흉한 것’이 바른 이치인데 선이 더러 흉함을 만나기도 하고 악이 도리어 길함을 얻는 것은 바른 것이 아니니, ‘바른 것이 이긴다’고 한 점은 말뜻이 매우 친절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貞)’을 ‘상(常)’이라고 말하면 그 속에는 이미 ‘바르다[正]’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만 ‘정(貞)’을 ‘바르다[正]’는 뜻으로 푼다면 ‘상(常)’의 뜻까지 다 담을 수 없습니다. 이는 아래 글에서 말한 ‘정관(貞觀)’과 ‘정명(貞明)’을 보더라도 서로 연관되지 않으니, 만약 ‘정관’과 ‘정명’을 ‘정관(正觀)’과 ‘정명(正明)’이라고 한다면 이것이 과연 무슨 말이 되겠습니까.
시초(蓍草)의 덕은 둥글고 괘(卦)의 덕은 네모진 속에 효(爻)와 상(象)은 먼저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효와 상이 안에서 움직인다.”라고 한 것이고, 시초를 뽑아 손가락에 끼워 괘가 이루어져야 길흉이 비로소 드러나기 때문에 “길흉이 밖에 드러난다.”라고 한 것이니, 《본의》의 뜻은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혹자는 형체가 없는 효와 상을 안에 소속시키고 자취가 있는 길흉을 밖에 소속시켰으니, 안과 밖의 구분을 말한 점은 친절한 듯 보이지만 시초와 괘를 버리고 안팎만을 말한다면 효와 상이 어느 곳에 보이고 길과 흉이 어떠한 일에서 징험되겠습니까. 이러한 시각으로 본다면 아래 글에서 “변화에 나타나고, 말에 보인다.”고 한 것은 시초와 괘의 변화와 밖에 드러난 말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 이 주장은 아마도 통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상은 계사전 하(繫辭傳下) 제1장이다.

홍재전서 제104권

경사강의(經史講義) 41 ○ 역(易) 4

 

[계사전 상(繫辭傳上) 제12장]

 

주자가 혹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기(奇)와 우(耦)의 두 획을 가지고 ‘입상(立象)’을 해석하고 기와 우가 괘에 설치된 것을 가지고 ‘설괘(設卦)’를 해석하였는데, 최경(崔憬)은 “입상은 복희(伏羲)가 하늘을 관찰하고 땅을 살펴 8괘(卦)의 상을 세워 그 뜻을 다한 것이고, 설괘는 그것으로 인해 겹으로 쌓아서 64괘를 만든 것이니 진위(眞僞)가 그 속에 다 들어 있다. 괘사(卦辭)와 효사(爻辭)를 지어서 복희가 괘를 만든 상에 붙였으므로 상이 이미 그 의미를 다 담고 있다. 그래서 괘사와 효사도 할 말을 다하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이 비교적 명백한 것 같은데, 이 말을 따르더라도 무방한가? 변통(變通)시키고 고무(鼓舞)시키는 것에 대해 《주자어류》에서는 점서(占筮)를 다 포괄하여 설명하고 있지만 상사(象辭) 중에 곧 변통시키고 고무시키는 묘미를 이미 갖추고 있으니, 이는 다만 점서로 인하여 쓴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아래 글에서 “화(化)하여 재단함은 변(變)함에 있고 미루어 행함은 통(通)함에 있다.”고 한 것은 모두 상사(象辭) 가운데의 이치에 변과 통이 들어 있음을 가리킨 것이지, 전적으로 7, 8, 9, 6의 변화만을 말한 것은 아닌 듯한데, 어떤지 모르겠다.

[성종인이 대답하였다.]
성인(聖人)이 괘(卦)를 설치함에 상(象)이 그 가운데 들어 있으니, 상은 괘와는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상이 있은 뒤에 괘가 있는 것이니, 상이 먼저이고 괘가 뒤입니다. 그러므로 주자(朱子)는 마침내 건의 실(實)과 곤의 허(虛)를 본떠 기(奇)와 우(耦)를 만든 것을 ‘입상(立象)’에 소속시켰고 기와 우가 괘획(卦畫)에 드러난 것을 ‘설괘(設卦)’라고 보았으니, 그 조리와 맥락이 매우 정밀합니다. 최씨(崔氏)의 주장대로라면 그가 “8괘의 상을 세웠다.”고 한 것은 이미 ‘설괘’의 뜻을 범하고 있어 괘와 상에 대해 전혀 구분이 없습니다. 또 양의(兩儀)에서 8괘에 이르고 그것이 64괘에까지 이르는 것은 곧 자연의 수이니, 비록 괘획만을 말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그것으로 인해 겹으로 쌓았다.”고 하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복희의 괘획과 문왕의 괘명(卦名)을 둘로 나누는 것에 대해 신은 옳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후세의 학자들이 자주 최씨(崔氏)와 오징(吳澄)의 설을 말하는데, 과연 무엇을 보고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변통시키고 고무시킨다.”고 한 말은 오직 음양의 노소(老少)의 변화가 점서(占筮)에 나타난 것이니, 그 변화로 인해 통하고 그 통함으로 인해 이치가 순조롭게 되어 저절로 고무의 성대함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대개 그렇게 되는 묘리는 비록 점서의 외면에 있지만 능히 이와 같을 수 있는 도는 반드시 점서로 인해 드러나는 것이니, 주자가 단연코 이것을 점서로 본 것은 다만 그 드러난 것을 근거로 하여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체용(體用)은 본래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니, 후세의 학자들이 “상사(象辭) 가운데 변(變)과 통(通)이 있으니 전적으로 7, 8, 9, 6만을 말한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도 주자가 아직 말하지 않은 뜻을 밝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래에서는 건곤(乾坤)을 ‘역의 문’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건곤을 ‘역 속에서도 쌓여진 것’이라고 하였고, 위에서는 “천지(天地)의 자리가 설정되면 역이 그 가운데에 행한다.”라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건곤(乾坤)이 열(列)을 이루면 역이 그 가운데 성립된다.”라고 하니, 문이라고 하고 쌓인 것이라고 하며 행한다고 하고 성립된다고 한 뜻에 대해 자세하게 말해 줄 수 있겠는가? “형이상(形而上)을 도(道)라 한다.”고 할 때의 ‘도’와 “한 번은 음이 되고 한 번은 양이 되게 하는 것을 도라고 한다.”고 할 때의 ‘도’는 차이가 없다. “한 번은 음이 되고 한 번은 양이 되게 하는 것을 도라고 한다.”는 측면에서 말하면 음양은 오히려 형이하(形而下)에 속하지만 “하늘은 높고 땅은 넓다.”고 한 측면에서 말하면 음양은 도리어 형이상에 속하여야 하는 것인가?

[심진현이 대답하였다.]
‘쌓였다[蘊]’는 것을 가지고 말하면 건곤(乾坤)은 안에 있고 역(易)이 밖에서 싸고 있는 것 같고, 문(門) 자를 가지고 말하면 건곤이 밖에 있어 역이 그 안에서 운행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쌓였다’는 말은 바로 함축의 뜻이니 이것은 《역경》이 함축하고 있는 것이 대체로 건양(乾陽)과 곤음(坤陰)의 도임을 이르는 것이고, ‘문’이라는 물건은 열고 닫는 상징이 있으니 이것은 역의 도가 변화하는 것이 음이 닫히고 양이 열리는 이치에 불과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설이 비록 다르기는 하지만 그 뜻은 같습니다. “천지의 자리가 설정(設定)되면 역이 그 가운데에 행한다.”고 하는 말은 대개 천지가 있으면 곧 이 역이 있어 천지 사이에 유행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건곤이 열을 이루면 역이 그 가운데 성립된다.”고 하는 것은 대개 건양과 곤음이 그 열을 이루면 역의 체(體)가 그 가운데에 성립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화(造化)와 유행(流行)의 측면에서 말하면 ‘행한다’고 하고 괘위(卦位)가 체를 이룬 측면에서 말하면 ‘선다’고 하는 것이니, 경문(經文)이 같지 않음은 진실로 당연한 것입니다.
음양 그 자체를 도라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은 음이 되고 한 번은 양이 되게 하는 이치가 바로 도이니, 이른바 음양이라는 것도 형이하(形而下)의 형기(形器)에 불과합니다. 지금 저 높은 하늘이라는 형기에도 본래 하늘이 되는 이치가 들어 있으며 저 넓은 땅이라는 형기에도 절로 땅이 되는 이치가 있으니, 이치라는 것이 바로 이른바 형이상(形而上)의 도입니다. 음양과 같은 것은 이미 경험으로 파악할 수도 있고 또 상징으로 본뜰 수도 있으니, 형이상의 이치에 소속시켜서 마침내 도라고 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이상은 계사전 상(繫辭傳上) 제12장이다.


 

 

홍재전서 제104권

경사강의(經史講義) 41 ○ 역(易) 4

 

[계사전 상(繫辭傳上) 제11장]

 

“시초는 둥글면서 신령스러우며 괘는 모나면서 지혜롭다.”고 한 것은 모두 덕(德)을 가지고 말한 것인데, 유독 효(爻)에 대해서만 “변하면서 알려 준다.”고 하여 의(義)로 말한 것은 어째서인가? 《주자어류(朱子語類)》에서는 “마음을 씻어서 물러나 감춘다.”고 한 것을 체(體)로 보고, “미래를 알고 과거를 간직한다.”고 한 것을 용(用)으로 보았다. 그러나 만약 “신령스러움으로 미래를 알고 지혜로써 과거를 간직한다.”고 한 구절은 나누어 말한다면 과거를 간직하는 것이 체가 되고 미래를 아는 것이 용이 되는가? ‘역(易)으로 물욕의 마음을 씻는다’는 주장에 대해 선대 학자들이 비난한 것은 참으로 옳다. 《본의(本義)》에서 “티끌 하나만큼의 누(累)도 없다.”고 한 것에 대해서도 의심이 없을 수 없다. 성인(聖人)의 마음은 본래 누가 없는 것인데, 굳이 그것을 씻어 내야만 티끌만 한 누도 없게 된단 말인가. 공환(龔煥)이 ‘의도적인 생각이 없는 것’을 ‘마음을 씻는 것’으로 해석하고 ‘인위적인 행위가 없는 것’을 ‘물러나 감추는 것’으로 해석한 것은 이치가 있는 듯한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윤행임(尹行恁)이 대답하였다.]
“둥글면서 신령스럽고 모나면서 지혜롭다.”고 한 것은 시초와 괘의 덕(德)을 말한 것이고, 효(爻)로서는 의심을 단정하기 때문에 “변역(變易)을 하면서 사람에게 고한다.”고 한 것이니 이것이 의(義)로써 말한 것입니다. 주자(朱子)의 체(體)와 용(用)에 대한 설은 이미 《주자어류》에 갖추어져 있습니다. “미래를 알고 과거를 간직한다.”고 한 것을 두 구절의 체용으로 나누어 말한 것이니, 예로 들면 주자가 또 “시초의 수는 7로 7×7=49가 되어 양(陽)에 속하지만 정해진 체는 없고, 괘의 수는 8로 8×8=64가 되어 음(陰)에 해당되는데 이미 정해진 체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두 구절의 체용에 대해서는 주자도 이미 상세하게 말하였습니다. “마음을 씻는다.”고 한 훈고는 곧 티끌만큼의 누도 없음을 말한 것이니, 공씨(龔氏)가 해석한 의도적인 생각이나 인위적인 행위가 없다는 것도 근거가 없지는 않습니다.


역은 다만 음양(陰陽)일 뿐이고, 그 음양을 변화하게 하는 이치는 태극(太極)이다. 그러므로 “역에 태극이 있다.”고 한 것이니, 이른바 “한 번은 음이 되고 한 번은 양이 되게 하는 것을 도라고 한다.”고 한 것과 그 이치가 같다. 도와 태극은 본래 두 개가 아닌데 도에는 도라는 명칭이 있고 태극에는 태극이라는 명칭이 있으니, 이치가 같은데 명칭이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위 장에서는 “여섯 효(爻)의 움직임은 삼극(三極)의 도이다.”라고 하였는데, 삼극의 ‘극(極)’은 여기에서 말한 태극의 ‘극’과 극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저기에서는 ‘삼극’이라고 하고 여기에서는 ‘태극’이라고 한 데에는 특별히 말할 만한 차이가 있는가?

[이청(李晴)이 대답하였다.]
도(道)와 태극(太極)은 본래는 하나인데 그 명칭만 달리한 것이니, 그 음양을 변화하게 하는 것을 가리켜 말할 때는 ‘태극’이라고 하고, 순환하고 운행하게 하는 것을 가리켜 말할 때는 ‘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대개 ‘태극’은 동정의 이치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능히 동(動)하여 양(陽)이 되고 능히 정(靜)하여 음(陰)이 되는 것이니, 능한 것은 ‘기(氣)’이고 능하게 하는 것은 ‘이(理)’입니다. 그러나 ‘이’는 스스로 행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기’의 힘을 이용하여 행합니다. 그러므로 ‘기’가 행하면 ‘이’ 또한 행하는 것이니, ‘이’와 ‘기’가 합해져야만 비로소 운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이’만을 말하고 ‘기’를 말하지 않는다면 운행의 뜻을 볼 길이 없을 것이고, ‘기’만을 말하고 ‘이’를 말하지 않는다면 운행하게 하는 것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운행의 가운데 나아가 운행하게 하는 이유를 겸하여 가리켜서 ‘도’라고 하는 것이니, 그렇다면 ‘태극’이란 이 이(理)의 지극한 곳이고 ‘도’는 바로 운행하게 하는 것으로, 이른바 같은 물(物)이면서 그 이름을 달리한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저 ‘삼극(三極)’과 ‘태극(太極)’은 본래 똑같은 ‘극(極)’인데, 태극은 괘효(卦爻)가 생겨나기 이전의 것으로 하나의 태극을 전체로 말한 것이고, 삼극은 괘효가 이미 동한 뒤에 각각 하나의 태극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의(本義)》에서는 “천(天)ㆍ지(地)ㆍ인(人) 삼재(三才)가 각각 하나의 태극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토대로 말한다면 태극과 삼극은 가리키는 것은 달라도 그 본원을 궁구하면 동일한 태극이므로, 사실상 말할 만한 차이점은 없습니다.


 

이상은 계사전 상(繫辭傳上) 제11장이다.


홍재전서 제104권

경사강의(經史講義) 41 ○ 역(易) 4

 

[계사전 상(繫辭傳上) 제10장]

 

이 장에서 처음에는 ‘성인(聖人)’이라고 하고서 ‘시이(是以)’라는 말 아래에는 ‘군자(君子)’라는 말로 이었는데, ‘군자’라고 한 것은 위의 ‘성인’을 가리켜 말한 것인가, 아니면 군자를 일반적으로 일컬은 것인가? ‘유위유행(有爲有行)’의 네 글자에 대해 주씨(朱氏)는 “유위(有爲)는 일을 만드는 것이고 유행(有行)은 일을 거행하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오징(吳澄)은 “유위는 내면의 일을 만드는 것이고 유행은 외면의 일을 만드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채청(蔡淸)은 “자신에게 행하는 것이 유위이고 사업에 시행하는 것이 유행이다.”라고 하였다. 그중 어느 설이 나은가?

[강세륜이 대답하였다.]
위의 ‘성인’은 역을 만든 성인이니 바로 복희(伏羲)ㆍ문왕(文王)ㆍ주공(周公)을 이르는 것이고, 아래의 ‘군자’는 역을 쓰는 군자이니 세 성인의 뒤에 나와서 역을 쓰는 도를 아는 자들이 모두 이 군자의 칭호에 해당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멀건 가깝건 간에 상관없이 결국 미래의 일을 아는 문제라면 천하의 지극히 정밀한 사람만이 거기에 참여할 수 있으니, 우리 공자가 아니면 그 누가 거기에 해당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계사(繫辭)는 바로 공자의 말씀이니, ‘군자’라고 한 것은 일반적으로 일컬어지는 군자인 듯합니다. ‘위(爲)’와 ‘행(行)’ 두 글자의 개념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는 일의 시작이고 ‘행’은 일의 끝으로 자신에게서 시작하여 일에서 마친다면 그것 또한 안팎의 구별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니, 오씨(吳氏)와 채씨(蔡氏) 두 선대 학자의 주장은 진실로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일을 만들고 일을 거행한다고 할 때 그 일이 다르지 않으니, 주씨(朱氏)의 주장은 전혀 별다른 뜻이 없습니다. 또 ‘유위(有爲)’와 ‘유행(有行)’은 모두 앞으로 하려 하고 앞으로 행하려는 일이니, 이는 번갈아 써서 대구를 만든 예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이렇게 나누어 배속하는 것은 성인께서 입언(立言)하신 취지가 아닌 것 같습니다.


소자(邵子)가 말하기를, “적연부동(寂然不動)은 근본을 돌이켜 정(靜)을 회복하는 것이니 곤(坤)의 시기이고, 감이수통(感而遂通)은 양(陽)이 가운데에서 움직여 그 정(靜)과 동(動)의 사이에는 털끝만큼의 공간도 허용치 않는 것이니 복(復)의 뜻이다.”라고 하였고, 곽씨(郭氏)는 “역은 의도적인 생각이 없고 인위적인 행동이 없어 마땅히 인사(人事)와는 서로 감응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도리어 천하의 일에 통하니, 이는 역이 천하의 지극히 신묘함이 되는 이유이다.”라고 하였으며, 정자(程子)는 “이것은 다만 사람의 분수 상의 일을 말한 것이다. 만약 도(道)를 논한 것이라면 모든 이치가 다 갖추어져 있어 굳이 감응하고 안 한 것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였고, 주자(朱子)는 “이것은 본래 역리(易理)를 설명한 것이지 인사(人事)를 설명한 것이 아닌데, 많은 사람들은 다 사람을 가탁하여 설명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과연 주자의 말대로라면 경문(經文)의 본뜻은 원래 사람의 분수와는 상관되지 않는 것인가?

[심진현(沈晉賢)이 대답하였다.]
이 장의 요지는 바로 성인이 역(易)을 사용하는 요체이니, 이른바 괘변(卦變)이니 상점(象占)이니 하는 것도 모두 역의 도 가운데에서 유추하여 그대로 사람의 분수상의 수용(需用)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이 ‘적연부동 감이수통(寂然不動感而遂通)’이라고 한 것도 이 네 개의 체(體)가 발하여 용(用)이 된 것입니다. 만약 그 체의 한 측면에서 말한다면 순수하게 역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만약 그 용의 한 측면에서 말한다면 역이 어찌 스스로 쓰여질 수 있겠습니까. 소자(邵子)가 적연(寂然)을 곤괘(坤卦)의 정(靜)으로 보고 감통(感通)을 복괘(復卦)의 동(動)으로 본 것은 진실로 동정(動靜)의 이치로써 말한 것입니다. 만약 괘변과 상점만을 가지고 말한다면 아마도 이(理)라는 한 측면에만 해당시킬 수 없으며 그 사이에 인위적(人爲的)인 일이 없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정자가 굳이 사람의 분수를 가지고 해설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만약 도를 논한 것이라면 모든 이치가 다 갖추어져 있어 굳이 감응하고 안 한 것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대개 역의 도에 고요함도 있고 통함도 있는 것은 또한 자연의 이치입니다. 저 태극(太極)이라는 것이 고요한 것이지만 나누어 양의(兩儀)를 내면 통하게 되고, 음(陰)이라는 것이 고요한 것이지만 변하여 양(陽)이 되면 통하게 됩니다. 감응하는 것은 바로 음양(陰陽) 두 기운이 유행하는 것으로 두 기운이 유행하면 천하의 일 가운데 통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될 것이니, 주자가 “본래 역을 말한 것이지 사람을 말한 것이 아니다.”라고 해석한 데에 어찌 그만한 이유가 없겠습니까.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이 장의 요지는 전적으로 시초(蓍草)와 괘(卦)에 대하여 말한 것이니, ‘적연부동(寂然不動)’도 역이고 ‘수통천하지고(遂通天下之故)’도 역입니다. 그러면 감응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종을 치는 것에 비유하면 종을 치는 자는 사람이고, 거울을 비추는 것에 비유하면 거울을 비추는 자는 사람이니, ‘도가 헛되이 행해지지 않는다’는 뜻이 참으로 맞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경문(經文)의 본뜻 또한 도와 사람에 관하여 종합하여 말한 것이고, 정자와 주자의 훈고는 각각 한 단면으로 치우치게 말한 것입니다. 곽씨(郭氏)의 주장은 바로 인사(人事)와 서로 감응할 수 없다는 것으로 말하였으니, 이것을 어찌 도를 아는 사람의 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상은 계사전 상(繫辭傳上) 제10장이다.


 

[주D-001]네 개의 체(體) : 무사야(無思也), 무위야(無爲也), 적연부동(寂然不動), 감이수통(感而遂通)을 가리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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