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헌선생문집 제8권_

잡저(雜著)_

 

영모록서(永慕錄序)

 

무릇 천지의 사이에 몸을 두고 있는 자라면 그 누구인들 자식이 되어 양친부모(兩親父母)가 남겨주신 몸을 계승한 자가 아니겠는가. 다만 기맥(氣脈)을 곧바로 전하여 종통(宗統)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성(姓)을 따르고 어머니의 성은 따르지 않으며, 집안에 두 높은 분이 없기 때문에 상복(喪服)에 참최복(斬衰服)과 자최복(齊衰服)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생성(生成)하고 사랑하여 길러준 은혜에 있어서는 실로 어찌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간격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자식이 어머니에 있어 사랑하고 도와주는 마음이 일찍이 한결같지 않은 것이 아니며, 부모가 아들자식과 딸자식을 사랑하고 예쁘게 여기는 정이 일찍이 차이가 있지 않으니, 이것이 참으로 인지상정(人之常情)이 아니겠는가. 성인(聖人)이 외가(外家)의 선대(先代)에 아울러 극진히 하고 외당(外黨)의 여러 친족에 그 후대(厚待)함을 모두 미루고자 하지 않은 것이 아니나, 다만 의리에 똑같이 하기 어려운 점이 있고 형편상 미치지 못함이 있을 뿐이다.
내가 보니, 세상 사람들은 외종(外宗)과 외당(外黨)에 대하여 한결같이 박대하면서 이것을 마침내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는바, 저들은 그 어머니의 태(胎) 속과 젖 아래에서 정성을 쌓은 수고로운 은혜를 생각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정을 쏟아야 하고 힘이 미칠 수 있는 곳에 어찌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일찍이 한 책을 만들어 정간(井間)을 나누고 내외(內外)의 선대들을 써 넣되 본종(本宗)은 미쳐 아는 바에 따라 그 분파(分派)된 것을 자세히 기록하고, 외종은 모두 시조(始祖)로부터 내 몸까지의 대수(代數)에 이르러 그치게 하였다.
그리하여 대마다 모두 장가든 성씨(姓氏)와 자녀들의 이름과 누구에게 시집간 것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비록 여러 파의 족류(族類)들을 다 쓰지는 않았으나 각자 본래의 보첩(譜牒)이 있으므로 또한 내가 만든 이 책자의 자녀의 이름과 누구에게 시집간 것을 참고한다면 대수와 항렬(行列)을 모두 알 수 있을 것이니, 나는 이 때문에 이 기록을 만들었다.
이 기록을 지목하여 《영모록(永慕錄)》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효도하고 화목하게 하는 도리를 미루어 넓힌 것이다. 내가 나의 어머니를 어머니로 받드는 마음을 가지고 미루어 올라가 보면 나의 선고(先考)께서 조비(祖妣)를 높이심과 나의 조부(祖父)께서 증조비(曾祖妣)를 높이심과 나의 증조고(曾祖考)께서 고조비(高祖妣)를 높이신 것이 그 정이 또한 어찌 다르겠는가.
또 미루어 올라가 백대의 무궁한 조상에 이르고 또 미루어 넓혀서 외종(外宗)의 외종에 이른다면 그 또한 무궁한 선조에 이를 것이니, 이는 나에게 모두 부모의 도리가 있고 나 역시 모두 후손의 이치가 있다. 만일 미쳐 듣고 알지 못하는 분은 어쩔 수 없거니와, 혹시라도 듣고 또 앎이 있다면 어찌 무관심할 수 있겠는가.
지금 나는 혹시라도 선대의 묘소가 있는 산을 안다면 반드시 이것을 기록하였으니, 혹 그 후손이 된 자들은 내외손(內外孫)을 막론하고 그 곳을 지날 경우 한번 바라보고 절을 올린다면 이 또한 큰 다행일 것이다.

 

여헌선생문집 제8권_

잡저(雜著)_

 

 

역학도설서(易學圖說序)

 

 

역(易)은 바로 천지(天地)이니, 천지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만변 만화(萬變萬化)와 만사 만물(萬事萬物)이 그 가운데에 있게 되었다. 역(易)이 어찌 이것을 벗어나 별도로 딴 도리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천지는 진실로 스스로 천지가 있고, 만변 만화는 진실로 스스로 만변 만화가 있고 만사 만물은 진실로 스스로 만사 만물이 있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천지가 자연히 역이 되는 것이다.


고유한 천지와 고유한 변화(變化)와 고유한 사물(事物)을 보면 여기에 역이 있는 것이니, 역을 굳이 다시 책을 만들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성인(聖人)이 반드시 역의 책을 만든 것은 어째서인가? 이는 바로 우리 인간을 위하여 만든 것이다.
사람은 진실로 누구나 몸을 가지고 있는데 지극히 가까운 것은 이 몸보다 더한 것이 없다. 그러나 이(耳), 목(目), 구(口), 비(鼻)가 이, 목, 구, 비가 된 이치와 사지(四肢), 백해(百骸)가 사지, 백해가 된 이치와 오장(五臟), 육부(六腑)가 오장, 육부가 된 이치를 아는 자는 드물다.


더구나 혼륜(渾淪)한 것을 우러러보고 하늘이 된 이치를 알며, 방박(磅礴)한 것을 굽어보고 땅이 된 이치를 알며, 만물이 떼지어 사는 가운데에 있으면서 만물의 이치를 아는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형체를 보고 이치를 알며 그릇을 보고 도를 알며 사물을 보고 법칙을 알며 드러난 것을 보고 은미한 것을 아는 자는 성인이 아니면 가능하겠는가.


사람이면서 이 도리를 알지 못한다면 이 역시 새와 짐승일 뿐이요 풀과 나무일 뿐이며, 서되 마땅히 서야 할 땅을 알지 못하고 행하되 마땅히 행하여야 할 길을 알지 못한다면 어찌 삼재(三才)의 도에 참예하겠는가. 성인이 이것을 걱정하여 부득이 역(易)을 만들어서 방책(方冊)의 위에 천지를 모상(模象)하였다. 이러한 뒤에야 신명(神明)의 덕(德)을 이로써 통하고 만물(萬物)의 정(情)을 이로써 유추할 수 있었다.


무릇 우주(宇宙) 사이의 이른바 만변 만화와 만사 만물이 모두 이 역의 포함하는 바와 덮는 바가 되어 고금(古今)의 구별이 없고 유명(幽明)의 차이가 없으며 멀고 가까움의 구별이 없고 크고 작음의 차이가 없이 모두 도망할 수 없으니, 이는 진실로 역이란 책이 과연 위대하고 지극하다는 실제에 걸맞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에 비로소 책 속에 있는 역을 가지고 천지의 역을 알고 모상한 천지를 가지고 고유한 천지를 알아 우리 인간의 사업이 이로부터 정해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인문(人文)이 역을 얻어 밝게 드러나고 사물의 법이 역을 얻어 다해지고 이륜(彛倫)이 역을 얻어 펴지는 것이니, 이에 이르면 이 역의 공용(功用)을 어찌 다 측량할 수 있겠는가. 마땅히 천지가 남아 있으면 이 책이 천지와 더불어 함께 보존되어 천지와 더불어 시종(始終)을 함께할 것이다.


그러나 팔괘(八卦)가 64괘가 되어 크게 갖추어졌는데, 문왕(文王)이 괘사(卦辭)를 지어 64괘의 뜻을 밝히고, 주공(周公)이 효사(爻辭)를 지어 3백 84효(爻)의 뜻을 밝혔으며, 공자(孔子)가 십익(十翼)을 지어 이 역이 천지에 있는 것과 책 속에 있는 것을 밝히셨다. 그리하여 반드시 이처럼 반복하여 자세히 다한 뒤에 끝마친 것은 어째서인가?


역의 이치는 본래 스스로 천지와 만물에 갖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삼황(三皇) 이전에는 다만 천지를 굽어보고 우러러보며 만물을 사방으로 관찰하여 모두 그 이치를 알았고, 복희(伏羲) 이후와 문왕(文王) 이전에는 다만 괘효(卦爻)의 상(象)을 보고서도 모두 그 이치를 알았으니, 이는 총명 예지(聰明叡智)하고 신무(神武)하여 죽이지 않는 성인(聖人)이 아니겠는가.
성인은 세상에 큰 질박함이 이미 흩어져 세변(世變)이 날로 낮아지므로 사물을 열어주고 이루어주는 방법을 베풀지 않을 수 없음을 알았다. 이에 천지와 사람과 물건이 있으면 괘(卦), 효(爻)가 없이 역학(易學)을 할 수 없다고 여겼으므로 이에 괘, 효를 그었으며, 괘, 효가 있으면 또 계사(繫辭)가 없이 역학을 할 수 없다고 여겼으므로 이에 계사를 지은 것이다. 이미 괘, 효를 긋고 계사를 짓자 역의 가르침이 이루어졌다.


복희는 천지가 아직 발명하지 않은 것을 발명하였고 문왕과 주공은 복희가 미처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하였고 공자는 문왕과 주공이 미처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괘를 긋고 말을 단 것이 모두 성인이 그만둘 수 없는 것이었다.


복희, 문왕, 주공, 공자 네 성인이 이미 멀어지자 좌도(左道)가 어지럽게 일어나서 천 년 이래로 역도(易道)가 거의 어두워지게 되었는데, 또 다행히 정자(程子)가 《역전(易傳)》을 짓고 주자(朱子)가 《본의(本義)》와 《계몽(啓蒙)》 등의 책을 지어 네 성인의 남은 진리를 발명하니, 이 역(易)을 우익(羽翼)함이 극진하고 또 극진하였다.


정자(程子), 주자(朱子) 이외에 전후의 여러 학자들이 이미 갖추어진 역을 인하여 혹을 덧붙이고 무사마귀를 더하며 가지를 모사(摸寫)하고 잎새를 흉내내어 말을 늘어놓아 논설하고 남는 먹으로 도식(圖式)을 만들고는 스스로 역의 뜻을 밝힌다고 여긴 자가 무릇 몇 사람이나 되는데, 지금 전하는 자가 거의 없어 그것이 있거나 없거나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 이와 같은데도 내가 지금 다시 이 책을 엮어 편집함은 어째서인가?


내 일찍이 생각해 보니, 괘, 효의 이치가 심오하고 해석한 내용 또한 은미(隱微)하다. 후세에 태어난 자가 각자 자신의 견해를 내어 심오한 이치를 밝히고 은미한 말을 열어 놓으려고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더욱 미루어 부연하고 더욱 논설과 해석을 붙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도식 위에 도식을 만들어 도식이 여러 가지 모양에 이르고, 말 뒤에 말을 달아 말이 몇 권에 이르러, 세상이 내려올수록 서책이 더욱 많아지고 서책이 더욱 많아질수록 역리(易理)가 더욱 혼잡하게 되었다. 그러하니 경(經)의 본지(本旨)를 모독하고 혼란시킨 것이 진실로 십중팔구(十中八九)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 혹 한 도식이나 한 말이라도 한 가지 뜻을 통달한 것이 있으면 또한 마땅히 취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치는 진실로 정(精)한 것과 거친 것의 차이가 없고 큰 것과 작은 것의 구별이 없으니, 이리저리 종횡(縱橫)하고 종합하여 천 가지 조목(條目)과 만 가지 맥락(脈絡)이 모두 꿰뚫리고 다 포괄되어 그 묘함이 무궁무진하다. 역(易)의 묘리가 이 때문에 무궁한 것이다.


사람이 역리를 아는 것은 혹 정하고 혹 거칠며 혹 크고 혹 작아서 과연 서로 십 배, 백 배의 차이가 나는바, 십분의 경지를 모두 통달한 자는 진실로 항상 있지 못하며, 천 가지 조목 중에 한 가지 조목과 만 가지 맥락 중에 한 가지 맥락을 엿보아 앎이 있으면 이 또한 모두가 진리이다. 이 때문에 도식을 만들고 해석을 만든 것이 혹 역을 배우는 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모두 거두고 함께 모아 나란히 합해서 참고하여 살펴보는 자료로 삼는 것은 또한 초학자들에게 매우 절실하다. 그러므로 한 질(帙)을 모아 책을 만들고 분류(分類)하여 차례로 나열하니, 역리의 근원과 분파(分派), 처음과 끝이 모두 이 안에 들어 있다. 보는 자는 반드시 지붕 위에 다시 지붕을 올려놓고 상 위에 다시 상을 올려놓은 것이라고 의심하는 자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자세히 보고 세세히 이해한다면 모두 각기 주장하는 바의 뜻이 있어 비록 중복됨을 면치 못하더라도 실로 싫어할 것이 없다.


그리고 혹 근원이 같으나 분파가 다르고 뜻이 다르나 종지(宗旨)가 같은 것을 또한 취하여 책 끝에 실어서 이 역의 이치가 포함하지 않는 바가 없음을 징험하였다. 그리하여 돌을 끌어다가 옥을 증거하고 저것을 근거하여 이것을 밝히는 자료로 삼게 하고는 총괄하여 이름하기를 《역학도설(易學圖說)》이라 하였다.
도식과 해설은 모두 이미 이루어 놓은 것을 그대로 따랐으나 간혹 천박한 나의 소견으로 망녕되이 도식과 해설을 만들어 붙인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니며, 또 편찬하고 보는 즈음에 스스로 미루어 안 뜻이 있으면 감히 조박(糟粕)이라 하여 버리지 않고 책의 맨 끝에 기록하여 놓았다.


그러나 이는 반드시 선유(先儒)들의 학설에 근본하고 당연한 이치에 부합하게 하였으며, 전연 나의 억측으로 헤아린 것이 아니요 또 억지로 천착(穿鑿)한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어둡고 둔한 나 자신이 보기에 편리한 자료로 삼으려고 했었는데, 다시 한 집안의 몽매한 자들을 열어 보이고자 하였으므로 마침내 이 책을 편찬하게 된 이유를 말하여 책머리에 쓰는 바이다.

[주D-001]십익(十翼) : 《주역》에 대한 열 편의 부연 설명서로 단전(彖傳) 상(上)·하(下), 상전(象傳) 상·하, 계사전(繫辭傳) 상·하, 문언전(文言傳), 설괘전(說卦傳), 잡괘전(雜卦傳), 서괘전(序卦傳)을 이른다. 공자는 《주역》을 좋아하여 단전, 상전, 계사전, 설괘전, 문언전 등을 지었다 한다. 《史記卷四十七 孔子世家》

여헌선생문집 제8권_

잡저(雜著)_

 

족계(族契)를 중수(重修)하는 서

 

오늘날 우리 계(契)가 성립된 것은 옛날의 계를 다시 중수(重修)한 것이니, 이른바 옛날의 계라는 것은 바로 우리 장씨(張氏)의 동성계(同姓契)이다. 우리 장씨는 대대로 옥산(玉山)을 관향(貫鄕)으로 하여 전해온 지가 이제 20여 대(代)이니, 몇백 년을 지나왔는지 알 수가 없다.
애석하게도 구보(舊譜)가 전하지 않아 대종(大宗)의 밖에 별도로 소종(小宗)이 된 것이 모두 몇 파(派)나 있는지 알지 못하며, 또 소종 가운데에 어느 대(代)의 분파(分派)가 가장 번성한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대략으로 헤아려보면 내 몸으로부터 위로 5대와 6대 이전에는 관작(官爵)과 품계(品階), 사적(事蹟)과 문장(文章)이 혹 편록(編錄)에 기재되어 있고 혹 옛 집안에 전해져 오는바, 사람들이 우리 나라의 갑족(甲族)을 꼽을 적에 반드시 옥산 장씨(玉山張氏)를 들곤 하니, 그렇다면 그 현달하고 또 번성했음이 분명하다.
사람들 중에 토착 성씨가 된 자들은 언제나 번성하지 못하고, 비록 번성하더라도 혹 벼슬살이하고 혼인함으로 인하여 흩어지고 이사가는 경우가 많다. 그리하여 대대로 그 지방에 거주하는 자들이 참으로 적은데, 오직 우리 장씨는 20여 대를 전해오도록 이 지방을 떠나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집안이 효도하고 대대로 화목하며 덕을 쌓아 복을 오게 함이 진실로 유래가 있는 것이다.
가문이 번성할 때를 당해서는 온 집안이 한 가족이 되고 온 가문이 한 마음이 되었을 것이니, 우애가 돈독하고 화목한 가운데 각자 그 도리를 다할 뿐이었다. 어찌 계(契)를 만들어 통일시킬 필요가 있었겠는가. 그러다가 대를 전해옴이 이미 멀어져 분파(分派)가 많아지자 정(情)에 간격이 없을 수 없고 형세가 나누어지지 않을 수 없으므로 반드시 유지하고 모으는 도리가 있어야 하였으니, 이 때문에 종족(宗族)의 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계를 처음 만든 자는 누구인가? 바로 나의 족조(族祖)이신 진사(進士) 휘(諱) 잠(潛)께서 나의 선친(先親)과 함께 상의하여 만드셨다. 내가 들으니, 진사공(進士公)은 성품이 가장 순후(淳厚)하고 착하며 효도하고 우애하는 행실이 돈독하여, 대대로 쌓아온 덕을 미루어 가문이 전해오는 유풍(遺風)을 이었으며, 우리 선친도 소종(小宗)의 장(長)으로 선조를 추모하는 효성이 간절하였는바, 진사공에 있어서는 단문(袒免)의 조카가 되신다. 그리하여 지기(志氣)와 취미가 깊이 서로 합함이 있었으니, 이 계를 우리 종족간에 세울 것을 의논한 것은 그 뜻이 진실로 심원하다.
타성(他姓)을 넣지 않아 반드시 기운의 등속을 오로지하였으며, 은혜를 돈독히 하여 마음을 하나로 만들고 규칙을 정하여 일을 통일시켜 때로 화목을 다져 좋은 정을 융합하고 일에 힘을 함께하여 서로 돕는 의를 통하였다. 그리하여 부유한 자는 나누어 주고 가난한 자는 구제받게 하여 경사가 있으면 기쁨을 함께 하고 근심이 있으면 서로 구휼하게 하였으니, 이 또한 집안을 화목하게 하고 종족을 보존하는 깊은 생각과 원대한 계책이었다.
나는 비록 미처 진사공(進士公)을 절하고 모시지 못하였으며 우리 선친도 일찍 별세하시어 가정(家庭)의 가르침을 직접 받지 못하였으나 오히려 남은 가르침의 훌륭함을 볼 수 있었다. 자신 이상으로 증조(曾祖)의 항렬(行列)이 된 자가 있으며 이하로는 손자의 항렬로 처음 난 자가 있었는데, 늙은이와 어린이, 적자(嫡子)와 서자(庶子)를 합하여 모두 계에 가입되어 있는 자가 30여 명이었으며, 나이가 어려 아직 장가를 들지 못하여 부형(父兄)의 아래에 딸려 있는 자도 또 많았다.
마침내 글을 강(講)하고 외우는 과정을 만들어 종족의 어린이들의 학문을 권장하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면 모여 앉아서 글을 강하게 한 다음 그 등급을 정하여 장려하였으니, 이는 더욱 우리 계의 아름다운 일이었다. 또 이것을 미루어 넓혀 비록 우리 장씨 성(張氏姓)이 아니더라도 우리 성(姓)의 외손(外孫)이 된 자들이 제 스스로 계에 들어오려고 하면 동참하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이는 비록 본래의 규정이 아니었으나 또한 후(厚)함을 따르는 뜻이었다.
아! 임진년(1592,선조25)과 계사년(1593,선조26)에 왜란(倭亂)을 겪은 이래로 온 집안이 일소(一掃)되어 패망하였다. 그리하여 지금 남아 있는 자가 어른은 채 열 명이 되지 못하고 어린이는 겨우 6, 7명뿐인데 이들도 모두 유리(流離)하고 곤궁하여 의식(衣食)을 장만하기에도 겨를이 없으니, 누가 종족을 합하여 화목을 닦는 방도에 뜻을 두겠는가.
지금은 왜적(倭賊)이 바다를 건너간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에 주둔하고 있던 명(明) 나라 군대도 또한 철수하여 부역이 잠시 느슨해지고 생업도 다소 여유가 있다. 이 때문에 전쟁에서 살아남은 백성들이 차츰 인간의 일을 갖추고 있으니, 우리 종족이 된 자가 우리 종족의 고사(故事)를 다시 거행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마침내 집안의 노인들에게 청하여 우리의 계를 다시 회복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장씨 성을 가진 자는 몇 사람이 안 되었다. 그리고 우리의 외척(外戚)으로서 연계가 되거나 혹은 친함을 맺고 의(義)를 합한 자로 지방에 있는 자는 아직도 그러한 사람이 많았는바, 이들이 우리 종족을 버리지 않고 함께 약속을 지킬 것을 생각하여 모두 입계(入契)하도록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책을 만들어 이름을 등사(謄寫)하고 규약을 정하니, 모두 약간 명이었다.
내가 생각하건대 계(契)라는 것은 합한다는 뜻이니, 합한다는 것은 겉과 속이 간격이 없어 근심스러운 일과 기쁜 일을 반드시 함께하고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반드시 같이한 뒤에야 참다운 합함이라 이를 수 있으니, 겉으로만 따르고 마음은 다르며 입으로만 허락하고 몸은 어기는 자는 참다운 합함이 아니다.
덕의(德義)로 서로 좋아하여 오직 선(善)을 권면하고 잘못을 타이른 뒤에야 올바른 합함이라 이를수 있으니, 사사로이 친하고 바르지 못하게 따라다니며 구차히 함께하고 간사하게 친하는 자로 말하면 올바른 합함이 아니다. 이는 또 우리 계중(契中)에 있는 자들이 알지 않으면 안 된다.
한번 약속한 뒤에는 비록 길가는 사람이라도 곧 형제가 되니, 하물며 함께 계에 든 사람이겠는가. 나는 우리 계원(契員) 중에 반드시 계(契) 자(字)의 뜻을 깊이 알아서 진사공과 우리 선친이 계를 만드신 처음 뜻을 실추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것을 확신한다.
아! 우리는 한 가문인데 원초(元初)에는 종족만 있고 계가 없었으며, 중간에는 처음에 계가 있다가 끝에는 나라가 혼란하고 사람들이 모두 죽어 계가 폐지되었는데 이제 또 몇 명밖에 되지 않은 잔약(孱弱)한 후손들이 다시 옛날의 계를 복구할 것을 의논하니, 이 또한 한 가문의 성쇠(盛衰)의 운수일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이후로 다시 몇 번이나 성하고 쇠함이 있을 터인데, 뒤를 이어가는 자들이 계를 처음 만들고 계를 복구한 뜻을 생각할지 모르겠다.
계가 이루어지자, 계중에 있는 여러 형제들은 나에게 부탁하여 전말(顚末)을 기록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감히 집안 노인들에게 들은 것을 모두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
아! 이 계의 근본은 선친이 진사공의 명령을 받들어 처음 만든 것이니, 그렇다면 오늘날 이 계를 중수하는 것은 나에게 있어 더욱 감회가 깊다. 또 진사공의 손자인 광한(光翰)과 대종손(大宗孫)인 내범(乃範)을 오늘날 수계(修契)하는 유사(有司)로 삼았으니, 이는 모두 불초 등이 정성을 다하여야 할 처지이다.
그러나 이 어찌 우리 몇 사람의 사사로운 정성이겠는가. 실로 계중에 들어있는 여러 어른들이 함께 기뻐하여야 할 일이며, 실로 우리 선조께서 대대로 가르쳐온 지극한 뜻이요, 실로 우리 황천(皇天)이 진리를 내려주어 본성(本性)을 갖게 된 자연의 의(義)인 것이다.
만력(萬曆) 29년(1601,선조34) 7월 모일에 문말(門末) 현광(顯光)은 서(序)하다.
1. 계중에서는 족보(族譜)를 깨끗이 써서 유사(有司)가 삼가 보관하고 서로 전하여야 한다.
1. 계중에 가입되어 있는 자들은 서로 사랑하고 보호하여 항상 한집안 사람처럼 대하여야 한다.
1. 우리 계는 바로 종족의 계이다. 계를 만든 것이 이미 종족을 근본으로 하였다면 우리 계원(契員)들은 종족이 된 근원을 생각하여 먼 조상을 추모하는 정성을 지극히하지 않으면 안 된다.
먼 선조 이상은 법에 4대가 지나면 비록 종손(宗孫)이라도 사당에서 제사할 수 없으니, 오직 정성을 다하는 도리는 다만 성묘(省墓)하는 한 가지 일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먼 선조들의 분묘(墳墓)는 또 그 장소를 알지 못하니, 이는 후손들이 깊이 애통해하고 민망히 여기는 바이다. 오직 우리 7대 조고(祖考) 및 6대 조고(祖考)와 6대 조비(祖妣)의 분묘는 모두 성주(星州) 땅에 계시니,마땅히 1년에 한 번씩 제사하여, 한편으로는 정성을 지극히하여 남은 경사의 흐름에 보답하고 한편으로는 그 지역을 기억하여 우리 후손들의 생각을 열어주어야 할 것이다.
해마다 제사를 올리는 의식은 유사(有司)가 이를 주관하며, 혹 봄이나 혹 가을에 동성(同姓) 중에서 절반을 나누어 제물(祭物)을 마련하되 반드시 정성을 지극히하여 나누어 두 곳에서 제사하며 비록 외손이라도 혹 참배하고자 하면 더욱 아름다운 일이다.
1. 먼 조상의 분묘를 이미 알 수 없고 집안의 옛 족보도 난리통에 모두 잃어서 이제 미상(未詳)한 부분이 많으니, 내외손(內外孫)을 막론하고 만일 혹시라도 우리 장씨의 선대의 사적(事蹟)을 듣고 보아 아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그 듣고 본 것을 자세히 기록해서 우리 계중에 보고하여야 할 것이다.
1. 우리 계는 처음에 다만 동성 사람들만을 가지고 만들었으나 지금은 비록 소원한 타성(他姓)이라도 만약 우리 장씨 족보와 연관이 있으면 모두 들어오게 하였다. 이는 또한 선대의 은혜를 미루어 화목하는 도를 넓힌 것이니, 선대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랑하는 정이 내외손(內外孫)의 간격이 있겠는가. 사람들은 아들과 딸을 두지 않은 이가 없으니, 그 심정을 가지고 우리 선대의 마음을 체득한다면 이를 상상하여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계중에서는 마땅히 동성(同姓)과 이성(異姓)을 구별하지 말고 서로 후하게 대하는 의는 간격이 없어야 할 것이나, 다만 선조를 추모하는 등의 일은 동성의 입장에 있는 자가 반드시 스스로 그 정성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1. 이 계는 원초(元初)에는 바로 우리 장씨의 동성계(同姓契)였으니, 그렇다면 무릇 계중에 들어 있는 우리 동성인 자들이 더욱 돈독히 힘써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언제나 유사를 정할 때에 반드시 동성 한 사람과 이성 한 사람으로 인원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이는 빈주(賓主)의 구별을 두기 위해서가 아니요, 다만 두 명의 유사가 모두 이성이면 본성(本姓)인 자가 더욱 계의 뜻을 소홀히 하고 잊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1. 한 계원 가운데에 길한 일만 있고 흉한 일이 없으며 좋은 일만 있고 나쁜 일이 없다면 이는 계중의 다행이다. 무릇 우리 계원의 처지에 있는 자들은 진실로 각자 삼가고 힘쓰고 반성하여 반드시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하고 반드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말아 모름지기 계중으로 하여금 기쁘게 들을 만한 일이 있게 하고 듣기 싫은 일이 없게 한다면 이보다 큰 다행이 있겠는가.
1. 인륜의 가운데 아버지는 사랑하고 자식은 효도하며 형은 우애하고 아우는 공손하며 남편은 창도(唱導)하고 부인은 화(和)하며 미루어 동성간에 화목하고 또 미루어서 외척간에 화목하며 또 미루어 붕우간에 신의를 지키고 후하게 하여야 하는바, 이것은 바로 우리 가문이 평소 돈독히 해 왔으며 우리 계중이 마음을 다하여야 할 사항이니, 그 어찌 서로 권면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부터 더욱 서로 권면한다면 어찌 계중에 크게 축하할 일이 아니겠는가.
1. 향곡(鄕曲)에 있는 평민들이 어찌 조정에서 군주를 섬기기를 기다린 뒤에 군신간의 의리를 다할 수 있겠는가. 오직 맡은 직무를 수행하고 각기 맡은 일에 종사하여 국가에서 생양(生養)하고 길러주는 은혜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 바로 백성의 의무이다.
책을 읽어 선비의 직업을 가진 자는 그 뜻이 진실로 후일을 기대함이 있거니와, 농사를 지으며 힘으로 먹는 백성에 있어서는 무릇 옷 한 벌을 입고 밥 한 그릇을 먹는 것과 한 번 앉고 한 번 눕는 편안함이 모두 국가의 은택인데, 이에 보답하는 도리는 오직 부세(賦稅)를 잘 바치고 부역을 힘써 함에 있을 뿐이다. 지금은 10년 동안 병화(兵火)를 치른 뒤라서 백성들의 재력이 진실로 고갈되었으나 오히려 굶주리지 않고 춥지 않으며 위로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 처자식을 기르는 것을 어찌 자기의 공로로 삼을 수 있겠는가. 우리 계중에 있는 자들은 함께 서로 권면하여야 할 것이다.
1. 난리를 겪은 이래로 사람들은 의식(衣食)이 곤궁하여 모두 농업이 근본임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모두들 힘써 밭을 갈고 농사일에 부지런하니, 진실로 서로 권면할 필요가 없다. 다만 한두 해 다소 풍년이 든 뒤에는 사람들이 자못 곡식을 천하게 여기고 술마시는 것을 숭상할 것인바, 이는 바로 농사일을 게을리할 조짐이다. 우리 계중에 있는 자들은 각기 이를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1. 계원 중에 나이가 어려 공부하는 자들은 비록 평소처럼 초하루와 보름에 글을 강하지는 못하더라도 부형이 된 자들은 각기 마땅히 감독하고 권면하여야 할 것이다. 만일 한 계중에 있는 어린이와 젊은이가 필경 모두 평민으로 돌아가 준수(俊秀)한 자가 그 사이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어찌 우리 계의 복이겠는가.
1. 농군이 농사일을 부지런히 하지 않고 어려서 공부를 부지런히 하지 않는 자는 유사가 살펴보았다가 계에 모이는 날에 이를 모두 계중에 알리고 혹은 그 당자(當者)를 벌하거나 혹은 그 부형이나 가장(家長)을 꾸짖어야 한다.
1. 난리를 겪은 이후로 토지를 다투고 노비(奴婢) 때문에 송사하는 일이 곳곳마다 풍속을 이루고 있으니, 이는 매우 아름답지 못한 풍속이다. 만일 약자가 강자에게 침해를 당하고 정직한 자가 정직하지 못한 자에게 억울함을 당하고 졸렬한 자가 사기꾼에게 사기를 당하고 천한 자가 귀한 자에게 빼앗김을 당한다면 형편상 진실로 법을 맡은 곳에 시비(是非)와 곡직(曲直)을 판별해 주기를 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혹 때를 틈타 요행을 바라고 비리(非理)로 남과 다투기를 좋아함은 지극히 추악한 일이다. 무릇 우리 계중에 있는 자들은 간절히 이를 경계하여 한 계원의 부끄러움이 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더구나 상란(喪亂)을 겪은 뒤에 여염이 빈터만 남고 밭두둑이 쑥대와 갈대만이 자라고 있으니, 만약 부지런히 농사짓는다면 어찌 의식(衣食)을 걱정하겠는가. 반드시 비옥한 토지를 널리 점유하여 자손을 위한 계책을 삼으려는 자가 이 계원 중에 있다면 지혜롭지 못함이 어찌 심하지 않겠는가. 어찌 굳이 다투어 송사하고 모질게 싸워서 난리에 살아남아 외로운 사람들과 화목하지 않겠는가.
1. 계원의 잘못을 계원이 들었으면 각기 친근한 사람이 먼저 두서너 차례 타이르고, 반드시 고치지 않음에 이른 뒤에야 유사에게 알린다. 고치지 않는 것을 보고도 유사에게 고하지 않는 자와 먼저 타이르지 않고 대번에 유사에게 알리는 자는 모두 벌을 주도록 한다. 그리고 유사는 이것을 들었을 경우 작은 잘못이면 모이기를 기다려 말해주어 함께 타이르고, 큰 잘못이면 즉시 통문(通文)을 내어 일제히 모이게 해서 꾸짖으며, 여럿이 꾸짖어도 고치지 않은 뒤에는 손도(損徒)를 하고 손도를 해도 고치지 않은 뒤에는 계원에서 축출한다. 그러나 이미 축출이 되었더라도 잘못을 뉘우치면 즉시 다시 돌아올 것을 허락한다.
1. 계원이 저지른 잘못은 계원들만이 대면하여 꾸짖을 것이요, 계원 밖의 타인들에게 퍼뜨려 말하지 말아야 한다. 혹시라도 대면하여 타이르지 않고 밖에 말을 퍼뜨리는 자가 있으면 계중에서 엄중히 처벌한다.
1. 우리 계중에서는 단지 계원의 잘못만을 서로 책할 뿐이니, 외부 사람들의 잘못과 악행에 있어서는 비록 혹 얻어 듣더라도 입으로 말하지 말아야 한다.
1. 계원의 잘못을 외부 사람이 혹 말하는 자가 있어 계원이 이것을 들었으면 반드시 잘못을 저지른 계원을 찾아가 말해주어 잘못을 고치게 하여야 한다. 혹시라도 이러한 말을 듣고는 따라서 부화뇌동하고 조장하며 본인에게 말해주지 않는다면 계중에서 엄중히 처벌한다.
1. 관원(官員)의 선악(善惡)을 논하고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을 논하는 것은 가장 분수를 지키고 몸을 보전하는 도리가 아니니, 우리 계중에서는 이것을 지극히 경계하여야 한다. 이 경계를 범하는 자는 계중에서 함께 처벌한다. 그러나 자신에게 간절한 억울함과 고통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서로 하소연하여 풀리기를 구하여야 하니, 이는 또한 환난(患難)에 서로 구휼하는 도리이다.
1. 계원 중에 혹 수재(水災)나 화재(火災), 도적 등 의외의 변고가 있으면 힘을 다하여 함께 구원하여야 한다. 만일 환난을 듣고도 급히 구원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계중에서 함께 처벌하도록 한다.
1. 계원 중에 상(喪)을 당한 자가 있으면 초상(初喪)에는 염(斂)과 빈소(殯所)의 도구를 부조하고, 장례할 때에는 무덤을 경영하는 부역을 도우며 또 법식에 따라 장례에 필요한 물건을 돕도록 한다.
1. 계원 중에 남혼여가(男婚女嫁)가 있을 경우에도 법식에 따라 혼인에 필요한 물건을 돕도록 한다.
1. 세속에서 계를 하는 자들은 길흉 간의 도움에 혹 부조하는 횟수를 한정시켜 돕는다. 그리하여 이미 한정한 바의 횟수를 다했으면 일찍이 도움을 받았던 자는 다시 길흉의 일이 있더라도 계중에서 다시 돕지 않으니, 이는 단지 서로 물건을 빌린 자가 빌려온 숫자를 비교하여 반드시 상환하는 행위요, 기쁜 일과 근심스러운 일을 서로 함께하여 정으로 서로 돕는 의리가 아니다. 지금 우리 계중에서는 세속의 계에 많고 적음을 따지는 누추한 규칙을 본받지 말고 옛사람들이 한결같이 후(厚)하게 한 아름다운 뜻을 힘써 숭상하여야 할 것이다.
상(喪)은 반드시 부모나 처자만이 아니요 혹 방친(傍親)의 상도 있으며, 혼인은 반드시 본인의 자녀만이 아니요 혹 아우나 조카의 혼인이 있으며, 혹 한 사람이 여러 번 일이 있더라도 만일 자기 스스로 그 일을 주관할 경우에는 또한 일에 따라 서로 도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돕는 법식은 또 경중(輕重)의 등급이 없을 수 없으니, 이는 다만 때에 임하여 여럿이 상의해서 참작하여 정함에 달려 있을 뿐이다. 다만 일찍이 앞서의 일에 도왔다 하여 전연 뒤에 돌아보지 않아서는 안 된다.
1. 딴 지방에 있는 종족들이 만약 계에 들어오기를 원하면 모름지기 여럿이 의논하고 허락하여, 화목하는 의리가 원근에 간격이 없게 하면 좋을 것이다. 다만 불시에 모여 준례에 따라 여러 가지 물건을 거두는 등의 일에 있어서는 그 형세가 지방에 있는 자와 일일이 똑같이 할 수 없다. 여기에서 서로 통지할 때에 혹 제때에 미치지 못하고 저쪽에서 서로 따라올 때에 역시 기약과 같이 하지 못할 것이니, 이것을 한결같이 계의 규칙으로 준례를 정한다면 끝내 영구히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오직 봄, 가을에 강신(講信)을 하여 크게 모여서 서로 참여하여 함께 상의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을 제외하고는 굳이 모두 반드시 참석하기를 바라지 말며, 비록 일제히 모이지 못하더라도 참여하지 않은 잘못으로 벌을 논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혹 올 수 있는데도 오지 않고 마땅히 참여하여야 하는데도 참여하지 않았다면 또한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을 것이니, 계중에서는 비록 벌을 주지 않더라도 또한 본인이 마땅히 이것을 스스로 알아야 할 것이다.
여러 가지 물건을 거두는 것도 이들에게는 원래 정한 규칙을 다 바랄 수 없으니, 다만 저들의 힘이 미칠 수 있고 형세가 할 수 있는 것을 따라 시한(時限)에 구애하지 말고 수량(數量)을 따지지 말고 오직 끝내 서로 협조하고 서로 돌아봄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계중에서는 또 저들이 계의 규칙대로 하지 못한다 하여 서로 돌아보는 즈음에 소홀히 하지 말고, 각기 그 정과 의리를 다할 뿐이다.
1. 강신(講信)하여 화목을 닦는 것은 봄, 가을에 각각 날짜를 정하여 행하되 사치하고 아름답게 함을 숭상하지 말고 모두 진솔(眞率)하기를 요하며 정에 맞고 즐김을 한계로 삼아야 한다. 만약 어지러이 취(醉)하여 쓰러지며 떠들고 고함쳐 예(禮)를 잃는 자가 있으면 처벌하여야 할 것이다.
1. 계원이 모일 때에는 단지 계중의 일을 상의하고 정분을 서로 펼 뿐이며, 절대로 외간의 잡된 말을 언급하지 말아야 한다.
1. 계를 만든 뒤에는 계원 중에 반드시 서로 좋아하는 즐거움이 있고 서로 험악한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떳떳한 심정 밖에 혹 다시 출계(出契)할 것을 원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스스로 그 글을 갖추어 유사에게 바치게 하고, 유사가 계중에 알려서 허락하도록 한다. 그러나 동성인 사람일 경우에는 그래도 그 이름을 제거하지 말고 다만 계의 일에 참여하지 못하게 할 뿐이다.

[주D-001]단문(袒免)의 조카 : 사종질(四從姪)을 가리킨다. 단문은 상중(喪中)의 복식의 한 가지로 단은 왼쪽 소매를 걷는 것이며 문은 관을 벗고 머리를 묶는 것인데 오복(五服) 이외의 친족에 대한 애도의 표시이다. 《예기대전(禮記大傳)》에 “5세가 지나면 단문을 하여 동성(同姓)으로 강등한다.” 하였다.
[주D-002]손도(損徒) : 계원의 자격을 정지시키는 것으로 보이나 자세하지 않다.

 

여헌선생문집 제8권_

잡저(雜著)_

 

 

잡술서(雜述序)

 

 

내 가만히 천지의 조화를 보니, 그 변함이 또한 많았다. 종(縱)과 횡(橫)이 서로 교착하고 경(經)과 위(緯)가 합하고 흩어지니, 그 행함이 어찌 반드시 모두 긴관(緊關 긴요한 관건)한 곳일 뿐이며 그 쓰임이 어찌 반드시 모두 중대한 것일 뿐이겠는가. 행함에는 반드시 헐후(歇後 긴요하지 않은 것을 이름)한 것을 겸하고 쓰임에는 반드시 미세한 것을 다한다.
위에 나타나 있는 것은 해와 달과 별인데 해와 달과 오성(五星)과 28수(宿) 이외에 또 이름 없는 수많은 별이 있으며, 아래에 나타나 있는 것은 오악(五嶽)과 사독(四瀆)인데 오악과 사독 이외에 또 이름 없는 수많은 산과 물이 있으며, 낮과 밤과 추위와 더위는 음양(陰陽)의 큰 강령(綱領)인데 낮과 밤과 추위와 더위 이외에 또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달라지는 기후(氣候)가 있으며, 깃이 달린 새와 털이 난 짐승과 비늘이 달린 물고기와 껍질이 있는 동물은 만물 중의 한 생물인데 깃이 달린 새와 털이 난 짐승과 비늘이 달린 물고기와 껍질이 있는 동물 이외에 또 풀 한 포기와 나무한 그루와 같은 미물(微物)이 있다.
이치[理]의 쓰임[用]은 지극히 넓고 도(道)의 체(體)는 지극히 크니, 그 중대한 것에만 한결같이 치중하고 미세한 것에는 미치지 않는다면 이치의 넓음을 다할 수 없으며, 그 긴관(緊關)한 곳에만 편중하고 헐후(歇後)한 곳을 따르지 않는다면 도의 큼을 다할 수 없다. 이는 중대한 것과 미세한 것이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어 천지가 그 큼을 이루는 까닭이며, 긴관한 곳과 헐후한 곳이 서로 필요하고 아울러 행해져서 조화가 무궁무진하게 되는 이유이다.
우리 인간에 있어서도 또한 이 이치이며 또한 이 도이다. 덕(德)은 안과 밖을 포함하여 갖추어지고, 도(道)는 크고 작은 것을 꿰뚫어 온전해지며, 일은 가볍고 중한 것을 겸하여 다하고, 업(業)은 근본과 지엽을 통하여 진전된다.
마음을 보전하여 성(性)을 기름은 내면에 있는 덕이고 자기 몸을 닦고 남을 다스림은 도의 큰 것이며, 들어가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와서는 어른을 공경함은 일의 중한 것이며, 경(敬)에 마음을 두고 이치를 궁구함은 업의 근본이다. 안에 있는 덕은 진실로 성실히 하지 않을 수 없고 큰 도는 진실로 부지런히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중한 일은 진실로 돈독히 하지 않을 수 없고 근본인 업은 진실로 독실히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의리는 다함이 없으니, 어찌 한갓 안만 닦고 밖이 없으며, 한갓 큰 것만 하고 작은 것이 없으며, 한갓 중한 것만 하고 가벼운 것이 없으며, 한갓 근본만 하고 지엽이 없을 수 있겠는가. 시일(時日)이 무궁무진하니 막힌 것을 열어주지 않을 수 없고 괴로운 것을 쉬지 않을 수 없고 조이는 것을 풀어주지 않을 수 없고 합한 것을 흩어놓지 않을 수 없다.
이에 긴관한 것에 힘쓰는 여가에 반드시 헐후한 시절이 있어야 하고, 중대한 공부를 하는 나머지에 반드시 미세한 일을 하여, 이로써 의사(意思)를 두루하고 정신(精神)을 개발하며 성정(性情)에 맞게 하고 문화(文華)를 통달하여야 한다.
이것은 마음을 보전하여 성(性)을 기름에 비하면 진실로 밖이며, 자기 몸을 닦고 남을 다스림에 비하면 진실로 작은 도이며,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나와서는 공경함에 비하면 참으로 가벼운 일이며, 마음을 경(敬)에 두고 이치를 궁구함에 비하면 참으로 지엽적인 업이다. 그러나 덕의 포용함이 이로 인하여 갖추어지고 도의 꿰뚫음이 이로 인하여 온전해지며 일의 겸하는 바가 이로 인하여 다하게 되고 업의 통합함이 이로 인하여 진전되니, 이것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몸소 만 가지 기무(機務)를 총괄하여 조심하고 두려워함이 진실로 성대(盛大)한 황제의 덕(德)이나 반드시 훈훈한 남풍(南風)을 노래로 읊는 여유가 있었으니 이는 황제라 하여 정(情)에 맞는 일이 없지 않은 것이며, 사해(四海)에 군림하여 쉼이 없는 하늘을 체행함이 진실로 지극한 왕자(王者)의 도이나 반드시 영대(靈臺)에서 구름을 관찰함이 있었으니 이는 왕이라 하여 기운을 휴양(休養)하는 때가 없지 않은 것이다.
이치를 궁구하다가 알지 못하면 애를 태우고 이치를 알면 즐거워 밥을 먹는 것도 잊으며 늙음이 오는 줄도 모르는 현성(玄聖)에 이르러도 동산(東山)에 오르고 태산(泰山)에 오르는 놀이가 있었으며,옛 성인(聖人)의 도를 보호하고 부정한 학설을 막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은 아성(亞聖)도 잊지도 않고 억지로 조장(助長)도 하지 않는 기름이 있었으니,그렇다면 도에 나아감은 진실로 한 가지 길이 아니요 덕에 들어감도 또한 방법이 여러 가지인 것이다.
비록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돈독히 하는 것이 우리 유자(儒者)들이 힘써 공부하는 강령(綱領)이 되나 휴양하여 창달(暢達)하고 발하여 폄을 또 폐할 수 없다. 이것이 육예(六藝)에 노는 한 조목(條目)이 바로 도(道)에 뜻하고 덕(德)에 의거하고 인(仁)에 의지하는 끝에 있는 이유이니,어찌 여섯 가지의 재주가 모두 의리에 갖추어진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이미 도에 뜻하고 덕에 의거하며, 덕에 의거하고 인에 의지하면 또 반드시 육예에 논 뒤에야 안에서 얻은 것을 가지고 밖에서 징험할 수 있고 밖에서 휴양한 것을 가지고 마음을 기를 수 있는 것이다.
이에 안과 밖이 서로 필요하고 본(本)과 말(末)이 서로 힘입어, 덕이 이 때문에 갖추어지고 도가 이 때문에 온전해져서 학문과 사업이 자연히 수고로움과 괴로움을 깨닫지 못하여 그만두려고 하여도 그만둘 수 없는 재미가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 나는 비록 도와 덕과 인이 나에게 고유(固有)한 것임을 알고 있으나 일찍이 도에 뜻하고 덕에 의거하고 인에 의지함을 학문의 진수(進修)에 징험할 수 없으니, 어떻게 육예에 놀 수 있겠는가. 다만 몸이 난리를 당하여 어려움과 험난함을 골고루 겪어서 마음을 천 번만 움직일 뿐이 아니요 성질을 백 번만 참을 뿐이 아니었으니, 그 스스로 지킴이 굳다고 이를 만하다.
지금은 다행히 당장의 근심이 없고 바깥 일에 관여하지 않으므로 정(情)에 맞게 하고 기운을 휴양하여 세월을 편안히 보낼 것을 생각한다. 그리하여 육예에 찾아보나 능한 것이 없고 오직 사물을 보면 생각이 나는바, 생각이 나는 대로 그때마다 기록하여 혹 문장을 짓고 혹 시구(詩句)를 짓는 것을 마음속에서 나오는 대로 하니, 이것이 혹 활쏘기와 말타기를 대신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기록해 가는 것이다.
만력(萬曆) 을미년(1595,선조28) 계하(季夏) 12일에 쓰다.

[주D-001]훈훈한……읊는 여유 : 순(舜) 임금이 오현금(五絃琴)으로 읊었다는 남풍가(南風歌)를 이르는바, 여기에 “남풍의 훈훈함이여 우리 백성들의 노여움을 풀어주고, 남풍이 제때에 불어옴이여 우리 백성들의 재물을 풍성하게 하네.[南風之薰兮 可以解吾民之慍兮 南風之時兮 可以阜吾民之財兮]” 하였다. 《孔子家語 辯樂解》
[주D-002]영대(靈臺) : 주(周) 나라 문왕(文王)이 만든 대(臺)로 구름 따위의 천문(天文)을 관찰하는 곳이라 한다.
[주D-003]현성(玄聖)에……있었으며 : 현성은 대성인(大聖人)이라는 뜻으로 공자(孔子)를 가리키며, 동산(東山)은 노(魯) 나라 도성의 동쪽에 있는 작은 산이고, 태산(泰山)은 오악(五嶽)의 하나로 큰 산이다. 맹자(孟子)는 “공자가 동산에 올라가 노 나라를 작게 여기시고 태산에 올라가 천하를 작게 여기셨다.” 하였으므로 이것을 인용한 것이다. 《孟子 盡心上》
[주D-004]아성(亞聖)도……있었으니 : 아성은 공자 다음 가는 성인이라는 뜻으로 맹자를 가리킨다. 맹자는 일찍이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름을 말하면서 “잊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말라.[勿忘 勿助長]” 하였으므로 말한 것이다. 《孟子 公孫丑上》
[주D-005]육예(六藝)에……이유이니 : 육예는 여섯 가지 기예로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를 이른다. 공자는 학문하는 방법을 말하면서 “도에 뜻하고 덕에 의거하고 인에 의지하고 기예에 놀아야 한다.[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遊於藝]” 하였으므로 말한 것이다. 《論語 述而》

여헌선생문집 제8권_

잡저(雜著)_

 

 

동진록(同塵錄)

 

나는 성질이 비루(鄙陋)하고 용렬하여 본래 우뚝하고 뛰어난 행실이 없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 어진 자와 어질지 못한 자, 귀한 자와 천한 자,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등 그 누구나 만나는 바에 따라 대응하고 사람에 따라 대하였다.
그리하여 무릇 귀한 자와 부유한 자는 일찍이 친하였거나 또는 성의(誠意)를 가지고 서로 만나보려고 하는 자가 아니면 진실로 감히 스스로 붙으려는 뜻이 없었으며, 이른바 어질고 지혜로운 자에 있어서도 만약 참으로 어질고 참으로 지혜로움을 스스로 살펴 알지 못하면 감히 달려가 만나보려고 하지 않았으며, 비록 혹 만나더라도 또한 가볍게 마음으로 허여(許與)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난하고 천한 자는 만일 정상적인 방법으로 가난과 천함을 얻지 않았으면 진실로 성분(性分)의 안에 관계되지 않으므로 내 감히 스스로 외면하여 가벼이 여기지 않았으며, 어리석고 불초(不肖)한 자에 있어서도 또한 일찍이 차별하여 대우하고 비하하여 오만히 대하지 아니하여 혹 더불어 용납하여 만나주고 혹 더불어 말을 나누곤 하였다.
그러므로 나를 좋아하는 자들은 나를 혹 전금(展禽)의 화(和)함에 비유하고 나를 비판하는 자들은 나를 향원(鄕愿)의 행실에 비교하였으나 나는 오히려 이러한 행실을 고치지 않았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후로는 세도(世道)가 날로 더욱 혼탁해지고 인심(人心)이 더욱 패악해지니, 이러한 때를 당하여 비록 바른 도를 지키고 예의(禮義)를 몸소 실천하는 자라도 시골에 있으면서 일체 올바른 법도로 다스릴 수 없는데 하물며 유리(流離)하여 딴 마을에 나그네로 부쳐 있는 자가 어찌 세속을 따라 스스로 감추는 도가 없겠는가.
이에 억지로 온화하고 유순한 안색(顔色)을 하고 강경(剛勁)한 모양을 힘써 제거하여, 비록 노예(奴隷)와 비첩(婢妾), 아동(兒童)과 하우(下愚)를 만나더라도 반드시 온화한 얼굴로 대하고 따뜻한 말로 상대하니, 하물며 마을 사람들을 능가하여 감히 기세(氣勢)를 내는 자를 대함에 있어서랴.
이는 비단 사나운 자를 만나거나 교만한 자를 만나 거만한 말을 하다가 노여움을 저촉하고 완악한 용모를 하다가 욕을 부를까 우려해서 그러할 뿐만 아니라, 고을의 풍속이 질박하고 촌스러우며 백성들이 지식이 없으니, 다만 충신(忠信)과 질직(質直)함으로써 서로 사귀어야 하고 예법(禮法)과 겸양(謙讓)으로 종사할 수 없어서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떳떳함을 변하고 평소의 행실을 고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말을 잘 하지 못하여 일찍이 마음속과 다른 말을 하지 못하였으나 지금은 혹 억지로 말하는 경우가 있으며, 나는 모양을 꾸미는 것을 잘 하지 못하여 일찍이 기뻐하지 않는 웃음을 짓지 못하였으나 지금은 혹 억지로 웃는 경우가 있다. 그리하여 바둑판으로 놀이하는 경우도 있고 활을 쏘고 구경하는 경우도 있으며, 혹 앞 시내에서 물고기 잡는 자들과 함께 어울리고 혹 뒷산에서 사냥하는 지아비를 따라다닌다. 혹은 밭두둑에서 함께 두 다리를 뻗고 걸터앉기도 하고 혹은 길거리에서 서로 농담을 나누기도 하며, 혹은 방패와 창에 대한 일을 말하기도 하고 혹은 농사짓고 누에치는 일을 말하기도 한다.
상대방의 물음에 따라 답하여 감히 옳고 그름을 다투지 않으며, 말에 따라 들어 주어 감히 잘잘못을 구별하지 않는데, 이와 같이 날을 보내고 이와 같이 해를 마친다. 나는 때때로, “내가 난세(亂世)에 대처하고 말속(末俗)을 따름은 자신을 보존하는 계책에는 잘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유속(流俗)과 함께하고 더러운 세속과 영합하여 날로 물들고 달로 변화하여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며 의심하고는 곧바로 스스로 다음과 같이 해명(解明)하였다.
바깥에서 따름은 자취이고 중심에 지킴은 마음이며, 변할 수 없는 것은 도이고 변할 수 있는 것은 일이다. 나는 중심의 지킴을 한결같이 할 뿐이니, 바깥의 자취를 따름이 어찌 나쁘겠는가. 나는 변할 수 없는 것을 변치 않을 뿐이니, 또 변할 만한 것을 변하는 것이 어찌 나쁘겠는가.
능히 클 수 있고 능히 작을 수 있은 뒤에야 용(龍)의 신묘함을 볼 수 있으며, 능히 굽힐 수 있고 능히 펼 수 있은 뒤에야 귀신(鬼神)의 묘함을 볼 수 있으니, 도가 어찌 한결같이 높고 멀고 깊고 큰 것만을 하겠는가. 비록 지극한 덕을 간직한 사람이라도 때로는 낮고 가깝고 얕고 작은 것을 하여 혐의하지 않으니, 이 때문에 그 높고 멀고 깊고 큰 도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 도가 어찌 다만 사람에게 있어서만 그러하겠는가. 천지(天地)와 같이 광대(廣大)하고 고후(高厚)하며 일월(日月)과 같이 지극히 밝으며 풍우(風雨)와 같이 깊고 멀더라도 그렇지 않음이 없다.
내가 한번 말해 보겠다. 하늘이 덮어주고 땅이 실어주는 것으로, 날아가는 새에는 봉황(鳳凰)이 있고 달리는 짐승에는 기린(麒麟)이 있으며, 물고기와 벌레에는 거북과 용(龍)이 있고 풀에는 지초(芝草)와 난초(蘭草)가 있으며, 나무에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있고 흙에는 금(金)과 옥(玉)이 있으며, 산에는 오악(五嶽)이 있고 물에는 사독(四瀆)이 있으며,사람에는 성인(聖人)과 현인(賢人)이 있고 나라에는 황제(皇帝)와 왕(王)이 있으니, 그 있는 바가 크고 또 귀하지 않은가.
뱁새에 이르러는 새 중에 작은 것이고 개와 돼지는 짐승 중에 작은 것이며, 하막(蝦蟆)은 벌레 중에 작은 것이고 쑥과 갈대는 풀 중에 작은 것이며, 탱자나무와 가시나무는 나무 중에 작은 것이고 모래와 자갈은 흙 중에 작은 것이며, 구릉은 산 중에 작은 것이고 도랑과 개천은 물 중에 작은 것이며, 어리석은 지아비와 어리석은 지어미는 사람 중에 작은 것이고 일반 백성들은 나라의 미천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 또한 하늘이 덮어주고 땅이 실어주는 가운데 포용되지 않음이 없으니, 어찌 유독 크고 귀한 것만이 천지에 포용되고 작고 미세한 것은 마침내 버려지겠는가.
단지 물건의 포용됨이 귀천(貴賤)과 대소(大小)와 거세(巨細)를 겸할 뿐만 아니라 그 운행하고 조화를 베푸는 도(道)도 모두 높고 작고 얕고 깊음이 있다. 추위가 심해지면 갖옷을 겹쳐 입고 따뜻한 방에 있는 자도 오히려 따뜻할 수 없으나 추위가 약해지면 미세한 벌레도 또한 발생(發生)하니, 이는 추위가 항상 심하지만은 않고 때로는 쇠할 때가 있는 것이다. 더위가 성하면 산이 마르고 냇물이 끓으나 더위가 식으면 한 덩이의 흙도 마르지 않고 길 위에 있는 빗물도 마르지 않으니, 이는 더위가 항상 성하지만은 않고 때로는 쉴 때가 있는 것이다. 어찌 길이 융성하고 쇠하지 않으며 길이 성하고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겠는가.
해와 달이 물건을 비춤도 또한 그러하여 단지 아름답고 큰 것만을 비추고 미세한 것은 비추지 않는 것이 아니며, 비바람이 물건을 적셔줌도 또한 그러하여 단지 크고 귀한 것만을 적셔주고 천하고 작은 것은 적셔주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높고 크며 지극히 넓고 후(厚)한 것은 물건을 선별하여 용납하지 않고, 지극히 밝은 것은 물건을 선별하여 비추지 않고, 지극히 윤택한 것은 물건을 선별하여 적셔주지 않는다.
성인(聖人)의 도(道)도 이와 같다. 그 높고 크고 깊고 원대(遠大)한 것으로 말하면 천지(天地)에 유통(流通)하고 음양(陰陽)에 출입하여 귀신과 길흉을 함께하고 해와 달과 광명을 함께하여, 이미 돌아가신 성인(聖人)을 잇고 만세(萬世)의 후학(後學)들을 열어주나, 그 낮고 작고 얕고 천근(淺近)한 것으로 말하면 교화(敎化)가 풀 한 포기와 나무 한 그루에도 모두 입혀지고 덕(德)이 어리석은 지아비와 어리석은 지어미에게까지 미치며, 도(道)가 여염(閭閻)과 밭두둑에 행해지고 몸이 궁벽한 골목과 들에서도 편안하니, 이것이 능히 클 수 있고 능히 작을 수 있어 변화(變化)하고 굴신(屈伸)하는 도인 것이다.
하늘에 천거하자 하늘이 받아주고 백성에게 드러내자 백성들이 귀의(歸依)하여 필부(匹夫)로서 요(堯) 임금의 지위를 선양(禪讓)받았으니, 대순(大舜)의 성(聖)스러움이 어떠하였는가. 그러나 미숫가루를 먹고 채소를 먹을 적에 뇌택(雷澤)에서는 고기잡는 어부가 되고 황하(黃河) 가에서는 질그릇을 굽는 도공(陶工)이 되고 역산(歷山)에서는 밭가는 백성이 되었으니, 이 때를 당하여 대순이 감히 야인(野人)들과 스스로 달리하였겠는가.
도가 여러 왕 중에 으뜸이어서 요(堯), 순(舜)보다도 크게 어질었으니, 공자(孔子)의 성스러움이 어떠하였는가. 그러나 노(魯) 나라 사람들이 사냥하여 잡은 짐승의 많고 적음을 다투자 그들과 함께 사냥하여 잡은 짐승의 많고 적음을 다투었으며, 음행(淫行)이 있는 남자(南子)를 만나보고 포악한 양화(陽貨)를 만나보았으며, 광(匡) 땅에서 경계하는 마음을 품었고 진(陳) 나라에서 식량이 떨어져 경황이 없어 수레바퀴 자국이 온 천하를 돌았으니, 이 때를 당하여 공자가 감히 한 가지 잘함으로써 이름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이는 성인을 일반 사람들이 미칠 수 없어, 변화함이 신묘한 용과 같고 굴신함이 귀신과 같아 덮어주고 실어주고, 광명함이 천지와 일월과 똑같음이 있는 것이다. 내가 오늘날 진세(塵世)와 함께함도 이러한 뜻이므로 우선 이것을 기록하여 후일 스스로 상고하기를 기다리는 바이다.

 

[주D-001]전금(展禽)의 화(和)함 : 전금은 춘추 시대 노(魯) 나라의 명재상으로 전(展)은 성이고 금(禽)은 자(字)이다. 또 자를 계(季)라고도 하며 이름은 획(獲)인데 식읍(食邑)이 유하(柳下)이고 시호가 혜(惠)이므로 일반적으로 유하혜라고 칭한다. 그는 마음이 너그러워 조정에서 세 번 축출을 당하였으나 원망하지 않았으며, 사람이 곁에서 옷을 모두 벗더라도 “너는 너이고 나는 나이니, 네 어찌 나를 더럽히겠는가.” 하여 유유히 함께 거처하였다 한다. 이 때문에 맹자(孟子)는 그를 일컬어 “성인(聖人) 중에 화한 자이다.[聖之和者]” 하였다. 《論語 衛靈公》 《孟子 萬章下》
[주D-002]향원(鄕愿)의 행실 : 향원은 향원(鄕原)으로 쓰기도 하는바, 시골에서 삼가고 조심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공자(孔子)는 이러한 자들을 겉으로만 공손한 사이비 유덕자(似而非有德者)라 하여 “향원은 덕의 적이다.[鄕原德之賊也]”라고 배척하였다. 《論語 陽貨》 《孟子 盡心下》
[주D-003]오악(五嶽)이……있으며 : 오악은 중국의 다섯 개의 명산으로 동악(東嶽)인 태산(泰山), 서악(西嶽)인 화산(華山), 남악(南嶽)인 형산(衡山), 북악(北嶽)인 항산(恒山), 중악(中嶽)인 숭산(嵩山)이라고 하나 기록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으며, 사독은 네 개의 큰 물로 곧 양자강(揚子江), 황하(黃河), 회수(淮水), 제수(濟水)를 가리킨다.

 

여헌선생문집 제8권_

잡저(雜著)_

 

주왕산(周王山)에 대한 기록

 

산의 높이가 가장 높지는 않으나 산의 이름은 크게 드러났으니, 이는 고적(古跡)이 있고 또 바위와 골짝이 기이하기 때문이다. 나는 주왕산(周王山)의 이름을 들은 지가 오래였으므로 한번 구경하여 진세(塵世)의 눈을 상쾌하게 할 것을 생각한 것이 오래였으나 소원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금년 여름에 친구들을 따라 산의 가까운 지역에 가서 우거(寓居)하게 되었다.
하루는 두서너 명의 친구들과 약속하여 오랜 소원을 부응하려고 하였는데, 마침 이날 점심 무렵 비가 내려 두루 구경하지 못하였다.
사람들에게 들으니, 이 산을 주왕(周王)이라고 이름한 것은 삼한(三韓) 시대에 한 왕호(王號)를 가지고 있던 자가 이 곳에 피란(避亂)하여 산의 위에 대궐을 세웠는바, 옆에 폭포수가 있고 폭포수 가운데에는 바위 구멍이 있어 사람이 몸을 숨길 수 있으며 폭포수가 가리우고 있기 때문에 외부 사람들은 바위에 구멍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 임금은 위급한 일이 있으면 이 구멍에 숨어서 피하곤 했다 한다. 나는 해가 저물고 또 비가 내리므로 그 자취를 직접 보지는 못하였으나 산이 이름을 얻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구경하는 자들은 이르기를, “이 산은 골짝이 좁고 시냇물이 험하며 암벽이 우뚝이 솟아 있고 고개 위가 평평하고 넓으며 사방의 길이 모두 멀리 막혀 있으니, 난세(亂世)를 당하면 군대를 은닉하여 적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
놀러와서 이 산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다만 고적(古跡) 때문이 아니요 바위가 기이하고 물이 깨끗하여 마치 신선(神仙)들이 서식(棲息)하는 곳인 듯해서이다.
골짝의 이름은 두 개가 있으니, 동쪽은 바로 이른바 주왕이 피란했다는 장소이다. 폭포의 구멍이 아직 변치 않았고 대궐터가 그대로 남아 있는데 골짝에 들어가 몇 리쯤 가면 지금 허물어진 사찰(寺刹)이 하나 있다.
서쪽은 바위와 골짝이 동쪽에 비하여 더욱 기이한데 바위의 허리로 인적이 미치지 않는 곳에 이상한 새 한 마리가 이 틈에 둥지를 틀고 있으니, 사람들은 청학(靑鶴)이라 이른다. 이 새는 매년 봄과 여름에 이 곳에서 알을 까 새끼를 치는데, 둥지를 마주한 바위 머리에 작은 암자를 세워 이 새를 바라보나 암벽이 멀고 둥지가 높아 사람들이 이 새를 볼 수 없었다. 그리하여 평상시 와서 구경하는 자들은 나팔을 불어 새를 놀라게 해서 날아 나오기를 기다린 뒤에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한 무인(武人)이 둥지에 활을 쏘아 화살이 그 옆에 꽂히자, 이후로는 학이 마침내 더욱 험한 바위로 옮겨가서 사람들이 다시 보지 못한다고 한다.
골짜기 5리쯤 되는 곳에 이르면 벼랑이 끊기고 길이 다하는데 길이 다한 곳에 부암(附巖)이라는 바위가 있는바, 이 바위가 높은 벼랑에 붙어 있기 때문에 부암이라고 명칭한 것이다. 만약 개미처럼 붙고 이[蝨]처럼 기어 올라가면 이 바위에 올라가 길을 통할 수 있다. 이 길을 따라 한 고개를 넘어가면 산세가 다소 평평하여 그다지 기이하고 아름답지는 않으나 다만 용못이 몇 곳 있는데 폭포를 받아 못을 이루었으며 하도 높아 가까이 근접할 수가 없고 너무 깊어 측량할 수가 없다.
용못으로부터 북쪽으로 7, 8리쯤 가면 옛날에 점촌(店村)이 있었는데 이름을 광혈(廣穴)이라 하는 바, 난리로 주민들이 흩어져 지금은 다만 몇 채의 막사가 남아 있다 하나 이상은 다 내가 직접 가보지 못하였다.
나는 이번 걸음에 비록 두루 보고 감상하지는 못하였으나 산의 대략은 이미 알게 되었다. 가장 기이한 것은 여러 바위이며, 바위 중에서도 서쪽 골짝에 있는 것이 더욱 기이하였다.
이 날 눈으로 본 것을 한번 기록하면, 골짝의 입구로부터 길이 다하는 곳에 이르기까지는 약 5리 쯤 되는데 양쪽의 벼랑이 모두 바위이나 서로 중첩되어 있지 않으며, 아래로 바위 밑으로부터 위로 바위 머리에 이르기까지 몇 길[丈]인지 알 수 없으나 다만 한 돌로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져 있다. 중간에 작은 시냇물이 있고 시냇물로부터 오솔길이 있는데 오솔길은 흙을 밟지 않고 돌을 따라 걸어 올라가는바, 돌이 시내의 좌우에 널려 있어 혹은 높기도 하고 혹은 낮기도 하며, 혹은 크기도 하고 혹은 작기도 하며, 혹은 종(縱)으로 있기도 하고 혹은 횡(橫)으로 있기도 하며, 혹은 기울기도 하고 혹은 평평하기도 하니, 다리 힘이 건장한 자가 아니면 반드시 항상 넘어지고 만다.
이 길을 따라 올라가는 자들은 두 벼랑의 암벽을 우러러보면 바위 뿌리가 각기 사람과 겨우 지척지간에 있는데, 바위 모서리가 곧바로 구름이 다니는 하늘 위로 솟아 있어 하늘과 해가 참으로 우물 안에서 보는 것처럼 보인다.
이른바 부암(附巖)이라는 바위 위에 이르면 좌우의 여러 바위가 눈 앞에 펼쳐져 있어 천 가지 모습과 만 가지 모양이 모두 갖춰져 있다. 혹은 네모지고 혹은 둥글며 혹은 쭈그러들고 혹은 삐쭉 나왔으며, 혹은 좌우(左右)가 서로 맞이하여 마치 손을 잡고 읍(揖)하는 듯한 것이 있고 혹은 피차(彼此)가 서로 높아 마치 누가 더 큰가를 다투는 듯한 것이 있으며, 혹은 부부(夫婦)처럼 배합한 것이 있고 혹은 형제(兄弟)처럼 나란히 자리한 것이 있으며, 혹은 원수처럼 서로 등진 것이 있고 혹은 친구처럼 서로 가까이한 것이 있다.
혹은 한 바위가 우뚝 솟고 나머지 여러 바위는 함께 낮으니, 높이 있어 우러러 받드는 것은 군주와 스승과 같고 낮아서 압도당하는 것은 신하와 첩과 같으며, 동쪽 벼랑의 바위가 서쪽 벼랑에 연하지 않고 서쪽 벼랑의 바위가 동쪽 벼랑에 이어지지 아니하여, 마치 문(門)을 나누고 진(陣)을 구별하여 진법(陣法)이 서로 뒤섞이지 않는 듯하다. 혹은 엄연하고 엄숙하여 중립(中立)하고 기울지 아니하여 마치 범할 수 없는 대인(大人)과 정사(正士)를 연상시키는 것이 있으며, 혹은 기이하고 괴이하여 모양을 형상할 수 없어 마치 우리 유학과 배치되는 이도(異道), 좌학(左學 이단의 학문)과 같은 것이 있었다.
혹은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장수가 군주에게 절하지 않는 것을 예(禮)로 삼은 듯한 것이 있고, 혹은 맹금류(猛禽類)나 곰과 같은 장수가 살벌(殺伐)을 마음으로 삼은 듯한 것이 있으며, 혹은 상고(上古) 시대의 성인(聖人)이 질박한 세상에 태어나 도(道)가 천지(天地)와 똑같아 성정(性情)을 드러내지 않는 듯하고, 혹은 말세(末世)에 경박한 사람들이 재주를 믿어 교만하고 방자해서 스스로 자랑하는 듯한 것이 있다.
혹은 숲과 골짝에서 자유로이 생활하여 그 일을 고상히 하는 자인 듯한 것이 있고, 혹은 바위 구멍으로 도피하여 더러운 세상에 장차 오염될까 두려워하는 듯한 것이 있으며, 혹은 괴리(乖離)하여 스스로 달리하는 듯한 것이 있고 혹은 의지하고 붙어서 사람들과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것과 같은 것이 있으며, 혹은 작은 것이 큰 것을 따른 것이 있고 혹은 뒤에 있는 것이 앞의 것을 따른 듯한 것이 있었다. 머리를 숙이고 감추어 마치 시세(時勢)를 두려워하는 듯한 것이 있고 모서리를 드러내어 마치 세상의 어지러움에 분노하는 듯한 것이 있으니, 이것이 그 대략으로 그 형상을 이루 다 형용할 수 없었다.
이제 기이한 형상을 가지고 감히 옛날 역사책에서 들은 것에 비유한다면 마치 옛 도(道)를 좋아하고 성인(聖人)을 사모하는 사람이 세상에 늦게 태어난 것을 서글퍼하고 지극한 덕을 보지 못하는 것을 개탄하여 그 도를 상상하고 옛 성인을 그리워한 나머지 붓끝을 가지고 조화를 부려 천고(千古)의 성인(聖人)들을 그려내어 삼황(三皇)을 배열하고 오제(五帝)를 나열하되 첫번째에는 반고씨(盤古氏)를 놓고 중간에는 무회씨(無懷氏)와 갈천씨(葛天氏)를 놓고 아래로는 삼대(三代)의 성왕(聖王)에 이르기까지 그 형상을 갖추어 높이고 숭상하지 않음이 없다. 그 형체는 모사(模寫)할 수 있으나 그 도는 모사할 수 없으며, 그 몸은 그릴 수 있으나 그 마음은 그리지 못하여, 다만 이름과 지위를 가지고 모의(模擬)하는 듯하다.
또 두추(斗樞 북두성의 첫 번째 별)에 번개가 치자 황제 헌원씨(黃帝軒轅氏)가 용상(龍床)에 납시고, 치우(蚩尤)의 안개가 걷히자 운사(雲師)가 나열하는 듯하다. 그리하여 음양(陰陽)을 조화하고 사시(四時)를 순히 하는 것은 정승의 지위에 있는 풍후(風后)이고, 만방(萬邦)을 편안히 하고 사해(四海)를 깨끗이 하는 것은 장수인 역목(力牧)이다. 해와 달을 똑고르게 하여 책력(冊曆)을 만들어 절기(節氣)를 손바닥 위에서 움직인 것은 용성(容成)이란 신하가 있고, 북두성의 자루를 가지고 천문(天文)을 점치고 인간 세상에 육십갑자(六十甲子)를 만든 것은 대요(大撓)라는 사람이 있다.
굽어 살피고 우러러 관찰하여 만 가지 변화를 연구해서 산수(算數)를 만든 것은 바로 예수(隷首)이고, 기후(氣候)를 살피고 수(數)를 상고하여 알맞는 음을 찾아 율려(律呂)를 만든 것은 영륜(伶倫)이다. 의복에 문장(文章)을 만들어 귀천(貴賤)이 드러나고 배와 수레를 만들어 만국(萬國)이 와서 조공하니, 여러 관직이 모두 구비하여 각각 하늘이 내려준 직책을 수행해서 하늘의 직무를 다스리는 기상(氣像)이 있다.
또 당(唐)과 우(虞)의 시대에 요(堯)와 순(舜)이 등극함에 사악(四岳)이 지위에 있고, 팔원(八元)과 팔개(八凱)가 등용되어 한 당(堂)에서 서로 담론을 하고, 여러 제후(諸侯)들이 아름답게 덕이 있는 이에게 양보하여 상서로운 바람을 만들고 상서로운 해가 빛나니, 백관(百官)들이 서로 좋은 점을 본받아 모든 공적이 이루어지는 기상이 있다.
또 주(周) 나라 무왕(武王)이 목야(牧野)에 군대를 주둔하고 하늘의 아름다운 명을 기다리고 있는데, 만국의 군대가 모두 모이고 열 명의 훌륭한 신하들이 일제히 일어나 군의 대오(隊伍)가 정돈되고 창과 칼이 구름을 깨끗이 씻어낸다. 태공(太公)은 날쌘 매처럼 뽐내고 굉요(閎夭)는 훌륭한 계책을 올리는데 무왕이 황금 도끼와 흰 깃발을 가지고 군사들에게 맹세하니, 우방(友邦)의 여러 군주와 일을 맡은 사도(司徒), 사마(司馬), 사공(司空), 아(亞), 여(旅), 사씨(師氏)와 천부장(千夫長), 백부장(百夫長)들이 각각 창을 들고 각각 방패를 나란히 하고 각각 세모진 창을 세워 함께 맹세하는 말을 듣는다. 그리하여 범과 같고 비휴(貔貅)와 같고 곰과 같고 큰 곰과 같이 무용(武勇)이 당당한 장수들이 일제히 멈추어 힘을 쓰는 듯한 기상이 있다.
또 주공(周公)이 총재(冢宰) 자리에 있으면서 예악(禮樂)을 만든 것이 천지(天地)의 조화와 같으니, 여러 관직과 온갖 직책을 맡은 자들이 모두 질서를 따라 예악과 문물이 구비되지 않음이 없다. 제후들이 조회 오매 다섯 등급의 작위(爵位)로 진열하여 옥과 비단이 뜰에 교차하고 종과 북이 당하(堂下)에 모두 매달려 있다. 치국(治國)의 대도(大道)를 막 펼쳐 존비(尊卑)의 지위를 감히 혼란시키지 못하고, 사당에서 연향(宴饗)을 마련하여 크고 작은 신하들이 감히 예를 넘지 못하니, 목목(穆穆)하고 황황(皇皇)하며 빈빈(彬彬)하고 욱욱(郁郁)한 기상이 있는 듯하다.
또 천지(天地)의 원기(元氣)가 이구산(尼丘山)에 모여 있어 공자(孔子)가 수수(洙水)와 사수(泗水) 가에서 가르침을 베풀자, 영재(英才)가 구름 떼처럼 모여 3천 명의 제자가 있고 70명의 훌륭한 인재를 이루니, 다섯 가지 과목을 세워 재주를 다하고 네 가지 가르침을 가지고 학문을 성취시킨다. 그리하여 혹은 당(堂)에 올라 방(房)에 들어온 자도 있고 혹은 문장(門墻)을 바라보기만 하고 들어가지 못한 자도 있다. 안회(顔回)는 어리석은 듯하고 증삼(曾參)은 노둔하며 중유(仲由)는 용맹하고 증점(曾點)은 뜻이 높아 각각 그 재주에 따라 성취하니, 재주는 사람에 따라 길고 짧고, 학문은 공력에 따라 높고 낮으나 모두가 성현(聖賢)의 무리이다.
또 맹자(孟子)가 전국 시대(戰國時代)에 우뚝이 솟아 수사(洙泗)의 성학(聖學)을 이어 드높은 태산(泰山)의 기상을 지니고 호연(浩然)의 바른 기운을 길러 천지의 사이에 충만되어 있다. 제(齊) 나라와 양(梁) 나라의 군주를 압도하니 인의(仁義)의 말이 하늘을 다스릴 수 있고, 장의(張儀)와 공손연(公孫衍)의 무리를 첩이나 부인으로 여기니 도덕(道德)의 의논이 땅을 다스릴 수 있다. 무너지는 파도에 울분을 느껴 큰 제방(堤防)을 세우고, 우리 도를 보호하여 큰 한계(限界)를 만들어 황왕(皇王)의 세대를 출입하고 예의(禮義)를 종횡(縱橫)하니, 문장(文章)의 예봉(銳鋒)이 몇천 길[丈]인지 알 수 없으며 화두(話頭)가 몇만 층인지 알 수 없다. 유속(流俗)들은 그 의(義)를 우러러보고는 혼이 달아나고 이단(異端)들은 유풍(遺風)을 바라보고는 넋이 빠지니, 그 확고함이 흔들 수 없고 그 엄함이 범할 수 없는 듯하다.
또 진(秦) 나라 관문(關門)이 한번 격파되니 초(楚) 나라의 범처럼 무서운 항우(項羽)가 교만하고, 때가 오지 않으니 적룡(赤龍)인 유방(劉邦)이 잠시 굽힌다. 홍문연(鴻門宴)에 호걸들이 다투어 달려와 범증(范增)은 결행을 재촉하는 패옥(佩玉)을 자주 들고 항장(項莊)은 칼춤을 추어 유방을 죽이려 한다. 장량(張良)이 급히 나가 위급함을 알리자 번쾌(樊噲)가 방패를 들고 곧바로 들어오니, 이 때를 당하여 사나운 바람이 뒤집히는 듯하고 구름이 어지러이 모이는 듯하며, 범이 움키는 듯하고 용이 버티고 있는 듯하다. 초(楚) 나라 신하들은 초 나라를 위하여 도모하고 한(漢) 나라 신하들은 한 나라를 위하여 도모하니, 천하의 자웅(雌雄)이 아직 결판나지 않은 듯하다.
또 천하가 한(漢) 나라로 돌아와 초 나라가 망하고 노(魯) 나라가 도륙(屠戮)을 당하니, 전씨(田氏)의 후손이 외로운 섬에서 의리를 지킨다. 그를 따르는 자 4백 명은 모두가 의사(義士)인데, 천하가 넓지 않은 것이 아니나 4백 명의 몸을 용납할 곳이 없으며, 한(漢) 나라의 벼슬이 영화롭지 않은 것이 아니나 한 마음으로 지키는 절개를 바꿀 수 없다. 이에 의리를 뽐내어 하늘에 맹세하고 함께 죽기로 약속하니, 4백 명이 충절(忠節)을 지켜 함께 죽어 추상(秋霜)이 늠름한 듯하다.
또 한(漢) 나라의 국운(國運)이 장차 다하니 영웅이 힘을 쓸 곳이 없다. 오(吳) 나라와 위(魏) 나라가 한창 강성하니, 촉(蜀) 나라의 왕업(王業)이 외롭고 위태롭다. 힘은 비록 미약하나 의리는 더욱 굳세고, 세력은 비록 부족하나 뜻은 더욱 웅장하다. 와룡(臥龍 제갈량(諸葛亮)을 가리킴)은 구름과 비 속에서 비늘을 떨치고 봉추(鳳雛 방통(龐統)을 가리킴)는 아득한 하늘에서 날개를 치며관우(關羽)는 범처럼 뛰어오르고 장비(張飛)는 곰처럼 분발하고 조운(趙雲)은 사람들 속에서 뛰어나며, 또 모두 담력(膽力)을 키우고 주먹을 떨침과 같으니, 끝내 성공과 실패를 가지고 영웅을 논할 수 없다. 이 때를 당하여 촉 나라의 한 지방이 어찌 영웅의 소굴이 아니겠는가.
또 수양성(睢陽城)이 위급하여 외로운 성에 힘이 다하였는데, 장순(張巡)이 천 길 높이 우뚝한 절개를 지니고 허원(許遠)이 구정(九鼎)의 의리를 잡아, 애첩(愛妾)을 죽여 먹으면서도 뜻이 흔들리지 않고, 참새를 모두 잡아 먹고 쥐구멍을 파 먹으면서도 기운이 꺾이지 않는다. 하란진명(賀蘭進明)은 공을 시기하여 구원하지 않고 오랑캐의 형세는 약세(弱勢)를 틈타 더욱 압박하니, 남제운(南霽雲)의 성난 쓸개가 말[斗]처럼 크고, 뇌만춘(雷萬春)의 의(義)가 산처럼 높은 것과 같다. 이 때를 당하여 수양성 안의 사람들이 모두 분노하고 함께 감격하여 필사(必死)의 각오를 간직하고 구차히 살려는 계책이 없다. 그리하여 한 성으로 온 천하를 막아내어 성이 비록 격파되었으나 충절이 더욱 굳고 죽음이 비록 참혹하였으나 의리가 더욱 높았으니, 어쩌면 그리도 장한가.
애산(崖山)에 해가 지는데 창해(滄海)에 구름이 깜깜하다. 군신(君臣)과 사직(社稷)을 외로운 한 배에 싣고 가니, 이 때를 당하여 일이 이미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문천상(文天祥), 육수부(陸秀夫), 장세걸(張世傑) 등 여러 신하들은 위태로움에 대처하는 큰 충절이 확고하여 평상시와 다름이 없다. 조복(朝服)과 주절(柱節)로 강상(綱常)의 중함을 한 몸에 맡기고 하루의 사직을 보존할 것을 도모하여 곧바로 하루의 직분을 다하였으니, 비록 원(元) 나라의 백안(伯顔)과 장홍범(張弘範)이 하늘에 넘치는 세력으로 핍박하였으나 자신에게 있는 의지는 일찍이 조금도 변치 않았다. 아! 어쩌면 그리도 늠름한가.
이는 내가 이 산을 유람할 적에 수많은 바위의 기이한 모양을 보고 우리 인간의 기상을 만고(萬古)의 위에 인식한 것이니, 비록 인간의 일에 크고 작음이 똑같지 않고 지나간 자취에 길흉(吉凶)이 각기 다르나 널리 취하여 비유함에 어찌 해롭겠는가.
적멸(寂滅)의 가르침이 서방(西方)에 일어나 파리한 중과 늙은 승려(僧侶)가 백 명과 열 명으로 무리를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육합(六合)을 먼지와 초개(草芥)로 여기고 인간 세상을 꿈과 환(幻)으로 여겨, 하늘을 우러르고 벽을 향하여 좌선(坐禪)하고 입정(入定)하는 것은 이른바 승려와 부처인데, 바위의 괴이한 것이 이와 유사하다.
선도(仙道)의 학문이 후세에 나와 조화(造化)의 권세를 훔치고 사생(死生)의 관문을 초월하여, 천륜(天倫)을 거스르고 인륜을 버려 방장산(方丈山)을 집으로 삼고 영주산(瀛洲山)을 가정(家庭)으로 여긴다. 그리하여 천년 봄을 고요히 앉아 있고 바둑 한 판에 도끼 자루가 썩는 것은 이른바 신선(神仙)인데, 바위의 은벽(隱僻)한 것이 이와 유사하다.
그러나 이상은 모두 우리의 도(道)가 아니니, 비록 이와 유사한들 어찌 굳이 숭상할 것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바위가 사람과 유사하려는 데 뜻이 있는 것이 아니요, 나의 뜻으로 스스로 모의(模擬)할 뿐이다.
똑같은 한 산의 바위인데 바위의 모양이 천 가지로 다르고 만 가지로 구별되며, 똑같은 천지의 사람인데 사람의 일에는 천만 가지 변화가 있으니, 천지가 만물을 만든 실정(實情)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바위 모양이 천 가지로 다르고 만 가지로 구별됨과 인간의 일이 천만 가지로 변화함은 모두가 이치이다. 이치는 본래 하나인데 물건에 나타남은 천 가지 다름과 만 가지 구별이 있으며 사람의 일은 천만 가지 변화가 있으니, 이는 어째서인가? 이 이치는 본래 일정한 방소(方所)가 없고 또 일정한 형체가 없으므로 물건이 얻어 형체가 될 적에 자연히 그 다름과 구별이 없을 수 없으며, 사람이 얻어 일이 될 때에 또한 그 변화가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이치가 하나임은 체(體)이고 형체가 각기 다름과 일이 변함은 용(用)이니, 하나가 있지 않으면 어떻게 천만 가지의 용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체는 하나가 아닐 수 없고 용은 천만 가지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지가 만물을 내고 물건이 형체를 지니고 있음이 천만 가지가 아닐 수 없는 것은 자연의 형세이므로 그렇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기상을 간직하고 사업을 짓는 것으로 말하면 어찌 그 사이에 취사 선택이 없을 수 있겠는가. 물건의 형체가 각기 다름과 인사(人事)의 변화가 이미 한 이치에 해롭지 않다면 내 지나간 옛 자취를 저울질하고 인사의 변화를 취사 선택하는 것이 한 성(性)에 해롭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바위가 물건과 유사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내가 취하는 것이 선택이 없을 수 있겠는가. 삼황(三皇), 오제(五帝)의 지극한 도(道)의 질박함과 지극한 덕(德)의 순박함을 내 숭상하지 않을 수 없다.
황제 헌원씨(黃帝軒轅氏)가 여러 관직을 진열하고 당(唐), 우(虞)가 온갖 직책을 나열하며, 정돈되고 엄숙함이 목야(牧野)의 출정(出征)과 같고, 질서정연하고 찬란함이 주공(周公)의 제도(制度)와 같은 것을 내 사모하지 않을 수 없다. 공자(孔子)가 수사(洙泗)에서 가르치는 과목을 설정하고 맹씨(孟氏 맹자(孟子)를 가리킴)가 도를 호위함을 내 이에 스승삼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홍문(鴻門)의 호걸과 전횡(田橫)의 의사(義士)는 내 그 지략은 위대하게 여기나 그 덕은 보지 않으며 그 뜻은 아름답게 여기나 그 도는 취하지 않는다. 촉한(蜀漢)의 영웅과 수양(首陽)의 절의와 애산(崖山)의 충의는 내 이에 높이 숭상하여 존경한다. 그러나 승려와 부처의 학문은 이단(異端)이니 배척하여야 할 것이요, 선도(仙道)의 도는 바른 도가 아니니 멀리하여야 할 것이다.
숭상할 만하고 사모할 만하고 스승삼을 만한 것과 위대하게 여기나 보지 않고 아름답게 여기나 취하지 않는 것과 높이 존경하나 배척하여 멀리하는 것은 다 내가 평소에 강명(講明)하여야 할 바이니, 어찌 산의 바위를 필요로 하겠는가.
오직 상상하고 모의하여 천 년의 뒤에 마치 훌륭한 모습과 풍절(風節)을 천 년 이전에 본 듯한 것으로 말하면 어찌 오늘날 이 유람으로 말미암아 얻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에 그 비유되고 모의되어 인식된 것을 기록해서 다른날 책상 위에 분발하는 자료로 삼는 바이다.
만력(萬曆) 정유년(1597,선조30) 맹하(孟夏) 일(日)에 기록하다.

[주D-001]사악(四岳) : 고대에 있었던 관명(官名)으로 사방 제후(諸侯)를 총괄하는 임무를 맡았다.
[주D-002]팔원(八元)과 팔개(八凱) : 팔원은 여덟 명의 인인(仁人)이고 팔개는 여덟 명의 선인(善人)이다.
[주D-003]열 명의 훌륭한 신하 : 《서경(書經)》 태서(泰誓)에서 무왕(武王)은 “나는 나라를 다스리는 열 명의 신하가 있다.” 하였으며, 《논어(論語)》 태백(泰伯)에서 공자(孔子)는 “이 중에 부인이 한 명 끼어 있으니, 남자는 9명뿐이다.” 하였는데, 그 주(註)에 열 명의 신하는 주공 단(周公旦), 소공 석(召公奭), 태공 망(太公望), 필공(畢公), 영공(榮公), 태전(太顚), 굉요(閎夭), 산의생(散宜生), 남궁괄(南宮适)과 무왕의 어머니인 문모(文母)라 하였고, 일설에는 무왕이 자기 어머니를 신하라고 말할 수 없으니 아마도 무왕의 아내인 읍강(邑姜)일 것이라고 하였다.
[주D-004]우방(友邦)의……백부장(百夫長) : 이 내용은 《서경(書經)》 목서(牧誓)에 보인다. 아(亞)는 부(副)의 뜻으로 부사도(副司徒), 부사마(副司馬), 부사공(副司空)을 이르며, 여(旅)는 여러 대부(大夫)이고 사씨(師氏)는 성문을 지키는 장수이며, 천부장(千夫長)과 백부장(百夫長)은 천 명을 거느리는 장수와 백 명을 거느리는 장수이다.
[주D-005]목목(穆穆)하고……기상 : 목목은 공경하는 모양이고 황황(皇皇)은 아름다운 모양으로 천자와 제후왕의 훌륭한 용모를 나타낸 것이다. 빈빈(彬彬)은 문(文)과 질(質)이 잘 조화되어 아름다운 모양이고 욱욱(郁郁)은 문채가 찬란한 모양이다.
[주D-006]다섯 가지 과목 : 자세하지 않다. 《논어(論語)》 선진(先進)에서 공자(孔子)의 제자들을 소장(所長)에 따라 네 가지로 분류하여 “덕행(德行)에는 안연(顔淵), 민자건(閔子騫), 염백우(冉伯牛), 중궁(仲弓)이고, 언어(言語)에는 재아(宰我), 자공(子貢)이고, 정사(政事)에는 염유(冉有), 계로(季路)이고, 문학(文學)에는 자유(子游), 자하(子夏)이다.” 하였다. 후세에는 이것을 공문사과(孔門四科)라 하는바, 혹 이 사과를 오과(五科)로 잘못 쓰지 않았나 추측된다.
[주D-007]네 가지 가르침 : 문학과 행실, 충(忠)과 신(信)으로, 《논어(論語)》 술이(述而)에 “공자는 네 가지로 사람을 가르쳤으니 문학과 행실, 충과 신이었다.[子以四敎 文行忠信]”라고 보인다.
[주D-008]전씨(田氏)의 후손 : 제(齊) 나라의 전횡(田橫)을 가리킨다. 전국 시대(戰國時代) 제 나라의 왕족으로 초(楚)와 한(漢)이 대치하던 당시 전영(田榮)의 뒤를 이어 제왕(齊王)이 되고 항우(項羽)를 섬겼으나, 항우가 패망하자 화를 두려워하여 5백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서해의 오호도(烏乎島)로 피신하였다. 천하를 통일한 유방(劉邦)이 사람을 보내어 “와서 항복하면 제후왕을 봉하고 오지 않으면 섬 전체를 도륙(屠戮)하겠다.”고 위협하자, 낙양(洛陽)으로 유방을 찾아가던 중 끝내 굴복하는 것을 싫어하여 그만 자결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그의 부하들도 모두 자결하여 충절을 지켰다. 본문의 4백 명은 5백 명의 오기(誤記)인 것으로 보인다.
[주D-009]구정(九鼎)의 의리 : 구정은 우왕(禹王)이 구주(九州)의 쇠를 모아 주조하였다는 솥으로 역대에 국가의 왕통(王統)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여겨왔다. 이 때문에 큰 의리와 충절을 일컫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주D-010]애산(崖山) : 애산(厓山)으로도 쓴다. 중국의 광동성(廣東省) 신회현(新會縣) 남쪽 바닷속에 있는 섬으로 천험(天險)의 요새이다. 남송(南宋) 말기 금(金) 나라의 침공으로 송(宋) 나라가 위태롭게 되자, 장세걸(張世傑) 등은 황제인 조병(趙昺)을 받들고 이곳으로 피난하였으나 금 나라의 백안(伯顔)과 장홍범(張弘範)에게 패하여 멸망하였는바, 다음의 내용은 이 사실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宋史 卷四百五十一 張世傑列傳》
[주D-011]조복(朝服)과 주절(柱節) : 조복은 조회할 때에 입는 관복이며 주절은 가느다란 철사줄이 들어 있는 관(冠)으로 추측되나 자세하지 않다.
[주D-012]적멸(寂滅)의 가르침 : 불교(佛敎)의 교리를 이른다. 적멸은 열반(涅槃)의 의역(義譯)인바, 본체가 고요하여 일체의 상(相)을 떠났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여헌선생문집 제8권_

잡저(雜著)_

 

명경신당 제사(明鏡新堂題詞)

 

당의 주인은 나의 외손(外孫)인 박률(朴慄)이니, 스스로 안행(雁行) 가운데 넷째로서 생부(生父)의 명령을 받들어 백부(伯父)인 상사공(上舍公)의 양자(養子)가 되었는바, 상사는 바로 용암 선생(龍巖先生)의 제사(祭祀)를 받드는 증손(曾孫)이다.
용암의 스승은 송당(松堂) 박 선생(朴先生)이며 친구는 진락당(眞樂堂) 김 선생(金先生)이니, 그 문로(門路)의 바름과 자임(自任)의 중함이 저술한 여러 책에 자세히 나와 있고, 또 부(府)의 선비들의 귀와 눈에 보고 들어 익숙히 알고 있으므로 내 굳이 다시 말하지 않는다.
용암이 생존해 계실 때에 집 앞에 당(堂)을 설치한 다음 그 아래에 못을 파서 네모지게 만들고 마침내 당호를 명경(明鏡)이라 하였으니, 상상컨대 당호를 지은 것은 반드시 심상(尋常)한 것이 아닐 것이다.
애석하게도 병란(兵亂)을 만나 당은 빈터가 됨을 면치 못하였는데, 상사공(上舍公)이 모재(茅齋) 몇 칸을 설치하였다. 그 후 상사가 별세하자 서재(書齋)가 또다시 무너졌는데, 이제 마침내 옛날 주춧돌을 정돈하여 새 서재를 건축하니, 방이 두 칸이고 대청이 한 칸이었다. 비록 옛날 당을 그대로 받들어 똑같이 하지는 못하였으나, 또한 선대(先代)의 뜻을 잘 받들어 집을 지었다고 이를 만하다.
나는 오랫동안 앓던 병이 다소 덜하므로 어린 손자들을 보러 왔었는데, 당의 주인이 나에게 한 마디 말을 써서 벽에 남길 것을 청하므로 이 당(堂)의 시말(始末)을 대강 서술하였다. 그리고 서술을 마친 다음 다시 주인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아! 네가 선대의 뜻을 따라 이 당을 지은 것은 그 뜻이 참으로 좋다. 그러나 늙은 내가 생각해 보니, 네가 선친(先親)의 뜻을 계승하고 선대의 일을 전하는 사업이 어찌 다만 이 당을 건축하는 것일 뿐이겠는가. 그 중하고 또 큰 것이 따로 있다. 선생이 저술한 자양심학지론(紫陽心學至論)은 바로 마음을 다스리는 큰 요체이며, 격몽편(擊蒙篇)과 경행록(景行錄)은 모두 일상 생활하는 사이에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긴요한 내용이다. 그리고 삼후전(三侯傳)은 또 남아(男兒)가 뜻하고 숭상함에 간절한 것이며, 위생방(衛生方) 역시 혈기(血氣)로 몸을 지니고 있는 자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네가 이 당에 있으면서 선생의 유훈(遺訓)을 실추하지 않는다면 어찌 네 사업의 중하고 또 큰 것이 아니겠는가. 내 비록 노망하였으나 이 말로 끝마치는 것은 그 뜻이 결코 천근(淺近)하지 않으니, 네 부디 노력할지어다.”

[주D-001]용암 선생(龍巖先生) : 용암은 박운(朴雲:1493∼1562)의 호. 자(字)가 택지(澤之)이고 본관이 밀양(密陽)으로 선산(善山) 출신임. 중종 14년에 진사(進士)가 되고, 이때 박영(朴英)을 찾아가 학문의 방법을 물었다.
[주D-002]송당(松堂) 박 선생(朴先生) : 송당은 박영(朴英:1471∼1540)의 호. 자가 자실(子實)이고 본관이 밀양임. 본래 무관(武官) 출신이었으나 뒤에 신당(新堂) 정붕(鄭鵬)을 사사하고 학문에 힘써 대학자가 되었다.
[주D-003]진락당(眞樂堂) 김 선생(金先生) : 진락당은 김성취(金成就:1492∼1551)의 호. 자가 성지(成之)이고 본관이 선산(善山)임. 박영(朴英)의 문하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전공하였다.

여헌선생문집 제8권_

잡저(雜著)_

 

용졸당설(用拙堂說)

 

당(堂)의 주인이 현광(顯光)에게 글을 보내오기를, “당(堂)은 임천군(林川郡) 남당강(南塘江)의 서쪽 강안(江岸)에 있으니, 바로 제가 터를 잡아 세운 것이며, 당호(堂號) 역시 저의 호입니다. 옛날 우리 선친(先親)께서는 양졸(養拙)로 당호를 삼으셨으므로 우리 형제 세 사람이 모두 졸당(拙堂)을 계승하여 호를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형 성도(聖徒)는 수졸(守拙)이라 하였고 아우 성복(聖復)은 지졸(趾拙)이라 하였으며, 지금 이 성징(聖徵)은 용졸(用拙)로 저의 당호를 삼았으니, 졸(拙)은 진실로 집안 대대로 전하여 함께 숭상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 형세의 빼어남과 경치의 풍부함을 모두 기록하여 보여준 다음 인하여 한 문자(文字)를 청해서 잊지 않는 자료로 삼으려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졸(拙)은 덕(德)의 바탕이니, 졸함으로써 마음을 잡으면 마음이 망녕된 생각이 없고 졸함으로써 몸을 가지면 몸이 망녕된 행동이 없으며, 일에 응할 때에 졸로써 응하면 일이 순하지 않음이 없고 남을 대할 때에 졸로써 대하면 남이 믿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졸은 만복(萬福)의 기초가 아니겠는가.
이 졸함을 길러 대대로 전하여 한집안이 적덕(積德)하는 자료로 삼았는데, 이에 이것을 지켜 수졸(守拙)이라 하고 이에 이것을 따라 지졸(趾拙)이라 하였으니, 이는 모두 선친의 뜻을 계승하고 선친의 일을 따르는 효도이며, 주인은 또 졸을 써서 용졸(用拙)이라 하였으니, 그 뜻을 나타낸 것이 더더욱 깊다.
졸하면 재주가 없고 재주가 있으면 졸하지 않으니, 졸하여 졸함을 따르는 자는 언제나 일을 하는데 부족하고, 재주로 재주를 부리는 자는 항상 작위(作爲)하여 병통이 있다. 그러므로 오직 재주가 있으면서도 졸함을 쓴 뒤에야 재주로써 졸함을 구제하고 졸함으로써 재주를 억제하여 활용함에 맞고 행함에 마땅한 도가 되는 것이다.
주인은 또한 재주에 뛰어나다고 말할 만한데 마침내 졸을 쓰는 것을 뜻으로 삼아 당호를 삼고 가슴속에 새겨두니, 그렇다면 주인이 이 졸에 힘을 얻은 것이 필경 어떠하겠는가. 나는 주인을 위하여 거듭 축하하는 바이다.
강산의 빼어난 형세와 보기 좋은 경치로 말하면 이 당에 오르는 자 중에 반드시 문장(文章)으로써 그림을 대신하는 솜씨가 있을 것이다. 나는 실로 졸하여 졸을 따르는 자인데 주인이 글을 요구하므로 감히 졸한 말로 고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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