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헌선생문집 제8권_
잡저(雜著)_
역학도설서(易學圖說序)
역(易)은 바로 천지(天地)이니, 천지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만변 만화(萬變萬化)와 만사 만물(萬事萬物)이 그 가운데에 있게 되었다. 역(易)이 어찌 이것을 벗어나 별도로 딴 도리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천지는 진실로 스스로 천지가 있고, 만변 만화는 진실로 스스로 만변 만화가 있고 만사 만물은 진실로 스스로 만사 만물이 있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천지가 자연히 역이 되는 것이다.
고유한 천지와 고유한 변화(變化)와 고유한 사물(事物)을 보면 여기에 역이 있는 것이니, 역을 굳이 다시 책을 만들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성인(聖人)이 반드시 역의 책을 만든 것은 어째서인가? 이는 바로 우리 인간을 위하여 만든 것이다.
사람은 진실로 누구나 몸을 가지고 있는데 지극히 가까운 것은 이 몸보다 더한 것이 없다. 그러나 이(耳), 목(目), 구(口), 비(鼻)가 이, 목, 구, 비가 된 이치와 사지(四肢), 백해(百骸)가 사지, 백해가 된 이치와 오장(五臟), 육부(六腑)가 오장, 육부가 된 이치를 아는 자는 드물다.
더구나 혼륜(渾淪)한 것을 우러러보고 하늘이 된 이치를 알며, 방박(磅礴)한 것을 굽어보고 땅이 된 이치를 알며, 만물이 떼지어 사는 가운데에 있으면서 만물의 이치를 아는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형체를 보고 이치를 알며 그릇을 보고 도를 알며 사물을 보고 법칙을 알며 드러난 것을 보고 은미한 것을 아는 자는 성인이 아니면 가능하겠는가.
사람이면서 이 도리를 알지 못한다면 이 역시 새와 짐승일 뿐이요 풀과 나무일 뿐이며, 서되 마땅히 서야 할 땅을 알지 못하고 행하되 마땅히 행하여야 할 길을 알지 못한다면 어찌 삼재(三才)의 도에 참예하겠는가. 성인이 이것을 걱정하여 부득이 역(易)을 만들어서 방책(方冊)의 위에 천지를 모상(模象)하였다. 이러한 뒤에야 신명(神明)의 덕(德)을 이로써 통하고 만물(萬物)의 정(情)을 이로써 유추할 수 있었다.
무릇 우주(宇宙) 사이의 이른바 만변 만화와 만사 만물이 모두 이 역의 포함하는 바와 덮는 바가 되어 고금(古今)의 구별이 없고 유명(幽明)의 차이가 없으며 멀고 가까움의 구별이 없고 크고 작음의 차이가 없이 모두 도망할 수 없으니, 이는 진실로 역이란 책이 과연 위대하고 지극하다는 실제에 걸맞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에 비로소 책 속에 있는 역을 가지고 천지의 역을 알고 모상한 천지를 가지고 고유한 천지를 알아 우리 인간의 사업이 이로부터 정해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인문(人文)이 역을 얻어 밝게 드러나고 사물의 법이 역을 얻어 다해지고 이륜(彛倫)이 역을 얻어 펴지는 것이니, 이에 이르면 이 역의 공용(功用)을 어찌 다 측량할 수 있겠는가. 마땅히 천지가 남아 있으면 이 책이 천지와 더불어 함께 보존되어 천지와 더불어 시종(始終)을 함께할 것이다.
그러나 팔괘(八卦)가 64괘가 되어 크게 갖추어졌는데, 문왕(文王)이 괘사(卦辭)를 지어 64괘의 뜻을 밝히고, 주공(周公)이 효사(爻辭)를 지어 3백 84효(爻)의 뜻을 밝혔으며, 공자(孔子)가 십익(十翼)을 지어 이 역이 천지에 있는 것과 책 속에 있는 것을 밝히셨다. 그리하여 반드시 이처럼 반복하여 자세히 다한 뒤에 끝마친 것은 어째서인가?
역의 이치는 본래 스스로 천지와 만물에 갖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삼황(三皇) 이전에는 다만 천지를 굽어보고 우러러보며 만물을 사방으로 관찰하여 모두 그 이치를 알았고, 복희(伏羲) 이후와 문왕(文王) 이전에는 다만 괘효(卦爻)의 상(象)을 보고서도 모두 그 이치를 알았으니, 이는 총명 예지(聰明叡智)하고 신무(神武)하여 죽이지 않는 성인(聖人)이 아니겠는가.
성인은 세상에 큰 질박함이 이미 흩어져 세변(世變)이 날로 낮아지므로 사물을 열어주고 이루어주는 방법을 베풀지 않을 수 없음을 알았다. 이에 천지와 사람과 물건이 있으면 괘(卦), 효(爻)가 없이 역학(易學)을 할 수 없다고 여겼으므로 이에 괘, 효를 그었으며, 괘, 효가 있으면 또 계사(繫辭)가 없이 역학을 할 수 없다고 여겼으므로 이에 계사를 지은 것이다. 이미 괘, 효를 긋고 계사를 짓자 역의 가르침이 이루어졌다.
복희는 천지가 아직 발명하지 않은 것을 발명하였고 문왕과 주공은 복희가 미처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하였고 공자는 문왕과 주공이 미처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괘를 긋고 말을 단 것이 모두 성인이 그만둘 수 없는 것이었다.
복희, 문왕, 주공, 공자 네 성인이 이미 멀어지자 좌도(左道)가 어지럽게 일어나서 천 년 이래로 역도(易道)가 거의 어두워지게 되었는데, 또 다행히 정자(程子)가 《역전(易傳)》을 짓고 주자(朱子)가 《본의(本義)》와 《계몽(啓蒙)》 등의 책을 지어 네 성인의 남은 진리를 발명하니, 이 역(易)을 우익(羽翼)함이 극진하고 또 극진하였다.
정자(程子), 주자(朱子) 이외에 전후의 여러 학자들이 이미 갖추어진 역을 인하여 혹을 덧붙이고 무사마귀를 더하며 가지를 모사(摸寫)하고 잎새를 흉내내어 말을 늘어놓아 논설하고 남는 먹으로 도식(圖式)을 만들고는 스스로 역의 뜻을 밝힌다고 여긴 자가 무릇 몇 사람이나 되는데, 지금 전하는 자가 거의 없어 그것이 있거나 없거나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 이와 같은데도 내가 지금 다시 이 책을 엮어 편집함은 어째서인가?
내 일찍이 생각해 보니, 괘, 효의 이치가 심오하고 해석한 내용 또한 은미(隱微)하다. 후세에 태어난 자가 각자 자신의 견해를 내어 심오한 이치를 밝히고 은미한 말을 열어 놓으려고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더욱 미루어 부연하고 더욱 논설과 해석을 붙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도식 위에 도식을 만들어 도식이 여러 가지 모양에 이르고, 말 뒤에 말을 달아 말이 몇 권에 이르러, 세상이 내려올수록 서책이 더욱 많아지고 서책이 더욱 많아질수록 역리(易理)가 더욱 혼잡하게 되었다. 그러하니 경(經)의 본지(本旨)를 모독하고 혼란시킨 것이 진실로 십중팔구(十中八九)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 혹 한 도식이나 한 말이라도 한 가지 뜻을 통달한 것이 있으면 또한 마땅히 취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치는 진실로 정(精)한 것과 거친 것의 차이가 없고 큰 것과 작은 것의 구별이 없으니, 이리저리 종횡(縱橫)하고 종합하여 천 가지 조목(條目)과 만 가지 맥락(脈絡)이 모두 꿰뚫리고 다 포괄되어 그 묘함이 무궁무진하다. 역(易)의 묘리가 이 때문에 무궁한 것이다.
사람이 역리를 아는 것은 혹 정하고 혹 거칠며 혹 크고 혹 작아서 과연 서로 십 배, 백 배의 차이가 나는바, 십분의 경지를 모두 통달한 자는 진실로 항상 있지 못하며, 천 가지 조목 중에 한 가지 조목과 만 가지 맥락 중에 한 가지 맥락을 엿보아 앎이 있으면 이 또한 모두가 진리이다. 이 때문에 도식을 만들고 해석을 만든 것이 혹 역을 배우는 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모두 거두고 함께 모아 나란히 합해서 참고하여 살펴보는 자료로 삼는 것은 또한 초학자들에게 매우 절실하다. 그러므로 한 질(帙)을 모아 책을 만들고 분류(分類)하여 차례로 나열하니, 역리의 근원과 분파(分派), 처음과 끝이 모두 이 안에 들어 있다. 보는 자는 반드시 지붕 위에 다시 지붕을 올려놓고 상 위에 다시 상을 올려놓은 것이라고 의심하는 자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자세히 보고 세세히 이해한다면 모두 각기 주장하는 바의 뜻이 있어 비록 중복됨을 면치 못하더라도 실로 싫어할 것이 없다.
그리고 혹 근원이 같으나 분파가 다르고 뜻이 다르나 종지(宗旨)가 같은 것을 또한 취하여 책 끝에 실어서 이 역의 이치가 포함하지 않는 바가 없음을 징험하였다. 그리하여 돌을 끌어다가 옥을 증거하고 저것을 근거하여 이것을 밝히는 자료로 삼게 하고는 총괄하여 이름하기를 《역학도설(易學圖說)》이라 하였다.
도식과 해설은 모두 이미 이루어 놓은 것을 그대로 따랐으나 간혹 천박한 나의 소견으로 망녕되이 도식과 해설을 만들어 붙인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니며, 또 편찬하고 보는 즈음에 스스로 미루어 안 뜻이 있으면 감히 조박(糟粕)이라 하여 버리지 않고 책의 맨 끝에 기록하여 놓았다.
그러나 이는 반드시 선유(先儒)들의 학설에 근본하고 당연한 이치에 부합하게 하였으며, 전연 나의 억측으로 헤아린 것이 아니요 또 억지로 천착(穿鑿)한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어둡고 둔한 나 자신이 보기에 편리한 자료로 삼으려고 했었는데, 다시 한 집안의 몽매한 자들을 열어 보이고자 하였으므로 마침내 이 책을 편찬하게 된 이유를 말하여 책머리에 쓰는 바이다.
[주D-001]십익(十翼) : 《주역》에 대한 열 편의 부연 설명서로 단전(彖傳) 상(上)·하(下), 상전(象傳) 상·하, 계사전(繫辭傳) 상·하, 문언전(文言傳), 설괘전(說卦傳), 잡괘전(雜卦傳), 서괘전(序卦傳)을 이른다. 공자는 《주역》을 좋아하여 단전, 상전, 계사전, 설괘전, 문언전 등을 지었다 한다. 《史記卷四十七 孔子世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