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전서 제102권

경사강의(經史講義) 39 ○ 역(易) 2
[돈괘(遯卦)]

돈괘(遯卦)의 의의(意義)에 대해서는 《정전》과 《본의》에 상세하다. 그러나 여섯 효(爻)로 본다면 다 같이 물러난다는 뜻이다. 위의 세 효에서는 “좋아하면서도 물러남이다.”, “아름답게 물러남이다.”, “살찌게 물러남이다.”라고 하여 용퇴(勇退)를 부러워하는 뜻이 있고, 아래 세 효에서는 “물러나는 데 꼬리 격이라 위태롭다.”, “누런 소가죽을 잡음이다.”, “물러남에 미적거리는 것이다.”라고 하여 미련을 둔 채 결단을 못하는 뜻이 있으니, 어째서인가? 이는 이 괘의 상괘와 하괘 중에 위의 건(乾)은 강건(剛健)한 것이고 아래의 간(艮)은 중지하는 것으로 강건함은 결단하기가 쉽고 중지함은 움직이기가 어려워서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두 음효는 차츰 자라고 네 양효는 바야흐로 물러가는데 점점 자라는 것은 주(主)가 되고 바야흐로 물러가는 것은 빈(賓)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아니면 군자는 양에 속하여 벼슬길에 나아갈 때는 신중을 기하고 물러남은 쉽게 하므로 백구(白駒)를 타고 빈 골짝에 간 것처럼 미련 없이 훌쩍 떠나는 것이고, 소인은 음에 속하기 때문에 세력을 좋아하고 이익을 탐하므로 노둔한 말이 콩깍지를 못 잊는 것처럼 명리에 연연하여 결정하지 못하는 것인가? 이것이 위의 세 효에는 아름답고 좋은 칭찬이 있고 아래의 세 효에는 얽매이고 집착하는 일이 있게 된 까닭인가?

[김희조가 대답하였다.]
‘물러난다’고 하는 뜻은 같은데 위의 세 효는 용퇴하는 뜻이 있고 아래의 세 효는 연연하여 결정하지 못하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이 성상(聖上)의 질문에서 반복하며 유추하여 풀이하신 까닭인데, 그 첫 번째 것은 건(乾)은 강건한 것이므로 결정하기가 쉽고 간(艮)은 중지하는 것이므로 움직이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두 번째 것은 자라나는 음(陰)은 주(主)가 되고 물러나는 양(陽)은 빈(賓)이 된다는 것이고, 세 번째 것은 군자는 양에 속하므로 물러남이 쉽고 소인은 음에 속하므로 물러남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 몇 가지는 진실로 괘(卦)와 효(爻)에 대해 오묘한 뜻을 터득하신 것으로서 신(臣)과 같이 어리석은 자는 더 의논드릴 것이 없습니다. 다만 괘상(卦象)으로 말씀을 드리면 건은 강건한 것으로 위에 있기 때문에 ‘좋다’라던가 ‘아름답다’라고 일컬은 것이 위의 효에 많이 있고, 간은 중지하는 것으로 아래에 있기 때문에 ‘잡는다’라던가 ‘얽매인다’라고 일컬은 것이 아래의 효에 많이 있는데, 이는 대체로 그러한 것입니다. 또 만약에 효마다 나누어서 말한다면 백구(白駒)를 타고 빈 골짝을 찾아 미련 없이 훌쩍 떠나는 것은 상구(上九)에서 “살찌게 물러남이다.”라고 한 것이 이와 비슷하고, 노둔한 말이 콩깍지를 못 잊어 기웃거리며 연연해하는 것은 구삼(九三)에서 “물러남에 미적거리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 이와 비슷합니다. 그리고 초육(初六)의 음과 구사(九四)의 양과 같은 경우는 진실로 점점 자라는 것이 주가 되고 바야흐로 물러나는 것이 빈이 됩니다. 그러나 육이(六二)의 한 효에 대해서는 시대의 사정과 형편에 맞게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 구오(九五)의 임금과는 중정(中正)한 도로써 친합(親合)하여 그 견고함이 지극한 사이인데, 그러한 육이가 물러나고자 하는 것은 군석(君奭)이 성왕(成王)에게 은퇴(隱退)를 청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오기(吳綺)가 “물러남이 합당치 않다.”고 한 말은 이 효에 해당하는 시기에 그러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설해 가면 돈괘 여섯 효의 의의가 거의 풀리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대상(大象)에 이르기를, “군자가 본받아서 소인을 멀리하되 나쁘게 대하지 않고 엄숙하게 한다.”고 하였는데, ‘멀리한다’고 한 원(遠) 자를 극히 잘 보아야 하겠다. 오직 멀리하기 때문에 엄숙함이 생기는 것이고 엄숙하기 때문에 나쁘게 대하지 않아도 절로 멀어지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늘이 언제 사람을 두렵게 하려는 뜻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사람이 스스로 두려워하는 것은 하늘이 지극히 험난하여 오를 수가 없고 해와 달은 타고 넘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소리와 얼굴색을 크게 하지 말아야지 만약에 표정으로 나타내게 되면 소인을 멀리하는 방도에 있어서는 근본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말은 경문(經文)의 뜻과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이곤수가 대답하였다.]
산이 사람을 거절하는 것은 아니나 산이 높아서 사람이 올라갈 수 없는 것처럼 군자가 소인을 끊는 것은 아니나 엄숙하여 범할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대상(大象)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예를 들어 여기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군자이고 한 사람은 소인이면, 군자로서는 진실로 소인과 관계를 끊게 마련인데 그 끊는 방법이 어찌 다른 데에 있겠습니까. 그 몸가짐을 근엄하게 하고 말을 법도 있게 하여, 바라보면 마치 가을철의 서리나 뜨거운 햇빛 같아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위엄이 있고 범할 수 없는 응집된 기상이 있게 되면 저 소인은 반드시 멀리하려고 하지 않아도 절로 멀어지게 될 것인데, 어찌 졸장부가 화를 내는 것처럼 해서야 되겠습니까. 진실로 엄숙한 자세로써 두려워하게 하지는 못하고 다만 나쁜 말과 사나운 표정으로 간사한 사람을 멀리하는 방법으로 삼으면 원망만 사게 될 것이니, 어찌 공자가 ‘말을 삼가라’고 하신 교훈에 맞는 것이 되겠습니까. 저 하늘이 소리와 냄새로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닌데도 백성들이 쳐다보며 공경하는 것은 위엄을 내세우지 않아도 절로 위엄이 서기 때문이며, 군자가 기뻐함과 성냄을 나타내지 않는데도 소인이 멀어지는 것은 공경을 하면서 멀리하기 때문입니다. 엄숙하게 함과 멀리하는 것을 서로 본말(本末)로 삼으면 경문(經文)에서 “나쁘게 대하지 않는다.”고 한 뜻이 확 들어올 것입니다.


 

이상은 돈괘(遯卦)이다.


 

[주D-001]백구(白駒)를 …… 것처럼 : 세상의 부귀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산중의 빈 골짝으로 은퇴함을 뜻하는 말이다. 《詩經 小雅 白駒》
[주D-002]노둔한 …… 것처럼 : 작은 이익에 얽매여 큰 것을 보지 못하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三國志 卷9 魏書 曹爽傳》
[주D-003]군석(君奭)이 …… 청한 것 : 군석은 주(周) 나라 성왕 때 사람으로 나이가 많아지고 벼슬이 높아지자 물러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여 은퇴를 청하였다. 《書經 君奭》

홍재전서 제102권

경사강의(經史講義) 39 ○ 역(易) 2
[항괘(恒卦)]

 

선대 학자의 말에 의하면 “건(乾)과 곤(坤)은 기화(氣化)의 시작이고 함(咸)과 항(恒)은 형화(形化)의 시작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기화ㆍ형화의 의의를 들려줄 수 있겠는가? 또 “형화는 곧 기화이다. 가령 형화가 종식(終息)되게 되면 기화가 다시 일어난다.”라고 말하였는데, 이는 바로 개벽설(開闢說)이다. 그런데 진실로 형화가 곧 기화라면 기화가 종식되지 않았을 적에 형화가 종식되게 된다는 것을 나는 믿지 않는다. 가령 형화가 종식되게 된다면 기화가 다시 일어난다는 것을 무엇으로 체험할 수 있는가?

 

[신복이 대답하였다.]
《주역》 상경(上經)을 건ㆍ곤에서 시작한 것은 천지(天地)의 기화(氣化)의 묘리(妙理)이고, 하경(下經)을 함ㆍ항에서 시작한 것은 남녀(男女)의 형화(形化)의 묘도(妙道)입니다. 음양(陰陽)의 이기(二氣)와 오행(五行)의 기운이 교감(交感)하는 것으로 인하여 만물의 생명이 비롯되는 것이니, 그것이 어찌 천지의 기화가 아니겠습니까. 남녀의 정기가 결합하면 만물이 화생(化生)하는 것이니, 그것이 어찌 남녀의 형화가 아니겠습니까. 대체로 기(氣)는 무형(無形)한 것이고 형(形)은 유형(有形)한 것인데, 무형이기 때문에 천지의 기화가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태극도(太極圖)에서 이른바 “양이 변하고 음이 합하여 수(水)ㆍ화(火)ㆍ목(木)ㆍ금(金)ㆍ토(土)가 생긴다.”고 한 것입니다. 유형이기 때문에 남녀의 형화가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태극도에서 이른바 “오묘하게 부합하고 응집(凝集)되어 건(乾)의 도(道)는 남자가 되고 곤(坤)의 도는 여자가 된다.”고 한 것입니다. 요컨대 기화와 형화는 원래 근원이 하나이지 애당초 두 가지가 아니니, 이 점은 선대 학자들이 진실로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유형한 것은 종식될 때가 있으나 무형한 것은 종식될 때가 없다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저 천지 사이에 유형한 물체가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마는 본디 다하여 사라져 가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화의 작용은 종식된 적이 없습니다. 그 종식되는 면에서 보면 충(蟲)ㆍ어(魚)ㆍ조(鳥)ㆍ수(獸)ㆍ초(草)ㆍ목(木)은 모두 종식될 때가 있는 것이고, 그 종식되지 않는 면에서 보면 만물이나 내가 다 무궁무진한 것입니다. 선대 학자들의 그러한 논리도 이러한 관점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집니다.


왕필(王弼)이 말하기를, “고요함은 조급함의 군주이고 편안히 있음은 동작의 주체이다. 그래서 편안히 있음은 위에서 처해야 할 바이고 고요함은 오래갈 수 있는 도이다. 괘(卦)의 위에 처해 있고 동(動)의 극에 있으면서 이러함을 항상 지켜 간다면 베풀지 않아도 얻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노자(老子)의 사상으로 역(易)을 풀이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말도 이치에 타당함이 있다. 송(宋) 나라의 소식(蘇軾)이 배를 젓고 바둑을 두는 비유를 한 것도 사실은 여기에 근거한 것이며, 한(漢) 나라의 문제(文帝)와 송 나라의 인종(仁宗)이 모두 고요함을 추구하고 편안함에 처한 자였으므로 그들의 다스림이 오래갈 수 있는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노자의 사상으로 역을 풀이하였다고 하여 일률적으로 나무랄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여기는가?

[강세륜이 대답하였다.]
“고요함은 조급함의 군주이고 편안히 있음은 동작의 주체이다.”라고 한 것은 그 견제하는 방법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고요함은 천지 사이의 자연적인 이치입니다. 한결같이 고요하게 있기만 하면 힘없이 쇠약해지고야 말 뿐이고, 한결같이 움직이기만 하면 설치다가 넘어지고야 말 것입니다. 하늘의 움직임만 있고 땅의 고요함이 없으면 하늘이 아마 무너져 내릴 것이고, 땅의 고요함만 있고 하늘의 움직임이 없다면 땅이 아마 꺼지게 될 것입니다. 천지의 도가 오래가면서 끊임이 없을 수 있는 까닭은 움직임과 고요함의 이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항괘(恒卦) 하나로 말하면 장남(長男)인 진(震)이 위에 있고 장녀(長女)인 손(巽)이 밑에 있는데, 남은 양이고 여는 음이며 양은 움직이는 물건이고 음은 고요한 물건이니, 음과 양이 서로 필요로 하고 움직임과 고요함이 서로 연관이 된 다음에야 오래가는 도가 되는 것입니다. 천하의 만사와 만물이 다 그러한데, 어떻게 움직이지 않은 채 고요한 상태만으로 오래가는 도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노자가 주장하는 청정(淸淨)의 학설이 우리 유학자에게 배척을 당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굳이 《정전》과 《본의》를 내버려 두고 왕필과 소식의 견해를 취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한 나라 문제와 송 나라 인종의 경우는 모두 안정을 추구하는 정치를 하였으니 오히려 조급하게 나아가고 망녕되게 움직이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래서 후세의 중급 수준의 군주가 되는 데는 해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 나라 문제의 학문은 황제(黃帝)와 노자를 위주로 하였기 때문에 그 말류의 폐단 가운데 무제(武帝)가 신선을 구하는 병폐가 있었고, 송 나라 인종의 다스림은 도리어 쇄신(刷新)하는 데 결함이 있어서 끝에 가서는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오랑캐에게 굴복당하는 화근이 있었으니, 안정만을 추구하는 정치가 어떻게 오래갈 리가 있겠습니까.


이상은 항괘(恒卦)이다.


 

 

홍재전서 제102권

경사강의(經史講義) 39 ○ 역(易) 2
[함괘(咸卦)]

 

 

단전(彖傳)에서 “함(咸)은 감응(感應)의 뜻이다.”라고 하였고 정자(程子)는 “감(感)은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단전에서는 또 천지 만물과 성인이 감통(感通)하는 이치를 지극히 말하였으니, 함괘(咸卦)는 오로지 감응과 움직임을 위주로 한 것 같다. 그러나 여섯 효의 효사(爻辭)를 보면 모두 정(靜)을 마땅하게 여기고 동(動)은 마땅하게 여기지 않으니, 어째서인가? 《정전》과 《본의》에서 “구사(九四)는 중간에 있으면서 위에 있고 심장(心臟)의 위치에 있으면서 마음의 상(象)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태(兌)의 하효(下爻)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상사(象辭)에서 “산 위에 못이 있음이 함(咸)이니, 군자는 이를 본받아 마음을 비우고 남의 의견을 받아들인다.”고 한 데 대하여 정자는 “마음을 비우면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였고, 주자는 “간(艮)의 밑에 있는 두 음효(陰爻)가 중간이 비어서 물이 스며드는 상이 있다.”고 하였고, 장청자(張淸子)는 ‘쌍뉴(雙紐)’라는 말을 만들어 “땅속이 비어 있으면 스며드는 물을 받아들이지 않음이 없는데, 마음속을 비우면 남의 의견을 수용하지 못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는 또 간의 밑에 두 획으로 마음의 상을 삼은 것 같은데, 어떻게 여기는가?

[김희조(金煕朝)가 대답하였다.]
함은 감응의 뜻입니다. 그런데 그 감응은 스스로 감응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움직임을 기다린 뒤에 감응이 되므로, 하늘과 땅의 기운이 움직여서 한 이치가 서로 감응하고 만물이 움직여서 두 기운이 교감(交感)하며 성인이 움직여서 백성들이 믿음으로 감응하는 것이니, 그 감응하는 것이 어디엔들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지금 저 여섯 효의 효사에서 마치 정(靜)하는 것을 마땅하게 여기고 동(動)하는 것을 마땅하게 여기지 않는 것같이 말한 것은 대개 태(兌)는 열성(悅性)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을 착(錯)으로 보아 동성(動性)을 지닌 진(震)이 되면 그 진출함이 더욱 빠르니 그렇게 되면 움직이는 것이 중도(中道)를 넘기가 쉽고 감응하는 것이 정도(正道)를 얻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성인이 그러한 염려를 하여 특히 “가만히 있으면 길(吉)하고, 움직이면 수치스러움을 당한다.”는 따위의 말로 가볍게 움직임을 경계한 것입니다. 괘효(卦爻)의 본뜻이야 어찌 정하는 것을 마땅하게 여기고 동하는 것을 마땅하게 여기지 않음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저 구사(九四)의 한 효로 말하면 넓적다리 위와 등심 밑에 있는 격이니 위치로 말하면 심장의 위치이고 상(象)으로 말하면 마음의 상입니다. 《정전》과 《본의》의 해석은 다 그러한 것인데, 다만 대상(大象)에서 “마음을 비우고 남의 의견을 받아들인다.”고 한 풀이를 보면 문득 같지가 않습니다. 장씨의 쌍뉴설(雙紐說)에 대해서는 우선 어떠하다고 논하지 않겠습니다. 주자가 말한 “빈 것은 물이 스며드는 상이 있다.”고 한 것은 대개 간(艮)의 아래의 두 획을 마음으로 여긴 것인데, 이것이 후세의 유학자가 의심을 일으킨 곳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신(臣)의 견해를 말씀드리면, 간의 아래의 두 음효(陰爻)는 감(坎)에서 온 것으로서, 설괘(說卦)에서 “감은 마음이 급한 것이 되고, 단단하고 심이 많은 것이 된다.”고 하였으니, 주자가 간의 아래의 두 획을 마음의 상으로 삼은 것도 여기에 근거한 것 같습니다.


구사(九四)에서 “끊임없이 오가면 붕당끼리만 네 생각을 따를 것이다.”라고 하였다. 무릇 해가 지면 달이 뜨고 추위가 가면 더위가 와서 한 번 가고 한 번 오는 것은 모두 감응(感應)의 정상적인 이치이니, 사람의 마음도 분명히 가고 오는 것이 없을 수 없다. 그런데 주자가 “점(占)으로 인하여 경계를 베푼 것이다.”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자연스러운 왕래도 있고 좋지 않은 뜻의 왕래도 있으니, 감응도 그러하여 사사로운 감응이 있고 합당한 감응이 있으며 안으로 감응하는 것도 있고 밖으로 감응하는 것도 있으며 대응으로 말한 것도 있고 전일한 감응을 가지고 말한 것도 있는데, 하나하나 분석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윤행임이 대답하였다.]
가고 오는 것은 곧 감응의 이치인데, 해가 지고 달이 뜨는 것은 자연스럽게 가고 오는 것이지만 ‘끊임없다’라는 한마디를 덧붙인 것은 바로 좋지 않은 뜻으로 가고 오는 것이므로 《본의》에서 “점으로 인하여 경계를 베푼 것이다.”라고 풀이한 것입니다. 초육(初六)이 구사(九四)에 응(應)하는 것은 이른바 전일한 감응이고 육이(六二)가 구오(九五)에 응하는 것은 이른바 대응의 감응이지만, 구오가 육이와 응하는 것과 구사의 끊임없이 오간다는 것은 이른바 사사로운 감응입니다. 괘(卦)의 하체(下體)에서 감응하는 것은 이른바 안의 감응이고 괘의 상체(上體)에서 감응하는 것은 이른바 밖의 감응입니다. 산과 못이 기운을 통하는 것과 남자와 여자가 서로 감응하는 것은 이른바 합당한 감응입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이 만물을 변화 육성시키는 것과 임금과 신하가 천직(天職)을 함께 다스리는 것과 남편과 아내가 화합하는 것과 해와 달이 번갈아 가며 비추어 주는 것들은 하나의 감(感) 자에 지나지 않으니, 함(咸)의 의의가 하도 커서 다른 의논이 더 필요 없겠습니다.


 

이상은 함괘(咸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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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강의(經史講義) 39 ○ 역(易) 2

 

 

[이괘(離卦)]

 

 

혹자의 말에 의하면 “이괘(離卦)의 초구(初九)는 해가 돋는 것이 되고, 이괘의 구이(九二)는 해가 중천에 온 것이 되고, 이괘의 구삼(九三)은 해가 기우는 것이 된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구삼으로 말미암아 얻어 낸 것이다. 그렇다면 해가 돋는 초기는 곧 우리가 동작하는 시초가 되며 사물에 응하는 시초가 되는데, 그 끝마무리를 잘하려고 하면 시초에 잘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초구의 군자는 그 신발이 섞였을 적에 반드시 공경해야 하는 것이니, 그 사물이 뒤섞였을 초기에 반드시 공경하는 이유는 대개 그 길(吉)ㆍ흉(凶)ㆍ회(悔)ㆍ인(吝)의 계기가 여기에서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어떤지 모르겠다.

[신복이 대답하였다.]
이괘(離卦)가 해뜨는 시초가 되는 것은 해가 처음 돋아나는 것입니다. 비괘(比卦)의 초육(初六)과 사괘(師卦)의 초육이 모두 시초의 의미로 뜻을 일으켰으니, 이괘의 시초를 해가 처음 뜨는 것으로 풀이하는 것이 또한 무슨 불가(不可)함이 있겠습니까. 초구는 아래에서 위에 걸린 격이므로 신발이 뒤섞인 상(象)이 있는 것인데, 《정전》과 《본의》의 뜻을 자세히 탐구해 보면 다만 초구 그 자체로써 한 효의 일을 만든 것이지 진실로 해가 처음 돋는 것으로 의의를 취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역(易)의 도는 무궁한데 《정전》과 《본의》의 해석도 그중에 한 가지 일을 예로 들어서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를 확대시켜 나아가면 한 효에도 여러 가지 뜻을 겸하고 있으니, 《정전》과 《본의》에 그 뜻이 없다고 하여 성급하게 그르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끝마무리를 잘하려고 하면 초기에 잘해야 하는 것은 진실로 군자의 지론(至論)입니다. 이괘의 초기에 능히 공경하고 두려워한다면 이(離)에 대한 대처를 잘하는 것이니, 이렇게 말하면 비록 《정전》과 《본의》의 뜻에 다 맞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일설(一說)로는 갖추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구삼(九三)의 효사에 대해 죽음을 슬퍼하는 뜻으로 풀이한 것은 《정전》과 《본의》가 모두 같다. 그러나 혹자는 콩이 아니면 보리이고 위성(魏成)이 아니면 적황(翟璜)이라는 글로 풀이하면서 “구삼이 해가 지는 자리에 처해 있으면서 지나치게 강하고 중(中)이 못 되니 그 뜻이 거칠다. 그래서 질그릇을 두드리며 노래하지 않으면 크게 기울어지는 슬픔이 있을 것이니, 그 노래를 함은 즐거움이 정상을 잃은 것이고 그 슬퍼함은 슬픔이 정상을 잃은 것이다. 슬픔과 즐거움이 정상을 잃었으니 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그 말이 지극히 합리성이 있다. 《사기(史記)》와 《한서(漢書)》 중에 그런 형태의 문법이 많은데, 예를 들면 “하늘을 우러러보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서 땅에다 그린다.”고 한 것이 그러한 것이다. 혹자의 해석대로 따라도 무방하겠는가?

[윤행임이 대답하였다.]
《시경》의 “지금 우리가 즐기지 않으면[今我不樂]”이라는 구절과 “세월이 흘러 늙게 될 것이다.[逝者其耋]”라는 구절로써 풀이한 것은 여남전(呂藍田 여대림(呂大臨))의 말이고, “나이가 늘그막에 이르렀으니, 거문고와 퉁소로 즐거이 지내야지.[年在桑楡 絲竹陶寫]”라는 구절로써 풀이한 것은 조용재(趙庸齋 조여등(趙汝騰))의 말인데, 모두 《정전》과 《본의》의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관단(李觀彖)은 “장구 치고 노래하며 즐기지 않으면 늙음을 탄식하며 슬퍼할 것이다. 슬픔과 즐거움이 항상치 않음은 황혼기에 접어든 증거라네.” 하였는데, 만약 이 말을 따르게 되면 아마도 본뜻을 잃게 될 것입니다.


 

이상은 이괘(離卦)이다.


 

[주D-001]위성(魏成)이 아니면 적황(翟璜) : 양자택일(兩者擇一)의 뜻으로 쓰이는 말로, 위 문후(魏文侯)가 정승을 뽑을 적에 “지금의 정승 재목으로는 위성이 아니면 적황이다.”라고 한 데서 인용된 말이다. 《通鑑 威烈王23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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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강의(經史講義) 39 ○ 역(易) 2

 

[감괘(坎卦)]

 

습감(習坎)이라고 할 때의 ‘습(習)’의 뜻은 중습(重習)한다는 습인가, 아니면 학습(學習)한다는 습인가? 《정전(程傳)》과 《본의(本義)》에서 모두 중습으로 풀이한 것은 아마 단전(彖傳)의 말을 근거로 삼은 것 같은데, 평암 항씨(平菴項氏 항안세(項安世))의 말에 의하면 “이(離)ㆍ진(震)ㆍ간(艮)ㆍ태(兌)ㆍ손(巽)은 다 마땅히 중습의 뜻으로 보아야 하는데 감(坎)이 64괘 중에 앞에 있기 때문에 특히 습(習) 자를 더하여 다음 괘의 예(例)를 일으킨 것이며, 건괘(乾卦)와 곤괘(坤卦)의 경우는 여섯 효(爻) 전부가 한 효에 해당하므로 습 자를 더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말이 그럴듯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이미 습 자를 중(重)의 뜻으로 풀이하였으면 중건(重乾)이나 중곤(重坤)의 경우에 습 자를 더하는 것이 어째서 옳지 않다는 것인가? 대개 감(坎)은 험(險)의 뜻인데 험난한 일은 익숙한 경험이 없으면 행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미리 익숙한 경험을 쌓아야 험난한 일을 해낼 수 있는 것이다. 물이 아무리 위험하다고 하더라도 물에 익숙한 자는 빠져 죽게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성인이 특히 습 자를 더한 것인데, 그것이 공영달(孔穎達) 이하 여러 학자들이 “익숙하게 익힌다.”고 한 습의 뜻을 취한 까닭이다. 두 학설이 다 통하는데, 어느 학설을 따라야 하겠는가?

[이익진이 대답하였다.]
팔괘(八卦)를 바탕으로 하여 이를 거듭함으로써 64괘가 되었고, 그중에 순수하게 거듭된 것이 여덟인데 유독 이 한 괘에만 습 자를 더하였고 그 밖의 것은 더하지 않았습니다. 건과 곤 두 괘의 경우는 순양(純陽)과 순음(純陰)으로 되었을 뿐만이 아닙니다. 대상전(大象傳)에서 천행(天行)이니 지세(地勢)니 한 글을 보면 중습(重習)의 뜻으로 말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離)와 손(巽) 이하의 다섯 괘는 습 자를 더하더라도 불가(不可)함이 없을 것 같은데 감(坎)은 서괘(序卦)의 순서에서 육자(六子) 중의 맨 앞에 있으므로 습감(習坎)이라는 이름을 붙여 다른 괘의 예(例)를 일으켰으니, 항씨(項氏)와 호씨(胡氏)의 말이 바로 이러합니다. 또 감은 험한 일이 되어 익숙한 경험이 없이는 행할 수 없으므로 익숙하게 익히는 뜻을 취하여 습감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니, 고주(古註)의 왕필(王弼)과 공영달(孔穎達)의 말이 이러합니다. 이 두 학설도 모두 일리가 있으니, ‘중습’이라는 말은 단전(彖傳)에서 “거듭 험하다.”고 한 뜻에 근본한 것이고 ‘익숙하게 익힌다’고 한 말은 대상전(大象傳)에서 “가르치는 일을 익힌다.”고 한 뜻에 근본한 것입니다. 그런데 《정전》과 《본의》에서 다 같이 ‘중습’의 풀이를 위주로 한 것은 ‘습’에는 진실로 두 가지 뜻이 있으나 중습의 뜻이 비교적 더 깊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습(習)이라는 글자는 날개를 뜻하는 우(羽) 밑에 백(白)을 붙여서 새가 날려고 연습한다는 뜻에서 상(象)을 취한 것이므로 중습은 학습(學習)의 뜻이 되며, 학습은 사실상 중습에 근본한 것으로서 물(物) 자체에 있어서는 중습이 되지만 일을 행함에 있어서는 학습이 되는 것입니다. ‘감(坎)’ 그 자체는 ‘물’에 해당하므로 중습이라고 이름을 붙였으나 감을 응용하는 도리는 학습으로 의의를 삼아야 하는 것인데, 《정전》과 서괘(序卦)에서도 ‘학습’과 ‘온습(溫習)’의 습으로 뒤를 이었으니 그 뜻의 개요를 알 수 있습니다.


한 양효(陽爻)가 두 음효(陰爻) 속에 빠져 있는데 음효가 끊어진 곳은 파인 구멍과 같으니, 이것이 감(坎)이 빠지는 상(象)이 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물건이 빠지는 것은 진실로 스스로 취한 것이지 본래 파인 구멍의 잘못이 아니니, 빠진 자가 흉한 일을 당한 것이고 빠지게 한 것은 길흉의 일과는 관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 괘상(卦象)은 문득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초육(初六)과 육삼(六三) 그리고 상육(上六)은 다 빠지게 한 자인데도 흉하다느니 또는 쓰지 말라느니 하였고, 구이(九二)와 구오(九五)는 곧 빠진 자인데도 허물이 없다느니 또는 조금 얻는다느니 한 것은 어째서인가?

[강세륜(姜世綸)이 대답하였다.]
한 양효가 두 음효 속에 있는 것이 감이니, 양효는 진실로 빠진 자이고 음효는 이를 빠지게 한 자입니다. 그러나 한 괘로 말하면 모두 감험(坎險)의 체가 되므로 육효(六爻)로 볼 적에는 모두 빠지는 상이 있으니, 이런 점에서는 스스로 빠지거나 빠지게 하는 구분이 없습니다. 임천 오씨(臨川吳氏)가 감(坎)의 음획(陰畫)의 짝을 가지고 물가의 양쪽 언덕의 상으로 보고 음효(陰爻)의 끊어진 것으로써 언덕 아래에 푹 파인 구멍의 상으로 본 것은 그 말이 너무도 교묘한 논리에 해당합니다. 감의 성격이 어찌 그러한 것이겠습니까. 위와 아래는 다 음(陰)이고 중간의 한 양(陽)이 있으니, 이는 음과 양이 도리를 잃고 강(剛)과 유(柔)가 마땅함을 잃은 격입니다. 그래서 감이라고 한 것이니, 감의 괘에서 감의 체에 있는 것은 음이건 양이건 빠지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감(坎) 즉 빠지는 데는 위아래와 얕고 깊은 구별이 있고 효(爻)에는 강과 유와 허(虛)와 실(實)의 구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상(象)이나 점(占)에 있어서도 각각 뜻이 다른 것입니다. 초육과 육삼과 상육은 다 같이 유약(柔弱)한 바탕이나, 초육은 감의 아래에 있으므로 그 빠지는 것이 깊어서 구덩이에 들어가는 격이고, 육삼의 경우는 아래에 있는 감의 위와 위에 있는 감의 아래에 있으니 앞과 뒤가 모두 험난한 것으로서 나아가거나 물러남에 다 빠지는 것이 되므로 그 빠지는 것이 더욱 깊으면서 또 구덩이에 들어가는 격이고, 상육의 경우는 험난한 극한 상황에 처하고 감의 마지막에 있으니 그 빠지는 것은 더 깊어서 감옥에 갇힌 것과 같고 그 벗어날 기약이 없는 것은 마치 끈으로 얽어맨 것과 같은 격이므로 그 조짐은 흉하고 그 점은 쓸 수 없음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구이와 구오는 다 같이 강한 양의 자질로서 모두 감의 험난함 속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구이의 경우는 감의 밑에 있으므로 험난함에서는 벗어날 수가 없지만 그 점은 조금 얻는 격이고, 구오의 경우는 감의 위에 있으므로 장차 험난함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그 점은 허물이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스스로 빠지는 것과 빠지게 하는 것을 구분하여 보지 않고 해당 효의 뜻만 가지고 말한다면, 그 상은 저러하고 그 점은 이러함에 대해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 같지 않습니다.


 

이상은 감괘(坎卦)이다.


 

[주D-001]육자(六子) : 《주역(周易)》의 팔괘(八卦)에서 건(乾)ㆍ곤(坤)을 제외한 나머지 여섯 괘를 가리키는 말이다.

홍재전서 제102권

경사강의(經史講義) 39 ○ 역(易) 2

 

 

[대과괘(大過卦)]

 

 

단사(彖辭)에서 “기둥이 흔들림은 밑 부분과 끝이 약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뜻을 살펴보면 중간에 있는 네 개의 효를 기둥이라고 하고 초(初)와 상(上)의 두 효(爻)를 가리켜 밑 부분과 끝이라고 한 것 같다. 그러나 효사(爻辭)에서 살펴보면 삼(三)과 사(四) 두 효를 가리켜 기둥이라고 하고 이(二)와 오(五) 두 효를 가리켜 마른 버들이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이미 단전(彖傳)의 말과는 다르며, 또 그 흔들린다는 것은 구삼에 해당하는 기둥뿐이고 구사의 기둥은 높이 솟은 것이지 흔들리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또 생각해 보면 밑 부분은 아래이고 끝은 위이다. 기둥은 아래에서 받쳐 주는 것이 약하면 흔들리지만 위에 실어 주는 것이 약하다고 하여 흔들릴 리는 없다. 그래서 이과(李過)는 구삼과 구사의 두 기둥을 나누어서 각각 내괘(內卦)와 외괘(外卦)에 배속시켰는데, “구삼에 해당하는 기둥은 위는 튼튼하나 아래가 약하므로 ‘흔들려서 흉하다’고 한 것이니 이는 아래가 약한데 돕는 이가 없다는 말이고, 구사에 해당하는 기둥은 위는 약하나 아래는 튼튼하므로 ‘높이 솟은 것이니 길하다’고 한 것이니 이는 아래가 튼튼하여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아마도 상전(象傳)에서 이른바 “도울 수가 없다.”고 한 것과 “아래에서 흔들리지 않는다.”고 한 말에 근본한 것 같은데, 《정전》과 《본의》에서 상전을 해석한 것이 문득 그렇지 않음은 어째서인가?

[신복(申馥)이 대답하였다.]
대체로 단전과 효사는 의의(意義)를 취한 것이 자연 다릅니다. 한 괘의 상(象)으로 말하면 중간의 네 효가 기둥이 되지만, 여섯 효의 의의로 말하면 구삼과 구사의 두 효가 기둥이 됩니다. 마른 버들도 나무이니, 비록 곧바로 기둥이라고는 하지 않았으나 그 나무에서 상(象)을 취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양구산(楊龜山 양시(楊時))이 일찍이 촉(蜀) 땅의 중[僧]에게서 들은 말로 말하기를, “네 개의 효가 강양(剛陽)으로서 비록 다 같이 나무가 되기는 하나 기둥이 되기도 하고 버들이 되기도 하는데, 버들은 나무 중에 약한 것이다. 이 괘로 말하면 밑 부분과 끝이 약한데 구이는 밑 부분에 가깝고 구오는 끝에 가까우므로 모두 나무 중에 약한 것이 된다.”라고 하였는데, 이치상 그럴듯합니다. 구삼의 기둥은 밑 부분이 약하여 흔들리고 구사의 기둥은 밑 부분이 튼튼하여 높이 솟은 것이라는 점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이 괘의 체(體)에는 모두 흔들리는 상(象)이 있습니다만, 그중 흔들리는 것도 있고 높이 솟은 것도 있는 것은 단전과 효사에서 의의를 취한 것이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씨(李氏)의 말은 어찌 터득한 바가 없이 그렇게 말하였겠습니까. 성상(聖上)께서 “기둥은 아래에서 받쳐 주는 것이 약하면 흔들리지만 위에 실어 주는 것이 약하다고 하여 흔들릴 리는 없는 것이다.” 하신 것은 아마도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끝이 약하다.”고 한 것은 위에서 실어 주는 것이 약함을 말한 것이 아니고, 대개 유약한 음(陰)이 무력(無力)하여 기둥이 붙을 데가 없음을 말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에 기둥이 하나 있다면 반드시 위아래가 유지되어 꽉 결속이 되어야 기둥이 붙을 데가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여지없이 부러지거나 부서지게 될 것입니다. 단전에서 기둥이 흔들리는 상을 취한 것도 아마 이러한 뜻일 것입니다. 이씨가 구삼과 구사를 나누어 두 기둥으로 말한 것도 다만 효(爻)의 의의에 따라 말을 내세운 것이지, 괘상(卦象) 자체로서 기둥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보면 《정전》과 《본의》의 풀이가 자연 모순되지 않을 것입니다.


양구산(楊龜山)이 촉(蜀) 땅의 중에게서 들었다는 말을 인용한 것 중에 “기둥은 강한 나무가 되고 버들은 약한 나무가 된다. 구이(九二)와 구오(九五)를 모두 버들이라고 한 것은 구이는 밑 부분에 가깝고 구오는 끝에 가까워 모두 약한 나무의 상(象)이 있기 때문인데, 이 괘는 밑 부분과 끝이 다 약하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한 말은 그럴듯하다. 그러나 버들을 말하면서 굳이 ‘마른 버들’이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무릇 초목의 속성은 양기가 이르면 돋아나려는 생각으로 야들야들해지면서 부드러워지고 양기가 지나가면 마르고 굳어져서 빳빳하게 되는 것이다. 이 괘의 이름은 대과(大過)로서 중간의 네 효가 모두 강한 양(陽)이니 마른 버들을 강한 나무라고 해도 잘못될 것이 없을 것이다. 전자의 말에 의하면 버들은 약한 나무고 후자의 말에 의하면 버들이 강한 나무가 되는데, 강하다고 하고 약하다고 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가?

[윤행임이 대답하였다.]
네 양효(陽爻)가 중간에 있어서 밑 부분과 끝이 다 약하기 때문에 기둥은 강하고 버들은 약하다는 구별이 있는 것입니다. 대체로 손(巽)은 목(木)이 됩니다. 그러므로 손이 위에 있고 진(震)이 아래에 있으면 익괘(益卦)가 되는데 성인이 그 상(象)을 취하여 쟁기와 보습이라고 하였고, 손이 위에 있고 감(坎)이 아래에 있으면 환괘(渙卦)가 되는데 성인이 그 상을 취하여 배와 노라고 하였으며, 손이 아래에 있고 태(兌)가 위에 있으면 대과괘(大過卦)가 되는데 기둥이니 버들이니 하여 나무로 비유를 한 것은 버들은 강 언덕에 자라는 나무로서 구이와 구오는 모두 음효에 가깝기 때문에 기둥이라는 말을 바꾸어 버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적정한 시기가 지나면 마르거나 늙는 상이 있게 되는데도 “움이 튼다.”고 하고 “꽃이 핀다.”고 한 것은 적정한 시기는 지났지만 지극한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이는 밑 부분에 가깝고 구오는 끝에 가깝다.”고 한 말은 과연 정밀하고 새로운 뜻을 얻은 것입니다. 대개 본체는 강하여도 초육과 상육에 비하였기 때문에 버들이라고 하고 또 말랐다고도 한 것인데, 버들이란 약한 뜻을 취한 것이고 말랐다는 것은 강한 뜻을 취한 것이니 이런 것이 이른바 “강한 것이 약한 것을 구제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상은 대과괘(大過卦)이다.


홍재전서 제102권

경사강의(經史講義) 39 ○ 역(易) 2

 

[이괘(頤卦)]

 

“나를 보고 턱을 움직인다.[觀我朶頤]”는 것을 《정전(程傳)》과 《본의(本義)》에서는 모두 초구(初九)에 해당시켰는데 항안세(項安世)는 그 “턱을 움직인다.”를 상구(上九)의 상으로 생각하였고, ‘전이불경(顚頤拂經)’을 《정전》과 《본의》에서는 모두 한 가지 일로 보았는데 황간(黃榦)은 ‘아래에게 길러 주기를 구하는 것’을 전(顚)으로, ‘위에게 길러 주기를 구하는 것’을 불(拂)로 보았으며, “길러 줌을 본다.[觀頤]”고 한 것과 “입의 내용물이다.[口實]”라고 한 것을 《정전》과 《본의》에서는 덕을 기르고 몸을 기르는 일로 나누었는데, 육전(陸銓)은 “그 선(善)하고 선하지 않음을 고찰하여 자기에게서 취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역경》의 뜻은 진실로 마땅히 《정전》과 《본의》를 위주로 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데, 그 밖에 여러 학설도 다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인가?

[이익진이 대답하였다.]
《역경》에서 상(象)을 취한 것 중에는 다른 효(爻)의 일까지 아울러 인용하여 본효(本爻)의 뜻을 밝힌 경우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대축괘(大畜卦)에서 ‘불깐 돼지’라고 한 것과 중부괘(中孚卦)에서 ‘학이 운다’고 한 것은 상응(相應) 관계로 말한 것이고, 둔괘(屯卦) 육이(六二)에서 ‘강(剛)을 탄다’고 한 것과 비괘(比卦) 육사(六四)에서 ‘위를 따른다’고 한 것은 승승(承乘)으로써 말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라면 태괘(泰卦)의 세 양이 함께 나아가는 것과 소축괘(小畜卦)의 힘을 합하여 강건(剛健)함을 축지(畜止)시키는 것 같은 것은 동체(同體)로서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 초구의 자리에 있으면서 위의 효로 의의(意義)를 삼은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초구는 이괘(頤卦)의 첫자리에 있으면서 육사와 상응이 되고 있으니, 너니 나니라고 한 것은 진실로 초구와 육사의 사이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상구(上九)의 상에 빗댄다면 이는 이미 승승의 경우도 아니고 또 동체의 의의도 없는 것이니, 너는 초구고 나는 상구라고 하는 것은 도저히 서로 미칠 수 없는 관계입니다. 육이의 상에 대해서라면 《정전》과 《본의》의 풀이는 모두 “거꾸로 기른다.”고 한 것과 “언덕에서 길러 줌을 구한다.”고 한 것을 위아래로 나누어 배속시켰는데, 황씨(黃氏)가 “위에게 길러 주기를 구하는 것이 어긋나는 것이다.”라고 한 것은 비록 정자와 주자의 해석과는 조금 다르다고 하더라도 대체의 뜻은 진실로 옳게 파악한 것입니다. 그러니 글자 풀이의 차이에 대해서는 아마도 많은 변론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길러 줌을 본다.”고 한 것과 “입의 내용물이다.”라고 한 것에 대한 풀이는 《정전》과 《본의》의 해석이 모두 ‘그 길러 줌을 보는 것’과 또 ‘스스로 기르는 것’으로 말하였으니, 결과적으로는 반드시 정도(正道)를 얻는 것으로 길(吉)함을 삼은 것입니다. 육씨(陸氏)가 “그 선(善)하고 선하지 않음을 고찰한다.”고 말한 것도 아마 옳은 것 같습니다. 비록 같지 않은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제가(諸家) 중에 한 가지 의의(意義)는 될 것이니, 굳이 말을 허비하면서까지 변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괘(頤卦)의 내용에는 몸을 기르는 것과 덕을 기르는 것과 남을 길러 주는 것과 남에게 부양을 받는 것 등의 뜻이 들어 있다. 여섯 효와 단사(彖辭) 및 상사(象辭)에 나아가 말한다면 어느 것이 몸을 기르는 것이며 어느 것이 덕을 기르는 것이며 어느 것이 남을 길러 주는 것이며 어느 것이 남에게 부양을 받는 것이 되는가? 신령스러운 거북처럼 밝은 지혜를 가지고도 도리어 흉한 조짐이 있고, 호랑이가 노려보는 것처럼 탐욕을 부리는데도 마침내 허물이 없음은 어째서인가?

[이곤수(李崑秀)가 대답하였다.]
이(頤)의 도(道)는 잘 기르는 것뿐입니다. 사람이 기르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덕을 기르는 것이고 하나는 몸을 기르는 것입니다. 덕을 기르고 몸을 기르고 나서 남을 기르고 남에게 부양을 받는 데까지 이르는 것인데, 만약에 기르는 것이 덕이면 마땅히 그 덕을 기르는 도를 구해야 하고 만약에 기르는 것이 몸이면 마땅히 그 몸을 기르는 도를 구해야 할 것이며 남을 기르고 남에게 부양을 받는 데 이르러서도 모두 마땅히 길러야 하는 도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 마음을 맑히고 욕심을 적게 하여 성인의 학문에 뜻을 두는 것은 덕을 올바르게 기르는 것이고, 동작을 신중히 하고 음식을 조절하면서 음악이나 여색, 음식으로 인하여 변하지 않는 것은 몸을 올바르게 기르는 것입니다. 무릇 남을 기르는 것은 양에 해당하고 남에게 부양을 받는 것은 음에 해당합니다. 군자가 위에 있으면 남을 기를 수 있지만 소인이 아래에 있으면 그 형편이 남에게 부양을 받아야 하는 것이니, 남을 기르고 남에게 부양을 받는 것이 올바름을 놓치면 모두 잘 기르는 도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섯 효와 단사 및 상사의 내용으로써 몸을 기르고 덕을 기르는 것과 남을 기르고 남에게 부양을 받는 것에 나누어 배속시키면, 하괘(下卦)의 세 효는 다 스스로를 기르는 것이니 덕을 기르고 몸을 기르는 것과 같은 것이고 상괘(上卦)의 세 효는 다 남을 기르는 것입니다. 단사와 상사에서는 스스로를 기르고 남을 기르는 도를 포괄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신령스러운 거북도 도리어 흉한 조짐이 있고 호랑이가 노려보는 것처럼 탐욕스러운데도 마침내 허물이 없다고 한 경우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대개 스스로 내면을 기르는 것은 거북만 한 것이 없고 외면을 기르는 것은 호랑이만 한 것이 없는 법인데, 신령스럽더라도 스스로를 보존하지 못하고 존귀하면서도 스스로 진중하지 못하면 거북처럼 아무리 밝은 지혜가 있다고 하더라도 당연히 흉한 것이고, 그 위엄을 기르고 그 체모를 존중하면 비록 호랑이가 노려보듯이 탐욕을 부려도 당연히 허물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두 효에서 상(象)을 취한 뜻은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이상은 이괘(頤卦)이다.


 

[주D-001]승승(承乘) : ‘승(承)’은 아래에 있는 효(爻)가 위에 있는 효의 뜻을 받들어 따르는 것이고, ‘승(乘)’은 위에 있는 효가 바로 밑에 있는 효를 타고 있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홍재전서 제102권

경사강의(經史講義) 39 ○ 역(易) 2

 

[대축괘(大畜卦)]

 

선대 학자의 말에 의하면 “축(畜)에는 세 가지 뜻이 있는데, 온축(蘊畜)이라고 한 것은 덕(德)을 쌓는다는 말이고, 축양(畜養)이라고 한 것은 어진 이를 기른다는 말이고, 축지(畜止)라고 한 것은 강건(剛健)함을 중지시킨다는 말이다. 강건하고 독실함은 온축의 큰 것이고, 어진 이를 숭상함은 축양의 큰 것이고, 강건함을 중지시킴은 축지의 큰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단전(彖傳)을 고찰해 보면 그 뜻이 명백하다. 그러나 《정전(程傳)》과 《본의(本義)》의 여러 설명은 다만 온축과 축지의 측면으로만 주로 논의하였고 축양의 뜻에는 약간 소략한 것 같은데, 그것은 어째서인가? 그리고 여섯 효(爻)에서 보면 오로지 축지의 상(象)뿐이지 온축의 뜻은 없는데, 이것도 어찌 의심해야 할 한 가지가 아니겠는가?

[이익진(李翼晉)이 대답하였다.]
이 괘(卦)가 축(畜)이 된 의의는 상(象)으로 말하면 하늘이 산속에 있는 것이 되므로 지극히 큰 것을 축적하는 뜻이 되며, 덕(德)으로 말하면 지극히 강건(剛健)함을 중지시키는 것이니 지극히 올바름을 축적하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이를 나누어 말하면 축양(畜養)과 축지(畜止)와 온축(蘊畜)의 항목이 있으나, 합하여 말하면 “어진 이를 숭상한다.”고 하는 것과 “어진 이를 기른다.”고 하는 것도 모두 덕을 축적하는 일 중의 한 가지이며, 온덕(蘊德)이니 축덕(畜德)이니 하는 것도 축지(畜止) 가운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축(畜)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고 한 것은 정여해(鄭汝諧)의 주석에 나오는 말인데, 비록 단전(彖傳)을 조목별로 풀이하려는 뜻에 근본한 것이기는 하나 사실은 하나의 축(畜) 자의 뜻일 뿐입니다. 《정전(程傳)》이나 《본의(本義)》의 해석이 상세하기도 하고 소략하기도 한 것과 괘(卦)와 효(爻)의 개념이 때에 따라 의의(意義)가 성립된 까닭은 그 분명하고 비근한 것만을 취하여 지극히 크고 지극히 온축된 오묘함을 나타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역경》의 글 내용은 본래 일정한 규칙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인데, 어찌 그것으로 인하여 의심을 일으키는 발단을 삼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리고 건괘(乾卦) 문언(文言)의 예로 미루어 보면 지축(止畜)은 축(畜)의 시기이고, 온축(蘊畜)은 축의 의의이고, 축양(畜養)은 축의 응용입니다. 효(爻)는 시기를 근본으로 삼는 것이니, 여러 효사(爻辭)에서 모두 축지(畜止)의 상으로 말한 것은 어찌 축을 응용하는 시기가 아니겠습니까.


축(畜)에는 축지(畜止)를 받아들여 스스로 멈추는 것도 있고, 상대를 축지시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도 있고, 서로를 축지시키지 않고 함께 나아가는 것도 있는데, 이를 다 차근차근 지적하여 분명하게 말해 줄 수 있겠는가? 구이(九二)에서 “수레의 복토(伏兔 수레 상자와 굴대의 연결목)가 빠졌다.”고 한 것과 구삼(九三)에서 “좋은 말로 쫓아감이다.”라고 한 것과 육사(六四)에서 “송아지 뿔에 빗장 나무를 묶음이다.”라고 한 것과 육오(六五)에서 “불깐 돼지의 어금니이다.”라고 한 것의 상(象)에는 각각 뜻이 있고 그 뜻에는 각각 취한 것이 있을 것인데, 수레가 어찌하여 구이에 속하며 말이 어찌하여 구삼에 속하는가? 초기에 견제해야 하는 물건으로는 어찌 송아지만 그러하며, 악을 막는 것의 중요함을 어찌 반드시 불깐 돼지에 비유해야 하는가? 당연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인데, 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고자 한다.

[윤행임(尹行恁)이 대답하였다.]
축지(畜止)를 받아들여 스스로 멈춘다는 것은 초구(初九)가 육사(六四)에 대해서 그러한 것이고, 상대를 축지시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육오(六五)가 구이(九二)에 대해서 그러한 것입니다. 서로를 축지시키지 않고 함께 나아간 것은 구삼(九三)이 상구(上九)에 대해서 그러한 것입니다. 대개 초구는 비록 육사와 상응(相應) 관계이기는 하지만 육사는 자기를 억제시키는 것이므로, 축지를 받아들여 스스로 멈춘다고 한 것은 초구를 가리킨 것입니다. 육오는 윗자리에 있으면서 구이를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므로, 상대를 축지시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고 한 것은 육오를 가리킨 것입니다. 구삼은 지극히 강한 자리에 있고 상구는 축(畜)의 마지막에 있으면서 서로를 축지시키지 않고 뜻을 같이하는 것이므로, 서로를 축지시키지 않고 함께 나아간다고 한 것은 구삼을 가리킨 것입니다. 이를 종합하여 말하면 상괘(上卦)의 세 효(爻)는 간(艮)으로서 축지를 하게 하는 자이고 하괘(下卦)의 세 효는 건(乾)으로서 축지를 받아들이는 자입니다. 구이가 육오에게 축지를 당하여 나아갈 수 없으니 이는 마치 수레의 바퀴살이 벗겨져서 나아갈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고, 구삼은 상구의 구하는 바가 되어서 위로 나아가려고 하니 마치 말이 달려가는 것과 같아서 막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소의 강한 힘은 뿔에 있는데 송아지를 예로 든 이유는 아마 초구의 양(陽)은 기르기가 쉬움을 말한 때문일 것이고, 돼지의 맹렬한 힘은 어금니에 있는데 불깐 돼지를 예로 든 것은 아마 구이의 강함은 견제하기가 어려움을 말한 때문일 것입니다. 구이에서 수레의 상(象)을 취한 이유는 나무로 수레를 만들고 나무는 강한 물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양효(陽爻)에서 수레로 비유를 한 경우로는 소축괘(小畜卦)의 구삼에서 “수레의 바퀴통이 빠졌다.”고 한 것과 대유괘(大有卦)의 구이에서 “큰 수레에 싣는다.”고 한 것과 비괘(賁卦) 초구에서 “수레를 버리고 걸어간다.”고 한 것과 곤괘(困卦) 구사에서 “쇠 수레에 곤혹을 당함이다.”라고 한 것과 기제괘(旣濟卦)의 초구에서 “수레바퀴를 끌어당긴다.”고 한 것과 미제괘(未濟卦) 구이에서 “수레바퀴를 끌어당긴다.”고 한 것과 같은 예가 있습니다. 그러나 곤(坤)이 큰 수레에 배속되므로 음양(陰陽)이 상응(相應)되어야 반드시 수레라고 말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구삼에서 말을 상으로 취한 것은 건은 좋은 말의 상징이 되며 말은 굳건하게 가는 것이므로 반드시 말로써 비유를 삼은 것입니다. 그리고 송아지와 불깐 돼지로 비유를 취한 것은 이는 비록 음물(陰物)이기는 하나 뿔과 어금니가 강한 것이기 때문에 양의 비유로 취하였을 것입니다.


 

이상은 대축괘(大畜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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