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전서 제101권

 

경사강의(經史講義) 38 ○ 역(易) 1 계묘년(1783, 정조7)에 선발된 이현도(李顯道)ㆍ조제로(趙濟魯)ㆍ이면긍(李勉兢)ㆍ김계락(金啓洛)ㆍ김희조(金煕朝)ㆍ이곤수(李崑秀)ㆍ윤행임(尹行恁)ㆍ성종인(成種仁)ㆍ이청(李晴)ㆍ이익진(李翼晉)ㆍ심진현(沈晉賢)ㆍ신복(申馥)ㆍ강세륜(姜世綸) 등이 답변한 것이다

 

[수괘(隨卦)]

 

초구(初九)의 ‘관유투(官有渝)’라고 한 관(官) 자에 대하여 공영달(孔穎達)은 “사람 마음의 주장하는 것을 ‘관’이라 한다.”고 하였는데, 《정전》과 《본의》에서 주수(主守)라고 한 것과 편주(偏主)라고 한 것도 여기에 근본한 것 같다. 그리고 “진의 주체이다.[震主]”와 “동의 주체이다.[動主]”라고 한 두 주(主) 자는 괘(卦)를 구성하는 주체가 된다는 뜻이니, 아마도 관 자의 주석인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장청자(張淸子)와 유염(兪琰)은 다만 “진의 주체이다.”라고 한 주 자를 관 자로 풀이하였으며, 혹자는 “양은 음의 주체가 되므로 관이라 하였다.”고 한다. 《정전》과 《본의》의 본뜻도 과연 그러한가?

[심진현이 대답하였다.]
《역경》의 효사(爻辭)에는 늘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괘(卦)의 상(象)으로 건괘(乾卦)에서 용(龍)이라 한 것과 박괘(剝卦)에서 평상(平床)이라 한 것이 그러한 예이고, 하나는 군자의 응용으로서 이괘(履卦)에는 예(禮)의 뜻이 있고 수괘(需卦)에는 기다리는 뜻이 있는 것이 그러한 예입니다. 지금 이 ‘관유투(官有渝)’라고 한 관(官) 자도 군자의 응용의 측면에서 보면 이는 사람이 주관하는 바로서, 주수(主守)니 편주(偏主)니 하는 것은 다 이 효의 바른 뜻입니다. 그러나 만약 괘의 상으로 보면 수(隨)의 내괘(內卦)는 진(震)이고 초효(初爻)는 또 진의 주체가 되므로 관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군자의 응용으로 말한다면 관은 군자의 지킴이고 괘의 상으로 말한다면 초효는 진괘의 주관(主官)이 됩니다. ‘관주(官主)’라고 하면 군자가 역리(易理)의 상을 관찰하는 것이고 ‘주수(主守)’라고 하면 군자가 역리의 의의를 응용하는 것인데, 저로서는 두 학설이 다 통한다고 생각되는데, 옛 성인(聖人)이 상(象)을 취하여 훈계(訓戒)하신 뜻도 반드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으리라 여깁니다.


서기(徐幾)가 말하기를, “육삼(六三)이 얻었다는 것은 구사(九四)에서 얻은 것이고 구사가 얻었다는 것은 육삼에서 얻은 것이다.”라고 하였고, 공환(龔煥)도 말하기를, “육삼이 올라가서 양을 따르는 것은 이치상 올바른 것이지만 구사가 아래에 있는 음에게 추종을 받을 경우 이를 고수(固守)하면 흉하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아마 우번(虞翻)의 “육삼을 얻었다.[獲三]”고 한 말을 근거로 삼은 것 같다. 그 학설이 《정전》이나 《본의》와는 같지 않지만, 역시 취할 점이 있겠는가?

[이곤수가 대답하였다.]
수괘(隨卦)의 경우 육삼은 초구와 같은 체(體)이므로 육삼은 당연히 초구를 따라야 할 것인데 도리어 구사를 따르니, 이는 장부(丈夫)에게 매달리느라 소자(小子)를 잃은 것입니다. 그리고 구사에서 “정고(貞固)하게 지키면 흉하다.”고 한 것은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상(象)이 있기 때문이지 아래에 있는 음에게 추종을 받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육삼이 얻은 것은 구사에서 얻은 것이라고 하는 것은 옳겠지만, 구사가 얻은 것을 가지고 육삼에서 얻은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번의 말은 이미 《정전》이나 《본의》와 같지 않으니, 저는 감히 취할 수가 없습니다.


 

이상은 수괘(隨卦)이다.


홍재전서 제101권

 

경사강의(經史講義) 38 ○ 역(易) 1 계묘년(1783, 정조7)에 선발된 이현도(李顯道)ㆍ조제로(趙濟魯)ㆍ이면긍(李勉兢)ㆍ김계락(金啓洛)ㆍ김희조(金煕朝)ㆍ이곤수(李崑秀)ㆍ윤행임(尹行恁)ㆍ성종인(成種仁)ㆍ이청(李晴)ㆍ이익진(李翼晉)ㆍ심진현(沈晉賢)ㆍ신복(申馥)ㆍ강세륜(姜世綸) 등이 답변한 것이다

 

[예괘(豫卦)]

 

구사(九四)의 대신(大臣)은 이미 화합으로 즐거움을 이룬 주체이되 신하의 정도를 잃지 않았다. 그런데도 육오(六五) 효의 뜻은 도리어 유약(柔弱)한 임금이 견제를 받는 것으로 풀이하였으니, 이는 비록 효(爻)에 의하여 의의를 취한 활례(活例)이기는 하나 끝내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지금 왕종전(王宗傳)과 하해(何楷) 양가(兩家)의 학설을 고찰해 보면, 한쪽에서는 법가필사(法家拂士)의 말을 인용하여 육오의 임금이 구사의 대신을 얻은 것으로 비유하였고, 한쪽에서는 조심하고 신중하며 두려워하는 뜻으로 보아 질병이 들었어도 마침내 항상함을 얻어 죽지는 않는 것으로 비유하였는데, 이렇게 보면 경(經)의 본뜻에 크게 어긋나지는 않겠는가?

[조제로(趙濟魯)가 대답하였다.]
구사는 강한 양으로 신하의 자리에 있으면서 화합으로 즐겁게 함을 주관하였으니 신하의 올바른 도리를 얻은 것임을 알 수 있고, 육오는 유약한 음으로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안일과 즐거움을 탐하니 임금의 도리를 잃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양만리(楊萬里)는 ‘이윤(伊尹)과 주공(周公)이 좋은 임금을 만나 도(道)를 행하는 것’을 ‘구사의 유예(由豫)의 상(象)’에 해당시켰고, 풍의(馮椅)는 ‘제(齊) 나라와 노(魯) 나라가 강한 신하에게 견제를 당하는 것’을 ‘육오의 정질(貞疾)의 뜻’에 해당시켰습니다. 구사에서는 정도를 잃은 것에 대해 말하지 않다가 육오에 와서야 강한 신하가 핍박하는 것으로 말한 것은 비록 서로 모순인 것 같기도 합니다만, 《역경》에서 의의를 취한 것은 본래 한 가지에만 구애받지 않는 법이니, 그것이 이른바 활간(活看)하는 법입니다. 왕씨와 하씨의 두 학설 같은 경우는 비록 《정전》과 《본의》의 뜻과는 다른 듯하나, 구사가 좋은 임금을 만난 것은 진실로 법가필사(法家拂士)의 보필자가 육오의 유약한 임금을 돕는다고 말할 수 있으며, 또한 조심하고 신중하며 두려워하는 경계를 다하는 데에도 해당됩니다. 이렇게 보면 마음을 바로잡고 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상사(象辭) 중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니, 왕씨와 하씨의 두 학설은 아마도 참고로 보는 데에는 해로움이 없을 것 같습니다.


예(豫)의 뜻에 대해서는 학설이 세 가지가 있으니, 대상(大象)에서 말한 것은 화합의 즐거움을 뜻함이고, 여섯 효사(爻辭)에서 말한 것은 안일의 즐거움을 뜻함이며, “문을 이중으로 설치하고 목탁(木柝)을 치면서 난폭한 자를 막는다.”고 한 것은 예비(豫備)의 뜻이다. 다만 괘효(卦爻) 중에는 예비의 뜻이 없으므로 선대 학자들이 의문시하였다. 지금 예비라는 두 글자의 의의를 여러 효(爻) 중에서 찾아보고자 한다면 어떤 효가 여기에 해당하겠는가? 구사의 “의구심을 갖지 말라.[勿疑]”고 한 것과 육삼의 “더디게 하면 후회가 있다.[遲有悔]”고 한 것은 모두 신속히 하라는 것과 일찍 결정하라는 뜻이 있는데, 이는 모두 예비에다 배속할 수 있는 것인가? 계사(繫辭)에서 육이를 찬양하여 말하기를, “기미를 아는 것이 귀신같다.[知幾其神]”고 하였는데, “기미를 안다.”고 일컬은 것은 예비의 뜻이 포함된 것이니 육이만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김희조가 대답하였다.]
이 예괘(豫卦)를 논하는 자 가운데 어떤 이는 “화합의 즐거움이다.”고 하고 어떤 이는 “안일의 즐거움이다.”라고 하지만, 만약 그 제일의 뜻으로 말하면 사실상 예비(豫備)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섯 효사에서 예비란 두 글자를 말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대개 《역경》의 여러 괘를 살펴보면 그 뜻을 숨겨 두고 읽는 사람이 상(象)으로 인하여 찾아보게 한 것이 많이 있는데, 이 괘가 그중의 한 예입니다. 초육(初六)의 ‘즐거워서 우는 것[鳴豫]’의 경우는 비록 예비의 뜻이 없는 것 같으나 그 상을 보는 이는 소인(小人)이 용사(用事)하게 될 조짐을 알고 예방함이 있을 것이며, 상육(上六)의 ‘즐거움에 어두운 것[冥豫]’에서도 예비의 뜻이 없는 것 같으나 그 상(象)을 보는 이는 군자가 선으로 옮길 계기임을 알고 미리 도모함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미루어 보면 육삼의 ‘위로 바라보며 즐기는 것[盱豫]’과 구사의 ‘즐거움이 말미암은 것[由豫]’에서도 문을 이중으로 설치하고 목탁을 치면서 난폭한 자를 막는 뜻이 있음을 알 수 있으니, 육이의 한 효만이 예비의 정신이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상은 예괘(豫卦)이다.


 

[주D-001]활례(活例) : 문구(文句)에 얽매이지 않고 융통성 있게 풀이하는 예를 말한다.
[주D-002]법가필사(法家拂士) : 법가는 법도(法度)가 있는 세신(世臣)을 뜻한 말이고, 필사는 보필(輔弼)하는 현사(賢士)를 뜻한 말이다. 《孟子 告子下》
[주D-003]유예(由豫) : 예(豫)가 된 이유라는 뜻으로, 예괘(豫卦)가 된 이유는 구사(九四) 때문이란 말이다.
[주D-004]정질(貞疾) : 정당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질고(疾苦)를 겪는다는 뜻이다.
[주D-005]활간(活看) : 문구(文句)에 얽매이지 않고 융통성을 가지고 폭넓게 본다는 뜻이다.

홍재전서 제101권

 

경사강의(經史講義) 38 ○ 역(易) 1 계묘년(1783, 정조7)에 선발된 이현도(李顯道)ㆍ조제로(趙濟魯)ㆍ이면긍(李勉兢)ㆍ김계락(金啓洛)ㆍ김희조(金煕朝)ㆍ이곤수(李崑秀)ㆍ윤행임(尹行恁)ㆍ성종인(成種仁)ㆍ이청(李晴)ㆍ이익진(李翼晉)ㆍ심진현(沈晉賢)ㆍ신복(申馥)ㆍ강세륜(姜世綸) 등이 답변한 것이다

 

[겸괘(謙卦)]

 

겸손의 덕은 지극한 것인데, 육오(六五)와 상육(上六)에서 모두 “침벌(侵伐)해야 한다.”고 하고 “무력을 써야 한다.[行師]”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정전(程傳)》에서는 “임금의 도는 겸손하고 부드러움만을 숭상할 수 없으니 반드시 위엄도 적절하게 써야 한다.”고 하였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읍국(邑國)을 정벌한다는 것은 남의 나라를 침벌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사심(私心)을 극복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두 학설 중에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주자어류(朱子語類)》 중에서는 《노자(老子)》의 “양쪽 군사가 서로 버티고 있을 때는 비애심(悲哀心)을 가진 자가 이긴다.[抗兵相加 哀者勝矣]”는 구절을 인용하여 겸괘(謙卦)의 뜻을 풀이하였는데, 어느 효에서 그러한 뜻을 볼 수 있는가?

[심진현이 대답하였다.]
침벌을 하고 무력을 쓰는 것이 겸손하고 부드러움과 상반(相反)되는 것은 진실로 의심이 갑니다. 그러나 겸손하고 부드러운 중에도 위엄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위엄이 있는 중에도 겸손과 부드러움이 없어서는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묘족(苗族)을 정벌할 적에 백익(伯益)이 우(禹)에게 조언(助言)하기를, “겸손하면 보탬을 받는다.[謙受益]”고 한 말이 있고 《서경(書經)》 홍범(洪範)에서 정직(正直)ㆍ강극(剛克)ㆍ유극(柔克)의 삼덕(三德)을 논하면서 “강한 자에게는 강하게, 유순한 자에게는 유순하게 해야 한다.[剛克柔克]”고 하였는데, 그러한 뜻에 따라 정전에서 반드시 이렇게 풀이하고자 한 것입니다. “읍국(邑國)을 정벌한다.”고 한 것을 가지고 “자기의 사심을 극복하는 것이다.”라고 한 것은 아마도 정론(正論)이 못 되는 듯합니다. 지금 만약에 상육(上六)의 “군대를 출동한다.[行師]”는 글을 상징으로 삼아서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사심을 제거하고 간사함을 막는 법’으로 삼는 것은 혹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찌 갑자기 “겸괘 상육의 ‘군대를 출동한다.’는 말은 사심을 극복하는 뜻이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곤(坤)의 상(象)은 대중의 뜻도 되고 땅의 뜻도 되니, “침벌을 한다.”라거나 “군대를 출동한다.”라거나 “읍국을 정벌한다.”라는 것도 아마 그 의의를 취한 바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어찌 사심을 극복한 뜻을 말하고자 하여 무력을 써야 한다느니, 읍국을 정벌해야 한다느니 하는 억지 비유를 취하였겠습니까. 《노자》의 “비애심(悲哀心)이 있는 자가 이긴다.”는 말은 대개 자가(自家 노자를 가리킴)의 “유순함을 지키라.[守雌]”는 논리인데, 만약 그 말을 인용하여 겸괘의 상(象)을 밝히려고 한다면 굳이 그것이 아니더라도 지금 이 상육 효사의 “우는 겸이다.[鳴謙]”라고 한 데에는 이미 지극히 겸손한 덕이 있는 데다가 또 무력을 쓰는 이로움이 있으니 노자의 말과 같은 점이 있지 않습니까.


상전(象傳)에서 “많은 데서 덜어서 적은 데에 보태 주어 물건을 저울질하여 공평하게 베푼다.”고 한 것으로 보면 겸(謙) 자는 ‘평등’의 뜻이 있고, 단전(彖傳)에서 “가득 찬 것은 이지러지게 하고 겸손한 데는 보태 주며 가득 찬 것은 해되게 하고 겸손한 데는 복되게 한다.”고 한 것으로 보면 겸 자는 바로 영(盈) 자와 상대적인 것으로 ‘부족(不足)’의 뜻이 있다. 《정전(程傳)》과 《본의(本義)》에서 “있으면서도 있는 척하지 않는다.[有而不居]”는 뜻으로 풀이하였는데, 과연 결함이 없는 것인가? 풍의(馮椅)는 “대상(大象 공자의 상사(象辭))의 말은 군자의 겸손한 덕을 뜻하는 상(象)이 아니고 군자가 한 시대를 다스려서 겸손하게 하는 상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말은 또 어떠한가?

[이면긍이 대답하였다.]
상전(象傳)에서 “물건의 양(量)을 고르게 하여 공평하게 베푼다.”고 한 것은 균등하지 못한 것을 공평하게 한다는 뜻이니 그것이 ‘겸손한 데는 보태 주는 것’이고, 단전의 “가득 찬 것은 이지러지게 하고 겸손한 데는 보태 준다.”고 한 것은 부족한 데에 보태 주는 뜻이니 ‘공평하게 베푸는 것’입니다. 저의 견해로서는 차이가 있음을 모르겠습니다. 지금 저울로 물건을 달 적에 왼쪽이 무겁고 오른쪽이 가벼우면 왼쪽의 것을 오른쪽으로 옮겨 놓아 평형을 이루어 기울어지지 않게 하는 법이니, 물건이 많은 쪽의 것은 덜어 내어 적게 하고 적은 쪽에는 더 보태어 많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겸손하기 때문에 보태고 보태기 때문에 공평하게 되는 것이니, 아마도 ‘평등’과 ‘부족’으로 나누어 볼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있으면서도 있는 척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겸(謙) 자의 주된 뜻을 풀이한 것이며 공평하게 베푸는 것과 이지러지게도 하고 보태기도 하는 것은 곧 군자가 겸손함을 쓰는 도리이고 보면, 혹 말 표현의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결함이 있다고 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풍의의 말은 아마도 온당치가 않은 듯합니다. 군자가 자기의 몸을 닦는 도리와 남을 다스리는 도리에 어찌 두 가지의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나 자신이 겸손하면 이를 온 세상에 미루어 나가서 모두 다 겸손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찌 그 자신의 덕이 겸손하지 못하면서 한 시대를 다스려 겸손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풍의가 “군자의 겸손한 덕이 아니다.”라고 한 것을 저는 감히 취할 수가 없습니다.


이상은 겸괘(謙卦)이다.


[주D-001]양쪽 …… 이긴다 : 《노자(老子)》 69장에 있는 말로, 왕필(王弼)은 본문의 ‘항병(抗兵)’을 군사를 일으키다[擧兵]로 ‘가(加)’를 버티다ㆍ부딪히다[當]로 풀이했다.
[주D-002]겸손하면 보탬을 받는다 : 옛날 우(禹)임금이 복종하지 않는 묘족(苗族) 정벌을 가서 30일 동안 승리를 거두지 못하자 백익(伯益)이 무력을 쓸 것이 아니라 덕화(德化)로 다스려야 한다고 조언한 말이다. 《書經 大禹謨》
[주D-003]강한 …… 한다 : “강경하여 순종치 않는 자는 강하게 다스리고, 온화하고 순종하는 자는 유순하게 다스리라.[剛不友剛克 燮友柔克]”고 한 말의 준말로, 채침(蔡沈)의 주석에 ‘우(友)’는 순종[順], ‘극(克)’은 다스림[治], ‘섭(燮)’은 온화함[和]으로 풀이되었다.

 

홍재전서 제101권

 

경사강의(經史講義) 38 ○ 역(易) 1 계묘년(1783, 정조7)에 선발된 이현도(李顯道)ㆍ조제로(趙濟魯)ㆍ이면긍(李勉兢)ㆍ김계락(金啓洛)ㆍ김희조(金煕朝)ㆍ이곤수(李崑秀)ㆍ윤행임(尹行恁)ㆍ성종인(成種仁)ㆍ이청(李晴)ㆍ이익진(李翼晉)ㆍ심진현(沈晉賢)ㆍ신복(申馥)ㆍ강세륜(姜世綸) 등이 답변한 것이다

 

[대유괘(大有卦)]

 

《정전(程傳)》과 《본의(本義)》에서는 믿음을 이행하고[履信], 순응하길 생각하고[思順], 어진 이를 높이는 것[尙賢]을 상구(上九)의 일로 보았는데, 곽옹(郭雍)은 육오(六五)의 일이라 하였다. 지금 “믿음을 이행한다.[履信]”고 한 이(履) 자를 관찰해 보면 육오는 성실한 믿음이 있는 자인데, 상구가 그 위에 있어서 성실한 믿음을 밟고 있는 뜻이 있으니, 《정전》의 말이 옳을 듯하다. 또 “어진 이를 높인다.[尙賢]”고 한 상(尙) 자를 관찰해 보면 상구는 어진 이가 되는데 육오가 그 밑에 있으면서 어질고 덕 있는 이를 높이는 뜻이 있으니, 이는 곽옹의 말이 옳은 듯하다. 어느 학설이 더 좋은지 모르겠다. 모든 괘의 공통적인 예를 생각해 보면 상효(上爻)는 쓸모없는 자리이고 오효(五爻)는 임금의 자리인데, 괘의 중요함은 군효(君爻)에 있는 것이고 보면 믿음을 이행하고, 순응하길 생각하고, 어진 이를 높이는 것을 육오에 배속시키는 것이 이치로 보아 더 낫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익진이 대답하였다.]
효(爻)에 여섯 자리가 있는데 그중에서 오효를 임금으로 삼고, 유독 위의 한 효만을 지위는 없으면서 높은 자리에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제가(諸家)의 학설 중에 손님과 스승의 뜻으로 보거나 물러나 쉬는 자리로 말을 하기도 하는데, “기러기가 점점 공중으로 나아간다.[鴻漸于逵]”라든가 “왕후를 섬기지 않는다.[不事王侯]”는 것들이 그러한 것입니다. 이 괘에서 육오의 임금은 아래에 여러 어진 이들의 보필이 있지만, 상구는 강명(剛明)한 덕을 가지고 풍성한 대유(大有)에 처해 있으면서 뚜렷하게 하는 일도 없이 하늘에게 도움 받는 복을 누리고 있으니, 믿음을 이행하고 순응하길 생각하고 어진 이를 높이는 일은 다만 이치에 순응하고 도리에 맞게 하여 하늘과 사람의 도움을 얻는 경사를 말한 것입니다. 《정전》과 《본의》의 해석은 모두 이러한 뜻을 위주로 한 것인데, 만약 곽옹의 말대로라면 애당초 계사(繫辭)에서 어찌하여 육오의 효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다만 “하늘로부터 돕는다.[自天祐之]”고 한 이하의 것만을 들어서 이어 말하였겠습니까. 이 육오 효의 자리는 아마도 손님과 스승의 뜻으로 보거나 물러나 쉬는 자리로 미루어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그러나 64괘 중에 대유괘(大有卦)보다 더 풍성한 것이 없으니, 풍성하면 반드시 쇠퇴하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래서 구사(九四)의 효사에서는 이미 “풍성함을 내세우지 않아야 한다.[匪其彭]”고 한 경계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대유(大有)의 마지막 자리에 처해 있으니 반드시 감손(減損)을 초래할 우려가 있으나, 다만 대유가 끝난 다음에는 겸괘(謙卦)로 이어져서 풍부하게 소유하였으면서도 있는 체하지 않고 윗자리에 있으면서도 높은 체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른바 “믿음을 이행하고 순응하길 생각한다.[履信思順]”고 하는 것은 사실상 겸(謙)이 그렇게 하는 것이지 대유가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닌데, 어찌 육오만을 해당시킬 수 있겠습니까.


양(陽)은 풍부함이 되고 음(陰)은 가난함이 되며 양은 크고 음은 작은 것이 되는데, 지금 이 괘는 음효(陰爻) 하나가 상괘(上卦)의 중간에 있고 그것을 다섯 양이 종주(宗主)로 삼고 있으니, “큰 것이 소유하였다.[大者有之]”는 말이 아니고 “소유한 것이 크다.[所有之大]”는 것이다. 그런데 《정전》에서는 대유(大有)를 부유(富有)로 풀이하였으나, 정여해(鄭汝諧)는 “곧바로 대유를 부유와 성대(盛大)로 보는 것은 그 본뜻을 잃은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만약에 “소유한 것이 크다.”고 하는 뜻으로 미루어 보면 그 ‘부유’라고 한 것도 “소유한 것이 부유하다.”고 할 수는 없겠는가?

[이곤수가 대답하였다.]
대유를 풀이한 이는 모두가 “그 소유함이 크다.”고만 하고 “크면서도 부유하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삼가 고찰해 보면 왕필(王弼)의 주석에서는 “크게 형통하지 않으면 어떻게 대유를 얻겠는가.” 하였고, 공영달(孔穎達)의 소(疏)에서는 “소유를 크게 할 수 있으므로 ‘대유’라고 일컬었다.”고 하였으며, 《본의》에서는 “대유는 소유함이 큰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모두 그 소유함이 큼을 말한 것입니다. 유독 《정전》에서만 “대유는 성대하고 풍부하게 소유한 것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대유는 번성하고 많다는 뜻이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부유하게 되면 해가 없는 경우가 적다.”고 하였으니, 이는 크면서도 부유함을 말한 것입니다. 정여해가 “그 본뜻을 잃은 것이다.”라고 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리(易理)를 잘 연구하려면 그 상(象)을 완미(玩味)하고 말에는 매달리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 이 대유괘로 말하면 음유(陰柔)한 한 효가 높은 자리에 있고 많은 양이 아울러 순응하고 있으니 “그 소유함이 크다.”고도 할 수 있고 “크면서도 부유하다.”고도 할 수 있는데, 어찌 그 뜻을 잃었다고 논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반드시 ‘소유함의 풍부함’을 가지고 “소유함이 크다.”고 풀이한다면 이는 아마도 《정전》의 본뜻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상은 대유괘(大有卦)이다.

홍재전서 제101권

 

경사강의(經史講義) 38 ○ 역(易) 1 계묘년(1783, 정조7)에 선발된 이현도(李顯道)ㆍ조제로(趙濟魯)ㆍ이면긍(李勉兢)ㆍ김계락(金啓洛)ㆍ김희조(金煕朝)ㆍ이곤수(李崑秀)ㆍ윤행임(尹行恁)ㆍ성종인(成種仁)ㆍ이청(李晴)ㆍ이익진(李翼晉)ㆍ심진현(沈晉賢)ㆍ신복(申馥)ㆍ강세륜(姜世綸) 등이 답변한 것이다

 

[동인괘(同人卦)]

 

교(郊)와 야(野)는 같은 뜻인데, 동인(同人)을 야에서 하면 “형통하다.”고 하고 동인을 교에서 하면 “후회가 없다.”고만 말한 것은 어째서인가? ‘동(同)’에는 대동(大同)이라고 할 때의 동도 있고 “구차히 함께하지 않는다.[不苟同]”고 할 때의 동도 있어, 진실로 일률적으로 논할 수 없다. 그러나 육이(六二)의 한 효(爻)는 괘체(卦體)로 말할 적에는 대동(大同)의 뜻이 있고 효의 뜻으로 말할 적에는 아부하고 편당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경계를 보였으며, 구오(九五)의 한 효는 단사(彖辭)와 상사(象辭)가 중직(中直)함과 중정(中正)함으로 응하는 것을 밝혔는데, 《정전》에서 “임금이 대동(大同)하는 도리는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장차 어느 것을 따라야 하겠는가? 어떤 이는 “안의 괘체는 같은 데서 다른 데로 가고[自同而異] 밖의 괘체는 다른 데서 같은 데로 오는 것이다.[自異而同]”라고 하였는데 3ㆍ4의 두 효가 같은 데서 다른 데로 가고 다른 데서 같은 데로 올 적에 같게 되고 다르게 되는 계기에 대해서 자세히 분변할 수 있겠는가?

[심진현(沈晉賢)이 대답하였다.]
교(郊)와 야(野)는 다 같이 도시 밖에 있는 장소인데, 야 자에 대해서는 “넓고 멀리 떨어진 곳이다.[曠遠]”라고 풀이하고 교 자에 대해서는 “황폐하고 후미진 곳이다.[荒僻]”라고 풀이하였습니다. 그러니 넓고 멀리 떨어진 곳은 그 같이함[同]에 있어 거리낌이 없는 것이고 황폐하고 후미진 곳은 그 같이함에 있어 응할 자가 없는 것이니, 그 점이 형통함과 후회가 없는 것의 차이입니다. 육이(六二)의 상사(象辭)에서 아부하고 편당을 들어서는 안 되는 뜻으로 경계를 보인 것은 하나밖에 없는 음이 구오(九五)와 합쳐지기를 구하기 때문인데, 만약 괘체로 말한다면 다섯 양이 중정(中正)한 음 하나에게로 돌아가니, 그것이 대동(大同)이 되는 것입니다. 구오의 상(象)을 “대동하는 도리가 아니다.”라고 한 것은 덕이 같은 모든 양을 버리고 아래에 있는 음 하나에 응하기 때문인데, 만약 괘상(卦象)으로 말한다면 강한 양이 구오의 자리에 있어서 중정하고도 곧으니, 그 점이 단사와 상사에서 찬양한 까닭입니다. 이는 진실로 역리(易理)가 서로 섞여 가며 변역(變易)하는 것으로서 그 이상 더 오묘함이 없습니다. 동인(同人)의 내괘(內卦)는 이괘(離卦)인데 그 이괘는 건괘(乾卦) 중에서 한 획이 변한 괘이니 이는 같은 데서 다른 데로 온 것[自同而異]이고, 동인의 외괘(外卦)는 건괘인데 구오 한 효가 내려와서 내괘인 이괘의 음효(陰爻)와 응하니 이는 다른 데서 같은 데로 간 것[自異而同]입니다. 그리고 3ㆍ4 두 효의 경우는 육이와 구오의 사이에 끼어서 위로도 따라가고 아래로도 따라갈 수 있는 처지이기 때문에, 구삼(九三)에서는 “숲 속에 군사를 매복시킨 격이다.”라고 하여 억지로 같음[同]을 구하려는 뜻이 있고 구사(九四)에서는 “담에 올라가서 공격해도 이기지 못하는 격이다.”라고 하여 곤경에 처하자 반성하는 뜻이 있으니, 이런 것을 가지고 연구해 보면 같고 같지 않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선대 학자가 이르기를, “64괘(卦)는 이미 복희씨(伏羲氏) 때에 갖추어졌으나 그 이름만 있었고 설명은 없었는데 문왕(文王)이 비로소 단사(彖辭)를 붙였으니, 건(乾) 자는 복희(伏羲)의 글이고 원형이정(元亨利貞)은 문왕의 글이다.”라고 하였다. 진실로 그 말대로라면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履虎尾]”고 한 곳과 또는 “들에서 사람과 같이한다.[同人于野]”고 하는 것은 어떻게 구분하여 배속시켜야 하는가?

[김계락이 대답하였다.]
복희 때에는 괘(卦)의 획만 있고 글은 없었는데 문왕이 비로소 설명을 붙였다는 것에 대해서는 선대 학자들이 이미 자세히 논하였고, 소자(邵子)의 선천도(先天圖)에서도 설명하여 밝힌 바가 있습니다.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고 한 것과 또는 “들에서 사람과 같이한다.”고 한 것에 이르러서는 다른 괘사(卦辭)에서 구분하여 말한 것과는 진실로 같지 않습니다. 대개 모든 괘 중에 혹 어떤 괘만을 말하면서 그 아래에 단사(彖辭)를 붙인 것도 있고 위 괘의 이름을 연관시켜서 그 괘의 뜻을 말한 경우도 있으나, 오직 이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고 한 것과 또는 “들에서 사람과 같이한다.”고 한 것만은 비괘(否卦) 괘사에서 “비색할 때는 사람의 도가 없다.[否之匪人]”고 한 것과 간괘(艮卦) 괘사에서 “그 보이지 않는 등쪽에 머무는 격이다.[艮其背]”라고 한 것과 더불어 모두 다 위의 계사(繫辭)의 뜻을 연관 지은 것입니다. 그리고 괘의 이름은 비록 복희씨의 시대에 나온 것이나 설명을 붙인 것은 문왕의 시대이니, 그 구분하여 배속시키는 것은 아마도 분변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상은 동인괘(同人卦)이다.

홍재전서 제101권

 

 

경사강의(經史講義) 38 ○ 역(易) 1 계묘년(1783, 정조7)에 선발된 이현도(李顯道)ㆍ조제로(趙濟魯)ㆍ이면긍(李勉兢)ㆍ김계락(金啓洛)ㆍ김희조(金煕朝)ㆍ이곤수(李崑秀)ㆍ윤행임(尹行恁)ㆍ성종인(成種仁)ㆍ이청(李晴)ㆍ이익진(李翼晉)ㆍ심진현(沈晉賢)ㆍ신복(申馥)ㆍ강세륜(姜世綸) 등이 답변한 것이다

 

 

[비괘(否卦)]

 

 

비괘(否卦)의 성격은 안은 소인(小人)이고 밖은 군자(君子)인데, 아래에 있는 세 음효는 소인의 상(象)이다. 그런데 《정전(程傳)》에서는 아래에 있는 군자로 본 것은 어째서인가? 초육의 “띠 뿌리를 뽑는 것 같다.[拔茅]”고 한 것에 대해 《본의(本義)》에서는 “소인이 무리 지어 나오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왕씨(王氏)는 “군자가 무리를 이끌고 물러가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초육의 “길하면서 형통하다.[吉亨]”고 한 것에 대해 《본의》에서는 소인이 길하면서 형통한 것으로 보았고 혹자는 군자의 길하면서 형통한 것으로 여겼는데, 어느 것이 옳은가?

[김계락이 대답하였다.]
이 괘로 말하면 안은 소인이고 밖은 군자이므로, 비색하여 막히는 상이 있습니다. 만약 아래에 있는 세 음효를 가리켜 “아래에 있는 군자이다.”라고 한다면 태(泰)와 비(否)의 구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자(朱子)가 동수(董銖)의 질문에 대답하기를, “아마도 견강부회(牽强附會) 같은데 그런 뜻은 아니다.” 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괘의 뜻은 본의대로 따라야 할 것입니다. 초육의 “띠 뿌리를 뽑는 것 같다.”고 한 뜻은 태괘(泰卦) 초구(初九)에서 “띠 뿌리를 뽑는 것 같다.”고 한 상(象)과는 참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정(征)’과 ‘정(貞)’ 두 자의 뜻을 구분해 보면 그 말뜻이 각각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왕씨와 혹자가 군자로 풀이한 것은 비록 《정전》의 뜻을 따른 것이기는 하나 아마도 《본의》의 풀이처럼 순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평지도 비탈이 될 수 있고 간 것은 돌아오게 되어 있으며 비색함이 극에 달하면 태평이 오는 것은 당연한 천리(天理)이다. 그런데 여기 상구(上九)의 효사에서 “비색함이 기울어진다.[否傾]”고 하지 않고 “기울어지는 비색함이다.[傾否]”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왕종전(王宗傳)은 “사람의 힘의 비중이 더 많다.”고 하였고 선대의 학자는 “하늘과 사람은 서로 이기는 이치가 있다.”고 하였는데, 그 태평함과 비색함이 교차되는 시점에 처하거나 그러한 기회를 당하게 되면 반드시 그 변화에 따라 지켜 가는 방법이 있게 마련이다. 만약에 그러하다면 이 세상은 영원히 태평스러우며 편하기만 하고 비색한 시기는 없단 말인가? 마침내 천운(天運)과 사람의 힘이 서로 이기는 비율은 어느 쪽이 더 많은가?

[신복이 대답하였다.]
아무리 큰 실과라도 심지 않으면 싹이 나지 않고 기울어지려는 그릇은 붙들어 주지 않으면 바로 놓이지 않습니다. 비율로써 계산한다면 사람의 힘이 차지하는 비율이 더 많은데, 이것이 신포서(申包胥)가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긴다.”고 말한 까닭입니다. 그런데 후세의 군신(君臣)들이 위기를 당하여 망해 가는 것을 그대로 보고 있으면서 구제하지 않은 것은 그 이치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비괘(否卦) 상구(上九)에서 “비색함이 기울어진다.[否傾]”고 하지 않고 “기울어지는 비색함이다.[傾否]”라고 한 것도 사람의 힘이 천운을 이길 수 있기 때문인 듯합니다. 선대 학자들의 말이 어찌 생각 없이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세상이 영원히 태평스러우며 편할 때만 있을 수 없는 것은 비록 천운이 바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람의 힘이 하늘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찌 천운만을 탓하며 변화에 따라 지켜 가는 방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상은 비괘(否卦)이다.


 

[주D-001]왕씨(王氏)는 …… 것이다 : 이 말은 《주역절중(周易折中)》 권2 비괘(否卦) 초육(初六) 집설(集說)에 나오는 호원(胡瑗)의 말인데, 여기서 ‘왕씨’라고 한 것은 오기(誤記)인 듯하다.
[주D-002]정(征)과 …… 뜻 : 여기서의 ‘정(征)’은 태괘(泰卦) 초구(初九)의 ‘무리로 가면 길하다.[以其彙征吉]’고 할 때의 정을 말한 것이고, ‘정(貞)’은 비괘(否卦) 초육(初六)의 ‘무리와 같이 정고함을 지키면 길하면서 형통하다.[以其彙貞吉亨]’고 할 때의 정을 가리킨 것이다.

홍재전서 제101권

 

경사강의(經史講義) 38 ○ 역(易) 1 계묘년(1783, 정조7)에 선발된 이현도(李顯道)ㆍ조제로(趙濟魯)ㆍ이면긍(李勉兢)ㆍ김계락(金啓洛)ㆍ김희조(金煕朝)ㆍ이곤수(李崑秀)ㆍ윤행임(尹行恁)ㆍ성종인(成種仁)ㆍ이청(李晴)ㆍ이익진(李翼晉)ㆍ심진현(沈晉賢)ㆍ신복(申馥)ㆍ강세륜(姜世綸) 등이 답변한 것이다

[태괘(泰卦)]

 

태괘(泰卦) 육사(六四)에 대해서 《정전(程傳)》이나 《본의(本義)》에서는 모두 그 효를 가지고 소인(小人)이 다시 올 조짐으로 여겼다. 그러나 여러 학자의 말에 의하면, 혹은 “세 양효(陽爻)가 이미 나아가서 기꺼이 어진 이와 함께한다.”고 하였고, 혹은 “오(五)를 따르고 어진 이에게 낮추니 그 마음이 아름답다.”고 하였고, 혹은 “아래에서는 강직함으로 윗사람을 섬기고 위에서는 겸허함으로 아랫사람을 접한다.”고 하였다. 이 몇 가지 학설은 비교적 의미가 있는 것 같은데, 《정전》과 《본의》의 미비한 점이 보완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신복이 대답하였다.]
《역경》의 효사(爻辭)에서 취한 뜻은 그 큰 것만을 들어서 말한 것입니다. 태괘의 구성은 세 양효는 아래에 있고 세 음효는 위에 있는데, 양이 극도로 성(盛)한 것은 음이 이르는 징후가 됩니다. 따라서 태(泰)가 형통한 뒤에는 반드시 비색(否塞)한 상징을 이룹니다. 육사(六四)의 한 효는 음유(陰柔)한 바탕으로 중(中)을 지난 시기에 처하였는데, 바탕이 이미 음유하니 그 조짐이 소인이 되며 태가 이미 중을 지났으니 그 상징은 비색함이 되려는 것이므로, 《정전》과 《본의》에서 육사 효를 소인으로 결론지었습니다. 그러나 역(易)의 이치는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 건괘(乾卦) 구사(九四)를 가지고 “태자(太子)이다.”라고 하는 이가 있었는데, 이천(伊川)이 이를 그르다고 하면서 “만약에 그렇게 본다면 역은 384건의 일이 될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저 사효(四爻)는 임금 가까이 있는 자리이고 태(泰)로서 형통한 시기에 처하였으니, 위로 유순한 임금의 뜻을 받들고 아래로 무리 지어 오는 어진 이를 인도해 주면 겸손함을 펴는 덕을 굳이 겸괘(謙卦) 육사(六四)에게 많이 양보할 것이 없을 것이며 혼인을 청하는 좋은 일도 둔괘(屯卦)의 육사처럼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무슨 불가함이 있겠습니까. 선대 학자의 말도 아마 이렇게 본 것일 것이고, 《정전》과 《본의》의 뜻과 함께 행해져도 어긋남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양이 극에 달하면 음이 이르고 태가 극에 달하면 비색함이 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니, 반드시 정자와 주자의 말대로 보아야 주공(周公)의 본뜻에 맞을 것입니다.


단전(彖傳)에서 “안은 군자(君子)이고 밖은 소인(小人)이다.”라고 한 것은 착하고 간사한 자에 대한 구분을 엄격히 한 것인데, 구이(九二)에서 “못마땅한 자도 포용한다.[包荒]”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초구(初九)에서는 “띠 뿌리를 뽑으면 서로 연결된 것처럼 그 무리로 간다.”고 하였으니 이렇게 보면 벗들의 응원을 중하게 여긴 것인데, 구이에서 반대로 말한 것은 어째서인가?

[이곤수가 대답하였다.]
태괘의 의의는 크고 넉넉한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기운이 통하여 태평하게 되어서 만물이 모두 무성하며 군자의 도는 자라나고 소인의 도는 소멸되니, 이는 바로 임금과 신하와 위아래 사람이 마음을 함께하고 힘을 모아 하늘을 대신해서 일을 해 나갈 때입니다. 어진 이가 나오고 간사한 자가 물러가는 계기와 양이 올라가고 음이 내려오는 구분이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성인이 어찌하여 세도(世道)가 낮아지고 높아지는 즈음에 대하여 정성스런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초구에서는 “띠 뿌리를 뽑으면 서로 연결된 것처럼 그 무리로 간다.”고 하였고 구이에서는 “못마땅한 자도 포용하고 붕당을 없애야 한다.[包荒朋亡]”고 하여 앞뒤의 뜻이 모순된 것 같은데, 그 의의를 가만히 궁구해 보면 매우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 “못마땅한 자도 포용한다.”고 한 것은 착하고 간사한 자를 구별하는 데 소홀히 하여 너그럽게 참는 기풍을 지나치게 쓰라는 것이 아닙니다. 태평하게 다스려지는 시대에 위아래가 뜻을 같이해야 하는데, 만약에 널리 포용하는 아량을 가지고 여유롭고 느긋함을 베풀지 않는다면 위에 있는 자는 그 속이 넓음을 보여 줄 수 없고 아래에 있는 자는 그 재능을 펼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붕당을 없애야 한다.”고 한 것은 고립시키고 내버려 둔 채 착한 이들을 이끌어 주지 않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군자는 나오게 하고 소인은 물러가게 하여 지초와 난초가 향기를 같이하듯이 착한 선비가 모두 나오게 해야 하는데, 만약 그 사심을 끊지 못하고 크게 공정한 마음으로 단정을 내리지 않으면 이는 “무리로 가는 것이 길하다.”고 한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또다시 “붕당을 없애야 한다.[朋亡]”는 것으로써 상효(上爻)의 뜻을 밝힌 것입니다. 구양수(歐陽脩)가 “군자의 진실한 벗은 나오게 하고 소인의 진실치 못한 벗은 물리친다.”고 한 말이 이 뜻을 밝힌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은 태괘(泰卦)이다.


 

 

홍재전서 제101권

 

경사강의(經史講義) 38 ○ 역(易) 1 계묘년(1783, 정조7)에 선발된 이현도(李顯道)ㆍ조제로(趙濟魯)ㆍ이면긍(李勉兢)ㆍ김계락(金啓洛)ㆍ김희조(金煕朝)ㆍ이곤수(李崑秀)ㆍ윤행임(尹行恁)ㆍ성종인(成種仁)ㆍ이청(李晴)ㆍ이익진(李翼晉)ㆍ심진현(沈晉賢)ㆍ신복(申馥)ㆍ강세륜(姜世綸) 등이 답변한 것이다

 

[리괘(履卦)]

 

“현재의 본분대로 간다.[素履]”고 할 때의 본분[素]에 대해서 “빈천의 본분대로다.[貧賤之素]”라는 것과 “소박한 본분대로다.[潔素]”라는 것과 “순박한 본분대로다.[質素]”라는 것과 “평소의 본분대로다.[雅素]”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소박하다’고 할 때의 본분은 과연 ‘순박하다’고 할 때의 본분과 다르며, ‘평소이다’라고 할 때의 본분은 또 ‘소박하다’고 할 때의 본분과 다른 것인가? ‘소박하다’나 ‘순박하다’나 ‘평소이다’라는 뜻 외에 “빈천의 본분대로다.”라고 하는 뜻이 별도로 있는 것인가? 주자의 이른바 “사물에 끌려서 옮겨 가지 않는다.”고 한 것은 과연 종합해서 말한 것인가?

[신복이 대답하였다.]
“흰 띠풀을 깔개로 쓴다.[藉用白茅]”고 한 것은 소박함을 숭상하는 것이고, “희게 꾸미면 허물이 없다.[白賁无咎]”고 한 것은 순박함을 취한 것이니, 본분을 뜻하는 소(素)의 덕은 지극한 것입니다. 이괘(履卦) 초구(初九)의 군자(君子)는 양으로서 강한 체질을 타고났는데 낮은 자리에 있으면서 본분대로 가는 것을 편하게 여기며 여유로움을 가졌으니, 그 행동으로 말하면 소박한 본분이고, 그 가는 것으로 말하면 순박한 본분이고, 그 지위로 말하면 평소의 본분입니다. 그러니 그 소박한 본분이라는 것은 그 몸가짐의 깨끗함을 취한 것이고, 순박한 본분이라는 것은 그 질박하여 꾸밈이 없는 것을 취한 것이고, 평소의 본분이라는 것은 만나는 형편에 따라 편안하게 여기는 뜻을 취한 것입니다. 그런데 소박한 본분이라 하고 순박한 본분이라고 할 때의 본분이라고 한 소(素)는 그 뜻이 거의 가까우나, 평소의 본분이라 할 때의 소의 뜻은 《중용(中庸)》의 “현재 처한 위치이다.[素位]”라고 할 때의 소와 같으니, 두 소 자에 비해 차이가 없을 수 없습니다. 요컨대 세 소 자는 “빈천(貧賤)의 본분이다.”라는 뜻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그 뜻은 《정전(程傳)》에 갖추어져 있습니다. 말린 밥과 채식으로 생활한 것은 순(舜)임금이 본분대로 살아간 것이고, 거친 밥과 단사표음(簞食瓢飮)으로 생활한 것은 공자(孔子)와 안자(顔子)가 본분대로 살아간 것입니다. 주불(朱紱)이 와도 그 본분을 변하지 않는 것과 황이(黃耳)의 길(吉)함이라도 그 본분을 바꾸지 않는 것과 주자의 “사물에 끌려서 옮겨 가지 않는다.”고 풀이한 것은 바로 “현재 본분대로 간다.”고 할 때의 본분[素]과 같은 것이나, 세 본분[素]의 뜻도 모두 그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자도 이괘(履卦)의 초구(初九)에 의해 말했을 따름입니다. “군자는 현재 처한 위치대로 행동한다.”고 하였으니, 어찌 빈천의 본분대로 사는 것을 편하게 여기는 것뿐이겠습니까. 반드시 “본래 부자였으면 부자로 행세하고, 본래 어려운 형편이면 어려운 형편대로 행세한다.”고 한 것처럼 해야 그 의의가 갖추어질 것입니다.


호랑이 꼬리를 밟는 것은 똑같은데 사람을 물기도 하고 사람을 물지 않기도 하는 이유는 진실로 밟는 그 자체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선대 학자들은 “입 안에 물건이 들어 있어 다물고 있는 것은 사람을 물지 않는 상(象)이고, 입 안이 비어서 벌리고 있는 것은 사람을 무는 상이다.”라고 하였는데, 어떤 것이 물건이 들어 있는 것이고 어떤 것이 비어 있는 것이며, 어떤 것이 다문 채 있는 것이고 어떤 것이 벌린 채 있는 것인가?

[이곤수가 대답하였다.]
이괘(履卦)의 성격은 화열(和說)한 자로서 강한 건(乾)을 만나 지극히 어렵고 위험한 처지에 놓인 꼴이니, 그 위태로움으로 말하면 호랑이를 맨손으로 잡고 황하를 맨몸으로 건너야 하는 격입니다. 그러나 진실로 그 평소의 본분대로 가면서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순응하고 음은 양의 뜻을 받들면 비록 매우 위태로운 데 처하였다 하더라도 상해를 당하지는 않을 것이니, 그것이 괘사(卦辭)에서 “사람을 깨물지 않는다.”고 단정한 까닭입니다. 만약 괘상(卦象)으로 말하면 이괘는 태(兌)가 하괘(下卦)가 되고 태는 입[口]의 상이 되는데, 두 양효는 아래에 있고 한 음효가 위에 있으며 음이 양 자리에 있으니, 이는 자질은 약하면서 뜻만 강한 것으로서 육삼(六三)의 한 효가 바로 그 결함에 해당합니다. 선대 학자가 “입 안에 물건이 들었다.”고 한 것과 “입을 다물었다.”고 한 것과 “입 안이 비었다.”고 한 것과 “입을 벌렸다.”고 한 말로써 사람을 물고 물지 않는 차이를 밝힌 것은 대개 괘상에서 취한 것입니다. 그러니 초구의 “현재의 본분대로 간다.”고 한 것과 구이의 “가는 길이다.[履道]”라고 한 것은 즉 입 안에 물건이 든 것과 입을 다문 것이고, 육삼의 “애꾸눈이 보는 정도이고 절름발로 가는 격이다.”라고 한 것은 즉 입 안이 비었고 입을 벌린 것입니다. 밟고 가는 바의 처지로 말하면 편안함과 위태로움의 같지 않음이 이러하고, 만나는 바의 상(象)으로 말하면 강함과 유함의 같지 않음이 이러하니, 괘사나 효사의 차이에 대해서는 아마 괴이하게 여기실 것이 없을 듯합니다.


 

이상은 이괘(履卦)이다.


 

[주D-001]흰 띠풀을 깔개로 쓴다 : 《주역(周易)》 대과괘(大過卦) 초육(初六)에 있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주D-002]희게 …… 없다 : 《주역(周易)》 비괘(賁卦) 상구(上九)에 있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주D-003]주불(朱紱)이 와도 : 주불은 관복(官服)을 뜻하는 말이다. 《주역(周易)》 곤괘(困卦) 구이(九二)의 《정전(程傳)》에 “왕자(王者)의 복장에 따른 폐슬(蔽膝)이다.”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곤궁하게 지내다가 높은 벼슬을 하게 된다는 뜻이다.
[주D-004]황이(黃耳)의 길(吉)함 : 황이는 황색(黃色)의 솥귀[鼎耳]를 말한다. 정(鼎)이라는 솥은 벼슬이 높은 이라야 쓸 수 있는 것이고 황색은 중앙토(中央土)를 상징하는 색이라 하여 길함을 뜻한다. 《周易 鼎卦 六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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